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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회] 2년 3개월 옥살이 만기 출옥: 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09 08:00 김삼웅 짙은 어둠이 깔린 1992년 2월 12일 0시 .. http://t.co/bdOYrJV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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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09 08:00 김삼웅

 

 

짙은 어둠이 깔린 1992년 2월 12일 0시 30분,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옥문이 열리고 2년 3개월 옥살이를 한 김근태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고 홍성교도소 문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재근과 가족이 함께하였다.

김근태가 2년 실형선고를 받고도 3개월을 더 산 것은 이른바 ‘미결통산’을 제외한 때문이었다. 군사정권의 철저한 보복이 자행된 것이다. 양심수의 경우 수형 일수가 줄어든 경우는 있어도 늘어난 일은 없었다.

환영객들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빗속에서 더욱 비장감으로 들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서울ㆍ부산ㆍ광주ㆍ대구ㆍ청주에서 밤길을 달려온 선후배와 동료 150여 명이 그의 출소를 지켜보았다. 환영객 중에는 김병걸ㆍ고광석ㆍ지선ㆍ최민화ㆍ김희택ㆍ유기홍ㆍ장기표 등 재야의 동지와 장영달ㆍ이해찬ㆍ원혜영ㆍ신계륜 등 민주당 관계자, 손학규ㆍ정운찬 등 학계인사가 포함되었다. 특별 환영객 미국인 에드워드 베이커의 모습도 눈에 띠었다.

우중에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최민화 소장의 사회로 한밤중의 ‘김근태 석방 환영대회’가 열렸다. 교도소 당국은 그의 석방에 전국에서 민주인사들이 몰려 올 것을 우려하여 출감 시간을 꼭두 밤중을 택했지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빗속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김근태 선생이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민족의 품으로 돌아와 기쁘다. 역시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말로 확실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기필코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큰 역할을 해 주시길 바란다. - 지선 스님.

너무 기뻐서 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 우리 생애에 이처럼 감격스럽고, 또 이처럼 기쁜 날이 언제 있었겠는가. 김근태 선생이 지금 이 어둠의 벽을 박차고 나타났다. 함박웃음을 웃으며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뛰어오른다. 그럼에도 한편 우리는 언제까지 이 어둠의 역사를 헤쳐가야 하는지, 민족의 비극을 노래해야 하는지 한없이 통탄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항상 어둠 저편에 밝은 빛이 있으며 구름에 가려도 하늘은 늘 푸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김근태 선생과 더불어 민주화와 통일의 한 길로 나가자. - 소설가 김병걸.

자연인 김근태를 사랑하고 운동가 김근태를 존경하는 재외 교포의 한 사람으로서 사랑과 우정을 전한다. 김근태를 따르는 모임은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교포, 양심적 외국인까지 많이 있다. ‘김근태 석방위원회’는 이 자리에 참석한 에드워드 베이커를 포함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쿠우모 뉴욕주지사, 투투 주교, 오갈 하벨, 그레고리 팩 등 전 세계 16개국 61명의 위원이 참여하고 있다. 나는 이 분들을 대신해 인사를 전하며, 김근태 씨의 민주화운동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재미 언론인 신기섭.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 나라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우리가 이루고자 하고 이룰 수 있는 민주정부 수립의 전기를 맞고 있다. 지난 시절 우리 운동의 어려움은 김근태 동지가 없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김근태 동지의 석방을 기점으로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예비하자. - 장기표.

 


1990년 2월 11일, 28년 간의 감옥생활에서 풀린 넬슨 만델라를 환영하기 위해서 5만의 군중이 로벤섬 연안에 모였다. 그는 웃고 있었고 “자유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돌이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남아공 정부는 아무리 정적이라도 한밤중에 풀어주는 따위의 꼼수는 부리지 않았다.

