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해방을 맞아 이 책을 펴내게 된 사연도 적었다.
그가 소련군에 피체되어 북한에 억류중일 때 먼저 내려온 친구 노평구가 묵은 잡지에서 어렵게 원고를 찾아서 자기가 내는 <성서연구>에 다시 연재를 하고, 이것이 마치면서 단행본으로 내게 되었음을 밝힌다. 함석헌의 서문은 이어진다.

골방에서 무릎을 겯고 앉아 친구들에게 이야기로 한 그대로를 다듬지도 못하고 일반 세상에 내어놓은 저자의 맘은 부끄럽고 두려울 뿐 아니라 차라리 설음을 금할 수 없다. 본래 이것은 자신 홀로의 탄식이며 반성이요, 친구에게 하는 위로며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신앙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은 자 같이 다듬을 겨를도 없이 내어놓는다고 하기는 하면서도 될 수 있다면 ‘고난의 역사’를 연구해 보자고 뜻만은 먹었다. (주석 10)

함석헌은 해방 뒤의 혼란과 자신의 투옥 등으로 원고를 보완하지 못한 사정을 밝히면서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이라는 말이 일반 독자에게 걸림이 될 듯하니 빼면 어떨가 하는 의견이 잠깐 나왔으나 그것은 사슴에게서 뿔을 제하는 일과 같아서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 글이 이 글이 된 소이는 성서적 입장인 데 있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성서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 입장에서만 역사는 쓸 수 있다. 엄정한 의미의 역사철학은 성서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희랍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적으로 보는 이 성서의 입장에서만 성립이 된다. (주석 11)

2003년 한길사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은 1962년 3월 “사슴에서 뿔을 제하는” 격의 ‘성서적 입장’을 빼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재, 대폭 보완하여 재출간하였다. 초판 출간이 그의 표현대로 ‘박옥’이었다면, 개재 증보의 신간본은 ‘금옥(金玉)’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해방 뒤 역사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저술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책과 관련해서는 뒤에 다시 쓰겠다. 그는 민족사의 어둠이 짙던 시대 민족사관과 식민사관이 부딪히던 1930년대에 ‘씨알사관’을 바탕으로 하는 독특한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 책을 저술하였다.


주석
10> 앞의 책, 2쪽.
11> 앞의 책,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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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오산고보 시절, <성서조선>에 종교(기독교)에 관해 많은 글을 쓸 정도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초기의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서 차츰 벗어나 독자적인, 조선적인 기독교로 바뀌어 갔다. 함석헌의 ‘종교사상의 계보’를 연구한 강돈구 교수는 그의 종교적 특징을 지적한다.

“김교신과 마찬가지로 함석헌도 우치무라로부터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이되, 우치무라의 ‘일본적 기독교’ 대신에 ‘조선적 기독교’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함석헌의 ‘조선적 기독교’는 김교신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김교신은 한반도의 강역에 의미를 부여한 반면, 함석헌은 한반도의 강역보다는 오히려 역사에 착안하였다.” (주석 5)

그는 이어서 둘째 특징으로 “그의 다원주의적 종교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다원주의적 종교관은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그것보다 한층 더 진전된 것으로, 유영모로부터 받은 영향에 기인한다.” (주석 6)라고 분석했다. 함석헌은 1940년대 초 무교회주의와 멀어질 때까지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30대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함석헌은 1934년 2월부터 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 (61~83호)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하였다.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과 조선역사 교육이 금지된 시국에 그는 소수나마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자 ‘조선역사’를 지었다. 연재에 앞서 1933년 12월 30일부터 새해 1월 5일까지 서울 오류동 송두용의 집에서 6박7일 동안 동계 성서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그는 ‘조선역사’의 초고를 발표하고, 참석자들과 토론하였다. 그의 명저가 태어나게 된 고고지성인 셈이다.

