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의 생애는 저항과 투쟁으로 일관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3.1만세시위 참여, 계우회사건, 성서조선사건, 독서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고, 해방후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속되고, 월남해서는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되는 등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펜이 요구될 때는 진짜 글을 통해 할 말을 하고, 제도 언론이 봉쇄당할 때는 온몸을 던져 행동으로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다. 언론이 압제자의 편이 되어 왜곡과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하면서 직접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권력과 싸웠다.
그의 사상적 근저에는 노자와 장자의 무위사상, 기독교의 박애정신,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자연주의와 초월사상이 녹들었지만, 본바탕의 정신은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비폭력사상은 저항이고 투쟁이었다. 휘트맨의 <풀잎>이나 쉘리의 <서풍>에서 보이듯이, 치열한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 고난의 가치를 일깨웠다.
그는 결코 유약한 선비나 초월적인 종교인, 관념론적인 사상가가 아니고 ‘정신의 순례자’는 더욱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져도 저항이라는 말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행동한 ‘싸우는 평화주의자’ 이다.
근자에 함석헌을 지나치게 종교의 테두리 특히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시도가 있다. 특히 종교ㆍ정신계의 지도자인 유영모 선생과 동렬화 시키려는 것은 함석헌의 본령인 저항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가 아닌가 싶다. 평안도 호랑이, 아니 조선의 호랑이에게서 어금니와 발톱과 날램과 용기를 빼버려서는 안된다.
옛글에 ‘화호불성반위구(畵虎不成反爲狗)’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하여 개를 그리게 된다”는 뜻이다. 함석헌의 모든 연구, 평가, 분석 은 마땅히 그의 투철한 저항사상 즉 비폭력 저항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함석헌 사상의 알파와 오메가는 ‘저항’ 바로 그것이다. 그의 저항정신은 오늘에 다시 발현이 요구된다.
유신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면서 긴급조치를 통해 모든 비판세력에 족쇄를 채우고 개헌운동을 폭력으로 봉쇄시킬 때에 함석헌은 분연히 일어나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은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3.1 명동선언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선언문은 ①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과업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권은 이 일을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몰아가면서 재야 지도급 인사들을 속속 구속했다. 구속자가 함석헌을 비롯, 김대중ㆍ윤보선ㆍ윤반웅ㆍ문익환ㆍ함세웅ㆍ신현봉ㆍ김승훈ㆍ이문영ㆍ서남동 등 18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3.1 민주구국선언사건에 이어 1979년 3월 1일에는 범민주진영의 연대투쟁기구로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이 결성되었다. 함석헌ㆍ김대중ㆍ윤보선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3.1 운동 60주년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재건, 확립하고 나아가 민족통일의 역사적 대업을 민주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자발적이며 초당적인 전체국민의 조직”으로서 ‘국민연합’을 결성했다. 함석헌은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연합’의 산하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NCC 인권위원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13개 단체가 가입할만큼 반유신 저항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다.
함석헌의 반유신 저항운동은 지칠줄을 몰랐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었지만 유신권력을 둘러싸고 권력내부에서는 치열한 음모와 권력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12.12 사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안개정국’이란 표현이 언론에 공공연하게 쓰일 만큼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1월 24일 함석헌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결혼식을 가장하여 서울명동 YW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국민연합’,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회원 5백여 명은 △ 유신정권 퇴진 및 건국민주내각 조직 △ 공화당,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또한 △ 유신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 개입을 일체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이래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검찰은 함석헌을 비롯 박종태ㆍ 양순직ㆍ김병걸 등 96명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했다.
함석헌은 누가 뭐래도 저항적인 행동주의자이다.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는 먹물쟁이가 아니라 치열하게 사유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투사이고 들사람이고 저항인이었다. 그에게서 행동과 실천성을 빼면 사상가이고, 철학자이고, 문명비평가이고 종교인이 된다. 시인이고 역사연구가이고 언론인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함석헌의 본령은 아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식견과 학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만, 그런 식견과 학식은 행동과 실천을 위한 에너지요 무기요 군량미였을 뿐이다. 학문을 위한 학문, 사상을 위한 사상,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학문, 실천을 위한 철학이었다. 그에게 행동과 실천을 배제한다면 평범한 저항적 지식인에 불과할 것이다.
함석헌의 생애를 추적하면 젊은 시절부터 투철한 행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일제식민지 시절에 대부분의 지식인이 침묵할 때 그는 성서조선사건, 계우회사건, 독서회사건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실제로 행동하고 그 행동의 결과 일제의 감옥에서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해방후 신의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북쪽에서 투옥되고 월남하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체제에서 투옥되었다. 치열하게 저항하고 행동하다가 잡혀들어간 것이다. 그의 고난의 대부분이 말이나 글 때문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직접 행동하고 저항운동에 나선 적이 한 두차례가 아니었다.
자유당 독재가 극에 이르렀을 때 충남 천안의 씨알농장에서 단식하면서 저항하고,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14일 동안이나 삭발 단식투쟁을 벌이고, 1974년 11월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저항하여 한국신학대학생과 교수들이 삭발단식을 할 때, 이들을 격려차 방문했다가 거침없이 머리깎고 단식을 함께 하면서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이런 행동과 저항이 ‘소극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례를 들려드리겠다. 1971년 4월 19일 김재준ㆍ이병린ㆍ천관우와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주도한 것은 함석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야 지식인 연합체로 기록되는 ‘민수협’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박정권에 도전한 이가 다름아닌 함석헌이었던 것이다.
