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19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9
2014년 8월16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6
2014년 8월14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4
2014년 8월13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3
2014년 8월10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0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3 08:00 김삼웅

 

 

정치권력에 맛이 들린 박정희세력은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함석헌이 황야에서 아무리 목메이게 외치고 글을 써도 그들은 들은 채도 않고 오히려 선동가로 몰아치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켜 미ㆍ일ㆍ한 동맹체제화하고자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넣었다.

1961년 6월 케네디ㆍ이께다(池田)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ㆍ케네디 회담을 통해 이 문제가 깊숙히 논의되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의 지원에 목을 매단 박정희로서는 미국의 제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 유세에 들어갔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와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였다.

<사상계> 1964년 3월호에 함석헌은 비감한 마음으로 <양한재조 재차일념(兩韓再造在此一念)>을 썼다.
평소 한자 제목을 잘 붙이지 않았는데, 이번은 달랐다. 편집자는 “한 마음 한 끝 먹고 조선을 새겨 보니 조은 땅 조은 빛이 한 글월 피웠구나. 한 조선 첨서 한난걸할 알속에 지키네”란 알듯 모를 듯한 발문을 붙였다.

우리는 또 다시 “나라를 지키자”고 외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됐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부끄럽고 분한 일입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남이 다 잘 사는 이 때에, 우리 만이 못 살고 밤낮이 이꼴이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분하다는 것은 했으면 했을 것인데 번히 알고 못하니 분하지 않습니까?

함석헌은 자신들이 일제감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할 때에,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동포들에게 총질을 한 친일군인들이 권력을 잡아,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마땅히 요구해야 할 청구권과 문화재 반환 등이 묵살당한 데 하염없는 분노를 느끼면서 이 글을 썼다. 박정희 권력의 비리와 인권탄압,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당시의 상황이 한말의 망국기와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요새 나라 꼴 그 때와 꼭 같습니다. 한일회담, 그 때의 5조약, 7조약, 맺으려던 꼴과 꼭 같고, 창가학회니 뭐니 그 때의 흑룡회, 일진회와 터럭도 다를 것 없습니다. 그 때에도 미ㆍ러ㆍ중이 뒤에서 어물어물하다 우리를 팔아넘기더니, 오늘도 또 셋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나라를 지키자!”하는 글을 짓게 하는 교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교사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함석헌의 이 글의 핵심은 후반 다음의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 옛날 나라가 일본 침략자들 때문에 위태했을 때 그것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이성계를 나가 맞으며 최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三韓再造 在此一擧 (삼한재조 재차일거)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이성계가 가슴 속에 나라라는 일념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거(一擧)는 삼한을 재조(再造) 못하고 잃는 일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또 다시 나라는 남으로 일본침략주의의, 북으로 중공침략주의의 엿봄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보내며,

兩韓再造 在此一念

이라 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일념을 품었습니까?
나라가 임(臨) 하옵소서!
일체 중생이 다 이 한 나라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또 씨알에게!

- 念, 念, 念 , 아멘.
(주석 29)

박정희의 대일 굴욕회담이 강행되면서 장준하는 1965년 <사상계> 긴급증간호를 발행했다.
160쪽 전 지면을 털어 <신을사조약의 해부>라는 특집으로 꾸몄다. 이 책은 야당, 재야ㆍ학생들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의 이론적 전거가 되었다.

박두진ㆍ박남수ㆍ조지훈의 <우리는 또 다시 노예일 수 없다>는 연작시에 이어 함석헌의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란 권두시론, 백낙준의 <한국근대화와 일본침략>, 이범석의 <이제는 더 침묵할 수 없다>, 양호민ㆍ부완혁ㆍ정문기ㆍ김철ㆍ김원룡이 각 전문 분야에서 집필한 <한ㆍ일협정문의 분석>, 각계 지도급 인사 105인의 앙케트 <105인의 발언>,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각계의 성명서가 실렸다. 특히 예비역 장성들의 반대 성명에는 김홍일ㆍ김재춘ㆍ박병권ㆍ박원빈ㆍ송요찬ㆍ손원일ㆍ이호ㆍ장덕창ㆍ조흥만ㆍ최경록 등이 서명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장성들까지 참여하여, 국민이 얼마나 굴욕회담에 반대했는가를 보여주었다.

