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 12. 연행 여행과 미인계 사건


때로 외국 국가 원수나
국제적인 인권 단체에서 방한하게 되면
우리는 아예 수도권을 벗어나서
지방 먼 곳으로 강제 연행되어 잠적해 있어야 했다.

대통령이 외국 순방길에 오를 때도 그랬고
대통령이 국가 경축 행사에 참석할 때도 그랬다.

1975년 3월 29일 나는 강의실에서 수업받고 있던 중
경찰서 정보과 직원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

 

 ▲ 동아일보 1975.04.02



그 당시 한국의 민주화에 많은 관심을 보여온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의원이 이끄는
아시아태평양지역 소위원회가
민청학련 사건의 고문과 조작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또 영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대표단을 보내왔다.

그들이 만날 만한 30 ~ 40명의 명단이
중앙정보부에 입수되자 공안 기관에서는
명단에 든 인사들이 조사단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전원을 강제 연행해서 지방으로 보내게 했다.

이른바 "강제 연행 여행"이라고 부르는 이 수법은
박정희가 사망하는 1979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당시 화성군 오산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수원 지역 정보 기관에서 나를 담당해서
강제 연행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틈을 타서 잠시 함석헌 선생님이 계시는 봉원산거를 찾았다.
여남은 이들과 인도 경전 바가받기타를 공부하고 있던 함 선생님은

"그런 데를 끌려 가게 되면 여자를 조심해야 될 거야"

하고 염려를 주셨다.
함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이튿날 수원에서 온양으로, 수덕사를 거쳐, 장항으로,
다시 군산을 거쳐, 전주로 정신없이 끌려 다녔다.

자정을 넘어서야 전주 복판쯤으로 여겨지는 곳에 위치한
여관장에 들어서 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피곤도 겹치고 해서 선잠에 빠져들 즈음
잠결에 등어리 바짝으로 뭉클하고 뜨뜻한 체온이 느껴져 왔다.

이상한 감촉에 잠을 설치고 깨어 돌아 보니

동행한 기관원은 간 데 없고
스물 두어 살 쯤으로 보이는 웬 여자가
완전히 벌거벗은 채 나와 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순간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뇌리를 스치면서
벌떡 일어나 불을 켜려고 벽을 더듬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왜 이러시느냐고
조용히 한번 놀자고 하면서 내 팬티를 잡고 늘어졌다.

나는 털썩 주저 앉아 벗겨진 팬티를 다시 가려 입고
주인장을 부르며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기를 두 세 번 계속하자 그녀는 조용히 하면 불을 켜 주겠다고 하면서
일어나 불을 켜고는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 와 내 목을 잡고 끌어 당겼다.
20 여 분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틈을 타서 밖으로 뛰쳐 나왔다.

내친 김에 서울로 올라와
명동에 위치한 전진상 교육관 위층의 수녀원으로 가서
수녀들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 있었다.

그러자 지학순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찾아 오시고
박형규 목사님과 이 철 어머니, 김지하 어머니, 김 윤 어머니가 오셨다.

마침 한국의 인권 문제를 취재하러 왔던

영국의 BBC 방송 텔레비전 제작팀들이 찾아와

여러시간 인터뷰를 했다.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세 분이 공동의장으로 이끌던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대변인 함세웅 신부 명의로
진상을 알리고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편 광고 탄압 사건으로 박 정권과
한창 심각하게 마찰을 빚고 있던 동아일보에서는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과 엠네스티 국제위원회가
한국 인권문제를 조사하려 할 때
당국은 그들이 만나려는 민주인사들을 관광여행을 시켰으며
특히 연세대 최민화 군의 경우 기관원이 어린 학생에게
미인계(美人計)를 쓰는 등 불미한 사례에 접해
분노와 서글픔을 억제치 못한다고 밝혔다" 고
함 신부의 기자회견문을 보도하기도 했다.

 

▲ 동아일보 1975.04.05

 

당시 시국과 관련해서 일어난 집회와 시위 등 소식은 방송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고

신문에서 1단 짧은 기사로 보도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재야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5단 기사로 보도한다는 건

그야말로 보기드문 톱기사에 다름 아니었다.

영국 BBC 방송에서는 순수한 학생을 강제로 연행해서
인간적으로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려는 반인륜적 행위로 미인계 사건을 소개하면서
유럽과 캐나다 호주 등에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방송했다.

그 주간에 있었던 구속자 가족 목요기도회에서 함석헌 선생님은

"인면수심도 유분수지...
어떻게 맑고 순진한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해다가
창기를 집어 넣어 타락시키려는 일을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이오!
정부에서 하는 짓거리가 이 지경인데도
우리가 비폭력만 하고 있어야 되겠소?
갑시다! 도끼들고 나갑시다.
치안본부로 가서 다 때려 부수어야지..."

