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6 09:48 김삼웅

 

 

당시 조봉암 등은 흑도회에서 이탈하여 볼쉐비즘을 통한 민족해방의 길을 걷고, 박열 등 아나키스트들은 체포되어 길고 긴 옥고를 치루었다. 이들에 비해 함석헌은 지극히 온건한 지점에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이 무렵, 즉 일본 사회에 신사조의 물결이 넘실대고, 재일 유학생과 노동자들이 조국해방 투쟁의 노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희생을 감수할 때, 그는 비교적 안전지대에서 우찌무라의 무교회 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로 결성했습니다. 조선사람이라면 하숙도 잘 아니주려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던 어느 일요일, 나는 나보다 한 반 위인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 선생님(유영모-필자)에게서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이 동경고등사범에 다니면서 우찌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연구회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의 생애를 두고 또 한 차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3ㆍ1운동의 체험으로 얻게 된 민족주의 정신을 이으면서도 우파 계열의 독립운동가나, 일본 유학 중에 지켜보아 온 아나ㆍ불 계열의 좌파 독립운동가가 아닌 기독교사상을 통한 정신적ㆍ사상적 연마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우치무라를 만난 것은 오산에서 남강ㆍ도산ㆍ고당을 만난 것과 궤를 같이할만큼 생애에 두고 두고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훗카이도 출신인 우치무라는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때 신문기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일왕의 칙어를 비판하여 역적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교회 안의 형식과 위선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전도를 시작하면서 지식 수준이 높은 크리스찬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무런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해서 무교회란 이름이 붙었다.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성경연구회에 나갔다. 여기서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사귀고, 함께 한국에 무교회주의를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의 둥지가 된 <성서조선> 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치무라 모임에 다닐 때 한국 학생이 여섯 사람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모임 후에는 우리끼리 또 모여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몇 해 계속되다가 다들 졸업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할 때 여섯이 의결하고 동인지의 잡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고 했습니다.

여섯이 다 귀국한 후 첨에는 경비와 글을 분담해 가면서 내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전담하여 거의 개인잡지처럼 됐습니다.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면서 한 것이지만, 김(金)은 본업보다 부업이 더 크다고 하면서 전력을 기울여서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관헌에게 발행금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석 16) 여섯사람은 함석헌ㆍ김교신 외에 유석동ㆍ송두용ㆍ정상훈ㆍ양인성이다.

함석헌이 유학중에 일본사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저물고, 황도파 세력에 의한 치안유지법 제정, 노동자와 일본공산당 탄압, ‘대역사건’이라 하여 박열과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 사형선고(무기형으로 감형), 간토 대진재 와중에서 5천 명 이상의 조선인 학살과 일본 아나키스트ㆍ사회주의(공산주의) 지도자 암살(처형) 등이 자행되고 있었다.

함석헌은 학교 교육보다 우치무라를 통해 그리고 교우들과의 토론으로 폭 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김교신ㆍ송두용 등과는 평생 신앙의 동지가 되었다.

함석헌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그를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배울수록 생각의 범주가 넓어지고, 동서양의 명저를 통해 안목이 확대되었다. 우치무라는 두 개의 J를 내세울만큼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이었다. 하나의 j는 예수이고, 다른 하나의 j는 재핀 즉 일본이다.

나는 차차 의식적으로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첨에는 모임의 형식, 예배절차, 성경 해석하는 태도, 회비 받는 주머니의 모양까지도 우치무라 식을 본떴는데, 하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했는데, 후에 가서 생각해 보니 도무지 사람답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책을 참고하는 태도조차도 고쳤습니다. 덮어 놓고 참고하기를 그만두고, 나로서 성경 본문을 놓고 씨름을 하여서 일단 내 생각의 초점이 잡힌 후에야 그 책을 열기로 했습니다. 성경해석의 참맛을 조금 알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서기 시작한 것은 그 후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나면 “나는 모든 것이어서 우치무라가 표준이다”하는 사람보다는 나 자신이 선생에게 더 친근하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주석 17)

애를 더듬어 보면 지극히 자주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어릴 때부터 움트기 시작한 자주성과 창조성은 뒷날 독재권력과 싸우게 되는, 민주주의와 씨알사상으로 영글게 되었다. 뛰어넘어 자기의 주체성과 폭넓은 신앙체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평생 자주하는 정신으로 살았고, 민주주의 사회의 씨알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줄기차게 싸웠다.