‘민수협’은 70년대말부터 3선개헌의 후유증에서 깨어난 각계 인사들이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발아되었다. 이들은 1971년을 ‘민주수호의 해’로 정하고, 공명선거를 통해 1인 장기집권을 막아내고자 1970년 4월 8일 서울 YMCA에서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화계 등 각계를 망라한 저명인사들이 모임을 갖었다. 그리고 4・27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명을 다짐하는 ‘민주수호선언’을 채택한데 이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모임에서 김재준ㆍ천관우ㆍ이병린ㆍ이병용ㆍ장용ㆍ김정례 등 6인으로 준비소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4월 19일 ‘민수협’을 정식 발족시키고, 함석헌ㆍ김재준ㆍ이병린ㆍ천관우를 대표위원으로 선출했다.
이후 ‘민수협’은 강연회, 좌담회, 성명서발표, 인권탄압 사례 조사, 공명선거를 위한 선거참관인단 구성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는 최초의 재야민주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이후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등 긴급조치 시대 재야단체의 모태가 되었다. ‘민수협’의 지도자가 바로 함석헌이었고, 그는 모든 재야세력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함석헌의 저항적인 실천운동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불을 붙였다. 야당이 주최하는 전국적인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대학생들과 함께 반민족적인 한일회담반대 투쟁을 벌였다. 또한 1969년 박정권이 영구집권 야욕에서 자행한 3선개헌반대투쟁과 그 이후 반유신투쟁의 집회에서 어김없이 함석헌이 참석하여 사자후를 토해냈다.
신학자 김경재(한신대)는 “함석헌의 문화 종교적 삶의 자리는 계몽주의적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뢰, 자연과학과 종교의 화해, 동양문화와 서구 기독교문명의 지평융합 그리고 세계문명 전체가 영적으로 크게 한번 털갈이를 하려는 진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문명전환기적 카이로스 의식으로 충만해 있었다” 면서 “오산학교 학장시설 다석 류영모와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나 청년시절 기본사상의 기틀을 닦고, 일본 동경사범학교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 간디, 톨스토이, 주세페 마치니, H.G.웰츠의 영향을 받아 그의 역사철학의 토양으로 삼았다.”(주석 14)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육화’된 저항사상은 어디서 기원하고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먼저 출생지역을 들 수 있다. 그는 “서북 끄트머리 평북 용천군에서도 바닷가인 부라면 원성동이다. 그는 ‘물 아랫놈들,’ 즉 ‘감탕물 먹는 놈’ 으로 자라났다. 그곳은 일명 사자섬이라고 하는데 일찍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소박한 농민생활에 히브리적 바탕의 신앙이 뿌리를 내린 동리였다.”(주석 15)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섬’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섬’ 이란 말이다. …용천에서도 그 위대로 사는 사람들이 여기를 업신여겨 ‘물 아랫놈들’ ‘감탕물 먹는 놈들’ 하였다. 감탕이란 높은 지대의 흙이 비에 씻겨 흘러 바닷가에 내려가 가라앉아서 생긴 유기물질 많은 까만 충적토이므로 퍽 살찐 흙이나, 진흙이므로 샘물은 늘 흐리고 비가 오면 다니기가 참 불편한 흙이다. 그래 감탕물을 먹는다고 멸시하는 것이다.(주석 16)
함석헌은 그가 다른 글에서도 밝혔듯이 평안도 용천의 ‘상놈’으로 태어났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와 같은 태생적인 환경은 생애를 두고 저항정신의 기본바탕을 형성하였다.
두번째는 성장기의 배경이다. 나라가 망하기 시작하는 1901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망국을 지켜 보고 감수성이 예민한 19살 때 3․1 운동을 겪었다. 직접 3․1 항쟁에 참여하여 평양고보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후 오산학교에 들어가 류영모,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을 만나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교보 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이 때 잔혹한 조선인학살을 지켜보면서 청년 함석헌은 식민지백성의 참상을 ‘육화’시킨다. 동경유학 시절에 무교주의자 우찌무라를 만나고, 셸리의 <서풍의 노래>에 접하게 되고, 김교신 등 동지들을 만난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움트기 시작한 정신사적 토양이다.
세번째는 시대적 배경이다. 식민지, 해방, 분단, 동족상쟁, 미군정, 이승만 독재, 5․16쿠데타, 한일굴욕회담, 유신, 5 ․17쿠데타 등 한국근현대사의 모순과 역리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 이에 대한 저항을 양심과 정의의 수단가치로 채택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저항의 방법은 비폭력 평화주의였다. ‘싸우는 평화주의자’라는 닉네임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무저항주의라고, 아는 체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그것은 사실은 저항의 보다 높은 한 방법 일 뿐이다. 바로 말한다면 비폭력 저항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한 예수가 그렇게 맹렬히 악과 싸운 것을 보아라. 말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에 올라가도 저항, 물속에 들어가도 저항, 허무 속에 가도 거기에 스스로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에 버티고 있는 하나님이 있는데, 너 만이 저항을 모른단 말이냐?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내가 너를 박차 너를 살려내고야 말리라.(주석 17)
주석 14>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교수신문>, 2003. 1. 1. 15> 안병무 , 앞의 책, <씨알 인간 역사>. 16> <물 아래서 올라와서>,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4, 한길사. 17> 함석헌, 앞의 책, <저항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