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012/12/09 08:00 김삼웅

 

 

함석헌이 덕일소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용천군에는 11개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지역 유지들이 신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사립학교들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일제의 조선병탄 이후 제정된 <조선교육령>에 의해 대부분이 폐교되고 말았다.

함석헌이 네 살 적에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여덟 살 때인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에서 처단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의 2천만 겨레에게 엄청난 환희와 감격을 안겨주었다. 소년들에게도 그랬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함석헌은 1912년 이용엽 등 친구 4명과 안중근의 ‘단지동맹’ 대신 잉크로 손도장을 찍은 문서를 만들어 하나씩 나눠 갖고 일심단(一心團)을 조직하였다.

안중근 의사처럼 왜놈들을 물리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어른들에게 알려지면서 일심단은 곧 해체되었다. 일본군과 러시아군으로 갈라서 ‘전쟁놀이’를 하던 철부지 아이들의 행동 치고는 유다른 일이었다. 당시 조선의 민심이기도 했다.

이 일은 함석헌의 끈질기고 치열한 저항사의 첫 번째 사건으로 꼽아도 될 것이다. 일심단은 해체되고 말았지만, 함석헌의 단심(丹心)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이제 와 생각하면 꿈 같은 일이요 어린애다운 한 웃음거리지만, 그래도 잊을 수 없이 내 속에 남긴 무엇이 있다. 새파란 잉크를 일부러 불에 쪼여서 내 엄지손가락 인을 찍었던 그 모양이 지금도 눈 앞에 또렷 또렷이 보인다. 이놈의 손가락, 열두 살 때 한맘 바쳐 나라 위해 죽겠다고 내 손으로 인을 찍었던 내 손가락, 일제시대엔 일본 형사가 제 맘대로 끌어다 꾹꾹 찍고, 공산시대엔 소련 군인이 또 맘대로 끌어다 꾹꾹 찍은 이 손가락, 이 운명의 손가락, 그냥 둘까 잘라 버릴까? 글을 쓰다 말고 이 손가락을 들여다본다. (주석 6)

함석헌이 열 살 때 나라가 망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병탄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개국 이래 처음으로 국권이 왜적의 손에 넘어갔다.

나라는 망했다. 산도 그 산이요, 바다도 그 바다요, 하늘도 그 하늘, 사람도 다름없는 흰 옷 입은 그 사람들이건만 이제부터 자유는 없단다.

자유가 무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자유 속에 자유가 무언지 모르고 살았던 나는 이제부터 자유가 무언지를 배워야 했다.

대한이라 하면 안 된다. 조선이라 해야 한다. 태극기는 떼어버려야 한다. 일장기 그리기를 배워라. 이제 우리나라 임금이란 것은 없다. 일본사람이 총독으로 와서 우리를 제 맘대로 한다. 나는 그 ‘흑노망향가(黑老望鄕歌)’란 노래를 들은 일이 있다.

온 세상이 다 재미 없고
늘 슬플 뿐일세
내 늘 원은
내 집에 보내주오.
(주석 7)

열 살 짜리 소년에게도 망국 - 국치의 소식은 충격이었다.
남달리 영민하고 집안이 일찍부터 민족주의사상에 접했던 까닭이었다. 비교적 일찍 개화의 물결을 탄 용천 지역의 정신사적 산물이기도 했다. 2년 뒤의 일심단 사건은 국치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내가 열 살 때, 나라가 망하던 때, 그가(함일형-필자) 몇 사람 되는 동리 어른들과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려 통곡하며 “하나님…”부르짓던 것이 지금도 눈에, 귀에 선하다. 어른이 그렇게 통곡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무서운 것도 같고, 나도 섧기도 하고, 무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전신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나라가 뭔지를 조금 깊이 느낀 것도 그것이 처음, 기도를 정말 들은 것도 그것이 처음. (주석 8)


주석
6> 함석헌, <나라는 망하고>, <사상계> 1959년 3월호.
7> 앞과 같음.
8>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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