동경고사를 다니는 동안 많은 배움의 인물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영국의 요절한(31세 때 선박 전복사고) 낭만파 시인 쉘리(1792~1822)다. 그의〈서풍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시에 담긴 저항정신을 높이 산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압박,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서풍의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다 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것은,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잊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몇 사람 아니되는 세 시대의 정신적 영웅의 한 사람이다. 도덕의 테두리에서 견주어 볼 때 그에게 비난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가 가진, 세 시대에 대해 날카롭고 억센 힘으로 나가려는 독수리 같은 정신에 비하면 아무것서도 아니다.
(주석 18)

오, 사나운 서풍아, 너 가을의 산 숨이야,
네가 볼 수 없이 올 때 그 앞에 몰리는 시든 잎새
술사에게 쫓기는 유령의 때와 같으니,(…)

예언의 나팔소리를 외치라, 오,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주석 19)

함석헌은 <서풍의 노래>의 마지막 구절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를 민족 해방의 메시지로 환치하면서 쉘리를 배우고, 간디를 읽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인도의 시인 타고르, 독일의 문호 괴테를 좋아한 것도 이 시기였다.

괴테는 많은 사상적 편력을 했다고 한다. 스웨덴붉에서 신비주의, 헤델에서 능동주의, 스피노자에서 단독사상, 자연에서 범신론 등으로….

이 점이 함 선생님과 통하는가? 그는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ㆍ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내촌(內村)에게서 성서, 타골ㆍ칼라일ㆍ카스키ㆍ노자ㆍ장자ㆍ바다받기타에서 최근의 데이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 (주20)


주석
15> <전집> 4, 215쪽.
16> 앞의 책, 218쪽.
17> 앞의 책, 218~219쪽.
18> 함석헌, <겨울이 만약 온다면>, <전집> 4, 111~112쪽.
19> 함석헌, <역사와 민족>, 233~238쪽, 제일출판사, 1964.
20> 안명우, <선생님께 드리는 글>, <씨알 인간 역사-함석헌선생 80순기념문집>, 5쪽, 한길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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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

012/12/15 08:00 김삼웅

 

 

 

오산학교 시절에 기독교 신앙이 더욱 깊었던 그에게 현장에서 지켜 본 간도 대진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이 때의 영적 체험은 섭리사관(攝理史觀)을 싹 틔워 그의 독특한 역사관, 역사철학이 되고, 곧 만나게 되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에 입문하게 된다.

함석헌에게 간도 대진재의 참화 그 자체도 맨 정신으로 감내하기 어려웠지만, 그 와중에 벌어진 일본인들의 야수성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같은 마을에 사는 기독교인, 불교인도 다르지 않았다. 이때 그는 일본의 국가주의의 패악을 뼈저리게 체득했다. 함석헌은 며칠 뒤 함덕일과 하숙집에서 반찬을 사러 가게에 갔다가 일본도와 대창을 든 일단의 무리에게 쫓기게 되었다. 다행히 안면이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 유치장에 수감되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함석헌은 뒷날 수차례 감옥과 유치장을 드나들면서 이를 일러 ‘인생대학’이라 불렀다. 그가 인생대학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간도 대진재 때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이 아닌 사범학교에 입학한 것도 간도 대진재의 영향이 작용하였다.

나는 하룻밤을 경찰서에 잡혀가서 새고 왔습니다. 그것이 나의 감옥길의 입학식이였습니다. 하룻밤 지내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제 일본 민족이란 어떤 민족인지 알았다기보다는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았고, 종교도 도덕도 어떤 것인지 눈앞에 똑바로 나타났습니다.

일생 동안 수차례 드나들게 된 감옥(형무소)의 첫 경험이었다. 마치 미국의 저항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845년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했다가 하룻동안 콩고드 감옥에 갇히게 되고, 이 경험이 <시민의 불복종>을 쓰게 되었듯이, 함석헌도 이 때의 경험이 조국해방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향하는 거대한 발걸음이 되었다.

함석헌은 1924년 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1부 갑조)에 들어갔다. 전공과 진로를 두고 여러 날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하여 보통선거법이 제정되고, 노동자계급의 지위향상과 노동조합 결성이 추진되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전파 되고, 아나키즘, 자유주의, 자본주의 등 각종 이데올로기가 번창하였다.