박은식과 신채호가 망명지 중국에서 나라를 빼앗겨도 “국혼과 국사만 잃지 않으면 독립이 가능하다”면서 <한국통사>(박은식)와 <조선상고사>(신채호)를 지은 것과 비교된다.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것을 보완하여 엮은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비견되는 민중사관의 독특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책은 망명지가 아닌 일제의 억누름이 극박스러운 오산에서 씌여졌음에 의미가 각별하다.

그가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이미 한국의 역사학계는 ‘민족주의’, ‘유물사관’ 그리고 ‘실증주의’라는 세 가지 흐름으로 근대 사학의 뿌리를 내리는 중이었다. 예컨대 신채호는 1931년부터 조선의 <상고문화사(上古文化史)>를 <조선일보>에 연재 중이었고, 백남운은 1933년에 계급투쟁사론의 관점에서 <조선사회경제사>를 동경에서 출판했다. 그리고 1934년 5월에는 실증주의를 내건 이병도에 의해서 진단학회도 창립되었다. 우연한 일이지만, <성서조선>에 <조선역사>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이병도의 진단학회가 설립되기 석 달 전부터였다. 그밖에도 문일평은 1933년부터 <조선일보>에 <사안(史眼)>으로 본 조선>을, 정인보는 1936년부터 <동아일보>에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여 각각 민중중심과 유물론적 사관의 일단을 선보였다. (주석 7)   

한편 이 무렵 조선총독부는 <조선반도사> 35권을 편찬하였다. 일제는 병탄 초기부터 조선사 관련 각종 사서를 불태우거나 주요한 것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1923년 1월부터 총독부 정무총감이 배석하고(편찬위원장), 1925년부터는 중추원으로 이관하여 1937년까지 27년에 걸쳐 식민사관에 기초한 <조선반도사>를 편찬하였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97만5천원이 투입되고,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를 총동원하였다. ‘조선사’ 35권 외에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천 623편을 별도로 펴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관학자와 조선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면서 내건 ‘편찬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 백성의 지능과 덕성을 개발하여 그들을 훌륭한 제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이번에 중추원에 명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게 한 것도 또한 민심훈육의 일단에 기하고자 함이다. 일본에서는 ‘신부(新府)’의 인민을 교육함‘을 불평과 반한의 기풍을 조작하는 결과로 끝나는 것이 상례라 하고…. 이제 조선인에게 조선역사를 읽는 편의를 제공하면 그들 조선인에게 옛날을 생각하여 그리워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지만…. 조선에는 고대의 사서가 많으며 또한 새로이 저작한 것이 적지 않다…. <한국통사> 등 후자는 근대 조선의 청일, 노일간의 세력걱정을 서술하여 조선이 등을 돌릴 길을 밝히고 있으니 이들 사서가 인심을 심히 곤호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서들의 ‘절멸’을 가함은 오히려 그것의 전파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공명ㆍ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가 현저할 것이다. (주석 8)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야욕에서, 그리고 속국화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은 본래 북만부는 중국의 속국이고, 남반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억지를 ‘역사적 사실’로 꾸미고자 온갖 궤변과 망설을 끌어들이면서 왜곡과 날조로 <조선반도사>를 편찬한 것이다.

일제의 <조선반도사> 편찬 시기는 함석헌의 일본 유학과 오산고분 교사 시절과 맞닿는다. 그가 남달리 재능이 있고 탐구하고 싶었던 미술, 기독교사 등을 뒤로 하고 역사를 지망한 데는 일제의 한민족사 왜곡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온갖 억누름 속에서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한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하겠다. 조선총독부가 <조선반도사>를 편찬할 때 일본의 관학자들과 조선에서는 최남선ㆍ이병도ㆍ신석호 등 어용사학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편찬 과정의 여러 가지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이런 추론은 가능하다.

함석헌의 조선사 연재는 그때마다 일제 관헌들의 요시찰의 대상이 되고 잡지는 회원 외에 배포가 금지되었다. 그는 초년 교사 시절에 총독부의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글을 썼다. 그리고 해방 뒤 1950년 4월 이 원고를 단행본으로 묶어 간행하였다. 발행처는 성광문화사, 값은 750원이었다, 함석헌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밝힌다.

