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6 08:00 김삼웅

 

 

“자유는 한번 싹트면 엄청난 속도로 자라는 나무” - (조지 워싱턴)라고 한다는데, 한국의 경우는 예외인 것 같다. 또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 (제퍼슨)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 것 같다.

4월혁명, 반유신투쟁,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가에서 한국(인)처럼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최근 북아프리카, 중남미 일부 아랍 국민들의 항쟁을 제외하면 한국의 민주화투쟁은 반세기 이상 앞선다. 다시 구속된 김근태는 결연한 자세로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한번은 검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10년 정도 손아래였을 그 검사는 이름이 문성우였던가. 신문조서를 받겠다고 했다. 진술거부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우선 포승과 수갑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했더니 그것은 교도관의 권한이고 자기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검사실 내에서 지휘권은 당신에게 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서의 임의성 성립을 위해서 수갑과 포승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으니 되풀이하여 그것은 교도관의 권한이라고만 했다. 그 전에 이 검사방에 왔을 때는 언제나 수갑과 포승을 풀었는데, 위에서 한번 본떼를 보여주라는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술을 거부한다. 이것을 고지한 이상 퇴거할 자유가 없다. 이렇게 포박한 상태로 진술을 거부하고 있는 나에게 무의미한 질문을 하는 것은 피고인에 대한 학대행위라고 하면서 신랄한 말싸움을 1시간 정도 벌였다. 그후 다시는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도저히 재판을 받을 수가 없었다. 첫 공판에 나가 모두진술을 통해 이것은 정치적 보복이기 때문에 나는 ‘재판받을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와버렸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7년 구형에 3년 선고였다. 거의 같은 죄목(?)으로 재판받았던 이부영 씨 10월, 이창복 씨 1년에 비해 중형이었다. 재판 거부에 대한 보복이었다.
(주석 12)

김근태는 1990년 5월 9일 민자당반대 시위 및 전민련 결성과 관련하여 구속되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5월 13일 검사의 기소장과 판사의 판결문이 복사품과 같은 재판에서 7년 구형에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와 상고심에서 2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검사와 판사가 과격, 급진, 선동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미국 작가 마이클 무어의 “진실은 선동적인 것처럼 보이고, 상식은 급진적인 것이 되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안양교도소에서 두번째 옥살이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국보법 7조 1항과 집시법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김근태의 서울상대 한참 선배이기도 하는 민족경제학자 박현채는 “역사에 충실한 삶이란 오늘에 있어 보상받지 아니하고, 오늘에 있어 보상받길 원하지 않는 삶이다.”고 다짐하면서 ‘역사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김근태도 다르지 않았다. 정계진출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첫번째는 민청련에, 두번째는 전민련의 활동에 충실하다가 다시 갇힌 신세가 되었다.

처음에는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서울과는 그리 멀지 않아서 부인과 동지들이 면회오는데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별 두 개가 되면서 옥살이의 이력도 붙고, 수사ㆍ재판과정에서 육체적 고문은 없어서 그냥저냥 견딜만 했다.

1991년 1월 초 안양교도소에서 딸 병민이에게 편지를 썼다. 이때 병민이는 어느새 아홉 살 소녀가 되었다.

귀여운 우리 아가씨, 병민아!
편지가 늦어서 미안하다. 너한테서 온 두 통의 편지는 받았고, 하나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란다. 그 동안 서울에서 안양으로 아버지가 이사를 해서 그렇단다. 주로 아버지의 게으름 탓 때문이지만 지난 6개월 여의 교도소 생활중 이 편지가 내가 쓰는 첫 번째 편지이다.

있잖니, 병민아, 사람이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속이 텅 비고 메마르게 되는 법인데, 지난 2년 동안 아버지는 끊임없이 말을 해야 했고, 그것도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했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침묵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영향이 너에게까지 가고 말았구나. 답장을 안 한다고 네가 울었다는 얘기를 듣고 지금 부랴부랴 방에 돌아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이해해줄 수 있겠니, 병민아.

