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19 08:00 김삼웅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의 신임을 얻게 된 박정희의 정치적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앞의 두 사안의 투쟁 과정에서 야당은 신한당과 민중당으로 갈라지고, 언론은 박정권의 회유와 탄압이라는 강온 전략에 말려 제 기능을 잃어갔다.

제6대 대통령선거가 1967년 5월 3일로 예정된 상태에서 야권은 윤보선ㆍ유진오ㆍ이범석ㆍ백낙준 등이 자천타천으로 거론되었다. 국민은 단일후보를 기대했으나 조정이 쉽지 않았다. 장준하가 중심이 되어 후보단일화 작업의 일환으로 ‘4자회담’을 주선했다. 거론 인사 4명을 모아 화합을 성사시킨 것이다.

곡절 끝에 윤보선이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장준하는 이범석이나 백낙준이 후보가 되기를 바랐으나 뜻대로는 아니었다. 윤보선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교체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위기를 맞은 박정희는 군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눈엣가시와 같은 장준하와 <사상계>에 보복의 칼을 뽑았다. 굴욕회담 반대의 이념적, 이론지적 역할의 중심에 장준하와 <사상계>가 있고, 그 배후에 함석헌의 존재에 주목한 것이다. 1965년 3월 중순 종로세무서 직원 10명이 사상계사에 들이닥쳐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10일 동안의 조사에도 꼬투리를 잡지 못하자, 이번에는 국세청의 증원부대까지 포함된 20여 명이 본사는 물론 인쇄소, 제본소, 지업상, 광고주, 지방 거래 서점까지 찾아가 이잡듯이 뒤졌다. 고사작전이었다. 또 <사상계> 편집위원 중에도 ‘정치교수’로 찍어 대학에서 추방시키는 등 전방위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1966년 10월 26일 장준하는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었다.
그가 삼성계열사의 밀수행위 규탄대회에서 “박정희가 밀수왕초”라는 발언과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라는 발언 때문이었다. 광복군 장교출신 장준하와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의 맞대결이었다.

<사상계>는 1967년 4월호에 ‘4자회담’을 주제로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를 마련한 것은 ‘4자회담’의 내막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의미가 있었다. 참석자는 함석헌ㆍ백낙준ㆍ이범석과 사회자 양호민이었다. 양호민은 당시 <사상계> 주간이었다.

좌담회에 참석한 함석헌은 “이번만은 정상적인 정권교체에만 국한되지 말고 한번 어려운 시국을 인식하여, 사람이야 누가 명색을 지고 나서든지간에, 중요한 이 시기에 공동의 정치책임으로 정치를 일신하는, 역사로 보면 나라를 건진다는 그런 의식에서 일을 한다면 공동으로 같은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이번에는 일이 되는가보다 해서, 국민이 갑자기 ‘4자회담’이 되는 것에 감흥을 올렸었는데, 그 후에 못된 것을 보고는 아주 섭섭하군요.” (주석 21) 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박정희는 두번째로 맞붙은 윤보선과의 접전에서 쉽게 승리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야당후보에 식상한 국민은 박정희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정권의 탄압으로 <사상계>가 고사 상태에 빠지게 되고, 국가원수모독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장준하는 더 이상 언론인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하여 박정희를 물리치기 위해 직접 정치에 나서는 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6월 8일로 공고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로 작심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동대문 을구에 옥중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함석헌은 이때 장준하의 선거연설원이 되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민당에 입당원서를 냈다. 그리고 지원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세요.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장준하 이 사람은 죽습니다.
자살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주석 22)

함석헌은 장준하의 당선을 위해 선거구를 찾아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다. 후보는 감옥에 갇혀 있고, 자금도 조직도 없는 선거전이었다. 흰 두루마기, 흰 머리, 흰 수염의 함석헌이 연단에 서면 우선 호기심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고, 장준하와 박정희, 그동안 <사상계>의 역할 등을 이야기하면 박수가 쏟아졌다.

함석헌의 지원연설로 여론이 움직이고, 지식층을 중심으로 장준하의 독립운동과 <사상계>의 가치가 알려지면서 선거 판세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정보기관이 장준하를 석방하는 것이 ‘동정여론’을 차단할 수 있다는 보고에 따라 정부는 투표 일주일 전에 그를 석방하였다. 석방된 후보의 얼굴이라도 보자는 유권자들이 몰려왔다.

대세는 장준하에게 쏠렸다. 5만 7천여 표(차점은 3만 5천여 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이로 당선되었다.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준하는 당선되었으나 신민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3ㆍ15가 무색케하는 관권ㆍ부정선거로 공화당이 압승했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구상하면서 개헌선 확보를 위해 총선에서 부정을 자행한 것이다. 야당과 학생들은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 규탄운동에 나섰다. 6월 9일 연세대에서 부정선거규탄시위가 일어난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박정권은 6월 15일 전국 28개 대학과 57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이를 규탄하는 학생들을 탄압하면서 거침없이 휴교령을 내리는 파스시트적 수법이었다. 


주석
21> <사상계>, 1969년 4월호, 20쪽.
22> 고성춘, <장준하선생의 옥중당선 이야기>, <민족혼ㆍ민주혼ㆍ자유혼>,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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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8 08:00 김삼웅

 

 

 

1999년 신문ㆍ방송ㆍ통신사ㆍ편집ㆍ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들에 의해 한국의 ‘20세기 최고언론인’으로 선정된 송건호는 1971년 <언론인 함석헌>을 썼다. 몇 대목을 뽑아본다.

