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30 08:00 김삼웅

 

 

양복차림의 함석헌 선생(50년대)

함석헌은 기독교의 교파싸움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비판한다.

장로회가 2분(二分)이 되고 감리회가 2분이 되고 한 교회당 안에서 두 파가 대립해 예배를 드리고 경관을 출동시키고 교회당 차압을 하고, 천주교는 우리는 그런 싸움 아니한다 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마치 국민의 불평을 식민지전으로 전가시켜 겨우 통일을 유지해 가는 제국주의 국가의 일과 마찬가지로 다른 교파는 다 열교(裂敎)라는 것을 밤낮 선전해서만 유지되어가는 통일이다. 개신파에서 개종해 온 것을 선전 광고하는 것은 그것이 교파심 아니고 무엇인가?

종파 싸움은 기독교 저희끼리의 싸움을 하는 것은 외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근본으로 하면 일체 현세적인 것을 상대로 싸우잔 것인데 그 근본정신이 살아 있는 한 그 싸움은 그칠 날이 없다. 그런데 외적이 없다는 것은 타협한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타협을 한 것은 속았기 때문이다. 교의 파쟁(派爭)이 일본시대에는 별로 없었다. 공산침략이 심할 때는 천주교와 개신파도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대적이 좀 멀어질 때 종파싸움은 맹렬히 일어났다. 그것이 무엇인가? 대적을 전연 밖에서만 보았고 안에 보지 못한 것이다. 속았다는 것은 그것이다.

함석헌은 당시에 급속히 늘어나는 교회당의 문제에 대해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한국기독교는 이승만ㆍ김영삼ㆍ이명박 장로 3인을 대통령으로 ‘배출’했다.

최근에 와서 오는 현상으로 교회당이 날마다 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현상일까? 먼저 교회당은 무엇으로 그처럼 늘어갈까? 여러 말할 것 없이 돈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도 이때껏 어디서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보냈다는 것은 못들었고 인간이 지은 것들인데 인간이 지었다면 어디서 났거나 돈 있어서 된 것이지 건축자가 그저 지어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해방 후 날로 더 잘못되어가는 경제에 교회에는 어떻게 그런 돈이 있을까?

교회 경영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무슨 힘으로 되나? 소위 장로급이 중심이 되어 가는 것 아닌가? 장로란 결코 신앙의 계급이 아니다. 돈의 계급이지. 돈 있는 사람, 교회경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장로로 되도록 하는 것이오. 지금 교파쟁이 대부분 그 장로급을 중심으로 하고 하는 일 아닌가? 그럼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맘몬의 교회인가? 기독교인은 속죄를 받은 결과 이런 것도 죄로 아니 느끼리만큼 강철 심장이 되는가?

함석헌은 이 논설의 말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교회의 증상은 고혈압이라 진단할 수밖에 없다. 뚱뚱하고 혈색도 좋고 손발이 뜨끈뜨끈한 듯하나 그것이 정말 건강일까? 일찍이 노쇠하는 경향 아닌가? 그러기에 이렇게 혼란해 가는 사회를 보고도 아무 용기를 내지 못한다. (…)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가 죽지 않았다가 변화하려면 산 공기와 일광 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같이 중압하는 교회당의 무게 밑에서도 생명의 씨가 살려면 역사적 대세의 분위기를 마셔야 할 것이다.

<사상계> 주간 안병욱의 회상이다.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은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글이다. 이 글 때문에 <사상계>가 일약 수천 부가 증가했다. 저마다 다투어서 사 읽었고,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읽은 뒤에 소감도 여러가지였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신랄한 경고요, 또 선생님 자신의 기독교관을 적은 것이다. 무교회주의자인 함 선생은 이 글에서 프로테스탄트도 공격했고 가톨릭도 내리쳤다. 기독교인들은 분개했고, 비 기독교인들은 쾌재를 외쳤다.
(주석 24)