노동운동이 고조되면서 오스키 사카에 등의 아나키즘운동과 1920년 결성된 일본 사회주의동맹 등 볼세비즘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른바 ‘아나’ 대 ‘볼’의 논쟁이 치열해지고, 1925년 6월 일본공산당원 전원이 검거되는 ‘제1차 공산당사건’이 발생하였다. 간도 대진재의 와중에 아나키즘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지도자 상당수가 학살되거나 피검되었으나, 지식인ㆍ노동자 사회에서는 여전히 아나ㆍ볼 사상이 생명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번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정말 우리 민족을 건질 수 있느냐고. 정치란 것이 이럴진대, 지식인ㆍ상류사회란 것이 이럴진대, 그 악당을 물리치는 것은 종교ㆍ도덕으로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라를 해방시키려면 혁명밖에는 길이 없고, 혁명을 한다면 사회주의혁명 이외에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이 썩어가는 것을 보면 혁명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신앙을 버리고 도덕이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은 전혀 무시해 버리는 사회주의에 들어갈 수는 차마 없었습니다.

20대 초반의 함석헌에게 1920년대 초기 일본 사상계와 종교풍토는 많은 사상적ㆍ정신적 갈등을 겪게 하였다. 조선 유학생들과 노동자 대부분이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이를 조국해방 투쟁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반면에 친일계열의 부르조아 청년ㆍ학생들은 일본의 선진문물을 배워 식민지 조국의 관리가 되고자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생 거의 대부분이 그 소위 신사조에 휩쓸려서 사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나 자신의 경우로만 보아도 그러한 영향이 확실했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일본의 현실을 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 사상적인 모든 움직임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흥미를 가지고 덤벼든 것은 아나키즘이었다. 일본 청년들과 같이 휩쓸려 다녔지만 박열ㆍ신용우ㆍ방한상 등 맹장들과 흑도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해 우리들만이 사상계에 있어서 최첨단을 걷는 선구자인 것처럼 뽐내고 우쭐대던 기억이 난다.

함석헌은 일본에서도 명문이라는 동경고사에서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교사를 훈련하는 양성소이지 학문을 하는 학교가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났고, 일본식 국가주의 정신 교육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일본의 수재들이 모이는 이 학교의 역사교육 학과의 사비생(私費生)이 되어 그들과 경쟁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학비와 하숙비는 오산학교의 보조비와 고국에서 아버지가 한의사로 어렵게 마련한 돈을 보내주어 어느 정도 꾸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 학생들과 역사연구를 목표로 하는 함석헌의 공부의 방향이 같을 리 없었다. 함석헌은 학교 공부보다 동서양의 다양한 고전과 역사서적을 읽고 현대사상의 관련 서적도 탐독하였다. 타고르의 <기탈잘리>를 읽은 것도 이때였다. 이를 계기로 간디의 책을 읽고 그에게 매료되었다.

동경고사 시절 성적표에 따르면 수신, 교육학, 역사를 위주로 한 갑조(甲組)의 교과목 가운데 법제와 경제는 1학년 때만, 교육학은 3개년, 국사(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는 4개년간 수강했는데, 특히 1,2학년 때는 사범학교 교육의 특성상 수신ㆍ교육학ㆍ국어ㆍ한문 등이 많은 시간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함석헌은 졸업하면서 당시 규정에 따라 사범학교 교원면허증, 보통중학교 교원면허증, 고등여학교 면허증 등 3종을 모두 수여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함석헌의 동경고사 졸업생 중에는 김교신 외에 시인 조병화, 문학평론가 백철, 친일 언론인 서춘, 전 대통령 최규하, 북한의 역사학자 문석준 등이 손꼽힌다.

함석헌은 동경고사에 들어간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일왕의 충용스러운 ‘교육병사’들을 양성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4년을 묵묵히 보내면서도 일본인 동기생들을 사귀지 않았고, 국체명징의 일본 교육정신에 반발하여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었다. 또 세계적으로 알려진 저항 인물들에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는 뒷날 많은 글을 쏟아냈지만 동경고사 시절에 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없었을 것이고, 무의미한 기간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주석
11>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노명식, 앞의 책, 147~148쪽.
12> <전집> 4, 215쪽.
13>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희망>, 1957년 2ㆍ3ㆍ5호 연재.
14> 조광, <1930년대 함석헌의 역사인식과 한국사 이해>, <한국사상 사학 2>, 2003. 이치석, 앞의 책, 151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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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

012/12/14 08:00 김삼웅

 

 

1923년 관동재진재 학살된 조선인들의 숫자는 6천 6백여 명이나 된다. 이런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 없이 어찌 제대로 된 역사를 말하겠는가? ⓒ 자료사진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1923년 3월 하순 일본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당시 조선에는 대학이 없었다. 일제는 우민화 정책으로 식민지 조선에 대학을 세우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미국이나 유럽은 너무 멀고 극소수의 친일파 자녀가 아니고는 유학비가 만만치 않았고, 중국에서는 아직 근대적인 대학이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다. 집에서는 유학비를 댈 여력이 없어서 오산학교의 도움을 받았다.

