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9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9
2014년 8월8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8
2014년 8월6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6
2014년 8월5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5
2014년 8월3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3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08 08:00 김삼웅

 

 

1961년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개정판을 낸데 이어 12월에는 그동안에 쓴 시를 모아 시집 <수평선 너머>를 간행했다. 생각사에서 나온 이 시집은 6ㆍ25전쟁 전 개성에서 <영원의 젊은이>, 월남 뒤 공주에서 <장작불> 그리고 대전에서 <기러기>라는 프린트로 나왔던 것을 1953년 3월에 인쇄판으로 묶었고, 이번에 이 모든 것에서 고르고 장정을 바꾸어 새로 활자판으로 펴냈다.

함석헌은 이 시집에도 실린 초판 서문에서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낸 이유를 말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시라 할 터면 하고 말터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주석 9)

함석헌은 <두 번째 내놓은 말>에서 개정판을 낸 이유를 설명한다.

남의 병신 자식을, 감추어 기르는, 사랑과 미움, 귀여움과 뉘우침, 불쌍히 여김과 죽기를 기다리는 감정이 한데 섞인, 원수의 아들을 한번 봤으면 그만이지 또 다시 보자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 아닌가? (주석 10)

이 시집에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비롯하여 120편이 실렸다. <선전>과 같은 격렬한 선언문 투의 시가 있는가 하면, <인생은 갈대>와 같은 서정시도 있다. 몇 절씩만 소개한다.

선전

이 세상의 주권자야, 나는 오늘 너를 향해 선전하노라.
네 힘이 아무리 강하고
네 법이 아무리 엄하고
네 조직이 아무리 치밀하여도
오늘부터 나는 네 시민이 아니도다,
나는 너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자유의 이름에서

친구들아,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선생들아,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나에게 속빈 말의 충고를 하였고
나에게 너희도 모르는 거짓 길을 가르쳤고
나에게 영원한 집을 찾지 말라 달래였으니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맹렬한 싸움을 시작하노라.
(주석 11)


인생은 갈대

인생은 연한 갈대 여린 순 날카로운 맘
쓴 바다 노한 물결 단숨에 무찌르자
끝끝이 뜻 머금고서 다퉈가며 서는 듯

인생은 푸른 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자라고 자라란 뜻 하늘에 달뜻 컨만
떠는 잎 한데 얽히어 부르짖어 우는 듯.
(주석 12)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벗어나면서, 인제대학교 전 총장 이윤구의 안내로 퀘이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지만 1953년에 쓴 시 <대선언>에서 이미 변화의 낌새를 찾을 수 있다.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옛날의 모험가 한 가지 노래하련다
나가는 역사의 수레채를 메고 달려나 보련다.
내 아직 얻었담도 아니요
허린 거울 속 보듯 내 눈에 희미는 하나
앞엣것 잡으려 뒤엣것 잊고 나는 닫노라
이제부터 나를 붙잡지 말라

내 즐겨 낡은 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가장 튼튼한 것을 버리면서 약하면서
가장 가까운 자를 실망케 하면서 어리석으면서

나는 산에 오르리라
거기는 꽃이 피는 곳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 같이
그 향 냄새 맡는 코를 미치고 기절케 하는 꽃
그 꽃을 맡기 전 나는 벌써 취했노라.
(주석 13)

중국 17세기 초의 문인, 문학이론가로 유명한 장유(張維)는 저서 <시사서(詩史序)>에서 시(詩)와 사(史)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상의 변화를 기록하고 득실을 밝히는 것이 사(史)이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면서 음악과 어울리는 것이 시(詩)라고 하고, 그 둘은 서로 섞일 수도 없고 겸할 수도 없다고 했다. 사람은 재능이 한정되어 있어, 사가(史家)가 시인일 수 없고, 시인이 사가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뛰어난 시인은 그 두 영역의 구분을 넘어서서, 세상일에 대한 깊은 근심을 절실하게 나타내 사실의 핵심에 이른다고 했다.”
(주석 14)

3세기 전에 장유가 마치 함석헌을 예비하여 한 말 같이 들린다. ‘사가와 시인’의 좀처럼 어울리기 어려운 작업을 그는 해냈다. 뿐만 아니라 맹렬한 언론인과 격렬한 민권운동가로 이어진다.


