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22 08:00 김삼웅

 

사람이 출세하면 목이 굳어진다고들 한다. 특히 정치 속물들이 의원 뱃지를 달거나 청와대에 들어가면 목에 기브스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근태는 늘 자성하는 마음으로 의정활동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어려웠던 지난 날을 잊지 않으려고 서민들의 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틈이 나면 지역구의 어려운 고아나 독거노인들을 찾았다. 그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수배 중일 때 가족의 생계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친구들이 가족을 격려하려고 김근태의 집을 찾았다가 단칸방에서 아내 인재근과 갓난 아기 병준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을지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뒤늦게야 들은 김근태는 평생을 서민들을 위해 살고자 마음을 다지고 다졌다.

그리고 겸손하고 도덕적 바탕에서 원칙과 상식을 지키면서 정치활동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런 자세는 재선에 이어 장관이 되고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강경한 투사라는 인상을 먼저 떠올립니다. 정계에 나온 뒤의 나의 모습이나 행보를 보고서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지하고 원만한 것은 좋은데 유약해 보인다, 너무 점잖고 도덕적이다. 논리적이어서 차가워 보인다고도 합니다. 최근에는 균형감각이 있고, 내재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는, 과분한 평가도 듣곤 합니다.

칭찬이든 비판이든 모두 달게 듣고자 합니다. 또한 반성도 하고 때론 힘도 얻습니다. 그런 평가들이 ‘나’라는 사람 됨됨이와 꼭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크게 틀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은 도덕적인 자신감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갖추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고민하며 더 나은 내일에의 비전을 가질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내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주석 18)

국회의원 김근태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투명한 의정활동으로 우선 유관기관과 기업인들이 긴장했다. 그리고 여의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각종 로비스트들이 겁을 먹었다. 그에게는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후원금이 모이지 않았고, 명절 때이면 국회 의원회관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선물 꾸러미가 그의 방은 피해갔다.

새로운 정치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나는 그 출발점이 정치자금의 투명성과 민주적 공천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감기관에는 후원회 초청장을 돌리지 않았다. 한 번도 촌지를 주지 않은 나를 이해해주는 기자들이 고맙다. 당론과 다르게도 투표할 수 있는 크로스보팅과 표결 내용을 그대로 공개하는 표결실명제를 통해서 정책 투명성을 높일 수 있게 되면 참으로 좋겠다.
(주석 19)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은 김영삼 정권의 야당 파괴를 막고 차기 집권을 위해 자민련 총재 김종필과 연합을 서둘렀다. 두 총재는 5월 4일 국회에서 전격 회동하고 대여 공동투쟁을 다짐했다. 이것은 사실상 DJP공조의 신호탄이 되었다. 두 김 총재는 △ 검찰의 표적수사 중단 △ 과반수 확보 중단 △ 입당자의 원상회복을 촉구하면서,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15대 국회 원구성을 거부키로 합의했다.

또 5월 26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함께 대규모 합동집회를 열고 양당공조를 통해 ‘총선민의 수호투쟁’을 결의, 등원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두 당의 공조체제는 9월 정기국회에서 더욱 강화되어 10여 차례의 합동의총과 정책토론회, 양당 인사들간 식사모임 등으로 이어졌다.

1997년의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자민련이 후보 단일화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의원내각제 개헌에 대해 “15대 국회에서는 어려우나 16대에 가서는 추진할 수도 있다.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제 개헌을 선거공약으로 내걸 수 있다”는 등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이와 관련 김근태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오래 전부터 절체절명의 가치로 추구해 왔다. 박정희 정권 이래 36년 동안 철옹성을 쌓아오며 구축된 특정 지역의 패권주의를 깨뜨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현실정치의 장벽을 지켜보면서도 5ㆍ16군사쿠데타와 유신정변의 핵심 중의 한 사람인 김종필과의 정치연대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김근태는 의원총회와 기자회견을 통해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하는 자민련과의 후보단일화 에 찬성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당 부총재의 위치에서 이같은 발언은 국민회의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김대중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원칙과 대의를 중시해온 그로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김근태가 원칙과 타협, 이상과 현실, 가치와 실용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대세는 이미 ‘DJP연합'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김근태는 민주당과의 통합을 서둘렀다. 정치적 ‘친정’이기도 하지만, 옛 재야 시절 상당수 동지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들은 4ㆍ11총선에서 대부분 낙마하고, 당내 갈등과 분열로 심한 내홍을 앓고 있었다. 자민련과의 연합도 중요하지만 정통민주세력의 연대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옳게 또 떳떳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오직 그러한 사실만으로서 능히 불행을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입증하고 싶다.”라는 베토벤의 말이 이즈음 김근태의 심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석
18> 김근태, <부드러운 힘>, <희망은 힘이 세다>, 22~23쪽.
19> 김근태, <시린 겨울을 보내며>, <희망은 힘이 세다>,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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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

012/09/21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심성이나 행동방식은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나서길 즐겨하지 않았다. 직업 정치인으로서는 적격이지 못한 체질이다. 강준만 교수(전북대)의 평가다.