함옹은 이른바 직업적 언론인으로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인물이면서도 이 양반이야말로 죽은 언론계가 언제나 생기와 양심과 용기를 붙어 넣어주는 참된 언론인으로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함옹을 누구도 언론인이라고 보지 않는데도 기실 이 분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아마 가장 진정한 언론인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바로 이 점(자유롭고 독립된 지식인 - 필자)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칭 언론인이 구름처럼 많은 이 세상에서 오직 유일한 진짜 언론인으로서 활동해 온 것은 이 분의 그 아무것에도 매어 살지 않는 자유롭고 독립된 생활이 한 조건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함옹이 기자들이 우글우글한 신문사 밖에 있으면서도 빛나는 언론활동을 하게 된 것은 이른바 언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을 때 그의 언론 활동이 상대적으로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직업적 언론인이 감히 엄두도 못내는 한 시대의 본질적 문제에 핵심을 찌르는 비판활동을 벌인다. 이런 때의 함옹 글은 비수보다도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글이 된다. 그래서 흔히 권력자들은 함옹을 옥에 가두기도 하고, 그가 내는 잡지를 압수처분하기도 하고, 그를 위협, 겁을 주기도 하고, 때론 미행ㆍ감시ㆍ연금하기도 하며 그의 글을 꺾으려고 하였다.

지킬만한 재산도 없고, 보호할 만한 감투도 없고, 유지하여야 할 정치적 지위도 없었다.
함옹은 철저하게 무욕하고 따라서 잃을 것이 없는 노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다. 그의 빛나는 언론활동은 바로 이러한 ‘무욕의 지위’에서 나온 정론이었다.
(주석 17)

송건호의 글을 인용한 것은 언론계 사주들이 서울 시내 중심가에 거대한 사옥을 짓고, 언론인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제도언론의 타락에 대해 질타한 모습을 찾기 위해서이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7년 1월호에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는 권두시론을 썼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장준하를 면회갔다가 청탁받아 쓴 글임을 서두에 밝혔다.

말인즉,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 했고 존슨이 온 것은 한국 청년의 피를 더 요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기 때문이라 하지만 그것은 꺼리가 될 뿐이고, 정말 까닭인즉 군사정권 이래 오늘까지 이 정권과 싸워왔기때문 아닌가? 존슨이 왔던 것이 월남전쟁 때문인 것은 과학적인 사실 아닌가? 대통령이 밀수 왕초라 하는 것은 춘추필법 아닌가? 이 나라 모든 일의 책임이 잘잘못 간에 나 대통령한테 돌아갈 것은 정한 일 아닌가? 그럴라기에 대통령으로 놓은 것이지, 만일 아무 책임 아니진다면 무슨 대통령이라 할 것이 있나? (주석 18)

함석헌은 송건호가 지적한대로 “언론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을 때 거침없이 이른바 ‘성역’을 비판하였다. 당시 언론은 박정희를 성역화하면서 직접 비판에서 비켜갔다. 함석헌은 예외였다.

좋기는, 이상대로 된다면, 현 대통령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여 한 번 용퇴를 하는 일이다. 공화당 당수를 그만두고 대통령 입후보를 아니할 것을 선언해 주는 일이다. 그렇기만 한다면 일은 훨씬 쉽고 나라를 위하여 참으로 축제할 일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그는 설혹 그럴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 주위의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능히 물리치는 데가 그의 정치가로서의 성의와 역량을 증명하는 데다. 한 사람의 값이 큰 것을 또 한 번 생각한다. (주석 19)

함석헌은 박정희가 공화당 대표와 차기 대선 후보로 나오지 말고, 당장 하야할 것을 제의한다. 야당 대표라도 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함석헌이 이 글에서 제기한 문제는 언론(인)의 책임, 나아가서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한 족벌신문에 대해 ‘게릴라전’을 펴라는 주장이다. 해방 이후 이 같은 발언은 최초였다. 금단의 성역에 불화살을 쏘았다.

다음에 오는 선거가 성공이 되거나 실패가 되거나, 실패되면 될수록,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언론의 게릴라전이다. 국민의 양심을 대표하던 사상계가 경영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읽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계획적으로 하는 압박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에서 대규모의 정규군의 싸움의 시대가 지나가고 게릴라전이 그 승부를 결정하듯이, 언론에서도 큰 신문 큰 잡지로 여론을 지배해가던 시기는 지나간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규군이 깨지면, 그 패잔부대를 무수한 게릴라부대로 재편성하여 대부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방방곡곡을 보내어 도리어 승리를 거둘 수 있듯이 우리 사상의 싸움에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전차 간에서나 버스 간에서나, 결혼식에서나 장례식에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우리의 정의혁명 사상을 고취하고 지금 잘못된 정치의 비판을 하자는 것이다.

새해에는 그대로만 올 수 있을 것이다. 폭력정치, 정보정치, 당파주의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와야한다. 천지에 버젓한 정의혁명을 청천 백일에 내놓고 생활로 하잔 말이다.
(주석 20)

함석헌이 주창한 ‘언론게릴라전’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제도언론(인)의 과제가 되어 있는 한편 진보신문의 창간과 주간지, 월간지와 특히 인터넷신문과 방송, 각종 전자 매체가 속속 나타나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주석
17> 송건호, <언론인 함석헌>, <씨알ㆍ인간ㆍ역사>, 26~29쪽, 발췌.
18> 함석헌,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 <사상계>, 1967년 1월호, 16~17쪽.
19> 앞의 책, 20쪽.
20> 앞의 책,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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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7 08:00 김삼웅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명상과 독서를 하는 한편 또 한 권의 저서를 펴내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오산고보에 재직하면서 1936년 5월호부터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연재하였다. ‘조선역사’의 자매 편인 셈이다. <성서조선> 제88호부터 110호까지 2년여에 걸쳐 연재한 세계역사였다. <성서조선>이 폐간되면서 이 연재도 중단되었다. 함석헌은 해방 뒤 <영단(靈斷)>에 썼던 글까지 모아 책으로 묶었다.

함석헌은 해인사에서 ‘조선역사’를 보완, 개작한 것과는 달리 ‘세계역사’는 예전에 쓴 글 중에 골라서 펴냈다. 제목도 ‘성서적 입장에서 본’을 빼고 <역사와 민족>으로 바꾸었다.

<성서조선>이나 <영단>에 냈던 글을 묶어 책으로 내자는 의견이 왔습니다. 그럴 때 나는 반대했습니다. 내자는 이의 말은, 그 글들이 나왔을 때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말하자면 한 구석에서 된 것이니 이제 그것을 다시 내놔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으므로 그럴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자는 이의 주장은 또 이러했습니다.

