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

012/12/1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14년 덕일학교 4년을 졸업하고 양시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병탄하면서 식민지 교육의 친일ㆍ우민화를 목적으로 <조선교육령>을 제정하고 교육제도와 내용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함석헌은 5학년에 편입이 가능했으나 일본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4학년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양시공립보통학교로 편입했을 때의 일인데, 실제로 5학년에 들어갈 학력인데도 단지 “묻는 말에 일본말로 대답 못한다”는 이유로 4학년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왜 일본말로 말해야 한단 말인가? 소년 함석헌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일본어를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한다는 학교규칙 때문이었다. (주석 9)

양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장래 의사가 될 꿈을 안고 1916년 4월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평고)에 입학하였다. 당시에도 평양은 큰 도시였다. 평안도 지역의 물산이 집결하고, 오래 전부터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져 대륙문화가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함석헌은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 경창리 5번지에 하숙을 정하였다.

열여섯에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물아래 촌바우가 금수강산을 본 것이 이것이 처음이었다. 소년 시절의 3년을 그 속에서 자란 것은 일생에 잊지 못할 행복이다. 평양은 이른바-

긴 성 한 편에 굼실굼실 흐르는 물
한 벌판 동편 끝에 올망졸망 섰는 뫼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그 장관은 넓은 들과 그 복판을 흐르는 대동강이었다. 거기 중심이 되어 호령하는 자리에서 주산(主山)이 된 것이 모란봉이다. 모란봉이 크기 조막만한 데 지나지 않지만, 한번 거기 올라서면 사방 몇 백리의 산천이 지호간(指呼間)에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제1강산이다.
(주석 10)

함석헌의 평양 생활은 평범했다. 식민지 초기여서 일경의 감시가 삼엄하고, 평양도 하루가 다르게 왜색으로 변해갔다.

나는 어느 점으로 보나 학교에서 두드러진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 성적으로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조그만 시골구석에서는 재주 있단 말도 들었는지 모르나 평안 남북, 황해 일대의 수재가 다 모인 곳엘 가면 자연 그렇게 되기도 쉽지 않고 또 웬일인지 소위 공부벌레 소리 듣는 것은 속되어 보여서 머리 싸매는 공부는 한 일이 없다. 그렇다고 이른바 호걸 노릇을 했나 하면 물론 아니다. 맘은 타고난 약질이어서 바닷가에 났으면서도 헤엄칠 줄을 모르고 체조시간이 되면 철봉하잘까봐 그것만 걱정이었다. (주석 11)

평고 시절(1917년 8월)에 함석헌은 부모가 정해 준 고향 이웃마을 처녀 황득순과 결혼하였다. 17살, 아내는 한 살 아래였다. 효심이 두터웠던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그대로 맞았다.

오래지 않아서 나는 결혼을 너무 이르게 했다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지식청년 사이에 유행했던 이혼 같은 것은 그때도, 그 후도 생각해 본 일 조차 없습니다. 아내는 전연 교육을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 내가 졸업을 하고 돌아오기 전에 그에 대한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듯합니다.

그때 두 분이 교회에 나가시며 며느리까지 데리고 나가셨고, 아버지 어머니가 손수 며느리 교육하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리해서 어머니는 해방 직전까지 그 지방 여성계에서는 지도적인 인물이 되신 것입니다.
(주석 12)


주석
9> 이치석, 앞의 책, 83쪽.
10>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사상계>, 1951년 4월호.
11> 앞의 책.
12> 함석헌, <나의 어머니>, 노명식, <함석헌 다시읽기>,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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