장준하는 이 글이 발표된 뒤 안병욱과 함께 신촌 전셋집으로 함석헌을 찾아가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대현동에서 내가 만난 함 선생님은 ‘퍽 수줍어하는 잘생긴 노인’이라는 인상이다. 그렇게 겸허한 노인이 그렇게 격렬하고 날카롭고 무서운 글을 쓰시나 하는 놀라움을 곁들게 하였다. 별로 말씀은 아니 하시고 곁에서 안병욱 형이 이것저것 묻는 말에도, “글쎄, 그럴까, 하기는” 등 비교적 모호한 말 한 두 마디씩을 남기실 뿐이었다. 내가 <사상계>의 발간 취지를 대강 말씀드리고 나서, 앞으로는 <사상계>를 선생님이 직접 하시는 잡지라고 생각하시고 계속하여 글을 써 주십사 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고 “글쎄요”라는 말씀만 남기실 뿐이었다. (주석 25)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은 지지와 성원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반대와 폄훼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은 천주교 명동성당 신부 윤형중이었다. 그는 <신세계> 9월호에 함석헌이 “일부 기독교도의 비행이나 경거망동을 기독교 전체에 뒤집어씌우면서 침소봉대한다고 격렬하게 반박했다. 두 사람은 얼마 뒤 본격적인 논쟁을 벌인다.


주석
24> 안병욱, <옆에서 지켜본 사상계 12년>, <사상계>, 1965년 4월호, 265쪽.
25> 장준하, 앞의 글,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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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환도 후에 <말씀>이라는 신앙잡지에 많은 글을 썼다.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 <새 시대의 종교>, <말씀살이(시)> 등이다.
그리고 <편지>란 잡지에도 <영원히 불어 오고 가는 바람소리>, <맘의 나라>, <속죄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버리는 것이냐>, <간디의 죽음> 등을 썼다. 기독교 관련 잡지여서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함석헌이 일반 국민, 시민을 상대로 한 글쓰기는 <사상계> 1956년 1월호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시작으로 한다. 이 글은 무명의 그를 일약 한국사회의 대논객으로 부각시켰다. 당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마각이 드러나고 있던 시점이다. 1954년 5.20 제3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금권ㆍ폭력선거로 승리한 것을 계기로 11월에는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을 감행하여 이승만의 3선의 길을 텄다.

1955년 9월의 <대구매일신문>의 필화사건은 언론탄압의 전초였다.
이승만은 1956년 5월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종교ㆍ문화ㆍ예술 단체를 어용화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특히 기독교계의 어용ㆍ부패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함석헌의 대사회 비판은 기독교계를 향했다. 그만큼 사랑하고 아낀 까닭에 아프게 때렸다. 그는 그동안 대사회 발언을 삼가고 있었다. 천성과 성품이 누구를 욕하거나 나무라지 못한 까닭이다.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비판에 나선 것은 역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였을 것이다.
 

1959.9 사상계 사무실에서 시드니후크 박사, 장준하와 함께



1950~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잡지였던 <사상계>는 지식인, 대학생의 필독서가 되고, 마치 지성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사상계>가 그만큼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 출신 사장 장준하의 잡지에 대한 열정과 정론정신이 바탕이 되었지만, 함석헌의 날카로우면서도 천의무봉한 글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사상계> 1956년 1월호는 김형석 연세대 교수의 <인간의학과 현대철학>, 김성식 고대교수의 <대학과 세계정신>, 이숭녕 서울대 교수의 <나의 독서관> 등 꽤 읽을거리가 있는 편집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번 호에서 잡지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게 되고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함석헌의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당시 함석헌은 무명인이었다. 서울 신촌에서 양계장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퀘이커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사상계>의 주간이던 안병욱이 함석헌의 인물됨을 듣고 장준하 사장에게 천거하여 글을 쓰게 한 것이 <한국 기독교는…>이었다. 이 글이 시쳇말로 히트를 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함석헌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상계>에 계속하여 비중 있는 글을 썼다. 그리고 ‘한국의 간디’라 불릴만큼 한국지성계의 큰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장준하와 만나면서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의 혈맹 관계가 되었다. 장준하에게 함석헌은 스승이고 동지였다.