이 조그마한 글은 본래 20년 전 10여 인의 신앙동지 앞에서 이야기로 한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우리 거문고를 바빌론 시냇가 언덕 위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던 때다. 외적(外的) 압박, 내적(內的) 비탄으로 말이 자유롭지 못한 그때에 쓰디 쓴 입에 붙이어 우리의 온 길, 갈 길을 이야기 해 본 것이 이 고난의 역사다.

그 후 그것을 그 동지의 1인이요, 지금은 고인이 된 김교신 군이 <성서조선>지에 연재하였다. 광고도 선전도 않은 그 잡지는 독자가 가장 많을 때에도 2백이 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나마도 압박자의 뜻에 거슬려 폐간을 당하게 되는 때에 이 역사도 그 이유의 하나였고, 책은 모두 수색되어 없애 버린 바 되었으니 이 고난의 역사는 그 바빌론 거친 들에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잠깐 들렀다가 들 끝에 사라지는 외로운 포수(捕囚)의 신음성 같이 아주 없어져 버린 듯하였다. (주석 9)


주석
5> 강돈구, <함석헌 종교사상의 계보>, <종교연구>, 2001년 여름호, 18쪽, 한국종교학회.
6> 앞의 책, 19쪽.
7> 이치석, 앞의 책, 303쪽.
8>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선사편수회 개요>, 김삼웅,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223쪽 재인용, 인물과 사상사, 2004.
9>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서문, 1쪽, 성광문화사,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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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8 08:00 김삼웅

 

1927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한국인학생들과 함께 졸업기념(가운데줄 중앙). 사진은 함석헌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ssialsori.org/)에서

함석헌은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1928년 지체없이 귀국했다. 4월부터는 모교인 오산고보의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섰다. 동경고사에서 교사자격증을 땄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얼을 키워 주고 유학비를 지원해 준 모교에 지원하여 발령을 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 품었던 얼을 한아름 키워서 모교로 돌아온 것이다. 함석헌은 수신과 역사지리 과목을 맡아 가르쳤다.

교사 함석헌은 한복으로 일관했다. 여름에는 흰 옷 모시 두루마기, 겨울이면 무명옷에 회색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었다. 이같은 옷차림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나는 현해탄을 건널 때 품고 간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보다 더한 눈총 속에서도, 땅을 태우고 하늘을 지키는 불길 속에서도, 번쩍이는 창검 속에서도, 내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하던 일 다 마치고 얼굴 빛 더 그을어지고 현해탄 도로 넘어 다시 돌아올 때도 품고 돌아온 것이 있습니다. 속알 여물려면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이미 씨알로서의 올갱이는 넣어주심을 받은 것이 있노라고 믿고 있습니다. (주석 1)

함석헌이 귀국하여 오산고보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될 무렵, 조선에서는 이태 전의 6.10 만세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어서 전국의 학교에는 일경의 감시가 심했다. 1927년 1월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통일전선운동 단체로 신간회가 발족하여 이상재를 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활동을 시작하고, 5월에는 여성운동 통일체 근우회가 발족하였다. 1928년 1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34명이 구속되고, 5월에는 조명하 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 구미노미야 기니히코 육군대장을 독검으로 공격했다가 현장에서 피체되어 10월에 처형되었다. 6월에는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사형ㆍ무기형을 추가하는 등 독립운동가를 더욱 심하게 탄압하였다. 7월에는 제1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70여 명이 피체되었다. 일제에 병탄되어 20여 년이 지났는 데에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그치지 않았다.

3ㆍ1운동 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의 미명 아래 다소 유화책을 펴는 듯 했지만, 내실은 더욱 한민족을 옥죄고 탄압하였다.