김근태는 답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행진은 멈출 수가 없다”고, 여전히 자신에 찬 소신을 밝히고, 감옥에서 생각했던 소회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우리 운동에 고통을 가져다 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관념적인 운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련ㆍ동구의 붕괴 등 세계적 규모의 변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지만 주요하게는 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전술상의 착오가 우리 운동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고 본다. 나는 ‘남북합의서’ 의 발표를 전후해서 통일의 현실적 가능성이 높아지자 비교적 올바른 관점에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조차도 “통일 다 됐다”, “통일운동 끝났다”는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것은 지배세력이 통일의 실현가능성을 고의적으로 외면하거나 지배세력이 통일의 가능성을 선동적으로 부추기는데 도취되어 비교적 실현가능성이 있는 통일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같다. 나는 통일의 궁극적인 이상형만을 제시해 그것에 이르는 아무런 전술적 대안도 없이 민중적 통일운동이라는 것에 경도되는 상황에 대해 경고하고 싶다.
(주석 1)

김근태는 이어진 인사말에서 “문익환ㆍ임수경ㆍ문규현 등 통일운동과 민주화ㆍ노동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하는 분들을 남겨 둔 채 석방되어 이들에게 송구스럽다” 면서, 정부에 이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였다. 목이 메어 간간히 연설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그는 옥중에서 더욱 단련되고 다듬어진 언어를 통해 출감소감을 밝혔다. 빗줄기는 그치지 않았다.


주석
1> 김택수, <출소 인터뷰 김근태>, <월간 말>, 199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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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회] ‘민중론’의 치열한 사회학자 모습: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8 08:00 김삼웅 김근태가 온전히 서정시인 또는 서사시인.. http://t.co/eLGN5e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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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8 08:00 김삼웅

 

 

김근태가 온전히 서정시인 또는 서사시인인 것 같지만, 다음의 대목을 보면 ‘민중론’의 치열한 사회학자의 모습이다.

민중은, 그리고 대중은 사회와 역사의 주인이고 또 더욱 그렇게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오늘의 민중이, 대중이 이미 자동적으로 그러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주인이 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나는 여전히 어느 정도 비판적이고 회의적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 원인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장애를 타고 넘어 스스로 사회와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그 책임은, 그 과제는 민중 자신에게 짐 지워져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그것을 매개하고 안내하는 그 역할이 바로 운동과 활동가의 임무인 것이지요. 여기에 민중과 활동가, 대중과 운동 사이에 팽팽하고 긴장되면서 창조적인 변증법적 통일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호는 필요하지만, 단순한 그것의 반복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주석 19)

그런가 하면 김근태는 격렬한 혁명가다. 혁명가 중에는 시인의 품성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김근태는 낭만주의적인 변혁운동가, 또는 사회혁명가이다.

그러나 나는 약간 달리 판단하고, 달리 주장했습니다. 단지 1단 기사로 나거나 아니면 뭉개져 버렸던 투쟁의 소식이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와 같은 탄압의 시기에 모든 투쟁은 자기희생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거기엔 높은 도덕성이 살아 있다. 우리는 대중의 마음속으로 전파하고 전염시켜야 된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한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며, 민주 변혁의 시작은 오직 그럴 때 그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의 민생 문제 접근은 자칫하면 협소하게 될 수도 있고, 의도와는 다르게 민중을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차원에 붙박아 놓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고 나는 주장하였습니다. (주석 20)

 



김근태 역시 여리고 흔들리는 연약한 자연의 산물인 보통사람이다. 시대가 그를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떼어 철창에 가두었고, 내세우기는 공화제인데도 실제로는 전제자들이 독재를 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앞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다가 수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의 본성은 순하고 선한,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웃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일생동안 거침없이 자기의 십자가를 메고 늠름하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에 겨워 쓰러져 무르팍 깨지고 하염없이 눈물 흘릴 때가 있고, 외로운, 지독히 외로운 곳에 넘어져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감옥에 갇힐 때마다 나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는 다른 분들도 대충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우리는 서로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 취약함을 고백하는 속에서의 약함의 연대가 함께 할 때마다 우리의 강한 연대인 신념과 이상이 오만과 허위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저 앞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야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석 21)


주석
19> 앞의 책, 270쪽.
20> 앞의 책, 271쪽.
21> 앞의 책,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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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

012/09/07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대단한 문장가다. 편지 글의 면면을 읽다보면 ‘투사’로서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문장이 곳곳에 널려 있다. 행간에는 리얼리즘 문학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구절이 글의 품격을 높여준다.

‘겨울감옥’ 추위의 정황을 그린 대목이다.