주석
9> <수평선 너머>, 1953년 머릿말, 생각사, 1961.
10> 앞의 책, 9쪽.
11> 앞의 책, 191쪽.
12> 앞의 책, 36쪽.
13> <수평선 너머>, 170쪽.
14> 조동일, <한국시가의 역사의식>, 5쪽, 문예출판사, 1994.


 


01.gif
0.05MB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8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8
2014년 8월7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7
2014년 8월5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5
2014년 8월3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3
2014년 8월2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2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07 08:00 김삼웅

 

 

쿠데타세력은 1961년 10월 진보성향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사회당 간부 최백근을 처형하고 혁신계 인사들을 중형에 처하는가 하면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하여 구정치인들을 묶고 자신들의 정치적 발판을 구축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이에 항의하여 하야하자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대통령권한대행까지 꿰찼다.

박정희의 ‘원대복귀’ 혁명공약은 헌신짝이 되고, 그가 노골적인 정치참여의 의지를 내보이는 가운데 12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하고, 몇 차례의 번의를 거듭한 끝에 12월 27일 대통령 출마 의사를 표명했다. 5ㆍ16쿠데타가 권력찬탈을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1950년 3월 28일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를 간행했던 것을 1961년 겨울 한 달 동안 해인사에서 대대적인 개작을 하여 간행하였다. 제목도 ‘성서적’을 빼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꾸었다. 개정신판은 1962년 3월 일우사에서 간행되었다. 그런데 개정판을 내고 제목을 바꾸면서도 1950년판의 ‘서문’을 ‘머릿말’로만 바꾸었을 뿐 내용은 그대로를 실었다. 왜 그랬을까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성서적 입장’의 제거가 “사슴에게서 뿔을 제하는 일”과 같고, “성서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 입장에서야만 역사는 쓸 수 있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그런데 개정판에서 ‘뜻으로 본’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뒤에 다시 간행한 책의 서문이다.

그래서 책을 내게 되는 전해 겨울 해인사에 한 달 가 있으면서 전체에 걸쳐 크게 수정을 하여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 더구나 무교회 신자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석 1)

내가 보기에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1962년 2월 30일자로 일우사에서 종서로 발행된 (456쪽 정가 2,500환) 것이 정본이 아닌가 싶다. 저자 스스로 꼼꼼히 교정을 보아서 오탈자도 거의 없다. 말미에는 유달영의 <책 끝에 붙이는 글>을 실었다. 표지 안쪽에는 회갑날의 저자 흑백 사진도 실렸다.

또한 1950년과 1954년 재판본에 비해 1962년 판본에는 제4부가 추가되었다.
제4부 <생활에 나타난 고민하는 모습>에 <고난의 의미>,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이 추가된 것이다. 이후 몇 곳 출판사가 바뀌면서 나온 책은 1962년 판본을 횡서로 고치고, 유달영의 발문을 제한 것이 대부분이다.

함석헌의 주저인 이 책의 기조(基調)는 ‘고난의 사관’이다. 신라의 통일 이래 한민족이 걸어온 길은 고난이었다는 주장이다. 당당하게 출발하여 열국시대를 거치고 풀무 속에 다듬어진 삼국시대에 고구려 아닌 신라가 통일을 주도하면서 광대한 대륙을 잃게 되고, 그 땅에 고려가 세워졌으나 ‘다하지 못한 책임’으로 민족사의 고난이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성계의 덕 없는 창업, 사대주의를 국시로 내걸고 나라를 세움으로써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수난인가? 두 말할 것 없이 그 다하지 못한 책임 때문이요, 그 잃어버린 정신 때문이다. 이조(李朝) 한 대의 역사는 한 마디로 하면 중축이 부러진 역사다. 축이 부러진 수레가 어찌 나갈 수 있을까? 정도 없이 국민 이상도 없이, 수레의 바퀴 같은 모든 제도 조직이 있다 한들 어떻게 역사의 진행이 있을 수 있을까? 수레의 가장 중요한 것이 축이 둣이 역사에 가장 요긴한 것도 민족정신이요 국민 이상이다.

