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Portrait of painter Nikolai Nikolayevich Ghe. 1880. by Ilia Repine.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2.5 x 66.2 cm. Tretyakov Gallery Room 31 

화가 니콜라이 게 (Nikolai Nikolayevich Ghe)의 초상화.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아 레핀(Ilia Repine)의 작품이다.


니콜라이 게 (Nikolai Nikolaevich Ge 1831- 1894)는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로 역사적, 종교적 그림으로 유명하다.
니콜라이 게는 조부가 18세기에 러시아로 이민 온 프랑스 혈통의 귀족 가문 태생이다.  
조실부모하고 농노 유모의 손에 컸다.  
키에프와 상 페테르부르그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 전공하다 황립예술학교로 옮긴다.  

니콜라이 게는 우크라이나 사실주의 화가이면서 상징주의자로, 
역사화와 기독교적 주제를 색다른 해석으로 진지하게 탐구했다. 
니콜라이 게의 작품은 점점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어려서부터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하던 게(Ge)는 제정(帝政) 러시아 시절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대학 (Kyiv University)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던 과학도였다. 
20세이던 1850년이 되어서 그동안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뒤늦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화가 수업을 쌓았다.

 

 “What is truth?”  Christ and Pilate, 진리란 무엇인가? 예수와 빌라도. 1890,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233 х 171cm. Tretyakov Gallery Room 31

<진리란 무엇인가?>는 대위법적인 화면 구성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예수. 전자는 등을 보이고 있고 후자는 앞을 바라보고 있다. 
한 사람은 빛을 받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림자에 싸여 있다. 
빌라도는 자유로운 권력자의 제스처를 하고 있는 반면 예수는 손이 뒤로 결박된 상태다. 
빌라도의 몸집은 다소 뚱뚱한 편이나 예수는 바짝 말랐다. 
두 사람의 이런 대조는 화면을 매우 드라마틱하게 만들 뿐 아니라 
관객이 예수가 처한 상황 속으로 급격히 빨려들게 한다.

그림 속 빌라도는 어둠 속의 예수를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도대체 네가 말하는 진리란 무엇이냐?”
그림 속 빌라도는 예수를 가소롭다는 듯 쳐다본다. 
그는 예수를 그저 보잘 것 없는 정신병자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이 그림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가 예수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가 그럴 만한 가치조차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묵묵히 빌라도를 바라보는 예수의 눈빛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말도 할 의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니콜라이 게의 예수는 결코 패자가 아니다. 
저 높고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비롯하여 세상의 영광과 권위로 충만한 
모든 제도와 기득권자들이 승리자가 아닌 것처럼 가난하고 누추하다고 
세상에서 멸시를 받고 있다고 예수가 패자인 것은 아니다. 
그의 침묵은 굴종이 아니며, 그의 슬픔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지독한 고통을 진리와 양심을 위해 스스로 감내했기에 
니콜라이 게의 예수는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What is Truth? 
빌라도의 관저에 잡혀온 예수에 대한 심문 중에 로마 총독 빌라도가 던진 질문이다. 
너는 유대인인데, 네가 그 유대인들의 왕이라면서? 빌라도는 두 번이나 따지고 물었다. 
그런데 네 유대인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 
네가 말하는 진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러나 빌라도는 그 앞에 결박 당해 있는 예수의 다음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렸다면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 인류가 가장 듣고 싶었던, 
들었으면 좋았을, 그 대답을 들었을 텐데.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군중들에게 넘겨주었다.  

일반적으로 그림에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표현할 때 키아로스쿠로 (명암 대조법)를 많이 쓰는데 
선에는 밝은 빛을 주고, 악의 영역에는 어둠을 주어 극적 효과를 내며 주제를 극대화 시킨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말이다. 
하지만 니콜라이 게는 그 반대로 표현하여 어둡고 칙칙한 그늘 속에 
버려진 듯한 예수를 표현함으로써 쉽게 얻을 수 있는 진리와 선의 성격을 설명한다. 
진실로 가치있는 진리는 쉽게 얻을 수 없다. 
진정 찾고 고민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으로 그림을 통해 그 진실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림이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 철학이 되고, 그리고 가르침이 된다.
그림을 통해서 힐링을 얻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진리란 무엇인가?>는 한 편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철학이다.
선한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얻는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인간 본연의 선한 양심을 바탕으로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판단해야 할지 길을 잡아준다.

예수와 빌라도가 마주 보고 서 있다.
한 사람에겐 밝고 화사한 빛이 , 다른 한 사람에겐 그늘과 어둠만이 존재한다.
살찐 빌라도가 앙상히 야윈 예수에게 한쪽 손을 내밀고 거만히 어깨를 으쓱하며 질문을 한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 그림은 <요한복음 18장>에 나오는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네가 왕이냐?"라고 질문을 한다.
이에 예수는 왕이다고 대답하며
"난 진리를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세상에 왔으니 진리를 증언하려 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고 따를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에게 되묻는다
"네가 말하는 진리란 무엇이냐"
예수는 이에 답하지 않고 무섭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빌라도에게 응한다.

과연 진리는 무엇인가
그림 앞에선 우리에게 작가는 질문에 진지해지라고 한다.
또한 예수에게 거들먹거리는 빌라도의 거만함을 보여주며 부끄러움의 민낯을 가늠케 한다.
그리고 진정 선한 것이 무엇이며 진리는 무엇인지를 고민하라 한다.
어둠 속에서 예수가 세상사 안일하고 편한 것을 찾아 쉽게 야합하는 우리를 꾸짖듯이 쳐다본다.

그림에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표현할 때 키아로스쿠로, 명암 대조법을 많이 쓴다.
대표적으로 렘브란트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선에는 밝은 빛을 선사하고 , 악의 영역엔 어둠을 주어 극적 효과를 내며 주제를 극대화시킨다.
그러나 게의 <진리란 무엇인가>는 반대로 진리와 선인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서 있다.
살찌고 비단옷을 입은 빌라도는 환한 빛을 등에 업고 진리를 심판하려 한다.
거짓 잣대를 들고 진실인양 선을 묻으려 한다.

그렇다!
작가는 어둡고 칙칙한 그늘 속에 버려진듯한 예수를 표현함으로써
쉽게 얻을 수 없는 진리와 선의 성격을 설명한다.
진정으로 찾고 고민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진리와 선은
자동인출기의 물건처럼 돈을 넣고 누르면 나오는 인스턴트 식품이 아니다.

끝없는 노력과 연구, 자기 성찰을 통해야만 진리에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다.
수많은 빌라도들이 잘못된 선과 도덕의 잣대를 휘둘러
올바른 정신을 좀먹게 하는 현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진리와 선은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니콜라이 게는 말해준다.
조금만 주의력을 흩트려도 거짓이 참이 되는 세상이니
어둠 속에 있는 선과 진리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데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는 거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의 정신에 큰 감화를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
톨스토이는 내 안에 존재하는 이성으로 선을 찾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
선한 목적으로 삶을 정진하는 것이 인생이라 말한다.
일신의 안위만을 추구해선 안 되며, 만인의 행복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말하고, 교회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은 신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예수 또한 인간이므로 그를 신격화해 기도하는 것을 엄격히 반대했다.
사치와 무위도식의 생활에 빠져 있는 타락한 특권 계급을 부정하고
그들을 인간 사회에 불행을 가져다주는 악의 근원으로 규정지었다.
또한 폭력을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를 부정하며
그들을 지지하는 교회 세력 , 학문, 예술 모두를 부정한다.

톨스토이를 지지한 니콜라이 게는 <진리란 무엇인가>에서
그리스도는 어둠에 갇혀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 즉 선하고 도덕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자를 대변하고,
극단적 이기심으로 자신의 안위만에 급급한 기득권층을 빌라도로 표현했다
어둠 속에서 두 손이 포박된 예수처럼 진리와 양심을 외치는 자는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차갑고 어두운 현실 속에 내팽개쳐질 때가 많다.
바로 진리와 선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야 올바른 진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빛이 참다운 진리임을 빌라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빌어 분명하게 전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이 고독하고 힘들더라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톨스토이의 가르침이며 니콜라이 게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사실주의화가들 가운데는 종교적 주제를 다룬 여러 명의 화가들이 있는데, 
그들은 사회, 정치적인 내용을 기독교적 주제에 대비시켜 
그 당시 부패하였던 정부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런 분야에서 활동한 화가 가운데 탁월한 사람이 바로 '니콜라이 게'이다.

그는 특히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 램브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니콜라이 게는 렘브란트로부터 빛의 효과나 그밖의 기법만을 배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생활의 심오한 드라마를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보고 있는 '진리란 무엇인가?'는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던진 짤막한 질문이다. 
오른편 자색옷을 입은 그리스도는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억압에서 민중들을 구원하는 
하층 사회의 꿈을 대표하고, 자색옷은 희생, 헌신, 겸손, 고귀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밝은 빛을 받아 황금색 옷이 빛나는 빌라도의 모습은 
권세, 귀족적 에고이즘, 교만함과 세속적 영화를 의미하고 있다.

물론 권세 있는 편이 오후에 어지러울 정도로 비추이는 태양빛을 받아 
그 당당함이 더욱 빛나고 있지만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눈초리만큼 빛나고 있지는 않다. 
지금 그리스도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는다. 
빌라도는 이런 예수를 답답하게 생각하며 절반은 조롱 섞인 말투로 묻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네가 주장하는 진리란 겨우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냐?"
라고 묻고 있지만, 예수는 이 질문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 진리가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진리는 변명할 수가 없다. 
진리는 그 자체인데 어떻게 진리가 변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진리가 변명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침묵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고, 
침묵은 곧 진리가 오히려 심판하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도 빌라도가 내밀은 손은 예수를 문책하면서 가리키는 손이 아니라, 
예수를 지칭하면서 <당신이 진리입니다!> 하는 듯이 보인다. 
사실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정죄하고 재판정에 예수를 세웠지만 
예수를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들을 심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리이고 그 말씀이 진리이셨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해는 짧다. 
작가는 지금은 비록 빌라도가 오후의 눈부신 태양빛을 받고 있지만, 
곧 빌라도는 어두움에 묻힐 것이고 그 밝은 빛은 
예수님 쪽으로 비추어서 영적인 빛을 발할 것이다. 
이미 그것은 그리스도가 빌라도를 바라보는 눈초리에서 그 빛을 읽을 수가 있다. 
또한 그러한 염원은 작가의 마음 속에서 소원하는 민중을 대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다. 항상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므로.
“ …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 (요한복음 18:37)

 

Maria, sister of Lazarus, meets Jesus who is going to their house, 1864.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와 그들을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82 x 64 cm. Tretyakov Gallery Room 31

 

Last Supper. 최후의 만찬. 1863.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누군가 서 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찾아온 듯하다가 어둠 속에 놀란 베드로의 눈과 
호기심 가득한 제자들 사이에 예수가 마지막 만찬의 침상에 비스듬이 누워 있다. 
다가 올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다빈치의 것과는 다른 분위기가 당시의 분위기를 실감하게 한다.
“유다의 검은 그림자가 일으킨 화면의 균열은 마치 <죄와 벌> 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균열이라는 뜻의 단어 ‘라스콜’에서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최후의 만찬 Last Supper, 압권이다. 
이제 최후를 맞아들여야 하는 예수의 고뇌에 찬 표정, 즐거운 작별의 만찬 모습은 아니다. 
그 순간 모든 제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불길한 어둠 속의 거음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다.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전통적인 최후의 만찬 그림은, 서구식 식탁 의자에 두루 앉아 있는 모습이지만, 
니콜라이 게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께서 비스듬히 누워 마지막 만찬을 맞고 있다. 
당시 유대인의 만찬 모습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가 절절한 사실주의 화가이듯이, 얼마나 고증에 충실했던 화가였는지를 보여준다. 

 

Christ and his disciples entered the Garden of Gethsemane after the Last Supper, 1889.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게세마네 동산으로 향해 가는 그리스도.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65.3 x 85 cm. Tretyakov Gallery Room 31

 

The Garden of Gethsemane. 게세마네 동산. 1869 년에 사작하여 1880년 완성.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He is Guilty! The Judgment of the Sanhedrin, 그는 유죄다, 산헤드린의 재판. 1892.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잡혀온 예수의 초라한 모습과 벽에 기대어 있는 예수를 능멸하듯 조롱하는 제사장들 
'변방 갈릴리의 촌놈 너는 유죄다!'

 

Conscience, Judas. 양심, 배반자 가롯 유다. 1891.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149 x 210 cm. Tretyakov Gallery Room 31

'유다의 가책' 그날 밤 유다이다. 

은화 30 냥을 돌려주기 위해서 어두운 길을 다시 걸어가고 있다.  
저기 길 끝에 돈을 돌려 줄 유대 제사장 무리들이 보고 있다. 밤 그람자보다 더 어두운 밤. 
겟세마네에서 기도의 모습과 가롯 유다의 가책, 상대적으로 정면 모습과 뒷면 모습이다. 


이 대조적인 그림은 고뇌에 찬 모습과 한없이 격리되어 외로운 모습이라 할까? 
특히 담요를 둘러쓰고 혼자 서서 가롯 유다가 바라보는 시선 방향 멀리 
어둑한 어둠 속 횃불들 사이로 체포되어 붙들려가는 예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 속에 어깨를 움츠리고 저멀리 한 무리의 사람을 바로 보고 서 있는 사람은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 넘기고 그 죄책감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롯 유다다. 
예수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일신을 위해 갈등하는 
유다의 양심의 빛깔은 온통 까맣게 칠해져 있다. 
작가는 일상의 갈등 속에서 부정한 양심에 손을 들어주는 우리의 모순을 
유다의 검은 욕심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다.

 

Golgotha, 골고다. 1893. oil on canvas. by Nikolai Ghe. Tretyakov Gallery Room 31

세 도둑과 함께 십자가 처형장 해골의 언덕으러 끌려가는 두려움과 고통이 가득하다.
홍포를 입은 예수가 골고다 처형의 언덕에서 로마 병정의 형 집행 지시에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이다. 
맨발의 예수 옆에 서 있는 함께 처형될 두 사람 강도의 시선 처리 모습도 이채롭다. 
한 강도는 이미 체념했고, 다른 한 강도는 아직도 노려보는 시선이다. 
그 사이에 예수의 모습은 아아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바로 처절한 두려움 앞에 선 우리들의 모습이라 할까? 

사형을 언도받은 예수가 다른 두 명의 사형수와 함께 

처형장을 나아가는 모습에서 예수가 보여주는 파토스는 절절하다. 
왼편에 보이는 형리의 손이 그를 가리키자 

예수는 공포에 사로잡혀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 하고 있다. 
진리와 정의를 외쳐 왔지만 예수 또한 한사람의 인간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기에 스스로 죽음을 택해 
저 자리에 선 저 남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임을 말하고 있다. 

 

The Return from Christ's Entombement (study). 그리스도를 매장하고 돌아가는 일행들 (습작) 1859.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Harbingers of the Resurrection, 부활의 조짐. 1867.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부활의 조짐' 동이 트는 새벽, 창을 든 로마 병정과 천사의 날갯짓. 
니콜라이 게가 부활의 상징과 은유의 그림을 그렸다. 

부활을 예감케 하는 그림이다.
부활의 예감, 무덤을 지키는 로마 병정들의 실루엣, 

왼쪽 방향에서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막달라 마리아, 
시선 방향으로 멀리 예사롭지 않은 새벽 먼동이 무엇인가의 특별한 조짐을 예감하게 한다. 

예수 부활의 그 새벽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맞선다 할까? 대단한 표현이다. 
사실주의 화가인 니콜라이 게를 상징주의로 불리는 것을 대변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in Jerusalem,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1859. 
by Nikolai Ghe.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31

앙토냉 아르토 (Antonin Artaud)는 천사를 가장 성스럽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손에 뱀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가장 깊은 고요만이 바늘이 떨어지는 침묵을 깨는 소리가 
가장 커다랗게 지축을 흔드는 소란이라고 표현했다. 
니콜라이 게의 그림들 속에서는 극단적인 사실이 표현되면서도 
그것이 다시 절대적인 상징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료들은 아직 미술사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그림들은 지금 이해되고 있는 해석이나 가치 이상으로 
앞으로 더욱 중요한 의미를 던져 줄 것이 확실해 보인다.

니콜라이 게는 다른 러시아의 이동파화가들 처럼 창작의 자유와 예술을 통한 

민중 교화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를 원했다. 
이동파 화가들은 그림을 들고 순회 전시하며 
"민중아 꺠어나라"를 주창한 행동주의적 미술 경향이다. 
그들은 단정하고 기품 있고 보수적인 기존 아카데미 미술교육에 반발하며 
더 낮은 곧으로 그림이 달려가기르 원했다.

​그들의 기존 회화의 틀을 벗어나 창작의 자유와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역점을 두었으며. 
이 혁명적인 표현운동에는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핵심물들이 참여하였다. 
따라서 미에 대한 탐구보다 사회적.윤리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화풍도 대중에게 더 잘 어필할 수 있는 사실주의을 지향했으며 
삶의 진실이라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이들 작품은 시골과 도시의 일상생활 장면이 주요 테마가 되었고 
일상과 축제 속의 농민과 도시민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그림을 들고 민중 곁으로 달려가는 '이동전시협회'를 결성함으로써 
마침내 미술사에 이동파(Peredvizhniki)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동파의 목표는 예술을 관료행정으로 부터 해방시키고 
예술을 통해 민중을 교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Christ and Nicodim. 1889.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 at Peterhof, 1871.
표트르 1세 대제께서 황제의 궁전 페테르호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이 작품은 역사화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호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 대제의 여름궁전이다. 
표트르 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 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당당한 풍채에 다리를 꽈아 자신감을 드러낸 대제에 비해 
큰 키에 마른 체형의 황태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나약한 안성울 풍긴다.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노려보는 대제의 얼굴에서 비극이 암시된다. 
좌우로 나누어진 구도에 의한 대립적 인물 배치 역시 마찬가지다. 
비극에 대한 반복적인 복선을 설치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황제에 오르기 전 형인 이반과 동생인 소피아를 물리치고 어머니 세력을 덥고 황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는 총병들의 반란을 격은 후 형, 동생과 그 세력을  척결하고 자리를 공고히 굳혔다. 
그리고 그 힘으로 서구화 정책을 밀고 나가기 시작한다.  
그후 유럽과의 통로 확보를 위해 스웨덴과 2차례 전쟁을 거쳐 
발트해 연안을 확보하고 상테폐테르부르크를 건설하였다. 

황태자 알렉세이는 표트르 대제와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렉세이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알렉세이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자라났으며 옛 러시아 방식을 숭상했다. 
대제의 개혁을 탐탁치않게 여겼던 보수주의자들은 알렉세이를 지지했다.

