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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17 08:00 김삼웅

 

 

1995년은 김근태에게 새로운 삶의 시발점이 되었다.
황량한 재야에서 척박한 야당인이 된 것이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재야와 야당 사이에 큰 장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야당은 제도권에 속한다. 정당은 복수정당제가 헌법상으로 보장되면서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한 시대의 해맑은 영혼이 시대정신을 구현하고자 들어 선 야당은 재야와는 또 다른 집단이었다.
시대의식이 없는 출세주의자들도 많았고, 정치보다는 정략에 능한 정상배도 적지 않았다. 유신ㆍ5공시대에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권력을 탐하는 기회주의자들, 돈 보따리나 한 때의 지명도로 비례대표 또는 말뚝만 박아도 당선되는 지역에서 공천받아 선량노릇을 하는 국회의원도 없지 않았다. 물론 반독재 투쟁에 몸 바쳐온 정통 야당인이 많았다.

김근태는 과거 두 차례에 걸쳐 정치인이 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1985년 2ㆍ12총선 당시 김영삼으로부터 종로구 출마 권유, 두 번째는 1991년 투옥 중일 때 김대중으로부터 신민당 부총재를 제의받았다. 김대중은 평민당에서 재야 인사들을 영입, 신민당으로 개편하면서 이우정ㆍ조세형 두 의원을 특사로 보내 입당을 제의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 다 운동진영 내부 조건이 성숙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야당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근태가 정치참여 바꿔 말해서 야당에 입당하게 된 배경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994년까지 ‘마지막 재야’로 남아 있던 그는 1995년 초 평민당 후신인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이 통합해서 새민주당을 결성하자 부총재 직함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민주세력의 집권을 위해서 참여한 것이다. 정국이 크게 요동치고 있을 때였다.

제14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에 이어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통일운동에 전념해 온 김대중이 1995년 7월 18일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집권 초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혁을 추진했던 김영삼 정부가 급속히 보수화하면서 국정운영의 난맥상을 보였다.

문민정부의 총체적 실패를 지켜보던 김대중은 그 대안으로 자신감을 갖게 되고, 6ㆍ27 지방자치 선거를 진두 지휘, 야당의 압승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국민회의는 8월 11일 신당발기인대회에 이어 9월 5일 창당대회를 열었다. 김근태는 김대중으로부터 신당 참여를 권유받았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실패로 자칫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게 되고, 남북관계는 전임 노태우 정부보다 훨씬 후퇴하고, 서민생계는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여기에 각종 대형참사까지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국정을 바로 잡을 대안세력이 요구되었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부총재로 영입되었다.
민주당이 이기택파와 반이기택파로 분열되어 심한 갈등을 빚으면서 김근태는 김대중의 국민회의에서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부총재에는 김근태를 비롯, 김영배ㆍ박상규ㆍ신낙균ㆍ유재건ㆍ이종찬ㆍ정대철ㆍ조세형이 각각 선출되었다. 대부분 현역 의원이다.

지도위원에는 권노갑ㆍ길승흠ㆍ김봉호ㆍ김상현ㆍ김태식ㆍ김희선ㆍ라종일ㆍ유준상ㆍ신순범ㆍ신용석ㆍ안동선ㆍ이용희ㆍ정영모ㆍ정희경ㆍ천용택ㆍ한광옥ㆍ허재영, 원내총무에는 신기하, 사무총장에는 조순형, 정책위의장에는 손세일, 지방자치위원장에는 장석화, 대변인에는 박지원이 각각 임명되었다. 김근태는 제1야당의 최고지도부에 진입하게 되었다. 48세, 정치인으로는 늦깍이었다.

 



간디가 가는 길이 있고 네루가 가는 길이 있습니다.
재야운동은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의 길이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사회운동의 길은 간디의 길이고 정치운동의 길은 네루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은 서로 다르지만 지원하고 협력하는 길입니다.
(주석 1)

김근태는 이제까지 걸어온 간디의 길에서 네루의 길로 접어들었다.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이 다른 것 같지만 목표와 지향은 다르지 않는 것이었다. 김근태의 말을 더 들어보자.