네가 보낸 두 번째 편지에 ‘예감’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사용한 네 글을 보면서 아버지는 매우 자랑스러웠단다. 면회 때 엄마와 아버지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마구 웃었단다. 그랬더니 모두 속으로는 아버지의 기분을 알아주면서도 그러는 나보고 “푼수” “얼간이”라고 놀려대더라. 아마 다른 경우에 이런 얘기 들으면 언짢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아버지는 낄낄대고 웃었다.

병민아, 그래 네 예감대로 아버지는 올해 안에는 못 나갈 것 같다. 너와 네 오빠 병준이, 엄마 등 사랑하는 우리끼리 함께 얼굴 보면서 살지 못하는 것은 슬픔이지.

자상한 아빠가 귀염둥이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보통사람의 꿈이 배인다. 그 무렵 병민이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근태의 편지는 이어진다.

그런 이 아버지가 어느 날인가, 네가 차와 부딪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떠했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니. 막막함이었다. 뒷머리가 뻗뻗해지고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사람의 생명은 정말로 귀중하다. 그것은 절대 자체이고 거기에 부담을 주고 위해를 가하는 모든 것은 악이고, 우리는 그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 네 말대로 네가 옳았다고 아버지는 믿으며 운전기사가 잘못한 것이겠지만 이와 같은 일이 비슷하게라도 앞으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병민아, 교통질서는 사람간의 약속인데도 서로 갈 길이 바쁘다고 때로 욕심을 내다가 교통사고가 일어나 사람이 다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네가 미리 방비하도록 해야 된단다.

병민아, 시험을 잘 봤다면서. 그래 수고했다. 그리고 축하한다. 너의 두 번째 편지의 맨 앞에 시험 얘기가 있었지. 그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일을 책임있게 해야 한다고 너희들에게 말했던 일, 어쩌다가 너희들을 야단쳤던 일, 그리고 몇 번인가 때리기조차 했던 일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너희들이 아버지의 얘기를 시험점수 잘 따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싶어 착잡해졌다. 이런 말 저런 말이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학교 공부를 우습게 생각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시험점수 잘 받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고 친구들과도 잘 안 놀고 미워하기까지 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도 모두 하지 않는 그런 것은 아버지는 정말로 반대한다.
(주석 13)


주석
12> 앞의 책, 651쪽.
13> 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33쪽,
한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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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

012/08/25 08:00 김삼웅

 

노태우 정권은 방북인사들을 용공으로 매도하고, 족벌신문ㆍ어용방송들이 덩달아 붉은 색칠을 하면서 한국사회는 살얼음판의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음모가들에게는 일을 꾸밀 절호의 기회였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내키지 않는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선 패배와 더불어 총선에서도 제2야당으로 밀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제3야당에서 존재감을 잃어가던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공안분위기를 틈타 야합하면서, 정계는 다시 한번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는 노무현 의원.

 

1990년 1월 22일 이들 세 사람은 3당 야합을 통해 거대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다.
6월 항쟁으로 어렵게 돌린 역사의 물굽이가 다시 역류하는 반동이었다. 3당야합은 정치지형의 변개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민주화의 역류와 보수화를 불러왔다.

5공청산은 물건너가고 부동산가격 폭등사태, 물가고, 증시침체, 토지공개념 후퇴와 금융실명제 보류 등 경제난국이 가속화되었다. 거대 여당으로 변신해 오만불손해진 민자당 정권은 임시국회에서 방송법, 국군조직법, 광주관련법, 추경예산 등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일당독재식 국정운영으로 일관하였다.

전민련은 안팎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1989년 4월부터 몰아닥친 공안정국의 탄압과, 영등포을구 재선거를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하고, 5월부터 이른바 ‘합법정당논쟁’이라는 내부적 혼란에 빠져든 것이다. 합법정당논쟁은 전민련 내부 각 정파간에 이해와 불신을 불러왔다. 이우재ㆍ장기표ㆍ조춘구 등은 전민련에서 합법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1989년 9월 26일 전민련 2차 중앙위원회에서 전민련을 탈퇴하고, ‘새정당창건을 위한 임시연락사무소’를 설치하면서 민중정당 건설의 주체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연락사무소는 이미 1989년 9월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진보적 대중정당건설을 위한 준비모임’과 통합, ‘진보정당결성을 위한 정치연합’을 발족시켰다.

