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필화사건 이후 정열적으로 글을 썼다.
주로 <사상계>의 지면이지만 <사조(思潮)>와 <신태양>, <새벽> 등 월간지에도 기고하였다. <나의 인생시초(詩抄)>, <사자냐 아메바냐>, <새 삶의 길>, <정치와 종교>, <우리가 어찌할꼬>, <겨울이 만일 온다면>, <때가 오고 있다>, <물 아래서 올라와서>, <나라는 망하고>, <3ㆍ1정신>,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백두산 호랑이>, <남강ㆍ도산ㆍ고당>, <사모님론>, <이단자가 되기까지>, <내 것이냐 카에자의 것이냐>, <한배움>, <38선을 넘나들어>, <들사람 얼(야인정신)>, <씨알의 설움>, <평화적 공존은 가능한가>, <간디의 아슈람>, <에밀레> 등이다. <사상계>에 쓴 글은 일종의 자서전적인 글이다. (주석 18)

1959년 1월호 <새벽>에 쓴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씨알의 꿈틀거림을 내다보는 예언서와 같은 글이었다. 이승만의 노욕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보안법 개정을 통해 비판세력을 탄압하면서 1959년 4월 30일 야당지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사망했는데도 부통령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조기에 제5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야당 유세장에 못가도록 일요일에 등교시킨 데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다.

함석헌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1960년 초부터 3월 1일까지 44일 동안 자신과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을 벌였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의 수단으로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단식에 앞서 머리와 수염을 깎았다. 취재 기자의 전언이다.

단식으로 함 선생의 용모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 우선 머리와 수염을 깎은 것이다. 그리고 어딘지 핏기가 가시고 피로가 느껴진다. “철저히 단식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 설탕물도 먹구….” 결국 문제는 ‘마음이 맑아지고’ 참회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시며 앞으로도 글도 쓰지 않고 참회의 고행을 계속함으로 2개월 동안은 글도 안 쓰고 발표도 안 하실 작정이라고 하시며 극구 “거 좀 내 얘기 안 나오게 해줘! 글이 문제야 말이 문제야, 난 죄인이야!” - 함 선생의 간곡한 말씀에 기자도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하시던 함 선생, 모 신문을 읽으시더니, “학원의 자유, 정치 도구화 반대라, 그래 일요일에 학교 나오라는 사람이 나쁘지, 건 잘못했구만, 학생이 어디 나쁜가. 젊은 기백으로 의당 있을 수 있는 현상이지…. 사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한심해, 쩍 하면 도미(渡美)한다 빽찾구. 학생 나무랄 것 있나. 교육자가 나빠. 학생들 말이 교수들의 강의에 환멸을 느낀대요. 교수들이 사상이 있어야지.
(주석 19)

함석헌이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사상 유례가 없는 3ㆍ15 관권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에 항의하는 마산의거에 이어 4ㆍ19혁명이 일어났다. 서울로 올라온 함석헌은 종로 2가 100번지 사상계사에서 장준하와 함께 시위대열을 지켜보았다.

“4월 19일 두 분(함석헌과 장준하-필자)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한청빌딩에서 지켜보시던 모습은 묵묵히 역사의 격류속으로 되새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주석 20)

4ㆍ19날 시위 시민ㆍ학생들은 종로 화신 앞에서 종로 5가까지 한 길을 가득 메웠을 적에 한청빌딩의 사상계 깃발을 보고 격려와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두 사람은 손을 흔들어 답례하면서, 이름 없는 민초들이, 씨알들이 결정적인 순간이면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학생과 시민들은 이승만 12년 독재와 자유당을 타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체세력이 없는 혁명은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가면서 민주당의 몫이 되었다. 민주당은 내각제 개헌으로 집권당이 되면서 분열하고 무능함을 내보였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1년 1월호에 <국민감정과 혁명완수>를 썼다. 혁명 뒤의 혼란과 민주당의 분열상에 분노하는 글이다.

