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욕쟁이 시인 채광석

 

 

87 년 6 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태 전 민청련이 운동 방침으로 정한
"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 라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 슬로건이
점차 신민당과 재야 모든 정치 사회 단체의 주요 운동 방침으로 되고

고문에 의한 서울대생 박종철 군 사망 사건과
서울대 여학생 권인숙 양에 대한 성 고문 사건
연세대 이한열 군의 최루탄 사망 사건 등등으로

고문 추방과 직선제 개헌 투쟁을 위한 국민운동 본부가
지역과 부문과 계층을 망라해서 발족되고

마침내는 6 월 민주대항쟁의 물결을 이루어 내고
투쟁 목표를 관철해 냈던 그 해 그 달...

어느 날 저녁 어스름한 무렵...
대문밖에서 나와 혜숙의 이름을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대문 열고 나가 보니 채광석이다.
채광석은 바다 풍경이 아름답고 아름드리 송림으로 이름 난 안면도 출신이다.


▲ 채광석(蔡光錫, 1948년 7월 11일~ 1987년 7월 12일)


그는 서울대 사범대학에 재학 중이던 71 년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군대에 강제 입영당하고
제대하고 복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 시위 사건으로 구속되어

2 년 6 개월 동안 감옥살이 하다가 80 년 봄에 다시 복학했지만
5.18 광주 사태 이후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다시 구속되었었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시인으로 문학 평론가로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터였다.

채광석은 그 날 술이 얼큰한 상태로
문밖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혜숙이 보고 싶어 왔다면서 까만 비닐봉지를 내게 내밀더니
소고긴데 지나오다 보니까 요 아래에 정육점이 있어서 사 왔단다.

나는 속으로 평소에 채광석의 성품으로 보아
'친구집에 소고기를 사 들고 다닐 줄도 아나?' 하고 의아스러워 했다.

" 웬 일이냐?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 안주도 할 겸 우리 혜숙 씨랑 같이 먹을려고 그런다 임마."

채광석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 박혜숙! 당신 죽으면 안돼!..."
하고 점잖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서 고기를 빨리 구어 오라고 성화다.
고기를 구어 먹으면서 광석은 " 혜숙아! 이 고기 먹고 빨리 병 나아야 돼! "
하면서 입에 넣어 주려는 시늉을 부리기도 한다.

" 혜숙이 기지배야! 죽긴 왜 죽어! 죽으면 안 돼!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한이 맺혔는데 왜 죽어! 이 기지배야!
이제 민주화가 코 앞에 닥쳐 왔는데...
우리가 얼마나 바라던 건데...
억울하지도 않냐?...
민주화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이 씨부랄누무 기지배야!"

술 처먹으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장안에 욕쟁이로 유명했던 그는
이날도 혜숙을 향해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우리 주위에서는 그의 욕설과 독설적 비난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혜숙은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뻗혀 있다.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넘기는 상태에서
고기를 굽고 역겨운 냄새까지 피워가며 술주정이라고 한다는 소리가

혜숙이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것을 전제로
금방 죽을 사람인 것을 전제로 해서

죽지 말라고
죽긴 왜 죽냐고
죽으면 억울하지도 않냐고
바짝바짝 약을 올리고 앉았으니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며
피가 마르도록 아둥바둥 살아날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의 입장에서
심사가 좋을리 있겠는가?

내 생각에도 옆지기 편이어서가 아니라
혜숙의 심사로야 당연하지...

참다 못한 혜숙이 소리를 지른다.

" 광석이 형! 형이나 몸조심 잘 해!
사람 팔자 알 수 없는 거야!
형이 그렇게 술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지난 번처럼 교통사고 당해서
나보다 먼저 콱 죽어버릴지 어떻게 아냐구!
사람 팔자 알 수 없는 거니까 형이나 조심해!
형이나 조심하라구!!!....."

몇 해 전 일이다.
이신범 유인태 최 열 조성우 채광석 등 친구들 여럿이
이대 앞에서 늦게까지 모임을 갖다가
혜숙이 운영하는 약국에 들러 한 잔 더 하고 가겠다고 자리를 옮기던 중에

채광석은 지하도로 건너기가 귀찮았던지
차가 질주하는 이대 입구 사거리를 가로지르다가 택시에 들이 받혔다.

이 광경을 처음 목격한 최 열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져 있는 광석을 부축하고
사고 택시에 태워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킨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채광석이 술에 취하면
어디에서 재우거나 집에까지 바래다 주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을 빗대어서 화가 난 혜숙이
채광석을 향해 독설을 퍼 부은 것이다.

그 날, 나는 채광석과 함께 근무했던 후배를 불러내어
광석을 집에까지 바래다 주도록 부탁했다.

광석은 우리 집 대문을 넘자마자 골목을 나서면서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 혜숙아! 혜숙이 기지배야!... 죽지 말아!...
죽으면 안 돼 이누무 씨부럴누무 기지배야!...
민주화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이제 다 돼 가는데 씨부럴녀나!!!..."

채광석은...
6 월 민주대항쟁으로 전두환 노태우가
결국 국민에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 29 항복 선언 직후

민주화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분위기에서
그 감격, 그 감동과 흥분에 취해
후배들과 날밤을 새고 새벽녁까지 어울리다가
우리 집 근처 아현동에서 질주하는 택시에 받혀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
.
우리 집에 다녀간 지 보름 남짓 만의 일이다.
.
.
나와 함께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한

친구이자 탁월한 시인이요 문학 평론가였던 채광석은
서른 아홉 나이로 그렇게 허망하게 요절한 것이다.


채광석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 안면읍에서 출생,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83년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제기하면서 백낙청, 김사인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문학논쟁에 참가했다.


창작 주체의 계급론적 차별성 문제,

수기의 문학 장르 가능성의 문제,

집단 창작의 문제, 문학 조직의 문제 등을 문단에 던지는 등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문단 평론계의 한 맥을 형성했다.


1974년 5월 22일 소위 오둘둘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40 여 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고

〈애국가〉, 〈검은 장갑〉 등의 시를 쓰기도 했다.


저서로 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 시집 《밧줄을 타며》,

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사회문화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 등이 있다.