함석헌은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게 있다”는 부제가 붙은 이 시론에서 처연한 심경으로 국민에 호소한다.

한국은 어디로 가나?
이 4천만 문화민족은 어떤 운명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는가?
5천년 고난의 역사는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하고 있나?
지금 한ㆍ일조약의 비준이라는 한 순간을 놓고 민심은 마치 회오리바람 밑에 노는 물결처럼 미치고 있다.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것을 해서라도 기어이 이 조약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고, 정의와 자유의 정신에 불타는 학생들은 거기 대해 뭉치와 최루탄과 철창의 고통을 무릅쓰며 혹은 주린배,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움켜쥐고 단식을 하면서 싸우고 있고, 일반 국민은 그 두 사이에 불안과 의심과 분노와 두려움에 떨고 서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고, 어느 순간에 가서는 결정이 나고야 만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 있다.
(주석 30)



주석
29> <사상계>, 1964년 3월호, 45쪽.
30> <사상계>, 긴급증간호, 20쪽, 1965.

 

 


01.gif
0.5MB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16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6
2014년 8월15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5
2014년 8월13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3
2014년 8월10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0
2014년 8월9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9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15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5
2014년 8월14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4
2014년 8월10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0
2014년 8월9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9
2014년 8월8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8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63년 2월 영국 체류 중일 때 장준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군정 4년 연장을 시도하는 등 국내 정세가 위급하니, 이를 질타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상계>는 1963년 4월호를 ‘창간10주년 기념특대호’로 꾸미면서 권두에 함석헌의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실었다. 28~31쪽에 실린 짧은 글이지만, 그의 글 어느 것 못지 않는 알찬 내용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부제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고 나온다”가 의미하듯이, 주권자가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였다.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을 묻느냐? 여러운 것 아니다. 간단명료하지 않으냐? 군인은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더라, 이야말로 사뭇 들어가는 칼 같이 뻔한 진리지. 군인이 정권 쥐었으니 민정 되려면 군인이 물러서는 거지, 무슨 복잡한 것이 있겠냐? 물러설 마음이 없기에 헌법개정이요, 민의요 하지, 깨끗이 물러서는 사람이 토론이 무슨 토론이냐? 군인은 깨끗해야 한다고 늘 하는 말 아닌가? 소견이 옳았거나 글렀거나, 하여간 생각에 군정을 꼭 해야겠다 하거든 군정이라 하고 해! 또 권력을 좀 쥐고 해 먹고 싶거든 그렇다 하고 해! 호랑이도 호랑이 노릇하고 독수리도 청천백일에 내놓고 남의 고기 먹는데 너라고 못할 것 없지. (주석 23)

함석헌은 예리한 필봉으로 부정어법을 통해 진정한 ‘군인정신’을 알리고, 정직하지 못한 ‘정치군인’을 질타한다.

또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 말할까? 그것도 같은 말이다. 민중이 곧 일어서야지. 도대체 정권 넘겨준단 말부터 고쳐야 한다. 정권이 뉘건데 누가 뉘게 넘겨주어? 천하는 천하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란 말을 벌써 몇 천 년 전 사람이 했는데 정권을 민중에게 넘겨주다니 그런 시대착오가 어디 있나? 이양이란 글귀를 쓰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민중 모욕이다. 이양이 아니라 대정봉환(大政奉還)이지. 가져갔던 정권을 도로 바치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글귀를 쓰는 것은 민중을 속여 바치는 척 하면서도 속살로는 그냥 쥐고 있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글의 논점은 군인들이 탈취해간 정권을 꼼수 부리지 말고 원래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주라는 것이다. “천하는 천하요….”의 구절은 맹자의 주장을 상기시킨 대목이다.

