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6 09:02 김삼웅

 

 

함석헌이 좋아하는 인물은 김시습이었다. 둘은 닮은 데가 많았다.

김시습이 미친 모양을 하고 다니며 길가(세조치세)에 오줌을 쌌다. 그것이 누구냐? 그가 길을 가다가는 주저앉아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하고 통곡하던 바로 민중 그 자신이 아닌가? 오줌을 쌌다니 어디다 싼 것일까?

세조의 정치에 대해, 바로 세조의 얼굴에 대고 싼 것이지 뭐냐? 칼을 뽑아 물을 잘라도 물은 오히려 흐른다고, 사람의 모가지는 자를 수 있어도 민중의 오줌인 신화, 전설, 여론은 못 자를 것이다. 봐라! 두고 봐라! 한이 뼈에 사무쳤다니 원수라도 갚을까 봐 겁이 나 그러냐? 비겁하다! 그게 아니다. 미친 체 오줌을 싸는 것은 원수 갚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비겁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에서 싸는 오줌이 아니야. 오줌 쌈을 받는 놈보다는 스스로 좀 넓고 큰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야. 소원이야 예수처럼 죽으면서도 죽이는 놈을 위해 복을 빌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만한 얼의 실력은 없으니, 오줌이라도 싸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장자, 휘트맨 등 들사람의 정신을 소개하면서 참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 함석헌은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 없어 이꼴이다. …들사람이어 옵시사! 와서 이 다 썩어져 가는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

함석헌의 이 글은 5.16 쿠데타로 기백을 잃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한줄기 석간수처럼 목마름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한 마리 ‘야생마’처럼 포악한 독재와 싸우면서 민주주의와 씨알의 권리를 지키는 등대지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들(野)’은 거칠고 투박함을 상징한다. 그 대신 순수하고 자연적인 힘을 갖는다. 옛날에는 지배세력은 성(城) 안에 살고 피지배층은 성 밖에 살았다. 성 밖의 씨알ㆍ민초ㆍ백성들이 성안 귀족들을 먹여 살렸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성을 지키려 싸우다 죽었다. 들은 이들의 백골로 덮히고, 부토가 되어 씨앗을 키웠다.

함석헌의 ‘들사람론’은 현실적 ‘약은 문화인’과 대비된다.

그럼 달리는 차 같은 이 시대 풍조에 어떻게 하나? 누가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브레이크를 밟는 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다 죽더라도 휩쓰는 이 물결을 막으려 홀몸으로 나서는 야인, 들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이 없어 이꼴이다.

함석헌은 태어나기를 평안도 용천 바닷가 상민출신의 야인이었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도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의 배경도 들사람의 상황이었다. 나라가 망할 무렵(1901년)에 태어나 감수성이 예민한 19세 때에 3ㆍ1운동을 겪었다. 오산학교에서 들사람 류영모ㆍ이승훈ㆍ안창호ㆍ조만식을 만나면서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 유학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야인사상에 접하게 되면서 함석헌의 ‘들사람’의 혼이 성장한다.

함석헌은 이 글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바벨탑 이야기를 모르나? 이제 우리가 아무리 지식 기술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정말 우주적인 크고 높은 정신에 철저하다면, 소련이나 미국의 지금 앞선 것쯤은 문제 아닐 것이다.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생각과 정력을 몇 해나 더 민중을 누르고 짜먹을 수 있나 거기만 쓴단 말이냐? 너희 생각이 그렇게 작고 비루하니까 너희 자식들이 저렇게 망나니가 되지. 그러나 이제라도 아니 늦다!
빈 들에 외치라!

함석헌이 살아 온 시대적 배경, 분단ㆍ6ㆍ25전쟁ㆍ연이은 독재정치는 그의 야인정신을 저항정신으로 체화시킨다. 그가 걸어온, 걷고자 한 야인의 길은 권력ㆍ종파ㆍ세력ㆍ집단화를 거부하는, 순수 재야의 들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무게가 있었고 글은 비중이 실렸으며 그의 노선은 민중이 따랐다.