함석헌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끼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한 남강의 둘째아들 이택호의 도움으로 간다(神田)에 있는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입학자격이 필요없는 한국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거치는 기본코스처럼 되었다. 일왕 부자를 처단하려든 박열, 2ㆍ8독립운동을 주도한 김상덕 등도 세이소쿠에서 영어를 배웠다.

함석헌은 일본으로 가면서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문학, 영문학, 미술 등 취미가 있는 분야를 하나씩 검토하고 삭제해 나갔다. 3ㆍ1운동 이후 국내에서 열기를 띤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고심 끝에 교육을 전공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범학교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였다.

하지만 도쿄에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대지진을 맞게 되었다. 1923년 9월 1일 유지마에 사는 함덕일 형제를 만나러 갔다가 지진을 겪었다. 유지마는 함석은이 메이지(明治)대학을 다닐 때 하숙하던 곳으로, 평고시절의 하숙집 아들 함덕일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간토 지방의 진도 7ㆍ9라는 대지진으로 57만 가구가 파괴되고 사망자가 10만 여 명, 피해 가옥이 45만 채, 건물 피해로 압사한 인명이 2천여 명에 이르렀다. 큰 피해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한편,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인이 폭등을 일으켜 일본인을 죽이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폭등을 선동한다”는 따위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조선인의 폭등을 단속하기 위해” 조선인을 수용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일본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조선인 폭동 소문에 격분한 일본인 자경단과 군ㆍ경찰에 의해 6천여 명의 조선인과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무차별 학살되었다. 그 와중에 박열 등 불령단 소속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일왕부자 폭살 사건’의 혐의로 구속되고, 일본 아나키스트운동 지도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英)가 살해되었다.

함석헌은 용케 살아남았다. 지진이 일어난 반대쪽에 있다가 참변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친구의 집에서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지진으로 황급히 층계에서 내려오자, 집이 무너지고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처참한 자연의 재앙과 인간의 아비규환을 현장에서 목견하였다.

23세의 함석헌을 대진재의 한복판에 있게 한 섭리는, 그로 하여금 인간이란 무엇인가, 일본인은 어떤 민족이며 한국인은 또 무엇이며, 국가란 무엇인가, 종교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다 무엇인가를 그 똥구멍까지 철저히 파헤쳐 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3ㆍ1운동이 아니었더라면 자기는 사람질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함 선생은 만일 대지진의 한복판에서 그 무서운 광경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돈을 주고 사려 해도 살 수 없고, 지혜로 찾아내려 해도 찾아낼 수 없는,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면 기회요 계시라면 계시였던” 그 기회와 계시를 놓칠 뻔 했는데, 자기를 그곳에 있게 하여 그 끔찍한 경험을 하게 하고 그 속에서도 아니 죽고 살아남아 오늘까지 한 것은, 그 광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전하라고 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의 그 광경을 말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말로 전하라고 해서 죽지 않고 살아남게 했는데 “그걸 말로 다 할 수 없다니! 부끄럽고 슬픈 일”이라고 탄식하면서, 그 광경은 사람의 필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고, 그저 “장엄이라고 할까 처참이라 할까 처절이라 할까, 지옥ㆍ연옥이 있다면 그런 곳일까”라고 한다. (주석 10)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함석헌은 이튿날 자기 하숙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운명의 신비를 깨치게 되었다. 자신들이 시노비즈이케를 떠난 날 밤에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 거기에 있던 수 만 명이 불에 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주석
10>  노명식, 앞의 책,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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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3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뒷날 두고두고 자기는 오산의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람구실을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남강ㆍ도산ㆍ고당은 민족적 지도자인 한편 오산학교에 깊이 관계하여 오산을 민족ㆍ정신교육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함석헌의 <오산학교> 사랑을 들어보자.