지금 생각이라고 다 옳은 것도 아니요, 옛날 생각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며 또 일단 내는 다음에는, 내 생각이라 해서, 거기 독재권을 쓸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번 의논이 오고 간 끝에 그 중에서 비교적 내 마음에 허락이 되는 것을 후린 것이 이것입니다.
(주석 12)

함석헌은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그리고 동기집회에서 발표한 기독교사를 3부 자매편으로 낼 계획이었으나 ‘기독교사’는 원고를 잃어서 영영 햇볕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정말 어려운데 빠졌습니다. 정말 깊이 생각할 때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고 ‘어떻게, 어떻게’ 하고 ‘방안’을 찾아서 미치나, 방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속 그 자체가 잘못됐는데, 깊이 생각이라 했지만, 무엇이 깊은 것이겠습니까? 독자적으로, 나로서 하는 것 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뒤져 왔던 방구석을 또 다시 뒤지는 모양으로 그런 심리로 지나간 날에 했던 생각을 또 다시 뒤집어 봅니다.
(주석 13)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일반에 비교적 많이 알려진데 비해 <역사와 민족>은 덜 알려진 편이다. 책은 △ 서언 - 우리들의 세계역사, 성서사관과 진화론에 이어 △ 창시시대 △ 성장기 △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로 큰 장을 나누었다.

△ 창시시대 - 1. 우주의 창조. 2. 생명의 창조. 3, 인류의 출현까지. 4. 인류의 진화. 5. 인간의 특질. △ 성장기 - 1. 석기시대. 2. 지리와 인종의 배포. 3. 요람 안의 여러 운명. 4. 종교. 5. 무력국가. △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 1. 서풍의 노래. 2.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3. 순교의 정신. 4. 하나님의 정의. 5. 산 신앙. 6. 무교회 신앙과 조선. 7. 존재하는 종교. 8. 제2의 종교개혁. 성삼문과 스테반. △ 20세기의 출애굽 - 1.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애소랜도의 발시로 구성되었다.

함석헌은 이 책의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의 근본 정신이란 어떤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라는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 명사는 그 사물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그가 지는 성질을 단적으로 잘 나타낸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의 근본이 되는 프로테스트 라는 말은 번역하여서 ‘반항한다’, ‘항의한다’, ‘선언한다’, ‘공증한다’ 등의 말로 된다. 대체로 말해서 자기의 주장을 공공연히 선언 증거한다는 말로 전투적 기분이 짙은 말이다. 곧 의가 불의에, 진리가 사론에, 선이 악에 강압을 받을 때에 프로테스탄트가 일어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프로테스탄트, 그 주의를 프로테스탄티즘이라 한다. 이 명사의 해석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위인(爲人)이 어떠함은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재미 있는 것은 이 명사가 프로테스탄트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고, 반대자가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제 2스파에르회의 때에 정통파 구교 사람들이 그 결정한 법안에 반항한다 하여서 그들을 불러 프로테스탄트 곧 반항자라 경멸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후에는 자타가 다 승인하여 공용하게 되었다.
(주석 14)

함석헌은 프로테스탄트였다.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을 잇고자 하였고, 그 정신으로 압제자들에게 대들었다. 기독교가 근본정신을 잃고 타락하자 이를 비판하고, 독재권력과 야합하자 거침없이 떠났다. 하지만 기독교의 기본인 성서를 죽는 날까지 놓지 않았다. 그 대신 저항을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함석헌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 그 원류를 설명한다.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의 배후에는 중세의 종교적 질곡에 반항하는 문예부흥 이래의 자유사상, 인문주의사상이 흘러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오히려 불충분하다. 한층 더 올라가서 바울주의에서 우리는 근원은 찾을 수 있다. 바울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무엇보다 자유독립의 사람이다. 유대교의 율법주의, 의식주의(儀式主義)의 묵은 물결이 때때로 침입하려는 모양을 보고는 그는 열화 같이 일어서서 신앙의 자유독립을 외쳤다. 갈라디아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이를 알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의문(儀文)의 노예가 아니요, 신앙에 의한 자유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여 온 유대교도들을 상대로 싸우는 바울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고 무엇인가? (주석 15)

함석헌은 또 이 책의 <하나님의 정의>편에서, 양심이 마비되고 진실을 보는 눈이 까막눈이 된 사람들을 질타한다.

눈먼자야, 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네가 죽음 구렁이 속에 빠져죽고 생각이 없거든 두드려라. 열심히 두드려라. 정의의 빛이 있을 지어라 하며. 그러면 네 눈을 덮은 두터운 암흑의 빗장이 깨어지고, 눈이 부신 정의의 빛이 스스로 나타나 네 앞을 환하게 비칠 것이다. 만고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정의다. (주석 16)


주석
12> 함석헌, <역사와 민족>, 머리말, 제일출판사, 1964.
13> 앞과 같음.
14> 앞의 책, 242~246쪽.
15> 앞의 책, 249쪽.
16> 앞의 책,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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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16 08:00 김삼웅

 

 

플리커(@Dan Stovall)

함석헌의 비폭력주의는 투항이나 패배주의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비폭력저항이었다. 독재세력과 싸우되 비폭력으로 저항하자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사상을 배운 것이다. 그의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면서 “진리는 곧을 때는 금강석 같으면서도 연할 때는 꽃 같은 것이다”란 신념대로였다. “오직 비폭력만이 인류의 희망”이란 간디의 철학은 바로 함석헌의 철학이었다. <사상계> 1967년 2월호에 쓴 <저항의 철학>에서 잘 나타난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 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주석 7)

다음은 앞 장에서도 인용하였지만, 함석헌의 저항사상의 핵심 부문이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 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즉, 음(陰)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쏟아나오는 정(精), 맨숭맨숭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神),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다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는 없어 말구유 안으로라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
(주석 8)

함석헌의 저항정신을 연구한 송기득(한신대) 전 교수는 “함석헌의 저항은 단순히 인간의 개체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켰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저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그것은 그대로 ‘존재적 저항’의 연장이다. 그는 나와 역사를 따로 떼어서 보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전체이다.” (주석 9)고 분석한다.

