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세력은 <사상계>가 서점에 깔린지 4, 5일이 지나서 장준하와 취재부장 고성훈을 체포했다. 장준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의 집무실로 끌려갔다. 김종필은 장준하에게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따위 글을 도대체 어떤 저의로 갖다가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과업 수행과정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하는 거 아니오? 이것을 싣게 된 목적과 경위를 말해보시오.”하고 마치 죄인 다루듯이 윽박질렀다.
장준하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부탁하여 원고를 실었고, 남의 글을 전체를 보고 평가해야지 부분적인 대목을 가지고 말하느냐고 젊잖게 따졌다. 궁지에 몰린 김종필은 장도영(5·16쿠데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내각수반, 국방장관을 맡고, 장준하 대면 전날 반혁명죄로 구속 -필자)과 동향이라, 그의 사주를 받는 것이 아니냐고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김종필은 심지어 함석헌이 정치를 할 의향이 있느냐고 생뚱한 질문을 하였고, 장준하가 그를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질타했다.
함석헌은 끌어가지 못했다. 3년 전 이승만 정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이유로 끌어다가 20일간 투옥하는 등 ‘서툰 짓’을 한 이래 그의 존재는 아무리 쿠데타세력이라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우뚝한 민중의, 씨알의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 박정희 - 김종필은 이승만보다는 한 수 위였다. 정치적으로 더욱 교활해진 것이다.
쿠데타 주체들 사이에 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의 구속 여부를 둘러싸고 투표까지 했다는 설이 있다.
“노명식(전한림대 인문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이 때의 함석헌은 3년 전의 함석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고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다. 당시 풍문으로는 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을 구금할 것인가를 두고 투표를 했는데 3대 3으로 팽팽히 맞섰다는 것이다. 결국 최고회의에 참석하여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부표를 던지는 바람에 찬성 3표, 반대 4표로 함석헌은 구금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풍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김종필은 군에서 정군운동을 하다가 예편되어 실직상태일 때 장준하가 책임자로 있던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본부에 취직하겠다고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다. 마침 장준하가 부재중이어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이를 두고 장준하는 뒷날 자신이 그때 김종필을 만나 직원으로 채용했었다면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김종필은 젊은 시절 <사상계>를 읽었고, 함석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보 업무에 종사하다보니, 그를 구속하여 국제적으로 특히 미국 조야의 여론이 비등할 것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함석헌은 구속을 면했지만, 이로써 그의 용기와 저항정신, 정치평론의 입지와 위상은 따를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제까지는 주로 종교비평의 글을 많이 썼으나, 5ㆍ16 비판부터는 정치비평가의 일역을 도맡게 되었다. 쿠데타세력이 당초 ‘원대복귀’의 약속을 어기고 민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정치비평의 논설을 쏟아냈다. 한 정치학자는 “함석헌이 사상ㆍ종교ㆍ철학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한 정치 사상가의 면모와 민주화에 앞장서서 반독재 투쟁을 한 정치행동가로서의 행보 외에도, <사상계>나 <씨알의 소리> 등에 게재한 글을 통해 정치평론가로서의 역할을 선구적으로 시도하였다고 본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정치평론은 시비곡직을 떠나서 성역을 두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를 피해가거나 둔사로 어물쩍 넘어가는 여타의 식자들과는 달랐다. 이승만ㆍ박정희를 표적으로 삼았다. 감히 따르기 어려운 일을 그는 해냈다. <할 말이 있다>와 <5ㆍ16을 어떻게 볼까?>는 반독재자와 군부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이었다.
주석 31> 장준하, <사상계지수난사>, <장준하문집> 3, 사상, 1985, 32쪽. 32> 김용준, 앞의 책, 143쪽. 33> 이동수, <함석헌과 정치평론>, <한국정치학 회보>, 2001년 겨울호, 89쪽.
4ㆍ19 뒤 한 때의 혼란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구체제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혼란상이었다. 일부 학생과 혁신계의 과도한 주장도 있었지만,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차츰 진정되어갔다. 연말부터는 정국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민주당의 분당사태로 장면 정부가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군사쿠데타의 요인이 될 수는 없다.
함석헌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1961년 5월 16일,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그의 조카사위 김종필이 주도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반란군의 주모자 박정희가 일본군 다카키 마사오인 것 같다는 장준하의 말을 듣고는 분노와 함께 허탈감을 가누기 어려웠다. 반란군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권을 장악, 4월혁명으로 태어난 장면 정부를 타도했다. 쿠데타를 첫 모의한 시점은 1960년 9월 10일이다. 이들은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가 좌절되고, 5월 12일로 연기했다가 16일에 쿠데타를 결행했다.