유고집으로 《민족문학의 흐름》이 있다.

우리 동료 선후배들과 문인들은 ' 민족문학가 고 채광석 동지'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성대하게 꾸려 보냈다.


▲ 1987년 7월 14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고 채광석 시인의 장례식


그리고 1 주기와 2 주기에 맞춰
그의 전집 5 권을 펴냈다.

13 주기 기일이던 2000 년 7 월 12 일에는
안면도 휴양림 길목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 이 자리를 빌어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73. 채광석 ㅡ 그를 다시 생각하며

 


이 글을 연재하면서
채광석의 혼령이 나에게
숨가삐 지나치지 말고 좀 쉬어 가라며
자꾸만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지...
한동안 도무지 글이 씌여지지 않는다.

그래... 이 눔아~~~!!!
오랜만에 너랑나랑 되지 못한 말이라도
주섬주섬 훌훌 털면서 회포나 풀어 보자꾸나...

그는 태안군 안면도 양지말에서
안면 면장을 지내시던 아버님과 어머님 슬하
4 남 2 녀 중 둘째로 태어 났다.

안면도 창기초등과 안면중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사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71 년 10 월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쿠데타 전초전으로
위수령을 발동하여 각 대학에 완전무장한 공수단 병력을 진주시켰고
학생들을 마치 전쟁포로처럼 취급하면서 연행하여
제적시키거나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다.

위수령이 발동되던 다음날
채광석은 안면도 고향집에서 체포되고
그 길로 강제 입영되어 강원도 원통에서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

군에서 만기 제대하고 복학한 광석은
1975 년 4 월 10 일, 서울대 농과대학생 김상진이
수원의 서울농대 교정에서 "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할복자살한 사건을 접하자마자 충격을 금치 못하고

5 월 22 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치루는 시위를 감행하는 등
소위 "오둘둘 사건"을 주동하여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무려 2 년 하고도 1 개월이 넘는 세월 옥고를 치루는 동안
그는 감옥에서 시(詩)작 활동에 열중하여 많은 옥중시를 남기고
훗날 결혼하게 되는 강정숙에게 쉴새없이 옥중 연서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그 후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80 년 5 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계엄 쿠데타가 발동되자
채광석은 또 다시 체포되어 40 여 일 간 모진 고문을 당하고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82 년부터는 '시와 경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박노해 시인을 발굴하고

계간 '창작과 비평'과 시 전문지 '시인'등에
문학평론과 시 등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1984 년에는 나의 권면으로
민중문화운동협의회(현 민족예술인총연합 전신)를 창립하고
나와 함께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한편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민족문학작가회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초대 총무간사를 맡아
이 단체를 실질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1985 년에는 나와 함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창립에 앞장서면서
나는 청년단체 대표위원을
광석은 문화예술분과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1987 년 7 월 12 일...
연보를 보니까 그 놈 생일이던 바로 다음 날에...
여성단체연합에서 주최하는 민요한마당 행사에 참여한 후
귀가 도중 서울 마포구 아현초등학교 부근 차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향년 39 세...
7 월 14 일, 재야 민주사회단체가 망라된 가운데
"민족시인 故 채광석 민주문화인葬"이 엄수되고
그의 유해는 팔당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 주기에 두 권, 2 주기에 세 권
길지 않은 이승의 세월에서 남긴 그의 전집이 완간되었고

그가 남긴 시 가운데
"기다림"과 "부활"은 비장한 곡으로 다듬어져
널리 불려지는 노랫말이 되었다.

10 주기 때 추모 문학의 밤 행사를...
13 주기를 맞이해서 마침내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맡고 있던
광산 구중서 교수의 글씨와
조각가 김운성의 제작으로

안면도 휴양림에서 각계 각층 300 여 분이 참석한 가운데
채광석의 시비 제막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 후 대 여섯 차례 그의 시비를 들를 때마다
가족에게 동료 선후배들에게 무거운 짐 잔뜩 지워 놓고 요절한 놈 주제에

뭔 복을 타고 났길래
아름다운 풍광하며 우거진 송림
뭇사람들이 모이고 지나는 길목에
저리 보기드믈도록 빼어난 거처를 장만했나...

난... 난...
도대체가 어림도 없을 성 싶어
부러움을 한아름 안고 돌아서곤 했다.

2000 년 7 월 12 일
"안면도의 푸른솔로 살아 오라!"는 제하로
'채광석 시비 제막식 및 문학의 밤'
자료집에 실린 글 가운데 몇 편을 옮겨 적는다.


기 다 림 ㅡ 채광석 시비 수록시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이름모를 산새들 떼지어 날고
계곡의 물소리 감미롭게 적셔 오는
여기 이 외진 산골에서

맺힌 사연들을 새기고
구겨진 뜻들을 다리면서
기다림을 익히리라

카랑한 목을 뽑아 진리를 외우고
쌓이는 낙엽을 거느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조용히 다지다가

자유의 여신이 찾아오는 그 날
고이 목을 바치리라

대를 물려 가꿔도 빈터가 남는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전문 옮김)



채광석...
그는 진작부터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떠나기로 아예 작정하고 있었던가?

그의 시 "기다림"에서처럼
그는 경제 성장이 어떻고
마이 카 시대가 저떻고
다가오는 팔팔 올림픽이 어떻고
또 저떻고 하던 적에

자유와 민주와 평등
그리고 통일의 새 날을 위해
고독한 밭에 나가 불씨를 묻었다.

흥청이고 망청이는 도시에서
외진 산골에서

피맺힌 역사 한맺힌 이들의 사연들을
가슴 속 깊이 되새기고
뜨거운 불씨를 지피면서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랑카랑한 목청으로 진리를 외치고
욕설을 퍼대며 불씨를 피우다가

자유의 여신이 활활 타오르는 그날
몸뚱이를 바치리라고 했다.

자기 목숨만으로 부족하면
대대손손 이어가며
불씨를 묻으리라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광석의 몸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밧줄을 타며 ㅡ 채광석

밧줄을 탄다.