이를 알고 있는 포트르대제는 아들에게 생활방식을 바꾸던지 
제위 계승을 포기 하던지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아들은 결국 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국외로 도피한다. 
이것은 단순한 부자간의 갈등이 아니고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사상적 대립이었다. 

알렉세이는 1718년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국가 반역죄로 체포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문하고 자백을 받아냈으며, 사형선고라는 잔혹한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알렉세이는 사체로 발견된다. 
그림 속에서 벌어진 논쟁의 결론은 일단 역사가 증명한다. 
제위 계승의 포기와 해외 도피로 이어진 알렉세이의 행보가 반증하듯이 
그에게는 표트르 대제의 정책을 뛰어 넘을 대안이라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이 그림이 그려진 1870년대 지식인들을 행동하게 했던 것은 서구주의자들의 사상이었다. 
벨렌스키, 헤르첸, 바쿠닌의 사상은 헤겔 등의 독일 관념론에 기초한 것이며 
훗날 사회주의 혁명의 기반이 되는 마르크시즘 역시 서구 사상이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진보와 발전, 이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법이다. 
헤르첸의 영향을 받은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은 혁명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 
민중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는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운동가들은 민중들의 몰이해와 불신 속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진리는 현실에서는 결코 단선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승리는 표트르 대제의 것이었지만, 
그는 아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인륜에 어긋난 아버지였다.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부정과 악에 대해서 예술이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가 확신을 할 수 없었던 니콜라이 게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대문호 톨스토이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 철학의 신봉자가 된다. 
화단에 복귀한 그가 남긴 명작 가운데 하나가 예수와 빌라도의 대화를 그린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작품이다.

1870년 역사 주제의 이 그림 '페테스부르크에서 알렉세이 황태자를 심문하는 표토르 대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같은 쟝르의 다른 그림들은 냉대를 받자 니콜라이 게는
'화가는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야지 그림을 판다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니콜라이 게는 우크레이나에 농장을 사서 이주했다. 
게는 톨스토이와 친하게 됐고 그의 철학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코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대제의 여름궁전이다 .
표트르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아버지 표트르대제는 자신감 있는 자세로 앉아 아들을 매섭게 노려본다.
바닥에 떨어져 잇는 문서는 방금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테이블에 한손을 엊고 비스듬히 서 있는 아들 알렉세이의 허약한 실루엣은 
아버지의 당당한 풍채와 비교가 된다.

표트로대제의 발밑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체스판 모양의 바닥은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 종국에는 반란까지 획책한 
아들을 심문하는 대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의 초상. 1884.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와 친하게 됐고 그의 철학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후기의 게는 종교화와 인물화로 돌아왔다. 
그의 신약에 근거한 종교화는 진보파의 환영을 받았으나, 동시에 보수파의 비난을 받았다. 

니콜라이 게는 1894년, 63세의 나이로 그의 농장에서 죽었다. 
애석하게도 그가 평생을 걸려 그린 많은 작품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던 관계로 그가 그린 모든 작품은 그에게 매달 작은 봉급을 보내주던 
스위스의 후원자 베아트리체 (Beatrice de Vattville)에게 모두 넘겼다. 
그러나 후원자였던 베아트리체가 1952년에 세상을 떠났을 떼, 
그녀의 성에서는 니콜라이 게의 그림이 단 한 작품도 발견되지 않았다. 


무서워서 처치한 것은 아닐까? 
세월이 지나고 1974년이 되어서야 미궁 속의 그의 그림 중 몇몇 작품들만 
스위스의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되었다. 
1990년대부터 러시아 정부가 직접 나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중심으로 
니콜라이 게의 작품 수집에 나섰다. 
러시아 국가 은행의 적극적 자금 지원으로 니콜라이 게의 그림들을 
보이기만 하면 모두 구입에 나섰지만, 아직도 그의 그림 대부분은 사라졌고 
여전히 존재 미상, 미궁인 작품이 대부분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작품 역시 '레플리카', 모작이 대부분이다. 

 

Portrait of Natalia Petrunkevich. 나탈리아 페트룬케비츠의 초상. 1892~1893.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retyakov Gallery Room 31

 

Portrait of Shestova with Her Daughter. 1859. 쉐스토바와 그녀의 딸.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Vineyard at Vico. 1858.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Marble Quarry at Carrara, 1868.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Portrait of the Author Alexander Herzen, 1867.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Portrait of the Physiologist Moriz Schiff, 1867.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Portrait of Joseph Daumangé, 1868.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Portrait of the Historian Nikolay Kostomarov, 1870.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31. 니콜라이 게(Nikolai Ghe) 작품 전시실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Self-portrait, 자화상. 188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은 1844년 러시아의 추구예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때 고향 추구예프의 이콘 화가 

부나예프(Bunakov)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19세 되던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예술장려협회의 미술학교에서 데생 교육을 받았다. 
이듬해인 186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의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를 만났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를 이끈 지도자이자 시대를 주도하는 예술가로 
그는 레핀에게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각인시켰다.

레핀은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아카데미 졸업 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그는 이것으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레핀은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유학을 미룬 채 이 장면을 그리는 데 매달렸다. 
3년 뒤에 탄생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각각의 인물 속에 개성 넘치는 성격과 
다양한 삶의 흔적, 강인함과 절망, 비극적인 러시아의 상황을 담아낸 수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레핀은 1873년 5월 유럽으로 향했다. 
비엔나, 베니스, 로마를 방문한 그는 파리에 자리를 잡았다. 
1874년 파리에서는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레핀은 인상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예술의 흐름과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옹호했다.

레핀은 1876년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여 <성직자>, <황녀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 등 러시아적 가치와 전통에 바탕을 둔 작품을 발표했다. 
1877년 추구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온 레핀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의 영지 아브람체보를 자주 방문했다. 
이곳에는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Tretyakov) 등 예술가 및 재력 있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레핀은 이념적으로 자유로웠던 아브람체보의 분위기를 즐겼고, 

이 모임의 가장 활동적인 회원이 되었다.

1882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옮긴 레핀은 이동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이동파는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러시아 사회를 통찰력 있게 묘사한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은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역동적인 삶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삶 속에 내재된 다양한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유형지에서 고향의 집으로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간의 긴장된 심리 상황이 날카롭게 포착되어 있다.

레핀은 초상화의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고골(Nikolai Gogol) 등을 비롯한 문학가, 
무소륵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Vladimir Stasov) 같은 예술 비평가, 
그밖에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다.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 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았다. 
레핀의 마지막 대작이 된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를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핀은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왼손으로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이전의 명성에 걸맞는 작품에는 미치지 못했다. 
레핀은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보냈다. 
그리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레핀이 거주하던 쿠오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1948년 레핀의 이름을 따 ‘레피노’로 개칭되었다.

 

Krestny Khod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Gubernia. 쿠르스크 지방의 십자가 행렬. 1883. 
by Ilya Repin. oil on canvas. 280 x 17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십자가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1880–1883년) 
​1880년에서 1883년 사이, 3년여에 걸쳐 완성된 이 이 작품은 쿠르스크 지역의 
코렌나야 수도원 (Korennaya Monastery)에 모셔진 신령한 기적의 성상
 '쿠르스크 성모상 (Our Lady of Kursk)'과 십자가를 들고 

거리 행진 행사를 펼치는 대규모 러시아 정교회 축제다. 
거지와 장애인과 치안 경찰과 군인들을 위시해 지역 유지들이 앞장서서 
그 뒤를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며 대오를 이룬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어떻게 술 취한 취객이 

성상을 들고 있느냐 하며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 그림은 평범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러시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 행렬로, 

교회 안에 있는 이콘(성상화)이나 성물을 들고 행진을 하는 행사라고 한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어떤 신념으로 자리잡을 때는 분명 인간의 귀천을 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과 인간을 연결지어주는 인간이 개입하게 되면, 

이상하게도 계급에 따라 신의 사랑은 차별을 두게 된다.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은 재미있다.
이콘을 들고 걷는 귀부인은  자부심에 차 있으며, 

화려한 복장의 성직자는 지루한 것처럼 보인다. 
두 명의 여인은 조심스레 성물 상자를 들고 걷고 있다.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치안 담당자는 말을 타고 거만하게 가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채찍을 휘두르기까지 한다. 
지친 아이들은 동행하는 어른의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림의 왼쪽 하단, 그러나 화면에서 감상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그들이다.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레핀은 원래 십자가 행렬을 위해 숲을 지나는 배경을 선택했다고 한다. 
르노아르의 <물랭 드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에서 표현된 

일렁리는 햇빛의 효과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핀은 참나무 숲 속의 햇빛 효과를 포기한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인상을 포기하고 

화창한 하늘 아래, 뽀얀 먼지 일어나는 흙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레핀이 얻은 효과는 무엇일까? 바로 사람들이다. 

 

The Reply of the Zaporozhian Cossacks to Sultan Mahmoud IV. 1880.
by Ilya Repin. oil on canvas. oil on canvas. 67 X 87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터키 술탄 메메드 4세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 카자흐인의 회신(回信)'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가 카자크 족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에 대해 어마어마한 쌍욕이 담긴 답장을 보내서 복수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말대로 세상에서 일리야 레핀만큼 사람의 삶을 잘 표현해서 그린 화가는 없는 것같다.
저 많은 사람들이 다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데 너무 익살스러우면서도 너무 진지하고...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편지 한 장 쓰면서 쓰러지고 난리가 났다. 

16세기 몽골로부터 독립한 러시아는 모스크바랑 키예프랑 이런 곳에서 
몽골이 살고 있던 시베리아로 제국을 넓혀갔다. 
남쪽으로도 영토를 넓혔는데, 이제 독립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던 때라 
아직 제대로 만들어진 체계가 없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이 그림 역시 레핀의 주특기인 굉장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권한을 등에 업고, 시베리아 등 각종 미개척지를 돌아다닌 자유분방한 민족답게
그들 얼굴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친다.
그림의 배경인 조롱거리로 답장을 쓰는 현장답게 편지를 쓰는 서기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타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도를 가진다.

가운데 탁자위에서 글을 쓰는 서기는 정작 이 중요한 현장에서 답장을 쓰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건만,
그의 모습은 안경쓴 샌님같은 모습에 복장도 시커먼 것이, 별반 중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않게 한다.
작가가 신경써서 연출한 중요한 인물들은 탁자를 중심으로 배치된 코사크족 인물 개개인들임을 알 수 있겠다.
진지한 모습, 익살스런 모습, 박장대소하는 모습, 담배 피우는 모습 등 개개인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하다.

주요한 얼굴 모습은 모욕적 답장을 씀으로 인해 비웃음이다.
근데 이렇게 많은 인물들 개개인의 웃는 얼굴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다.
마치 실제 현장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이다.

또한 인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비류도 사실주의가 묻어난다.
유목민족 특유의 야생적인 복장과 러시아의 투르크 양쪽의 영향을 받은 듯한 장비와 장비에 그려진 문양.
거칠게 살아왔음을 반증하는 멋드러진(?) 수염과 쭈글쭈글한 주름.
지금 쓰고 있는 답장이 여차하면 거대한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음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하하하 웃고 있는 것이 이들의 와일드함과 저항정신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1676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트 4세는 현재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던 
자포로제 코사크인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다. 
자포로제 코사크는 코사크의 한 일파로 드네프르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그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등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서 여러 번 싸운 적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 술탄의 편지 내용인즉슨
"술탄이자, 무함마드의 아들, 해와 달의 형제, 하느님의 손자이자 총독으로,
마케도니아와 바빌론, 예루살렘, 상 이집트 왕국의 지배자, 황제 중의 황제, 군주 중의 군주,
패배할 줄 모르는 훌륭한 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그리스도교의 확고한 방어자로써 짐은 그대들 자포로제 코사크인들이 
어떠한 저항없이 자발적으로 짐에게 복종할 것과 무의미한 공격으로 짐의 심기를 건들지 않을 것을 명하노라"

쉽게 말해 "순순히 항복하고, 국경지대를 찝적거리지 말도록"이란 말을
아주 거창하게 타이르듯 내지른 편지다.
이에 대해 코사크인들은 콧방귀 뀌듯이 답장을 쓴다.
편지를 쓰는 현장이 박장대소의 장이 될 정도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느냐 하면,
10원짜리 대사가 난무하는 무지막지한 편지였다.

 -자포로제 코사크 형제들이 술탄에게
터키의 임프이자 똥같은 악마들의 친구이자 형제이며 루시퍼의 꼬붕인 술탄아. 
얼마나 병신같은 기사길래 니 후장에 붙은 고슴도치 한마리도 족치지 못하냐? 
악마의 똥같은 짬 찌끄레기야. 너 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기독교 형제들을 이기지 못할꺼다. 
우린 니네 좆만한 쫄따구들이 무섭지도 않고, 땅에서든 바다에서든 박살내서 니 애미를 따먹어 주마! 

너는 바빌론의 설걷이꾼, 마케도니아의 마부, 예루살렘의 양조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염소와 떡칠 새끼, 
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새끼,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창남, 카먀네트의 망나니, 
그리고 이 모든 세상에서 가장 골빈 놈이다. 
신 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의 쥐가 난 좆 대가리, 돼지 주둥아리, 
당나귀 엉덩이에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의 대갈통이나 달고 있고 니 애미와 할 씨발새끼야!

이것이 너같은 좆만한 새끼에게 주는 우리 자포로제 형제들의 답장이다. 
너는 기독교의 돼지에게 먹이를 줄 정도도 안되거든? 
이제 끝을 맺는데, 우리는 달력 그딴거 안키워서 오늘이 몇 일인가 몰라. 
달은 하늘에 있는 것이고, 몇 년인가는 책에 적혀있고, 날짜는 니가 있는 동네와 똑같다. 
우리 똥꾸녕이나 쭈욱 빨아라!
-코사크의 수령 이반 시르코와 자포로제의 형제들-

어쨌든 이 편지를 보내고 나서도 메흐메트 4세는 별반 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당시는 이미 다른지역과의 전쟁으로 너무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편지 자체가 코사크인들에게 한번 크게 패하고 나서 보낸 것이기에
다시 전투를 치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터키와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으르렁거린 역사적 사실의 한가운데에서
이 정도의 역작을 그려낸 일리야 레핀에게 박수를 보낸다.

3, 6m가 넘는 이 대형 그림은 2년 여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 술탄 (재위 1648-1687)의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한 그림 타블로이다. 
이 그림을 본 알렉산드르 3세는 감탄하면서 즉석에서 3만 5천 루블을 하사했다. 
이 금액은 러시아 황실 그림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의 그림 값이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들은 러시아의 생생한 역사 현장을 극명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미술관과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국립 미술관을 장식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Tsarevna Sophia Alexeevna in the Novodevitchy Convent. 1879.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감금된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45 x 202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이상적 군주란 어떤 사람일까. 
나라를 잘살게 만들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애틋하게 살핀 왕을 
우리 역사에서 찾는다면 사람들은 단연 조선조의 세종을 꼽을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세종은 충무공과 더불어 흠결을 찾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이다. 
그에게는 ‘대왕’이란 칭호가 따라붙는다. 
‘대왕’이란 이름이 익숙한 군주로는 민족의 영웅 광개토대왕도 있다. 
그는 상세한 행적을 알기 힘든 고대사의 인물이지만, 한때 우리가 동북아시아를 
호령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이 좁은 땅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적 스케일을 확장시켜준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이 두 군주의 업적들을 몽타주하여 러시아 역사에 대입했을 때 
로마노프 왕조의 제4대 차르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를 떠올리게 된다면 좀 무리가 있을까. 
‘대제’가 이룬 성과를 나열하자면 너무 길다. 
요컨대 군사·행정·산업·교육·종교 등 전 방위에 걸친 서구화 개혁을 통해, 유럽 변방의 이류 국가 
‘모스크바대공국’을 세계 열강 ‘제정러시아’로 환골탈태시킨 것이 바로 그다. 
역사를 만들어 온 주체는 한 사람의 군주가 아니라 민중이란 명제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역사가 이만큼 한 인물의 업적에 의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러시아의 거장 일리야 레핀은 1879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공주>를 내놓았다. 
화가는 그로부터 약 180년 전 아름다운 노보제비치 수녀원 어느 방 안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탁자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은 표트르 대제의 이복 누나 소피아 공주이다. 
번쩍거리는 치장이 그녀의 높은 신분을 나타내고 있지만 어딘지 퇴락해 보인다. 
사자처럼 위풍당당한 모습과 부릅뜬 눈매가 사뭇 위협적이지만 어딘지 서글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지금 무려 아홉 해 동안 이 수도원에 갇혀 지내는 신세인 것이다. 
게다가 오른쪽 창밖에는 한 남자의 주검이 매달려 있다. 
심상찮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소피아 알렉세브나(Sophia Alexeevna)의 전성시대 
표트르 대제의 부왕인 로마노프왕조 제2대 차르 알렉세이에게는 
두 명의 왕후와 그들이 낳은 많은 자녀들이 있었다. 
제3대 차르 표도르 2세는 알렉세이 사후에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1682년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뜬다. 
따라서 후계자는 자연히 수많은 형제들 가운데에서 찾게 되었다. 
차르가 죽었을 때 같은 어머니 마리아 소생으로 여섯 남매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부왕의 후처 나탈리아가 낳은 이복동생 삼남매가 생존해 있었는데 표트르가 그 가운데 하나였다. 
왕후를 배출한 두 가문은 차르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한다. 
한쪽이 승리하는 순간 다른 쪽은 멸문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를 파국적 상황이었다.

여기서 사태는 일단 표트르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었다. 
러시아정교회의 최고위자인 총대주교 요아킴이 각 계급의 대표들과 뜻을 모아 
표트르를 차르로 선포해 버린 것이다. 
차르 알렉세이의 첫 부인 마리아의 소생으로 16세의 이반이 있었지만 
병약하여 왕의 재목이 아니었고, 둘째 부인 나탈리아의 아들 표트르는 
아직 10살에 불과했지만 건강하고 군주로서의 자질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이반의 장성한 친누나 소피아 공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소피아 공주의 외가 밀로슬라브스키(Miloslavsky) 가문은 
표트르의 외가 나리쉬킨(Naryshkin) 가문이 왕자 이반을 살해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스트렐치 근위대는 
표트르의 친척과 우호 세력 40여 명을 살해한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긴급히 모인 고위성직자와 정부 관계자들은 
타협책으로서 이반과 표트르를 공동 차르로 옹립한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표트르가 죽지 않고 차르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민심이 그에게 상당히 쏠려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공동 차르’는 허울뿐인 자리였다. 
실제 권력은 공식적으로 섭정이 된 소피아가 틀어쥐게 된다.