안병욱 주간은 뒷날 회고에서 자신이 잡지를 만들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함석헌 선생과 류달영 교수를 ‘발굴’한 일을 들었다. 그러면서 잡지 편집장의 큰 책무는 좋은 글을 받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좋은 필자를 발굴하는 일이라고 들었다. (주석 23)

안병욱에 의해 ‘발굴’된 함석헌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 철학자, 반독재 인권운동가, 언론인, 역사연구가 등으로 불리면서 군사독재와 치열하게 싸운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몇 차례 추천되었으며 1970년대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씨알사상’을 정립하였다. 그 첫 출발이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평론이다.

이 글은 <사상계> 126쪽에서부터 140쪽까지, 200자 원고지 100매 분량의 평론이다.
원고 말미의 필자 소개는 ‘기독교인’이라고 명기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한국기독교를 비판한 셈이다. 한국기독교를 공개적으로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한 이는 함석헌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독교계의 반응이 뜨거웠고, 그를 비난하는 소리도 높았다. 친여 성향으로 갓 창간한 월간 <세대>는 창간 2호인 7월호에 윤성범 교수의 <요한은 어디서 외쳤는가(함석헌론)>을 실었다. 윤성범은 함석헌을 선동가ㆍ이단자로 매도하였다.

함석헌의 첫 대사회 발언, 대종교 비판 발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여기 기독교라 하는 것은 천주교나 기독교의 여러 파를 구별할 것 없이 다 한데 넣은 ‘교회’를 두고 한 말이다.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말은 해방 후 10년 동안 그 교회가 걸어 온 길을 주로 역사적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고 하는 말이다.”라고, 기독교 신구교를 싸잡아 비판하는 글임을 밝혔다. 그는 비판을 거부해 온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어느 종교도 다 신성불가침을 주장한다.
‘비판’이라 할 때 교회는 본능적으로 수염을 끄들리는 봉건 귀족의 기분 같은 생각을 가진다. 사실 교회는 봉건제도의 뱃 속에서 설러져 나온 것이고, 아직도 그 젖 냄새를 못 버린 점이 많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지만, 해하려는 신성불가침은 없다. 비판 받아야 한다. 이젠 인간은 무반성 신뢰만이 신앙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어떤 종교경전도 그는 비판 없이 읽으려 하지는 않는다. 반성을 아니할 수가 없다. 인간이기 때문에.

함석헌이 대사회발언의 첫 목표를 한국교회에 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 우리나라에 종교가 있다면 기독교다. 즉 국민의 양심 위에 결정적인 권위를 가지는 진리의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세계관 인생관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기독교가 내부치는 교리와 실제가 다르고, 겉으로 뵈는 것과 속과가 같지 않은 듯 하고, 살았나 죽었나 의심이 나게하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고신도(古神道)나 화랑도 모양으로 역사적 사회적으로 아주 완전히 죽어버렸다면 문제없다. 그것은 식은 재다. 삼국시대의 불교나 이조시대의 유교 모양으로 인심 위에 산작용을 하고 있다면 또 문제없다. 그것은 산 불길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미지근한 재요 시들어가는 나무다. 지금 이 사회가 정신적 혼란에 빠져 구원을 위해 두 손을 내미는데, 교회는 왜 아무런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지 않을까?

당시 한국 기독교는 전후의 폐허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 아래서 침묵하거나 ‘국부 이승만’을 떠받들며 교세 키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먼저 한국종교사상사의 뿌리를 소개한다.

기독교가 본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들어 올 때는 정복적인 생명력을 가졌었다. 우리나라는 오랜 동안 사상으로 하면 고신도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과 불교적인 것이 합하여 혼연일체를 이루어 왔다. 물론 처음에는 고신도가 국민생활을 지도해왔을 것이고, 대륙으로부터 유교문화가 들어오자 도덕에 관한 한은 대체로 유교적인 것으로 대치가 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사회생활의 실제 도덕에서는 높은 것이었으나, 세계관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세한 설명을 주는 것이 없음으로 고대의 고신도적인 것으로 내려오다가 불교가 당시의 중국에서 성했던 물질적ㆍ예술적인 문화를 타고 올 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대부분 불교적인 것으로 돼 버렸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정신계를 말하면 상반신 세계관적인데 관한 한 불교적 고신도적이었고, 하반신 도덕적인데 관한한 유교적이었다.