히말라야 산에 우리의 형제와 동료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도봉산 인수봉의 바위벽, 설악산 골짜기의 얼음벽
벽을 탄다 기어 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땡볕 아우성치는 여름이나
혹한 내리꽂히는 겨울이나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산 사나이들 밧줄을 탄다

비바람이 밀치고
설한풍이 손끝 발끝을 흔들고
뇌성벽력이 몰아친다 해도
밧줄을 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목숨이기에
단속반원들 우르르 달겨들어 패대기치더라도
리어카는 우리들 목숨의 줄이므로

비루먹이고 병들게 하고
꼬드김 손찌검
발길질 똥바가지질 몽둥이질 이간질 쳐대도
노동 삼권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민주화는 통일은
우리의 목숨이므로

목숨을 탄다

민주 민족 민중의 산맥
우리의 선열과 형제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공장 농촌의 얼음벽 학교의 바위벽
벽을 탄다 기어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 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아우성치는 압제의 손길
내리꽂히는 수탈의 손길을 뚫고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외치며 노래하며

민족의 아들딸
밧줄을 탄다 목숨을 탄다

민주주의여
통일이여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이여

(전문 옮김)


칠월의 거리에서 ㅡ 채광석 형에게
도종환(시인, 전 문화관광부 장관)


형이 새벽의 거리에서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난 지 십 년

나는 형이 묻힌 산엘 찾아가지 않았다
많은 날을 바람부는 거리에 서 있었다

형이 생각날 때면 시장 골목 목로주점 찾아가
후배들에게서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걱정하던 젖은 목소리와
한쪽으로 기울어진 얼굴 떠올리며
급하게 소주잔을 뒤집었다

형이 떠나던 그해 여름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퍼붓는 빗발 피하지 않고 길을 걸었다

짧은 생애 내내
이 시대의 머리 위로 퍼붓는 빗줄기 피하지 않고
형이 갔던 것처럼

나도 그 이후 십 년
피하지 않고 내 길을 걸어왔다

그때마다 산 속이 아니라 이 거리 어딘가에
형이 함께 있으리라 믿었다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내동댕이 쳐진
노동자의 벗겨진 신발 옆에
형이 함께 있을 것 같았고

철거반원의 햄머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는 사람들 곁에
함께 악을 쓰다 두들겨 맞고 쓰러져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감옥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철문을 발로 차며 거세게 항의하다 끌려가
먹방으로 돌아와 긴 긴 사랑의 편지를 쓰며
밤을 새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내기 괜찮냐 이렇게 물으며
철창 너머 서 있을 것 같았다

망촛대 꺾어 흔들며
산비탈에 혼자 누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터를 잃고 쫓겨난 지 오래인 나를
사람들 사이에서 알아보곤 큰 소리로 이름 부르며
길 건너 달려올 것 같았다

자유와 밥과 사랑을 위해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을 타며
갈라진 땅의 모질고 큰 절망과
그 절망의 사슬을 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것 같았다

칠월 어느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저녁이면
다 못한 이야기 너무 많아 무어라 무어라 소리지르며
길 저쪽으로 끝도 없이 걸어가고 있을 것 같았다

등만 보이며 젖어젖어 빗속으로
몸짓만 보이며 하염없이 빗속으로

(전문 옮김)



마지막 욕쟁이 채광석
김진경 (시인)


어린 시절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는
산자락을 두른 저녁 연기를 뚫고
들릴 듯 말 듯 들판의 끝까지 쫓아와서는

개울창에 숨어 노는 우리들의 멱살을 붙잡아
여지없이 저녁 밥상 앞에 앉히고야 말았다

"이 육실헐 눔 어디 가서 지랄허고 자빠진겨"

부르는 소리 뒤에 군시렁거리는
그 기름진 어머니 욕의 힘일 것이다.

채광석,
그는 욕을 할 줄 안 마지막 사람이다.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술 취한 한밤 전화기에 대고 퍼붓는
그의 기름진 욕을 거름 삼아

그의 소리는 푸르게 뻗어
암담한 저녁에도 여지없이 멱살을 잡아
우리를 목숨의 밥상 앞에 앉히고야 말았다.

군시렁군시렁 욕하고 있을 그를 떠올리며
감시의 눈길을 피해 가야 하는
그 멀고 추운 길을
우리는 낄낄거리며 두려움 없이 걷곤 했다.

걸어서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그리운 집에 닿곤 했다.

아. 이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하나로
남의 가슴에 칼을 꽂는 사람은 많아도
욕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그 기름진 사랑을 퍼부을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 목숨의 밥상에 차려졌던
민주며 평등이며 정의며 사랑이며 하는 것들도
살아 남기 위해 위로만 뻗는 낙엽송 숲의 나무들처럼
멀쑥멀쑥 키만 커졌다. 마네킹 냄새가 난다.
아, 이 숲엔 부르는 소리가 없다.

아, 이 숲엔 우리가 함께 앉을 밥상이 없다.
아, 이 숲엔 그 모든 것을 키우는 기름진 사랑이 없다.

술 마시고 돌아오는 밤
깜빡이 등이 깨어지고 안테나가 부러진 차 앞에서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아무래도 버릇대로
너만 혼자 잘 먹고 살면 되냐!

군시렁군시렁 욕을 퍼부으며 그가 찾아와
안테나를 부러트리고 등을 깨트린 것 같다.

돌아보면 담 모퉁이를 돌아가는
쓸쓸한 한 사내의 등이 보인다.

아, 우리가 찾아야 할 삶
아, 우리가 찾아야 할 사랑

마지막 욕쟁이 채광석
늘 우리에게로 오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

(전문 옮김)

 

 

 

74. 내 복에 무슨 재혼?

 

 

채광석의 죽음으로
나와 혜숙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죽음은 이렇듯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램이었다.

"나 죽으면 당신 재혼할 꺼지?"

혜숙은 베개를 높이 쌓아 놓고
기대어 자다가도 문득문득
이런 말을 자주 던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지경에서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입에 발른 듯
아양떠는 시늉도 할 수 없고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속 들여다보이는 말을 하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퉁박을 주며 나무랄 수도 없지 않은가?

혜숙은 답답해 죽겠는지
또 물어 온다.

"당신 재혼 할 꺼지? 그렇지!"