중축 없는 바퀴를 밀면 밀수록 더 어지러이 이리 굴고 저리 굴듯이 역사도 정신이 빠지면 아무리 정치를 하고 모든 문화 활동을 하여도 어지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수난이다.
(주석 2)

함석헌은 동명왕ㆍ혁거세ㆍ온조ㆍ왕건까지 관인대도(寬仁大度)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성계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사대국시를 비판한다.

중축이 부러진 역사! 그것이 욿은 제도를 밟아 바른 길을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500년 동안의 일은 그저 어긋남이요. 거꾸러짐이요. 깨짐이다. 당초부터 이소사대(以小事大)를 표어로 삼고 된 구차한 건국인지라, 구차 아닌 것이 없다. 내 나라를 가지고도 남에게 줬다가 다시 빌어 받기에 힘이 들었고, 내 스스로 된 임금이건만 남의 승인을 얻기에 부끄럼이 그지 없었다. 그러면서도 두 세 임금과 신하를 내놓고는 분해 하지도 아쉬워 하지도 않고 멍청하고 있었다. (주석 3)

함석헌의 이 책에는 ‘조선’을 ‘이조’로 표기하는 등 용어 사용에서 ‘한계’도 없지 않다. 우리 역사에 ‘이조’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조선’을 ‘이조’ 또는 ‘이씨조선’ 라고 쓴 것을 그대로 표기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대한)이 한 왕조가 못 되고, ‘이씨’의 씨족사회라고 비하하는 뜻으로 이런 용어를 써 온 것이다. 교과서는 물론 역사학자들의 연구서적도 마찬가지였다. 함석헌 역시 이 책을 펴낼 때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E. H.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내용이나,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사관”은 알아도, 신채호의 “역사란 아(我)와 비야(非我)의 투쟁과정”이란 말은 잘 모른다. 또한 함석헌의 씨알사관에도 백지상태다.

지나간 것(과거)이라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정말 지나간 것이라면 지금(현금)의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요, 따라서 기록할 필요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기록하고 알려해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기록할 필요, 알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아직 살아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석 4)

다음은 연구가와 언론에서 많이 인용하는 부문이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 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주석 5)

이 책의 마지막 부문은 이렇게 장식된다.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에 더럽힌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 (주석 6)

함석헌의 사관은 강단사학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과거의 다수한 사가들이 공정한 역사를 쓰기 위하여 해석 없는 사실기록을 하다가 수십 백권의 납골당명록(納骨堂名錄) 만을 쓰고 만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적어도 민중의 역사는 아니다. (주석 7)

사실 기록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역사에 대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납골당명록’ 만이어서는 의미가 없다.

“함석헌은 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과거란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이고, 역사적 사실이란 현재와의 관련에서 선택된 유의의(有意義)한 것이고, 의미 없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의 중요성은 그 의미에 있다. 따라서 역사서술은, 그 의미 있는 사실들을 인과관계적 상호연관의 연쇄 속에 통일적인 체계로 엮어야 한다. 그 체계는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부분들이 전체에서 유리될 수 없다.” (주석 8)


주석
1> <네째 판에 부치는 말>, <전집> 1, 18쪽.
2> <뜻으로 본 한국역사>, 223쪽, 일우사, 1962.
3> 앞의 책, 227쪽.
4> 앞의 책, 229쪽.
5> 앞의 책, 302쪽.
6> 앞의 책, 452쪽.
7>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13쪽,
1954년판.
8> 노명식, <한국의 역사가 함석헌>, <한국사시민강좌> 제20집, 121쪽, 일조각, 2000.