“4ㆍ19혁명은 실패다. 허정 과도정부는 그만두고 장면의 정부는 이날까지 해논 것이 무엇인가? 당파싸움하는 동안에 겨울은 다 되고, 생산기관 하나 신통히 돌아가는 것 없고, 민중은 못 살겠다고만 하는데, 농 안에 가뒀던 쥐는 다 도망가고…." (주석 21)

‘농 안에 가뒀던 쥐’는 이승만의 하와이 탈출과 부정선거 원흉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법망을 피한 것을 지적한 내용이다.

새로 쥐를 잡지는 못하나마, 잡아 준 쥐도 놓쳐? 나는 사형 폐지 주장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원흉이라고 죽여야 한다는 것 아니요, 또 나 자신이 이승만이요 자유당인 판에, 감히 애국심의 전매특허나 하는 듯 엄벌주의 주장할 양심도 없지만, 정권을 쥐고 민중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으로써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말이다.

하면 하는 것이고 아니 하면 깨끗이 손을 떼는 것이고, 놔주면 놔주는 것이고 그렇지 않음 분명히 처리를 했어야지, 어물어물하는 동안에 다 놓쳐버렸다. 대체 왜 다 잡아 논 쥐를 못먹나? 이 고양이가 벌써 늙었나?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도둑질을 해 배가 불렀나?
(주석 22)

함석헌은 4ㆍ19가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그 이유를 ‘헛총’이었기 때문이라 비유하였다. 역설논법이다. 당시 세간에 ‘헛총’이란 말이 유행되기도 했다.

4ㆍ19는 실패다. 왜 실패했나?
헛총이었기 때문이다. 4ㆍ19혁명은 헛총이다. 헛총 쏜 학생들이 잘못이란 말은 아니다. 헛총 쏜 것 잘했지. 마땅히 헛총이어야지. 헛총의 뜻은 무엇인가?

이 도둑놈들아 물러가라.
아니 물러가면 쏜다.
우리게 정말 총알 있다.
그러나 너희를 사람으로 본다.

하는 뜻이 들어 있다. 헛총을 쏘면 사람으로 대접한 것이요, 알을 넣어서 쏘면 짐승으로 여긴 것이다. 마음은 헛총에 맞아 살아나는 것이요, 살은 알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허칙실(虛則實)이요 실칙허(實則虛)다. 학생들 잘했다.

그런데 왜 실패했나? 쏜 것은 도둑놈 쫓으려고 쏜 것인데, 앞에 있던 몇 놈은 사람다운 정신을 차려서는 아니지만 앞에 있었던 만큼 혼쌀이 나서 도망을 쳤는데, 뒤에 섰고 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것들도 맘은 같은 도둑인지라 알이 아니든 줄 알자 기어 든 것이다.
(주석 23)

함석헌은 민중이 일어나 혁명을 완수 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말미에서 예언가와 같은 말을 남긴다.

“길가의 막돌을 되는대로 던지는 듯 한 이 글을 다 썼는데 때 아닌 겨울 장마가 한 주일이냐 계속하다가 해가 나나보다 했더니 또 눈을 뿌린다. 그것은 무슨 예언인가?” (주석 24)


주석
18> 정현필 정리, <함석헌 저작 연대별 분류>, <함석헌 연구>, 제3권 제1호, 2012.
19> S기(記), <단식 44일 끝나다>, <세계>, 1960년 4월호.
20> 이문휘, <문화강연회 가치를 높이 들고>, 장준하선생 20주기 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광복50년과 장준하>, 1995.
21> <사상계>, 1961년 1월호, 권두논단.
22> 앞과 같음.
23> 앞과 같음.
24>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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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7월 31일 오전 10시 46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http://t.co/4rrSFII4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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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회] 이승만 정권에 투옥ㆍ수모 겪어: 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3 08:00 김삼웅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말기적인 전재.. http://t.co/HaHLLbt6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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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3 08:00 김삼웅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말기적인 전재를 일삼았다.
58년 연초 형법의 언론보도 규제 조항으로 언론기본권을 제약하고,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진보당 간부 7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5월 2일 실시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관권이 동원된 부정선거로 자유당이 126석(민주당 79석)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함석헌의 필봉은 이 지점에서 더욱 날을 세운다.