나는 '당신이 죽지 말고 살아 있으면 될꺼 아냐!'
하는 외침이 목구멍을 통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꾸욱 참아 내면서 한숨을 푸욱 내 쉰다.

"그래도 한 5 년은 기다리겠지?"

아! 이제 혜숙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가 보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혜숙이 죽으면 안 되는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혜숙은 자꾸 되물으며
대답해 달라고 조른다.
나는 우정 화를 잔뜩 머금고

"나한테 무슨 복이 터졌다고 재혼 복까지 있겠어!!!"
"그런 복이 있다면 5 년까지 어떻게 기다려!!!"

하고 대꾸한다.
혜숙은 약이 오르고 화가 나면서도
싸울 기운이 없는지 잠자코 있다.
그러다가 또 되묻는다.

"아무리 그래도 3 년 상은 치뤄 주겠지?"
"......"

나는 쓸데없는 말 집어치우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대꾸도 안 한다.

혜숙은 며칠 지나서 또 떠 본다.
나는 계속 귀찮다는 듯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

내가 대답을 안 하니까
혜숙은 더욱 더 약이 올라 있다.

"그러면 1 년은 넘겨 주겠지?"

하고 낮춰서 물어 본다.
나는 혜숙이 너무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로 심사도 복잡하고 편치 않아서
마지못해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1 년은 넘겨야 되겠지?"

혜숙은 더욱 더 속상해 한다.
훗날 혜숙은 그 때 너무 약이 오르고 속상해서
죽지 못하겠더라고 했다.

우리는 그토록 절박한 상황에서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를
하나마나한 말들을 밑도끝도 없이 주고받곤 했다.

혜숙의 친구들 사이에
'내 복에 무슨 재혼이냐'는 말이
우스갯말로 둔갑해서 퍼져 나갔다.

최민화는 재혼하고 싶어 죽겠는데
혜숙이 약이 올라 죽지 못하고
그 복을 가로채서 깨뜨려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재혼 복은 없어야지...

아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단단히 각오하고
이후에 닥칠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해 올 때마다
나에게 끝내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은
아이들 문제였다.

에미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자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를 때마다 두려움이 앞섰다.

한 가정의 부부는 생활을 함께 하고
오랜 세월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닮아 가게 된다.

한 쪽에서 작은 인기척만 있어도
상대방의 몸 상태가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느끼고 알만큼 일심동체로 되어 간다.

평생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하다보면

생각이 닮고 마음이 닮을 뿐만 아니라
모습까지 닮아 가는 것이다.

나와 혜숙의 관계 역시 그랬다.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집에서 시시콜콜 얘기하지 않아도
혜숙은 나의 활동 반경과 행동거지를 대충대충 다 꿰고 있다.

서로가 각자 다른 장소에서 소식을 듣고 신문을 읽어도
판단하고 정리하고 받아들이는 게 서로 일치한다.

혜숙과 나는 사회를 보고 역사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역시 서로 닮아 있다.

삶의 가치관과 신념
인생관과 역사관이
서로 비슷비슷 닮아 있고 일치하는데

이런 배우자를
어디서 다시 찾고 만날 수 있겠는가?

10 여 년 세월 동안

생활을 같이 하고 호흡을 함께 하면서
불편없이 알맞게 맞추어 놓은 것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서
새로 구할 수 있겠는가?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어느 세월에 훈련하고 노력해서
이만큼 서로를 일치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디서 혜숙이 같은 분신을 만나고
남은 세월을 어떻게 혜숙이처럼
편안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아득하고 까마득하다.

재혼하는 복은 없는 게 낫다.
재혼 복은 없어야지!!!...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72. 욕쟁이 시인 채광석  (0) 2008.01.22
73. 채광석 ㅡ 그를 다시 생각하며  (0) 2008.01.22
75. 희망의 불씨  (0) 2008.01.22
76. 누런 신문지처럼  (0) 2008.01.22
77. 또 하나의 시련   (0) 2008.01.22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75. 희망의 불씨

 

 

혜숙은 첫돌이 마악 지난
막내 아들 중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우리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점점 더 야위어 가자
막내가 세 살 될 때까지만이라도
살아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다.

기력이 쇠약할대로 쇠약해 져서
누어 있기조차 힘들어 했을 때...

혜숙은
"어떻게 해서든지 올 12 월까지는 살아야 될텐데..." 했다.

그러면 앞으로 6 개월이 남아 있다.
나는 "하필이면 왜 12 월까지야?"
하고 물었다.

"막내가 너무 어려서 엄마를 전혀 모를 것 같애...
중현이가 커서 엄마를 기억하게 되려면 두 돌은 돼야겠지?
나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돼!"

막내가 두 돌이 되려면
앞으로 9 개월이 더 있어야 한다.

혜숙은 9 개월이라는 세월을
더 살아 있을 자신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9 개월이 아니라
6 개월 만이라도 더 살아서
막내에게 엄마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나마 남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거다.

혜숙은 자기자신의 운명을
가늠하고 예측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면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이거다~~~!!!

혜숙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 희망은
막내에게 있었다.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되는 절대적 의지가
바로 막내에게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
유일한 희망은
바로 첫돌지난 막내에게 있었고
그것은 막내에 대한 모성 본능이었다.

과학적으로... 임상적으로 증명된 절망 앞에서
한갖 공허하기 짝이없어 보이는
추상적 희망이었지만

혜숙은 본능적으로
엄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죽음을 이겨 내야 하는 의지...
생명에 대한 집착이
모성 본능에 의해서

마지막 희망의 불씨로
그 명맥을 지켜 내고 있었던
것 이 다 .

 

 

 

 

76. 누런 신문지처럼

 

 

요즘에는 2 주에 한 번씩으로
주사하는 방법이 달라졌는가본데

혜숙은 3 주 째 한 번
그리고는 1 주 후에 한 번
다시 3 주 째와 1 주 후...

이런 방식으로 6 개월 동안
항암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항암제가 얼마나 독하던지
혜숙은 주사를 맞고 나면
오장육부를 다 들어내듯
토하고 또 토하고

토할 것이 없어 헛구역질하느라
혼절할 지경에 이르르곤 했다.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져 나가서
백구머리한 여승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몰골이 남들 보기에 너무 민망스럽고
혐오감을 줄 정도로 변해 갔다.