1698년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감금된지 일년 뒤의 소피아 알렉세에브나 황녀, 
그녀의 친위대가 처형당하고 시녀 전부가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를 묘사한 작품이다. 

그림 속에 나타나는 여성들은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찬미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다. 
아름다움과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자태, 

그 내면에 산재한 고고함이 뭇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경우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샤갈의 그림, 클림트의 그림 등을 보면 

사랑하는 직접적인 대상으로의 여성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세 번째는 의인화 된 여성이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문학 속 주인공으로서, 현실 속에 포치된 타자적 시각에 의한 여성이다. 
물론 이밖에도 여성은 여러가지 의미로서 그려진다.

그렇다면 그림 속 여자가 가장 고통스럽거나 정말스러울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어떠한 연유로 절대적 위치에서 강제로 벗어났을 때 느끼는 분노로 

이성을 조절하지 못할 때가 아닐까 싶다. 
장희빈이 그러했고 서태후가 그러했음만 보아도 이는 타당성이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리얼리즘을 논할 때 거론되는 몇 안 되는 동유럽권 화가이자 
19세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독보적인 존재인 일리야 레핀의 그림 

소피아 알렉 셰에브나 황녀 정말 무시무시한 표정이다.
무언가 증오에 찬 나머지 붉게 이글거리는 눈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읽어 내게 하고 
꽉 다문 입술은 백 마디 말 보다 강인하게 다가온다. 
자세는 매우 당당하고 심지어 패기마저 넘쳐 보인다. 덤빌테면 덤벼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 황녀가 처한 당시의 입장은 상당히 불안했다​.

황금빛 의상을 걸치고는 있지만 험악한 표정을 잔뜩 짓고 있는 이 여성은 

러시아 표트르 대제 (즉, 러시아 노마노프왕조 제 4대 황제)의 친누나이다. 
그런 그녀가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원래는 표트르와 또 다른 동생 이반과 함께 1682년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표트르와의 동맹이 깨지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소피아는 동생에게 대항하려다 실패하면서 결국 감금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일종의 쿠데타가 미수로 그친 셈이었다. 

쿠데타의 실패는 곧 동생의 지독한 앙갚음임을 의미했다​.

그림 뒷편을 보면 참수되어 목이 내걸린 병사를 볼 수 있다. 
황녀를 지켜주던 근위병이지만 이미 죽음에 이르렀다. 
대제는 이렇게 누나의 수족들을 눈 앞에서 하나씩 죽여 나갔고 
누나마저 서서히 죽음에 이르도록 평생 수도원에서 놓아주질 않았다​.
이를 기록하는 몸종 (그림 왼쪽 뒤)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듯 앉아 
조심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당시의 상황에 어쩔줄 몰라한다. 

이는 진실에 관한 두려움이다. 
죽음에 이를 사람이나 이를 보는 사람이나 모두 불안정하긴 매한가지이다​.

이 그림은 권력이라는, 인간이 결코 벗지 못할 굴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한 때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절대 권력자였으나 

그녀의 현재는 덧없는 무상함이 감돌 뿐이다. 
또한 그녀의 미래는 대략 짐작해도 결코 밝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일리야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역사를 조명하면서도 
인간이 가야할 길이 결국 어디로 나 있는지를 일러주려 한다​.

 

Refusal of the Confession. 고해를 거절하다. 1879~188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8 x 48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죽음이 현실 앞에 놓여 있어도 자신의 신의를 버리지 않고 
조국을 위해 생을 다한 것임을 당당히 밝히는 혁명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남루한 모습의 혁명가지만 결의에 찬 표정이 압권이다.

 

Dragon Fly. Portrait of Vera Repina, the Artist's Daughter. 188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4 x 111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Composer Anton Rubinstein. 작곡가 안톤 루빈스타인 초상화.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및 지휘자 안톤 루빈스타인

 

Portrait of the Artist Vasily Surikov. 화가 바실리 수리코프 초상화. 188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an old woman. 1870.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7 x 111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Vera Repina, 187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0 x 7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Actress Pelageya Strepetova as Elizaveta.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Hunchback 1.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3.5 x 64.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곱추소년 1> (Hunchback)

레핀의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십자가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곱추 소년이다. 
소년은 레핀이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이었다. 
그는 절름발이 곱추소년을 위해 여러 장의 습작을 남겼는데, 다양한 표정을 연구한 흔적이 보인다. 
그 중에서 그는 슬픈 표정이 아니라 무표정한 듯 앞으로 열심히 나가는 소년의 모습을 선택했다. 
소년의 얼굴에는 행렬에 낀 사람들의 오만함도, 지루함도 없다.  

 

Portrait of V. E. Repin, the Artist's brother. 186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8 x 86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Actress Pelagey Strepetova.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0 x 61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Artist Vasily Polenov. 187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5 x 89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Artist Ivan P. Pohitonov.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3.5 x 64.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Yuriy Repin, the Artist's son.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5 x 110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poet and slavophile Ivan Sergeyevich Aksakov. 1878.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6 x 97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utting a Propagandist Under Arrest. 1890~189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5 x 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Surgeon Nikolay Pirogov.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3 X 64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Narratorb of the Folk Tales V. Tschegolionkov. 1879.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Warrior XVII century. 1879.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9. 일리야 레핀 작품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30. 일리야 레핀 작품 전시실

 

Ivan the Terrible and His Son Ivan on November 16, 1581.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죽인 뒤 오열하는 이반뇌제. 1581년 11월 16일', 188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254 x 19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이반 뇌제'라고도 불리우는 이반 4세는 

특유의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남다른 정치를 펼친 인물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대귀족들의 궁정 혁명과 전횡으로 

숱한 고초를 겪은 까닭에 의심이 많고 성품이 잔인했다. 
그의 어머니 옐레나 대공비는 그가 친정에 나서기 전 

권력 투쟁의 희생양으로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그의 치세 동안 치위대는 그의 사촌 형제와 친척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한때 중앙집권화를 위해 개혁을 단행하고 ‘타고난 예지와 뛰어난 언변 

그리고 평론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되기도 한 그였지만, 궁중의 어두운 유산인 

암투와 음모 때문에 광신적인 사람, 모든 일에 의심을 품는 기인이 되었다. 
이 최초의 공식 차르는 심지어 아들을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아들의 처소에 들른 이반 뇌제는 

며느리인 황태자비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며느리가 입은 옷이 매우 무례하고 음란해 보였다. 
진노한 뇌제는 갑자기 임신한 며느리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내가 지르는 비명에 놀란 황태자가 허겁지겁 현장으로 달려왔는데, 
그 모습을 본 뇌제는 더욱 분이 치밀어 쇠지팡이로 아들의 관자놀이를 내려쳤다. 
결국 그렇게 유일하게 믿던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것이다. 

이반 4세가 자신의 황태자인 이반을 

지팡이로 폭행해서 죽인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작품이다. 
제목의 '1581년 11월 16일'은 이반 4세가 이 일을 저지른 날짜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러시아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고 레핀도 예외가 아니었다.

 
레핀은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이 이반 4세의 일화를 통해 

그 광기와 공포의 감정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반 4세의 모델은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어느 노인의 얼굴을 

레핀이 발견해서 따왔고, 황태자 이반의 모델은 당시 레핀이 매우 아꼈던 

작가인 프세블로드 가르쉰(Всеволод Гаршин)의 얼굴에서 따왔다고 하고 다른 설도 있다.

그런데 레핀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그림은 

러시아에서 이반 4세를 재평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이반 4세는 단순히 난폭한 폭군이란 평가만 받았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이반 4세를 대단히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인간미'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반 4세의 또다른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가 단순한 

폭군이 아닌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군주라는 재평가를 내리게 된 계기가 된 것.

이 그림은 살해 장면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해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이반 뇌제의 모델로 레핀은 시인 겸 화가였던 그리고리 먀소예도프를, 
왕세자의 모델로는 작가 프세볼로드 가르신을 택했다고도 한다.

그 후 일어난 일들이 물론 모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년 후 정신이 이상해진 가르신은 계단으로 떨어지면서 세상을 마감했다. 
계단에서 떨어질 때 그가 부딪힌 머리 부분은 불운한 그림에서 왕세자가 피를 흘리는 부분과 같았다.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죽인 뒤 오열하는 이반뇌제 Detail (부분)

공포에 질린 이반과 아들 이반
잔인했지만 용맹하고 현명한 황제였는데 

한번은 이반 4세가 왕자의 집을 저녁에 방문했하고 한다. 
황제를 맞는 왕자비는 겉 옷을 한 벌만 입고 있었다. 
당시 풍습은 손님을 맞이할 때는 세 벌의 옷을 입어야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황제는

며느리를 폭행하고 왕자가 이를 말렸고 격한 성격의 자제력이 없었던 이반 대제는 

언쟁을 하다가 뜻하지 않게 맏아들 이반을 죽이게 된다.

황제는 순간적으로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왕자의 관자노리를 내려쳤다. 
이 장면은 바로 머리를 후려 치고 난 그 다음 장면이다. 
그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아들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손으로 상처를 누르고 있으며, 
죽음을 앞둔 황자는 무력한 손으로 주단을 짚고 있다.

이렇듯 레핀은 이반 대제의 신경질적인 외모와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아들을 죽인 자의 폭군의 비극을 여실히 폭로하였다. 
바로 그 순간 벌어진 사태를 바로잡고자 하는 희망으로 아들을 향해 몸을 던진다. 
레핀은 종종 인생에 있어서 극도로 긴장된 열정으로 인해 발생되는 비상한 사건들에 흥미를 보였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깨닫고 정신이 나간 아버지 이반 4세와 한 팔로는 아버지 어깨를 잡고 
한 팔로는 바닥에 팔을 기댄 아들 이반의 비극적인 모습이 펼쳐있다. 
새빨간 피가 스며 나오는 듯한 화면의 색채는 이 작품의 정서를 더욱 고양시켜준다. 
또한 이 작품 속에서 보이는 섬세한 심리, 조형적, 색채적인 뉘앙스에 대한 레핀의 붓놀림은 
이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켜준다.

극적 묘사에 탁월했던 레핀의 감성은 정말 최고이다. 
실제로 아들 이반은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이반 4세가 죽고 나서 왕조는 바뀌고 만다. 
광기어린 폭군이 자신의 손으로 황태자를 죽였고, 이로 인해 사실상 왕조의 대가 끊기게 된다. 
폭군 사후 대혼란의 시대가 도래하자 찬탈자들은 남은 폭군의 아들을 암살하고, 
병약해서 후손을 생산할 수 없는 폭군의 다른 아들을 허수아비로 세웠다가 그가 죽자 왕국을 빼앗는다.
하지만  “폭군의 암살된 아들은 사실 도망쳤고, 다른 소년이 대신 살해된 것”이라는 소문을 통해 
가짜 왕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고 정권을 얻었던 소설 같은 역사가 있다.

 

[영상] 아들을 죽인 미친 왕, 뇌제 이반 4세

 

Il'ia Efimovich Repin: They Did Not Expect Him. Unexpected Visitors. 1884~1888.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60.5 x 167.5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거실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여기는 그의 집이다. 

이 비쩍 마른 남자는 퀭한 눈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모자를 든 손을 몸 안쪽으로 붙인 경직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노파가 그를 보고 엉거주춤 일어난다. 

놀란 모습이 역력하다. 이 노파는 그의 어머니다. 
거실 구석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뒤를 돌아본 여인은 이 상황에 경악하는 모습이다. 

이 여인은 그의 아내다. 
테이블 한쪽 구석에서 어린 여자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아이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반면에 그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의 표정은 한결 밝다. 
이 아이는 기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하녀로 보이는 여성은 문고리를 붙잡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예기치 않았던 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출현. 그 긴장의 순간. 
창문에서 들어온 은은한 햇살이 이 가족과 축축한 실내를 감싼다.  
거실로 보이는 공간 좌측의 큰 창문과 

정면으로 열린 문 뒤쪽 작은 창문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온다.
빛으로 인해 그림의 전체적인 색조는 밝고 따뜻하고 부드럽다.
이렇게 채색함으로써 돌발 상황이지만 

이 순간이 기본적으로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암시한다. 

​목에 스카프를 매고 낡고 긴 모직 코트를 걸친 초췌한 남자가 

한 손에 모자를 움켜쥐고 거실 안으로 들어온다.
지나치게 길어 구겨진 코트의 소매가 두 손목 아래를 덮었다. 
낡은 부츠와 다듬지 않은 턱수염, 

마른 얼굴은 그의 모습을 더욱 초췌해 보이게 만든다.
약간 머뭇거리며 서 있는 남자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신하지 못하는지 눈빛에 불안한 기색이 스친다.

​의자에서 황급히 일어나 엉거주춤 서 있는 검은 옷의 노파는 

돌아온 남자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의 아들임을 바로 알아본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녀의 얼굴 전체를 볼 순 없지만, 

지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는 헤아리고 남는다.
그녀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귀환이 몰고 온 놀람과 흥분에 휩싸여 
떨리는 왼손을 의자로 가져가 몸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 같다.
어머니는 곧 늙은 몸을 천천히 가누며 아들에게로 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림 오른쪽 테이블에 두 아이가 앉아 있다.
어린 여자아이는 뜻밖의 남자의 등장에 어리둥절해 하고, 
또 겁을 먹은 듯 숙제를 하다 말고 낯선 방문자를 유심히 지켜본다.
이 아이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 아이가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가 집을 떠났거나, 
아니면 너무 어릴 때 헤어져 그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불안감에 어깨를 움츠리고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이 아이의 태도와는 아주 다르게 아이 오빠는 곧바로 반가움에 겨워 활짝 웃는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아버지임을 확인하자마자 소년의 두 눈에는 기쁨의 빛이 가득하다. 

​아이들 뒤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던 젊은 여인은 오래전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던 남편이 
불쑥 찾아오자 깜짝 놀라 급히 연주를 멈추고 몸을 돌려 그를 응시한다. 
그녀의 표정에는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가족들 중  아무도 그가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 뒤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하녀로 보이는 인물이 거실 쪽 문을 열고 서 있다.
아마 남자에게 문을 열어준 사람이 이 하녀일 것이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주인집 가족들이 집안으로 들어간 

낯선 남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녀 뒤로 빼꼼히 얼굴만 보이고 있는 사람은 요리사로 생각된다. 
그녀는 단지 이 상황이 무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레핀은 그림의 주인공 격인 혁명가 아들과 그의 노모를 

세로줄 마루에서 출발해 하녀와 요리사, 열린 거실문을 통과해 

창문으로 이어지는 축선의 중심에서 좌우로 조금 벗어나게 배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인물에 더 집중시키고, 
정서적인 공감의 강도를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노렸다. 


끝으로 이 그림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표정과 눈빛이 보여주는 느낌일 것이다. 
레핀은 그가 만족할만한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 표현을 얻기 위해 
주요 인물들을 네 번이나 고쳐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통해서 레핀은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진리를 위해 몸 바친 

그리스도에 비견될 수 있다고 진술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대의(大義)가 옳고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 역시 
가족들의 반응이 어떨까 걱정하며 서 있는 그림 속 남자처럼 결국 러시아 민중들의 
평가와 검증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오랜 유형(流刑)에서 어느날 갑자기 집에 나타난 혁명가.
유형지는 분명 춥고 황량한 머나먼 시베리아였을 것이다. 

레핀의 그림을 통해 그는 어떤 출신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을까를 추정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피아노를 포함한 집안의 집기와 거실 내부의 인테리어, 하녀와 요리사를 부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걸 보면 그는 최상류층의 귀족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류 이상의 사회경제 기반을 가진 계급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인민주의주의자, 공화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로 상당한 지식과 

문화적 소양을 지닌 인텔리겐차였을 거라는 단서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러시아의 역사를 보면 초기의 혁명운동인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로드니키들, 
그리고 이후의 직업 혁명가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혹은 중류 이상의 출신 성분을 가진 
인텔리겐차 (러시아의 특수한 지식계급 집단)들이 많이 분포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은 혁명가가 먼 유배지에서 가족에게 돌아온 광경, 그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시대적 정황을 감안하면 이 남자는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반체제 농민운동과 관련된 혁명가일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아주 오랜 시간 유배지에서 고생한 후 집에 돌아왔다.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는 작품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나는 타라스 셰브첸코(Tarasa Shevchenka, 1814~1861)의 초상화이고, 
다른 하나는 니콜라이 네크라소프(Nikolay Nekrasov, 1821~1878)의 초상화다. 
두 사람 모두 러시아 차르 체제 하에서 고통받던 농민을 위한 계몽 운동에 헌신했던 시인이다. 
특히 셰브첸코는 10년 간의 유배 생활 끝에 사면되어 집에 돌아왔으나 
유배 생활에서 얻은 중병으로 인해 외로움 속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이 두 시인으로 대표되는 혁명가를 위한 일종의 헌사가 될 것이다. 

벽면에 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두 초상화 사이 가운데 있는 그림은  ‘골고다(Golgotha)’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가 두 초상화 사이에 존재하게 함으로써 
레핀은 러시아 혁명가들의 투쟁과 고통을 순교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이 가족이 이 그림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혁명가는 가족과 떨어져 있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긴장된 그 순간에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은 
이 가족과 러시아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못 박히심’의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화가는 러시아 혁명가들의 투쟁과 고난에 종교적 순교의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레핀은 1885, 1887, 1888년 3차례에 걸쳐 방으로 들어오는 주인공의 얼굴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이 그림에 심혈을 기우려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직접적인 사회 상황 반영과 간접적인 심리 표현이 돋보이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레핀은 그 다음을 철저히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마주치는 상황은 오랫동안 부재하던 가족 누군가의 급작스러운 출현과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으로 인해 아직 긴장이 깨지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그림의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가족들은 기다리지 않았지만 갑작스레 돌아온 아버지 또는 언니를 
가슴으로 맞이할 준비로 곧 부산해질 것이다.
딸 아이는 재빨리 가방과 코트를 받아들 것이고, 막내 아들은 편안한 자리를 권할 것이고, 
부인은 따뜻한 차를 준비할 것이다.
물론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언니와 아버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할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의 근거는 이들이 정치적, 사회적 신념 체계를 초월해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위대한 사실에 기인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Detail (부분)

예기치 않은 방문객’은 레핀의 심리 묘사가 화폭에 그대로 펼쳐진 작품이다. 
1883년 알렉산더 3세가 즉위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를 갔던 사람들에 대해 사면령이 내려졌다. 
니콜라이 체르니세프스키가 21년 만에 시베리아에서 집에 온 것을 맞는 
식구들의 표정과 시선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긴장감이 다 드러나 있다.

유형지에 고생을 한 주인공은 창백하고 야윈 얼굴이지만 눈빛은 아직 살아 있다. 
그를 유형지로 몰아넣은 이념이 아직도 그의 눈빛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문을 열어 준 하녀의 표정은 놀람과 황당한 표정이 함께 떠 있다.