선거를 하면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는 팔고 억지를 쓰고,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 뿐이요, 내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 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나? 칼은 있기는 있나? 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했는데, 그렇게 사치한 벼슬아치들이 칼이 있을까? 정육점의 칼 가지고는 나라는 못 잡을 것이다. (주석 14)

이 글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정부는 함석헌을 구속했다. 8월 8일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구속 이유는 남한을 ‘꼭두각시’라 하여 정부를 부정하는 이적행위를 했다고 몰았다. 20대의 젊은 담당 형사는 함석헌을 수사하면서 뺨을 때리고 수염을 뽑았다. 자식보다 어린 경찰의 만행 앞에 참담함을 가누기 어려웠다.

트레이드마크처럼된 수염은 소련군에 잡혀있을 때 깎지 못하고, 38선을 넘으면서 그대로 두었던 것이 자라서 상징처럼 되었다. 경찰은 일제나 소련군 치하와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성격이 일선 형사에게 그대로 전이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이문동’과 ‘남산’, 전두환 정권의 ‘남영동’이 집권자의 의지의 발현이듯이 자유당 정권기의 경찰은 이승만의 수족이었다.

함석헌은 ‘꼭두각시’의 두목을 비롯하여 수족들의 사냥감이 되었으나, 민중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사상계>는 불티나게 팔렸다. 정의와 진실에 목말라했던 씨알들에게 모처럼 들려주는 청량수였다. 원래 이 글에는 제목이 없었던 것을 편집자 계창호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붙인 것이다.
(주석 15)

그런데 사장 장준하의 이름으로 쓴 <사상계> 8월호 권두언 말미에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우리 겨레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깊이 반성할 때는 왔다고 본다. 의(義)의 씨를 뿌려야 의의 열매는 거두어 진다”고 쓴 것으로 보아 장준하의 뜻이 배인 것 같다. <사상계> 8월호에는 ‘실존주의 특집’과 주요한의 <우리의 비원>, 유기천의 <자유사회>, 김팔봉의 <우리가 걸어온 30년> 등 읽을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단연 돋보이는 글은 함석헌의 이 논설이었다.

함석헌은 검찰의 불기소처분으로 20일 만에 서울시경 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
딱히 보안법으로 얽을 조항이 없었고 국민의 비등한 여론때문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이승만 정권은 농성중인 야당 의원들을(무술경위들을 동원하여) 지하실에 감금하고 신국가보안법을 변칙 처리했다. 내용 중에는 “허위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하는 행위”를 끼워넣었다. 함석헌 류의 정부 비판을 봉쇄하려는 언론탄압용 조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함석헌은 정치평론, 바꿔 말해서 독재비판의 험난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석방된 함석헌은 9월호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를 통해 다시 소신을 밝혔다. “정부를 비난했기 때문에 정부를 부인하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게 무슨 정부요, 관청이냐?’ 하는 말을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 들으면 물론 분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말을 중공이나 소련보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욕을 하는 것은 하리만큼 사랑하고 믿고 기대하기 때문 아닌가? 다스리는 자는 다스림 받는 자보다 도량이 넓고 커야 할 것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투옥에도 필화에도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충견이 된 지식인과 언론인의 핏발 선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피력한다.

나는 앞으로도 싸움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잘못이 있다면 나 자신이나 남이나 우리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힘을 다해 싸울 것이다. 그것이 나의 나라에 대한 충성이요 동포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결코 감정으로, 미움으로는 아니 하기로 맹세한다. 감히 장담을 하리오마는 적어도 그리하고자 힘쓸 것이요, 하나님이 그 실력 주시기를 겸손히 빌 것이다. (주석 17)

이 해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로 월남 이상재 언론상을 받았다.
글을 문제삼아 감옥에 가두는 권력이 있는가 하면 상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유당 독재 12년 동안에 함석헌만큼 이승만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람도 흔치 않았다.