가발을 장만해서
병원 가는 날이나 외출할 때마다 쓰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혜숙은 가발 쓰는 것을
몹시 불편해 했다.

동네 길을 벗어나서 택시를 잡으면
혜숙은 타자마자 가발을 벗어 제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운전 기사가 거울로 뒷자석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며 의아해 했다.

택시를 탈 때는 분명
다정한 연인이나 부부일 꺼라고 여겼던 모양인데
백미러로 보니까 평상복 차림을 한
여승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파계한 여승이 가족과 함께 탔거나
불륜스런 관계 쯤으로 여겼을 법했다.

혜숙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던지
말문을 열었다.

"기사 아저씨~~~!
내 머리가 좀 이상해서 그러시죠?
요즘 새로 나온 패션으로 해 봤는데...
좀 이상한 가봐... 당신은 어때 여보...
당신도 이상해? 당신은 괜찮지?"

나는 혜숙의 속마음을 안다.
혜숙은 운전 기사에게
자기의 백구머리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농담을 던졌다기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은 내 신랑이고 우리는 부부'사이니까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혜숙은 가발쓰기를 너무 싫어해서
나중에는 머리 패션을 모자와 머플러로 바꾸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동안(童顔)형이어서
나이가 어려 보이는 데
더욱 어려 보였다.

반면에 나는 제 나이보다도
좀 더 먹어 보이는 형이다보니
때때로 본의 아니게 불편한 적도 더러 있었다.

한번은 신발 상점에 들러 운동화를 고르는데
점원 아가씨가 내게는 아저씨라 부르면서
혜숙에게는 얘~~~쟤~~~ 해 가며
이거 신어 보라는 둥 저게 좋겠다는 둥
반말을 해 대는데
아마 고등학생 쯤 되는
아빠 따라온 딸인 줄 안 모양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기분 좋을 리 없는 혜숙은
그 후부터서든가...
시장에 가든가 택시를 타든가
음식점이나 커피�에 가든가
아무튼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눈치만 보이면
여보... 당신... 소리를 자주 되뇌이곤 했다.

혜숙은 물만 간신히 조금 삼킬 뿐
거의 아무 것도 먹지를 못 했다.

잣을 좀 먹는가 싶으면 잣을 사오고
새우를 먹는가 싶으면
시장에서 제일 고소하고 먹기 좋은 새우를 사오고 했지만
입에 대고 맛을 보는 정도지 먹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소문로 옛 배재학당 입구에 보양죽집이 있다.
근 30 년 야채죽과 전복죽, 버섯 인삼 새우 등등
각종 죽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나는 한 때 그 집에 들러
하루에 한 종류 씩 각종 죽을 포장해서 사 왔다.

그 중에서 입맛에 당기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혜숙의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변해 갔다.

주치의는 체중이 34 kg 이하로 내려가면
좀 힘들어 질꺼라 했다.

그리 되면 거의 가망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혜숙은 체중이 닷새에 1.5 kg 씩 줄어 들었다.

퇴원할 당시 48 kg 이던 체중이
두 달만에 34 kg 으로 줄어 들었다.

항암제를 두 달 째 맞는 날
주치의가 우리를 불렀다.

"박혜숙 환자는 이제 항암제를 그만 맞는 것이 좋겠어요...
항암제를 맞으려면 무엇보다도 체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돼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약해져서 계속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항암제가 치료에 꼭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항암제로 인한 부작용으로 생명이 단축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의학적 노력에 매달리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자고 다짐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막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 무슨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군요...
우선 고단백질로 영양분 있는 음식을 먹어서 체중을 늘리고
저항력을 키워서 치유되기를 바랄 수밖에......"

현대의학에서도 이제 손을 놓아버리는구나!!!
더 이상 방법이 없다지 않은가?

이제 한 주간이면 마치게 되는 방사선 치료만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병원에서 받아 주지조차 않는 신세로
방치되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혜숙은 더 이상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집에서 멍하니 숨만 쉬며 누어 있곤 했다.
'이러다가 죽는 거로구나' 싶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어
내장을 감싸고 있는 뼈마디가 모두 드러나다시피 했다.

얼굴이며 피부는
오랜 세월
창고 속에서
회색 먼지에 싸인 채
처박혀 있는
빛바랜 신문지 색이다.

톡 건드리면
우수수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누렇고 바싹 마른 케케묵은 신문지처럼
그렇게
핏기가 전혀 없다.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하며
베개에 기대 앉아
겨우
숨만 쉬고 있다.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74. 내 복에 무슨 재혼?  (0) 2008.01.22
75. 희망의 불씨  (0) 2008.01.22
77. 또 하나의 시련   (0) 2008.01.22
78.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0) 2008.01.22
79.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0) 2008.01.22

 

77. 또 하나의 시련

 

 

한편으로 그 당시 우리 가정은
경제적 사정까지도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나는 감옥에서 마악 출소하고 혜숙은 약국을 후배에게 맡겨 놓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데다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까지 처분해야 할 처지였다.

혜숙은 나에게 재정적 부담을 안기는 것이 무척이나 미안하고 죄스러웠던지
주저주저 하면서 조금씩 말문을 열려고 했지만 나 또한 사정을 알기가 두려웠다.

나는 네 번을 감옥에 드나들면서도 내 또래의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는
경제적 형편이 그리 못한 편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제적된 상태였지만 일찌기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에다 결혼하고서부터는 집을 장만하고 약국까지 운영했으니
다른 동료들보다 형편이 좀 괜찮은 편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혜숙이 약국을 운영하면서 번 돈으로
적금을 들고 저축을 했더라면 또는 여유 자금을 만들어
이리굴리고 저리굴리는 데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70 년대 말부터 돈을 좀 모아 둘 수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나는 내가 받은 만만치 않던 수입 모두를
운동 단체를 설립하고 유지하는데 써 왔다.

말하자면 재야 민주화 운동 단체의
재정 책임을 맡아 해 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비축한 재산이나
저축한 돈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오히려 세상을 살면서
갚아야 할 비용과 감당해야 할 빚들이 조금씩 늘어 났던 것이다.