이후 전민련 2차 대의원대회에서 합법정당 건설안이 부결된 후 1990년 3월 12일 계훈제ㆍ박형규ㆍ이소선ㆍ백기완 등 전민련 고문 4인이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 결성을 제안, 3월 21일 진보정당 준비모임 측이 기자회견을 통해 민연추 결성에 동참할 것을 발표함으로써 4월 13일 447명의 민연추 추진위원이 참가, 백기완ㆍ이우재ㆍ고영구 등 공동대표를 선출하는 등 공식적인 체계를 갖추고 출범했다. 이로써 전민련은 분열되고 말았다.

김근태는 ‘합법정당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잔류를 선언하였다.
“신식민지 파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민족민주세력의 정치세력화는 합법정당의 건설이 아니라 민족민주전선의 강화와 제도정치 공간에서 공개정치부대를 구축, 단일한 민주연합당을 추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합법정당을 주장한 그룹은 대의원대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민련을 박차고 나가 민중정당을 결성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40대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자주ㆍ민주ㆍ통일을 목표로 출범한 전민련 지도부는 김근태, 그만 ‘외롭게’ 남게 되어버린 것이다. 전민련 잔류를 선언한 그는 그 후 어수선한 조직을 재정비,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하던 도중 당국에 의해 구속되고 만 것이다.
(주석 10)

김근태는 ‘남은 자’들과 5월 9일 전국 18개 지역에서 회원ㆍ시민 20만여 명이 참가하는 가운데 ‘민자당해체 노태우정권 퇴진 국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시위로 전국 21개 도시에서 1,192명이 연행되고 그 중 55명 구속, 79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날 저녁 김근태는 전민련 주최로 제주에 강연을 하러 갔다가,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뒤늦게 전민련 결성 선언문과 사업계획서가 국보법 위반이란 혐의였다. 노태우 정부가 갑자기 김근태를 구속한 것은 그가 평민당ㆍ꼬마민주당ㆍ재야가 통합하여 거대 민자당에 대항하려는 민주 연합체의 구성 준비 작업 때문이었다. 당시 김근태는 이 작업에 몰두하여 상당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민자당 합당의 야합성을 규탄하고 흔들리는 민생문제를 효과적으로 제기하기 위해서 전민련 결성 이후 성장하고 있던 각급 대중단체를 전민련의 주도로 국민연합에 결집시켰다. 전교조ㆍ전농ㆍ전노협ㆍ전대협 등이 두루 포괄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고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 국민연합 조직을 갖고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맞서기 시작했다. 상당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일부 간부들이 나감으로써 위상이 저하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 정치적 영향력이 전민련에 남아 있었다. 당시 나는 재야 일부의 역량과 평민당, 작은 민주당이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 민주연합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전민련 내부의 정치역량을 우선 설득하고 전민련 바깥에 있는 민주대연합을 찬성하는 분들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함께 참여하도록 말이다. 또한 독자정당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였다.(…)

머지않아 비공식적으로나마 각 부문의 합석이 기대되는 시점에서 권력은 나를 구속했다. 이런 논의의 진전 자체를 차단하고자 했다. 1990년 5월 공안정국에서 나는 이처럼 다시 구속되었던 것이다.
(주석 11)

김근태가 ‘합법정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고 전민련에 잔류한 것은 타협을 모르는 외곬수이거나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완고성 때문이 아니었다. 노태우 군부정권의 본질과 보수야당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별로 기대하기 어려웠고, 강력한 재야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6공화국의 공간에서 특히 3당 야합으로 인한 거대 민자당이 지배하는 ‘1점반 정당체제’에서, 전민련 이탈파들이 추진한 ‘합법정당론’ 은 설 자리가 없었다. 실제로 ‘민중당’과 ‘한겨레민주당’ 등 진보정당들은 원내 진출에 실패하면서 존재가치 이외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면 전민련은 반신불수가 되고 공안정국과 1991년의 이른바 ‘분신정국’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역량의 분산 때문이었다.