그는 일제 36년과 군정ㆍ전쟁ㆍ이승만 독재를 겪으면서 몸을 사리고 순치된 지식인ㆍ언론인들의 비판정신을 일깨우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주석
14> 앞의 책.
15> 계창호, <젊은 날을 불사른 사상계>, 장준하 선생 추모문집위원회 편,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 나남출판, 1995.
16> <사상계>, 1958년 9월호.
17>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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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

013/01/02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농사꾼 생활을 한 지 1년 여 만인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썼다. 6ㆍ25전쟁 발발 8주년을 되돌아보면서 한국 사회를 진단해달라는 장준하의 주문이었다. 그래서 부제를 “6ㆍ25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달았다.

이 글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로 기독교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지 2년여 만에, <할 말이 있다>는 평론으로 한국사회에 충격을 준 지 1년 반 만에, 이번에는 기독교계의 울타리를 넘어 전사회적으로 그리고 이승만 정권에 타격을 준 명논설이었다. 대 정치발언이고 본격적인 첫 정치평론에 속한다. 이 글을 통해 함석헌은 민중 속으로 들어오고, 씨알의 대변인이 되고, 독재 권력으로부터 1급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도합 여섯번째의 투옥이고, 남한에서는 첫번째 옥고가 되었다. 이승만 시대의 대표적 필화사건이고 <사상계>가 날개돋힌 듯이 팔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구어체 문장 즉 ‘함석헌 문체’로 쓴 첫 정치평론이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한자(문)에 중독되면서 고유한 민족언어를 상실하게 되었다. 지배층ㆍ지식인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조선 중기에 허균과 김만중이 한글로 소설을 썼는가 하면, 후기에는 일군의 중인ㆍ서얼들이 패관체(稗官體)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쓰인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런데 호학군주로 불리는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통해 패관체를 쓰는 사람을 문책하고, 향후 문체가 불순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조처했다. 전통적인 한문체의 글쓰기만 허용됨으로써 이후에는 <열하일기>와 같은 책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 뒤에는 일본식 문체와 영어식 문체까지 극성을 부리면서 우리 말, 우리 글의 문체는 설 땅을 찾지 못하였다. 함석헌이 <할 말이 있다>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부터 본격적인 구어체 문장, 씨알의 언어를 되찾아 쓰게 되었다.

6ㆍ25 싸움은 아직 우리 목에 씌워져 있는 올가미요 목구멍에 걸려 있는 불덩이다. 어떤 불덩이도 삼켜져 목구멍을 내려가면 되건만 이것은 아직 목구멍에 걸려 있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러므로 밥을 먹을 수 없고 숨을 쉴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울 수도 없는 것이다. 어서 이것을 삼켜 내려야 한다. 혹은 이 올가미를 벗어버려야 한다. (주석 11)

6ㆍ25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가 처한 질곡과 올가미를 비판한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일본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 형제가 한집에서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소통할 수는 있지 않았나? 지금 그것도 못해 부모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ㆍ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ㆍ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지 않는가?

이 부문이 이승만의 심기를 거슬리게 되고, 독재자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아가는 충견들의 충성심을 발로하게 만들었다. 이승만의 심기를 건드린 대목이 신랄하다.

그렇게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날 아침까지 몰랐으니 정말 몰랐던가? 알고도 일부러 두었는가? 몰랐다면 성의없고 어리석고, 알았다면 국민을 팔아넘긴 악질이다. 그러고는 밤이 깊도록 서울을 절대로 아니 버린다고 열 번 스무 번 공포하고 슬쩍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었다. 저희들도 서로 살겠다고 도망을 한 것이지, 정부가 피란한 것은 아니었다. 문서 한 장, 도장 하나 아니 가지고 도망한 것이 무슨 정부요 관청인가? 그저 나도 너도 피란가서 다시 거기서 만났으니 또 사무라고 본 것 뿐이었다. 민중이 신용 아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석 12)

자유당 전성기에 이승만의 실정을 이만큼 정곡을 찔러 비판한 논객은 일찌기 없었다. 이 글이 처음이었다. 북한군은 6월 25일 새벽 4시, 10개 사단 병력으로 24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침하였다. 이승만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에야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보고를 받았다. 6시간 30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서울 사수’의 거짓 방송을 녹음으로 틀어놓고 6월 27일 새벽 2시에 국회에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줄행랑을 쳤다. 함석헌이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비판은 이어진다.