“김 부총재가 너무 솔직한 면이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지적해야겠다. 아니 그건 둔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오로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화를 냈겠지만, 나라 생각 이전에 중요한 게 개인의 밥그릇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13)

김근태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제1야당 부총재 직함의 3선급 초선의원으로서 항상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한국의 정치판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강성발언이 항상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끄는데 비해 김근태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발언을 하여 매스컴에서 묻히기 마련이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민첩하지 못하고 사색형이어서 여의도 정가에서는 ‘햄릿’이라는 평이 나돌았다.

요즘 김근태 부총재에게는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햄릿’이 그것이다. 늘 고뇌하고 망설이는 듯한 태도가 그런 이미지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짧은 정치인 생활 동안 그는 선택이 쉽지 않은 일들을 연속적으로 겪어야 했다. 민주당에 입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김대중 총재가 정계에 복귀했고, 국민회의가 창당되면서 민주당이 쪼개졌다. 그는 김 총재의 복귀와 신당 창당을 반대하였지만 결국 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4ㆍ11 총선 이후에는 신한국당의 야권에 대한 차별적인 검찰 수사와 여소야대 뒤집기 정국이 전개되었다.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이루면서 대여투쟁에 나섰고, 두 당의 연대는 대선 후보 단일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는 과거 민주세력을 탄압하던 보수세력과 연합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전술적으로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였다. 신한국당의 법안 날치기를 규탄하는 노동자들과 민주세력의 투쟁이 가속화되는 정국도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국민회의는 뭐하는 당이냐, 김근태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하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진다. 이래저래 그는 괴롭다.
(주석 14)

김근태는 그러나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초심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애초 권력을 탐하여 정계에 입문한 것이 아니었기에 천박한 언술이나 대중영합의 포풀리즘에 기대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정치권은 비판의 소지를 많이 안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야유와 냉소를 고집한다면 정치권은 아예 붕괴돼 버릴 것이다. 정치권이 점차 발전되고 나아지고 있다는 점은 평가해 주는 일도 중요하다. 희망을 갖고 격려와 기대를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뇌와 주저의 심경이었다. 좌절감도 깊었다. 반대로 투지도 생겼다. 정치세계는 나에게 ‘깊은 고뇌’와 ‘냉철한 교활함’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진실한 결단’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이에 응답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올 것이라 믿는다. (주석 15)

김근태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제도권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맑은 이성으로 판단하고 적응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치판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판치는 곳이다. 여간 쉽지가 않았다.

현실 제도정치는 여전히 낯선 동네이다. 대단한 관심과 추적이 오랫동안 있어왔고 군사독재에 대항해 함께 어깨를 걸고 수십년 지내왔기 때문에 퍽 많이 안다고 내심 자부해왔는데도 그렇다. 우선 대표적인 지도급 인사들 말고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해서 그렇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말하는 어법과 문법도 다르고 역사성도 분명히 다른 바가 있다. 늘 신문이나 방송에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를 의식해야만 하는 것도 또 다른 긴장과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주석 16)

 



초선의원 김근태가 낯선 국회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을 즈음, 그가 예측한대로 총선 뒤의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날이 갈수록 실정과 부패가 거듭되면서 검찰과 정보기관에 정권의 안위를 의탁하는 형국이 되었다.

정부여당은 4ㆍ11 총선에서 과반수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야당 및 무소속 영입작전을 계속했다. 야권은 “정보기관이 나서 사법처리 등을 빌미로 공간과 협박으로 야당ㆍ무소속 의원들을 입당시키고 있다.”고 비난할만큼 정부 여당은 노골적으로 야당의 파괴활동에 나섰다. 이로써 자민련은 정당 존립 자체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실제로 민주당, 자민련, 무소속의원 10여 명이 신한국당에 입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회담을 거듭하면서 정부 여당의 ‘의원 빼가기’에 공동전선을 폈다. 김영삼 정부의 독주는 계속되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여당 단독으로 본회의를 소집해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등 11개 안건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군사정권의 행태를 방불케 하였다.