당초 잘못은 민중이 깨지 못한 데 있다. 민중 스스로가 제 노릇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됐지, 죽음으로 자유 지키는 민중에 도둑이 어디 둘 수 있나?
또 바른 길 말할까? 이것도 다 알면서 못 본척 하는 길이다. 무슨 길? 언론의 자유다. 민중이 깨는데 언론의 자유 없이 어떻게 되겠냐?
(주석 24)
 
박정희의 군정연장 의도가 노골화되면서 신문들은 점차 연골화되어 갔다.
쿠데타 초기에 <민족일보> 사장의 처형 등을 지켜보면서 공포감에 빠진 언론(인)은 ‘민정이양’의 공약이 군정연장에서 다시 민정참여로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는 데도 크게 비판의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권한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감옥문 만이 정말 민정으로 건너가는 직통로다. 진리란 참 묘한 것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자들이 민중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감옥을 짓지만,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 가지고 나오는 것을 어찌하나? 그러므로 진리는 막강하다. 압박하는 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감옥을 넓히고 높일 것이다. 그러나 감옥이 넓어지고 높아질수록 자유의 길은 열리는 것을 어찌나.
민권을 찾고싶거든 감옥으로 들어가라!
살고 싶거든 죽음의 입으로 들어가라!
(주석 25)

함석헌이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의 불복종>에서 “불의한 시대에 의인의 갈 곳은 감옥뿐”이라 썼다. 함석헌의 이 시론이 소로와 맥이 닿아 있음을 본다. 함석헌이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쓴 <사상계> 4월호에는 창간 10주년 특집의 하나로 유진오ㆍ김팔봉ㆍ안수길ㆍ현승종ㆍ김성한ㆍ신상초ㆍ안병욱이 “나와 사상계”란 주제로 각기 인연과 사연을 피력했다. 당시 주간이던 안병욱의 글은 함석헌이 ‘세상에 불려나와’ 글을 쓰게 된 과정이 소상하다.

연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함 선생 댁에 들렸다.
지금은 원효로에 살고 계시지만 그때는 신촌 이대 앞에서 사셨다. 열 칸 쯤 되는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함 선생을 뵈었다. 두 칸쯤되는 장판방에 조그만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하고 계시다가 반가히 맞아주셨다. 톨스토이는 바이블을 읽기 위해서 54세 때부터 히랍어공부를 시작했지만, 함 선생의 히랍어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실력이 대단하시다.

한자에 능하시고 영어를 잘하시지만 그런 빛이 통 없다. 오산고보에서 영어선생들이 모른 것이 있으면 함 선생한테 가서 물었다. 그는 정말 도깨비였다.

<사상계>에 글을 쓰시라고 하였더니 “내가 뭘” 하시면서 사양을 하신다. 그 후 몇 번 들렸다. 안 쓰신다고 고집하다가 결국은 쓰셨다. 그후 내 성화에 못견뎌서 여러 번 쓰셨고, 쓰실 때마다 남이 못하는 소리를 하셨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소리를 쓸래면 뭣 때문에 글을 써, 글이란 나 아니면 못하는 소리를 써야 돼”.

언젠가 나 보고 하신 말씀이다. 글 다운 글을 쓰라고 책하시는 말씀 같았다.
<사상계>의 집필을 통하여 오산의 도깨비는 한국의 도깨비가 되었고, 그의 예리한 필봉은 독재정권의 아성을 겨누게 되었다. 의를 위해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 함 선생의 글은 언제나 피의 맥박과 생명의 리듬이 약동했다.
(주석 26)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

함석헌이 유럽을 방문하고 있을 즈음 국내 정세에 더욱 소연해졌다. 군부세력이 4대의혹사건으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이 돈으로 민정당을 사전 조직한데 이어 박정희는 민정 불참의 선서를 했다가 번복하여 민정 참여를 선언했다. 이와 함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大平) 일본 외상과 비밀 회동하고, 한일 국교 정상화의 대가로 무상공여 3억 달러, 상업차관 2억 달러로 대일 청구권 문제를 합의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함석헌은 귀국을 서둘렀다. 안병무의 회고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한국서 온 신문을 보고 군정세력이 자리를 굳힌다는 사실과 대일(對日) 태도를 보고 선생님께 자극적인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선생님은 들었던 숟갈을 놓고 낙류(落류)하시면서 모든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셨지요.” (주석 27)