전쟁이 지나간 오후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싸움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은 진 것 아닌가? 어찌 승전 축하를 할까? 슬피 울어도 부족할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 하고 떼어 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노자(老子)는 전쟁에 이기면 상례(喪禮)로 처한다 했건마는, 하기는 제2국민병 사건을 만들어 내고 졸병의 옷ㆍ밥을 깎아서 제 집 짓고 호사하는 군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과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울타리일까? (주석 13)


주석
11>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년 8월호.
12> 앞과 같음.
13>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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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57년 3월 충남 천안으로 이주하였다.
30년간(당시) 이발사로 일하면서 농지를 사모은 정만수가 농장을 만들어서 경영을 맡긴 것이다. 그는 일제말기 천안 자기 집에서 농촌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치다가 위험인물로 찍혀 1년 간 옥고 끝에 해방되던 해 3월에 풀려난 기독교인이다.

6ㆍ25전쟁 때에는 부산 중앙신학교에 입학하여 마침 함석헌의 강의를 듣게 되고 이어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읽었다. 이어서 부산 YMCA에서 함석헌의 <성경>, <노자>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종교와 사상에 뜻을 같이 하였다.

전후에는 서울의 중앙대, 고대 등 대학구내에서 이발사를 하면서 틈틈이 땅을 사모아 농장을 조성하여 함석헌을 초청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20년간 더 이발사를 하였다.

나는 일생을 남의 머리를 깎으며 살아왔다. 수 없는 사람의 머리가 내 손을 거쳐 갔지만 함 선생만한 머리를 지닌 사람이 없구나! 지금도 선생은 꼭 내손에 의해 이발을 하고 가신다. 나는 이 천직처럼 살아온 이발로 이제 선생을 이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람으로 만족한다. (주석 7)

함석헌은 정만수의 제안을 처음에는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선량한 사람이 평생 이발을 하여 마련한 농장을 인수하여 경영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그의 부탁이 워낙 강하고 진정성이 있어서 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 농장을 간디가 요하네스버그에서 톨스토이 농장을 운영하면서 60명 동지들과 일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친 것처럼 해 보잔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장이름을 ‘씨알농장’이라 지었다. ‘씨알’이란 이름의 본격 사용은 이때가 처음이다. 물론 이 용어는 유영모가 ‘창안’한 것이다.

“언젠가 대학(大學) 강의를 하시다가 ‘대학지도 재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大學之道 在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풀이하시는데 ‘한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뭄에 있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민(民)을 씨알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것이 참 좋아서 기회 있는대로 써 와서 이제 10년이 넘습니다.” (주석 8)

함석헌은 이 농장에 ‘씨알농장’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농장은 본래 땅주인이던 정만수 님이 30년 이발장이로 푼푼이 모아 얻은 돈으로 장차 어두운 농촌을 비추는 등불을 켜보자는 뜻으로 남 돌아도 아니 보는 묵은 데를 사서 해방 직후 과일 나무를 심은 것으로 시작됐고, 그후 김병태 님이 그것을 맡아 그 목적으로 강당까지 짓기 시작했던 것을 경영이 어려워져 그만두게 될 형편에 빠져 내가 맡게 되었다. 정성은 물론 모자라고 사업의 재주가 도무지 없는 나로서 스스로 그 적당치 않은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이 어려운 일을 맡은 것은, 하나는 정님(정만수-필자)의 막아낼 수 없는 간청이요, 하나는 오산시절 이래로 그리는 나의 농촌에 대한 꿈 때문이었다. (주석 9)

