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은 1962년 2월 10일 미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예정으로 미국 순방길에 올랐다. 그의 갑작스런 방미에는 세간의 의혹이 따랐다. 당시 미국무성은 후진국의 정계ㆍ학계ㆍ종교계 등의 중진급 인사들을 초청형식으로 미국으로 불렀다. 본질적으로는 미국에 우호적인 오피니언 리더를 양성하려는 전략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유당 시대부터 노태우정권기까지 적지 않은 ‘친미파’가 육성되었다.
함석헌의 경우는 달랐다. 주한미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이 <5ㆍ16을 어떻게 볼까?>를 영역하여 미국무성에 보내고, 국무성은 군사쿠데타의 와중에서도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여 그를 초청한 것이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유럽, 인도, 아프리카의 콩고, 슈바이처가 사는 곳, 특히 퀘이커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 케냐를 거쳐 이집트와 그리스 등을 돌아보고 싶었다.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출국하기 전날 밤을 밝혀 <수난의 여왕께 드리는 유언ㆍ예언 - 잠시 고국을 떠나면서>를 쓰고 한국을 떠났다. 이 글은 <사상계> 3월호에 실렸다. 편집자 이름으로 이같은 사실과 함께 귀국이 반년 내지 1년 후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 밤이 새면 나는 간다. 말은 미국을 간다지만 미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딘지 모르는 먼 나라를 향하여 가는 것이다. 계획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한 해 있다 돌아온다지만 한 해가 아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길이요, 세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바퀴를 도는 것이다. 미국 국무성이 불러서 간다지만 미국이란 것이 어디 있으며, 그 국무성이 어떻게 나를 부르며 내가 뭐하자고 그 명령에 복종할까? 미국이 어디 있을까? (주석 21)
함석헌은 이 글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길”이라 쓴 대로, 당초의 여정이 크게 앞당겨졌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단순한 ‘이별가’ 수준이 아니었다. 군부세력이 쉽게 민간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을 것, 어려움이 올 것을 예상했다.
“이제 어려움이 올 것이다. 역사는 싸움이다. 시대와 시대, 사상과 사상의 싸움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삼켜 버리기 전은 쉽지 않는 싸움이다. 시대를 넘겨 주기를 초등학교 교장이 졸업장을 주듯이 한 줄로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이날껏 자유는 인사로 얻어진 일이 없다. 기성복처럼 입혀줌을 받은 일이 없다.” (주석 22)
함석헌은 미국 여행 중에 국내 정세, 특히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에는 탈권 당한 민주당 정부 요인과 5ㆍ16에 반대한 장성 등 정치망명자가 많았고, 교포들도 <사상계>에 쓴 그의 글을 연상하면서 사자후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내 문제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교포들의 오해가 따랐으나 이에 개의치 않았다. 국내에서는 날을 세워 군사독재를 비판하지만, 해외에 나와서는 삼가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는 생각이었다.
3개월 간의 미국 시찰을 마친 함석헌은 워싱턴 D.C 소재 물리학자 김용준 교수의 아파트에서 그와 함께 지냈다. 해외 순방중에도 이전부터 시작된 1일 1식과 한복차림을 유지하였다. 한인 교회를 비롯하여 교포들의 초청으로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지만,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아서 ‘함석헌 사쿠라’란 비난도 나돌았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모임인 펜들힐로 가서 지내다가 1963년 1월 초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서 버밍험에 있는 퀘이커대학 우드브록 컬리지에서 3월 말까지 한 학기를 보냈다. 이때에 퀘이커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퀘이커 교도가 되었다. 이어서 영국 서부 지역과 스코틀랜드, 글라스코, 에든버러를 돌아보았다. 4월 28일 독일로 건너가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의 안내로 스위스, 핀란드, 노르웨이를 거쳐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함석헌은 1961년 8월 논설집 <인간혁명>을 일우사에서 펴냈다. 자유당 말기부터 최근까지 쓴 논설 10편이 실렸다. 이에 앞서 논설집 <새 시대의 전망>과 시집 <수평선 너머>, 번역서 칼 지브란의 <예언자>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속속 출간되었다. <인간혁명>은 두번째 논설집인 셈이다. 이 책은 군사쿠데타의 살벌한 상황에서도 1년 만에 4쇄를 찍을만큼 널리 읽혔다.
