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19 08:00 김삼웅
직선제 헌법이 마련되고 대선 일정이 잡히면서 대선 후보가 속속 등장했다.
집권당의 노태우와 야권에서 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의 이른바 ‘1노3김’이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민주화 진영에서는 야권 후보의 단일화에 노력하고 다수 국민도 이것을 바랐으니,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이 독자 출마를 강행하면서 야권은 분열상을 드러냈다.
재야ㆍ시민단체들도 분열되었다. 후보 단일화와 독자후보 출마문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이념ㆍ노선에 따라 각자도생에 나서기도 하였다. 김근태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민청련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옥중투쟁을 조직해냈으며 또한 바깥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6월항쟁을 직시했으며 그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운동권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의 옥중 메시지는 87년 12ㆍ16대선을 앞두고 세 차례 나왔다.
당시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그는 부인 인재근 씨가 면회 올 때마다 자신의 입장을 받아쓰게 했다. 10월 16일과 28일, 11월 4일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10월 26일의 첫 메시지에서 그는 김대중 씨를 ‘범국민적 대통령후보’로 추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씨의 비판적 지지 천명으로 그는 출옥 후 상당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김근태 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당시 어떤 입장이 옳았는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그것은 판단될 것이다." (주석 6)
김근태는 대단히 함축적인 발언을 하였다. 양김 중에 자신의 김대중 지지를 두고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근태의 메시지 때문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6월항쟁을 이끈 핵심적 재야연합세력인 민통련에서는 회원 투표를 거쳐 압도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핵심재야세력은 김대중을 선택적으로 지지하고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5공정권의 각급 부정과 관권동원, 야권후보의 난립으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김근태의 실망은 컸다.
5공 폭압세력이 교활한 정치적 술책으로 6ㆍ29를 제의하고, 야권과 재야가 이를 덜컹 받아들이면서 국민의 혁명적 열기가 체제내로 순화되고, 후보 난립으로 군부독재 청산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주석
6> 이재화, 앞의 책, 165쪽.
집권당의 노태우와 야권에서 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의 이른바 ‘1노3김’이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민주화 진영에서는 야권 후보의 단일화에 노력하고 다수 국민도 이것을 바랐으니,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이 독자 출마를 강행하면서 야권은 분열상을 드러냈다.
재야ㆍ시민단체들도 분열되었다. 후보 단일화와 독자후보 출마문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이념ㆍ노선에 따라 각자도생에 나서기도 하였다. 김근태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민청련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옥중투쟁을 조직해냈으며 또한 바깥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6월항쟁을 직시했으며 그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운동권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의 옥중 메시지는 87년 12ㆍ16대선을 앞두고 세 차례 나왔다.
당시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그는 부인 인재근 씨가 면회 올 때마다 자신의 입장을 받아쓰게 했다. 10월 16일과 28일, 11월 4일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10월 26일의 첫 메시지에서 그는 김대중 씨를 ‘범국민적 대통령후보’로 추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씨의 비판적 지지 천명으로 그는 출옥 후 상당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김근태 씨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당시 어떤 입장이 옳았는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그것은 판단될 것이다." (주석 6)
김근태는 대단히 함축적인 발언을 하였다. 양김 중에 자신의 김대중 지지를 두고 “앞으로 실천과정”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근태의 메시지 때문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6월항쟁을 이끈 핵심적 재야연합세력인 민통련에서는 회원 투표를 거쳐 압도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핵심재야세력은 김대중을 선택적으로 지지하고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5공정권의 각급 부정과 관권동원, 야권후보의 난립으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김근태의 실망은 컸다.
5공 폭압세력이 교활한 정치적 술책으로 6ㆍ29를 제의하고, 야권과 재야가 이를 덜컹 받아들이면서 국민의 혁명적 열기가 체제내로 순화되고, 후보 난립으로 군부독재 청산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주석
6> 이재화, 앞의 책,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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