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1 08:00 김삼웅

 

 

함석헌이 평고 시절에 겪은 가장 큰 사건은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한 일이다. 그의 나이 18살 때이다.
3ㆍ1운동은 한민족, 한겨레의 거족적인 항쟁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소외되고 푸대접 받아오던 평안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와 부상자를 낼 만큼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3ㆍ1운동의 집회횟수는 가장 많은 평안도가 315건으로 297건의 경기도(서울 포함) 보다 훨씬 많았다.
참가 인원은 인구밀집의 경기도가 665,900명인데, 평안도는 514,670명, 사망자수는 경기도 1,472명, 평안도 2,042명, 부상자수 경기도 3,124명, 평안도 3,665명, 피검자수 경기도 4,680명, 평안도 11,610명이었다.
(주석 1)

평안도에서 이처럼 많은 희생ㆍ부상ㆍ피검자를 낸 것은 일찍부터 전래된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이 지역 특유의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의 발로였다.

함석헌은 3ㆍ1운동 당시 친척 형인 함석은이 평고로 자신을 찾아오면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함석은은 평안남북도 학생운동의 책임자로서 평고의 책임을 함석헌에게 맡겼다. 함석헌은 몇몇 학우들과 밤을 세워 시위운동 때 나눠 줄 태극기를 목판에 새겨 찍었다.

1919년 만세를 부르는 그 해 처음 석은 형이 평양으로 왔다. 그가 3ㆍ1운동 때 평남북 학생운동을 맡은 관계로 자연 평고에서는 내가 연락을 하게 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서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는 시가행진에 참여했는데, 내 60이 되어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그때처럼 상쾌한 적은 없었다. 목이 다 타마르도록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 꽂아가지고 행진해 오는 일본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 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고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정말 먹었던 대동강 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하였다. (주석 2)

3
ㆍ1운동은 함석헌의 생애를 바꾸게 되었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이웃의 병을 고치겠다는 뜻이, 나라를 찾는 민족운동으로 바뀐 것이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한 명문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끝내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차마 양심상 그러하지 못했다.

만세를 부르고 난 후 한 반의 친구들은 거의 다 복귀했다. 그리하여 그대로 보통학교 훈도가 되고, 군 서기가 되고, 군수ㆍ경부가 되고, 의사ㆍ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한동안 계엄령이 내렸다가 안정된 뒤에 집에서 어른들이 학교에 다시 가라 하기도 하여 봇짐을 싸가지고 평양에 나왔으나 차마 학교문엘 들어설 수가 없었다. 머리를 들이밀기가 우선 싫고 한 번 박차고 나온 학교를 다시 갈 수가 없고, 또 함께 운동했던 친구 중에는 아주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어진 사람도 있는데, 의리상 배반이 되는 것 같아 학교에 가서 자복하고 계속해 다니기는 싫었다.

크게 용기가 있어서 아니라 맘이 약해 차마 할 수가 없어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딴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할 지 모르지만 하여간 의사 되기는 그만 두었다.
(주석 3)

혁명가나 사회운동가 중에는 젊어서 의학(의술)을 공부하다가, 몇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보다 민중ㆍ민족의 병(해방)을 고치겠다고 ‘전업’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은 아버지를 따라 한때 약업에 종사한 적이 있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만든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중국 5ㆍ4운동과 저항문학의 작가 루쉰, 중남미 해방의 게릴라 대장 체 게바라, 필리핀 독립전쟁의 영웅 호세 리잘의 전공은 의학이고 의사였다.

함석헌은 기미년의 저항과 좌절을 열여덟 피끓는 나이에 겪었다. 이름 없는 민중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지도층이 어떻게 일제와 타협하면서 민중을 배반하는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민중(씨알)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을 하게 되었다. 3ㆍ1운동이야말로 그에게 새 인간의 탄생이었다. 의학 지망생 함석헌이 씨알 사상가로 거듭나게 하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3ㆍ1운동은 겉으론 실패라면 실패다. 만세만 부르면 독립은 세계에서 ‘거저 주는’ 줄 알았더니 그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 의미에서 실패다. 그러나 실패인 줄을 차차 알면서도 민중은 결코 풀이 죽지 않았다.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자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운동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 운동의 뜻은 민중이 하나로서의 의식을 가진 데 있다. 씨알의 싹이 튼 것이다. 싹이 텄기 때문에 첫 번 열(熱)이 지나갔어도 낙심을 아니한 것이다. 낙심 아니한 증거는, 만세 이후 일어나서 한동안 밀물처럼 성행했던 강연회, 교육열이 그것이다. 그것은 자라는 현상이다.
(주석 4)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11,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2>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사상계> 1959년 3월호.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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