한때 김근태가 몸담았던 통합민주당은 4ㆍ11총선에서 참패, 원내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정부 여당의 ‘당선자 빼내기 공작’으로 당선자 15명 중 5명이 이탈하였다. 김원기ㆍ장을병 등 비주류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발족시키고, 총선 후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당선된 이기택 측은 이를 ‘해당행위’로 규정하여 민주당은 사실상 분당 상태가 되었다. 지리멸렬이었다. 정국은 1997년 겨울의 대선을 앞두고,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야권통합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도대체 야당에 들어간 김근태는 뭐 하고 있는 거냐”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재야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질책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야당출입 기자들도 왜 본격적으로 발언을 하지 않는가 하고 걱정과 우정의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아직 낯설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착종이 순차적으로 파악이 되지 않아 형광등처럼 껌벅껌벅 하기도 한다.… 지금은 참고 기다리고 있다.

기회를 노리는 그런 방향이 아니라 보다 많은 책임 있는 사람들과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와 다리를 어떻게 놓아갈 것인가를 준비하고 타진하고 결단할 그 시기를 기다리고 준비하려 하고 있는 중이다.
(주석 17)

김근태는 대선을 앞두고 야권과 재야가 통합하는 ‘민주대통합’의 큰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다.


주석
13> 강준만,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의 딜레마>, <인물과 사상>(계간) 제10호, 70쪽.
14> <월간 말>, 1997년 2월호, 김경환 기자.
15> <일요서울>, 1999년 1월 24일, 엄상현 기자.
16> 김근태, <희망의 근거>, 420~421쪽.
17> 앞의 책,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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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20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초선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 외무통상위에서 전반기 의정활동을 시작하였다.
외통위는 국회의원들이 기피하는 상임위지만 그는 당당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의정활동을 하였다. 남북관계와 주변 4강외교에 대한 전문지식을 높이고자 관계 자료를 읽고 상임위의 정책질의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가 따랐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의원 중의 하나였다. 국회 외통위의 가장 뛰어난 의원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후반기에는 재정경제위로 상임위가 바뀌었다. 재경위에서도 그의 활동은 돋보였다.

김 의원은 정치적 경력을 쌓기 위해 특유의 끈기와 성실로 의정활동에 전념하는 방식을 채택한 듯하다.
그는 15대 국회 전반기 의원평가에서 통일외무위원회의 가장 뛰어난 활동을 한 의원으로 선정됐다.(중앙일보 제4회 의원평가).

후반기 들어 재경위로 상임위를 옮긴 김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우리나라 법인(法人)의 기밀비ㆍ접대비의 규모를 밝혀내는 등 눈부신 활동력을 보여줬다. 한건주의나 비약적 성장보다 치밀한 사전준비와 실력 쌓기를 중시하는 장기전ㆍ지구전(持久戰)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지구전적 인물’이다. 혹은 대기만성(大器晩成) 형일 수도 있다.
(주석 10)

김근태는 30년에 걸친 재야투쟁의 길에서 현실 정치인이 되어 지역구를 관리하고 민원을 챙기는 일에 능숙하지 않았다. 또한 오랜 재야활동으로 인해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한계도 따랐다. 하지만 몸에 밴 성실성과 부드러운 심성, 공부하는 모습은 곧 여의도 정가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언론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근태 의원을 몇 번 만나본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보통 ‘재야출신 치고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역시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재야’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재야’라는 말이 주는 비타협성, 강경함, 완고함 같은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답변이 이어지곤 한다.

사실 ‘진지하고 매너가 부드러우면서 사고가 유연하고 합리적' 이라는 김 의원에 대한 평가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단순한 국회의원이 아니라 한 시대의 리더가 되기를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품성들을 그가 대체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 성품이 갖춰졌다는 것과 정치지도자로 성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정치리더로 발돋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대중성이다. 타고난 대중성이 부족하면 대중적 이미지를 창조해내려는 노력도 리더를 꿈꾸는 정치인이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주석 11)

 



원칙과 정의를 주장하던 재야운동에서 현실정치인의 길은 그에게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정치적 쇼를 할 줄 모르고, 여느 정치인들처럼 언론을 활용하는 방법도 몰랐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선 신문 사진과 TV화면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보도사진에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자리를 선정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기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 부총재는 확실히 낙제생임에 틀림없다. 지난 3일 민주당 서울시장 경선대회를 참관할 때도 그는 단상 맨 뒷줄 한귀퉁이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다른 부총재들이 앞줄 중앙에 당당히 자리를 잡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또 지난달 28일 이기택 총재 일행과 대구 가스폭발사고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일행의 후미로 밀려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 있었다.