송기득의 분석대로 함석헌의 저항은 역사적이었다.
일제로부터 시작된 그의 저항은 소련,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에게까지 이어진다.

“정치가 깡패식 폭력주의로서 민중을 억압하는 채제로 나갈 때 그것은 함석헌에게 있어서 무섭게 저항하는 상대로 부상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어떤 이유로서도 민중을 억누를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주석 10)

함석헌이 좋아했던 러시아의 저항인 베르쟈예프는 “나는 일생을 통하여 저항인이었다”고 고백할만큼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역사의 위대한 반역에 모두 찬성투표를 한다고 했다. 루소의 ‘자연’의 반역, 프랑스혁명의 반역, 객체의 권력에 대한 관념론의 반역,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역, 이성과 도덕에 대한 니체의 반역, 사회에 대한 입센의 반역, 역사와 운명에 대한 톨스토이의 반역 등 모두가 베르자예프의 반역과 동질적인 것이었다.” (주석 11)는 평가는 함석헌이 이은 비판과 저항정신이다.


주석
7> <사상계>, 1967년 2월호, 10쪽.
8> 앞의 책, 13쪽.
9>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알, 인간, 역사>, 88~89쪽.
10> 앞의 책, 89쪽.
11> 신민현, <저항의 자유인 베르쟈예프>, <기독교사상>, 1970년 4월호,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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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5 08:00 김삼웅

 

 

미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을 다시 키워 소련을 봉쇄하려 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면서 협정을 밀고 나갔다. 1964년 6월 3일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정부는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 정권타도와 국가변란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날조하면서 국면전환을 시도했다. 이것 역시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써먹은 공안카드의 효시가 되었다. 국민을 겁박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공화당 정권은 야당의원 61명이 총사퇴한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비준안과 전투사단 베트남파병안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학생시위가 격화되면서 정부는 무장군인들을 고려대와 연세대에 난입시키고,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해방 20년 만에 일본군 출신 대통령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강행 처리하고 말았다. 정부는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마침내 국민의 뜻에 배치되는 협정이 이루어졌다.

함석헌은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국민에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다. 그처럼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호소해도 국민은 정권의 폭력성에 겁을 먹고, 그리고 구차스런 먹고 살기의 일상 때문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원도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씨알농장 동지들이 땅을 개간해 농장을 일군 안반덕 골짜기였다. 이곳에서 오랜 명상과 자책으로 날들을 보냈다. 프랑스의 사상가, 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 <인간의 장래>, <과거의 비전> 등을 읽고 그에게 푹 빠져들었다.

함석헌이 “떼이야르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말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에서 소개된 그의 기사를 우연히 읽은 직후였다.” (주석 1) 이후부터는 그의 모든 책을 구해 읽고 특히 <인간현상>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원어는 프랑스말로 났을 테고, 내가 본 거는 영어 번역으로 보고 그랬는데 우리말로 번역됐으니까 한 번씩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상, 이거 다 우리가 모양살이로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저 나무는 저렇게 생겼다든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현상의 세계 아니예요? 현상의 세계, 물질세계라 그렇게 말해도 좋지만 물질이나 뭐나 다 현상으로 나타난 거니까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설명하잔 책이에요. 그는 제주이트(Jesuit)파의 신부였는데, 그이가 전공한 것은 고생물학이고 독실한 크리스찬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이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학문적인 말로 이 우주를 설명해보자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우주는 마지막에 어느 한 점으로, 학문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그 어느 ‘오메가 점’을 향하여 나간다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이에요. (주석 2)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에 파묻혀 샤르댕의 ‘인간현상’에 몰두하게 된 것은 “역사를 위한 투쟁을 좀 더 확실하게 인간의 미래를 위한 투쟁과 일치시켜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보였다.” (주석 3) 함석헌은 이어서 샤르댕의 <인간의 장래>를 읽고, 그의 주장대로 “인간의 미래와 미래의 세계가 ‘폭력도 없고 증오심도 없는’ 인간의 세계화(Plane'tarisation)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등장했던 피(血)의 전체주의에 대한 사랑의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4)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비폭력혁명>을 썼다. 장준하가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면서 그에게 원고를 청탁했고, 이제 날로 흉포해진 박정희 정권에 대응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비폭력을 통한 줄기찬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이 글을 썼다.

우리 나갈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비폭력혁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누구나, 어떤 일에서나,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가 이 시대의 나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곧 이 비폭력의 길입니다. 이날까지 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폭력주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오늘에 보는 것 같이 이렇게 어지럽게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이 이상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아니되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혁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석 5)

함석헌은 생애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고 비폭력 저항을 추구했다. 비폭력 투쟁의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상대에게도) 양심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상대도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비폭력주의는 개인이나 국가를 넘어 국제간에도 필요성을 역설한다.

정말 문제되는 것은 민족감정은 아닙니다. 그것을 타고 들어가기 쉬운 폭력주의, 침략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비폭력주의를 잘 이해하면 각 민족이 서로 제각기 자기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잘 화합하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폭력주의는 서로 경쟁이 아니고 문제가 있는 때에도 자기희생에 의하여 서로 저쪽의 속에 숨어 있는 좋은 힘을 끌어내도록 하자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주석 6)

함석헌의 비폭력주의운동에 대해 더러는 비판하거나 오해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씨알들의 생존권을 박탈한 무리들을 방치, 방관하려느냐는 반박이 따랐다. 하지만 그의 비폭력주의는 정확하게는 ‘비폭력저항운동’이다.