야인정신에 함께하기 마련인 저항정신으로 하여, 함석헌은 폭압의 시대에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척박한 이 땅의 들길에서 반독재와 평화통일, 그리고 씨알이 주인이 되는 민주화의 소금수레를 끄는 야생마의 역할을 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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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5 08:00 김삼웅

 

함석헌이 방점을 찍고자 한 부문은 권력을 우습게 여기는 엄자릉의 자유혼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한 개 선비로서 일어나 어지러워 가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전쟁이 다 끝나고 천하가 완전히 제 손아귀에 들어온 줄을 알게된 담, 맘에 좀 불안을 느꼈다. 이제 천하에 나를 칭찬 아니할 놈이 없고, 내게 복종 아니할 놈이 없건만, 단 하나 한 사내만이 맘에 걸린다. 그것은 엄자릉(嚴子陵)이다. 그는 광무제의 동창 벗이었다.

한 가지 성현의 도를 닦는 시절 서로 맘을 알아주는 벗으로 허락을 했었고, 높은 이상과 도타운 덕에 있어 그가 자기보다 한 걸음을 내켜 드딘 줄을 아는 광무제는 첨의 선비의 뜻을 버리고 권세의 길을 탐해 천자가 되기는 했지만 자릉이가 자기를 속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줄을 알았다. 그 생각을 하면 앞에 네 발로 기며 아첨하는 소위 만조백관이란 것들이 보기도 싫었다. 그래 사람을 부춘산에 보내 냇가에 낚시질하는 엄자릉이를 데려오라 했다.

자릉이 따라왔다. 대신이오 무어요 하는 물건들이 뜰 아래 두 줄로 버텨 서서 감히 우러러도 못보는 데를 자릉이 성큼성큼 걸어 광무 앉은 곳으로 쑥 올라갔다.

“아. 문숙(文叔)이 이게 얼마만인가?”

그동안에 몇 해의 전쟁이오 나라요, 정치요, 천자요, 그런 것은 당초에 코 끝에 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하들은 어쩔줄을 몰랐다. 광무도 도량이 넓다고는 하나 짐승처럼 부려먹는 신하들 앞에서 제 위에 또 권위가 있는 것을 허락해 보여 주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릉이를 신하 대접을 했다가는 당장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고 물론 자릉이 그럴 이도 없겠지만 광무의 맘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인지 모르는 기(氣)에 눌림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신하들 보고는 “너희들은 물러가라, 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서로 정을 좀 풀련다.”했다. 밤새 이야기를 하다 잤다.

천문을 보는 신하가 허방지방 들어와 “큰일 났습니다. 객성(客星)이 태백(太白)을 범했으니 무슨 일이 일삼는지 모르겠습니다.”했다. 태백이란 지금말로 금성인데 옛 사람 생각에 그것은 임금을 표시한다 했다. 객성이란 다른 별이란 말이다. 임금을 절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엄자릉이 자면서 광무의 배 위에다 다리를 펴 올려놓고 잤더라는 것이다. 그래 후의 시인이 자릉의 그 기상을 대신 말하여,

萬事無心一釣竿 (만사무심일조간)
三公不換此江山 (삼공불환차강산)
平生誤識劉文叔 (평생오식유문숙)
惹起虛名萬世間 (야기허명만세간)

일만 일에 생각 없고
다만 하나 낚시대라
삼공벼슬 준다한들
이 강산을 놓을소냐
평생에 잘못 봤던
유문숙이 너 때문에
쓸데없는 이름날려
온세상에 퍼졌구나.

함석헌이 이 무렵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엄자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이 가장 따르고자 했던 인물은 매월당 김시습이 아닐까.

세조 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난 소식을 듣고 중이 되어 독서와 저작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유교와 불교의 정신에 통달하고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당대에 으뜸이었으며 산천을 주유하고, 권력자들을 타매했던 ‘무관의 제왕’이었다. 매월당은 함석헌 그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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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

012/12/04 08:00 김삼웅

 

함석헌의 글은 이어진다.

마케도니아 한 절반 야만의 자식인 알렉산더가 천하를 정복할 적에 당시 무화의 동산인 헬라를 말발굽 밑에 두루 짓밟았다. 감히 머리를 들 놈이 없었다. 오는 놈마다 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디오게네스란 유명한 어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젊은 아이의 영웅심 자만심에, 으레 제가 나를 보러 오겠거니 했다. 기다려도 아니왔다. 약도 올랐고 호기심도 일어나고, 부하를 데리고 디오게네스 있는 곳을 찾아갔다.