이 부문과 관련, 함석헌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래서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 소원이던 인도여행 계획도 취소했지. 그래 돌아와서는 <사상계>의 장준하 한테 갔고 사상계사가 주최해서 시민회관에서 그리고 대광학교 운동장에서도 강연을 했는데, 그때 사람이 8, 9만이나 모였다고 해요. 그게 사회참여의 시작이라면 시작인데, 나는 사회참여니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러던 중 6ㆍ3 데모가 터졌지. 이런 때 가만 드러누워 있으니 이걸 어떡하지 그러다가 나온 거지요. 그래서 나와서 머리 깎고, 세상이 다 알거나 말거나 나대로 책임을 지는 생각을 하고, 깊이 생각을 해야지, 그런 생각에 두 주일 단식하고 그랬지요. (주석 28)




주석
23> <사상계>, 1963년 4월호, 28~29쪽.
24> 앞의 책, 30쪽.
25> 앞의 책, 31쪽.
26>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266쪽.
27> <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었는가 - 안병무와의 대담>, <씨알의 소리>, 4월 창간호, 1970년.
28> 앞과 같음.



01.gif
0.05MB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14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4
2014년 8월13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3
2014년 8월9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9
2014년 8월8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8
2014년 8월7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7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13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3
2014년 8월10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0
2014년 8월8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8
2014년 8월7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7
2014년 8월6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6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0 08:00 김삼웅

 

 

1963 영국 우드블록

함석헌은 1962년 2월 10일 미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예정으로 미국 순방길에 올랐다. 그의 갑작스런 방미에는 세간의 의혹이 따랐다. 당시 미국무성은 후진국의 정계ㆍ학계ㆍ종교계 등의 중진급 인사들을 초청형식으로 미국으로 불렀다. 본질적으로는 미국에 우호적인 오피니언 리더를 양성하려는 전략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유당 시대부터 노태우정권기까지 적지 않은 ‘친미파’가 육성되었다.

함석헌의 경우는 달랐다. 주한미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이 <5ㆍ16을 어떻게 볼까?>를 영역하여 미국무성에 보내고, 국무성은 군사쿠데타의 와중에서도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여 그를 초청한 것이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유럽, 인도, 아프리카의 콩고, 슈바이처가 사는 곳, 특히 퀘이커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 케냐를 거쳐 이집트와 그리스 등을 돌아보고 싶었다.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출국하기 전날 밤을 밝혀 <수난의 여왕께 드리는 유언ㆍ예언 - 잠시 고국을 떠나면서>를 쓰고 한국을 떠났다. 이 글은 <사상계> 3월호에 실렸다. 편집자 이름으로 이같은 사실과 함께 귀국이 반년 내지 1년 후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 밤이 새면 나는 간다. 말은 미국을 간다지만 미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딘지 모르는 먼 나라를 향하여 가는 것이다. 계획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한 해 있다 돌아온다지만 한 해가 아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길이요, 세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바퀴를 도는 것이다. 미국 국무성이 불러서 간다지만 미국이란 것이 어디 있으며, 그 국무성이 어떻게 나를 부르며 내가 뭐하자고 그 명령에 복종할까? 미국이 어디 있을까? (주석 21)

함석헌은 이 글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길”이라 쓴 대로, 당초의 여정이 크게 앞당겨졌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단순한 ‘이별가’ 수준이 아니었다. 군부세력이 쉽게 민간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을 것, 어려움이 올 것을 예상했다.

“이제 어려움이 올 것이다. 역사는 싸움이다. 시대와 시대, 사상과 사상의 싸움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삼켜 버리기 전은 쉽지 않는 싸움이다. 시대를 넘겨 주기를 초등학교 교장이 졸업장을 주듯이 한 줄로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이날껏 자유는 인사로 얻어진 일이 없다. 기성복처럼 입혀줌을 받은 일이 없다.” (주석 22)

함석헌은 미국 여행 중에 국내 정세, 특히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에는 탈권 당한 민주당 정부 요인과 5ㆍ16에 반대한 장성 등 정치망명자가 많았고, 교포들도 <사상계>에 쓴 그의 글을 연상하면서 사자후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내 문제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교포들의 오해가 따랐으나 이에 개의치 않았다. 국내에서는 날을 세워 군사독재를 비판하지만, 해외에 나와서는 삼가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는 생각이었다.