칼과 활로 하는 혁명이 껍데기의 혁명이라면, 속알의 혁명은 교회와 학교를 통해 하는 정신의 운동이다. 홍경래가 들다가 못 들고 만 민중혁명의 정말 큰 불은 그가 간 지 한 세기 후에 남강 이승훈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고당 조만식 선생에 의해 일으켜졌다.

남강 선생은 홍경래가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품고 죽던 그 정주성에, 양반의 사냥개인 관군이 혁명에 나섰던 민중을 단으로 묶어세우고 무찔러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던 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 자랐을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도산 선생은 그 홍경래가 났던 용강에서 났고, 조만식 선생은 그가 성공했더라면 필시 새 나라를 거기에 배반했을 평양에서 자랐다.

그들은 홍경래처럼 칼과 활을 들지는 않았다. 그처럼 술책을 쓰고 선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붉은 가슴을 가지고 민중의 붉은 가슴에 대했다. 그렇지만 그 운동은 홍경래의 혁명으로는 비할 수 없는 맹렬한 형세로 퍼져나갔다.
(주석 8)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이들의 정신적 세례를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여기서 ‘한글’을 처음 배웠다. 우리 글을 배워야 할 시기에 나라가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어의 상용이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 사진은 다석 사상연구회에서.

오산학교에는 3인의 민족지도자 외에도 첫 교사였던 독립운동가 여준(呂準), 체육교사 서진순(徐進淳), 뒷날 친일파로 변신한 이광수, 그리고 함석헌의 또 다른 정신적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가 있었다.

함석헌이 오산에서 유영모를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다.
다석은 그때 서른두 살, 투옥된 남강의 부탁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노자>, <장자>ㆍ<사서오경> 등 중국 고전은 물론 기독교 신앙에도 정통하여 스물한 살의 함석헌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일본 동경물리학교를 갓 졸업한 개명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유영모는 조선총독부가 교장 취임을 불허하여 1922년 4월 서울로 돌아가고 말았다.

함석헌은 1년 밖에 안 되는 기간의 사제관계였으나 평생 스승으로 모셨고, 그로부터 폭넓은 중국 고전과 속 깊은 기독교신앙을 배우게 되었다. 함석헌은 유영모 선생 밑에서 오산학교 교가를 부르면서 2년여 동안 혼과 신체를 단련하였다.

백두산서 자란 범은 백두호라고
범 중에 범으로 울리나리라
우리들은 오산에서 자라났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로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유영모 교장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를 통해 일본 무교회주의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와 기독교의 지도자 야마무로 군페이를 알게 되었다.

또 스코틀랜드 출신 토머스 칼라일을 배웠다. 그의 시 <오늘>은 함석헌이 나이가 많아질때까지 좋아했다.

오 늘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자 말지어다

영원에서 이 날은 나왔고
영원으로 밤이면 돌아간다

이날을 미리 본 눈이 없고
보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지 말지어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여러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생애를 두고 많은 영향을 받는 책을 읽었다.
HㆍG, 웰즈의 <세계사>, 토머스 칼라일의 <의상철학>, 죠지 폭스의 <일지>, PㆍB, 쉘리의 <시 모음> 등이다. 특히 웰즈의 <세계사>의 영향이 컸다.

웰즈의 저서는 감수성이 민감한 청년 함석헌에게 평화주의의 필요성, 세계주의에 입각한 역사관 및 종교관 형성에 근본적 영향을 심어주었다. 또한 웰즈의 <세계사>에 대한 감동 때문에 함석헌은 역사, 진화론, 과학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훗날 함석헌이 역사라는 학문을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그 스스로 ‘역사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에도 웰즈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석 9)

함석헌은 회고한다. 오산시절을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운동, 문화운동, 신앙운동의 산불도가니였습니다. 그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 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 교육이었습니다.”


주석
8>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 4, 157쪽.
9> 김성수, <함석헌 평전>, 104~105쪽, 삼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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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2 08:00 김삼웅

 

 

학교를 자퇴한 뒤 2년 동안은 함석헌에게 고뇌와 방황의 시기였다.

“공부를 중단하고 두 해 동안 번민할 때 포플러에 기대고 서는 밤도 많았고 숲 속으로 바다로 지향없이 헤매던 날도 많았지만, 무언지 아직 꼬집어 문제를 삼지 못했습니다.” (주석 5) 란 기록에서 잘 나타난다.

