2012/08/20 08:00 김삼웅
6월 항쟁의 열기 속에서 인재근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후보자로 남편과 함께 추천된 사실을 알았다. 그런 상이 있다는 것도 몰랐던 그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이었다.
김대중 선생 비서진들에게서 얼핏 들으니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후보자로 우리 부부가 추천되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 그 상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추천하는 정도로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어렵게 전화로 김대중 선생께 사양하는 뜻을 전했다. (주석 7)
인재근은 옥중의 남편과 이 상의 수상 여부를 놓고 상의했다. 부부는 미국이 그동안 한국에서 자행한 여러 가지 범죄적 행위에 미국인이 주는 상을 받는 데 대해 거부감이 생겼던 것이다. 분단과 국민의 반대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가장 잘 순종해주는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을 지지해주고 “한국민들은 들쥐와 같다”는 따위의 망언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광주학살과 관련 미국의 행위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6월항쟁으로 따낸 대통령 직선제로 인해 대통령후보 단일화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고, 우리 본부가 우리의 주체 역량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김대중 씨 비판적 지지를 표명할 당시 공교롭게 이 상의 수상자로 우리가 선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국내에 이러한 사정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미국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더욱 우리를 어렵게 하였다. 조국의 분단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6ㆍ25전쟁은 왜 발생한 것이며, 그리고 그 이후 현재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오고 있느냐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간과했었던 많은 사실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주석 8)
김근태 부부는 특히 미국의 광주사태와 관련된 부문에 이르러서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웠다. 곁들여서 ‘인권상’은 자신들보다 훨씬 큰 희생을 바친 동지들에게 돌려져야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부부는 여러 날 고뇌 끝에 결국 이 상의 수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미국 대통령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를 추모하는 사업으로서 제3세계 인권운동가에게 주어지는 상의 케네디 재단은 비교적인 양심 세력이 이끌고 있어서 이 재단의 일을 연대 지지하는 입장이 배려되었다. 또한 한국 민주화운동에 깊은 관심과 격려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수상을 결정하고도 11월 20일 워싱턴에서 거행되는 시상식에는 참가하지 못하였다.
김근태는 옥중에 있었고, 인재근은 노태우 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해 4월 로버트 케네디 추모사업회에서 이 상을 주기 위해 방한하기로 했지만, 정부는 그들의 비자발급을 거부하여 이것도 무산되었다.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듯 하자 정부는 뒤늦게 이들에게 비자를 발급해주고, 1988년 5월 4일 가톨릭센터 강당에서 수상식이 거행되었다. 김근태는 여전히 옥고중이어서 인재근 혼자 상을 받았다. 만감이 교차되는 수상이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으로 김근태는 국제적인 양심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석
7> 인재근 강연자료집 <엄마가 뿔났다>, 한반도재단 여성위원회, 54쪽, 2012.
8>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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