여기에 실린 논설은 <국민감정과 혁명완수>, <간디의 길>, <새나라 꿈틀거림>, <3ㆍ1정신>, <들사람 얼>, <크리스찬의 기백>, <하나님에 대한 태도>,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 <아름다움에 대하여>, <인간혁명>이다. 다음은 머릿말의 끝 부문이다.
친구여, 내가 주제넘게 왜 말을 하는지 아나? 깨쳐 말하면 싱거운 것이지만 정신이 분열됐다는 말까지 들은 담엔 부득이 깨쳐 말 아니할 수 없다. 내가 내 죄를 속해 보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라, 전날의 점잖은 친구에게 버림을 당했다. 그러니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걷어가지 않는 목숨 내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사는 밖에는 지금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걷어가지 않는 목숨 내가 버리고 싶지도 않고, 사는밖에는 조금이라도 죄를 속해 봐야지.
죽어야 할 목숨이니 될수록 낮은 일을 해야지. 그러나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워” 평생에 배운 것이 글인지라 부득이 붓대를 끄쩍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글의 넝마장수 사상의 넝마장수가 된 것이다.
혁명, 그것은 넝마 모으기 아닐까? (주석 15)
이 책에는 내가(필자) 함석헌의 많은 글 중에서 으뜸으로 평가하는, <들사람 얼>을 비롯하여 표제 논설 <인간혁명>과 그가 대단한 페미니스트임을 보여 주는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등은 반세기가 지냈지만 지금의 독자에게 읽혀도 생동감이 넘치는 내용이다. 좋은 문장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
젊은 여성이라면? 생김생김을 관계 말고, 태어난 집안의 높고 낮음을 생각말고, 돈이 있거나 없거나,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재주가 깊거나 옅거나, 그 차이를 도무지 보지 말고, 그저 젊은 여성이기만 한다면? 스물에서 마흔까지, 살갗에 꽃이 피어나 있으며, 숨에 향기가 들어 있고, 목소리에 사람의 혼을 어루만지고 흔드는 보드라움과 맑음이 잠겨 있고, 눈동자에 영원을 향해 애타는 속삭임이 들어 있는 때라면? 그것은 거룩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신비로움이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다. 젊은 여성의 할 일은 그 받아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스스로 깨달아 잘 쓰느냐 하는 데 있다. 잘 쓰면 심청이요, 잔 다크요, 마리아지. 잘못 쓰면 양귀비요, 크레오파트라요, 살로메지. (주석 16)
함석헌은 여성을 ‘풀무’요 ‘용광로’라 했다.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풀무다. 모든 쇠붙이를 녹여 쇠를 만드는 용광로를 달구기 위해선 풀무가 있어야 한다. 글은 이어진다.
여자는 풀무요 용광로다. 산을 빼는 항우가 우미인 앞에서 녹아 버려 영웅답지 못하게 질질 울었다 해서가 아니요, 사자를 찢는 삼손이 드보라 앞에서 혼이 빠져 믿음의 사람답지 못하게 딩글었다 해서가 아니다. 모든 쇳돌, 모든 녹슨 파쇠가 반드시 한 번 풀무 속에 들어가 가지고야 찌끼를 벗고 새 쇠가 되어 나오듯이, 모든 역사 모든 문화의 낡은 찌끼와 썩음을 벗겨 치우고 새 시대를 짓는 새 사람은 반드시 여자의 탯집 속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의 갈려 새로워짐은 반드시 세 세대로야 되는 것인데, 새 세대의 양심의 클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잡힌다. 모든 혁명은 여자의 탯집 속에서 시작된다. (주석 17)
함석헌의 여성론은 전통적인 여성관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으로서 시대적인 사명과 함께 ‘여성스러움’을 강조한다. 한 대목을 더 들어보자.
예로부터 착함과 슬기로움과 날쌤을 천하에 뚫린 세 덕이라 하지만, 그 덕을 다 갖추고라도 거기 만일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신비롬이 없다 해 봐! 그럼 인생이 어찌 됐을까? 또 요샛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목소리를 다투어 서로 부르짖지만, 그 두 가지 권리를 다 보장 받았다 하더라도 거기 만일 조금이라도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신비롬이 들어있지 않다 해 봐! 그럼 이 세상이 어찌 됐을까? 그런데 길을 가노라면 하늘에서 받은 그 귀한 자격을 제 손으로 다 뜯어 망가치우고, 여성 아닌 여성, 여성도 남성도 아닌, 사람도 짐승도 아닌, 흉측하고도 가엾은 형상들이 어찌도 그리 많은가? 풀무가 깨졌으니 역사는 장차 어찌되는 것일까? (주석 18)
함석헌의 이 책에는 또 그가 이화대학에서 한 강연 <아름다움에 대하여>가 실렸다. 내용 중에는 “너희의 너희 이상으로 잘 뵈잔 모든 허영심의 화장을 긁어 치워라”고 하면서 다음의 내용을 강조한다.