함석헌은 이어서 해방과 6ㆍ25 뒤 한국 기독교의 타락상을 분석한다.

그런데 38선이 갈라진 것을 당하고 교회는 어떻게 했나? 처음 흥분이 식고 미ㆍ소 양군의 주둔이라는 어쩔 수 없는 비애를 먹고는 그 다음 일어난 것은 예언이었다. 그래 저마다 예언이다. 3년 후에 통일이 된다, 5년 후에 된다, 어느 해는 예수가 재림하고 소련이 망한다, 이런 것이 유행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이 역사적 문제를 전연 우연한 것으로 안 심리다. 말은 우연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니 계획이니 예언이니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현실의 문구로 해석해 놓으면 우연이란 말이다.

이것은 그들이 신앙이 형식적, 관념적이고 실천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신계의 일과 현실적인 일을 혼동하여 하늘나라의 일을 곧 지상에서 보려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는 역사에 대해 도덕적인 노력의 입장에 서지 않고 전연 자연현상에 대하는 모양으로 기다려서 결과를 얻으려는 심리에 빠진다. 고로 예언을 하게 된다. 정감록식으로 운명을 기다리는 심리가 암시되어 가지고 나온 특수 정신적 현상이 곧 예언이다. 그런 고로 몇 번 해보아도 들어맞지 않는 것을 안 요사이는 전연 그런 것은 죄다. 구약에 많이 있는 예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이 윤리적인 것이다. 국민의 갈 길을 지시해 힘쓰게 하자는 것이지 요행을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주석
23>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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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8 08:00 김삼웅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함석헌은 대구를 거쳐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한때 제주도에서 머물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성서집회를 계속하면서 피난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식민지를 함께 겪고 해방된 한민족이 동족상쟁을 하게 된 까닭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뒷날 이때의 생각을 다듬어 6ㆍ25전쟁에 대해 비중 있는 글을 썼다.

6ㆍ25 싸움의 직접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 둘째 번 세계 전쟁을 마치려 하면서 러키산의 독수리와 북빙양의 곰이 그 미끼를 나누려 할 때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 수 없이 찢어진 금이 이 파리한 염소 같은 우리나라의 허리 동강이인 38선이다. 피가 하나요, 조상이 하나요, 말이 하나요, 풍속ㆍ도덕이 하나요, 이날것 역사가 하나요, 이해 운명이 한 가지인 우리로서는 갈라질 아무런 터무니도 없다. 그러므로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 (주석 16)

함석헌은 6·25전쟁의 원인으로 미ㆍ소 양대 블록의 세력다툼임을 들었다. 이어서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점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아무리 싸움은 다른 놈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등을 거기 내놓았던가? 왜 남의 미끼가 됐던가? 거기는 우리 속에서 찾을 까닭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이다.” (주석 17)

함석헌은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6ㆍ25 전쟁의 의미를 세계사적, 민족사적, 역사적 차원에서 해석한다.

이제 이 금수강산은 세계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중국이 먹었다 토하고, 만주가 먹었다 토하고, 영악한 일본이 먹었다가는 아니 토하고는 못 견딘 나라, 흉악한 러시아가 침을 흘리면서도 못 먹었던 나라, 이 나라에 중국이 도로 나오고, 만주가 또 오고, 러시아가 다시 오고, 첨으로 문을 열어 주었던 미국이 또 왔다. 그 뿐 아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그 사람 중의 잘난 것을 고르고 그 기계의 날카로운 것을 택하여 이 나라 강산을 두루 밟으며 3년을 어우러져 싸워, 붉은 피를 붓고 한데 엎어져 묻히었다. 이 나라는 인류의 제단, 유엔의 제단, 민족의 연합의 제단이 되었다. (주석 18)

