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2 08:00 김삼웅

 

 

학교를 자퇴한 뒤 2년 동안은 함석헌에게 고뇌와 방황의 시기였다.

“공부를 중단하고 두 해 동안 번민할 때 포플러에 기대고 서는 밤도 많았고 숲 속으로 바다로 지향없이 헤매던 날도 많았지만, 무언지 아직 꼬집어 문제를 삼지 못했습니다.” (주석 5) 란 기록에서 잘 나타난다.

고향 마을에는 온갖 신문이 나돌았다. 만세 부르다가 학교에서 쫓겨나 맨날 산에 올라 창가만 부른다. 심지어 함석헌이 미쳤다는 등의 박소문이었다. 함석헌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줄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심중을 꿰뚫고 다시 공부를 하도록 일깨웠다.

1921년 늦은 봄이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정처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이곳저곳 학교를 돌며 입학의 길을 찾았으나 이미 신학기 개학날이 지나서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다시 귀향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거리에서 집안의 형이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났다. 그는 서울 배제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고향마을에 기독교를 맨 먼저 전도한 사람이다. 그는 대한청년단 재정부장과 대외문서작성 관계를 맡는 독립운동가였다. 어렸을 적부터 함석헌을 무척 아껴왔다.

함석규는 함석헌을 정주의 오산(五山)학교로 가라고 권했다.
그래서 오산으로 내려가 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다. 그때까지도 함석헌은 오산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이 학교의 존재도 몰랐다. 남 같으면 대학을 졸업할 나이에 오산중학 3학년생이 되었다. 명문이라는 관립 평고생이 무명의 오산에 가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의 오산학교 입학은 또 한 차례 인생의 길을 크게 바꾼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였다. 3ㆍ1운동이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는 계기였다면, 오산입학은 새로운 얼ㆍ혼ㆍ알의 탄생이었다. 함석헌은 오산에서 민족정신의 수련을 닦게 되었다.

오산은 뒷날 함석헌이 풀이한대로 ‘다섯 뫼(五山)’의 지형으로, 익주의 고성(古城)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연향산과 해성산, 서쪽에 제석산, 서남쪽에 천주산, 남쪽에 남산봉이 둘러쳐진 곳이다. 여기에 남강 이승훈이 1907년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세웠다.

사업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된 남강은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교육진흥론>이란 강연을 듣고 난 뒤 개인의 영달보다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결심 아래 금주ㆍ금연과 단발을 결행하고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오산으로 돌아와 기존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에 이어 오산학교를 세웠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농가집 사랑방이나 건너방에 서로 끼어 욱적거리니 몸이 성하고 장질부사가 나고 더럽기 한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수준 이하의 교실이었다. 엉터리 교사도 더러 있었다.

학생도 합탕이었다. 전부터 있는 학생은 몇이 안 되고, 모두 새로 모여든 사람들인데 평고 퇴학자가 있지, 신성(학교)에서 닦아회(동맹휴교) 하고 온 자가 있지, 서른 된 수염난 이가 있지, 교회 장로 하는 사람이 있지, 훈장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본 백화파(白樺派) 문학을 읽고 문사연하는 치가 있지. (주석 6)

본래의 학교 건물은 3ㆍ1운동 때 일본 헌병대가 ‘민족주의의 소굴’이라 하여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한 해 뒤 독지가 김기흥이 거금을 내놔 45평의 세 칸짜리 임시교사를 지었다. 함석헌이 입학했을 때는 이 교사였다. 설립자 남강은 민족대표 33인의 기독교 대표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일본 관헌들은 눈에 불을 켜고 교사와 학생들을 감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누구 하나 겁먹거나 불평하지 않고, 민족의식으로 똘똘 뭉쳐 열심히 공부하였다. 함석헌에게 이런 모습이 경이로웠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을 ‘만났’다. 남강 이승훈ㆍ도산 안창호ㆍ고당 조만식이다. 이들은 당대의 민족지도자이고 인격자이며 교육자, 신앙인이었다.

함 선생이 오산학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 남강은 3ㆍ1운동 후 옥중에 있었다. 함 선생이 남강과 직접 접촉한 기간은 오산의 교사로 취임한 1928년 봄부터 남강이 급사한 1930년 5월까지 2년밖에 안 된다. 그리고 함 선생이 도산을 만나 뵌 것은 잠깐잠깐 두 번 뿐이라고 한다. 고당도 3ㆍ1운동 전후 두 번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나 함 선생이 오산에 편입했을 때는 이미 교장으로 있지 않았다. 함 선생은 고당에게 배운 일이 없다. 이처럼 세 분은 함 선생이 직접 글을 배운 선생님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맘속으로 참 스승으로 우러러 모신 이가 이 세분이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주석 7)


주석
5>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씨알의 소리>, 1970년 4월호.
6>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4권, 163쪽.
7> 노명식, 앞의 책,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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