알제리아 전쟁이 한창일 때 신학자 카잘리스는 “폭력에는 자유롭게 하는 폭력과 속박하게 하는 폭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속박의 폭력’에 저항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이 극에 달하고 있을 즈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폭력이란 도덕적 정당성이 없이 타인의 자유와 인권,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고 짓밟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박정희 정권은 구조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쿠데타 자체가 폭력이고, 따라서 폭력정권이었다.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대학에 무장군인들을 투입하여 제압했다. 씨알이 현대무기로 무장한 군경에 당해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비폭력주의 저항운동을 제시한 것이다. 간디가 걸었던 길이다. 비폭력을 통해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폭력세력을 제압하자는 주장이었다.


주석
1> 이치석, 앞의 책, 501쪽.
2> 함석헌, <내면의 예수>, <전집> 19, 140쪽.
3> 이치석, 앞의 책, 504쪽.
4> 앞의 책, 504~505쪽, 재인용.
5> <사상계>, 1965년 1월호, 41쪽.
6>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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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013/01/15 08:00 김삼웅

 

 

미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을 다시 키워 소련을 봉쇄하려 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면서 협정을 밀고 나갔다. 1964년 6월 3일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정부는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 정권타도와 국가변란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날조하면서 국면전환을 시도했다. 이것 역시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써먹은 공안카드의 효시가 되었다. 국민을 겁박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공화당 정권은 야당의원 61명이 총사퇴한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비준안과 전투사단 베트남파병안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학생시위가 격화되면서 정부는 무장군인들을 고려대와 연세대에 난입시키고,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해방 20년 만에 일본군 출신 대통령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강행 처리하고 말았다. 정부는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마침내 국민의 뜻에 배치되는 협정이 이루어졌다.

함석헌은 분노하고 좌절하였다. 국민에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다. 그처럼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호소해도 국민은 정권의 폭력성에 겁을 먹고, 그리고 구차스런 먹고 살기의 일상 때문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였다. 그래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원도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씨알농장 동지들이 땅을 개간해 농장을 일군 안반덕 골짜기였다. 이곳에서 오랜 명상과 자책으로 날들을 보냈다. 프랑스의 사상가, 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 <인간의 장래>, <과거의 비전> 등을 읽고 그에게 푹 빠져들었다.

함석헌이 “떼이야르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말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에서 소개된 그의 기사를 우연히 읽은 직후였다.” (주석 1) 이후부터는 그의 모든 책을 구해 읽고 특히 <인간현상>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원어는 프랑스말로 났을 테고, 내가 본 거는 영어 번역으로 보고 그랬는데 우리말로 번역됐으니까 한 번씩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상, 이거 다 우리가 모양살이로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저 나무는 저렇게 생겼다든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현상의 세계 아니예요? 현상의 세계, 물질세계라 그렇게 말해도 좋지만 물질이나 뭐나 다 현상으로 나타난 거니까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설명하잔 책이에요. 그는 제주이트(Jesuit)파의 신부였는데, 그이가 전공한 것은 고생물학이고 독실한 크리스찬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이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학문적인 말로 이 우주를 설명해보자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우주는 마지막에 어느 한 점으로, 학문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그 어느 ‘오메가 점’을 향하여 나간다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이에요. (주석 2)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에 파묻혀 샤르댕의 ‘인간현상’에 몰두하게 된 것은 “역사를 위한 투쟁을 좀 더 확실하게 인간의 미래를 위한 투쟁과 일치시켜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보였다.” (주석 3) 함석헌은 이어서 샤르댕의 <인간의 장래>를 읽고, 그의 주장대로 “인간의 미래와 미래의 세계가 ‘폭력도 없고 증오심도 없는’ 인간의 세계화(Plane'tarisation)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등장했던 피(血)의 전체주의에 대한 사랑의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4)

함석헌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비폭력혁명>을 썼다. 장준하가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면서 그에게 원고를 청탁했고, 이제 날로 흉포해진 박정희 정권에 대응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비폭력을 통한 줄기찬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이 글을 썼다.

우리 나갈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비폭력혁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누구나, 어떤 일에서나,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가 이 시대의 나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곧 이 비폭력의 길입니다. 이날까지 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폭력주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오늘에 보는 것 같이 이렇게 어지럽게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이 이상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아니되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혁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석 5)

함석헌은 생애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고 비폭력 저항을 추구했다. 비폭력 투쟁의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상대에게도) 양심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상대도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비폭력주의는 개인이나 국가를 넘어 국제간에도 필요성을 역설한다.

정말 문제되는 것은 민족감정은 아닙니다. 그것을 타고 들어가기 쉬운 폭력주의, 침략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비폭력주의를 잘 이해하면 각 민족이 서로 제각기 자기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잘 화합하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폭력주의는 서로 경쟁이 아니고 문제가 있는 때에도 자기희생에 의하여 서로 저쪽의 속에 숨어 있는 좋은 힘을 끌어내도록 하자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주석 6)

함석헌의 비폭력주의운동에 대해 더러는 비판하거나 오해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씨알들의 생존권을 박탈한 무리들을 방치, 방관하려느냐는 반박이 따랐다. 하지만 그의 비폭력주의는 정확하게는 ‘비폭력저항운동’이다.

알제리아 전쟁이 한창일 때 신학자 카잘리스는 “폭력에는 자유롭게 하는 폭력과 속박하게 하는 폭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속박의 폭력’에 저항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이 극에 달하고 있을 즈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폭력이란 도덕적 정당성이 없이 타인의 자유와 인권,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고 짓밟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박정희 정권은 구조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쿠데타 자체가 폭력이고, 따라서 폭력정권이었다.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대학에 무장군인들을 투입하여 제압했다. 씨알이 현대무기로 무장한 군경에 당해낼 힘이 없었다. 그래서 비폭력주의 저항운동을 제시한 것이다. 간디가 걸었던 길이다. 비폭력을 통해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폭력세력을 제압하자는 주장이었다.



주석
1> 이치석, 앞의 책, 501쪽.
2> 함석헌, <내면의 예수>, <전집> 19, 140쪽.
3> 이치석, 앞의 책, 504쪽.
4> 앞의 책, 504~505쪽, 재인용.
5> <사상계>, 1965년 1월호, 41쪽.
6>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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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박정희 정권의 반역사적, 반민족적인 굴욕회담의 강행에 믿을 것은 국민의 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절절한 심경으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민족혼을 이어온 국민의 정신을 일깨운다.