부산에서 힘든 피난생활 중인 1952년 그는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 몇 동지들 앞에서 <흰 손>이라는 장편시를 낭송하였다. 이 시는 사실상 그의 ‘신앙고백’을 뜻하는 것이었다.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 살고 싶더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닥침이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여봐라
예-이-
너 이 흰 손 가진 우상교도놈들을 끌어 내며
거룩한 내 집을 더럽히게 말라
믿어! 너희가 믿었느냐? 내 뜻대로 살았느냐?
나는 영원히 일하는 영, 사는 영
흰손 가진 너희를 나는 모른다.
(주석 19)

함석헌은 이를 시점으로 무교회주의와 결별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상 그것(흰 손)은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이날껏 정통적으로 인정해 오는 무교회에서도 그것은 그대로 가르치는 십자가의 공로로 죄 대속함을 받는다는 믿기만 하면 된 다는 사상에 반대하고 그러기 위하여는 인격의 자주성을 살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20년대 내 마음 속에 싸우고 찾아온 결과였다.” (주석 20)고 밝혔다.

함석헌은 무교회에 머물지 않게 된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다. 둘째번 이유를 소개한다. 여기에 의미가 다 포함된 듯 해서다.

우리나라 모양이 이미 누가 열어놓은 길을 그저 따라만 가 가지고 되기에는 너무도 독특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만이 당하는, 우리만이 풀어야 하는 문제를 당하고 있다. 백 년을 가다가도, 천 년을 가다가도, 내가, 우리가 하게 생겼지, 어디서 다 된 것을 빌어다 써가지고 될 수는 없다. 물건은 빌릴수가 있지만 정신이야, 믿음이야, 빌 수 없지 않은가? 자리가 더 좋은 것이 없으면 ‘다다미’를 살 수가 있고, 김치가 모자라면 ‘다꾸왕’을 써도 좋지만, 정치는 암만해도 야마도 다마시이(일본혼)를 가지고 우리를 다스릴 수, 될 수도 없고, 신앙도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가지고 우리를 살릴 수 없다.

무교회 신앙은 우치무라를 살리는 데 다 쓰고 털끝만큼도 남긴 것이 없다. 길이 길이 아니오 길 간 자리인 것 같이 신앙도 살고 난 자리뿐이다. 그러므로 나를 찾고 그것을 받들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오늘 나의 종교,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했다. 그러노라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무교회 빛깔이 차차 멀어지게 되었다. 남들이 주의시켜 줌을 받들고서야 내가 무교회 식이 아니고, 십자가 소리 적게 함을 알게 됐다. 나는 무교회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섭섭하게 받들었다. (주석 21)

함석헌은 1953년 가을에 서울로 올라왔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정부가 환도하면서 피난민들도 따라 올라왔다. 서울의 생활도 막막하기는 피난 부산과 다르지 않았다. 최태사와 친지들의 도움으로 서대문구 충정로 3가에 삶의 터를 잡았다. 여기서 한동안 머물다가 신촌 이화여대 근처의 대현동에서 셋방살이를 하게 된다.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간 서울의 생활은 참담했다. 특히 월남한 피난민들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아가면서 중앙 신학교에서 강연을 하는 등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전쟁이 터지자 무책임하게 도망쳤던 대통령 이승만은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자 북진통일론을 외치면서 점차 독재권력을 휘둘리기 시작했다.

 


함석헌 유영모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와 함께 종로2가 대성빌딩에서 학생ㆍ시민들을 상대로 종교ㆍ역사 강연을 하다가 세브란스의과대학 김명선 학장이 에비슨관을 내주어서 여기서 매일 오후 2시 정기 모임을 가졌다.

1955년 12월 14일은 함석헌이 태어난지 2만 날이었다. 이날 10여 명의 동지들이 신촌 그의 집에서 만둣국을 먹으며 2만일을 축하했다. 다석 유영모의 일기다.

