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 / 14. 장준하 선생


장준하 선생은 일제 말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만주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한 애국 지사다.


▲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서 (왼쪽부터)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찍은 사진.


그러나 선생의 명성은 독립군의 이력보다도
독립된 이 나라에서 펼친
반독재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의 거목으로
우리 뇌리에 남아 있다.

선생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일제로부터 독립한 나라의 지도층이
온통 일제의 압잡이들로 구성된 것에 대해
민족 정기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울분을 금치 못하셨다.

더욱이 군사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의 압잡이인 관동군 중위 출신이라는 데에 이르러서는
적이 비분강개하셨다.

장준하와 박정희...
이 두 사람은 이렇게 출신 성분에서부터 확연히 달랐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면에서
장준하 선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시대에 비슷한 연배로 만주라는 같은 공간에서
한 사람은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지만
결국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독립운동의 상징인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날까지 일제에 저항한 반면

또한 젊은이는 멀쩡한 교사직을 버리고
오로지 입신양명을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일제에 가장 충직스런 군 장교로
독립운동가들을 섬멸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결국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의 장교인 박정희 중위는
패잔병이자 전범자로 처벌을 받고
독립 운동을 이끈 장준하는 민족 지도자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맡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 상황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처럼 대조적이고 모순적인 현상은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권력과
그에 저항하는 민주화 통일 운동 세력의 성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 박정희로서는 장준하라는 존재가
감추고 싶은 자신의 과거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어서
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런 관계는 훗날 장준하 선생이
박 정권 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운명을
비극적으로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서술한 바 있거니와
1973년 12월 장준하 선생이 재야 인사를 대표해서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 청원 서명운동본부'를 제안 발의하자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키면서 전개되어 갔다.

이 운동을 막기 위한 조치로 박정희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굴하지 않는 장 선생을 처음으로 구속하였다.

그 직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우리 학생들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던 장준하 선생은
74년 12월 건강 악화로
수감 생활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정되어
'중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75년 2월 15일 석방된 나는 4 월 말 경
나병식(민주화기념사업회 상임이사) 황인성(사회운동)등과 같이
장준하 선생을 찾아뵈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석방된 학생들이 찾아온 것이 처음이어서인지
장 선생은 우리를 무척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선생님이 등산을 좋아하는 분이어서
우리가 모시고 함께 산행을 했으면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장준하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승낙하셨다.

"내가 지금 몸이 좀 좋지 않지만 귀한 분들 요청인데......
함께 갈 수 있도록 찾아 줘서 고맙소."

장 선생님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며
당신이 잘 아는 코스 중에
우리에게 꼭 안내해 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셨다.

5월 초 우리는 선생을 모시고 치악산을 향해 떠났다.
상원사에서 하루를 묵고 치악산 능선을 따라
비로봉을 거쳐 구룡사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내게는 치악산 등반이 초행길이라 무척 힘이 들었다.
만만치않게 어려운 코스였다는 기억이다.

그러나 선생은 중통으로 석방된 분 같지 않게
젊은 우리보다도 산행을 훨씬 잘 하셨다.

심근경색증을 앓고 계시던 선생은
빨간 약봉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당신이 갑자기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지면
약 두 알을 즉시 입에 넣어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산을 어찌나 노련하게 오르시는지
장 선생을 따라 오르는 길이 나에게는 적이나 힘에 벅찼다.

우리가 장준하 선생과 오랜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처럼 가까이서 체취를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정갈한 선비 같다고나 할까...
조용조용하고 말씀도 극히 절약하는 분인데
가까이서 봐도 뒤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참으로 흠잡을데 없이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만큼
귀공자 풍의 미남이었다.


▲ 장준하 선생


살결은 퍼런 빛이 도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희디희고 곱디곱다.

둘째 날 비로봉 정상을 거쳐 구룡사에 도착했다.
구룡사 주지 스님은 반색을 하며
장 선생과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장 선생은 매우 대견하고 자랑스러우신 표정으로
주지 스님께 우리를 소개했다.


▲ 치악산 구룡사


주지 스님은 1950 ~ 6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대표적 종합 월간지이자
장 선생이 펴내신 <사상계>의 애독자이셨단다.

그때부터 장 선생의 뜻을 존경해 왔다면서
불교신도 회장 등 여러분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 분들 역시 존경하는 분들을 직접 뵈었다고 반가워 했다.
우리 일행은 주지 스님이 주시는 차를 마시며
늦도록 세상 이야기 등을 나누기도 하고
그윽한 산사의 풍경 속에 등산의 피로를 풀면서
옥고의 여독을 씻어 내기도 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사찰과는 별로 인연이 없던 나로서는
그 날 난생처음 절에서 정식 공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 정갈하고 깨끗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튿날 아침 공양을 하면서 주지 스님은

"... 1년에 뚜껑을 한 두 번밖에 안 여는 귀한 곡차가 있는데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하면서 찻잔에 차를 따라주시는데
색깔이 맑고 고운 핑크빛이었다.

한 입 대어 마셔보니 은은하게 취해 오는 느낌이 든다.
알고 보니 산사에서 복분차라고 부르는 산딸기 발효주였다.

맛이 너무 좋았던지 황인성이 불쑥
"저... 한 잔만 더 주십시오" 했고
나병식도 뒤따라 웃으면서 "저도..." 하며
한 잔을 더 받는다.

나 역시 한 잔을 더 부탁했다.
두 잔을 마시고도 우리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니까
스님이 한 잔씩을 더 주신다.

석 잔 째 마시니 취기가 약간 도는 것 같다.
알딸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장 선생은 한 잔밖에 안 드셨다.

"장준하 선생이 우리 절을 찾아준 것만도 큰 영광인데
이렇게 귀한 분들까지 함께 찾아주셨으니
방명록에 이름을 좀 남겨 주시지요..."

주지 스님의 요청으로 방명록에 서명하려고 보니
바로 앞장에 이후락 김성곤 김종필 등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상호 대치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이어져 있어 묘한 감정이 머리를 스친다.

우리 다음으로 방명록에 서명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까 궁금하기도 했다.
주지 스님은

"이왕 오셨으니 가 볼만한 곳 한군데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기 계곡 쪽으로 가면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샘이 있는데
물이 아주 좋고 시원한 곳이니 산수도 즐기시고
그 샘물로 점심을 해 자시고 내려가십시오"

하시며 안내하는 분을 붙여 주셨다.
우리는 그 샘터에서 점심을 해 먹고는
냇가 계곡물에서 등물을 했다.

번갈아 서로 등을 밀어 주는데
장 선생의 등을 내가 밀어 드리게 되었다.

장 선생의 살색은 눈으로 바라보던 것보다도
훨씬 하얗다 못해 퍼런 기가 돌며 매우 고왔다.

여자의 살결이라도 이보다 더 보드랍고
윤기가 돌 것 같지 않을 정도다.

오후에 우리는 원주 시내 가톨릭 원주 교구청에 들러
지학순 주교님을 만나뵈었다.


▲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장 선생님은 매우 대견하고 자랑스러우신 표정으로
우리를 지학순 주교님께 소개했다.

지 주교님도 우리를 아주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신부님 수녀님 등과 만찬을 함께 했는데
헤어질 때 우리에게 격려금이랄까 

금일봉을 주신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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