농노 제도의 폐지 이후, 러시아 농민의 삶은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이에 진취적인 성향의 교사, 의사, 점원, 노동자가 앞장서서 러시아의 독자적인 농민 자치 공동체를 기초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믿고 '브 나로드(v narod)'운동을 펼쳤다.
그림 속의 아버지 또한 브 나로드 운동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당했고, 
어느 날 예고 없이 집으로 불쑥 들어온 것이다.

초췌한 몰골로 집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이 사람을 누가 이 집안의 가장으로 생각했겠는가.
가족들은 마치 낯선 이방인처럼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남편을,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맞이하고 있다.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 치열하게 교차하고, 경계심과 놀라움이 분주히 섞이는 지점에서
우리도 서서히 상황을 공감하게 된다. 
어떤 예술 장르가 이처럼 단시간에 이와 같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Detail (부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늙은 어머니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고 
피아노 앞의 아내는 아직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이 안 된 듯한 표정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Detail (부분)

공부를 하다가 낯 선 사람 그러나 처음 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표정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밝은 표정의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빛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Detail (부분)

거실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여기는 그의 집이다. 

이 비쩍 마른 남자는 퀭한 눈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모자를 든 손을 몸 안쪽으로 붙인 경직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The Reply of the Zaporozhian Cossacks to Sultan Mahmoud IV (study). 1880.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7 x 87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가 카자크 족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에 대해 어마어마한 쌍욕이 담긴 답장을 보내서 복수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말대로 세상에서 일리야 레핀만큼 사람의 삶을 잘 표현해서 그린 화가는 없는 것같다.
저 많은 사람들이 다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데 너무 익살스러우면서도 너무 진지하고...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편지 한 장 쓰면서 쓰러지고 난리가 났다. 

16세기 몽골로부터 독립한 러시아는 모스크바랑 키예프랑 이런 곳에서 
몽골이 살고 있던 시베리아로 제국을 넓혀갔다. 
남쪽으로도 영토를 넓혔는데, 이제 독립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던 때라 
아직 제대로 만들어진 체계가 없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이 그림 역시 레핀의 주특기인 굉장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권한을 등에 업고, 시베리아 등 각종 미개척지를 돌아다닌 

자유분방한 민족답게 그들 얼굴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친다.
그림의 배경인 조롱거리로 답장을 쓰는 현장답게 편지를 쓰는 서기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타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도를 가진다.

가운데 탁자위에서 글을 쓰는 서기는 정작 이 중요한 현장에서 답장을 쓰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건만, 그의 모습은 안경쓴 샌님같은 모습에 복장도 시커먼 것이, 

별반 중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않게 한다.
작가가 신경써서 연출한 중요한 인물들은 탁자를 중심으로 배치된 

코사크족 인물 개개인들임을 알 수 있겠다.
진지한 모습, 익살스런 모습, 박장대소하는 모습, 

담배 피우는 모습 등 개개인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하다.

주요한 얼굴 모습은 모욕적 답장을 씀으로 인해 비웃음이다.
근데 이렇게 많은 인물들 개개인의 웃는 얼굴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다.
마치 실제 현장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이다.
또한 인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비류도 사실주의가 묻어난다.
유목민족 특유의 야생적인 복장과 러시아의 투르크 

양쪽의 영향을 받은 듯한 장비와 장비에 그려진 문양.
거칠게 살아왔음을 반증하는 멋드러진(?) 수염과 쭈글쭈글한 주름.

지금 쓰고 있는 답장이 여차하면 거대한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음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하하하 웃고 있는 것이 

이들의 와일드함과 저항정신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1676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트 4세는 현재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던 
자포로제 코사크인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다. 
자포로제 코사크는 코사크의 한 일파로 드네프르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그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등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서 여러 번 싸운 적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 술탄의 편지 내용인즉슨
"술탄이자, 무함마드의 아들, 해와 달의 형제, 하느님의 손자이자 총독으로,
마케도니아와 바빌론, 예루살렘, 상 이집트 왕국의 지배자, 황제 중의 황제, 군주 중의 군주,
패배할 줄 모르는 훌륭한 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그리스도교의 확고한 방어자로써 짐은 그대들 자포로제 코사크인들이 
어떠한 저항없이 자발적으로 짐에게 복종할 것과 무의미한 공격으로 짐의 심기를 건들지 않을 것을 명하노라"

쉽게 말해 "순순히 항복하고, 국경지대를 찝적거리지 말도록"이란 말을
아주 거창하게 타이르듯 내지른 편지다.
이에 대해 코사크인들은 콧방귀 뀌듯이 답장을 쓴다.
편지를 쓰는 현장이 박장대소의 장이 될 정도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느냐 하면,
10원짜리 대사가 난무하는 무지막지한 편지였다.

-자포로제 코사크 형제들이 술탄에게
터키의 임프이자 똥같은 악마들의 친구이자 형제이며 루시퍼의 꼬붕인 술탄아. 
얼마나 병신같은 기사길래 니 후장에 붙은 고슴도치 한마리도 족치지 못하냐? 
악마의 똥같은 짬 찌끄레기야. 너 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기독교 형제들을 이기지 못할꺼다. 
우린 니네 좆만한 쫄따구들이 무섭지도 않고, 땅에서든 바다에서든 박살내서 니 애미를 따먹어 주마! 

너는 바빌론의 설걷이꾼, 마케도니아의 마부, 예루살렘의 양조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염소와 떡칠 새끼, 
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새끼,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창남, 카먀네트의 망나니, 
그리고 이 모든 세상에서 가장 골빈 놈이다. 
신 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의 쥐가 난 좆 대가리, 돼지 주둥아리, 
당나귀 엉덩이에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의 대갈통이나 달고 있고 니 애미와 할 씨발새끼야!

이것이 너같은 좆만한 새끼에게 주는 우리 자포로제 형제들의 답장이다. 
너는 기독교의 돼지에게 먹이를 줄 정도도 안되거든? 
이제 끝을 맺는데, 우리는 달력 그딴거 안키워서 오늘이 몇 일인가 몰라. 
달은 하늘에 있는 것이고, 몇 년인가는 책에 적혀있고, 날짜는 니가 있는 동네와 똑같다. 
우리 똥꾸녕이나 쭈욱 빨아라!
-코사크의 수령 이반 시르코와 자포로제의 형제들-

어쨌든 이 편지를 보내고 나서도 메흐메트 4세는 별반 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당시는 이미 다른지역과의 전쟁으로 너무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편지 자체가 코사크인들에게 한번 크게 패하고 나서 보낸 것이기에
다시 전투를 치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터키와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으르렁거린 역사적 사실의 한가운데에서
이 정도의 역작을 그려낸 일리야 레핀에게 박수를 보낸다.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Aleksander III receiving rural district elders in the yard of Petrovsky Palace in Moscow. 
모스크바의 페트롬스키궁에서 농촌지역원로들을 맞이하는 알렉산르드 3세. 1885~1886.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8 x 48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writer Ivan Sergeyevich Turgenev (1818-1883). 187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16.5 x 8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작가 투르게네프 (Ivan Sergeyevich Turgenev 1818-1883)의 초상
예술아카데미 학생이었던 레핀과 투르게네프의 만남은 예술아카데미의 작업실이었고
이때 레핀은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을 막 완성한 때였다
이들은 레핀이 아카데미 연수생으로 파리에 체류할 때 더욱 가까워 졌는데 물론 초상화를
그리면서 오래 면대하며 이야기와 토론을 하는동안 가까워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늘진 얼굴에서 오히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와 반대편 눈동자의 생동감, 
투박한 듯 섬세하게 그려진 손과 고상한 무늬의 의자, 대상의 성격을 하나하나 펼쳐내어 
꾹 꾹 눌러 놓은 듯 한 배경의 붓자국은 투르게네프의 낭만성과 소탈한 성격을 잘 나타내며 
레핀이 이 초상화를 성공적으로 완성하였음을 보여준다.

관객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한 표정과 대 문호의 존재감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 초상화는 
투르게네프가 파리에 체류하던 시기에 러시아의 거상이자 예술후원가인 트레티야코프의 주문으로 
당시 역시 파리에 있던 일리야 레핀에 의해 완성되었다. 

 

Portrait of the Composer Modest Musorgsky.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7 X 6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러시아의 음악가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 술에 취한 모습을 그렸다는데... 
레핀은 당대 러시아 예술가들의 초상화-인물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188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8 x 12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Pavel Tretyakov, Founder of the Tretyakov Gallery. 1883.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창립자 파벨 트레티야코프 초상화.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6 x 98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Author Alexey Pisemsky. 1880.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Composer Mikhail Glinka. 188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17 x 98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Autumn Bouquet. Portrait of Vera Repina. 1892. by Ilya Repin. 
oil on board. 65 x 111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Baroness Varvara Ikskul von Hildenbandt. 1889.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1 x 169.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Military Engineer Andrey Delvig.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08 X 86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painter and sculptor Mikhail Osipovich Mikeshin. 1888.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7 x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Artist D.N. Kardovskiy. 1896~189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1.5 x 7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Nadezhda Repina, the Artist's Daughter. 1900.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7 x 9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Author Leonid Andreev. 190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6.5 x 76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Poet Afanasy Fet.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2 x 6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V. Repin, musician, brother of the artist. 1876.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Doctor Constantine Franzevich Yanitsky. 186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Artist Grigory Myasoedov. 1886.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physiologist Ivan Petrovich Pavlov. 192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48 X 5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atiana Rechinskay.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7 X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오똑한 콧날, 살짝 벌린 아이 같은 입술과는 대조적으로 
살며시 내려뜬 그녀의 깊은 눈이 우리를 궁금하게 한다.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공업자이며 예술 후원가였던 S. I. 마몬토프의 조카인 
타티야나 마몬토바를 그린 이 작품은 러시아의 국민화가이자 
인물화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일리야 레핀의 드문 여성 초상화이다.

거장의 솜씨답게 18살 아름다운 소녀의 풍부한 감수성을 붓질 하나하나에 살려낸 화면에서는 
그녀의 오랜 고민과 조심스러운 희망이 엿보이고 단정하고 품위 있는 옷차림에 
곱슬머리를 단단히 올려 묶은 현재의 그녀가 꿈꾸듯 표현되어 있다.

예술사가 그라바르는 “구성의 참신함과 놀라운 기법, 섬세한 붓터치로 인해 
레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작품의 하나”라고 평했다. 
카키의 의자덮개와 벽의 색감이 정말 부드럽게 잘 어울린다.
우울한 모습의 표정 표현이 리얼하다.

 

Evening party.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86 x 116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members of State Council Ivan Logginovich Goremykin and 

Nikolai Nikolayevich Gerard. Study (습작). 1903. 
by Ilya Repin. oil on canvas. 45 x 63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Sergey Vitte. 1903.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0 X 8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V. K. Menk. 188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Duel between Onegin and Lenski. 189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30. 일리야 레핀 작품 전시실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28. 바실리 수리코프 작품 전시실

러시아 역사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화가는 바실리 수리코프다. 
수리코프의 역사화는 유장하고 장엄한 분위기와 다소 음울하고 사색적인 색조가 특징이다. 
그래서 누가 봐도 '러시아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인상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리코프의 장엄함과 음울함에는 분명 저 대륙의 광활함과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가 담겨 있다.

다른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러시아적 풍미가 충만하다. 
이 작품은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위해 어떤 핍박도 마다하지 않은 용감한 귀족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건초가 깔린 수레 위에 쇠사슬로 묶인 모로조바. 
그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비웃는 사람도 있지만, 안타까 워하고 슬퍼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지체 높은 여인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추운 눈밭을 가르며 무서운 형벌의 운명을 지게 되었을까?

바실리 수리코프는 '이동파' 일원으로 레핀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주로 대형 크기의 러시아 역사와 관련된 주제를 즐겨 그렸으며,  
사실주의 역사화의 거장으로 칭송 받았다.  
1877년부터 모스크바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시베리아의 카자흐 가정에서 태어난 수리코프는 조상들의 파란만 장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이주민' 혹은 '일당 노동자'라는 의미를 지닌 '카자흐'는 무거운 세금과  
강제노역을 피해 변경으로 달아난 농노와 그 자손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품팔이, 수렵, 약탈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등  
용맹성과 강인한 개척정신을 보여주었다.  
수리코프는 이런 조상들의 삶을 의식하고 자신의 예술 속에서  
민중적이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가치를 중시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

 

Tretyakov Gallery Room 28. 바실리 수리코프 작품 전시실

이 작품은 그리스 정교의 구교와 신교의 분쟁을 테마로 민중적 주제를 제시한 그림이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구교(분리교) 즉, 러시아 구세력을 상징하는 
모로조바 부인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그림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선택 받지 못한 계층으로 삶의 고통, 소외감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델의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굴곡있는 러시아의 힘든 역사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러시아 여인들의 굳은 의지가 그림에 절절히 배어 나온다. 
이 작품은 여성 심리 묘사가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히며 레핀과 함께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끌어 올린 대표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림은 17세기 러시아의 종교 대분열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교회 개혁과 교권 확대를 위해 러시아 교회의 전례를 
그리스 식으로 개편하려 하자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들고 일어났다. 
후자는 옛 의식을 고수하는 점에서 구교도로 불렸는데, 이들 구교도 뒤에는 일부 대귀족이 있었다. 
이들은 구교도 운동을 통해 구습을 지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차르 알렉세이의 중앙집권적 권력을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반면 차르는 니콘의 종교개혁에 기대어 전 동방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를 원했다. 
양쪽 다 열정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그 충돌은 요란했으며, 
결국 차르는 구교도들을 파문하고 화형에 처했다. 
구교도의 중추인 대주교 아바쿰(1621-1682)도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와 같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2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분신자살하는 등 
구교도들은 격렬히 저항했으며, 끝내 짜르도 이들을 완전히 '박멸'할 수 없었다. 
이들의 신앙은 면면히 이어져 18세기에는 그 권리를 다시 인정받았고, 
1905년에는 이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허락하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림의 여주인공 모로조바는 종교 대분열시 구교도 편에 섰던 대귀족 
프로 코피 소코부닌의 딸이자 역시 특권 귀족인 모로조프의 부인이다. 
여동생 우르소바와 더불어 옛 신앙을 수호하려고 개혁에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보로프스크 수도원 감옥에 유폐되어 삶을 마감했다. 
모로조바는 구교 의 지도자 아바쿰과 왕래하며 그의 가족을 재정적으로 도와 차르의 분노를 샀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녀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아니, 확신이라기보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빛을 발한다. 
수레 곁에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쫓아가는 동생 우르소바는 신앙적 열정 속에서도 초탈한 듯한 인상을 보여 준다.

겉으로 드러난 빛깔은 어떠하든 이 두 사람의 신앙 목표는 같다. 
이들의 신앙 앞에 무릎 꿇고 가호를 빌거나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모스크바 거리의 사람들은 절대 권력에 억눌린 민중의 한을 대변한다. 
지독한 탄압 속에서도 구교도의 신앙이 농민과 상인, 장인 등 민중의 마음을 사고 
그들의 연대 의식과 저항 정신과 만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포착된 그림이다. 

그림은 분리파의 거물이었던 대귀족 모로조바가 어느 겨울날 먼 귀양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사슬에 묶인 채 짚으로 바닥을 깐 초라한 썰매에 몸을 맡긴 모로조바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  
그는 오른손을 들어 두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 내지르며 저항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화면 우측에는 분리파들이 안타깝고 슬픈 얼굴로 그를 배웅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개혁파들이 유쾌한 얼굴로 패배자를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대립의 패배자는 분리파 뿐이었을까.  
니콘은 러시아정교회를 과도한 민족주의로부터 구하고 교회의 일체성을 강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투쟁의 과정에서 파문한 수많은 인재들을 상실함으로써 
교회의 역량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우위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하다가  
1667년 주교회의에서 파면되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1681년 아바쿰보다 오히려 한 해 먼저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실행한 사회전반의 개혁에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정교회의 수장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복속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 정교회는 두 번에 걸친 내부분열을 거치면서  
그 화려했던 권력을 세속 군주에게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Self-Portrait. 1879. 바실리 수리코프 자화상.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 80 X 1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바실리 수리코프 (Vasili Ivanovich Surikov)는 1848년 시베리아의 카자흐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졸업 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베로네제,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의 그림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들의 색채 기법을 받아들였다.

1870년대의 러시아 제실(帝室)아카데미에 대항하여 회화의 리얼리즘을 지향한 진보적 그룹인 
'이동파(移動派)'에 들어가 레핀(Ilya Repin, 1844~1930)과 함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주로 러시아 역사에서 소재를 찾았으며, 대표작에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
<베료조프에서의 멘시코프><스테판 라진>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파웰 트레치야코프가 구입을 했고, 
그의 후원으로 수리코프는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7년 사랑하던 아내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자 수리코프는 
그림을 포기하고 종교에 빠져들었으며 고향인 시베리아로 떠났다. 
오랜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몇 년 뒤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191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Boyarynya Morozova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1887.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304 x 587.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모로조바(Feodosia Prokopiyevna Morozova ,1632–1675)는 귀족(okolnichi)인 
프로코피 소고브닌(Prokopy Feodorovich Sokovnin)의 딸로 열일곱 살에 
역시 귀족(boyar)인 모르조프(Gleb Morozov)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이 1662년에 사망하여 일찍 홀로 되었으나 그녀의 지위는 여전했다고  한다. 
전례 개편 과정에서 구교도를 이끌었던 대주교 아바쿰 (Avvakum)이 모로조바의 정교회 신부였다. 
모로조바는 계급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구교도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동생 우르소바(Evdokia Urusova)도 구교도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르조바는 차르 알렉세이 1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1671년에 체포되어 보로프스키의 성 파프누티우스 수도원(St. Paphnutius Monastery, Borovsk)에 
감금되었고 그곳에서 1675년 1월에 일생을 마친다. 
이런 그녀의 일생은 구교도들에게 순교자의 삶이었을 것이다. 

레핀과 더불어 러시아 이동파의 대표적인 역사화가인 수리코프는 개편된 전례에 반대하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벌인 대귀족부인 구교도 모로조바가 끌려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건에 대한 세력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그녀의 주장이 뭔지가 모스크바 길거리의 설경과 함께 펼쳐져 있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이 반대파의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모로조바는 차르에 맞서다 수도원에 유폐돼 삶을 마감한 역사적 인물이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쇠사슬에 묶인 이 귀족 여성 주위에서 민중들이 눈물을 흘린다.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역사화는  
당대 현실을 향한 정치적 발언임이 분명하다.  -고명섭 한겨레신문 기자

까마귀처럼 새까만 옷, 창백한 낯색에 광기 어린 표정, 
이 강렬한 인상의 여인은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다. 
17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를 이루는 사건은  
바로 총주교 니콘과 사제 아바쿰의 대결이었다. 
교회에서 미신적 요소를 제거해 근대화한다는 니콘 주교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것은 교회 권력보다 교묘한 왕권강화정책이었다. 