억만 년이나 살 듯 문화주택을 지어 단꿈에 취해 보자던 이 땅을 박차고 너희가 정말 영원 무한한 정신의 우주에 머리를 하늘 가에 대고 높이 선다면, 그런다면 그때 해 달이 너희 귀고리가 되고, 수없는 별들이 너희 머리에 보석이 되고, 흐르는 구름이 너희 어깨에 쇼율을 던지는데, 옷은 무슨 옷이 걱정이 되며 단장은 무슨 단장이 문제가 된단 말이냐? (주석 19)
이 구절에서 천의무봉한 사유의 세계와 함께 그의 여성관을 읽을 수 있다.
내 사랑아, 마음을 아름답게 가져야지, 어떤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냐? 무한을 안은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지. 어떤 마음이 무한한 마음이냐? 참된 마음이지. 허영심이 가장 작고 착한 마음이다. 네 마음 속에서 허영심을 버려라. (주석 20)
주석 15> 함석헌, <인간혁명>, 7쪽, 일우사, 1961. 16> 앞의 책, 248~249쪽. 17> 앞의 책, 249~250쪽. 18> 앞의 책, 251쪽. 19> 앞의 책, 276쪽. 20> 앞과 같음.
1961년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개정판을 낸데 이어 12월에는 그동안에 쓴 시를 모아 시집 <수평선 너머>를 간행했다. 생각사에서 나온 이 시집은 6ㆍ25전쟁 전 개성에서 <영원의 젊은이>, 월남 뒤 공주에서 <장작불> 그리고 대전에서 <기러기>라는 프린트로 나왔던 것을 1953년 3월에 인쇄판으로 묶었고, 이번에 이 모든 것에서 고르고 장정을 바꾸어 새로 활자판으로 펴냈다.
함석헌은 이 시집에도 실린 초판 서문에서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낸 이유를 말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시라 할 터면 하고 말터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주석 9)
함석헌은 <두 번째 내놓은 말>에서 개정판을 낸 이유를 설명한다.
남의 병신 자식을, 감추어 기르는, 사랑과 미움, 귀여움과 뉘우침, 불쌍히 여김과 죽기를 기다리는 감정이 한데 섞인, 원수의 아들을 한번 봤으면 그만이지 또 다시 보자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 아닌가? (주석 10)
이 시집에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비롯하여 120편이 실렸다. <선전>과 같은 격렬한 선언문 투의 시가 있는가 하면, <인생은 갈대>와 같은 서정시도 있다. 몇 절씩만 소개한다.
선전
이 세상의 주권자야, 나는 오늘 너를 향해 선전하노라. 네 힘이 아무리 강하고 네 법이 아무리 엄하고 네 조직이 아무리 치밀하여도 오늘부터 나는 네 시민이 아니도다, 나는 너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자유의 이름에서
친구들아,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선생들아,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싸움을 펴노라. 나에게 속빈 말의 충고를 하였고 나에게 너희도 모르는 거짓 길을 가르쳤고 나에게 영원한 집을 찾지 말라 달래였으니 나는 오늘 너희를 향하여 맹렬한 싸움을 시작하노라. (주석 11)
인생은 갈대
인생은 연한 갈대 여린 순 날카로운 맘 쓴 바다 노한 물결 단숨에 무찌르자 끝끝이 뜻 머금고서 다퉈가며 서는 듯
인생은 푸른 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자라고 자라란 뜻 하늘에 달뜻 컨만 떠는 잎 한데 얽히어 부르짖어 우는 듯. (주석 12)
함석헌은 무교회주의를 벗어나면서, 인제대학교 전 총장 이윤구의 안내로 퀘이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지만 1953년에 쓴 시 <대선언>에서 이미 변화의 낌새를 찾을 수 있다.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옛날의 모험가 한 가지 노래하련다 나가는 역사의 수레채를 메고 달려나 보련다. 내 아직 얻었담도 아니요 허린 거울 속 보듯 내 눈에 희미는 하나 앞엣것 잡으려 뒤엣것 잊고 나는 닫노라 이제부터 나를 붙잡지 말라
내 즐겨 낡은 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가장 튼튼한 것을 버리면서 약하면서 가장 가까운 자를 실망케 하면서 어리석으면서
나는 산에 오르리라 거기는 꽃이 피는 곳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 같이 그 향 냄새 맡는 코를 미치고 기절케 하는 꽃 그 꽃을 맡기 전 나는 벌써 취했노라. (주석 13)