하시며 울분을 이기지 못해 하셨다.

마하트마 간디도 아들이
누군가가 아버지를 폭력으로 살해하려 한다면
그런 상황을 목격하면서도
그 괴한에게 비폭력으로 대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괴한의 폭력으로 아비가 죽게 되는 상황에서는
폭력으로 맞대응해서라도 괴한의 행동을 저지시키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대답했다는 말씀을 소개하면서
함 선생님은 나가야 된다고, 도끼라도 들고 여관으로
치안본부로 몰려 나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비폭력주의자인 함석헌 선생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력적 저항을 언급하신 대목이다.

 

한편 연세대 교정은 문교부의 계고장과 박대선 총장의 정면대립으로
대규모 학생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1975년 4월 3일 소식을 전해 들으신 나의 아버님은
김지하 모친, 이 철 모친, 김 윤 모친 등 구속자 가족 분들에 이끌려
함께 연세대로 향했다.

 

이날은 마침 전교생 7천 명 중 6천 여 명이 참여하고

음대 악단이 공대 옥상에서 진군나팔소리로

시위대를 고무하는 가운데 벌어진
개교 이래 최대의 학생시위가 있던 날이었다.

 

신문 보도를 통해 나의 강제연행과 미인계 사건을 전해 들은 학생들은
구속자 가족분들 방문 소식에 대강당으로 모이고
아버님은 대강단 연단에 올라 2천 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내가 연행된 경위와 천인공노할 미인계 사건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셨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본 당시 교목실장 이계준 교수는 훗날 나를 만나자
"그날 대강당에서 아버님이 명연설을 하셔서 열기를 한껏 돋구었다" 고
분위기를 전해 주셨다.

 

1975년 4월 6일 나는 새문안 교회 주일 예배와 대학생부 모임에 참석했다가
잠복 중이던 정보기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그리고는 부산으로 포항으로 경주로 또다시 연행 여행을 떠났다.

 

▲ 연행 여행 중 경주에서 정보과 형사와 함께. 박박머리로 감옥에서 출소하여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

 

포항에 머물고 있던 4월 8일에는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었다.

 

4월 9일 경주에 머물고 있을 때

인혁당 사건 관계자 8 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인혁당사건으로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들

 

▲ 1975년 4월 9일 대법 확정판결 후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8분 -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용원(당시 39·경기여고 교사) 도예종(51·삼화토건 회장) 서도원(52·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송상진(46·양봉업)

하재완(43·양조장 경영) 이수병(37·삼락일어학원 강사) 우홍선(45·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여정남(31·전 경북대 학생회장)

그 날 경주는 새벽부터 먹구름이 끼고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참으로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빈 속에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는 평소 좋아하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던 막걸리 한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내 위 속에 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한꺼번에 토해 버렸다.

 

이틀 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시국성토대회에서 세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은

정열적인 어조로 학내문제를 설명하고 죽음을 택하게 된 양심선언문을 읽은 후 할복 자결한다.

 

그날 연행 여행을 마치고 저녁 늦게 수원경찰서에 들어서자

서울농대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지고 김상진 열사가 자결한 일로 경찰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전주에 있는 여관장과

벌거벗고 내 침대에 누어 있던 여인을 직접 취조하고

정황과 사실을 샅샅이 파악했다.

나에 대한 미인계 사건과 이런저런 일이 겹치고 겹쳐서 

수원경찰서장 이하 정보 과장 계장 담당자 등 모두가 징계를 받게 되었다.

경찰서장과 간부들이 모두 오산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들은 어머니께 같은 공무원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던 일로 너그럽게 이해하고 부디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어머님은 내 처분만 바라보고 계셨다.

 

중앙정보부 학원담당 과장과 간부 두 분이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서

아랫사람들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저지른 짓이라면서

엄하게 질책하겠다고 했다.

결국 과장 이하 담당 직원들은 징계를 받고  
수원경찰서장은 시말서를 썼는데 그 후 다른 사건과 겹쳐 몇달 후 직위 해제되었다.

 

강제 연행여행은 그 후로도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매 해 31일 삼일절,  4.19혁명기념일인 419, 815일 광복절과

외국의 주요 사절이 방한할 때, 민주적인 집회가 예정되어 있을 때 등에는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강제 소개되어 연행여행을 다녀야 했다.

 

훗날 인혁당 관련자는 재심을 통해서

2007년 1월, 32년 여 만에사형 집행을 당한 분들을 포함하여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이 사건의 재심을 통해서

2009년 09월 11일, 35년 여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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