 


03.gif
0.04MB
01.gif
0.04MB
02.gif
0.05MB
  • profile
    [83회] ‘영혼을 지키면서’ 걷는 정치인의 길 http://t.co/Q2fxJbsCLK
  • profile
    [42회] 쿠데타 주체 ‘정신분열증 노인’ 망발: 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6 08:00 김삼웅 영등포구 문래동 문래공원에 세워진 박.. http://t.co/6JNEMbIGms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7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7
2014년 8월6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6
2014년 8월3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3
2014년 8월2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2
2014년 8월1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1

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6 08:00 김삼웅

 

 

영등포구 문래동 문래공원에 세워진 박정희 흉상.ⓒ오마이뉴스 권우성

쿠데타세력은 <사상계>가 서점에 깔린지 4, 5일이 지나서 장준하와 취재부장 고성훈을 체포했다. 장준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의 집무실로 끌려갔다.
김종필은 장준하에게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따위 글을 도대체 어떤 저의로 갖다가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과업 수행과정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하는 거 아니오? 이것을 싣게 된 목적과 경위를 말해보시오.”하고 마치 죄인 다루듯이 윽박질렀다.

장준하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부탁하여 원고를 실었고, 남의 글을 전체를 보고 평가해야지 부분적인 대목을 가지고 말하느냐고 젊잖게 따졌다. 궁지에 몰린 김종필은 장도영(5·16쿠데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내각수반, 국방장관을 맡고, 장준하 대면 전날 반혁명죄로 구속 -필자)과 동향이라, 그의 사주를 받는 것이 아니냐고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김종필은 심지어 함석헌이 정치를 할 의향이 있느냐고 생뚱한 질문을 하였고, 장준하가 그를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질타했다.

함석헌은 끌어가지 못했다. 3년 전 이승만 정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이유로 끌어다가 20일간 투옥하는 등 ‘서툰 짓’을 한 이래 그의 존재는 아무리 쿠데타세력이라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우뚝한 민중의, 씨알의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 박정희 - 김종필은 이승만보다는 한 수 위였다. 정치적으로 더욱 교활해진 것이다.

쿠데타 주체들 사이에 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의 구속 여부를 둘러싸고 투표까지 했다는 설이 있다.

“노명식(전한림대 인문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이 때의 함석헌은 3년 전의 함석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고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다. 당시 풍문으로는 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을 구금할 것인가를 두고 투표를 했는데 3대 3으로 팽팽히 맞섰다는 것이다. 결국 최고회의에 참석하여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부표를 던지는 바람에 찬성 3표, 반대 4표로 함석헌은 구금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풍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김종필은 군에서 정군운동을 하다가 예편되어 실직상태일 때 장준하가 책임자로 있던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본부에 취직하겠다고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다. 마침 장준하가 부재중이어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이를 두고 장준하는 뒷날 자신이 그때 김종필을 만나 직원으로 채용했었다면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김종필은 젊은 시절 <사상계>를 읽었고, 함석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보 업무에 종사하다보니, 그를 구속하여 국제적으로 특히 미국 조야의 여론이 비등할 것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함석헌은 구속을 면했지만, 이로써 그의 용기와 저항정신, 정치평론의 입지와 위상은 따를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제까지는 주로 종교비평의 글을 많이 썼으나, 5ㆍ16 비판부터는 정치비평가의 일역을 도맡게 되었다. 쿠데타세력이 당초 ‘원대복귀’의 약속을 어기고 민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정치비평의 논설을 쏟아냈다. 한 정치학자는 “함석헌이 사상ㆍ종교ㆍ철학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한 정치 사상가의 면모와 민주화에 앞장서서 반독재 투쟁을 한 정치행동가로서의 행보 외에도, <사상계>나 <씨알의 소리> 등에 게재한 글을 통해 정치평론가로서의 역할을 선구적으로 시도하였다고 본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정치평론은 시비곡직을 떠나서 성역을 두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를 피해가거나 둔사로 어물쩍 넘어가는 여타의 식자들과는 달랐다. 이승만ㆍ박정희를 표적으로 삼았다. 감히 따르기 어려운 일을 그는 해냈다. <할 말이 있다>와 <5ㆍ16을 어떻게 볼까?>는 반독재자와 군부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이었다.



