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7 08:00 김삼웅

 

 

 

김근태(전민련 정책실장)와 노무현(민주당 국회의원)은 1989년 2월 23일 한 여성지의 주선으로 한강변 포장마차에서 새벽 3시까지 소주잔을 나누며 대담하였다. 잡지사는 “재야 출신 국회의원과 재야운동가의 뜨거운 논쟁 6시간 생중계”란 제목으로, 흥미진진한 내용을 실었다.

“애초 두 사람이 만난 장소는 여의도의 맨하탄 호텔 1층 그릴. 그러나 두어마디 수인사가 오갈 때부터 마음이 통한 그들은 왠지 호텔 그릴 같은 데서 맥주를 들이키는 게 영 거북해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주종(酒種)을 바꾸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가까운 고수부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주석 6)

대담 중 두 사람은 김근태 고문, 노무현의 청문회 스타, ‘소파동’과 농민자살 문제, 노태우 정권의 폭력성 등을 폭넓게 나누었다. ‘재밌는’ 부문을 골랐다.

노무현 : 느낌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 몸에 익은 구면인 것 같은데,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늘 마음은 있었으면서도 기회가 오겠지 하며 기다렸지요.

김근태 : 저도 처음엔 노 의원에 대해 아는 게 없었습니다. 총선이 끝나고 이런 저런 매스컴에 나오는 보도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그후 변호사란 비교적 보장된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위대열에 끼어 구타당하고 끌려 다니기도 했다는 얘길 듣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 틀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했어요. 언젠가 만나지리라 했는데 그게 좀 늦어진 셈이지요.

노무현 : 전 김 선생님을 훨씬 오래 전부터 알았습니다. 83년부터 제가 운동권 조직을 변호사란 간판으로 뒤를 봐주고 있었을 때만해도 무슨 양심가인양 우쭐하기도 했었지요. 그러다 김 선생님의 그 처절한 고문 진술을 들었을 때, 운동권에 뒷돈 좀 댄다고 으쓱했던 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습니다. 출옥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꼭 한 번 뵈어야겠다고 벌려 온 것이 그만….

노무현 : 고문 후유증으로 당분간 활동을 못 하시지 않나 했었는데 의외로 자리에 한번 눕지도 않고 일하시는 걸 보고 감탄했습니다. 근데 거, 무슨 돈도 좀 생기셨다지요? 그것마저 몽땅 다른 데 바치셨다면서요?

김근태 : (웃음) 작년에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받을 때 생긴 상금 말씀하시는 모양인데 (그는 그 돈 3만 달러를 민청련 부설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설립 기금으로 내놓았다) 무슨 상 받았다는 부담에서 좀 해방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김근태 : 이런 말은 제가 직접 하긴 좀 쑥스런 질문이긴 하지만, 아까 기자가 꼭 좀 물어달라는 내용입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민가협에서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지 않았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야당에선 변변한 관심을 보여온 것 같지 않은데요.

노무현 : 민가협에서 수배를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참 좋은 아이디어구나 싶었어요. 한편으론 국회에서 이근안 문제를 심각하게 제시해오지 않았다는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그래서 그 현상금을 제가 내볼까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민가협 쪽에서 반가와하실진 모르지만.

김근태 : 노 의원께선 세비갖고 여기저기 쪼개쓰기도 바쁘다고 하시던데…

노무현 : 변호사할 때 벌어둔 돈이 아직 조금 남아 있습니다. 정 안되면 우리 집사람에게 결혼 직전 했던 약속을 포기할 수도 있고요. 무슨 약속이냐면 고시 합격했으니 변호사 여편네로 더운물 찬물 나오는 팬션에서 살게 해 주겠다는 거였어요. 이건 제가 정말 선생님께 부러운 점인데, 부인과 안팎이 다 그렇게 민중운동에 전념하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입니까.

여의도 고수부지 포장마차엔 늦은 손님마저 모두 다 뜨고 없었다.

현재 시간 새벽 두시 삼십분.
벌써 일곱 병의 소주병이 쓰러지고 안주는 거의 동이 났다. ‘이 잔만 들고 이젠 일어서시죠’ 하는 비서관들을 제치고 두 사람은 또 다시 “아줌마, 여기 한 병 더”를 외쳤다. (주석 7)


주석
6> <주부생활>, 1989년 3월호.
7> 앞의 책.

 



01.jpg
0.05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