사제 아바쿰은 교회 개혁에 반대하고 기존의 전근대적 종교의식을 옹호했다.  
사제 아바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박한 종교생활을 하던 기층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황제보다도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개혁이 단행되었고 아바쿰을 지지하던 구교도들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구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수리코프가 그리고자 한 것은 그녀의 순교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순교를 둘러싼 여러 반응들이다.  
그림 왼쪽에 이빨 빠진 하아버지와 그 옆의 남자는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어쩔줄 몰라하는 젊은 여인은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이고,  
그 옆의 여인도 고개를 숙여 숭고한 순교에 깊이 경배한다.  
마차 옆에 걸어가는 붉은 색을 입은 여인은 그녀의 동생인 우루소바 공작 부인이다.  
언니를 따라서 먼 길을 함께 거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은 그저 재밌다고 키득거린다. 

모로조바 부인을 싣고 가는 썰매는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비록 그녀에게 동감하더라도 검은 옷의 사제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두려움 없이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은 화면 오른편의 걸인이다.  
추운 겨울 맨발에 어깨의 맨살까지 드러난 참혹한 모습이지만 목에 걸린 사슬로 보아 고행승이다.  
오므라든 발가락은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를 실감나게 한다. 

수리코프의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장대한 서사성과 더불어 놀라운 장식성을 가지고 있어서  
베누아는 카펫의 그림 같다고 평했다.  
수리코프는 사실적인 장면 묘사를 위해 우르소바 부인의 진주 장식 모자,  
노부인이 걸친 금실로 수놓은 숄과 외투, 17세기의 의상과 장신구, 건물의 외관 등을 아주 섬세하게 재현해 냈다. 
화려한 러시아의 전통 의상은 흰 눈과 어울려 하나의 합창이 되었다. 
다양한 색채를 화면에 구사하되 하나의 톤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Young lady with his arms folded(Study to Boyarynya Morozova), 1885. 
by Vasili Ivanovich Surikov, oil on canvas. 46 x 35.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연습 작품
이 그림은 크기가 304 x 587.5 cm나 되는 대작이다. 
그림을 몇 개의 작품으로 나눠놓아도 될 정도로 생생하다. 
실제로 수리코프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부분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바실리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연습 작품 
실제로 수리코프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부분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Young lady with violet overcoat.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Young lady with blue fur coat. 1887.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Boyarynya Morozova,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Detail (부분 1)

그림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그림을 여러 개로 나누어 보았다. 
하나하나가 별도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림의 주인공인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이다. 그녀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다.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손은 두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늘 차르의 손에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이전처럼 두 손가락으로 기도하겠다"는 결의가 보인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2)

모로조바의 여동생인 우르소바(Evdokia Urusova)는 수레 옆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언니를 따라가고 있다. 
그녀의 눈빛을 보면 종교적 믿음과 삶을 초월한 듯한 인상을 준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3)

거지같은 모습을 한 수도승이다. 
한 겨울인데 헤진 옷을 입고 쇠사슬로 연결된 십자가를 걸고 있다. 
이 수도승 또한 손가락 두 개를 들고서 순교의 결의를 보이고 있다.

그림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모로조바와 같은 구교도이거나 
그녀의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민중들의 눈물을 동해서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4)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에서 정복이라고 하면 알렉산더와 칭기즈 칸을 떠올리지만 
21세기까지 “영토”의 의미로 정복을 완성한 나라는 러시아다.
레핀의 그림에 아들을 때려죽였다고 등장하는 이반 4세 바실리예비치 
(Иван IV Васильевич, 1530-1584)는 보통 그가 폭정을 펼쳤다고 해서 
이반 그로즈니 (Ива́н Гро́зный,Ivan the Terrible) 이반 뇌제(雷帝)라고 한다. 
러시아는 당시 1582년에는 시베리아 정복을 시작으로 동방 진출을 도모했고, 
1588년에는 발트 해 연안까지 진출하려다 패전하기도 했다. 

이반 4세의 류리크 왕조는 러시아 통지세력인 자신들에게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카이사르(Caesar, 케사르, 시저)를 본 따 차르(tsar)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하여 
차르의 시대를 열었지만 1598년에 표도르 1세가 사망하고 막을 내리게 된다.

1613년 이반 4세의 황후의 집안인 로마노프(Romanov) 가의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미하일 1세 차르로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차르의 전제 정치라고 하면 떠올리는 로마노프 왕조(Romanov dynasty)가 이들이다. 

로마노프 왕조는 지배구조가 혼란스럽고 영토가 좁았던 모스크바 차르국의 후반 시대 즉
"1613년 – 1721년 루스 차르국 시대"와 표트르 1세 (표트르 대제)에 의해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건국된 “러시아 제국 시대(1721년 – 1917년)”로 구분한다. 
이 과정에서 15세기만 해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가 
1894년까지 영토 확장을 거듭하여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태평양까지 진출하여 오늘날의 러시아 영토가 형성되었다. 

한마디로 러시아는 약 300여 년 동안 내부의 권력투쟁과 암투를 벌이며 
끊임없이 주변 국가와 민족들과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한 나라이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5)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는 로마노프 왕조의 2대 황제인 알렉세이 1세 
(Aleksey I Mikhailovich Romanov, 1629-1676, 재위: 1645-1676) 시기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알렉세이 1세 시기에 큰 사건 몇 개를 꼽자면 1649년에 농민들의 이동권을 박탈하여 
농민들은 땅과 지주에게 예속시키고 완전한 농노로 만들었다. 
그리고 1650년대 말부터 우크라이나를 편입하기 위하여 
폴란드와 발트 해 연안의 지배권을 놓고 스웨덴과의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 정부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부는 
재정 위기를 해결할 목적으로 소금세를 인상하고 담배 유통을 확대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은화 대신 동전을 유통시켜 통화량이 증가하면서,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 
당연히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가장 유명한 반란이 
바로 1670년대에 코사크의 농민지도자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의 봉기이다.

오늘 소개하는 “대귀족부인 모로조바”의 직접적 배경은 러시아인들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수정에 대한 갈등이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러시아 정교의 주도권을 누가 가질 것인가의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한 영향력 강화는 차르의 중압 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이미 이반 뇌제(雷帝)때부터 그리스 정교가 러시아로 오면서 나타난 
번역의 오류를 고쳐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있어 왔다. 
1649년에는 동방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전례에 이단적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여기에 새롭게 확장된 남부 슬라브 지방의 우크라이나인들 등을 교화시키기 위해 
단일한 올바른 전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도 충분했다. 


이런 시기인 1652년 알렉세이 1세와 교분이 깊었던 노브고로드 대주교 
니콘 (Nikon, 1605–81)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로 보내 그리스 전례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1653~1655년에 걸쳐 전례 수정 작업을 벌이고, 
1655년에 종교회의를 열거 전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6)

당시 개정된 내용은 상당히 많지만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성호를 두 손가락으로 긋던 것을 
세 손가락으로 긋게 하고, 예수의 철자를 Ісусъ에서 Іисусъ로 바꾸고, 
할렐루야도 두 번 외치던 것을 세 번 외치게 하였다. 
그리고 태양의 이동방향에 따라 교회 주변을 도는 예배의식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동안은 전례 개정에 동의하고, 실제로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대주교 아바쿰 (Avvakum, Petrovich, 1621~1682) 등이 대대적으로 반발하였다. 
반대파들은 너무 급격한 변화로 러시아 전통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 식을 대대적으로 도입한 것에 반발하였다.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기를 들었고 
차르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 계급들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농민과 상공인 지대의 사람들에게는 구교파 운동이 농노제와 
차르 지방관들의 횡포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생각되었다. 
결국 전례 수정을 둘러싼 갈등은 신교도 중심의 차르 지지 세력과 
구교도를 중심으로 한 일부 귀족과 농민들의 싸움으로 확장되었다. 
차르는 결국 반대파를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했다. 
구교도의 일부는 볼가 강을 건너가 숲 속에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차르의 정부군은 구교도들의 수도원과 공동체를 수년간 포위 공격했고, 
구교도들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분신자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이 갈등은 러시아 정부가 구교들의 권리를 인정한 18세기까지 이어졌고, 
감정의 골은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대격돌의 중심에 섰던 두 종교지도자의 마지막은 모두 비참했다. 
니콘은 한때 차르 알렉세이 1세와 함께 대주권자(Great Sovereign)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차르의 버림을 받아 1658년 총대주교직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알렉세이 1세는 1666년 종교 회의를 열어 공석이 된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에 
새 인물을 앉히고, 군주의 권력이 교회보다 강하다는 것을 공인받았다. 
그리고 니콘은 추방되고, 유폐되었다가 알렉세이 1세 사후에 모스크바로 돌아오지만 길에서 죽었다. 
구교도들을 이끌었던 아바쿰은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가 
겨우 모스크바로 둘아 왔지만 1682년에 화형 당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7)

그림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조바가 받는 고통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철모르는 아이들도 이 모습에 즐거워하고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8)

모로조바(Feodosia Prokopiyevna Morozova ,1632–1675)는 귀족(okolnichi)인 
프로코피 소고브닌(Prokopy Feodorovich Sokovnin)의 딸로 열일곱 살에 역시 
귀족(boyar)인 모르조프(Gleb Morozov)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이 1662년에 사망하여 일찍 홀로 되었으나 그녀의 지위는 여전했다고 한다. 
전례 개편 과정에서 구교도를 이끌었던 대주교 아바쿰 (Avvakum)이 모로조바의 정교회 신부였다. 
모로조바는 계급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구교도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동생 우르소바(Evdokia Urusova)도 구교도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로조바는 차르 알렉세이 1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1671년에 체포되어 보로프스키의 성 파프누티우스 수도원
(St. Paphnutius Monastery, Borovsk)에 감금되었고 그곳에서 1675년 1월에 일생을 마친다. 
이런 그녀의 일생은 구교도들에게 순교자의 삶이었을 것이다.
 
레핀과 더불어 러시아 이동파의 대표적인 역사화가인 수리코프는 개편된 전례에 반대하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벌인 대귀족부인 구교도 모로조바가 끌려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건에 대한 세력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그녀의 주장이 뭔지가 모스크바 길거리의 설경과 함께 펼쳐져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9)

반대파의 고통에 즐거워하고는 모습. 
우리나라에도 극히 일부 노인들이 이런 행위를 한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반대파의 저항을 극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역사화는 또한 수리코프가 살던 시대에 대한 발언임이 분명하다. 
차르의 전제 정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민중들의 각성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민주주의자들의 주장과 
러시아에 있어서 민주를 지향하는 예술로써 이동파의 열망이 들어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0)

레핀과 더불어 러시아 역사화가의 양대산맥인 수리코프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17세기 러시아 니콘의 종교 개혁시, 귀족 모로조프의 부인이던 모로조바는  
새로이 개편된 전례에 반대하고 원래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벌인다.  
결국 수도원에 유폐되어 생을 마감한 그녀는 여전히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성녀처럼 추앙되고 있다. 

그 현장을 생동감있게 그려낸 수리코프의 그림을 통해 좌우로 대칭되는 사람들의 행동과 표정,  
그 가운데를 모로조바가 쇠사슬에 묶여 무언가를 격렬히 호소하며 끌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의 겨울 길거리의 모습을 훌륭하게 묘사해 더욱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1)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이루는 것은 17세기 러시아 정교의 대분열이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교권을 확장하려 러시아 교회 전례를 뒤바꾸자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기를 들었다.  
교권 확장은 러시아 정교의 우두머리인 차르의 중압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반대파에는 차르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 계급이 포함돼 있었다.  
차르 중심의 신교도와 귀족 중심의 구교도는 끝까지 맞섰다.  
차르는 결국 반대파를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했다.  
2만명의 구교도가 분신자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구교도의 반차르 저항 정신은 이후 수백년 동안 도도히 흐를 반역의 저류가 됐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2)

주인공 모로조바는 차르에 맞서다 수도원에 유폐돼 삶을 마감한 역사적 인물이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쇠사슬에 묶인 이 귀족 여성 주위에서 민중들이 눈물을 흘린다.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역사화는  
당대 현실을 향한 정치적 발언임이 분명하다. 

까마귀처럼 새까만 옷, 창백한 낯색에 광기 어린 표정, 
이 강렬한 인상의 여인은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다. 
17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를 이루는 사건은  
바로 총주교 니콘과 사제 아바쿰의 대결이었다. 
교회에서 미신적 요소를 제거해 근대화한다는 니콘 주교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것은 교회 권력보다 교묘한 왕권강화정책이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3)

사제 아바쿰은 교회 개혁에 반대하고 기존의 전근대적 종교의식을 옹호했다.  
사제 아바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박한 종교생활을 하던 기층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황제보다도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개혁이 단행되었고 아바쿰을 지지하던 구교도들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구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수리코프가 그리고자 한 것은 그녀의 순교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순교를 둘러싼 여러 반응들이다.  
그림 왼쪽에 이빨 빠진 하아버지와 그 옆의 남자는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어쩔줄 몰라하는 젊은 여인은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이고,  
그 옆의 여인도 고개를 숙여 숭고한 순교에 깊이 경배한다.  
마차 옆에 걸어가는 붉은 색을 입은 여인은 그녀의 동생인 우루소바 공작 부인이다.  
언니를 따라서 먼 길을 함께 거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은 그저 재밌다고 키득거린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4)

모로조바 부인을 싣고 가는 썰매는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비록 그녀에게 동감하더라도 검은 옷의 사제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두려움 없이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은 화면 오른편의 걸인이다.  
추운 겨울 맨발에 어깨의 맨살까지 드러난 참혹한 모습이지만 목에 걸린 사슬로 보아 고행승이다.  
오므라든 발가락은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를 실감나게 한다. 

수리코프의「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장대한 서사성과 더불어 

놀라운 장식성을 가지고 있어서 베누아는 카펫의 그림 같다고 평했다.  
수리코프는 사실적인 장면 묘사를 위해 우르소바 부인의 진주 장식 모자,  
노부인이 걸친 금실로 수놓은 숄과 외투, 17세기의 의상과 장신구, 

건물의 외관 등을 아주 섬세하게 재현해 냈다. 
화려한 러시아의 전통 의상은 흰 눈과 어울려 하나의 합창이 되었다. 
다양한 색채를 화면에 구사하되 하나의 톤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The old woman with a patterned headscarf. 1886.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36 x 43.7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Head of Boyarynya Morozova. 1886. by Vasili Surikov. Series: Boyarynya Morozova. 

sketch and study 습작.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Wanderer. 1885. by Vasili Surikov. sketch and study 습작. 
watercolor.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28

 

Morning of the Strelets’ Execution.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1881.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379 x 218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바실리 수리코프의 첫 역사화 대작인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은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수리코프의 첫 번째 대작으로 표트르 대제(1672~1725) 시대의 친위병 반란을 소재하고 있다. 
표트르 대제는 권력을 잡자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고, 그 일환으로 친위병들을 정규군으로 대체하였다. 
그러자 정규군으로 편입되지 못한 기존의 친위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표트르 대제의 누나 소피아 공주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려 하지만, 
반란은 실패로 끝이 났고, 이들은 잔혹하게 진압 당했다. 
결국 소피아 공주는 1704년 47세로 죽을 때까지 노보데비치 사원에 위폐 당했고, 
봉기에 가담했던 친위병들은 색출되어 처형당했다.

1698년 최초의 친위병 공개 처형이 있었는데, 표트르 대제는 직접 5명의 친위병의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그 날 57명이 처형당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1182명이 처형당했다. 
그 후 10년 간 반란의 여파로 처형이 계속되었고, 그 일로 사형당한 이가 2000명에 달했다

수리코프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검은 수염의 친위병은 화가의 외삼촌인 스테판 페도로비치 토르고쉰이었고, 
여인들은 화가의 고향인 시베리아의 아낙네들이며, 친위병 노인은 시베리아 유형수였고, 
붉은 수염의 친위병은 고향의 묘지기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림 속 수레는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그곳에서 보고 그렸다고 한다. 
성 바실리 사원을 배경으로 붉은 광장에 결박당한 친위병들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이른 아침의 푸르스름한 전경 속에서 사형수들의 흰 셔츠가 더 두르러지게 보인다.  
여인의 절망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들의 죽음과 마딱드린 노파의 고통이 전해집니다. 
사형을 앞두고 있는 마지막 몇 분의 시간은 처연하기만 하다.

그림의 배경을 러시아 모스크바의 심장'붉은 광장'이다. 
표트르 대제가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치던 당시, 구조 조정 당한 
황제의 총병(스트렐치, 이반 뇌제 시절 창설된 사격부대)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반란은 순식간에 제압되고 2000명도 넘는 총병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처형 장면이다. 
그림의 속 뜻은 신구 세력의 갈등, 소통하지 않는 황실 세력과 

민중과의 갈등을 빗대 표현한 것이라 한다.

 

Morning of the Strelets’ Execution.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Detail (부분)

 

Menshikov in Berezovo. 베레조보의 멘쉬코프. 1883.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204 x 169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멘쉬코프 (Menshikov 1673-1729)는 군인이자 행정가로 

미천한 신분에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올랐던 인물. 
표트르 1세 사후 그의 왕비 카테리나를 통치자로 세우고 승승장구했고, 
그 후에는 어린 표트르 2세를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꾀했으나 귀족들의 반격으로 실각.  
부와 권력을 모두 잃고 베레조보에서 사망했다.  

이 그림은 몰락한 멘쉬코프와 가족을 그린 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며 권력 2인자였던 멘시코프는 
대제 사후에 실각하게 되고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그림은 시베리아로 유배된 권력자, 권세가 다한 권력자의 고독을 그린것이다. 
커다란 주먹을 불끈 쥐고 미래를 다짐하는 멘시코프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린 감이 있다. 
모든 것이 다 허무한 것임을 색바랜 갈색 톤의 색채가 대변해 준다. 


다만 아버지의 신세와 함께 시베리아에서 혹독한 삶을 살아야 하는 
딸들의 청춘만이 안타까울 뿐이다. 
풍요롭던 귀족의 삶에서 하루 아침에 조락한 그녀들의 삶에 병마저 찾아 온 것인지 
검은 옷을 입은 셋째 딸은 병색이 완연하다. 참으로 부질없는 과거의 부귀와 영화다.