중국 17세기 초의 문인, 문학이론가로 유명한 장유(張維)는 저서 <시사서(詩史序)>에서 시(詩)와 사(史)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상의 변화를 기록하고 득실을 밝히는 것이 사(史)이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면서 음악과 어울리는 것이 시(詩)라고 하고, 그 둘은 서로 섞일 수도 없고 겸할 수도 없다고 했다. 사람은 재능이 한정되어 있어, 사가(史家)가 시인일 수 없고, 시인이 사가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뛰어난 시인은 그 두 영역의 구분을 넘어서서, 세상일에 대한 깊은 근심을 절실하게 나타내 사실의 핵심에 이른다고 했다.” (주석 14)
3세기 전에 장유가 마치 함석헌을 예비하여 한 말 같이 들린다. ‘사가와 시인’의 좀처럼 어울리기 어려운 작업을 그는 해냈다. 뿐만 아니라 맹렬한 언론인과 격렬한 민권운동가로 이어진다.
주석 9> <수평선 너머>, 1953년 머릿말, 생각사, 1961. 10> 앞의 책, 9쪽. 11> 앞의 책, 191쪽. 12> 앞의 책, 36쪽. 13> <수평선 너머>, 170쪽. 14> 조동일, <한국시가의 역사의식>, 5쪽, 문예출판사, 1994.
쿠데타세력은 1961년 10월 진보성향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사회당 간부 최백근을 처형하고 혁신계 인사들을 중형에 처하는가 하면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하여 구정치인들을 묶고 자신들의 정치적 발판을 구축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이에 항의하여 하야하자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대통령권한대행까지 꿰찼다.
박정희의 ‘원대복귀’ 혁명공약은 헌신짝이 되고, 그가 노골적인 정치참여의 의지를 내보이는 가운데 12월 17일 개헌안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하고, 몇 차례의 번의를 거듭한 끝에 12월 27일 대통령 출마 의사를 표명했다. 5ㆍ16쿠데타가 권력찬탈을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1950년 3월 28일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를 간행했던 것을 1961년 겨울 한 달 동안 해인사에서 대대적인 개작을 하여 간행하였다. 제목도 ‘성서적’을 빼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꾸었다. 개정신판은 1962년 3월 일우사에서 간행되었다. 그런데 개정판을 내고 제목을 바꾸면서도 1950년판의 ‘서문’을 ‘머릿말’로만 바꾸었을 뿐 내용은 그대로를 실었다. 왜 그랬을까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성서적 입장’의 제거가 “사슴에게서 뿔을 제하는 일”과 같고, “성서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 입장에서야만 역사는 쓸 수 있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그런데 개정판에서 ‘뜻으로 본’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뒤에 다시 간행한 책의 서문이다.
그래서 책을 내게 되는 전해 겨울 해인사에 한 달 가 있으면서 전체에 걸쳐 크게 수정을 하여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 더구나 무교회 신자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석 1)
내가 보기에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1962년 2월 30일자로 일우사에서 종서로 발행된 (456쪽 정가 2,500환) 것이 정본이 아닌가 싶다. 저자 스스로 꼼꼼히 교정을 보아서 오탈자도 거의 없다. 말미에는 유달영의 <책 끝에 붙이는 글>을 실었다. 표지 안쪽에는 회갑날의 저자 흑백 사진도 실렸다.
또한 1950년과 1954년 재판본에 비해 1962년 판본에는 제4부가 추가되었다. 제4부 <생활에 나타난 고민하는 모습>에 <고난의 의미>,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이 추가된 것이다. 이후 몇 곳 출판사가 바뀌면서 나온 책은 1962년 판본을 횡서로 고치고, 유달영의 발문을 제한 것이 대부분이다.