3개월 간의 미국 시찰을 마친 함석헌은 워싱턴 D.C 소재 물리학자 김용준 교수의 아파트에서 그와 함께 지냈다. 해외 순방중에도 이전부터 시작된 1일 1식과 한복차림을 유지하였다. 한인 교회를 비롯하여 교포들의 초청으로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지만,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아서 ‘함석헌 사쿠라’란 비난도 나돌았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모임인 펜들힐로 가서 지내다가 1963년 1월 초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서 버밍험에 있는 퀘이커대학 우드브록 컬리지에서 3월 말까지 한 학기를 보냈다. 이때에 퀘이커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퀘이커 교도가 되었다. 이어서 영국 서부 지역과 스코틀랜드, 글라스코, 에든버러를 돌아보았다. 4월 28일 독일로 건너가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의 안내로 스위스, 핀란드, 노르웨이를 거쳐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주석
21> <사상계>, 1962년 3월호, 40쪽.
22> 앞의 책, 43쪽.

 

 



01.gif
0.14MB

'▷ SNS > Twit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년 8월10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10
2014년 8월9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9
2014년 8월7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7
2014년 8월6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6
2014년 8월5일 Twitter 이야기  (0) 2014.08.05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0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61년 8월 논설집 <인간혁명>을 일우사에서 펴냈다.
자유당 말기부터 최근까지 쓴 논설 10편이 실렸다. 이에 앞서 논설집 <새 시대의 전망>과 시집 <수평선 너머>, 번역서 칼 지브란의 <예언자>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속속 출간되었다. <인간혁명>은 두번째 논설집인 셈이다. 이 책은 군사쿠데타의 살벌한 상황에서도 1년 만에 4쇄를 찍을만큼 널리 읽혔다.

여기에 실린 논설은 <국민감정과 혁명완수>, <간디의 길>, <새나라 꿈틀거림>, <3ㆍ1정신>, <들사람 얼>, <크리스찬의 기백>, <하나님에 대한 태도>,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 <아름다움에 대하여>, <인간혁명>이다. 다음은 머릿말의 끝 부문이다.

친구여, 내가 주제넘게 왜 말을 하는지 아나? 깨쳐 말하면 싱거운 것이지만 정신이 분열됐다는 말까지 들은 담엔 부득이 깨쳐 말 아니할 수 없다. 내가 내 죄를 속해 보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라, 전날의 점잖은 친구에게 버림을 당했다. 그러니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걷어가지 않는 목숨 내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사는 밖에는 지금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걷어가지 않는 목숨 내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사는밖에는 조금이라도 죄를 속해 봐야지.

죽어야 할 목숨이니 될수록 낮은 일을 해야지. 그러나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워” 평생에 배운 것이 글인지라 부득이 붓대를 끄쩍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글의 넝마장수 사상의 넝마장수가 된 것이다.

혁명, 그것은 넝마 모으기 아닐까?
(주석 15)

이 책에는 내가(필자) 함석헌의 많은 글 중에서 으뜸으로 평가하는, <들사람 얼>을 비롯하여 표제 논설 <인간혁명>과 그가 대단한 페미니스트임을 보여 주는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등은 반세기가 지냈지만 지금의 독자에게 읽혀도 생동감이 넘치는 내용이다. 좋은 문장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

젊은 여성이라면?
생김생김을 관계 말고, 태어난 집안의 높고 낮음을 생각말고, 돈이 있거나 없거나,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재주가 깊거나 옅거나, 그 차이를 도무지 보지 말고, 그저 젊은 여성이기만 한다면?
스물에서 마흔까지, 살갗에 꽃이 피어나 있으며, 숨에 향기가 들어 있고, 목소리에 사람의 혼을 어루만지고 흔드는 보드라움과 맑음이 잠겨 있고, 눈동자에 영원을 향해 애타는 속삭임이 들어 있는 때라면?
그것은 거룩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신비로움이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다.
젊은 여성의 할 일은 그 받아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스스로 깨달아 잘 쓰느냐 하는 데 있다.
잘 쓰면 심청이요, 잔 다크요, 마리아지. 잘못 쓰면 양귀비요, 크레오파트라요, 살로메지.
(주석 16)

함석헌은 여성을 ‘풀무’요 ‘용광로’라 했다.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풀무다. 모든 쇠붙이를 녹여 쇠를 만드는 용광로를 달구기 위해선 풀무가 있어야 한다. 글은 이어진다.