물론 내 개인적으로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을 동시에 다 갈수는 없지요. 나는 이제 네루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간디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고 함께할 생각입니다. 국민회의(재야 단체-필자)에서 김상근 목사님과 함세웅 신부님을 상임대표로 하고 저를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뽑은 것도 간디의 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인정한 것이지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도덕적 정당성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주석 2)

김근태는 자신의 행로를 두고 간디의 길과 네루의 길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리고 해방 뒤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지도자가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위대한 영혼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며 전국을 순회하고 죽음을 각오한 단식 투쟁을 벌일 때, 위대한 현실주의자 네루는 간디의 그 숭고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간디에게는 간디의 길이, 네루에게는 네루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홀홀단신으로 평양으로 떠나시던 김구 선생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사진 속에서 선생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만일 그때 김구 선생 곁에 네루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우리 현대사는 크게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3)


주석
1> 조유식, <길 떠나는 김근태의 화두>, <월간 말>, 1995년 3월호, 113쪽.
2> 앞의 책, 114쪽.
3> 김근태, <기억에 관한 소고>, <희망은 힘이 세다>, 19쪽, 다우,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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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회] 미국 미시건대학의 초청 강연: 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6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93년 7월초 미국 미시건대학의 초청.. http://t.co/w38eJNN0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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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6 08:00 김삼웅

 

 

김근태는 1993년 7월초 미국 미시건대학의 초청으로 다시 미국을 방문하였다.
로버트 케네디상 수상자로 선정되고도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어진 수배와 투옥으로 남들이 이웃집 드나들듯 하는 미국행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미시건대학은 초청장과 함께 여비 일체와 체류비까지 부담하여서 방미에 달리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미시건대학에서 특별 강연을 하기로 하였다.

김근태는 7월 10일 미시건대학 대강단에서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민주주의의 전망>이란 주제의 강연을 하고 청중의 질문도 받았다.

당시 국내정세는 김영삼이 취임하면서 공직자 재산공개와 노태우 정권의 최대 의혹사건으로 떠오른 차세대전투기 도입 의혹 감사원 감사 등 개혁 드라이브로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 김대중이 없는 민주당은 야당의 트레이드마크인 ‘개혁’을 정부 여당에 빼앗긴 채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위협받고 있었다.

김근태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민주주의를 전망하는 연설문을 준비하였다. 그는 대단히 합리적이어서 맹목적인 반대나 비난을 위한 비난과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그러나 현상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가식적인 것과 진실한 것을 구분하고 평가하는 예리한 지성을 갖췄다. 이 연설문에서도 그런 부분을 찾게 된다.

 



김영삼 정권 수립 이후 특히 개개인의 시민은 상당히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더 이상 공포와 모욕감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선거과정에서 찬성과 반대 어떤 쪽이었던 간에 자신들이 직접 참여하여 이뤄진 결과로 수립된 정부이고, 민간 출신이 최고 권력자가 됨으로써 그렇게 되었다. 여하튼 지난 시기보다는 많이 나아졌고, 이제 그 고통스런 대결과 도덕적ㆍ정치적 책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대중적 분위기도 일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민주주의는 실현되고 있다”라는 지배적 언술의 반복과 일부 비판적인 운동그룹의 ‘지금은 진보적 수준을 향한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주장도 결과적으로 더 이상 민주주의 실현을 둘러싼 논쟁과 대결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만들었다.
(주석 18)

김근태는 초기에 김영삼 정권의 실체를 벗겼다. 본질적으로 군사정권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아직도 감옥에는 많은 정치범이 있다. 지난 시기 절차적 민주주의를 난폭하게 유린했던 국가보안법은 개폐되지 않았으며, 최고 권력자는 앞으로도 계속 국보법을 유지하겠다고 천명하였다. 독소조항이 웅크리고 있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이나 노동관계법도 그대로이다. 이렇게 볼 때 최소한의 기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부분적 자유화는 실현되고 있으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석 19)

 



김근태는 두 차례나 국보법과 집시법의 희생자이고, 원래 노동운동 출신이기에 노동관계법의 독소조항이 얼마나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들을 옥죄이고 있는가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이같은 악법이 개폐되지 않고 있는 ‘문민정부’를 진정한 민주정부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에 관해서도 예리한 메스를 가한다.

개혁이 지배적인 언술이 된 것은 김영삼 정권의 성립 이후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는 ‘개혁’이라는 슬로건 속에는 시대정신이 관철되고 있는 측면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 양측면은 반드시 상호배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립이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당면 요구로서의 진정한 ‘개혁’을 보다 힘차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이 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될 때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해 우리는 비판적으로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조건상 그리고 힘의 관계로 볼 때 지금 추진하고 있는 개혁 이외에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는 전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함축이 그 속에 담길텐데 과연 그럴까? ‘개혁’이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될 때 그것은 개혁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키기보다 그것을 오히려 제한하고 망상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주석 20)

 