인재근 씨에게.
정월 추위를 타는 모양입니다. 손이 다시 시렵고, 손이 자꾸만 허리춤 사이로 들어갑니다. 더욱 묘한 것은 해가 훤하게 밝은데도 바람이 팽팽해서 어수선하고 약간 불안한 듯한 분위기입니다.

긴밤은 참으로 뒤숭숭했습니다. 한숨이 두껍게 내려쌓여 있는 4동 뒤 좁은 마당을 돌개바람이 사납게 휘저었고 비닐 창문을 쉬지 안하고 덜컹덜컹 흔들어댔습니다. 바람으로 어수선한 밤에 넓은 방에 늦도록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청승맞을 듯싶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침낭 속으로 잠 속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한 밤중에 바람소리, 창문 덜컹거리는 소리로 인해 나의 얄팍한 잠에서 끌려나왔습니다. 어사무사한 경계에서 버둥대다가 결국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마침 아랫배도 탱탱하게되어 더 버티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깨고나서 다시 잠이 들지 못해 머리가 띵한 상태입니다.
(주석 14)

다음은 신 새벽 감옥 담장위로 치솟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느낀 소회다. 마치 잘 다듬은 한 편의 산문과 같다.

새벽 미명에 자리에서 일어나 비니루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곳의 풍경은 매일 좋구려, 거치른 시멘트 선, 건물의 사나운 직각이 시야를 찢고 들어오지만 거기에 별로 신경 쓰여지지는 않는구려. 때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담장 훨씬 위로 까마득하게 치솟아 올라간 20여 년 이상 묵은 나무들이 그렇게 정답게 다가올 수가 없소,

마치 머리를 기웃거리며 아는 체하고 내 방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다오. 거칠 것 없이 시원하게 크면서도 미루나무처럼 본때 없이 그리하여 허전하고 허망하게 길다란 그런 모습이 아니고, 희끄무레한 새벽하늘을 뒤로 하고 약간씩 구불텅구불텅 틀면서 다시 올가가고 그러다가 줄기를 내어 함께 위로 솟구쳐 오른, 빙 둘러쳐진 나무들 모습이 아주 친근하게 느껴지는구려.

여기에 갇혀져 있던 사람들의 한과 한숨이 저렇게 나무를 구비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오. 당신과 만나서 살아온 지난 날들이 미명에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저 나무처럼 여겨지는구려. 짧지 않은 세월을 저렇게 쭉 밀고 올라왔고, 그러면서 정답고 또한 구불텅한 구비와 옹이도 없지 않았던 세월이었지요.
(주석 15)

다음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이다.

꿈결처럼 다가오는 뿌연 저 인왕산 중턱의 색깔 변화가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구려. 우리 어머니는 피리를 잘 불었다오. 버들피리, 보리피리 모두 말이오. 봄은 어머니의 피리소리를 타고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오.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새끼손가락만하게 하고, 입에 무는 부분은 껍질을 살짝 벗긴다오. 먼저 만든 것은 나를 주시고, 또 하나를 만들어 입에 무셔서 적절한 위치를 잡으시는 것이오.

그 곡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입 속과 귓가에서는 뱅뱅 돌고 있지. 끊어질 듯 이어지고, 또 뭔가를 호소하고 거듭 호소하면서 반복되고, 변주도 되는 것 같았소. 그럴 때 어머니 표정,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오. 눈길은 아득히 먼 곳으로 가버리고, 몸은 점점 야위어가는 듯싶고, 그러면서도 생기가 도는 우리 어머니였다오. 이때의 어머니를 제일 사랑했던 것이오.
(주석 16)

다음은 ‘진눈깨비’에 관한 단상이다. 국어사전에는 “비가 섞여 내리는 눈”이라고 풀이한다. 김근태의 해석은 철학적이다.