함석헌의 주저인 이 책의 기조(基調)는 ‘고난의 사관’이다. 신라의 통일 이래 한민족이 걸어온 길은 고난이었다는 주장이다. 당당하게 출발하여 열국시대를 거치고 풀무 속에 다듬어진 삼국시대에 고구려 아닌 신라가 통일을 주도하면서 광대한 대륙을 잃게 되고, 그 땅에 고려가 세워졌으나 ‘다하지 못한 책임’으로 민족사의 고난이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성계의 덕 없는 창업, 사대주의를 국시로 내걸고 나라를 세움으로써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수난인가? 두 말할 것 없이 그 다하지 못한 책임 때문이요, 그 잃어버린 정신 때문이다. 이조(李朝) 한 대의 역사는 한 마디로 하면 중축이 부러진 역사다. 축이 부러진 수레가 어찌 나갈 수 있을까? 정도 없이 국민 이상도 없이, 수레의 바퀴 같은 모든 제도 조직이 있다 한들 어떻게 역사의 진행이 있을 수 있을까? 수레의 가장 중요한 것이 축이 둣이 역사에 가장 요긴한 것도 민족정신이요 국민 이상이다.
중축 없는 바퀴를 밀면 밀수록 더 어지러이 이리 굴고 저리 굴듯이 역사도 정신이 빠지면 아무리 정치를 하고 모든 문화 활동을 하여도 어지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수난이다. (주석 2)
함석헌은 동명왕ㆍ혁거세ㆍ온조ㆍ왕건까지 관인대도(寬仁大度)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성계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사대국시를 비판한다.
중축이 부러진 역사! 그것이 욿은 제도를 밟아 바른 길을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500년 동안의 일은 그저 어긋남이요. 거꾸러짐이요. 깨짐이다. 당초부터 이소사대(以小事大)를 표어로 삼고 된 구차한 건국인지라, 구차 아닌 것이 없다. 내 나라를 가지고도 남에게 줬다가 다시 빌어 받기에 힘이 들었고, 내 스스로 된 임금이건만 남의 승인을 얻기에 부끄럼이 그지 없었다. 그러면서도 두 세 임금과 신하를 내놓고는 분해 하지도 아쉬워 하지도 않고 멍청하고 있었다. (주석 3)
함석헌의 이 책에는 ‘조선’을 ‘이조’로 표기하는 등 용어 사용에서 ‘한계’도 없지 않다. 우리 역사에 ‘이조’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조선’을 ‘이조’ 또는 ‘이씨조선’ 라고 쓴 것을 그대로 표기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대한)이 한 왕조가 못 되고, ‘이씨’의 씨족사회라고 비하하는 뜻으로 이런 용어를 써 온 것이다. 교과서는 물론 역사학자들의 연구서적도 마찬가지였다. 함석헌 역시 이 책을 펴낼 때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E. H.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내용이나,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사관”은 알아도, 신채호의 “역사란 아(我)와 비야(非我)의 투쟁과정”이란 말은 잘 모른다. 또한 함석헌의 씨알사관에도 백지상태다.
지나간 것(과거)이라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정말 지나간 것이라면 지금(현금)의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요, 따라서 기록할 필요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기록하고 알려해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기록할 필요, 알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아직 살아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석 4)
다음은 연구가와 언론에서 많이 인용하는 부문이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 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주석 5)
이 책의 마지막 부문은 이렇게 장식된다.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에 더럽힌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 (주석 6)
함석헌의 사관은 강단사학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과거의 다수한 사가들이 공정한 역사를 쓰기 위하여 해석 없는 사실기록을 하다가 수십 백권의 납골당명록(納骨堂名錄) 만을 쓰고 만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적어도 민중의 역사는 아니다. (주석 7)
사실 기록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역사에 대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납골당명록’ 만이어서는 의미가 없다.
“함석헌은 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과거란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이고, 역사적 사실이란 현재와의 관련에서 선택된 유의의(有意義)한 것이고, 의미 없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의 중요성은 그 의미에 있다. 따라서 역사서술은, 그 의미 있는 사실들을 인과관계적 상호연관의 연쇄 속에 통일적인 체계로 엮어야 한다. 그 체계는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부분들이 전체에서 유리될 수 없다.” (주석 8)
주석 1> <네째 판에 부치는 말>, <전집> 1, 18쪽. 2> <뜻으로 본 한국역사>, 223쪽, 일우사, 1962. 3> 앞의 책, 227쪽. 4> 앞의 책, 229쪽. 5> 앞의 책, 302쪽. 6> 앞의 책, 452쪽. 7>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13쪽, 1954년판. 8> 노명식, <한국의 역사가 함석헌>, <한국사시민강좌> 제20집, 121쪽, 일조각,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