씨알농장의 운영은 쉽지가 않았다. 본래 농민이 아닌 그로서 그곳 농민들과 어울리기 어려웠고, 당시 농촌 현실에서 집단형 농업이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방 농민과는 친구가 됐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못하는 것은 내 죄다.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글공부 한 것이 죄가 되어 이러는 듯하다.(…) 우리 살림이라야 별것 없다. 4시면 일어나 찬물로 잘 때 씻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나 부르고 한 시간 명상이나 하고 보리밥에 배를 불린 다음엔 어둡도록 땅 파는 일이요, 짐승에 모이 주는 일이요, 10시에는 내일 해가 틀림없이 머리 위에 뜰 것을 믿고 누더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러는 동안에 친구가 있다면 봄에는 새벽 4시부터 반주를 해주는 푸른 공중의 종달새요, 가을엔 밤이 늦도록 노래하는 벽 틈의 귀뚜라미다.
(주석 10)

함석헌은 씨알농장에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농삿일을 하고 닭을 길렀다. 평평한 농지에는 보리ㆍ고구마ㆍ콩을 심고, 비탈진 땅엔 복숭아와 사과 등 과수나무를 심었다. 청년 몇 명이 참여하여 일손을 돕고, 밤이면 이들에게 강의하고 토론을 하였다. 간디의 <자서전>을 읽은 것은 이 무렵이다. 그는 뒷날 이 책을 번역하여 펴냈다.


주석
7> 정만수, <존경하는 함석헌선생>, <세계>, 1960년 4월호.
8> 함석헌, <씨알>, <씨알의 소리>, 창간호, 1970년 4월호.
9> 함석헌, <씨알의 설움>, <전집> 4, 72쪽.
10> 앞의 책, 7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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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2/12/31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자신의 존재와 <사상계>의 위상을 한층 돋보이게 한 글은 1957년 3월호에 쓴 <할 말이 있다>라는 글이다. ‘할 말’은 주권재민의 국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이지만,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부터 국민들은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권력은 반드시 변칙으로 종말을 고하고 만다. 이승만 정권은 그렇게 하다가 망했다. 함석헌의 이 논설은 <사상계>를 통한 최초의 대사회 발언이었다. 앞서 소개한 몇 편의 글이 대부분 기독교와 종교, 윤리 차원의 문제 제기였다면 이번 논설은 시사문제에 대한 함석헌의 본격적인 첫번째 노호(怒號)이었다.

밟아도 밟아도 사는 풀, 베어도 또 돋아나는 풀, 너는 무한의 풀 아니냐? 다 죽었다가도 봄만 오면 또 나는 풀, 심은이 없이 나는 풀, 너는 조물주의 명함 아니냐? 푸른 너를 먹고 꾀꼬리는 노래하고 사자는 부르짖고, 썩어진 물에서나 마른 모래밭에서나 다름 없는 향기를 너는 뿜어내니 너는 신비의 것 아니냐?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리오만 있어도 말을 아니하고 자라온 민중이다. 할 말이 없어서일까?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민중보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는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리집 같이 서 있는 학교 위에, 날아가는 돈 잡는다고 구더기 떼같이 밀려가는 군중들 위에, 그 군중을 또 박차고 먼지를 공중에 날리고 바람 같이 지나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미친 년놈들 위에, 또 그 모든 것 다 보면서 나라 망하는 줄은 모르고 재미난 구경한다고 극장 앞에 입을 헤벌리고 줄지어 섰는 저 미친 젊은 놈 젊은 년들 위에 제발 구정물이라도 끼어 얹어 줍시사!

이렇게 되는 역사에 무슨 잠꼬대라고 언론 취재가 무어냐? 저와 조금 다르면 공산당이라, 비국민이라, 이단이라! 제발 그런 소리 맙시사! 시대착오다. 역사의 거꾸로 감이다. 하늘 명령 거스름이다. 그것으로 망한 우리나라 아닌가? 제발 이 민중이 할 말을 하게 하라! 마이다스야 벌써 죽은지가 오래지 않나? 나는 죽어도 말은 아니할 수 없다.