김근태는 1990년 4월 9일, <월간 말>이 주최한 <민족민주운동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란 주제의 긴급토론에서 현 시국을 대단히 위기로 분석했다. “지금 우리 운동은 위기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지배세력은 부분적인 의사개량화조치를 통해 민족민주운동의 전투적인 부분과 변혁적, 원칙적 관점을 유지하는 운동에 대해 집중적인 탄압을 가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 탄압 앞에서 대응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전략계획조차 크게 동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라고 분석ㆍ평가하였다.

그의 분석은 정확했고 현실로 나타났다.


주석
10> 이재화, 앞의 책, 167쪽.
11> 김근태, <아직도 벗지 못한 공안의 굴레>, <분단시대의
피고들-한승헌선생화갑기념 논집>, 46~47쪽, 범우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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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4 08:00 김삼웅

 

현대판 민족개조론자

김근태는 1989년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노동문학>에 알맹이 있는 칼럼 몇 편을 썼다.
노동운동 출신으로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있던 그로서는 짧은 칼럼이지만 열성을 다한 글이다.

4월호에는 ‘민주운동가’ 란 직함으로 <현대판 민족개조론자>란 제목의 칼럼이었다.
이 책에는 고은ㆍ노무현ㆍ신경림ㆍ박현채ㆍ윤구병ㆍ이호철ㆍ이오덕ㆍ유시춘 등 낯익은 필자들이 함께하였다. 김근태의 글은 민족의식, 민족자주의 얼이 깃든 보기드문 격문이다.

반미감정은 열등감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한국민을 대표하여 미국에 가 있는 대사도 한몫 끼고 있다. 미국 텔레비전에 나가서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분명히 말하자면 이렇다. 반미 감정은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격렬한 정서이며, 또한 우리에게 열등감을 강요하고 강제해 온 외세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다. 그에 대한 올바르고 과학적인 인식의 출발인 것이다. 이른바 반미 감정은 한때 유행하는 그런 감정이 아닌 것이다. 무차별한 농ㆍ축산물 수입 개방 압력 앞에 맞서 싸우는 근로농민 계층, 가파른 원화 절상 압력으로 고통 받는 중소기업주들, 합법적인 노조운동을 비열하게 탄압하는 미국 자본에 맞서 분노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이렇게 여기에 굳세게 모여 있지 않은가.

우리를 깔보고 모욕하고 괴롭히며 때로는 때리기까지 하는 저들에 대항하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이태원 밤거리에 2천여 명의 시민이 모여 노래를 그토록 비장하게 부르고 있지 않은가. 행패 부리는 미군 병사들에 대해, 그들을 싸안고 도는 경찰들에 대해 새벽 2시 이태원 거리에서 그렇게 애국가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김근태는 화성군 사례 등을 예시하고 곧 ‘본론’으로 진입한다.

이런 우릴 보고도 여전히 위컴은 들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그게 궁금하다. 박정희 군사 파쇼 시대에, 전두환의 초기에 우리는 들쥐처럼 눈을 내리깔고 어깨는 축 늘어뜨린 채 그렇게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결단코 더 이상 들쥐일 수는 없게 만든 장본인이야말로 위컴이고 글라이스틴이며 그러그러한 양키들인 것이다. 80년 서울의 봄의 좌절에서, 광주사태에서 드러났던 추악한 그들의 모습이 우리 내부의 자존심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우리는 부시 방한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들쥐로 고정시키려는 집단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민중을 억누르고 빼앗는 정치 군부, 특권적 관료 집단이 그들이다.
프란츠 파농이 비웃어 주었던 검은 피부, 흰 가면과 똑같은 누런 피부, 흰 가면을 쓰고 있는 집단들이다.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자치를 구걸하고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던 반민족세력의 후예인 것이다. 민족의 절대독립을 외치고 실천했던 위대한 애국자와 민중을 배반했던 수치스런 매국노들의 후예이다. 현대판 민족개조론자로서 여전히 “아직 우리는 열등합니다. 제발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꼴불견을 더 이상 봐 줄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안 될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주석 6)