오늘은 함석헌이 2만 날 되는 날이다. 신촌의 함 선생 댁에서 만둣국을 먹다. 2만 날 기념 만두로 포식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보다도 차라리 더 소중한 것은 앞으로 오고 오는 해를 잘 하고 잘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잘잘해는 2만 일이다. 1945년 4월 26일 김교신이 세상을 떠나고 그날 나는 20,133일, 함은 16,116일, 김교신은 16,080일 이었는데 벌써 3,885일이 지나가서 나는 24,017, 함은 20,000일 되었다. 오늘은 1955년 12월 14일이다. (주석 22)


주석
16>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 67쪽, 생각사, 1979.
17> 앞과 같음.
18>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403쪽, 일우사, 1962년.
19>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너머>, 223~224쪽.
20> 함석헌, <말씀모임>, <전집> 3, 김용준, 앞의 책, 69쪽, 재인용.
21> 함석헌, <말씀 모임>, <전집> 3, 139쪽.
22> 김흥호 엮음, <다석일지(多夕日誌)>, 제1권, 김용준, 앞의 책,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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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7 08:00 김삼웅

 

 

함석헌은 감금된 지 꼭 50일 만인 1946년 11월 11일 출옥했다.
네 번째의 투옥이었다. 세 차례나 일제에 투옥당한 것은 식민지 백성이어서 ‘불가피’했다 치더라도 해방된 조국에서 ‘해방군’으로 진주했다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50일 간이나 옥살이를 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주위의 시선도 차갑게 바뀌었다.

집에 와보니 세상은 달라졌다.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일제시대에 수갑을 차고 형사에게 끌려가니 어느 사람 하나가 아는 체 하지 않더니 해방이 되는 날 떠메어다 놓고 저마다 존경하노라더니 또 소련 사람에게 끌려갔다 오니 마주 서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인심은 조석변을 말로만 들었더니 실제로 당하고 보니 참 기가 막혔다. 우리 집에서 길러낸 것들이 나를 잡아먹었다. (주석 11)

출감한 함석헌은 장녀 은수를 결혼시키고(3월 5일), 연말에 장녀가 출산하는 신의주 만포동 딸네 집에 갔다가 12월 23일 또 체포되었다. 이번에도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잡혀가서야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인물이라는 거였다.

다섯번째 투옥은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서인지 한 달 만에 풀어주었다. 나와보니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지주 숙청령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2만 평의 전답이 지주로 낙인되었다. 그때 일꾼들에게 나눠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그의 경우, 항일운동의 전력과 일꾼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서 제외돼야 한다는 주장과 정말 애국자라면 지주 생활을 했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 갈렸다고 한다. 결국 신의주사건 등의 ‘반동’과 함께 ‘지주계급’으로 몰리게 되었다. 재산은 전부 압수되고, 함석헌은 다시 투옥되거나 시베리아 유배형이 예비되고 있었다.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한 해를 지난 후 다시 붙들려가서 한 달을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본 내 주위의 친구들은 나를 그 이상 더 머물지 못하게 남으로 가라 권했습니다. 더구나 박승방 같은 분은 전혀 나 하나를 월남시키기 위해 박천에서 용천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1947년 2월 26일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문간에 기대서 하시는 어머님의 음성을 마지막이 될 줄은 알지도 못하고 들으며 그와 같이 떠나 월남길에 올랐습니다. (주석 12)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함석헌은 박승병과 함께 평양에서 잠깐 머물다 해주를 거쳐 육로로 38선을 넘는데 성공했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3월 17일이었다. 어머니와는 이때 헤어진 것이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가 월남할 때는 이미 38선이 굳어져서 무단 월선하는 데는 위험이 따랐다.

생사의 선을 넘어 나는 밝아오는 새날을 맞으러 친구와 둘이 손을 잡고 섰었다. 가지고 넘어온 것은 입은 옷 한 벌 밖에 성경이 한 권과 갇혔다 나온 후 지은 노래를 몇 수 적은 노트가 있을 뿐이었다. (주석 13)

함석헌도 젊은 시절 여느 지식 청년들처럼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짧은 기간 소련 점령기 북한에서 나타난 현상을 보고(당하고)는 정신적으로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학생 시절에 기독 신앙을 가지나, 사회주의자가 되나 많이 망설였다. 도덕적 정신적인 데서는 문제도 아니되지만 역사적인 자리에서 볼 때 사회주의에 어떤 ‘기본적’인 것이 있음을 인정아니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주의 이론에 일면의 진리가 있다 하여도 어디까지나 일면이지, 그것으로 사람을 옳게 이끌어 나갈 수는 없다. 그래 분명하게 잘라 버렸다.