다소 소극적인 그의 태도에 대해 주변에서 조언도 많았다 한다. 특히 이해찬 의원으로부터는 “김 부총재가 소극적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개인은 물론 국민회의, 재야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과감히 앞에 나서야 한다”는 코치를 받기도 했다고.

그는 민주당에 입당한 국민회의 출신이 당내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가 오는 통합협상에서 합의된 8월 전당대회 이후 부총제직 보장을 사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처음부터 개인의 몫을 챙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총재직을 사양하는 대신 국민회의에 약속된 지분을 더욱 확고히 보장받기 위한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이 정치판에는 도저히 통하지 않을 만큼 순진했음을 인정해야 했다.……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성품의 김 부총재지만 이에 대해서는 “당내 현실은 참으로 야박한 것 같다”며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주석 12)


주석
10> 전영기, 앞의 책 <월간중앙 WIN>, 84쪽.
11> 앞과 같음.
12> <뉴스메이커>, 1995년 5월 18일자, 김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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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

012/09/19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총선을 앞둔 1996년 3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제15대 총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해서는 국민회의가 원내 제1당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두말 할 필요 없이 이번 총선은 김영삼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의 장입니다. 우리 국민은 이번엔 반드시 수평적 정권교체를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당은 정치노선에 따라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여야가 정치적 노선이나 역사적 뿌리에 있어서 별로 다르지 않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되면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독일과 프랑스도 브란트와 미테랑이 집권하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주석 6)

김근태는 총선 이후의 정국을 진단한다. 대단히 예리한 분석이라는 평이 따랐다.

대략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먼저 신한국당이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제1당이 되었을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민주당과 자민련, 무소속을 끌어들여 여소야대를 뒤집으려 할 겁니다. 두 번째는 국민회의가 제1당이 되는 경우지요. 그러면 신한국당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민주당, 자민련과 손을 잡고 3당 합당을 시도할 겁니다. 세 번째는 어떤 당이 제1당이 되든 상관없이 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가 대연정을 이루는 경우입니다. 실현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지만 그래도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주석 7)

김근태는 진정으로 재야와 제도권 야당의 결합을 바라왔다. 그것만이 공룡화된 군사정권 후예들의 수구세력을 견제하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19세기 말 개화파와 동학농민혁명 세력이 결속하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총선 후에 격렬한 징계개편이 올 겁니다. 그리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면 다시 한번 기회가 올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독자정당을 주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주관적인 열정과 초조함이 그 내면에 있어요. 그런 한편 개인적인 입지를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는데 참으로 걱정스러운 상황입니다. 모두 다 눈앞의 현실만 염두에 두고 있지 중장기적인 계획이 없어요. 난 사실 이 기획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과연 진보진영의 집권전략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어요?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거야. 이건 일종의 거짓이야. 진정한 집권전략을 또다시 교란시키는 것이고... (주석 8)

그는 아직도 재야 일각에서 독자정당 준비를 하고 있음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지난 시기 자기의 생활을 헌신하고 바쳤던 젊은이들에게 간곡히 충고하고 싶습니다. 깊은 고뇌를 하는 것은 좋지만 상식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지요. 소위 진보진영이라면 70, 80년대에 군사독재와 몸으로 싸운 세력을 뜻하는 것 같은데 그들만으로 과연 집권이 가능하겠습니까? (주석 9)

김근태는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 서울 도봉갑구에서 당선되었다.
1995년에 사면복권이 되어서 공직 후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민자당의 양경자 의원을 누르고 원내진출에 성공했다. 정치인으로서는 늦은 49세의 초선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재산은 2억 8천 900만으로 최하위의 수준이다. 이때 종로구에서 당선된 이명박의 재산은 262억 6,200만원이었다.

김근태는 당선되었으나 국민회의는 이번 총선에서 의석을 크게 신장하지 못하였다.
선거결과 전국 253개 지역구 가운데 신한국당 121, 국민회의 66, 자민련 41, 민주당 9, 무소속 16석이었다. 전국구는 신한국당 18, 국민회의 13, 자민련 9, 민주당 6번까지 당선되었다.

국민회의는 전통적인 텃밭으로 알려진 수도권에서 1당을 신한국당에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47개의 의석이 걸린 서울에서 겨우 18석을 차지, 27석을 얻은 신한국당에 패배했다. 종로 이종찬, 중구 정대철, 성동을 조세형, 관악갑 한광옥, 중랑을 김덕규, 동작을 박실, 영등포갑 장석화 등 국민회의 중진들이 줄줄이 낙선되었다.