며칠 전에 어둑어둑해질 무렵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리는 모양도 그렇지만, 이름부터가 약간 재미있고 짓궂은 듯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귀가 안 맞고 김빠지는 느낌이 듭니다. 눈이 질다는 것이 형용 모순이면서도 말이 되는 것이 재미있고, 도대체 ‘깨비’라고 붙은 것들이 몽조리 약간은 체신 머리 없고, 방정을 떠는데 그러면서도 악의나 잔인함은 상당히 배제되어 있는 듯이 여겨집니다. 방아깨비, 허깨비, 도깨비, 같은 것들이 그것들인데 이 반열에 진눈깨비도 끼어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 철 늦은 진눈깨비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은 재미있다든지 장난치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스산한 느낌이었습니다. 쇠창살에 갇혀 제압당하고 그 쇠창살 위에 다시 촘촘히 그물눈의 쇠철망을 덮씌워 시원스런 시야도 차단당하여 내리고 있는 진눈깨비를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마침내 가물가물해지는 짜증스러움이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습니다.
(주석 17)

 



다음은 김병곤의 셋방을 찾아가서 함께 민청련의 일을 하자고 약속하면서, 그 집안의 풍경과 뒷날 닥치게 될 고난의 상념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그런 약속을 한 곳은 원효로의 어디쯤인가, 창고 같은 2층에 병곤이가 살 때였습니다. 마루엔 애들 기저귀가 치렁치렁 걸려 있었고, 문숙 씬 식사 준비한다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옆구리가 결리는 듯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 건지, 뭐 대단한 계획이야 있을까만, 그래도 봉급 받아서 뭣인가 해 보려고 하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대책 없이 그렇게 떠나는 병곤이가 과연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권하는 나는 또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흔들렸습니다. 그 날 문숙 씨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앉아 있다가 옆걸음을 쳐 나왔던 것이 아직 기억에 생생합니다. (주석 18)


주석
14> 앞의 책, 223쪽.
15> 앞의 책, 723쪽.
16> 앞의 책, 73쪽.
17> 앞의 책,230쪽.
18> 앞의 책,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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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6 08:00 김삼웅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부터 시작된 김수환 추기경과 인권변호사들의 동지적 관계는 70~8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왼쪽부터 송건호, 김수환, 황인철, 홍성우.ⓒ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근태는 1992년 1월 황인철 변호사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민변소속으로 반독재투쟁의 재야ㆍ청년ㆍ학생ㆍ노동자들의 변론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다음은 편지의 뒷부분이다.

지금은 아직 우리에겐 겨울입니다. 지난 시기처럼 지독히 캄캄한 겨울은 아니지만, 여전히 뿌우연 그러나 봄은 머지않은 아니 이미 봄이 우리를 향하여 어느 정도 와있는 겨울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그런 겨울의 짓누름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연합해야 하겠지요.

그런 새로운 관계, 이것은 우리 내부에서의 상호의 힘의 관계, 그러나 적대적이지 않고, 제한적으로만 경쟁적이며 기본적으로는 우호적인 토대 위에서의 상호관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 위에서 구축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복잡하고 미묘해서 꼬일 수 있는 것이지만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오늘의 위기적 상황에 직면케 된 것이고 다가오고 있는 총선ㆍ대선에서 만일 우리의 연합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의 것보다 훨씬 크고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며 이 유동적인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의 민족 역사에 민중의 삶에 그리고 이 지역 평화와 인류 진보에 큰 부담과 정체를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굴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서둘러야 하는데 정말로 서둘러야 하는데 하며 마치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은 초조함을 안고 지금 저는 징역을 살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이런 부담은 누가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선배님들, 황 선배님을 포함한 선배님들에게 부과되고 요구되어지고 있는 엄중함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후배들이 뒷받침해드려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주석 12)

김근태는 비슷한 시점에 홍성우 변호사에게도 편지를 썼다.
그 역시 인권변호사로서 독재시절 민주인사들을 변론하고, 김근태 사건도 맡았었다. 홍성우는 이 무렵 조영래의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라는 글모음집을 발간하여 신문에 광고가 실리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근태도 홍성우가 보내준 이 책을 읽은 터였다.

이곳 감옥은 바깥의 역사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런 역사의 흐름과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면제될 수 있으며, 또한 그에 대한 승인거부, 그리하여 유보도 일종의 특권처럼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저는 이 특권에 집착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데도 추모집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연이어 광고로 나오고 그리로 시선도 자꾸 갔습니다.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지면서 화들짝 놀라 눈길을 서둘러 돌리곤 했습니다. 저도 결국 다 읽긴 읽었습니다. 그러나 광고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 한 구절 또 한 구절 이렇게 보았는데 그걸 다 읽는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기막힌 슬픔”이라고 하셨지요.
“영래의 손때 묻은 글 줄”이라도 만져서 감당하기 어려운 허전함, 상실감을 메우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지요. 생명의 불꽃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직접 보셨을 홍 선배님에겐 정말로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선 희망없음에 대한 생각은 선배님과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이고, 또 그런 원인들의 무겁고 가벼움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더 큰 좌절과 캄캄함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타개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시급하게 그리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초조감도 생깁니다.

