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 13. 전지전능한 '말씀'



유신 정권은 우리들의 석방 조치를 통해
국내외로 비화된 비난을 모면하면서
한편으로 민주화의 요구를 막아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대학 사회뿐만 아니라
종교계 언론계 등으로 확산되면서 여의치 않게 되자
또다시 강경책을 구사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했다.

 

이때 미국이 월남에서 패망한 소식은
유신 정권에게 오히려 돌파구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관변 단체뿐 아니라 욱박지르고 회유할 수 있는 단체는 모두 다 총동원해서
연일 신문과 방송에 성명서와 광고를 내게 했다.

안보 궐기 대회를 대대적으로 가지면서 법석거리고 야단이었다.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가더니 얼추 올랐다 싶었던지 1975년 5월 13일
'국가 안전과 공공 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를 선포했다.



이른바 '긴조 9호'로 불리는 이 조치는 유신 헌법을
신성불가침한 성역으로 감싸고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신 헌법에서조차도 보장할 수밖에 없는 국민의 기본권들을
사실상 제한하고 박탈하여 그야말로 헌법 위에 군임하는
'신(神)의 말씀'으로 되어 있었다.

 

모든 국민들은 권력자의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될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누가 그러한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되었는지를
전해 듣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더우기 이 조치를 위반하였다고 판단하여 내려진 형벌에 대해서는
법의 심판 대상에서조차 제외되어 이의를 달 길도 없었다.

 

그야말로 '말씀'은 전지전능한 절대 권력이었던것이다.

정국은 또다시 꽁꽁 얼어붙는 분위기로 돌변했다.


긴급조치 9호는 이제까지 모든 긴급조치의 종합판으로
대학교를 완전히 병영화하고 철저한 감시체제 하에 두는 것이었다.

유언비어 유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위반자에게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부과하고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나 단체의 장에게 해당자의 해임이나 제적을 명령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휴업, 휴교, 정간, 폐간이나 승인, 등록, 취소도

주무 장관의 재량하에 심사할 수 있었다.


관제 반공궐기대회가 연일 기승을 부리는 분위기와 함께
정국은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서울대 복학생 그룹과 탈춤패, 문학패, 야학패 등이 주도하여
김상진 열사 추도식으로 거행된 기습적인 거사로
1천 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다.


5월 22일에 발생하였다고 해서<오둘둘>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지전능한 말씀과 절대 권력의 권위에 일대 타격을 안겨주는 시발이 되었다.


경찰과 학교 당국의 시위 대응은 강경 일변도로 급변하였다.
시위 중 8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는데 그 중 60명이 즉시 구속되었고

학교 당국은 이중 53명을 무더기로 제명했다.


또한 이 시위 사태에 책임을 지고 서울대 총장이 사임하고
사전에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치안본부장과 남부경찰서장,
정보과장, 정보계장 등 정보라인이 무더기로 경질되었다.


이후 경찰과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이 대학교 내에 상주하면서
학생담당 교직원과 협력하여 학생 시위를 원천봉쇄하는 것이
대학가의 일반적인 풍경이 되었다.


1975년 7월 16일 긴급조치 9호 선포 2개월 여 후

이번에는 사회안전법 (社會安全法)이 법률로 제정되었다.


이는 특정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을 예방하는 한편,
사회복귀를 위한 교육개선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보안처분을 함으로써

국가안정과 사회안녕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제정된 법률이었다.


보안처분 대상자는
①형법상의 내란죄·외환죄
②군형법상의 반란죄·이적죄
③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구성죄, 목적수행죄,
자진지원·금품수수죄, 잠입·탈출죄, 찬양·고무죄,
회합·통신죄, 편의제공죄를 지어 금고 이상의 형을 받고
그 집행을 받은 사실이 있는 자들로 규정되어 있다.


보안처분은 검사의 청구에 의해
법무부장관이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결정하며,
기간은 2년이지만 경신할 수 있다.


이 법은 정권에 의해 사상범 또는 공안사범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형기를 마치고도 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악법으로
위헌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나는 주소지인 오산에서 군계나 도계를 벗어나 출타를 할 때

사전에 정보기관에 신고하여 허락을 얻어야 하고 다녀와서도 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


월남인으로 반공 의식이 몸에 배어 있는 지학순 주교님은

빨갱이로 구속되어 처단된 전적이 있는 박정희부터 솔선수범해서 실천하라.

나는 박정희에 비해 관찰 대상이 될 수 없으니만큼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와 함께 석방된 이들 모두 사회안전법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긴급조치 9호와 사회안전법으로 나는 중앙정보부 남산 수사국과
서빙고에 위치한 보안사 대공분실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신세가 되었다.

 

어디에 있었느냐, 어디를 갔느냐에서부터 누구를 만났느냐, 무엇을 했느냐 등
개인적인 일상 생활을 시시콜콜 뒤져내더니 만나는 사람들을 참견하려 들고
다니는 곳을 제한하려 들었다.

 

학교는 물론이고 기독교 기관 단체나 교회에도 나가지 말라는 거다.

 재야 인사는 물론이고 친구나 선후배 심지어 교회 목사를 만나서도 안 된다는 거다.
도서관에 나가서 혼자 책을 보아서도 안 된다는 거다.

 

상식적 기준으로나 헌법, 기본법적 근거로나
무슨 절차로나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유신 정권은 이 뿐만 아니라 나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질 것을 강요했다.

 

이목구비를 틀어 막고
잠자코 있으라고 강요했다.

 

정신적으로 수긍할 수 없었다.
옳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아니라고 거부해야 했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저항해야 했다.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틈만 나면 친구와 후배들을 만났다.
틈을 내어 목사님 신부님을 찾아 뵈었다.

 

봉원산거를 찾아 함 선생님과의 모임도 계속했다.
김동길 교수와의 민립대학 강좌 수업도 계속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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