돌이켜 생각해 보라. 그렇게도 모르나? 이 4천년 넘는 역사가 무슨 역사인가? 결국 고난의 역사가 아닌가? 왜 고난인가? 제 정신 하나 부족했기 때문에 당한 고난이요, 욕 아닌가?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주 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부족은 하지만, 그 때문에 늘 욕은 봤지만, 그래도 제 정신을 아주 잃지는 않고 지켜왔기 때문 아닌가? 4천년 동안 먹고 입고 놀아온 것이 귀한가?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중국에 압박을 받아도 중국 사람이 못 되고, ‘만주 되놈’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되놈이 못되며, ‘왜놈’의 짓밟음을 입으면서도 왜놈이 못돼 버린 그것, 그 무엇, 그 정신이 귀하지 않은가? 미약은 하지만 그래도 이것이 보배요, 실날 같지만 그래도 이것이 생명 아닌가? 실로 우리가 해방을 당한 것은 우리 생활이 풍부해서도 아니요 우리 기술이 높아서도 아니다. 거지같은 생활이요 뒤떨어진 기술이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이란 정신 하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 31)

함석헌은 정치군부세력과 이에 놀아나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규탄한다.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이 나라의 생명이 되는 이 정신은 잊고 그것을 일부러 짓밟으면서 남의 세력을 힘입어 부흥을 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 일부 물욕과 권세에 미친, 민족과 역사를 모르는 정치인이란 것들은 비록 더럽고 옅은 이기주의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민중이 그것을 능히 막아내지 못하고 주춤하고 서서 걱정만 하는 것은 얼마나 비겁하고 못생긴 일인가?

함석헌은 1965년 8월 30일 재야ㆍ종교계ㆍ학계ㆍ문인ㆍ예비역 장성 등 각 분야 지도급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수호국민협의회의 상임대표로 선출되어 박정권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을 지도하였다. 정부에 굴욕회담을 중지시킬 것을 호소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반대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서울법대생 90여 명이 단식에 들어갔다. 졸도하는 학생이 생겼다. 함석헌은 ‘신을사조약’으로 명명된 한일협정을 정치문제가 아닌 하나의 죄악으로 인식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비폭력 투쟁의 방법은 단식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보았다. 이번에도 삭발을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약없는 단식에 들어갔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단식의 절박한 이유를 밝혔다.

오늘부터 문제의 해결이 나는 때까지 단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여 얻은 뜻을 여러분 앞에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내 죄를 회개함으로써 내 혼을 맑히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다시 한 번 진정 겸손한 마음으로 정부 당국에 대하여 정성껏 반성을 독촉해보기 위해서입니다. 근본 문제는 내 죄에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그동안 여러분은 제게 유언 중 무언 중 민중을 대표한 발언권을 허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은 힘이 없었습니다. 옳은 듯 하면서 악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의도 씨알 스스로의 의요, 죄악도 씨알 스스로의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살아나는 길은 진정한 국민운동에만 있습니다.
(주석 32)

한 연구가는 함석헌의 단식투쟁을 두고 “단식이라는 희생적 저항권을 강력한 도덕적 무기로 삼고, 굴욕외교에 대한 민족적 수치를 개인의 죄 문제로 접근함으로써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자각시키기 위한 자신의 도덕적 입헌성을 확고하게 만들어 놓을 줄 아는 정치력을 발휘하였다.”고 분석하고 “그것은 역사를 도덕적 의미의 행위로 인식한 자신의 역사관에 충실한 태도이기도 하다.” (주석 33)고 평가했다.

어느 시대나 권력의 비호를 받은 어용 곡필배가 있다. 언론계나 학계에서 많이 서식한다. 함석헌의 신문 연재가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중상모략하는 글이 쏟아졌다. 7월 26일부터 4일간 <서울신문>에 <억지울음 속에 숨은 음모 - 함석헌 씨의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를 박함>이란 글이 연재되었다. 박달수라는 가명으로 쓰인 이 글은 반지성, 비상식의 인신공격이었다.

‘박달나무’ 또는 ‘박달몽둥이’를 뜻하는 익명의 박달수는 언론계의 중진 모씨로 알려졌으나 끝내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박달나무’는 “협조와 건설을 부르짖는 이 나라에서 분열과 파괴를 노리는 씨의 악랄한 매명 선동, 안정과 긍정을 찾고 있는 이 날 이 겨레에 불안과 부정을 던져주는 씨의 너무나 역리적인 소영주의의….”라고 매도하고, 그는 함석헌이 “노망하여 명예욕을 채워보고자” 날뛰고 있다고 비난했다.
(주석 34)


주석
31> 앞의 책, 22~23쪽.
32> <단식에 앞서 동포에게 드립니다>, <동아일보>, 1965년 7월 1일치.
33> 이치석, 앞의 책, 498쪽.
34> <서울신문>, 1963년 7월 26~30일치.



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3 08:00 김삼웅

 

 

정치권력에 맛이 들린 박정희세력은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함석헌이 황야에서 아무리 목메이게 외치고 글을 써도 그들은 들은 채도 않고 오히려 선동가로 몰아치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켜 미ㆍ일ㆍ한 동맹체제화하고자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넣었다.

1961년 6월 케네디ㆍ이께다(池田) 회담에 이은 11월의 박정희ㆍ케네디 회담을 통해 이 문제가 깊숙히 논의되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의 지원에 목을 매단 박정희로서는 미국의 제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 유세에 들어갔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와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였다.

<사상계> 1964년 3월호에 함석헌은 비감한 마음으로 <양한재조 재차일념(兩韓再造在此一念)>을 썼다.
평소 한자 제목을 잘 붙이지 않았는데, 이번은 달랐다. 편집자는 “한 마음 한 끝 먹고 조선을 새겨 보니 조은 땅 조은 빛이 한 글월 피웠구나. 한 조선 첨서 한난걸할 알속에 지키네”란 알듯 모를 듯한 발문을 붙였다.