홍 선배님을 비롯한 선배님들이 그렇게 하실 수 없을까, 그렇게 되도록 여건이 마련될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통일된 재야가 다시 시급히 꾸려지고, 그것과 통합야당이 민주대연합의 원칙아래 발전적 차원에서 다시 결합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저도 한 역할을 하고 싶지만 그래 봐야 현재로선 별 소용없는 일이고, 바깥에 대한 기대로, 안타까운 희망으로 까치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 속에도 더 이상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래나 병곤이의 죽음은 결국 지난 번 우리의 좌절과 실패의 결과였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주석 13)


주석
12> 앞의 책, 244쪽.
13> 앞의 책,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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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회] 장영달 동지에게 옥중서한: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5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감옥에서 민청련의 동지 장영달, 변호사.. http://t.co/TgOS40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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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co/6ScUY75l [Daum블로그][67회] 장영달 동지에게 옥중서한: 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5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감옥에서 민청련의 동지 장영달, 변호사 황인철과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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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0장] 산자와 죽은 자에게 보낸 옥중메시지

2012/09/05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감옥에서 민청련의 동지 장영달, 변호사 황인철과 홍성우에게도 편지를 썼다. 사적인 관계로부터 역사관, 시국관이 담기고, 변론으로서 도와준데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았다.

 


2012년 8월, 장영달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은 '밀양 송전철탑 반대'하는 문구와 그림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다. ⓒ 윤성효

민청련 부의장 등을 맡아 함께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장영달에게 보낸 편지에는 1991년 2월 7일자의 소인이 찍혔다. 먼저 부인과 아들 ‘돌민’이의 안부를 묻고 ‘본론’으로 이어진다. 편지의 뒷부분이다.

제도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광범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명백히 그럴 만한 이유도 또 그들의 한계도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대중이 재야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할까요. 지금도 지배세력과 비판적 제도언론이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는 대중의 정치 불신은 우리가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결단을 통해 저기 보이는 희망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 30년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파시즘의 대중정서 동원으로 활용될 여지도 충분히 있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아니 1989년도 공안정국 이래 지금까지 오히려 지배세력의 그런 조작이 외세와의 협조와 국내 일부세력의 오류 때문에 상당한 성공을 보여 온 것이 사실 아니겠어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 내가 이런 경고를 하고 다니자 상당히 여러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저어기 저처럼 발전하는 대중운동을 왜 못 보는가 하고 준엄하게 반박하곤 했지요. 그것을 못 본 게 아니라 그것을 진정한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는 튼튼한 힘으로 전진시켜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활동가들의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포퓰리즘 편향에 크게 휘둘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획득했던 대중의 신뢰의 상당한 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이제 우리는 냉정히 돌아보고, 차이를 인정하면서 또 함께 해야겠지요. 도덕성, 과학성, 힘 등 전차원에서 심각한 되돌아봄이 다급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제 지자제와 임투기간 직후 전면적 실천평가에 기초하여 새로운 편제를 발전시켜내야 합니다. 그를 위해 장 선생도 나도 노력하기로 하십시다.

지금 창 밖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온 뒤 섣달 마지막 추위가 제 모습을 보이면서 달려들겠지요. 제법 대응력이 생겼지만 이 징역에서의 추위 앞에는 가끔 “속절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 속절없음 속에서 견뎌내는 끈질김을 다시 가슴 속에 품으려하고 있습니다.

장 선생의 따스한 마음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일이지요. 바쁜중에도 편지 주고, 책도 부쳐주고, 재판정까지 와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외상값은 내가 여기서 튼튼하게 지내는 것으로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장 선생!
끝으로 부인에게 꼭(!) 인사 좀 전해주시오.
그리고 돌민이에게도 얘기해주고……. (주석 11)

주석
11> 앞의 책 221 ~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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