시시비비의 판단이야 없지 않지만 있는 소감을 발표했다가는 언제 판국이 바뀌어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오랜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 알기 때문에 구차한 목숨 하나를 보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벙어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민중이 무표정이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더 꺼림없이 하게 된다. 그러면 비겁한 민중은 더욱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 이리하여 원인이 결과를 낳고 결과가 원인이 되어 세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무언극의 역사가 엮어졌다. 참혹하지 않은가. 비통하지 않은가.

함석헌의 이 평론은 한국사회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다음은 장준하의 회상이다.

이 글은 <사상계>를 돋보이게 할 글이요, 함 선생님을 우리 사회에서 놀라움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한 글이다. …각계의 반응은 충격적으로 나타났다. 시원하고 통쾌한 글이라는 사람, 독설이 심하다는 사람, 또 너무 독선적이라고 하는 사람, 하여간 우리 인텔리 사회에 크나큰 화제를 던진 글임에 틀림없었다. 1956년 1월호에 발표한 함 선생님의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에서 크게 분개하여 <신세계>지에 반박 논문을 썼던 윤형중 신부는 이 글 <할 말이 있다>에 대한 반박 논문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를 기고해 왔다. 이 논쟁의 시기에 <사상계>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형편으로 판매부수 4만부 선을 육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 지식층의 관심을 한 몸에 모은 잡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주석 1)

함석헌의 이 글은 ‘논쟁’의 발화점이 되기도 했다. 한국가톨릭을 대변해 온 윤형중 신부가 신랄한 반론을 제시하여 <사상계> 지상을 통해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윤형중의 반론은 5월호 <사상계>에 게재되었다. 윤형중은 함석헌의 글을 극렬하게 반박한다. 심지어 ‘공산당의 오열(五列) 냄새’가 난다고까지 극언했다.

함 선생이 신부가 안 되겠다니 천만다행이다. 설령 신부가 되겠다 할지라도 천주교회는 ‘모가지가 열네 번 잘리면 잘렸지’ 함 선생 같은 욕설가, 험구가, 모든 것을 혼동시만 하여 도무지 분별할 줄 모르는 그런 인물을 신부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주석 2)

복음서를 손에 들고서 천당 지옥도 믿지 않는 미지근한 함 선생이요, 현실의 모든 방면에 대하여 그처럼 지독한 불평과 불만을 품고 있는 함 선생이면 복음서와 함께 그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현행 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공산당에 본격적으로 입당함이 여하(如何)? (주석 3)

함석헌과 윤형중의 논전은 이어졌다. 함석헌이 <사상계> 1957년 6월호에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는 글을 통해 반론을 폈다. 그러나 글의 형식은 윤 신부를 직접 겨냥하지 않고 ‘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천하의 신부가 다 떠들어도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들은 다 교회라는 제도 밑에, 교황이라는 낮도깨비 앞에 제 인격의 자존성을 내놓고, 의지의 자유를 빼앗기고, 판단의 자유를 팔아버린 사람들이니, ‘제 말’이라고는 한 마디를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주석 4)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혀두고자 하는 말이 있다. 함석헌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윤형중은 뒷날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로서 유신체제와 싸우면서 함석헌과 ‘화해’하고 1979년 6월 15일 별세했다. 유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민주회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함석헌의 이 글에서는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사상계>가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 중에서 일부를 삭제했다는 점이다.

“나는 윤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왜 없냐? 공개토론 하자는 데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비겁한 일인 듯 하나 겁이 나서는 아니다. <할 말이 있다>는 글에서 잡지사가 깎았다는 부분은 이 대통령과 군인에 대한 말이었다. 나는 사실은 내 성의껏 말한 담엔 어떤 일을 당해도 좋다 생각했다. 군인ㆍ경찰ㆍ위력도 두려워 하고 싶지 않은 데 신부 한 사람 두려워 할까?”