고향 마을에는 온갖 신문이 나돌았다. 만세 부르다가 학교에서 쫓겨나 맨날 산에 올라 창가만 부른다. 심지어 함석헌이 미쳤다는 등의 박소문이었다. 함석헌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줄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심중을 꿰뚫고 다시 공부를 하도록 일깨웠다.

1921년 늦은 봄이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정처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이곳저곳 학교를 돌며 입학의 길을 찾았으나 이미 신학기 개학날이 지나서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다시 귀향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거리에서 집안의 형이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났다. 그는 서울 배제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고향마을에 기독교를 맨 먼저 전도한 사람이다. 그는 대한청년단 재정부장과 대외문서작성 관계를 맡는 독립운동가였다. 어렸을 적부터 함석헌을 무척 아껴왔다.

함석규는 함석헌을 정주의 오산(五山)학교로 가라고 권했다.
그래서 오산으로 내려가 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다. 그때까지도 함석헌은 오산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이 학교의 존재도 몰랐다. 남 같으면 대학을 졸업할 나이에 오산중학 3학년생이 되었다. 명문이라는 관립 평고생이 무명의 오산에 가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의 오산학교 입학은 또 한 차례 인생의 길을 크게 바꾼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였다. 3ㆍ1운동이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는 계기였다면, 오산입학은 새로운 얼ㆍ혼ㆍ알의 탄생이었다. 함석헌은 오산에서 민족정신의 수련을 닦게 되었다.

오산은 뒷날 함석헌이 풀이한대로 ‘다섯 뫼(五山)’의 지형으로, 익주의 고성(古城)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연향산과 해성산, 서쪽에 제석산, 서남쪽에 천주산, 남쪽에 남산봉이 둘러쳐진 곳이다. 여기에 남강 이승훈이 1907년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세웠다.

사업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된 남강은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교육진흥론>이란 강연을 듣고 난 뒤 개인의 영달보다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결심 아래 금주ㆍ금연과 단발을 결행하고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오산으로 돌아와 기존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에 이어 오산학교를 세웠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농가집 사랑방이나 건너방에 서로 끼어 욱적거리니 몸이 성하고 장질부사가 나고 더럽기 한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수준 이하의 교실이었다. 엉터리 교사도 더러 있었다.

학생도 합탕이었다. 전부터 있는 학생은 몇이 안 되고, 모두 새로 모여든 사람들인데 평고 퇴학자가 있지, 신성(학교)에서 닦아회(동맹휴교) 하고 온 자가 있지, 서른 된 수염난 이가 있지, 교회 장로 하는 사람이 있지, 훈장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본 백화파(白樺派) 문학을 읽고 문사연하는 치가 있지. (주석 6)

본래의 학교 건물은 3ㆍ1운동 때 일본 헌병대가 ‘민족주의의 소굴’이라 하여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한 해 뒤 독지가 김기흥이 거금을 내놔 45평의 세 칸짜리 임시교사를 지었다. 함석헌이 입학했을 때는 이 교사였다. 설립자 남강은 민족대표 33인의 기독교 대표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일본 관헌들은 눈에 불을 켜고 교사와 학생들을 감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누구 하나 겁먹거나 불평하지 않고, 민족의식으로 똘똘 뭉쳐 열심히 공부하였다. 함석헌에게 이런 모습이 경이로웠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을 ‘만났’다. 남강 이승훈ㆍ도산 안창호ㆍ고당 조만식이다. 이들은 당대의 민족지도자이고 인격자이며 교육자, 신앙인이었다.

함 선생이 오산학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 남강은 3ㆍ1운동 후 옥중에 있었다. 함 선생이 남강과 직접 접촉한 기간은 오산의 교사로 취임한 1928년 봄부터 남강이 급사한 1930년 5월까지 2년밖에 안 된다. 그리고 함 선생이 도산을 만나 뵌 것은 잠깐잠깐 두 번 뿐이라고 한다. 고당도 3ㆍ1운동 전후 두 번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나 함 선생이 오산에 편입했을 때는 이미 교장으로 있지 않았다. 함 선생은 고당에게 배운 일이 없다. 이처럼 세 분은 함 선생이 직접 글을 배운 선생님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맘속으로 참 스승으로 우러러 모신 이가 이 세분이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주석 7)


주석
5>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씨알의 소리>, 1970년 4월호.
6>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4권, 163쪽.
7> 노명식, 앞의 책,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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