주석
31> 장준하, <사상계지수난사>, <장준하문집> 3, 사상, 1985, 32쪽.
32> 김용준, 앞의 책, 143쪽.
33> 이동수, <함석헌과 정치평론>, <한국정치학 회보>, 2001년 겨울호, 89쪽.


 

 


01.jpg
0.09MB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6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6
2014년 8월5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5
2014년 8월2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2
2014년 8월1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1
2014년 7월31일 Twitter 이야기  (0) 2014.07.31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5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5
2014년 8월3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3
2014년 8월1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1
2014년 7월31일 Twitter 이야기  (0) 2014.07.31
2014년 7월30일 Twitter 이야기  (0) 2014.07.30

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

013/01/05 08:00 김삼웅

 

 

 

4ㆍ19 뒤 한 때의 혼란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구체제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혼란상이었다. 일부 학생과 혁신계의 과도한 주장도 있었지만,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차츰 진정되어갔다. 연말부터는 정국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민주당의 분당사태로 장면 정부가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군사쿠데타의 요인이 될 수는 없다.

함석헌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1961년 5월 16일,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그의 조카사위 김종필이 주도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반란군의 주모자 박정희가 일본군 다카키 마사오인 것 같다는 장준하의 말을 듣고는 분노와 함께 허탈감을 가누기 어려웠다. 반란군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권을 장악, 4월혁명으로 태어난 장면 정부를 타도했다. 쿠데타를 첫 모의한 시점은 1960년 9월 10일이다. 이들은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가 좌절되고, 5월 12일로 연기했다가 16일에 쿠데타를 결행했다.

반란군은 최고권력기구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입법ㆍ행정권과 사법의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국회ㆍ정당ㆍ사회단체를 해산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미군정 3년과 이승만 12년 독재에 시달려온 국민은 4월혁명으로 짧은 기간이나마 모처럼 자유를 찾았다가 1년여 만에 다시 포악한 군사독재를 맞게 되었다. 언론은 사전 검열로 군사반란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언론인ㆍ지식인들이 겁을 먹고 비판은커녕 사실 보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공포분위기였다.

함석헌은 절망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일본 군부의 정치개입과 군국주의가 어떻게 득세하고, 얼마나 폐악을 저질렀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감이 더욱 깊었다. <사상계>는 6월호 제작이 거의 진행된 와중에 5ㆍ16을 겪으면서 권두언과 화보 그리고 편집후기에 쿠데타의 내용이 실렸다.

필자의 주관인지는 몰라도 <사상계> 15년의 역사에서 1961년 6월호의 권두언, 화보, 편집후기는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화보 <혁명 새벽에 오다>에서는 쿠데타의 전개 과정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물사진과 함께 24컷으로 장식했다. 1년 여 전 “민중의 승리 기념호”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무기명으로 실린 권두언 <5ㆍ16혁명과 민족의 진로>는 아무리 계엄하의 상황이라 해도 이것이 과연 <사상계>의 권두언일까 싶을 정도의 글이다. (주석 25)

박정희 추종자들은 이 대목을 들어 장준하도 5ㆍ16쿠데타를 지지했다고 선전한다. ‘오해’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합법 정권이 총칼로 전복되고, 정부 각료를 비롯하여 수천 명이 갖가지 이유로 체포ㆍ구금되고 국회가 해산된 공포정치의 상황에서 장준하나 <사상계> 편집위원들이라고 어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준하와 <사상계>의 일탈은 오래가지 않았다. 7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회복하여 군사반란 세력에 포문을 열었다. 함석헌이 저격수로 나섰다. 7월호 권두논문으로 36쪽에서 47쪽까지에 실린 200자 100매 분량의 <5ㆍ16을 어떻게 볼까?>는 반란군 세력의 서릿발치는 계엄하에서 쓰이고 게재되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각오하고 글을 쓰고 장준하는 잡지사의 문을 닫을 결심을 하고 실었다.