우리, 일어서야 한다


김근태는 이 해 6월호에는 다시 <우리, 일어서야 한다>는 칼럼을 썼다. 노태우 정권이 유화책을 내걸면서 이면에서는 수많은 청년학생, 민주인사, 노동자들을 구속한 사례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에게 89년 5월은 80년 5월이 되고 있다. ‘광주’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니 ‘광주’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철규 형제의 처참한 죽음 속에서 ‘광주’는 저처럼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80년 합수부처럼 89년의 합수부는 우리에게 ‘광주’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귀 틀어막고 눈 내리깔고 비겁자처럼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김근태는 이 글에서 ‘이철규 변사사건’을 언급한다.
1989년 5월 1일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와 관련, 전남지역 합수부의 지명수배를 받아오던 교지 편집위원장 이철규(전자공학과 4년)가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정국은 타살이냐 실족사냐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정부는 사인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학생들을 대량 검거하였다.

이철규 형제의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의 광주’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광주, 항쟁하는 광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를 위해서 그 죽음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플랑크톤이니 과학이니 하면서 우리에게 머뭇거림을 강제해 오는 저들의 시꺼먼 의도를 단호히 거부해야 된다.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 수백 수천 명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하면서 다시 나아가야 한다. 공장과 농촌에서 학교ㆍ교회ㆍ절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거리거리에서 광범한 대중집회와 시위를 조직해 내야 한다. 특히 공장과 농촌에서 또한 거리에서 노동자와 근로농민이 주동이 되어 일어서야 한다.

광주와 이철규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그 책임자 처벌을 관철시키는 힘은 여기에 있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는 투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근원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지배권력의 탐욕과 증오심을 분쇄하는 곳에서만 승리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가. 절대로 가능하다. 누가 감히 가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진하고 있는 민주의 저 굳센 발자국 소리가, 우렁찬 함성이 저렇게 파도치고 있지 않은가.
(주석 7)

<민족민주운동> 창간호 발언

김근태가 석방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할 무렵인 1988년 9월 민청련은 부설기관으로 ‘민족민주운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민족민주운동의 과학적 이론정립과 정책수립역량의 제고에 보탬이 되고”,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후원 하에 연구소를 설립한다” 고 취지를 밝혔다.

연구소는 1989년 4월, <민족민주운동>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한국경제의 성장과 민족민주운동의 진로>를 탐색하는 기획좌담을 머릿기사로 실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신철영(서울 노동운동단체협의회 사무국장), 정태윤(진보정치연합 공동대표), 채만수(민족민주운동연구소 소장, 사회)가 참석했다. 주제는 ‘경제성장과 민민운동의 진로’였으나 토론 내용은 한국경제의 실상과 자본문제ㆍ노동ㆍ농민문제의 심각성,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민민운동의 역할 등이 폭넓게 논의되었다.

이 좌담에서 김근태는 대단히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상과대학출신으로서 한국경제의 실상을 전문가답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부분적인 획득, 몇가지 개량화 조치, 이런 것들이 남한사회의 현재 조건에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에 대해서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경험 속에서 현재의 상부구조ㆍ하부구조의 실제적인 조건에 비춰 봐도, 그런 단계적인 개량을 통해서 민중들의 삶이 향상되고 인간의 행복이 보장될 수 있는, 그런 길로 나갈 수 있는, 그런 길로 나갈 수 있다고는 볼 수 없고, 그렇게 봐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개량주의이고, 그런 개량주의는 우리의 조건 속에서 불가피하게 파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8)

김근태는 현 시국(당시)을 수구세력의 전략적 개량화 조치로 평가하면서 대단히 불안한 국면으로 인식한다. 한 대목을 더 발췌한다.