<사상계>가 함석헌의 글에서 이 대통령과 군인에 대한 부분을 삭제하고 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승만 독재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라 ‘역린(逆鱗)’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준하는 아직 이승만 독재체제에 정면 도전을 머뭇거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저자)는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에서 삭제된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고, 참으로 놀랐다.

함석헌의 반론에 대해 윤형중의 재반론이 <사상계> 7월호에 게재되었다. 그러는 동안 <사상계>는 시중의 화제가 되고 공전의 판매 부수를 늘리게 되었다. 이 논쟁의 시기에 <사상계>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형편으로 판매부수 4만부 선을 육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 지식층의 관심을 한 몸에 모은 잡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주석 5)

함석헌은 친지들의 도움으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작은 한옥을 지어 입주했다. 1956년의 일이다. ‘원효로 4가’는 이후 한국 인권운동의 거점이 되고, 저항언론 <씨알의 소리> 편집실이 되었다. 한 번의 대종교 발언으로 그의 글과 말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사상계>는 거듭 거의 글을 청해 실었다. 기독교 비판 논설이 예상 외의 반향을 일으키고, 책의 판매도 크게 증가하면서 단골 필자로 모시게 되었다.

<사상계>와 인연을 맺게된 함석헌은 같은 해 4월호와 5월호에 <새 윤리>를 상하에 걸쳐 발표하고, 9월호에는 <건전한 사회는 어떻게 건설될 것인가>라는 좌담회에 유진오ㆍ백낙준ㆍ김필봉ㆍ윤일선과 함께 참가했다. 당대의 명사들이다.

이어서 10월호에 <진리에의 향수>, 12월호에 <사상과 실천>을 썼다. 그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이 대단했고, 그만큼 <사상계>의 지면은 충실해지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함석헌의 꿈은 사회적 명사가 되는 것도, 논객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청년을 키우면서 소박ㆍ단순하게 사는 것이었다. 평양송산농사학원을 운영한 것도 그런 꿈에서였다. 1941년 가을에는 단신으로 만주 길림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길림성 참사관으로 일하는 동생 함석창을 만나는 일과, 만주 어디에 묵은 땅을 구해서 이상촌을 건설해 보고자 하는 꿈이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이래 인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상촌ㆍ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오랜 열망이 있었다. 노자의 ‘이상사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칼빈의 ‘기독교국가’, 박지원의 ‘허생전’, 푸리에의 ‘노동사회의 유토피아’, 아나키스트들의 ‘절대공동체’가 이에 속한다.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중국과 몽골, 러시아 지역에 이상촌을 건설하고, 군사를 키워 일제와 싸우려는 비전을 제시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함석헌은 만주에서 실망하고 돌아왔다. 연암 박지원이 1780년 건륭제 축하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중원을 지나면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하며 목을 놓아 통곡했다는 사력을 떠올렸을 것이다.

일제 말년에 만주를 여행한 일이 있는데, 혼자서 울음이 북받쳐 나와 참지 못한 일이 있다. 하나는 그 무연한 벌판을 보니 “원, 이놈들이 동지사(冬至使)랍시고 적어도 해마다 한 두 차례는 이 벌판을 봤을 텐데 이것 한 번 도로 찾아 살아보잔 생각은 못하였단 말이냐?” 하는 분한 생각에서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중국놈들, 만주놈이 일본 흉내 내려고 하는 꼴을 보고 “우리 꼴도 저 꼴이겠구나”하는 슬픈 생각에서였다. (주석 6)


주석
1> 장준하, <사상계지 수난사>, <장준하문집> 3, 134쪽.
2> 윤형중,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 <사상계>, 1957년 5월호, 45쪽.
3> 앞의 책, 49쪽.
4> <사상계>, 1957년 6월호, 282~283쪽.
5> 이 부문, 김삼웅, <장준하 평전>, 354~360쪽, 인용.
6>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전집> 4,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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