여자는 풀무요 용광로다.
산을 빼는 항우가 우미인 앞에서 녹아 버려 영웅답지 못하게 질질 울었다 해서가 아니요, 사자를 찢는 삼손이 드보라 앞에서 혼이 빠져 믿음의 사람답지 못하게 딩글었다 해서가 아니다.
모든 쇳돌, 모든 녹슨 파쇠가 반드시 한 번 풀무 속에 들어가 가지고야 찌끼를 벗고 새 쇠가 되어 나오듯이, 모든 역사 모든 문화의 낡은 찌끼와 썩음을 벗겨 치우고 새 시대를 짓는 새 사람은 반드시 여자의 탯집 속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의 갈려 새로워짐은 반드시 세 세대로야 되는 것인데, 새 세대의 양심의 클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잡힌다.
모든 혁명은 여자의 탯집 속에서 시작된다.
(주석 17)

함석헌의 여성론은 전통적인 여성관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으로서 시대적인 사명과 함께 ‘여성스러움’을 강조한다. 한 대목을 더 들어보자.

예로부터 착함과 슬기로움과 날쌤을 천하에 뚫린 세 덕이라 하지만, 그 덕을 다 갖추고라도 거기 만일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신비롬이 없다 해 봐! 그럼 인생이 어찌 됐을까?
또 요샛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목소리를 다투어 서로 부르짖지만, 그 두 가지 권리를 다 보장 받았다 하더라도 거기 만일 조금이라도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신비롬이 들어있지 않다 해 봐! 그럼 이 세상이 어찌 됐을까?
그런데 길을 가노라면 하늘에서 받은 그 귀한 자격을 제 손으로 다 뜯어 망가치우고, 여성 아닌 여성, 여성도 남성도 아닌, 사람도 짐승도 아닌, 흉측하고도 가엾은 형상들이 어찌도 그리 많은가?
풀무가 깨졌으니 역사는 장차 어찌되는 것일까?
(주석 18)

함석헌의 이 책에는 또 그가 이화대학에서 한 강연 <아름다움에 대하여>가 실렸다. 내용 중에는 “너희의 너희 이상으로 잘 뵈잔 모든 허영심의 화장을 긁어 치워라”고 하면서 다음의 내용을 강조한다.

억만 년이나 살 듯 문화주택을 지어 단꿈에 취해 보자던 이 땅을 박차고 너희가 정말 영원 무한한 정신의 우주에 머리를 하늘 가에 대고 높이 선다면, 그런다면 그때 해 달이 너희 귀고리가 되고, 수없는 별들이 너희 머리에 보석이 되고, 흐르는 구름이 너희 어깨에 쇼율을 던지는데, 옷은 무슨 옷이 걱정이 되며 단장은 무슨 단장이 문제가 된단 말이냐? (주석 19)

이 구절에서 천의무봉한 사유의 세계와 함께 그의 여성관을 읽을 수 있다.

내 사랑아, 마음을 아름답게 가져야지, 어떤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냐? 무한을 안은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지. 어떤 마음이 무한한 마음이냐? 참된 마음이지. 허영심이 가장 작고 착한 마음이다. 네 마음 속에서 허영심을 버려라. (주석 20)



주석
15> 함석헌, <인간혁명>, 7쪽, 일우사, 1961.
16> 앞의 책, 248~249쪽.
17> 앞의 책, 249~250쪽.
18> 앞의 책, 251쪽.
19> 앞의 책, 276쪽.
20> 앞과 같음.

 


 

 


01.gif
0.04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