반란군은 최고권력기구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입법ㆍ행정권과 사법의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국회ㆍ정당ㆍ사회단체를 해산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미군정 3년과 이승만 12년 독재에 시달려온 국민은 4월혁명으로 짧은 기간이나마 모처럼 자유를 찾았다가 1년여 만에 다시 포악한 군사독재를 맞게 되었다. 언론은 사전 검열로 군사반란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언론인ㆍ지식인들이 겁을 먹고 비판은커녕 사실 보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공포분위기였다.
함석헌은 절망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일본 군부의 정치개입과 군국주의가 어떻게 득세하고, 얼마나 폐악을 저질렀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감이 더욱 깊었다. <사상계>는 6월호 제작이 거의 진행된 와중에 5ㆍ16을 겪으면서 권두언과 화보 그리고 편집후기에 쿠데타의 내용이 실렸다.
필자의 주관인지는 몰라도 <사상계> 15년의 역사에서 1961년 6월호의 권두언, 화보, 편집후기는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화보 <혁명 새벽에 오다>에서는 쿠데타의 전개 과정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물사진과 함께 24컷으로 장식했다. 1년 여 전 “민중의 승리 기념호”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무기명으로 실린 권두언 <5ㆍ16혁명과 민족의 진로>는 아무리 계엄하의 상황이라 해도 이것이 과연 <사상계>의 권두언일까 싶을 정도의 글이다. (주석 25)
박정희 추종자들은 이 대목을 들어 장준하도 5ㆍ16쿠데타를 지지했다고 선전한다. ‘오해’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합법 정권이 총칼로 전복되고, 정부 각료를 비롯하여 수천 명이 갖가지 이유로 체포ㆍ구금되고 국회가 해산된 공포정치의 상황에서 장준하나 <사상계> 편집위원들이라고 어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준하와 <사상계>의 일탈은 오래가지 않았다. 7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회복하여 군사반란 세력에 포문을 열었다. 함석헌이 저격수로 나섰다. 7월호 권두논문으로 36쪽에서 47쪽까지에 실린 200자 100매 분량의 <5ㆍ16을 어떻게 볼까?>는 반란군 세력의 서릿발치는 계엄하에서 쓰이고 게재되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각오하고 글을 쓰고 장준하는 잡지사의 문을 닫을 결심을 하고 실었다.
글은 어떤 내용인가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썼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일제 패망 뒤에 광복군이 되거나, 해방 후 독립만세를 부른 것과 비유된다. 함석헌은 논설의 말미에서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
“3년 전 이 밤엔 잠 못 자고 한 생각 말했더니, ‘나라 없는 백성이라’ 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스무 날 참선을 시켰지, 이번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주석 26)
함석헌은 먼저 5ㆍ16쿠데타가 가져온 공포분위기를 지적한다.
그런데 나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가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인이 아니다. 의사 온 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인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칼보고 겁을 집어먹었지. 겁 난 국민은 아무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나게 하여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다스리기 쉽기야 죽은 시체가 제일이지, 시체를 업어다 산 위에 놓고 스스로 무슨 공이 있다 할 어리석은 사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매장인부 아닌가? (주석 27)
함석헌은 5ㆍ16을 준열하게 비판했다. 4월의 학생들이 잎이라면 5월의 군인들은 꽃이라는 비유를 들어 조속히 부대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최근까지 박정희 추종자와 사이비 언론인 중에는, 함석헌이 5ㆍ16을 꽃에 비유할 정도로 지지했노라는 허튼 언설을 편다.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거두절미한 것이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달 아닌가? 5ㆍ16은 꽃 한 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의 유가 아니다. 저번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은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했고 탱크로 행진했다. 잎은 영원히 남아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5ㆍ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하고 잊혀져야 한다. 노량진두에서 많지는 않지만 흐른 피는, 그 알고 모르고를 물을 것 없이 전국민이 스스로 흘려 역사의 제단에 바친 것이다. 그것은 부득이하여 한 번 잠깐 할 것이요, 될수록은 없어야 하는 것이요, 있다 하여도 곧 잊혀야 하는 것이다. (주석 28)
함석헌은 5ㆍ16의 군사반란을 결코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하지 못한다. 어떤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선의로 했다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의는 아니다. (주석 29)
한 사학자는 함석헌의 이 글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놨다.