가보니 늙은이 하나가 몸에는 누더기를 입고 머리는 언제 빗질을 했는지 메두사의 머리의 뱀처럼 흐트러졌는데, 바야흐로 나무통 옆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이 나무통은 그의 소유의 전부인데 낮에는 어디나 가고 싶은데로 그것을 굴려가지고 가고 밤에는 그 안에 들어가 자는 것이었다. 디오게네스는 누가 왔거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젊은 영웅은 화가 났다.

“너 알렉산더를 모르나?”

제 이름만 들으면 나는 새도 떨어지고 울던 애기도 그치는줄만 아는 알렉산더는 맘속에 “저놈의 영감쟁이가 몰라 그러지 제가 정말 나인줄을 알면야 질겁을 해 벌떡 일어설테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한 소리였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놀라지도, 코를 찌긋도 않고 끼웃해 알렉산더를 물끄럼 보고 하는 말이 “너 디오게네스를 모르나?” 그러고는 목구멍에 침이 타 마르고 있는 젊은 정복자를 보고 “비켜, 해 드는 데 그림자져” 했다.

산림학파(山林學派)가 있었다. 조선조 10대 연산군 이후의 계속된 사화와 당쟁으로, 이를 피하여 정계를 떠나 강호(江湖)에 파묻혀 독서와 문장으로 세월을 보내던 학자ㆍ문인들이다. 서경덕ㆍ이황ㆍ조식ㆍ이이 등이 대표적인 강호파이다. 이들 역시 순수한 들사람은 아니다. 함석헌이 이 시기에 살았다면 혹시 이 부류에 들었을까 싶지만, 아닐 것이다.

함석헌의 뜻은 단호하다.

뼈다귀가 빠질 대로 다 빠지고 살이 썩을 대로 다 썩은 우리나라 이씨네 500년에 있어서도 그래도 무슨 기백이 남은 것이 있다면 상투 밑에서 고린내는 났을망정 한 줌 되는 산림학자 있지 않았나? 정몽주를 때려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선죽교에 피가 흐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계ㆍ이방원을 만고의 죄인으로 규정짓는 민중의 판단이지, 왕위에 또 왕이 있단 말이지 무언가? 야차(夜叉) 같은 수양으로도 미친 녀석 같은 김시습을 어떻게나 모셔보려 애를 쓴 것은 무엇인가? 칼보다 더 무서운 칼이 있고 곤룡포보다 더 아름다운 옷이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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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회] 함석헌사상의 본령은 야인정신: 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3 10:00 김삼웅 우리 역사에서는 옛날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 http://t.co/FRBp5dWh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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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3 10:00 김삼웅

 

 

우리 역사에서는 옛날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다.
야만인이라는 뜻이 담겼다. 사전에서는 야인을 ① 교양이 없고 예절을 모르는 사람 ②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 ③ 시골사람 ④ 야만인으로 표기한다.

함석헌은 야인을 ‘들사람’이라고 해석했다.
종합교양지 <새벽> 1959년 11월호에 함석헌은 ‘들사람 얼’이란 부제가 붙은 "야인정신"이란 글을 썼다.
함석헌은 20권에 이르는 전집이 간행될 만큼 많은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하였지만, 나는 그의 많은 글 중에서 한 편을 고르라 한다면 서슴지 않고 "야인정신"을 들겠다.

함석헌은 교육사상가, 언론인, 종교인, 역사학자, 민주화운동 지도자 등 다양하게 불린다.
실제로 ‘어느 하나’ 가 아니라 이들 모든 분야를 넘나들고 포괄하는 큰 그릇이었다. 그렇지만 나보고 누가 함석헌의 본령(本領)을 지적해보라면 서슴지 않고 ‘야인(野人)’, 바꿔말해서 ‘들사람’이라 하겠다. 단순히 관직이나 공직에 나가지 않았데서가 아니라 그의 품성과 생각과 활동이 ‘야인’이었다. ‘야인’, 곧 들사람 정신이야말로 함석헌의 본령이고 사상이고 행동철학의 준거가 되었다.

함석헌사상의 상징어인 ‘씨알’은 들사람의 올갱이다.
함석헌의 역사관, 교육관, 민중관, 언론관, 종교관은 하나같이 야인정신, 들사람 정신에서 발원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의 들사람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사상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야인정신"은 이승만 폭정의 말기에 많은 지식인, 언론인, 문인, 종교인들이 ‘관제화’, ‘어용화’ 된 시점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다수 지식인ㆍ언론인들이 어용화된 시대에 함석헌은 광야에 선 모세처럼 ‘야인정신’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폭압과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권력에 기웃거리는 청년, 교사, 언론인, 종교인, 학자, 문인들에게 ‘내리치는’ 채찍이었다.