기독 신앙이 아니었다면 나는 험악한 공산주의는 몰라도 영국의 페비언 같은 것은 됐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말 같이 현대 사람이야 넓은 의미로는 다 사회주의자지. ‘사회’란 생각을 빼고 오늘날 사람의 살림은 있을 수 없다.
(주석 14)

함석헌의 경우와 같이 해방 뒤 북한에서 탈출한 월남자 수는 1945~1949년 사이에 대략 45.6~74.0만 명, 6.25 전쟁 시기의 월남자 수는 대략 55.8~64.6만 명에 이른다. 두 시기를 합치면 해방 뒤 한국전쟁 종결시점까지 월남자는 101.4~138.6만 명에 달한다. 해방 직후 1946년 말 현재의 북한 인구 926만 명을 기준으로 삼으면 1945~1949년 사이에 북한 전체 인구의 4.9~8.0%가 월남한 셈이 된다. (주석 15)

월남자 중에는 기독교(개신교)인들이 많았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 개신교 신자 수는 20만 명 안팎으로 북한 총인구의 2.2% 수준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월남한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극우반공의 기수가 된 기독교 목사들이 있었고, 함석헌ㆍ강원룡ㆍ장준하ㆍ리영희 등처럼 민주화의 기수도 있었다.

 


방수원.현동완.유영모.김흥호.함석헌


서울에 도착한 함석헌은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 칩거하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집회를 시작했다.
날씨가 풀리면서 4월부터는 유영모의 주일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무렵부터 하루에 한 끼만 먹는 1일 1식 주의를 실행한다. 1947년 7월 20일 함석헌은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란 시를 지었다. ‘그 사람’의 대상이 김교신인지, 사선을 넘어 서울까지 인도해주고 다시 북녘으로 돌아간 박승방인지, 또는 낮선 서울에서 신앙으로 이끌어 준 유영모인지, 생애의 지침이 된 남강ㆍ도산ㆍ고당인지, 아니면 이 모두인지, 함석헌의 명작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지었다. 얼마 뒤 아내와 자식 일부가 월남하였다. 어머니와 장남, 딸 3명은 내려오지 못했다.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되었다.


주석
11> 함석헌, <38선을 넘나들어>, <전집> 4, 51쪽.
12> 앞의 책, 277쪽.
13> <38선 넘나들어>, 앞의 책, 53쪽.
14> 앞의 책, 46~47쪽.
15>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410쪽, 중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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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6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정치꾼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여기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던 중에 일은 이미 크게 꼬여들었다. 신의주학생사건이 터지고, 함석헌은 소련군에 의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해방되던 해 11월 23일 신의주에서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결의하고 반소, 반김일성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에 보안부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여 1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뒤늦게 학생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신의주사범학교의 부속 강습생들과 신의주공립여자중학교 학생들은 시인민위원회를 습격, 기밀문서 등을 빼앗고 공산당원들과 대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발포로 다시 많은 학생이 피살되거나 중경상ㆍ투옥되었다. 해방 100일 만에 일어난 참변이다.

함석헌은 학생들이 총에 맞아 죽어 있는 신의주공산당본부에 들어갔다가 이들에게 체포되었다.

함석헌은 공산당본부에서 순식간에 소련군과 공산당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한국인 2세로 보이는 소련군이 일어나 러시아어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소련군 교육고문이 함석헌을 방문했을 때 통역을 한 사람이었는데, 함경도가 고향이라면서 자신을 친절하게 소개했었다. 함석헌은 러시아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그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흥분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사건의 장본인’이라고 지목하는 것 같이 느꼈다.