수리코프의 역사화로 두 번째 작품이다.
수리코프의 첫 역사화 대작인 <총기병 처형의 아침>이 표트르 대제 시대를 강타했던 
‘신구(新舊) 러시아의 충돌’이 빚은 비극을 다루었다면, 

두 번째 작품인 <베료조프의 멘쉬코프>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 선봉에 섰던 

한 권력자의 몰락을 통해 본 ‘전제권력의 은총과 징벌의 변덕스러운 충돌’을 보여주었으며, 
세 번째 작품인 <귀족부인 모로조바>는 17세기 러시아 종교분열이라는 ‘신구교(新舊敎) 충돌’을 다루었다. 

수리코프의 초기 작품들이 포착하고 있는 일련의 충돌 지점들은 
수리코프의 역사적 사유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초기 삼부작이 서로 상이한 시공간 – ‘17세기 후반 모스크바 붉은 광장’, ‘18세기 초반 시베리아의 베료조프 마을’, 
‘17세기 후반 모스크바의 파프누티예프-보롭스키 수도원 가는 길’ – 을 각각 보여주고 있지만,
수리코프의 역사적 사유의 전개는 첫 작품인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쉐코토프(Н. Щекотов)는 <베료조프의 멘쉬코프>를 “수리코프의 표트르 대제에 관한 전반적인 사유의 지맥 중 하나”
라고 보았는데, 쉐코토프의 이러한 주장을 수리코프 작품 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고 본다. 

 

Tsarevna's visit of nunnery. 황녀의 수녀원 방문. 1912.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제목은 황녀의 수녀원 방문이지만 유배되어 온 황녀이다. 
뒷쪽에서 수근거리면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황녀는 유배되어서 그런지 멍하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19세기까지는 이처럼 사실적인 그림이 많았지만  20세기초가 되면서부터 급격하게 러시아 미술은 바뀌게 된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사진기술이 발달하면서 더이상 사물과 그대로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겠다. 
그래서 아방가드로라고 하는 추상화가 대표적인 화풍으로 자리잡게 된다.

 

The Apostle Paul explains the tenets of faith in the presence of King Agrippa, 
his sister Berenice, and the proconsul Festus 1875.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142 x 218.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사도 바울이 아그리파왕 앞과 그의 자매 베르니케와 

총독 페니투스 앞에서 믿음의 실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그리파는 바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짧은 시간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오.’” (사도행전 26:28)


바울은 주후 58년에 헤롯 아그리파 2세와 그의 누이 베르니케가 
카이사레아에 있는 로마 총독 포르키우스 페스투스를 방문하였다. 
총독 페스투스의 초대를 받은 그들은 
‘아주 뽐내는 태도로 사령관들과 그 도시의 저명한 사람들과 함께 공청실에 들어갔’다. 
페스투스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인 사도 바울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불려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추종자는 어떻게 해서 

총독 페스투스의 재판석 앞에 서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25:13-23)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사도행전 25:30-33)

 

Portrait of Olga Surikova, the artist's daughter. 1888.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80 x 1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Strelets with cap. 1879. by Vasili Surikov. sketch and study 습작. oil on canvas. 

 

Winter in Moscow. 1885.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Portrait of T. K. Domozhilova. 1891.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Portrait of L. T. Matorina. Cossack woman. 1892.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Portrait of A. I. Yemelyanova.  née Schreider. 1909.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37.5 X 4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Portrait of doctor A. D. Yesersky. 1910.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102 X 62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8. 바실리 수리코프 작품 전시실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반항아, 조선 청년들 가슴에 불을 지르다
광주 학생운동에서 전국 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 나아간 반항아 장석천

 

적색노조 사건으로 체포된 뒤 형무소에서 찍은 장석천(30살), 앙다문 입꼬리가 반달처럼 아래로 휘었다.

애써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반항기가 느껴진다. 임경석 제공

 

1929년 12월3일 새벽이었다. 경성 시내가 발칵 뒤집어졌다. ‘불온’ 격문이 대량 살포됐기 때문이다. ‘조선 학생청년 대중아 궐기하라’라는 제목의 전단을 비롯해 6종의 등사판 유인물이 발견됐다. “검거된 광주의 조선 학생을 즉시 탈환하라”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날 밤부터 시작해 새벽에 먼동이 틀 때까지 누군가가 그 격문들을 경성 시내에 있는 거의 모든 고등·중등 교육기관에 은밀하게 뿌렸다. 십수 개 대학,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교정에 동시에 살포한 것을 보면 한두 명의 소행이 아니었다.1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전 조선 각지에도 발송됐다. 도중에 발각되기도 했다. 광화문우편국과 경성우편국에선 지방 배송 직전에 8천 장 분량의 격문을 압수했다. 경찰은 제작·살포된 유인물을 모두 2만 장으로 추산했다. 등사판 인쇄만으로 그 분량을 제작하기란 쉽지 않다. 등사원지 한 장을 등사판에 걸고서 최대 500장을 뽑을 수 있었다. 그나마 숙련된 등사 기능공이라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2만 장을 인쇄하려면 최소한 등사원지만 40장을 제작해야 했다. 소수 인원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2만 장 유인물 전국 청년학생에게 발송되다

 

일본 경찰은 긴장했다. 경기도경찰부가 지휘를 맡고 시내 각 경찰서가 분주하게 활동을 개시했다. 아침 일찍 모리 종로경찰서장이 오토바이를 몰아서 도경찰부를 방문하는 것이 목격됐고, 다나카 도경찰부장을 비롯한 경찰 고위 간부들이 집결해 장시간 밀의를 계속한다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됐다. 마침내 전격적으로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신간회, 근우회,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청년동맹 같은 공개 사회단체 임원진이 속속 체포됐고 그 사무실과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중등학교 학생들도 잡아갔다. 그리하여 사건 발발 이틀 뒤인 5일 오전, 이미 혐의자 127명이 마구잡이로 끌려갔다.

 

마침내 5일 오후, 종로경찰서 요시노 도조 경부보가 이끄는 고등계 경찰이 단서를 잡았다. 고등계란 ‘대일본제국’의 치안을 위태롭게 할 정치범죄와 사상범죄를 전담하는 특수 부서였다. 20대 젊은이 10여 명이 보름 전부터 밀의를 거듭한 끝에 저지른 ‘범죄’임을 밝혀냈다. 신문기사 표현에 따르면 ‘견딜 수 없는 취조’로 인해 얻은 정보였다.2

 

가혹한 고문과 악행이 자행된 끝에 알게 된 정보임을 말해주는 은유였다. 하지만 주모자로 지목된 장석천, 차재정 등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경찰은 사방에 경계망을 풀어서 그들의 행적을 쫓았다. 수은동, 당주동, 간동, 적선동, 청운동 등 경성 시내 오래된 주택가 일대에 정사복 경찰이 조밀하게 깔렸다. “골목골목과 산과 개천 등 사람들이 통행할 만한 곳은 전부 파수를 세우고” 수색했다. 그 결과, 주택가 두 곳에 나눠 보관하던 등사판 6대가 압수됐다. 명백한 물증이었다.

 

장석천(27)은 결국 붙잡혔다. 차재정 등 동료 10여 명도 함께였다.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이 일어나고 사흘째인 12월5일 밤이었다. 그날 밤부터 종로경찰서에서 시작된 취조는 이듬해 1월5일까지 한 달간 계속됐다. 이 기간에 작성된 경찰 ‘신문조서’ 5회 분량이 남아 있다. 이 문서들이 실제 취조 상황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취조’와 극한적인 고통이 불꽃을 튀었겠지만, 이 문서들에는 평면적인 문답만 기재돼 있다.

 

취조 현장이 얼마나 격렬하고 극단적이었는지를 시사해주는 사건이 있다. 취조실에 갇힌 장석천이 몰래 예리한 단도를 지니고 있다가 발각됐다. 체포된 지 20여 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격문 사건의 주모자로 의심받는’ 그의 몸을 검사한 결과 “왼쪽 양쪽 바지 정강이에다가 보기에도 끔찍스러운 단도를 숨겨넣은 것”이 드러났다.3

 

취조 상황이 밖으로 흘러나온 이례적인 기사였다. 언제 어떤 경로로 흉기를 구했는지, 어떤 목적으로 그것을 몸에 지녔는지 추궁당했겠지만, 후속 보도는 더 없었다. 아마 탈출을 꾀했거나,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자해를 결심했거나 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가 얼마나 담대하고 신념에 찼는지를 잘 말해준다.

 

장석천이 사망한 자택. 광주군 누문리 93번지의 현 위치. 광주 학생운동의 발상지 광주고보 정문 앞에 있다.

네이버 지도 갈무리

 

20일 동안 바지 안쪽에 단도를 숨기고

 

경찰이 물었다. 언제 무슨 목적으로 상경했느냐고. 광주에서 운동권 간부로 활동하는 자가 상경한 데는 불순한 의도가 있으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장석천은 터놓고 얘기했다. 11월17일 아침 경성에 도착했고, 목적은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시위운동의 진실을 경성에 전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경성에서도 학생들을 선동해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취조의 초점은 경성에서 누구와 만났고, 12월3일 격문 2만 장 사건에 어떻게 관련됐는지 확인하는 데 있었다. 장석천은 합법 공개단체의 간부들과 만난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이항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차재정·황태성), 중앙청년동맹 집행위원(곽현) 등과 협의했음을 인정했다. 장석천 자신도 청총 중앙집행위원이었다.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업무를 나눠 맡았다고 한다. 시내 학생들의 연합시위가 필요하다고 본 자신과 황태성은 학교별로 적임자를 물색하기로 했고, 그에 반해 차재정과 곽현은 군중을 선동하는 대량의 격문 살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장석천은 격문 2만 장 사건에는 관계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취조가 거듭됐지만 그 진술을 지켰다. 다만 각 고등보통학교에 연락해 연합시위를 준비한 사실은 시인했다. 접촉한 학교는 경성제2고보, 경신학교, 중동학교였노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어느 경우도 성공하지 못했다. 자신은 연합시위의 필요성을 설득했지만, 상대방은 교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거나 역량 부족 등의 이유로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는 것이 장석천의 진술 전략이었다.

 

장석천의 진술에는 일정한 특징이 발견된다. 경찰이 이미 인지한 사실은 시인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안에는 단호히 부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물증이 제시되거나 자신의 주장 근거가 무너지는 상황이 됐을 때, 그제야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그는 비밀결사 존재를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격문 사건이나 연합시위 계획과 비밀결사 사이의 연계를 극구 부인했다. 설령 관계가 있더라도 비밀결사 구성원 일부가 개인적인 결단으로 참여했던 거라고 진술했다.

 

장석천의 진술 투쟁은 유효했다. 그는 광주에서 학생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제1심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형을, 제2심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받았다. 광주 학생운동의 또 한 명의 지도자 장재성의 제2심 선고형량이 4년인 점과 비교하면 매우 낮다. 하지만 판결 이유 중에는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도, 서울 지역 연합시위운동도, 비밀결사 조선공산청년회 가담 사실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노출되지 않은 비밀결사 동료들의 안위를 지켰고, 자신의 법정 형량도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전국 194개 학교로 시위 확산되다

 

12월3일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의 의의는 컸다. 당시 경성의 학생운동은 교내 문제에 국한됐다. 광주 학생운동이 1929년 11월3일과 11월12일 두 차례 거리시위 형태로 폭발했는데도 그랬다. 식민지 통치 당국은 이 폭발의 재연과 확산을 막으려 총력을 기울였다. 총독부는 언론 보도를 틀어막았고, 경찰은 닥치는 대로 체포·구금했다. 일본인 이주민들은 갖은 흉기로 무장한 채 위력 시위를 벌였다. 그 때문에 대중투쟁이 광주 일원에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3·1운동 이후 처음 있는 대중적 거리시위 투쟁이 그대로 잦아들지도 몰랐다.

 

이때 장석천이 나섰다. 11월17일 긴급 상경한 그가 추구한 것은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학생들의 연합거리시위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의 노력은 주효했다. 12월3일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이 터졌고, 그것이 징검다리가 됐다. 교내 문제에 얽매여 학교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운동 수준을 일거에 한 단계 올리는 역할을 했다. 12월9일 제1차 연합거리시위가 터졌고, 다음달인 1월15∼16일 제2차 연합거리시위가 벌어졌다. 대폭발이었다. 그리하여 전 조선에서 광주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연대투쟁이 전개됐다. 전국 194개 학교에서 5만4천여 명이 거리시위, 동맹파업, 격문 살포 등의 형태로 행동에 나섰다. 그로 인해 1462명이 피검됐고, 2330명이 무기정학, 582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장석천은 광주 학생운동을 전 조선 학생운동으로 바꾼, 놀라운 성취를 거둔 지도자였다. 도대체 전 조선 학생운동으로 전환시킨 동력이 어디서 나왔을까? 뒷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고립되고 말았는데, 1929년엔 어떻게 그 고립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 네트워크 효과를 들어야겠다. 장석천은 비밀결사 조선공산청년회(공청)의 전라도 책임자였다.4 그 덕분에 그는 상경하자마자 공청 중앙집행위원회 멤버들과 회합할 수 있었고, 신속히 광주 학생운동의 전 조선 확산을 가져올 조처를 준비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합법과 비합법 활동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927년부터 광주에서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광주청년회, 광주청년동맹, 전남청년연맹, 신간회 광주지회 등 단체에 가입해 집행위원·조사연구부장·상임간사 등의 중책을 맡았다. 1929년 말까지 3년간 헌신해 광주 지역 운동권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성에 본부를 둔 전국 규모 단체에도 진출했다. 신간회 본부대회 출석 대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직에 취임했다. 이처럼 광주와 경성에 걸쳐 합법과 비합법 영역을 넘나드는 전업적인 활동 경력이 그에게 대중투쟁의 전국 확산 가능성을 부여했다.

 

장석천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자카드. 출소 예정일이 1934년 12월28일이라고 쓰여 있으나, 중병에 걸려 1933년 11월7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임경석 제공

 

불꽃 같은 혁명가의 삶과 갑작스러운 죽음

 

장석천은 학생운동 현장에서 노동운동 현장으로 이전한, 지식계급 출신의 전형적인 혁명가였다. 1931년 12월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적색노동조합운동 현장으로 달려갔다. 무대는 경성이었다. 조선제사회사, 인쇄소 인쇄직공, 지물회사 직공과 사무원들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성과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경찰에 적발됐다. 장석천은 다시 투옥됐다. 1932년 11월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제21007호 사진 원판이 남아 있다. 검사국으로 송치되고 한 달쯤 지난 시점이다. 벽돌 담장을 배경으로 찍은 수형자 사진이다. 무명으로 지은 하얀 한복을 입었는데, 확정판결을 받기 전 미결수 신분의 옷차림인 것 같다. 때가 묻어 꼬질꼬질하다. ‘장석천 4511’이라고 적힌 어깨띠를 매고 있다. 식별을 위해 형무소 쪽에서 강제로 착용하게 했을 것이다. 숫자는 수인번호일 터이다.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어 다부진 느낌을 준다. 코밑과 턱에 다듬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이 자랐다. 무감각하고 음울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턱을 치켜든 채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앙다문 입꼬리가 반달처럼 아래로 휘었다. 애써 감정을 숨기지만 반항기가 느껴진다.

 

이 억누르지 못하는 반항기 때문일까?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형기를 다 채우지 못했다. 중병에 걸린 채 보석으로 출옥했다. 고문 후유증이라고 판단된다. 1935년 10월18일, 광주 학생운동의 발상지 광주고보 정문 맞은편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새파란 나이 33살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6종 격문을 인쇄, 전 조선 각지에 배부’, <동아일보> 1929년 12월28일치 호외.

2. ‘격문사건 逐日확대, 今曉에 40여명 검거’, <동아일보> 1929년 12월6일치.

3. ‘張錫天 懷中에 단도를 발견’, <동아일보> 1930년 1월1일치.

4.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朝保秘第465號 朝鮮共産靑年會竝朝鮮學生前衛同盟檢擧ニ關スル件’, 1930년 4월15일. 현자29, 375쪽.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26. 빅토르 바스네쵸프 작품 전시실

 

빅토르 바스네쵸프 (Viktor Mikhailovieh Vasnetsov 1848~1926)는 오늘날에는 키로프라고 불리는 
밧캬에서 멀리 떨어진 로프얄에서 성직자의 여섯 아이 중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이콘 화가였던 할아버지의 피가 흘러서일까, 
훗날 여섯 아이 중 세 명은 화가가 되었고 세 명은 선생님이 되었다.  ​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열 살이 되던 해 뱟캬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는데
그 곳에 와 있던 폴란드 출신 화가 안드리올리라의 조수로도 일을 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가지 길 앞에서 고민하던 바스네초프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왕립 아카데미에 진학하고 싶었던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 두 점을 
경매에 올렸다고 하는데 이미 상당한 수준의 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
열 아홉이 되던 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그 후 7년간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 된다.  

그 곳에서 훗날 이동파의 리더가 되는 크람스코이를 알게 되고 
레핀과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바스네초프는 은메달을 수상한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생활상을 묘사한 판화 작업도 진행하는데 졸업을 앞 둔 해 
런던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그의 판화가 출품되었고, 동메달을 수상한다.

 

Tretyakov Gallery Room 26. 빅토르 바스네쵸프 작품 전시실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 다음 해, 파리에 있던 레핀이 바스네초프를 부른다. ​
파리로 건너 간 그는 당시 유행하던 인상파와 아카데미즘 기법을 두루 공부하고 ​
그리고 살롱전에도 작품을 출품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바스네초프는 러시아의 민담과 동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다음 해 모스크바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전래 동화와 
전통 민요 빌리나를 삽화로 표현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 완성되었을 때 주변의 평가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사실주의를 원칙으로 했던 이동파들의 입장에서 동화와 신화를 주제로 한 그의 작품은 
이동파의 취지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심지어는 유명한 감정인들마저도 그의 작품 구매를 거절했을 정도였다.

 

자화상 Self-portrait. 1873.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71 × 58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빅토르 바스네쵸프 (Viktor Mikhailovieh Vasnetsov 1848~1926)는
러시아 사실주의 민속화 일러스트, 디자이너 및 그래픽 아티스트이다.

성직자의 아들로 뱌트카(Vyatka, Kirov 키로프) 출생, 1862~1867년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67년 페테르부르크 드로잉 학교에 입학하여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1837~1887)에게 

사사하였으며 1869~1875년 세인트 피터스버그 예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여 높은 실력을 쌓았다.

그는 1878년부터 이동파에 참가하고 러시아 민족 미술의 부흥을 꾀한 

아브람체보(Abramtsevo)파 화가로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작품으로 러시아사와 민화를 테마로 한 '3용사', '야료누시카', 

'회색 늑대를 걸터타는 이반 왕자' 등이 있다.