<새벽> 24〜38쪽에 이르는 권두논설은 함석헌 특유의 쉬운 구어체로 쓰였다. 함석헌사상의 모태이기도 하는 ‘야인정신’을 보여주는 몇 대목을 살펴본다.

“임금이구 뭐고 내게 상관이 뭐야?”

요(堯)가 천하를 얻어 임금이 된 다음, 세상에서 자기의 다스림을 어찌하나 알아보려 한번은 시골을 나갔다. 밭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농사꾼을 보고 슬쩍, “당신은 우리나라 임금을 아시오?” 했다. 농부가 그 말을 듣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흙덩이만 까면서 하는 말이 “아, 내가 해 뜨면 나오고, 해 지면 들어가고, 내 손으로 우물 파 물 마시고, 밭갈아 밥 먹고, 임금이구 뭐구 내게 상관이 뭐야?” 했다.

요가 속으로 내가 나 있는 줄을 모르리만큼 했으니 어지간히 하기는 했구나 하면서도 아무래도 맘이 시원치 못했다.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하자는 맘이오 가르치잔 생각이므로 호강이나 세력을 부리잔 뜻은 없어, 집을 지어도 백성보다 나은 것이 겨우 흙으로 싼 새 층대에서 더한 것이 없었음을 자기도 스스로 알지만, 그래도 어쩐지 맘의 한 구석에 불만이 있었다.

그래 사람을 영천(潁川) 냇가에 보내어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전에 도를 같이 닦던 시절의 친구인 소부(巢父)ㆍ허유(許由)에게 가서, 나와서 벼슬을 하고 같이 일을 하자고 권했다. 그랬더니 소부가 그 말을 듣고는 “예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군”하고, 그 영천수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 허유가 송아지를 먹이면서 마침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그 모양을 보고 “야, 그 물 더러워졌다. 그것 먹이면 내 송아지 더러워진다.”하고 끌고 위로 올라갔다.

‘허유세이(許由洗耳)’의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순의 성군이나 소부ㆍ허유의 무욕정신, 탈권력에는 함석헌 자신의 무욕ㆍ야인정신이 배어 있음을 보게 된다.

“감탕속에 꼬리치고 싶다 해라”

장자(莊子)가 초나라에 갔다가 어느 냇가에서 낚시질을 했더니, 그 나라 임금이 듣고 신하를 보내어 예물을 잔뜩 가지고 와 하는 말이, “우리나라 임금이 선생님의 어지신 소문을 듣고, 꼭 오시어 우리나라를 위해 일을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했다.

장자 그 이야기를 듣더니 하는말이 “이애, 여기 제사 돼지가 있다. 그놈 살았을 때 진장속에 뒹굴고 있지만 제삿날이 오면 비단으로 입히고 정한 자리를 깔고 도마 위에 눕히고, 칼을 들어 잡는다. 그때 돼지가 되어 생각한다면 그렇게 죽는 것이 좋겠느냐? 또 너희나라 사당 안에 점치는 거북 껍질 있지, 그놈이 살았을 때 바닷가 감탕 속에 꼬리를 끌고 놀던것인데 한번 잡힌 즉 죽어 그 껍질을 미래를 점치는 신령이라 하여 비단보로 싸여 장안에 간직해 두게 되니, 거북이 되어 생각한다면 죽어서 그 영광을 받고 싶겠느냐? 감탕 속에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겠나?”했다.

왔던 사신의 대답이 “그야 물론 진장, 감탕 속에서 딩굴고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지오.”, “그렇다면, 가서 너희 임금보고, 나도 감탕속에 꼬리를 치고 싶다고 해라. 천하니 임금질이니 그게 다 뭐라더냐?” 하고 장자는 물 위에 낚시를 휙 던졌다.

조선시대에 사림(士林) 세력이 있었다. 7대 세조 때에 갈리기 시작한 유림의 파벌 중 하나로, 김종직ㆍ김숙자ㆍ김굉필ㆍ정여창ㆍ조위ㆍ김일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다. 9대 성종 때부터 관계에 등용되어 종래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대립하였다. 하지만 사림은 들사람, 야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권력을 추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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