이제부터 자신의 운명이 끝이라고 직감하는 순간, 뜰에 꽉 찬 소련군들의 ‘총칼이 일시에 쏵’하고 그의 가슴으로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소련군 장교의 지시로 함석헌을 둘러싼 칼과 총부리와 피스톨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가 물러갔으나, 곧 방사선 형태로 죽음의 물결은 반복해서 그에게 다가들곤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마음은 그렇게 차분하고 평안해질 수가 없었다.
(주석 6)

함석헌은 소련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졸도하면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깨어나면 다시 구타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연후에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처넣었다. 가족의 면회도 금지시켰다. ‘해방군’의 이름으로 들어온 소련군과 북쪽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었다.

함석헌은 죽음의 문턱에서 어렵게 살아났다. 짧은 ‘해방공간’에서 조만식 선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10월 초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될 때 함석헌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가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이승에서 스승과 만난 마지막이 되었다. 그는 11월 초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정치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추위,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네번째 투옥이라 이골이 날만큼 났다. 옥살이의 요령도 생겼다. 시를 쓰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옥중에 쉰 날을 있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봐야 나갈 길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내 할 일은 우는 것인가 보다 하여 날마다 일어나는 느낌을 적어보았다. 그것이 내가 난 후 처음으로 시를 써 본 시작이다. (주석 7)

1961 일우사

옥중에서 시를 택한 것은 갑자기 시심(詩心)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필기구가 없어서였다. 어렵게 구한 몽당연필로 소련군의 휴지에 쓴 300여 편의 시는 언제 나갈지 알 수 없는 기약없는 처지에서 씌였다. 함석헌은 월남하여 뒷날(1961년) 펴낸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저간의 사정을 담는다.
소위 신의주학생사건이 일어나, 정권에 미친 놈들 단순한 젊은 가슴의 의분에 총칼로서 대립하고, 그 원통한 피 모두 내 머리에 돌려, 나를 잡아 옥속에 던지니, 해방의 소식을 밭고랑에서 거름통 멘 채 들으며 “오, 그날이 오기는 왔나보다” 하고 들을 뿐이리만큼 둔감한 내 가슴에서도 울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그래 눈물 사이사이에 나오는 생각을 간수병의 눈을 피해 가며 부자유한 지필(紙筆)로 적자니 부득이 시가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난 후 처음 시란 것을 쓴 것이다. 50일 갇혀 있는 동안, 나오려니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짬짬이 면회 온 친구에게 주어 보낸 것이 모이니 삼백 여 수여서, 나온 후 그것을 한데 엮어 <쉰 날>이라 이름했는데, 그것은 1947년 봄 38선을 넘을 때 거의 다 잃어버렸다.
(주석 8)

함석헌의 초기 옥중 시는 이렇게 사라지고 없어졌다. 뒷날 그는 다시 여러 편의 시를 썼고, 시집을 간행했으며, 사후에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는 시비가 세워졌다. 그는 시에 대해 일가견을 가졌고, 시인으로도 불린다. 시인 아닌 시인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지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아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위즈위즈가 못 났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서 타골이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깎이고, 사슬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 말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났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었다.

나도 영원을 지향하는 충동을 품고 고난의 역사의 짐을 지는 한 개 심정인 이상 시가 왜 없으리오만, 그것은 품어주는 날개 없는 알 같이 다 곯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참혹한 일이다.
(주석 9)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는 최근 ‘함석헌의 종교시’를 탐구하는 저서를 냈다. 그의 ‘시인 함석헌론’이다.

필자의 관심은 창조적 사상가로서 함석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 그의 시론(詩論), 다시 말해서 그가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동양적 선비가 흔히 갖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동서양 고전의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퍼내 오늘에 재해석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함석헌의 진면목은 동트는 새문명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전령자로서, 예언자로서, 신탁을 맡은 사제로서 살고 간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 시대의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운명적 역할담당자를 한마디로 우리 시대 언어로 말할 때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석 10)


주석
6> 조동영, <동구보다 먼저 일어난 신의주학생 반공의거>, 이치석, 앞의 책, 376쪽, 재인용.
7> 함석헌, <38선을 넘나들어>, <전집> 4, 50쪽.
8> 함석헌, <수평선 넘어>, <머릿말>, 생각사, 1961.
9> 앞과 같음.
10> 김경재,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 12~13쪽, 책보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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