​주위의 각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바스네초프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
동화나 러시아 민담을 주제로 작품을 그린 화가가 바스네초프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러시아 민속미술에서 사용되던 방법과 기법을 새롭게 가져온 화가는 그가 처음이었다. 
결국 바스네초프는 러시아 회화의 새로운 기법의 창시자가 되었다.

바스네초프는 사바 마몬토프가 후원을 하고 있던 모임에도 적극 참여하는데, 
러시아 전통을 되살리는데 초점을 두고 암브라체보라는 곳에 근거를 둔 화가들 모임이었다. 
한편으로는 키에프에 있는 성 블라디미르 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을 맡게 된다. 
이 작업은 거의 5년이나 걸리는 대 작업이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거대한 도전이었고 멋지게 완성해 낸다.

1885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바스네초프의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된다. 
바스네초프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눈 아가씨 (The snow maiden)’라는 
오페라 작품의 무대 장식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
이후 여러 작품의 무대 디자인을 하게 되는데 러시아 미술에서는 이 방면의 선구자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건축에도 관심을 보여 
4대 미술관 중 하나라고 불리는 트레차코프 미술관을 세우기도 했다.

1912년 니콜라스 2세로부터 귀족의 작위를 받은 바스네초프는 
러시아 혁명 기간 중에는 트레차코프 미술관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
그는 그의 수입의 상당 부분을 미술관으로 돌렸고 미술관은 그 돈으로 작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10월 혁명 이후에는 교회의 종교화를 트레차코프 미술관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는데, 
혁명의 어수선함으로 인해 그림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던 것 아닐까 싶다.

1918년, 새로 창설된 소련의 붉은 군대 제복을 디자인했던 
바스네초프의 창조적인 상상력은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
그러나 그의 운명은 그가 꿈꾸고 있었던 모든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

바스네초프는 일흔 여덟이 던 해 7월, 미하일 네스테로프 (Mikhail Vasilevich Nesterov 1862 - 1942)가 
바스네초프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네스테로프의 화실에서 숨을 거둔다. 
​판화와 유화, 무대 디자인과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멋진 인생이었다.

 

Three Bogatyrs, 1881.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446 X 295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러시아의 전설적인 기사들 세 명을 그렸다.
일리아 무로메츠 (Ilya Muromets)가 중앙에 있고, 도브리냐 니키티치(Dobrynya Nikitich)는 왼쪽에, 
알료샤 포포비치(Alyosha Popovich )는 오른쪽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농부의 아들인 일리아 무로메츠 (Ilya Muromets)는 무롬(Murom) 근처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키예프 시를 해방시키고 혼자서 체르니고프 시를 방어했다.
키예프에서 일리아 무로메츠 (Ilya Muromets)는 블라디미르 왕자에 의해 최고 보가티르(bogatyr 중세 기사)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국토와 국민의 보호에 전념하는 뛰어난 육체적, 영적 힘과 성실함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수많은 영화, 그림, 기념물, 만화 등등에서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도브리냐 니키티치(Dobrynya Nikitich)는 러시아 민족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가티르 (bogatyr) 중 하나다.
이 캐릭터는 키예프의 스뱌토슬라브(Svyatoslav) 대왕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아들 블라디미르(Vladimir) 대왕을 가르친 실제 장군 도브리냐(Dobrynya)를 기반으로 한다 .
도브리냐는 종종 왕실과 가깝고 민감한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전문 궁수, 수영 선수 및 레슬러로 고귀한 전사 계급을 대표한다. 

알료샤 포포비치(Alyosha Popovich )는 러시아 민족 영웅 보가티르 중 막내다.
알료샤 포포비치(Alyosha Popovich )는 "교황의 아들"을 의미하며, 
아버지의 이름은 "Piest Levonty"또는 "대성당 사제 레온티(Leonty)"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이미지 역시 1071년 이교도 봉기에서 살해된 레온티 주교를 본떠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Ivan Tsarevitch Riding the Grey Wolf.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 1889.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249 × 187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2007년 12월 네덜란드 흐로닝겐의 흐로닝어 미술관에서 열린 
‘러시아 민담과 전래동화’전 관람객은 저마다 전시장 입구에 내걸린 안내 포스터에 매료됐다. 
포스터의 바탕 그림은 한 젊은이가 매혹적인 여인과 함께 거구의 회색 늑대 등에 올라 탄 채 
울창하고 어두컴컴한 숲을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

러시아 화가 빅토르 바스네초프가 그린 이 그림은 러시아 전래동화인 

<이반 왕자, 불새, 그리고 회색 늑대>의 한 에피소드로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를 묘사한 것이다.
다소 길지만 동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전래동화에서 유래한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
옛날 옛적에 한 임금님이 세 명의 왕자를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그는 정원에 황금사과나무를 키웠는데 매일 불새가 나타나 
한 개씩 가져가자 왕자들을 시켜 잡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두 형은 게을러서 잡지 못했고 막내 이반은 

잡을 뻔 하다 놓친 채 깃털만을 가져와 왕에게 보여준다. 
왕은 다시 새를 잡아오라고 명령하지만 두 형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용감한 막내는 갈림길 앞의 이정표에 표시된 세 길 중 

‘사람은 살고 말은 죽는 길’을 택해 힘차게 전진한다.

이정표의 예언대로 이반의 말은 거대한 회색 늑대에게 잡혀 먹히지만 
이반을 불쌍히 여긴 늑대가 그를 등에 태워 불새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
늑대는 불새를 가져오되 새장은 건드리지 말라 충고하지만 
이반은 이를 잊고 새장을 건드려 그곳 왕에게 붙잡힌다. 
이에 왕은 아홉제곱 나라 너머 세제곱 왕궁에 가서 

황금 갈기를 한 말을 가져오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한다.

이반을 그곳에 데려다준 늑대는 이번에도 말을 가져오되 
갈기는 만지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그는 다시 이를 어겨 붙잡힌다. 
그곳의 왕이 어여쁜 헬렌 공주를 데려다주면 용서해주겠다고 하자 
이반은 늑대의 도움을 받아 헬렌을 데려온다. 
그러나 헬렌을 사랑하게 된 이반이 슬퍼하자 늑대는 자신이 헬렌으로 변신해 
왕에게 갔다가 도망쳐 나옴으로써 헬렌과 말 모두를 구해낸다.

이반 왕자가 겁에 질린 헬렌 공주를 안고 거대한 회색 늑대 등에 올라타서 탈출을 하고 있다.
​뒤 따라 오는 추적자를 살피기 위해 눈은 커질 대로 커졌지만 손으로는 공주를 굳게 잡고 있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허리에 두른 칼이 허공에 떠 있다. 

이반이 이번에는 불새를 줘야 한다는 생각에 슬퍼하자 늑대는 다시 
불새로 변신했다가 도망쳐 나와 이반은 모든 것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던 이반은 안타깝게도 길에서 쉬던 중 두 형에게 발견돼 죽임을 당한다. 
며칠 뒤 이반의 시신을 발견한 늑대는 생명수를 구해 이반을 소생시키는 한편 이반의 두 형을 죽인다. 
이반은 마침내 왕국에 돌아와 헬렌 공주와 결혼식을 올리고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After Prince Igor`s Battle with the Polovtsy, "Polovtsy와 Igor 왕자의 전투 후" 1880.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167 x 308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앞에서 본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는 바로 이반이 늑대의 도움을 받아 
헬렌 공주를 데리고 숲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또 다른 작품인 ‘갈림길에 선 기사’는 세 갈래 길 앞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고민하고 있는 이반을 묘사한 것이다. 
주변에 널린 해골과 동물의 뼈, 시체를 쪼아 먹기 위해 주변을 맴도는 갈까마귀는 
이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바스네초프는 뱌트카(현 키로프) 주의 벽촌인 로프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자기보다 아래 계층인 농부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열 살 때 뱌트카의 세미나리에 들어간 그는 마침 그곳에 망명 와서 
성당 벽화를 그리던 안드리올리라는 폴란드 화가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19세가 되던 해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신화와 기독교적 주제만을 강요하는 전통 회화 교육에 반기를 들고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스네초프는 그룹의 리더인 이반 크람스코이와 핵심 멤버로 
훗날 최고의 화가가 되는 일리야 레핀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바스네초프는 사실적인 주제보다는 러시아 농촌의 전래동화와 민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76년 레핀의 초대로 파리에 간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의 아카데미즘과 함께 
인상주의 같은 첨단의 미술 사조를 배우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러시아 미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가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를 구상한 것도 파리에서였다. 
이듬해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러시아 전통 민담과 동화를 연구하는 한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져든다.

 

Alionushka, 알료누쉬카. 1881.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221 x 173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슬픔이 쓰나미처럼 밀려들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신을 단도리한다.
그럴 때 바스네쵸프의 <알료누쉬카>를 본다.
그녀의 절망하는 어깨에 내 슬픔을 올리고 몇 번을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 돌덩이가 되어 버린
그녀의 헐벗은 발을 어루만지다 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진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맥없이 흐느끼는 알료누쉬카의 눈물 한방울이 날 정화시킨다.
살다보면.. 말하려니 우습고 삭이자니 무거운 일들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럴 때마다 그림을 보고 혼자만의 카타르시스를 찾는다.

바스네쵸프의 알료누쉬카는 러시아 전래 동화를 바탕으로 한다.
어릴적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 살이를 하던 알료누쉬카는
그림의 연못가에 앉아 혼자서 눈물짓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었다.
하지만 이 연못에는 무시무시한 용이 산다하여 사람들이 꺼리는 곳.
우연히 알료누쉬카는 악마와 싸우는 용을 돕게 되고 그 용은 마법에 걸린 왕자였으며 악마를 물리친 왕자는 

마법에서 벗어나 자신을 도와 준 알료누쉬카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내용의 동화다.
러시아의 콩쥐 팥쥐, 신데렐라, 소공녀 세라 쯤 될까?

이 그림은 눈물짓는 알료누쉬카를 그리고 있다 .
그녀의 모습에는 절망으로 점철되어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알료누쉬카를 둘러싸고 있는 어린 전나무의 싱그러움은 다가올 미래가 밝음을 암시한다.
그림 전체를 덮고 있는 밝은 초록 또한 행복한 미래를 점치는 소재가 될 수 있으며 ,
누추하고 헐벗은 알료누쉬카지만 우아하고 고결해 보이는 자태는 아름다운 훗날을 가늠케 한다.

사실 바스네쵸프는 좌초에 걸려 서서히 침몰하는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을 알료누쉬카를 빌어 표현했다 하는데, 

결국 그림 속의 암시들이 러시아의 찬란 미래를 가늠하게 해 주고 비탄에 빠져 있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 그녀의 자태에 빗대어 러시아의 근본 클라스를 나타내고자 했다 한다.

슬픔 속에 긍정을 품고 있기에 이 그림을 보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고 고통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건가...
그림은 말이 없지만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주는 힘이 있다.
어려울 때 그림 앞에서면 우리의 영혼은 재충전되고 삶을 향한 용기 또한 새로이 얻게 된다.

 

Tsar Ivan The Terrible, 이반 뇌제. 1897.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247 × 132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하늘 아래 절대 권력 이반 뇌제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며 진리며 법인 러시아 황제다. 
그림에도 그런 고집이 그대로 배어 있다. 
황제로 군림하는 내내 자신의 말에 거역하면 그 어떤 이도 단칼에 베어버린 폭군이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이반 뇌제는 딱 그대로 심술맞고 고집스러운 늙은이다. 
바스네쵸프의 이반 뇌제는 워낙 잘 그려졌다 하여 러시아 오페라 등에 폭군을 표현할 때 
거의 이 그림을 바탕으로 의상이며 분장 등을 한다. 
특히 바스네쵸프는 역사 화가이면서도 당대 최고의 무대 미술 작가이기도 하다.

러시아 류리크 왕조의 황제. 흔히 이반 뇌제(雷帝)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백성들이 그를 부른 칭호이자 별명인 그로즈니(Гро́зный)를 의역한 것으로 
'두렵다', '끔찍하다'라는 의미로 현대 영어에서 사용되는 '형편 없는'이란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적을 두렵게 한다'라는 뜻이 있으며, 이반 4세 통치 초기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때려부수는 동시에 자국내 보야르들을 찍어누르던 시절에 주어진 별명이라 '강한' 리더라는 뜻이 강하다.

'뇌제'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로즈니라는 단어 자체는 '무서운', '두려운'이라는 뜻이지만, 
그 어원이 뇌우를 뜻하는 그로자(гроза)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뇌제라고 번역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뇌(雷) 자에는 우뢰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나운 모양새를 나타내는 뜻도 있으므로 
뇌제 자체가 사나운 황제라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끔 '이반 뇌제' 대신 '폭군 이반'이라고 의역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로즈니'라는 표현에는 폭군 이미지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경외심을 일으킨다는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폭군 이반'이라는 표현은 이반 4세의 폭정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완전히 합당한 번역어는 아니다.

이반 4세는 이전까지 공국의 수준에 불과했던 러시아를 처음으로 
국가의 지위에 올려 놓았고 스스로를 공작이 아닌 '모든 러시아인들의 차르' 라는 이름으로 
대관한 최초의 러시아 군주이기도 하다. 
차르라는 명칭 자체는 선군인 이반 3세 때부터 쓰였지만 
그것은 서유럽 국가들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 
군주의 정식 명칭은 '모든 러시아인들의 대공(大公)' 이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는 주변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러시아를 동유럽의 강국으로 만드는 등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하였다.

 

At a Bookseller's. 서점에서. 1876.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서점 앞이 소란스럽다. ​아이들은 천연색으로 묘사된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고 그림을 골라 든 할아버지도 꼼꼼하게 살피는 중이다.
창문 옆에 여러 종류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책보다는 그림을 파는 곳처럼 보인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벽에 그림 한 장 정도 거는 마음의 여유는 가지고 있는 것이겠다.

가게 안쪽에 앉아 손님을 맞고 있는 주인이 보인다. 
비록 허름한 가게이지만 아마 이 동네 유일의 ‘갤러리’일 것이고 ‘문화살롱’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동네 헌 책방을 자주 기웃거리곤 했다.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냄새도 좋았지만 책방 주인 아저씨의 해박함에 늘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자꾸 사라지는 작은 책방들이 안타깝다.

 

New from the Front. 전선으로부터의 소식. 1878.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79.7 X 62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골목길,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벽에 붙은 소식을 보기 위해 잠시 우산도 접었다.
전선으로부터 날아 온 기사를 읽는 사람들의 표정이 침통하다.

나이든 노인들과 여인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들이고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는 
사람들의 생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편한 얼굴일 수는 없다. 
전쟁은 살아 남은 자에게 더 큰 고통이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세상은 여전히 전쟁에 관한 한 진행형이다. 
진정한 평화는 언제쯤 올 수 있는 것일까?
전선에 나갔던 사람들이 어서 돌아 오기를 기대하면서 
벽보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움직일 줄 모르고 있다.

 

Moving House. 이사. 1876.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53 × 67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추운 겨울, 남루한 옷차림의 부부가 길을 나섰다. 
그동안 살던 집에서 또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중이다.
커다란 보퉁이 하나에 모두 담았으니 짐이라고 할 것도 없다.

​주전자를 든 여인의 표정에는 삶의 피곤이 덕지덕지 내려 앉았고 
초점 잃은 눈에는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는 절망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아내를 여기까지 몰고 간 것이 미안했던지 남편은 곁눈으로 아내를 보고 있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남자들은 가장 괴롭다.
하늘은 낮게 내려 앉았고 항구는 얼어 붙었다. 
힘든 고비를 넘는 두 사람에게 어서 봄이 와야 할 것 같다.

 

Samolet. (The Flying Carpet), 하늘을 나는 양탄자. 1880.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165 × 297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하늘을 나는 카펫’도 러시아 민담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보통은 ‘천일야화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후세인 왕자가 타고 다니던 카펫을 연상하기 쉽지만 
러시아 민담에서는 바바야가 여신이 바보 이반에게 내린 신비로운 선물 중 하나다. 
바보 이반은 러시아 민담에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로 순진하지만 행운의 청년으로 
늘 형제들의 질투로 위험에 빠지곤 한다. 
바보 이반은 바바야가가 준 신비의 카펫을 타고 이곳저곳을 여행한다. 
바스네초프는 그런 이반을 그림에서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양탄자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바보 이반이다.
여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세상 이 곳 저 곳을 여행하는 중이다. 
칼을 들고 아래를 내려다 보는 이반의 눈에는 긴장감과 당당함이 담겨 있다.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무모함과는 구별되는 당당함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러시아 철도 회사가 주문한 것이라고 하는데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던 철도와 
하늘을 나는 양탄자의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한창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19세기 말 러시아인의 낙관주의와 도전 정신이 표현돼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반이 타고 있는 양탄자 한 장쯤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다.

 

Portrait of Helena Adrianovny Prahovo. 1894.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A Game of Preference. 1879.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136 X 84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Three Tsarevnas of the Underground Kingdom. 1879~1881.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165.2 X 152.7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The Baptism of Russia. Date unknown.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In a suit buffoon. (Boy in the Jester's Costume). 1882.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Ivan Petrov, a Peasant from Vladimir Province. 1883.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Oak Grove at Abramtsevo. 1883.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Portrait of Natalia Anatolevna Mammoth. 1883. by Viktor Vasnetsov. Tretyakov Gallery Room 26

 

Portrait of sculptor Mark Matveevitch Antokolsky. 1884. by Viktor Vasnetsov. 
Tretyakov Gallery Room 26

 

Portrait of Boris Vasnetsov, son of the artist. 1889.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Sirin and Alkonost The Birds of Joy and Sorrow. ‘시린과 알코노스트-기쁨과 슬픔의 새’, 1896.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한 나무에 기쁨과 슬픔의 새가 나란히 앉아 각자의 소리를 내고 있다.
밝고 환한 얼굴의 기쁨의 새는 부드럽고 여유로워 보이는데 반해 
슬픔의 새는 퀭한 눈으로 안간힘을 다하는 것 같다.
그런 그녀 자신이 더 슬퍼 보인다. 슬픔은 슬픔 자신도 슬프게 하는 모양이다.

​문득 슬픔과 기쁨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처럼 나란히 다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기쁨이 올 수 도 있고 슬픔이 올 수도 있겠다.
무슨 소리를 들을 것인가는 결국 자신의 몫이다.

바스네초프의 그림에 대한 당대 화단의 평가는 냉혹했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같은 비평가는 
“미적인 아름다움은 오로지 물리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데 있는 것이지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바스네초프는 이런 비판에도 자신의 소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모두가 유행을 뒤쫓던 근대화의 문턱에서 그는 오히려 사라져가는 러시아의 전통을 되살려 
문화적,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의 그런 노력은 뒤늦게 인정받아 이제 그는 러시아의 전통을 확립한 대표적인 화가로 기억된다. 
그는 도전 정신으로 가득한 이반 왕자요, 순진무구한 바보 이반이었다.