글은 어떤 내용인가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썼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일제 패망 뒤에 광복군이 되거나, 해방 후 독립만세를 부른 것과 비유된다.
함석헌은 논설의 말미에서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

“3년 전 이 밤엔 잠 못 자고 한 생각 말했더니, ‘나라 없는 백성이라’ 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스무 날 참선을 시켰지, 이번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주석 26)

함석헌은 먼저 5ㆍ16쿠데타가 가져온 공포분위기를 지적한다.

그런데 나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가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인이 아니다. 의사 온 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인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칼보고 겁을 집어먹었지. 겁 난 국민은 아무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나게 하여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다스리기 쉽기야 죽은 시체가 제일이지, 시체를 업어다 산 위에 놓고 스스로 무슨 공이 있다 할 어리석은 사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매장인부 아닌가?
(주석 27)

함석헌은 5ㆍ16을 준열하게 비판했다. 4월의 학생들이 잎이라면 5월의 군인들은 꽃이라는 비유를 들어 조속히 부대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최근까지 박정희 추종자와 사이비 언론인 중에는, 함석헌이 5ㆍ16을 꽃에 비유할 정도로 지지했노라는 허튼 언설을 편다.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거두절미한 것이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달 아닌가? 5ㆍ16은 꽃 한 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의 유가 아니다. 저번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은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했고 탱크로 행진했다. 잎은 영원히 남아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5ㆍ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하고 잊혀져야 한다. 노량진두에서 많지는 않지만 흐른 피는, 그 알고 모르고를 물을 것 없이 전국민이 스스로 흘려 역사의 제단에 바친 것이다. 그것은 부득이하여 한 번 잠깐 할 것이요, 될수록은 없어야 하는 것이요, 있다 하여도 곧 잊혀야 하는 것이다. (주석 28)

함석헌은 5ㆍ16의 군사반란을 결코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하지 못한다. 어떤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선의로 했다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의는 아니다. (주석 29)

한 사학자는 함석헌의 이 글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놨다.

“그 잘못을 꾸짖는 준엄한 질타이기는 하나 그저 질타에 그치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타이르듯이 무엇이 잘못이며 그 잘못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가를 누누이 설명한다. 쿠데타는 크게 잘못된 불장난이지만, 이제는 어차피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첨에 약속한 대로 하루라도 속히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는 대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한다. 쿠데타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하였지만, 혁명이 무엇인지나 알고 했느냐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주석 30)

함석헌의 글이 세상에 나오면서 민중은 막혔던 숨통이 다소나마 터지는 듯한 쾌감을 느끼고, 지식인ㆍ언론인들은 자신들의 처신에 몸 둘 바를 몰라했으며, 쿠데타 주역들은 분개했다.


주석
25> 김삼웅, <장준하 평전>, 423쪽, 시대의 창, 2009.
26> <사상계>, 1961년 7월호.
27> <사상계>, 1961년 7월호.
28> 앞과 같음.
29> 앞의 책.
30> 노명식, <함석헌 다시 읽기>, 608쪽, 인간과 자연사, 2002.

 

 


01.jpg
0.05MB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3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3
2014년 8월2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2
2014년 7월31일 Twitter 이야기  (0) 2014.07.31
2014년 7월30일 Twitter 이야기  (0) 2014.07.30
2014년 7월29일 Twitter 이야기  (0) 2014.07.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