김영삼 정부의 ‘개혁’을 이처럼 예리하게 분석한 학자ㆍ언론인ㆍ야당정치인은 드물었다. 문민 정부의 개혁드라이브는 제도와 구조개혁이 아닌 현상에 머물고 있었다. 그나마 1년이 못가서 국회날치기, 남북갈등, 노동자탄압 등 ‘유사문민정부’ 로서의 허상을 드러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군부독재는 지역감정을 더욱 심화시켰다.
80년 이후 광주는 민주화 실현의 대장정에서 희생양이었고, 저항의 근거지였다. 호남에 적대하는 지역감정은 이제 민주주의 실현을 반대하는 악성의 퇴영적 본질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렇다면 이것은 이미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성과 양심 그리고 민주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까지 되고 있다해야 할 것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회피하면서 그것을 역사의 심판에 맡기겠다고 선언하는 이른바 ‘문민정부’를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주석 21)


주석
18> 김근태, <희망의 근거>, 23쪽.
19> 앞의 책, 23~24쪽.
20> 앞의
책, 25쪽.
21> 앞의 책,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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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관심은 재야민주세력을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묶는 작업이었다.
과거 일부 재야인사들의 진보정당운동의 실패를 돌아보면서 제도정치권과 재야세력의 조직적인 연계와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여러날 동안 준비 끝에 마침내 이를 위한 1단계 작업이 이루어졌다.

1994년 4월 23일 오후 충정로 동아일보의 18층 대강당, 400여 명의 재야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최고지도부인 공동대표단에는 종교계 원로와 재야 원로 5명을 선출하였다. 가톨릭대표 김병상 신부, 개신교대표 김상근 목사, 법조계대표 한승헌 변호사, 재야여성대표 김희선 전국연합자주통일위원장, 불교계대표 조계종 개혁의 핵심인 지선 스님, 그리고 이 단체를 오랫동안 준비해온 김근태가 각각 선임되었다. 김근태는 실질적인 상임대표였다. 대변인에는 천정배 변호사가 임명되었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결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93년 김영삼 정권 수립 후 ‘민주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평가가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93년 상반기에는 ‘정치적 국민운동체’를 추진하지 못하다가, 7월 16일에 가서야 1백 30여 명 활동가들이 서울 꼼뺑뜨왈 수녀원에 모여 토론을 시작했다. 각 지역과 부문 활동가들인 이들이 토론해서 7월 말 ‘새정조’를 만들고 책임자 회의를 성립시켰다. 가능한한 많은 합의를 통해서 정치운동과 대중운동으로 분화 발전하기 위해서였다.

8개월간 민주대연합에 동의하는 진영내에서 활발한 토론을 했지만 잘 안 되었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운동의 침체와 자기 조직정비에 골몰하고 있었다. 단결된 모습으로 전진하고 힘에 기초해야 할 재야운동은 폭넓은 합의와 단결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주로 제도정치권만 모색한다는 우려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94년 초반에 새정조는 15차 책임회의를 개최하고 4월 중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3월 12일 숭실대에서 확대회의를 개최해 4월 23일 결성대회를 갖기로 하고 운영규정, 사업계획, 추진일정 등을 정했다.
(주석 16)

 



‘국민연합’은 또 다른 재야 연합체인 ‘전국연합’을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개인자격으로 많은 명망가들이 참여했다. 이들 외에도 상당수 문화계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시인 고은과 김규동ㆍ신경림ㆍ문병란ㆍ도종환ㆍ신초혜, 소설가로는 천승세ㆍ조정래ㆍ윤정모ㆍ송영ㆍ김하기ㆍ정도상 등이 참여하고, 행사 당일 가수 신형원은 축가를 불렀다.

영화인 장신우 감독, 화가 홍성남, 만화가 이희재,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 전대협 2기 의장 오영식, 전대협 4기 대변인 김재웅,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허인회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밖에 상당수의 의사와 중소상공인, 교수, 변호사, 언론인 등이 참여하여, 과거의 재야 단체와은 달리 폭넓은 광장이 되었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출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92년 대선 후 상황정리가 우선 필요했다.
첫째, 92년 국민회의는 대선패배로 무너졌고, 전국연합이나 기층민중운동 진영에서도 변화된 상황에 대한 논의가 합의되지 않았다. 둘째, 평가결과 폭넓게 꾸리는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리고 민중중심의 공감대를 가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셋째, 김영삼 정권이 민중의 기본권문제, 남북관계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정리했다.
(주석 17)


주석
16> <월간 말>, <김근태와 국민회의 사람들>, 86쪽, 1994년 6월호
17> 앞의 책,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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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회] ‘정치적 국민운동론’ 제시하다: 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4 08:00 김삼웅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 http://t.co/RXrl1YCzL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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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1장] 집권대체세력 ‘국민회의’ 결성

2012/09/14 08:00 김삼웅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부터)이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를 경청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유성호

 

김영삼의 당선으로 외형상 32년의 군부독재를 끝내고 문민시대가 열리는 듯 했지만, 김영삼의 노태우 정권 참여와 그를 둘러싼 수구세력의 면면으로 보아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은 어렵다고 보았다. 그래서 김근태의 고민은 깊어갔다.
하여 이를 대체하는 차기 집권세력의 형성을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김대중이 떠난 민주당은 지도력의 부족으로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형국이었다. 김근태는 여러날 동안 생각 끝에 ‘정치적 국민운동론’을 제기하였다.