“그 잘못을 꾸짖는 준엄한 질타이기는 하나 그저 질타에 그치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타이르듯이 무엇이 잘못이며 그 잘못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가를 누누이 설명한다. 쿠데타는 크게 잘못된 불장난이지만, 이제는 어차피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첨에 약속한 대로 하루라도 속히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는 대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한다. 쿠데타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하였지만, 혁명이 무엇인지나 알고 했느냐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주석 30)
함석헌의 글이 세상에 나오면서 민중은 막혔던 숨통이 다소나마 터지는 듯한 쾌감을 느끼고, 지식인ㆍ언론인들은 자신들의 처신에 몸 둘 바를 몰라했으며, 쿠데타 주역들은 분개했다.
주석 25> 김삼웅, <장준하 평전>, 423쪽, 시대의 창, 2009. 26> <사상계>, 1961년 7월호. 27> <사상계>, 1961년 7월호. 28> 앞과 같음. 29> 앞의 책. 30> 노명식, <함석헌 다시 읽기>, 608쪽, 인간과 자연사, 2002.
함석헌은 필화사건 이후 정열적으로 글을 썼다. 주로 <사상계>의 지면이지만 <사조(思潮)>와 <신태양>, <새벽> 등 월간지에도 기고하였다. <나의 인생시초(詩抄)>, <사자냐 아메바냐>, <새 삶의 길>, <정치와 종교>, <우리가 어찌할꼬>, <겨울이 만일 온다면>, <때가 오고 있다>, <물 아래서 올라와서>, <나라는 망하고>, <3ㆍ1정신>,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백두산 호랑이>, <남강ㆍ도산ㆍ고당>, <사모님론>, <이단자가 되기까지>, <내 것이냐 카에자의 것이냐>, <한배움>, <38선을 넘나들어>, <들사람 얼(야인정신)>, <씨알의 설움>, <평화적 공존은 가능한가>, <간디의 아슈람>, <에밀레> 등이다. <사상계>에 쓴 글은 일종의 자서전적인 글이다. (주석 18)
1959년 1월호 <새벽>에 쓴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씨알의 꿈틀거림을 내다보는 예언서와 같은 글이었다. 이승만의 노욕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보안법 개정을 통해 비판세력을 탄압하면서 1959년 4월 30일 야당지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사망했는데도 부통령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조기에 제5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야당 유세장에 못가도록 일요일에 등교시킨 데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다.
함석헌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1960년 초부터 3월 1일까지 44일 동안 자신과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을 벌였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의 수단으로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단식에 앞서 머리와 수염을 깎았다. 취재 기자의 전언이다.
단식으로 함 선생의 용모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 우선 머리와 수염을 깎은 것이다. 그리고 어딘지 핏기가 가시고 피로가 느껴진다. “철저히 단식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 설탕물도 먹구….” 결국 문제는 ‘마음이 맑아지고’ 참회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시며 앞으로도 글도 쓰지 않고 참회의 고행을 계속함으로 2개월 동안은 글도 안 쓰고 발표도 안 하실 작정이라고 하시며 극구 “거 좀 내 얘기 안 나오게 해줘! 글이 문제야 말이 문제야, 난 죄인이야!” - 함 선생의 간곡한 말씀에 기자도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하시던 함 선생, 모 신문을 읽으시더니, “학원의 자유, 정치 도구화 반대라, 그래 일요일에 학교 나오라는 사람이 나쁘지, 건 잘못했구만, 학생이 어디 나쁜가. 젊은 기백으로 의당 있을 수 있는 현상이지…. 사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한심해, 쩍 하면 도미(渡美)한다 빽찾구. 학생 나무랄 것 있나. 교육자가 나빠. 학생들 말이 교수들의 강의에 환멸을 느낀대요. 교수들이 사상이 있어야지. (주석 19)
함석헌이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사상 유례가 없는 3ㆍ15 관권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에 항의하는 마산의거에 이어 4ㆍ19혁명이 일어났다. 서울로 올라온 함석헌은 종로 2가 100번지 사상계사에서 장준하와 함께 시위대열을 지켜보았다.
