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10/0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여당 의원으로서 어느 때보다 무거운 책임감과 처신의 신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1995년 정계에 입문하여 1년여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야당 의원 2년여 만에 집권당 국회의원과 부총재가 되었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이제는 그만한 위치에서 정치적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근태는 1999년 3월 장영달 의원과 이창복 전의원 등 현실정치에 뛰어든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재야의 교량 역할을 하기 위해 국민정치연구회(국정련)를 조직, 최고위원에 선임되었다. 나중에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로 확대되는 국청련에는 김근태의 정치철학과 비전을 지지하는 재야의 민주인사 다수가 참여하였다.

정치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여 지도급 위치에 이르면 ‘연구소’ 이름의 사조직을 만드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김대중ㆍ김영삼도 70년대 초기부터 연구소를 통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고 조직을 확대하여 당권과 대선후보의 발판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적지않은 자금이 필요했다. 정치자금을 만들 줄 모르는 김근태에게는 연구소의 운영이 쉽지 않았다. 참여자들의 회비로 충당하였다.

김근태와 그의 동지들이 1999년 3월 이전의 국민정치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을 창립한 것은 운동권 출신들의 폐쇄적인 모임에서 벗어나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이를 정치적 영역에서 실현하기 위해 참여형 대중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민평련 조직은 이사장 이호웅 의원, 부이사장 최규성ㆍ홍미영ㆍ임종석 의원, 사무총장 문학진 의원, 산하조직인 민주평화아카데미 원장은 신병렬 의원, 민주평화연구소장은 유승희 의원, 정책실장은 민청련 시절의 오랜 동지 김찬이 맡았다.

민평련은 열린우리당 현역의원 32명과 당중앙위원 5명 등이 지도위원으로 참여하고, 이해찬ㆍ임채정ㆍ한명숙ㆍ장영달ㆍ이부영ㆍ이상수ㆍ함세웅ㆍ지선 스님 등이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다.

민평련은 김근태의 사조직이 아닌 ‘정치적 지향과 행보를 함께하는 재야 출신 인사들이 주도하는’ 진보개혁의 연구모임이었다. 정책이나 의제를 치열한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민주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지방선거 출마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좋은 성과를 얻었다. 부산ㆍ경북ㆍ대구 등 취약지에 지역조직을 결성하고 서울에도 구 단위 조직을 결성하였다.

김근태는 민평련 결성대회에서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주자들이 덩달아 ‘경제민주화’를 내세우고 있는데, 엄격히 따지면 ‘저작권’은 김근태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미 군정에서 문정관을 지내고 이승만과도 가까웠던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정치의 특징을 ‘회오리바람형’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중앙의 상층부에서 일기 시작한 회오리바람이 일거에 정치지형을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서도 한국의 정치(정당) 구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헌정 6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 10년이 되는 정당이 하나도 없을만큼 한국의 정당은 포말과 같은 운명이다. 이것은 여야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회오리바람형’ 정치변화는 여전하다.

1995년 9월 5일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2000년 1월 20일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각계의 전문가, 엘리트들을 대거 영입해 전국 정당과 개혁정당을 기치로 새천년민주당(민주당)을 창당했다. 신당은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의 3대원칙을 내걸었다. 당대표에 서영훈이 선출되고, 김근태는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김근태는 신당 창당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심란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정당이 뿌리박지 못한 채 포말정당의 신세를 안타까워 한 것이다.

신당이 창당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관심사에서는 멀리 있는 것 같다. 나는 신당이 지금 많은 욕심을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과정에 충실한 것이 필요할 것이다. 신당이 정치권 내부의 타협이나 역할 조정에 충실하기보다는 새로운 미래에 중점을 두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국민에게 묻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따져보았으면 한다. 지금은 대안을 정치권 안에서 찾을 때가 아니고 미래와 국민으로부터 찾을 때이다. (주석 6)

김근태는 국회의원, 여당의 지도부가 되면서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의 마음으로 자성과 자계(自戒)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옷로비사건 등을 지켜보면서, 지도층의 도덕성 상실을 우려하였다.

오랜 민주화운동 그리고 수평적 정권교체의 성공, 그때 나는 감격과 함께 결심했었다. “이젠 의정활동에 전념하리라.” 민주화의 기틀은 마련되었으니 지금부터는 민주사회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외환위기는 극복했지만 경제는 여전히 어렵다. 정치는 흔들리고 있다. 진정으로 국민에게 다가서는 정치, 믿음이 살아 있는 정치, 그래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덕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주석 7)


주석
6> 김근태, <푸른 내일>, 제17호, 1999년 11월.
7> 김근태, <푸른 내일>, 제21호,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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