김근태는 1993년 5월 13일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정치적 국민운동체의 구상과 전망>이란 주제를 발표했다. 그는 먼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민족민주운동의 대중적 영향력을 저하시켜온 주요 원인은 물론 탄압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답변은 충분치 않다. 우리는 주관적 열정주의로 말미암은 전술적 실패와 전략적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다음 사항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 정세판단(87년 6월항쟁 이후 운동세력이 전략적 우위에 서 있다는 주장)의 착오
△ 관념적 급진주의(운동의 기본구도를 ‘진보 대 보수’로 과도하게 높이 설정)
△ 정치사업과 대중사업의 긴장된 통일을 구축하지 못함
△ 초기단계에 있는 대중운동의 자연발생성에 활동가들 굴복
△ 활동과 운동에서의 비대중성(의사개량화 국면에 걸맞는 운동의 변화 마비)
△ 분열
△ 조급한 독자정당과 독자후보전술의 좌절과 실패.
(주석 13)

김근태는 김영삼 정부가 내건 개혁과 신보수주의는 영국과 미국에서 실패한 것을 뒤늦게 수입한 정책모방이라 단정하면서, 그럼에도 대중에 대해 상당한 설득력과 포섭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 재야운동 진영의 새로운 역할론을 폈다. 범민주세력의 연대를 위해서 그 방법론을 제시한다.

△ 민주 대 반민주의 대중적 대립구도는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다.
△ 통일운동의 핵심적 내용은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지대화 실현 그리고 군축의 진전이 되어야 한다 (변화된 정세 아래에서 통일운동 또한 당연히 변경되어야 한다. 남한 민주화의 전면화와 더불어 북한의 변화를 가능케 하여 상승적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길로 전진해야 한다)
△ 정세의 변화는 기동적 운동에서 진지적 운동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강제)하고 있다
△ 우리의 운동은 선거를 매개로 하는 활동과 투쟁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주석 14)

김근태는 정치활동을 보다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체계, 기민하고 신속한 방침의 결정과 대응이 가능한 구조, 구호적 수준이 아닌 보다 구체적인 대안제시가 가능한 전문역량의 구축이 가능한 조직, 제도정치영역에 대한 개입과 집단적 진출이 가능한 조직, 김영삼 정권의 제도언론매체를 통한 여론형성에 대응이 가능하도록 광범한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조직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김근태는 이론가이고 전략가다.
그동안 많은 단체를 이끌면서 익힌 체험에서 우러난 조직이론이다.
다음은 그가 구상하는 정치적 국민운동체의 성격과 역할과 임무다.

정치적 국민운동체의 성격

정치적 국민운동체의 위상은 공개, 비제도권에 위치해야 한다.
한편으로 사적 영역으로 퇴각하고 있는 대중의 관심을 공적(정치적) 영역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공개영역에 존재하고, 다른 한편 정치적 국민운동체는 그 자체가 독자정당이나 제도야당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위한 추진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제도권 영역에 존재하는 조직이다.

정치적 국민운동체는 대중조직의 주요 역량과 국민적 대표성을 갖는 인사, 재야 일선에서 운동해온 활동가, 진보적 지식인을 비롯한 전문가 역량, 양심적 종교인과 시민, 그리고 민주당내의 진보블록까지도 포함할수 있도록 그들을 확대해야 한다.

정치적 국민운동의 역할과 임무

첫째, 일반민주주의적 과제를 제기한다. ‘참여민주주의’를 통한 자주 민주 통일을 우리의 깃발로 내걸 필요가 있다.
둘째, 제반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통일적 방침을 신속히 수립해낸다.
셋째, 제도정치영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성공적이고 조직적인 진출을 준비함과 동시에 향후 실시될 각종 선거에서 민주대연합에 기초한 적절한 대응을 통해 지배세력의 집권 연장기도(내각제 개헌 등)를 막아내고 15대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도록 준비한다. 범국민적인 수권정당의 건설을 분명한 자기목표의 하나로 삼아야 한다.
넷째,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될 미래의 상에 대한 합리적 대안을 제시한다.
(주석 15)


주석
13> <월간 말>, 1993년 6월호.
14> 앞의 책, 56쪽.
15> 앞의 책,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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