“4월 19일 두 분(함석헌과 장준하-필자)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한청빌딩에서 지켜보시던 모습은 묵묵히 역사의 격류속으로 되새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주석 20)
4ㆍ19날 시위 시민ㆍ학생들은 종로 화신 앞에서 종로 5가까지 한 길을 가득 메웠을 적에 한청빌딩의 사상계 깃발을 보고 격려와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두 사람은 손을 흔들어 답례하면서, 이름 없는 민초들이, 씨알들이 결정적인 순간이면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학생과 시민들은 이승만 12년 독재와 자유당을 타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체세력이 없는 혁명은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가면서 민주당의 몫이 되었다. 민주당은 내각제 개헌으로 집권당이 되면서 분열하고 무능함을 내보였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1년 1월호에 <국민감정과 혁명완수>를 썼다. 혁명 뒤의 혼란과 민주당의 분열상에 분노하는 글이다.
“4ㆍ19혁명은 실패다. 허정 과도정부는 그만두고 장면의 정부는 이날까지 해논 것이 무엇인가? 당파싸움하는 동안에 겨울은 다 되고, 생산기관 하나 신통히 돌아가는 것 없고, 민중은 못 살겠다고만 하는데, 농 안에 가뒀던 쥐는 다 도망가고…." (주석 21)
‘농 안에 가뒀던 쥐’는 이승만의 하와이 탈출과 부정선거 원흉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법망을 피한 것을 지적한 내용이다.
새로 쥐를 잡지는 못하나마, 잡아 준 쥐도 놓쳐? 나는 사형 폐지 주장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원흉이라고 죽여야 한다는 것 아니요, 또 나 자신이 이승만이요 자유당인 판에, 감히 애국심의 전매특허나 하는 듯 엄벌주의 주장할 양심도 없지만, 정권을 쥐고 민중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으로써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말이다.
하면 하는 것이고 아니 하면 깨끗이 손을 떼는 것이고, 놔주면 놔주는 것이고 그렇지 않음 분명히 처리를 했어야지, 어물어물하는 동안에 다 놓쳐버렸다. 대체 왜 다 잡아 논 쥐를 못먹나? 이 고양이가 벌써 늙었나?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도둑질을 해 배가 불렀나? (주석 22)
함석헌은 4ㆍ19가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그 이유를 ‘헛총’이었기 때문이라 비유하였다. 역설논법이다. 당시 세간에 ‘헛총’이란 말이 유행되기도 했다.
4ㆍ19는 실패다. 왜 실패했나? 헛총이었기 때문이다. 4ㆍ19혁명은 헛총이다. 헛총 쏜 학생들이 잘못이란 말은 아니다. 헛총 쏜 것 잘했지. 마땅히 헛총이어야지. 헛총의 뜻은 무엇인가?
이 도둑놈들아 물러가라. 아니 물러가면 쏜다. 우리게 정말 총알 있다. 그러나 너희를 사람으로 본다.
하는 뜻이 들어 있다. 헛총을 쏘면 사람으로 대접한 것이요, 알을 넣어서 쏘면 짐승으로 여긴 것이다. 마음은 헛총에 맞아 살아나는 것이요, 살은 알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허칙실(虛則實)이요 실칙허(實則虛)다. 학생들 잘했다.
그런데 왜 실패했나? 쏜 것은 도둑놈 쫓으려고 쏜 것인데, 앞에 있던 몇 놈은 사람다운 정신을 차려서는 아니지만 앞에 있었던 만큼 혼쌀이 나서 도망을 쳤는데, 뒤에 섰고 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것들도 맘은 같은 도둑인지라 알이 아니든 줄 알자 기어 든 것이다. (주석 23)
함석헌은 민중이 일어나 혁명을 완수 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말미에서 예언가와 같은 말을 남긴다.
“길가의 막돌을 되는대로 던지는 듯 한 이 글을 다 썼는데 때 아닌 겨울 장마가 한 주일이냐 계속하다가 해가 나나보다 했더니 또 눈을 뿌린다. 그것은 무슨 예언인가?” (주석 24)
주석 18> 정현필 정리, <함석헌 저작 연대별 분류>, <함석헌 연구>, 제3권 제1호, 2012. 19> S기(記), <단식 44일 끝나다>, <세계>, 1960년 4월호. 20> 이문휘, <문화강연회 가치를 높이 들고>, 장준하선생 20주기 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광복50년과 장준하>, 1995. 21> <사상계>, 1961년 1월호, 권두논단. 22> 앞과 같음. 23> 앞과 같음. 24> 앞과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