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 11. 석방 그리고 계속되는 수난


연세대에서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학생 17 명과 김찬국 김동길 교수 두 분이 구속되었다가 모두 석방되었다.

 

연세대 석방학생 :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 향 서준규

김영준 김학민 최민화 서창석 송무호 이재웅 송재덕 홍성엽 이상우 조형식

 

 

▲ 안양교도소에서 석방되는 김동길 교수를 누이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맞이하고 있다.

 

 

▲ 김찬국 교수


학교 당국과 총학생회 등 여러 모임에서는 학교의 명예와 자부심을 한껏 드높이듯
우리들의 석방을 환영하는 행사를 잇따라 갖고 위로와 격려의 뜻을 모아주었다.

종교 사회 단체들에서도 석방 인사 환영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그야말로 온 장안이 술렁거릴 정도였다.

반면에 유신 정보 통치 권력은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지면서 뜻밖의 분위기에 당황해 했다.

 

특히 소위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극악한 고문과 허위 자백 강요에 따른 

조작 수사 정황이 폭로되자 석방된 이들을 향해 반성하고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잠자코 자중하지 않으면 석방된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보낼 수 없다고 했다.

이 때 연세대 박대선 총장은 유신 권력의 기선을 피해 기정 사실로 굳히려는 듯
서둘러서 우리들의 복학을 허락했다.

 

 

▲ 연세대학교 박대선 총장


다른 대학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살기등등한 유신 권력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문교부가 나서서 계고장을 보내고 연세대에서는 연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정국은 더욱 술렁거렸다.

하지만 결국은 연세대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총장과 보직 교수들이 강제 사퇴하고
교수 직분까지 박탈당하는 참담한 굴욕으로 끝나버렸다.
우리는 온전히 복학으로 처리된 상태에서......

연세대 교정은 온통 울분에 차서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교수님들도 모두 그랬고 재학생과 석방된 우리도 그랬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대학원장으로 계시던 성내운 교수님은 우리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시며

"나도 자네들과 함께 감옥도 가고
같이 쫓겨났어야 하는 건데..."

라며 계속 학교에 나와 공부하라 당부하셨다.

 

 

▲ 성내운 교수

 

연세대학교 학생처장이었을 적에 성내운 교수는

학생운동에 앞장선 학생을 제적시키라는 당국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여러 정보기관에서 협박전화를 받았지만

끝내 학생처장으로서 학생을 제적시키는데 반대했다.

 

우리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자 동료 교수와 함께

구속학생들의 석방을 기원하는 '교수기도회'를 이끌었다.


양심적인 교육학자로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교수님은 1976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해직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은 성내운 교수님은 해직기자와 석방학생, 재야인사들과 어울렸다.


1977년 내가 씨알의 소리에 근무할 때 실은 늦봄 문익환 목사의 시 '꿈을 비는 마음'을 암송하고
모임이 있을 적마다 낭송하면서 시낭송가라는 전문영역을 개척했다.

 

급기야 1978년 6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발표하고 6개월 여 수배생활을 하다가

1979년 1월 체포 구속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60여 편에 이르는 성내운 교수님의 시낭송 강연은 단연 돋보였다.
미국에서도 60여 차례 시낭송 초청 강연을 했을 정도다.


우리는 복학 처리된 학생 신분으로 등교를 시도했다.
정보 기관원들은 새벽부터 교문과 강의실 앞에 지켜서서 우리의 수업을 방해했다.

온종일 지켜서서 우리가 나타나면 강제로 연행해 갔다.
경찰서 보호실에 가두기도 하고 이리저리 끌고다니다가 수업이 끝나는 시간 쯤에 풀어주기도 했다.

이런 곤경을 당하는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곁에서 지켜보는 동료 학생들과 교수님들, 교직원 모두가
누구랄것도 없이 참으로 비참한 심정이었다.

아니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아
그대로 수행할 수 밖에 없는 담당 기관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악법이라도 좋으니까 법을 만들어서 근거를 삼고 기준을 정해서
절차를 밟아 연행하든 가두든 해야 할 게 아니냐면서 집요하게 등교를 시도했다.

하지만 끝내는 우리 모두가 장기 결석으로 학점도 못 받고
또다시 제적당해야 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납득할 수 없고 수긍할 수도 없었다.
일단 끝난 일로 가만히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없었다.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양심으로 저항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선 함께 석방된 김동길 교수를 모시고 관계 기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한 장소를 마련해서 일주일에 이틀씩 교과 과정을 공부했다.

우리는 이 강좌 모임을 민립(民立)대학이라 불렀다.

 

나는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매형과

서대문에 위치한 저택, 방 2개와 주방이 있는 독립된 옥탑에

자취방을 마련하고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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