우리는 또 다시 “나라를 지키자”고 외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됐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부끄럽고 분한 일입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남이 다 잘 사는 이 때에, 우리 만이 못 살고 밤낮이 이꼴이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분하다는 것은 했으면 했을 것인데 번히 알고 못하니 분하지 않습니까?

함석헌은 자신들이 일제감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할 때에, 일본군 장교가 되어 동포들에게 총질을 한 친일군인들이 권력을 잡아,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마땅히 요구해야 할 청구권과 문화재 반환 등이 묵살당한 데 하염없는 분노를 느끼면서 이 글을 썼다. 박정희 권력의 비리와 인권탄압,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당시의 상황이 한말의 망국기와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요새 나라 꼴 그 때와 꼭 같습니다. 한일회담, 그 때의 5조약, 7조약, 맺으려던 꼴과 꼭 같고, 창가학회니 뭐니 그 때의 흑룡회, 일진회와 터럭도 다를 것 없습니다. 그 때에도 미ㆍ러ㆍ중이 뒤에서 어물어물하다 우리를 팔아넘기더니, 오늘도 또 셋이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나라를 지키자!”하는 글을 짓게 하는 교사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교사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함석헌의 이 글의 핵심은 후반 다음의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 옛날 나라가 일본 침략자들 때문에 위태했을 때 그것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이성계를 나가 맞으며 최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三韓再造 在此一擧 (삼한재조 재차일거)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이성계가 가슴 속에 나라라는 일념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거(一擧)는 삼한을 재조(再造) 못하고 잃는 일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또 다시 나라는 남으로 일본침략주의의, 북으로 중공침략주의의 엿봄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보내며,

兩韓再造 在此一念

이라 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일념을 품었습니까?
나라가 임(臨) 하옵소서!
일체 중생이 다 이 한 나라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또 씨알에게!

- 念, 念, 念 , 아멘.
(주석 29)

박정희의 대일 굴욕회담이 강행되면서 장준하는 1965년 <사상계> 긴급증간호를 발행했다.
160쪽 전 지면을 털어 <신을사조약의 해부>라는 특집으로 꾸몄다. 이 책은 야당, 재야ㆍ학생들의 굴욕회담 반대 투쟁의 이론적 전거가 되었다.

박두진ㆍ박남수ㆍ조지훈의 <우리는 또 다시 노예일 수 없다>는 연작시에 이어 함석헌의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란 권두시론, 백낙준의 <한국근대화와 일본침략>, 이범석의 <이제는 더 침묵할 수 없다>, 양호민ㆍ부완혁ㆍ정문기ㆍ김철ㆍ김원룡이 각 전문 분야에서 집필한 <한ㆍ일협정문의 분석>, 각계 지도급 인사 105인의 앙케트 <105인의 발언>,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각계의 성명서가 실렸다. 특히 예비역 장성들의 반대 성명에는 김홍일ㆍ김재춘ㆍ박병권ㆍ박원빈ㆍ송요찬ㆍ손원일ㆍ이호ㆍ장덕창ㆍ조흥만ㆍ최경록 등이 서명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장성들까지 참여하여, 국민이 얼마나 굴욕회담에 반대했는가를 보여주었다.

함석헌은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게 있다”는 부제가 붙은 이 시론에서 처연한 심경으로 국민에 호소한다.

한국은 어디로 가나?
이 4천만 문화민족은 어떤 운명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는가?
5천년 고난의 역사는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하고 있나?
지금 한ㆍ일조약의 비준이라는 한 순간을 놓고 민심은 마치 회오리바람 밑에 노는 물결처럼 미치고 있다.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것을 해서라도 기어이 이 조약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고, 정의와 자유의 정신에 불타는 학생들은 거기 대해 뭉치와 최루탄과 철창의 고통을 무릅쓰며 혹은 주린배,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움켜쥐고 단식을 하면서 싸우고 있고, 일반 국민은 그 두 사이에 불안과 의심과 분노와 두려움에 떨고 서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고, 어느 순간에 가서는 결정이 나고야 만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결국 국민에 있다.
(주석 30)



주석
29> <사상계>, 1964년 3월호, 45쪽.
30> <사상계>, 긴급증간호, 20쪽,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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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63년 2월 영국 체류 중일 때 장준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군정 4년 연장을 시도하는 등 국내 정세가 위급하니, 이를 질타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상계>는 1963년 4월호를 ‘창간10주년 기념특대호’로 꾸미면서 권두에 함석헌의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실었다. 28~31쪽에 실린 짧은 글이지만, 그의 글 어느 것 못지 않는 알찬 내용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부제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고 나온다”가 의미하듯이, 주권자가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였다.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을 묻느냐? 여러운 것 아니다. 간단명료하지 않으냐? 군인은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더라, 이야말로 사뭇 들어가는 칼 같이 뻔한 진리지. 군인이 정권 쥐었으니 민정 되려면 군인이 물러서는 거지, 무슨 복잡한 것이 있겠냐? 물러설 마음이 없기에 헌법개정이요, 민의요 하지, 깨끗이 물러서는 사람이 토론이 무슨 토론이냐? 군인은 깨끗해야 한다고 늘 하는 말 아닌가? 소견이 옳았거나 글렀거나, 하여간 생각에 군정을 꼭 해야겠다 하거든 군정이라 하고 해! 또 권력을 좀 쥐고 해 먹고 싶거든 그렇다 하고 해! 호랑이도 호랑이 노릇하고 독수리도 청천백일에 내놓고 남의 고기 먹는데 너라고 못할 것 없지. (주석 23)

함석헌은 예리한 필봉으로 부정어법을 통해 진정한 ‘군인정신’을 알리고, 정직하지 못한 ‘정치군인’을 질타한다.