혜숙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내가 먼저 감옥에 들어 가게 되면
지명 수배된 동료들이 혜숙을 찾아 온다.

감옥에서 나올 때마다 우리 집에는 내가 신었던 양말이나 입었던 옷가지
속옷까지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도피 중인 동료들이 모두 가져가는 것이다.

그 뿐인가?
약국에는 언제나 다만 얼마라도 현금이 있을테니까
돈이 떨어지면 동료들이 혜숙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혜숙은 있는 돈을 몽땅 털어 주곤 했다.
어느 날 혜숙이 심각한 사정을 내게 털어 놓는다.

"당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내가 집안 일을 잘 건사했어야 했는데...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해...
당신한테 지급된 월급과 상여금은
꼬박꼬박 수령해서 수배 중인 동료들한테 전달해 왔어...
쫓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약국에 있던 돈도 좀 보탰고...
그러다보니까 빚도 좀 지게 됐어...

여보! 나 지금 돈 때문에 피가 말라 죽겠어...
이거 어떻게 좀 해결해 줘...
내가 이렇게 죽어 가고 있는데 나 죽은 뒤에
나 때문에 경제적 피해를 볼 사람들한테서 받을
원망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당신은 어차피 아이들하고
건강한 몸으로 살아는 갈 테니까...
죽어 가는 내 소원 좀 들어 줘 여보!!!
지금 당장 약국을 정리하고 집을 처분해야 될 꺼야 여보!!!
흐흐흐흑......"

혜숙은 내게 울먹이며 매달리다시피 했다.
집을 처분해야 할 정도라니...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혜숙이 기록해 둔 메모지를 보았다.
갚아야 할 돈이 모두 합해서
그 때 돈으로 4 천 8 백 만 원 가량이다.

막상 약국을 처분하려다 보니까
그동안 약품을 제약회사에서 외상으로 들여와
현금을 받고 팔다 보니 받을 돈은 거의 없고
갚아야 할 외상매입금만 남아 있었다.

41 평 가량 되는 집과
약국 임대보증금 등등을 합해서 처분하면
대략 5 천 여 만 원 정도가 된다.

혜숙이 소원대로 당장에 빚을 몽땅 갚고 나면
한 2 백 여 만 원이 남게 된다.

우리 여섯 식구가 길거리에 나 앉을 수는 없고
살만한 전세를 얻으려면
그 때 돈으로 1 천 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8 백 만 원 가량의 빚은
계속 더 남아 있어야 한다.



 

78.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나는 당장에 대답을 못 하고 주저주저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내게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닐테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혜숙은 보름마다 한 번씩
두 번을 더 울먹이며 내게 매달렸다.

이 때 혜숙의 상태는
점점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6 월 중순 경...
혜숙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했다.

이제는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당신이 가부간에 대답하고 결단을 내려야 된다고 했다.
나는 혜숙에게 말했다.

"우선 약국부터 정리하고 급한 불부터 꺼 나가자 여보...
집은 우리가 장만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 명의로 되어 있으니 그냥 두고...
내가 집을 안 팔고도 당신 보는 앞에서
1 년 안에 빚을 다 갚을께...
그대신 당신... 앞으로 1 년은 꼭 살아 있어야 돼!
빚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죽으면 안 돼! 알았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고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남은 애절한 소원과 기대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마음 속으로 각오하고 다짐했던 계획을
나는 당장에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나에게는 뭔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왠지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돈을 굴리고 재산을 축적하는 일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해 낼 자신이 있었다.

다가 올 미래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오는 과정에서
나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그리 시달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공부나 진학 문제에
그리 걱정하고 불안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결혼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택에 대한 문제를 걱정해 본 적도 없다.

자녀 교육에 대한 문제 역시
지금부터 신경을 곤두 세우고 준비해 놓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크면 그때 가서 감당하면 되는 거지...
하는 자신감이 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1 년 안에 해 낼 꺼야... 해 낼 수 있어...
그런데 우리 혜숙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하지?
그러면 혜숙이 한을 남기게 될 텐데...
혜숙은 올 12 월까지만이라도 살아 있었으면 했는데...
기간 좀 줄여 보자... 올 연말로... 6 개월로 줄여 보자...
그래 6 개월 안에 감당해 보자'

나는 우선 약국부터 정리했다.
약품 도매상을 운영하는 분에게
관리 약사와 함께 전적으로 맡아 경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은 돈으로 우선 시급한 부채부터 갚아 나갔다.
내 사업 자금으로 43 만 원을 남겼다.




 

79.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전 중으로 찾아 뵙겠다고 약속했다.

강 사장은 유신 체제와 긴급조치 시대
민주화 운동 단체의 인쇄물을 도맡아 온 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선언문과 성명서 등 각종 유인물을
70 년대 초반부터 신변의 위험과 사업상의 손실을 무릅쓰고 인쇄해 준 유일한 분이다.

전북 남원의 가난한 집안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어머님 슬하에
모태 신앙을 이어 받아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형편이 못 되었다.

애를 태우며 안타까워 하시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학교를 못 보내는 대신으로
글이라도 계속 접할 수 있는 인쇄소에 취직하도록 권면했다.

고향 남원에서 1 년 여 인쇄소에 다니던 그는 4 . 19 혁명이 일어 나자
어린 마음에 별천지 세상으로 바뀌겠다 싶었던지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서울을 향해 무작정 상경했다.

이듬해 5 . 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아직 미성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는 낙엽이 짙게 물든 가을 어느 날
속리산 법주사에 여행삼아 갔다가 아예 세상을 등지고 입산해서 눌러 앉았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과 어머니로부터 받은 기독교 신앙으로
또한 부모님과 동생들 걱정으로 제대로 마음 붙이지 못하고 갈등하던 그는
입산한 지 1 년 여 만에 다시 세상으로 하산했다.

집안에서 계속 머물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던 그는
1963 년 다시 상경하여 인쇄소에 취직했다.

10 년 가까이 인쇄소에서 일하던 그는
72 년 박 정권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가운데
계엄 치하에서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헌법을 통과시키자

애가 터지고 울화가 치미는 심정을 억누를 길 없어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독자적으로 조그만 인쇄소를 차렸다.