지배세력이 결정적인 궁지에 몰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의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을 획기적으로 역전시킬 필요가 있겠는가의 문제인데,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민중운동이 몇가지 개량조치 속에서 변혁운동 쪽으로 이끌려 올 것인지 아니면 체제내화되는 개량주의적운동으로 갈지가 아직 모호한 상태에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둘러싼 쟁투가 지금 실제로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지 않느냐 하는 판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열린 공간에서는 탄압을 대비해야 되고 탄압시기에는 열림을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균형된 자세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주석 9)


주석
6> <노동문학>, 1989년 4월호.
7> <노동문학>, 1989년 6월호.
8> <민족민주운동> 창간호, 28쪽, 아침, 1989.
9> 앞의 책,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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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9장] 짧은 자유, 또 투옥되다

2012/08/23 08:00 김삼웅

 

늦봄 문익환 목사의 생전모습. 살아생전 그는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항상 있었다.ⓒ 김민수

 

김근태는 이론가이면서 전략가였다. 반군사정권, 반외세투쟁에 있어서는 명료한 이론과 함께 치밀한 조직과 연대를 통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과거의 재야ㆍ청년운동이 거칠게 조직되어 단발적으로 투쟁하다가 와해되곤 했던 경험에서 치열한 전략이 요구되었다. 그는 정책기획실장으로서 전민련의 이념과 조직을 총괄하면서 90년대초 노태우 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다.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예의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다시 파쇼적인 통치로 본색을 드러냈다. 전민련 고문인 문익환 목사가 3월 25일 정경모ㆍ유원호와 함께 베이징을 경유하여 평양에 도착하고, 이에 앞서 3월 20일 작가 황석영의 방북사건 등을 공안정국의 빌미로 삼았다. 문익환은 평양공항에서 입북성명을 발표하여 “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과 회담을 하는 등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친 뒤 귀국했다.

정부는 문 목사 일행이 귀국하자마자 미리 발부받아 둔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하여 김포공항에서 구속ㆍ수감했다. 이 사건은 공안정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4월 12일 이부영ㆍ조성우ㆍ권형택ㆍ이재오ㆍ이창복ㆍ배종렬ㆍ지선 스님 등 전민련 간부들을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14일에는 <한겨레> 논설고문인 리영희 교수를 북한 취재 계획과 관련하여 역시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5월 1일에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문익환 방북사건과 관련 혐의로 소환했다. 노태우 정권은 제1야당 총재까지 소환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위기 국면을 역전시키려 들었다.

4월 12일 전민련 의장단 등 간부들이 구속될 때 김근태는 빠져있었다.
외형상 고위 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민련 창설 당시 그는 정책실장이었다. 김근태는 의장단과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조직이 흔들리자 1990년 3월 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조직을 유지하고 폭압적인 공안통치를 일삼는 노태우 정권과 맞장뜨기 위해서는 김근태가 다시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회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고난의 길이었다.

김근태의 능력과 역량, 전민련과 민주화운동 진영에서의 위상을 꿰고 있는 공안당국이 그를 방치할 리 없었다. 그들은 쇠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외부 환경은 다시 5공 시대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었다.

89년 대학생으로 정부의 허락 없이 평양에 갔던 임수경 씨가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와야 할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문규현 신부가 임수경 씨와 동행해 내려오도록 파송했다. 물론 신부는 자신이 보호하던 학생과 함께 옥에 갇혀야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1989년 5월 3일 부산동의대 사태로 경찰관 7명이 사망하고, 6월 27일 평민당 소속 서경원 의원이 방북한데 이어, 6월 30일에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제3국을 통해 평양 청년학생 축전에 참가했다. 7월 7일에는 남한의 전대협과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가 남북통일을 위한 공동투쟁 등 ‘남북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임수경은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다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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