 


935년 오산학교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 사진은 함석헌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ssialsori.org/)에서

“병탄 이후 식민지 교육정책의 핵심이었던 ‘동화(同化)=일본화(日本化)=충량화(忠良化)’ 정책을 기독교학교에도 강요ㆍ관철시키려”  (주석 2)했다. 기독교학교 뿐만 아니었다. 이것은 종교계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식민정책이었다. 일제는 한국 민족을 일본적 가치관을 주입시켜 일본화하기 위해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제시하고, 인종적인 면에서 동일 근원성의 이론을 날조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키 위해 더욱 심하게 동화정책을 폈다.

병합 이래 소위 동화정책은 대체로 일본의 조선통치 근본방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내(寺內), 장곡천(長谷川) 양 총독의 시정을 보면 끄덕여지는 바가 있다. 원(原) 수상은 동화라는 말을 피하여 전에는 내지연장(內地延長)이라 하고, 후에는 일선융화를 주장하고 있다. 동공이곡(同工異曲)의 어휘지만 그간 통치 방침의 점차적 추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석 3)

일제의 동화정책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반발하면 가혹한 형벌로 처벌하고, 친일 조선인을 앞세워 민중을 억압하고 ‘교화’시켰다. 총독부는 1928년부터 1936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의 초등교육의 진흥이라는 명분 아래 ‘공립보통학교 일면일교(一面一校)계획’으로, 매년 130여 교씩 1,074교를 설립하였다. 어디까지나 조선의 아동들을 일본적 가치관으로 키우려는 ‘일선동화책’의 일환이었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민족교육의 요람이라는 오산고보에 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동화정책은 특히 심했다. 함석헌의 힘든 교사생활은 이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초년 교사 노릇을 하게 된다.

동경 고등사범을 졸업하고 나는 곧 오산에 돌아와 선생 노릇을 시작해서 1938년 봄 그만둘 때까지 만 10년을 있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황금시대라 할 만한 시절입니다. 취임하는 날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구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정성을 다 붓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못되어 나는 역사 교사가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역사란 것은 온통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를 정직하게 볼 때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옳은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 자포심만 날 터이요, 남이 하는 식대로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지 않고,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주석 4)

역사 교사 함석헌의 고민은 깊어갔다. 망국의 교사로서 망국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는 처지였고, 외적으로는 날이 갈수록 억누름이 심해졌다. 김교신을 도와 <성서조선>을 계속 내고, 여기에 매달 빠지지 않고 글을 썼다. 그리고 무교회주의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보였다. 김교신과 함석헌은 오산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운동을 철저하게 지켰다. 건물로서의 교회를 부정하고, 교회의 정례를 없애고, 교회의 성직을 두지 않는, 그래서 특정한 교직자가 없는 신앙생활이었다. 이 때문에 전통적 기독교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함석헌은 <성서조선> 창간호에 <먼저 그 의를 구하라>를 쓴 것을 시발로 동경고사 시절 <주여 믿어지이다>(2호), <선지자>(3,4호)에 이어 귀국하여, <살아계신 하나님>(4호), <신앙은 힘이다>, <조선에 기독교는 필요하나>,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우연과 연기>,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 <대담>, <고통의 가치>, <의와 악>,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시나>, <성삼문과 스테반>, <큰 식물>, <부활>, <민족 생명의 촛불 남강 선생>, <산 신앙>, <20세기의 출애굽기>,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그리스도 모방/토마스 아 켐피스 번역>, <의인은 멸절하는가>, <신 우주 시편 19장 연구>, <창구세주>, <예수 출현의 우주사적 의의>, <하나님은 이 시대를 버리시었나>, <러시아에 감사함>, <아모시스 연구>, <고난의 의미 - 시편 44장 연구>, <인생의 두 길-시편 1장 연구>, <순교의 정신>, <무교회신앙과 조선>, <무교회>, <서풍의 노래>, <강재선 선생의 일생>, <매소랜 도의 발시>, <세상을 이기는 용기>, <전도사를 기다림>, <바디매오와 삭개오>, <하늘나라 백성의 자격>, <결혼의 의미>, <요엘서 강의> 등을 기고하였다. 오산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10년 동안에 이밖에도 많은 글을 썼다.