▲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이 후로 그는 엄혹한 시절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박 정권에 저항하는 활동 단체를 찾아 다니며
그가 이제까지 갈고 닦아 온 기능과 직업을 통해서
필생의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줄곧 민주화 운동에 기여해 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70 ~ 80 년대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 졌다.

그러는 동안 그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구류를 살고 했다.

1980 년 4 월에는 김재규 관련 유인물 제작 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되었다가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전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다가
이듬해 5 월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석방되기도 했다.

나는 첫 직장이던 1977 년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일 적부터
필요한 인쇄물을 강은기 사장에게 맡겨 왔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등
내가 주도하고 관계했던 모든 단체의 유인물 역시 강은기 사장이 도맡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등 기독교 단체의 인쇄물도 거의 강은기 사장이 맡았다.

그는 실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민족 통일 운동 단체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의 인쇄를 담당해 온 산 증인이요
자기 직업을 통해서 운동에 헌신해 온 민주 인사다.

그는 오랜동안 나와 같은 교회에 소속된 나의 선임 장로이기도 해서
나와는 더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나는 다시금 그의 생애를 되돌아 본다.

그는 2002년 여름...
갑자기 췌장암으로 진단 받고 줄곧 병원에 입원해 왔다.

많은 이들이 그의 병실을 찾았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에서는
그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을 취재해 보도했다.

그리고 2002년 11 월 9 일
그는 험난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그를 알고 그를 소중하게 여겨 왔던 이들은
누구랄 것없이 그의 빈소를 찾았고
"민주인사 故 강은기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그를 안장했다.

식순 가운데 그에게 바쳐 진 조시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그 사람 웃으며 간다 ㅡ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유시춘 (소설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우리들에게
사계가 늘 겨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손톱밑 반달같이
여리고 뽀오얀 새눈 돋는 봄날과
시퍼런 삼나무 녹음
그 그림자까지 시퍼렇던 뜨거운 날과

먼길 흘러
저 혼자 깊어져
마침내 바다같은 한강하구 박차고
내 마음의 철새들 떠나는 날에도

성명서와
플랑카드와 스티커와
'민주화의 길' '민주노동' '민주가족' '민주통일'
'민' 字 항렬 인쇄물에 뒹굴던
우리 청춘은 늘 춥고 시렸다.

겨울 새벽 동쪽 하늘에 맨살로 걸린
그믐달이 친구였다.

날 선 분노 때문에
70 년대 80 년대 그때에는
을지로 뒷골목
세진인쇄 강은기 그 아저씨
늘 표정이 없었다.

그러다가 인쇄물 몇 리어카 찍어 간
장영달 이해찬 수배되고 감옥 가면
그래서 쌓인 빚 늘어 가면
태백 정선 광부같이
한번
씨익 웃고 말았다.

밤새 찍어 준
인쇄물과 함께 그 아이들 사라지면
대신 경찰서에 끌려가
아마도 그리 말없이
씨익 웃다가

매타작에 죽을 고생하다가도
다시 만나면
그저 한번 씨익 웃었다

강은기
그 아저씨 가슴에는
비수같은 적개심이 없었다

생활이 운동이었다
운동이 곧 생활이었다
숭늉처럼 따뜻하고 융숭 깊었다

세진인쇄
빚진 사람들아
슬퍼마라 울지마라

그 아저씨 이제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가느니

강은기
그 아저씨
외상값 못 갚은 친구들아
'국민의 정부'에 상기 가슴시린 벗들아
애통해 마라

그 사람 스스로
바다에 버린 양식

이제 곧
밀밭되어 보리밭되어
온 누리에 푸르게 물결칠 것을

그 사람
저기 말 없이
씨익 웃으며 가느니

( 전문 옮김 )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77. 또 하나의 시련   (0) 2008.01.22
78.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0) 2008.01.22
80. 전화기와 책상 하나로  (0) 2008.01.22
81. 세민약국과 나눔기획  (0) 2008.01.22
82. 네 번째 명함  (0) 2008.01.22

 

80. 전화기와 책상 하나로

 

 

나는 남은 돈 43 만 원을 들고
을지로 5 가 을지전화국으로 향했다.

그 당시 전화를 신청하려면
20 만 원 권 전화 채권값을 포함해서
43 만 원이 필요했다.

가지고 간 돈을 몽땅 지불하고
지정 받은 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지와 채권 한 장
달랑 받아 쥐고 나오다가

지금은 사라진 지난 날의 풍경...
전화국 앞에서 서성대는 아주머니에게
20 만 원 권 채권을 건네 주고
3 만 원을 할인해 17 만 원을 받았다.

17 만 원...
이 돈을 창업 자금으로...
유일한 밑천으로 삼아
6 개월 안에
5 천 만 원 가량 되는 부채를
갚아야 한다.

갚아야지...
꼭 갚고 말꺼야...

혜숙이 살아 있어야 할
올 연말까지는
꼭 갚아야 해...

1987 년 6 월 20 일...
나는 필사적인 행동을 개시하는
첫 번 째 업무를 마치고

중앙극장 건너편에 위치한
을지로 2 가 속칭 인쇄 골목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 갔다.

을지로 3 가 쯤에서
만 오천 원을 주고
전화기 한 대를 구입했다.

일제 때 지은 적산 가옥이
마치 혜숙의 빛 바래고 푸석푸석한 몰골처럼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듯
서로 기대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에 들어 섰다.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청을 울린다.

잉크 냄새가
코 끝을 진하게 스친다.

적산 가옥 비좁은 나무 계단을
조심조심 오른다.

색칠도 하지 않은 베니어판을
얼기설기 칸막이로 막아 구분해 놓은 사무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다.

강은기 사장이 씨익 웃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형님! 나 집사람 병 고치고 빚도 좀 갚아야 하는데...
여기 책상 하나 빌려 주세요...
아무래도 형님께 우선 신세 좀 져야 되겠어요.
언제까지가 될 지 모르겠지만....."

나와 혜숙이 살아온 모습
활동해 온 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분이어서
나는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군더더기도 뺀 채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했다.