또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 말할까? 그것도 같은 말이다. 민중이 곧 일어서야지. 도대체 정권 넘겨준단 말부터 고쳐야 한다. 정권이 뉘건데 누가 뉘게 넘겨주어? 천하는 천하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란 말을 벌써 몇 천 년 전 사람이 했는데 정권을 민중에게 넘겨주다니 그런 시대착오가 어디 있나? 이양이란 글귀를 쓰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민중 모욕이다. 이양이 아니라 대정봉환(大政奉還)이지. 가져갔던 정권을 도로 바치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글귀를 쓰는 것은 민중을 속여 바치는 척 하면서도 속살로는 그냥 쥐고 있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글의 논점은 군인들이 탈취해간 정권을 꼼수 부리지 말고 원래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주라는 것이다. “천하는 천하요….”의 구절은 맹자의 주장을 상기시킨 대목이다.

당초 잘못은 민중이 깨지 못한 데 있다. 민중 스스로가 제 노릇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됐지, 죽음으로 자유 지키는 민중에 도둑이 어디 둘 수 있나?
또 바른 길 말할까? 이것도 다 알면서 못 본척 하는 길이다. 무슨 길? 언론의 자유다. 민중이 깨는데 언론의 자유 없이 어떻게 되겠냐?
(주석 24)
 
박정희의 군정연장 의도가 노골화되면서 신문들은 점차 연골화되어 갔다.
쿠데타 초기에 <민족일보> 사장의 처형 등을 지켜보면서 공포감에 빠진 언론(인)은 ‘민정이양’의 공약이 군정연장에서 다시 민정참여로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는 데도 크게 비판의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권한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감옥문 만이 정말 민정으로 건너가는 직통로다. 진리란 참 묘한 것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자들이 민중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감옥을 짓지만,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 가지고 나오는 것을 어찌하나? 그러므로 진리는 막강하다. 압박하는 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감옥을 넓히고 높일 것이다. 그러나 감옥이 넓어지고 높아질수록 자유의 길은 열리는 것을 어찌나.
민권을 찾고싶거든 감옥으로 들어가라!
살고 싶거든 죽음의 입으로 들어가라!
(주석 25)

함석헌이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의 불복종>에서 “불의한 시대에 의인의 갈 곳은 감옥뿐”이라 썼다. 함석헌의 이 시론이 소로와 맥이 닿아 있음을 본다. 함석헌이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쓴 <사상계> 4월호에는 창간 10주년 특집의 하나로 유진오ㆍ김팔봉ㆍ안수길ㆍ현승종ㆍ김성한ㆍ신상초ㆍ안병욱이 “나와 사상계”란 주제로 각기 인연과 사연을 피력했다. 당시 주간이던 안병욱의 글은 함석헌이 ‘세상에 불려나와’ 글을 쓰게 된 과정이 소상하다.

연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함 선생 댁에 들렸다.
지금은 원효로에 살고 계시지만 그때는 신촌 이대 앞에서 사셨다. 열 칸 쯤 되는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함 선생을 뵈었다. 두 칸쯤되는 장판방에 조그만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하고 계시다가 반가히 맞아주셨다. 톨스토이는 바이블을 읽기 위해서 54세 때부터 히랍어공부를 시작했지만, 함 선생의 히랍어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실력이 대단하시다.

한자에 능하시고 영어를 잘하시지만 그런 빛이 통 없다. 오산고보에서 영어선생들이 모른 것이 있으면 함 선생한테 가서 물었다. 그는 정말 도깨비였다.

<사상계>에 글을 쓰시라고 하였더니 “내가 뭘” 하시면서 사양을 하신다. 그 후 몇 번 들렸다. 안 쓰신다고 고집하다가 결국은 쓰셨다. 그후 내 성화에 못견뎌서 여러 번 쓰셨고, 쓰실 때마다 남이 못하는 소리를 하셨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소리를 쓸래면 뭣 때문에 글을 써, 글이란 나 아니면 못하는 소리를 써야 돼”.

언젠가 나 보고 하신 말씀이다. 글 다운 글을 쓰라고 책하시는 말씀 같았다.
<사상계>의 집필을 통하여 오산의 도깨비는 한국의 도깨비가 되었고, 그의 예리한 필봉은 독재정권의 아성을 겨누게 되었다. 의를 위해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 함 선생의 글은 언제나 피의 맥박과 생명의 리듬이 약동했다.
(주석 26)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

함석헌이 유럽을 방문하고 있을 즈음 국내 정세에 더욱 소연해졌다. 군부세력이 4대의혹사건으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이 돈으로 민정당을 사전 조직한데 이어 박정희는 민정 불참의 선서를 했다가 번복하여 민정 참여를 선언했다. 이와 함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大平) 일본 외상과 비밀 회동하고, 한일 국교 정상화의 대가로 무상공여 3억 달러, 상업차관 2억 달러로 대일 청구권 문제를 합의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함석헌은 귀국을 서둘렀다. 안병무의 회고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한국서 온 신문을 보고 군정세력이 자리를 굳힌다는 사실과 대일(對日) 태도를 보고 선생님께 자극적인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선생님은 들었던 숟갈을 놓고 낙류(落류)하시면서 모든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셨지요.” (주석 27)

이 부문과 관련, 함석헌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래서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 소원이던 인도여행 계획도 취소했지. 그래 돌아와서는 <사상계>의 장준하 한테 갔고 사상계사가 주최해서 시민회관에서 그리고 대광학교 운동장에서도 강연을 했는데, 그때 사람이 8, 9만이나 모였다고 해요. 그게 사회참여의 시작이라면 시작인데, 나는 사회참여니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러던 중 6ㆍ3 데모가 터졌지. 이런 때 가만 드러누워 있으니 이걸 어떡하지 그러다가 나온 거지요. 그래서 나와서 머리 깎고, 세상이 다 알거나 말거나 나대로 책임을 지는 생각을 하고, 깊이 생각을 해야지, 그런 생각에 두 주일 단식하고 그랬지요. (주석 28)




주석
23> <사상계>, 1963년 4월호, 28~29쪽.
24> 앞의 책, 30쪽.
25> 앞의 책, 31쪽.
26>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266쪽.
27> <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었는가 - 안병무와의 대담>, <씨알의 소리>, 4월 창간호, 1970년.
28>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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