야권분열과 한 해 전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국민회의가 서울지역을 거의 휩쓸다시피한 데 대한 유권자의 견제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었다.


주석
6> <월간 말>, 1996년 3월호, 52쪽, <김근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김경환 기자.
7> 앞의 책, 52~53쪽.
8> 앞의 책, 54쪽.
9> 앞의 책,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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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회] 민주당에서 국민회의에 참여: 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18 08:08 김삼웅 김근태가 국민회의에 참여할 당시 야권은 크게 .. http://t.co/AnxDtEN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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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18 08:08 김삼웅

 

 

김근태가 국민회의에 참여할 당시 야권은 크게 분열돼 있었다. 김대중이 신당을 창당하면서 신당에 참여하지 않는 통합민주당으로 나누어졌다. 민주당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민주당)으로 발돋움하면서 이기택 대표를 제치고 김원기ㆍ장을병을 공동대표로 선출하였다.

1995년 12월 6일, 김영삼의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어 여전히 여당이 되고, 김대중이 국민회의를 창당, 제1야당으로 부상하면서 민주당은 제2야당으로 전락하였다. 또 이 해 벽두 김종필이 의원내각제를 기치로 내걸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 6ㆍ27 지방자치선거에서 크게 약진,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보수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언론에서 ‘신3김시대’라고 부를만큼 세 김씨가 호각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정통야당 세력이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김근태는 무엇보다 야권통합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김근태는 사분오열, 지리멸렬 상태에서 노선투쟁에 빠진 민주당보다 국민회의를 택해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김대중을 통한 민주세력의 집권이 가장 가능성이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야권의 통합이 급선무였다.

민주대연합이 이뤄지면 개혁과 민주주의가 힘을 얻고 한반도 상황도 크게 개선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난관 때문에 이것이 당장은 힘들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야권통합을 주장한 것입니다. 강력한 야당은 김영삼 대통령의 수구화를 저지하고 그를 견인해 민주대연합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대교체는 과거 양 김씨가 민주화투쟁에 기여한 바를 냉소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대중을 동반하면서 신중하게 추진해야지, 형식에 매달리면 세대교체만 한다고 지역정치 구도나 낡은 정치행태가 타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석 4)

‘정치는 생물’이란 말이 있듯이 한국의 정치판은 변화와 변동의 파고가 심한 편이다.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는 듯 했지만 정당은 여전히 특정 인물중심으로 개편되거나 운영되었다. 국민회의도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총재의 리더십에 크게 의존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김대중의 정계복귀와 신당창당에 즉각 검찰권을 발동하여 탄압했다.
국민회의 소속 박은태ㆍ최락도 의원과 최선길 노원구청장, 이창승 전주시장이 이런저런 이유로 구속되고, 종로구청장과 은평구청장 등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었다. 신당에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들의 참여를 막으려는 일종의 정치적 보복행위였다.

이즈음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시작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정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이어서 5ㆍ18특별법 제정과 특검제 도입을 둘러싸고 정국은 또 한 차례 격랑에 빠져들었다.

국민회의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정기국회가 끝난 연말에 지역구 조직책 선정작업에 들어가 김근태는 20년 이상 살아온 서울 도봉구에 신청, 조직책으로 선정되었다. 이제 야당의 지구당위원장이 된 것이다.

김근태는 원외 지구당위원장과 제1야당의 부총재로서 정당(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의 정당구조상 원외의 부총재는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원칙을 지키면서 국민회의의 집권채비에 정력을 쏟았다. 이 시기의 김근태를 한 언론인은 ‘개방적 명분주의자’로 분류하였다.

95년 천정배ㆍ유선호ㆍ김영환ㆍ박용석 씨 등 쟁쟁한 인사들을 이끌고 마지막 재야인사로 제도권에 진입할 때도 민주당 지분 10%를 인정받고 들어가는 등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당시 김대중 총재와 대등한 협상당사자 자격이었다.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 자기지분을 고집하지 않고 ‘정치를 배우는 자세’를 취했던 것은 김근태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아마추어 출신의 정치력의 한계 탓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근본을 중시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며 동시에 현실정치의 힘의 관계를 인정하는 실사구시형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말과 명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실세계의 큰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점에서 그는 ‘개방적 명분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겠다.
(주석 5)


주석
4> 앞의 책, 115쪽.
5>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 <월간중앙WIN>, 1999년 1월호,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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