강 사장은 비좁은 사무실 공간에 놓여 있는
책상과 공타 기계를 요리조리 옮기더니
책상 하나 들여 놓을 자리를 비워 준다.
공간에 맞도록 조그만 책상을 들여 놓고
전화기를 달았다.

아! 이제 나는
더 이상 마련할 수 없는 밑천을 가지고
더 이상 작을 수 없는 공간에서
홀홀단신으로 황당무계한 구름을 잡듯
청운의 뜻을 펼치듯
고난의 대 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의자에 앉아 본다.
전화기를 만져 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다짐하고 다짐하며 필사적인 각오로
우선 뛰쳐 나오기는 했지만
막막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차례인데...
무엇을 어떻게 추진해 나가야 하나...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무심코 전화기 다이얼을 누른다.
엉뚱하게도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 온다.

어! 이게 아닌데...
얼떨결에 "...에미 좀 바꿔 주세요" 한다.

"여보! 난데...
지금부터 사업 시작하는 거야...
사무실도 얻고 책상이랑 전화기도 마련했어...
당신한테 첫 번째로 전화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할려구...
1 년만 기다려... 1 년 안에 다 해결할 테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게 엉뚱한 소리를 해 댄다.
그렇지! 맞아! 그래야 돼!
이제 시작해야 돼!

본격적으로... 필사적으로...
해 내고 말아야 돼!!!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전화 다이얼을 누른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전화를 다 주시고...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되는 건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그동안 고생 많았지? 감옥에서 건강은 괜찮았고?
언제 나왔지?... 혜숙 씨는 요즘 어때? 병원에서는 뭐래?
이거 참 큰일이로구먼... 우리 친척 중에도 그런 분이 계셨는데...
그럴 때는 이러저러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더라구...
그 분도 견디다 못 해 막판에는 이러저러했는데...
차라리 처음부터 이러저러했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됐을 꺼라 그러더라구...
애들은 몇 이지?... 아이구 애들 생각해서라도
혜숙 씨가 빨리 건강해져야 할 텐데...
그나저나 우리 함 만나자구... 나한테도 시간 좀 내 줘...
점심도 좋지만 저녁에 만나서 회포도 풀어야지...
혜숙 씨 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첫 번째 통화에서
나는 막상 할 사업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 한 채
서로 안부 인사만 나누고 말았다.

두 번째도 그랬고 세 번째도 그랬다.
통화 내용도 비슷했다.

여기저기 전화 해 보았지만
계속 그 모양이었다.

나는 다급해 졌다.
안부 전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만큼
한가롭고 여유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78.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0) 2008.01.22
79.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0) 2008.01.22
81. 세민약국과 나눔기획  (0) 2008.01.22
82. 네 번째 명함  (0) 2008.01.22
83. 첫 번째 주문  (0) 2008.01.22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81. 세민약국과 나눔기획

 

 

직접 찾아가서 만나기로 작정했다.
그러다보니 연락처가 있어야 했고
명함이 있어야 했다.
상호가 있어야 했다.

그로부터 9 년 전이던 78 년 6 월
혜숙이 나와 결혼하면서
약국을 차렸을 때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혜숙의 약국 상호를
무엇으로 할까? 궁리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가 들어 서 있고
다가구 주택으로 변해 있지만
그때 적만하더라도 우리가 살던 곳은
닭장 동네라 불릴만큼 판잣집이 많았다.

그나마도 세들어 사는 이들이 많이 살던
달동네 어귀였다.

나는 '씨알' 약국이라 할까?
'민중' 약국이라 할까... 했다.

너무 '티'를 내고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았다.

조선조 숙종 때
우리 백성들은 참으로 생활이 곤궁했다.
많은 이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함경도 평안도 등
북쪽 지방이 더욱 심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조상이고 친척이고 고향이고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 헤매고 다녔다.

산에 닿으면 산나물을 뜯어 먹고
물에 닿으면 물고기를 잡아 먹는다.
들에 닿으면 품을 팔아
곡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이런 이들을 일컬어 세민(細民)이라 했다.
가난하고 천한 이들이다.

함석헌 선생의 상징어가 된 '씨알'을
한자(漢字)로 표현할 때
민중(民衆)보다는 세민(細民)이 더 가깝다.

서양철학에서 임금 노동자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안(Proletarian)이라는 개념보다도
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말이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나는 혜숙의 약국 상호를
'세민약국'이라 작명했다.

한자로는 쓰지 않았다.
험악한 시절 냉전의 세상에서
상호에 담긴 의미를 가지고
괜한 빌미를 살까 염려해서다.

약국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더러 묻는 적도 있다.

상호가 부르기 쉽고 마음에 든단다.
무슨 의미냔다.

부부간에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지은 것 아니냔다.
그렇지 않다고 했다.

영세민(零細民)에서 영(零)자를 뺀 거 아니냐고 한다.
그렇다고 했다.

그 후부터 혜숙은
상호에 대해서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이 동네가 옛날부터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았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닭장동네라 해서
다닥다닥한 판잣집에 닭장처럼 옹기종기 모여 산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 분들이 다 영세민들이잖아요...
근데 '영세민 약국'하면 좀 이상하고 동네 자존심도 상할 것 같아서
'영' 자를 빼고 그냥 '세민약국'이라 했어요..."

상호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회상에 잠기던 나는
이번에는 무얼로 지을까 궁리했다.

목적과 대상이 되는 객관적 개념보다는
실천과 행동...
구체적인 당위를 뜻하는 개념을 찾고 싶었다.

'나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실천적 개념이다.
분배의 정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행동적 개념이다.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단체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나눔' '나눔기획' '출판인쇄 나눔기획'......
상호를 '나눔기획'이라 정하고 명함을 만들었다.

사무실 입구에 네모반듯한 간판도 달았다.

 

 

 

'▷ 사랑과 희망으로 > 3. 죽음의 문턱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79.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0) 2008.01.22
80. 전화기와 책상 하나로  (0) 2008.01.22
82. 네 번째 명함  (0) 2008.01.22
83. 첫 번째 주문  (0) 2008.01.22
84. 월간 <말> 합본호  (0) 2008.01.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