주석
1> 함석헌,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전집> 4, 241쪽.
2> 김승태, <식민권력과 종교>, 4쪽,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2.
3> 지바 사타루(千葉了), <조선의 현재 및 장래>, <조선통치문제논문> 제1집, 38쪽, 경성, 1929.
4>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1>, <전집> 4,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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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7 09:44 김삼웅

 

 

함석헌은 1927년 고등사범 4학년이 되었다. 이 해는 졸업반의 의미보다 그의 생애에 비중 있는 가닥이 되는 동인지 <성서조선>의 창간에 참여한 일이다.

우치무라의 문하에서 신앙적, 민족적 뜻을 함께 한 김교신을 비롯한 함석헌ㆍ정상훈ㆍ송두용ㆍ양인성ㆍ유성동은 1927년 7월 도쿄에서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창간호는 국판 44쪽으로 김교신의 창간사에 이어 6인의 무교회 신앙의 고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논문을 실었다. 창간사에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국경이 있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면서, 쓰라린 민족의 시련을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순수한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해 나가자고 주장하고, 기성교회의 비리를 비판하며, 민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영혼을 신앙으로 각성시키자고 강조하였다.

창간호는 뒷 부분에 동인들이 1편씩 단상을 실었다. 함석헌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글을 발표했다. 생애의 첫 활자화 된 글이다. 처녀작인 셈이다. 꽤 긴 글이다. 마태복음 6:31-33을 인용한다.

“그런 고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외방 사람이 구하는 것이요. 이 모든 것을 너희 천부(天父)가 너희 쓸 것인 줄 아시나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또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은 적도 일본에서 잡지를 내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의 야수적인 식민통치를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성서를 인용하면서, 알아듣는 사람들은 깨우치게 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함석헌의 대 사회 발언의 첫 마디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제목이었음은, 27세 청년 함석헌의 의식의 척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고난에 찬 생애의 방향성을 예시한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함석헌은 정작 자신이 하고자 한 말을 한다.

근역(槿域-무궁화가 많이 피는 땅, 즉 한국)의 자녀들아.
의를 구하자. 생명을 위하여 먼저 그 의를 구하자 - 현실이 아무리 급박한 듯 해도 이는 우원하고 어리석은 말 같고 점점 더 파멸로 인도하는 말 같으리라. 끌어올리는 두레줄을 놓으라는 것 같아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듯 하리라. 그러나 진리다. 생명에 이르는 진리다.

근역의 자녀들아. 오늘날 우리는 불행에 우는 자다. 환난의 물결은 우리 위를 넘고 비탄의 부르짖음은 우리 입에 가득하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저주하고 싶고 온갖 것을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그로 인하여 살길은 아니 온다. 구원은 오직 의의 신으로부터 온다.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장막이 우리에게 있으며 그가 우리와 함께 거하시리니,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고 그가 친히 우리와 같이 계셔 하나님이 되고 눈물을 우리 눈에서 다 씻으시며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한계시록 21:3~4)

흰 옷 입은 근역의 자녀들아. 그 의를 구하여라. 네 입은 옷은 정의의 흰 빛이 아니냐. 네 맘도 그같이 희기를!
(주석 21)

<성서조선>은 동인들이 귀국하면서 서울에서 계속 발간되었다.
1930년 6월호인 제17호부터는 동인들의 사정으로 김교신 단독의 이름으로 편집, 발행되어 그의 개인잡지 성격의 신앙월간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인들의 투고는 계속되고, 함석헌도 계속하여 기고하였다. 그의 대표 저작으로 통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성서조선>에 연재하였다. 이 부문은 뒤에서 다시 쓸 것이다. 


주석
21> <성서초선>, 1927년 7월(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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