 

Portrait of the Artist A M Vasnetsov. 1878.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6. Viktor Mikhailovieh Vasnetsov 작품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27. 바실리 베레시차긴 작품 전시실

 

러시아의 전쟁 역사화가 바실리 베레시차긴 (Vasily Vasilyevich Vereshchagin 1842-1904)은
러시아 제국의 가장 유명한 전쟁 화가로 해외에 널리 알려진 최초의 러시아 화가이다.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정복과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전장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러일 전쟁에서 취재를 위해 타고 있던 러시아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침몰하면서 사망했다. 
그의 사실주의 화풍으로 인해 많은 작품들이 출판되거나 인쇄나 전시가 금지되었다

바실리 베레시차킨은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주 체레포베츠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 부모의 희망에 따라 군에서 운영하는 유년학교에 들어갔다. 
185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58년에 프리깃함 ‘캄차카’를 타고 서유럽과 이집트를 방문했다. 
1859년에 장교가 되지만, 군을 제대하고 이듬해부터 페테르부르크 미술 학교에서 배운다.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지루한 수업 방식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3학년 때 퇴학을 한다. 
트빌리시에서 장기간 체류한 뒤, 프랑스로 건너 가 피레네 산맥 등을 찾아 파리에서 1년을 보냈다. 
파리에서 에콜 데 보자르에서 배웠고, 장레옹 제롬에게 사사한다. 
화가로서 그는 프랑스 파에 속하는 정밀한 묘사, 날카로운 조형, 
그리고 부드럽고 밝은 다채로운 색상 조합을 특징으로 했다.

1867년,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과 함께 
투르키스탄 원정에 종군하여 사마르칸트 공격 등을 목격한다. 
1868년 카우프만 장군의 후원으로 투르키스탄을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1870년 뮌헨에 머물면서 종군을 하는 동안 그려 모은 스케치와 연구를 
그림으로 완성시키는 작업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관심사는 전투 장면보다는 
오히려 중앙아시아의 이국적인 건축과 풍속이었다. 
1874년에는 인도를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영국에 식민지 지배를 받는 인도의 실태를 보고 듣는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사령관의 조치로 부관의 지위와 
군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를 부여받고 시푸카 고개 전투를 목격한다. 
플레벤 공략전에서는 군인으로 복무한 그의 형제가 죽고, 자신도 중상을 당한다. 
이 비참한 전투는 그의 세계관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의 비참함을 
현지에서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전쟁을 그린 그의 그림에는 사망자, 부상자, 약탈, 
야전병원, 눈에 덮힌 병사의 시신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테마는 평소 그림이나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민주주의 사상은 이동파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영웅 예찬이었던 전쟁 회화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었다. 

연속작이 많아 투르키스탄 원정 (1871년 ~ 18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 ~ 1878년, 1880년 이후), 러시아 원정을 테마로 그린 것이 있는데, 
특히 후자에서는 보로디노 전투를 그린 대표작 ‘보로디노의 나폴레옹’이 탄생했다. 
그의 그림은 그 주제로 인해 선전 선동(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다른 대표작 ‘전쟁의 결말’은 두개골의 산을 그린 것이지만 1980년에 출판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쓰여진 책 표지에 ‘1916년 서부 아르메니아에서 터키에 의한 잔학 행위’라는 
캡션을 달아 게재된 후에 베레샤긴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188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비엔나와 베를린 등 긴 여행을 떠난다. 
온천에 체류 중인 바트엠스는 성 알렉 교회의 제단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렸다. 
1884년에는 두 번째 인도 여행을 떠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도 발길을 뻗었다.

팔레스타인 성지를 방문한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일련의 작품으로, 지금까지의 
서구의 유럽화된 그리스도 상이 아니라 현지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풍속과 풍경을 그려 넣은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중동의 인간상으로 묘사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단 정교회의 아이콘은 서구의 회화와는 달리 원래 중동의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
그의 발길은 고향 러시아, 동유럽은 물론, 심지어 미국까지 가게 된다. 
미국에서 미국-스페인 전쟁의 전장이 되었던 쿠바, 필리핀을 방문한다. 
또한 1903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친숙 인물상 등을 남겼다.

1904년에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러시아 조차지 뤼순으로 갔다. 
여기에서도 종군한 그는 여순 함대사령관 스테판 마카로프에 초대를 받아 
기함인 〈페트로파블롭스크〉에 탑승하여, 전쟁의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4월 13일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일본군이 부설한 기뢰에 닿아 폭발하였고, 
불과 몇 분 만에 화약고가 폭발했기 때문에 
마카로프 제독과 베레시차킨을 비롯한 승무원 대부분이 전사했다. 

베레시차킨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던 마카로프의 회의의 모습을 그린 스케치가
파도에 떠다니다 무사히 회수되었다.
그의 죽음은 적국 일본에서도 보도되어 
사회주의자였던 고토쿠 슈스이와 나카자토 카이자 등이 추모의 글을 남겼다.

이동전파에 속하는 화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학교를 나온 후 
1863년 파리로 나가 J.L.제롬에게 사사하였다. 
주로 파리 · 뮌헨 등지에서 살았으며 유럽 각지와 아시아를 여행한, 
당시로는 저명한 러시아의 예술가였다. 
투르케스탄 전쟁(1867∼1868) 및 러 · 터 전쟁(1877∼1878) 때에는 보도화가로 종군하여 
톨스토이풍의 평화주의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전쟁을 묘사하였다.

캅카스 · 인도 · 팔레스티나 여행에서의 풍경화와 풍속화에서도 같은 작풍을 찾아볼 수 있으며, 
1890년대에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입의 연작(聯作)을 제작하였다.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비전론(非戰論)을 강력히 호소하였으며, 
러일전쟁 때 여순항(旅順港) 밖에서 전사하였다. 
대표작에 '전쟁의 화신(Apotheosis of War)' 등이 있다. 
전쟁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다닌 후 파리에서 공부했다. 
평생을 여행하는 데 바친 그는 러시아 군대와 함께 카프카스와 크림 반도, 도나우 강 연안 및 
투르키스탄을 돌아다니며 현장에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부상당하고 이때 발칸 반도에서 본 것을 그린 전쟁화들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그림을 그렸고 1885~1903에는 러시아 · 미국 · 일본 등지를 여행했다. 
그는 러일전쟁 때 중국 뤼순 앞바다에 떠 있던 S. O. 마카로프 제독의 기함에서 죽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의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대단한 인기를 누려, 수없이 복제되었다. 
당시의 평화주의자와 인도주의자들은 해골 더미가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는 그의 그림 
〈전쟁의 화신 Apotheosis of War〉 (1871, 모스크바 트레탸코프 국립미술관)을 그들의 운동에 이용했다.
그의 작품들은 모스크바의 트레탸코프 국립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러시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The Apotheosis of War, 전쟁 예찬. 1871.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127 X 197cm. Tretyakov Gallery Room 27
 
베레시차킨의 투르키스탄 전쟁 연작의 시리즈의 마지막 그림이자
그의 반전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베레시차킨은 이 그림의 주석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정복자에게 바친다"라고
명시하여 전쟁의 비극와 무의미를 강조하였다.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쌓아 놓은 해골들이 작은 산을 이루었다.  
까마귀들은 하늘에서, 해골 위에서 햇빛 아래 탈색되고 부서져가는 해골들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그리고 몸은 다 어디에 가고 머리만 모여 있는 것일까? 

전쟁이 끝나고 미처 치우지 못한 주검들은 푸른 하늘 밑에서 풍화되어 가고 있다.  
너무 맑은 날이어서, 너무 밝은 때여서 더 처참하다. 
전쟁은 살아 있는 영(靈)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죽은 혼(魂)도 비참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베레시차킨은 러시아의 체레포베츠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땅을 소유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집안은 부유했고 지주나 귀족의 아이들이 
장교가 되거나 외교관이 되던 당시의 풍습대로 그의 부모도 그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알렉산더 예비 사관학교에 그를 입학시킨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정식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베레시차킨은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전쟁이라는 행위는 모든 국가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중요한 일이지만, 
러시아에서는 특히 수없이 반복된 침탈과 전쟁의 역사로 
전쟁이 국민모두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시대는 표트르 대제를 지나고 지나, 19세기 근대의 문턱까지 달려온 상태였다. 
그 사이 러시아의 국력과 병력수준은 획기적으로 높아졌지만, 
그 못지 않게 숱한 전쟁을 치러야했다.

그 전쟁은 때때론 '영웅적인 조국방어 전쟁'이었으며,  
때때론 '영웅적인 조국확장 전쟁'이었다. 
그러나 모든 전쟁에서 격렬한 피가 흘렀다는 것은  어느 전쟁 할 것 없이  공통적 분모였고, 
여기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것은 징집된 병사들이었다. 

러일전쟁을 지휘한 쿠로파트킨 장군의 회고록에서 나오듯이, (이 회고록은 국내에도 번역, 발간되어 있다.) 
18~19세기 러시아 군대의 숫자는 약 100만에서 150만을 헤아렸으며 
이들 상당수는 서유럽, 그리고 중앙의 코카서스 산맥 일대, 남측 터키국경 등과 같이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군대의 운용과 전쟁은 국가적인 부채 증가, 남성 인력의 징집으로 인한 
농업생산력 저하, 농촌피폐, 농촌의 식량생산 저하로 인한 식량부족의 만연, 기아발생 등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농민이 일을 아무리한다해도 대부분을 세금으로 빼앗기고, 
징집되어 군대로 간 아들들은 시체로 돌아오고......
이것이 당시 러시아 인구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민을 고통의 수렁 속에 빠뜨린 원인이었다.

이러한 침략전쟁과, 비효율적인 전쟁 운용방식에 대해 비난을 제기한 화가가 
바로 바실리 베레시차킨이었다. 
베레시차킨의 작품을 보자면, 거의 모든 작품이 전쟁 및 국경지대와 관련된 그림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전쟁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중요한 주제였다.

베레시차킨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1842년), 군사적 문화를 많이 접할수 있었던 어릴적
환경에 의해 이미 10대에 러시아 해군학교를 다녔고, 투르키스탄 전쟁, 발칸전쟁, 
러시아-터키 전쟁(투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몇 번의 가벼운 부상, 한번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작품세계는 반전(反戰)의 주제가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이 <전쟁예찬>이라는 그림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쌓여 있는 해골에는 일자(一)로 가로로 긴 도끼자국으로 보이는 상흔이 남아 있다. 
이미 전투 중에 도끼로 살해당한 시신을 왜 또다시 목을 잘라 그 목을 전시하듯 높게 쌓았는가.... 
일찍이 인간이 해 왔던 전쟁 속 '승리의 자랑'으로 으레 행해진 적군의 목베기와
대상자가 살았든 죽었든 그것을 자랑하게끔 만드는 
인간과 전쟁의 잔인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된다.

이 셀 수 없이 높게 쌓인 해골의 수, 그것을 파먹었을 법한 통통하게 살이 오른 까마귀들,  
전쟁으로 파괴되었을 집(우측 후편)과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푸르고 푸른 하늘....
이러한 장치들이 기묘하게 얽혀들어가면서 이 그림은 "전쟁을 하지 말자"는 몇백 장의 포스터와 
몇만 글자의 연설보다 전쟁을 하면 안되겠구나...라는 감성에 젖게 만든다. 
이처럼 베레시차킨은 전쟁에 대해 극구 반대하는 의사를 표현하였으며, 실제로도 어러한 말을 남겼다. 
"나는 화가로써 전력을 다해 전쟁을 비난한다. 나의 비난이 효과적인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정면으로 맞서 가차없이 비난한다."
때문에 베레시차킨은 위의 <전쟁예찬> 말고도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는
<시프카에서 모두 평온하다>, <치명상>, <전리품을 보이다> 등의 그림을 다수 남겼다. 
한편으로는, 전쟁화의 주인공을 항상 말단에 있는 병사로 내세움으로써 
민중화가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적국의 침략에 맞서 단호히 싸우는 러시아 병사와 민중, 
곤혹스러워하는 적군에 대해서도 그림으로 표현하여
합당한 전쟁 수행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그린 나폴레옹 전쟁 당시를 묘사한 그림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나폴레옹 전쟁 관련한
그림 중에 가장 극적이라고 평가받으며, 엄청나게 많은 화가들이 그의 그림을 모사하게된다.

자국의 침략 전쟁에 대해 비난하고, 적국의 침략에 대한 방어 전쟁에 대해 찬사를 높힌 이 화가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사령관 마카로프 제독이 타고 있던 러시아 해군 기함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호가 침몰할 때 배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전쟁을 하기는 쉬워도, 전쟁을 알기는 어렵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At  the City Wall, 'Let them enter'. 도시 성벽에서 ‘안으로 진격’. 1871.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95 X 160.5cm, Tretyakov Gallery Room 27

 

도시를 둘러 싸고 있는 성벽의 한 구석이 허물어졌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그 틈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맨 앞 줄의 병사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적의 공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성급하게 덤비는 병사를 손으로 막는 병사는 분위기로 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처럼 보이다.

벽 너머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짐작을 하고 있겠지만 
그 위험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은 애써 피하고 싶겠다. 
뒤쪽에 줄을 지어 계속 행진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전쟁터에서의 인간의 목숨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베레시차킨은 학교 재학 시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고 
때문에 앞으로 잘 나가는 장교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순간에 길을 바꾸기도 한다.  
군사 미술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사관학교를 다니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야간반에서 그림을 배운다.

열 여덟 살 되던 해 베레시차킨은 우등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종일반에 입학한다. 
장교가 되는 길을 걷어 차고 화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Mortally Wounded, 치명상. 1873.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요새 공격 중 치명상을 입고 후퇴하는 러시아병사. 
그의 주변에 이미 많은 병사가 쓰러져 있다.

 

Unawares attack. 1871. Turkestan series. military-and-soldiers, battles-and-wars, mountains-and-cliffs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82 x 206.7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터키 기병의 기습에 맞서, 소수이나마 대열 정연히 중대를 편성한 러시아 육군의 용맹을 보여준다.
바실리 베레시차킨은 러시아의 체레포베츠라는 곳에서 태어나 여덟 살이 되던 해 
알렉산더 예비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군사 미술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사관학교를 다니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야간반에서 그림을 배우고, 열 여덟 살 되던 해 베레시차킨은 우등으로 사관학교를 졸업 직후 
미술 아카데미 종일반에 입학하여 그림을 배우다가 파리로 유학하여 
장 제롬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되였으나 배우고자 했던 화법과는 맞지 않아 
새로운 주제를 찾아 코카서스를 여행하면서 그 곳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스케치하며 공부했다.

1867년, 스물 다섯 나이의 그는 투르키스탄에 있는 러시아 군대에 지원하여 
사마르칸트 방어전에서 영웅적인 활동으로 그는 러시아 최고의 훈장을 받게 되었고, 
처음 전쟁에 참여 한 10년 뒤에 전쟁의 참상은 꼼꼼하게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러시아-터키 전쟁에 다시 참여하면서 그의 작품에는 전쟁의 희생자들이 등장하는데, 
전쟁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병사들이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무능하고 무모한 러시아 장군들이 묘사되었다.

러일 전쟁 중 그는 러시아 기함 페테로 파블로프스키호에 타고 있었는데, 
전쟁을 증오했지만 두 번이나 전쟁에 참여하여 일본군이 쏜 어뢰에 의해 
이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 앉아 예순 둘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Battlefield at the Shipka Pass. 시프카 전투에서의 소코블레프 (러시아군 장성). 1878.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자료를 보니 시프카 고개는 불가리아의 발칸산맥을 넘는 고개로 
러시아와 터키 전쟁 당시 격전지였다고 한다. 
전투 중에 죽은 병사들의 모습이 처참하다. 
푸른 색 옷과 밝은 색 옷을 입을 주검들이 하늘을 향해, 
더러는 땅을 향해 얼굴을 눈 속에 파 묻고 있다.

살아 남은 병사들은 환성을 지르고 있지만 눈 쌓인 고개에서 

젊은 나이를 마감한 혼들은 아득한 산 너머를 향하고 있겠지... 
혼들이 넘어 가는 산을 올려다 보았다. 산 전체가 흘러 내릴 것 같은 느낌이다. 

러시아를 떠난 후 베레시차킨은 인도 여행과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여행한다. 
인도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인들에 대한 
인도인들의 저항과 건축물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했다. 
팔레스타인 여행을 통해 제작된 신약 성경 관련 작품은 그 표현이 가톨릭교회와 문제를 일으켜 
결국 비엔나에서 전시회를 할 때는 광신도들에 의해 작품 두 점이 염산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난다.

 

Defeated, Servise For The Dead, 망자를 위한 의식. 1878-79.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망자를 위해 사제는 향을 피워 흔들었다. 
군인이 되기 전에 각자의 삶이 있었겠지만 세상을 떠나는 순간은 모두 군인이었다.  
편안한 어딘가에 앉아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이 사람들을 전장으로 몰아낸
그 사람들은 이 광경을, 이 느낌을 알 수 있을까? 하늘은 온통 잿빛이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내리는 빛은 망자들이 하늘로 오르는 길처럼 보인다.

1890년이 넘어서라야 베레시차킨은 러시아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 정착한 그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제작하는데 여전히 냉정한 사실주의 기법이 사용되었지만 
초기에 비해 훨씬 낭만적이고 애국심이 담긴 작품이었다. 
그의 마지막 길은 화가가 아니라 군인의 모습이었다.

러일 전쟁 중 그는 러시아 기함 페테로 파블로프스키호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쏜 어뢰에 의해 이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 앉았다. 예순 둘의 나이였다. 
전쟁을 증오했지만 두 번이나 전쟁에 참여했고 
그리고 전투함과 생을 마감한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의 몸 속에는 화가의 피가 더 강했을까? 아니면 군인의 피가 더 진했을까?

 

A Resting Place of Prisoners. 죄수들의 휴식 장소. 1878~1879.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눈보라가 치는 길, 전쟁에서 포로가 된 죄수들이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가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들판에서 그냥 주저 앉아 쉬는 것이 전부이다.  
불어오는 바람은 쌓인 눈을 하늘로 올리고 있다.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상황, 모두가 팔에 얼굴을 파 묻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휴식처럼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고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고장이 나서 눈 속에 버려져 있는 바퀴가 마치 역사를 움직이는 바퀴처럼 보인다. 
전쟁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주저 앉게 한다. 
러시아 - 터키 전쟁을 주제로 한 베레시차킨의 작품들에는 
무능하고 무모한 러시아 장군들이 묘사되었다.

결국 러시아 정부와 갈등이 생겼고 알렉산더 2세는 그를 가리켜 
‘인간 쓰레기가 아니면 미친 놈’이라고 했다. 
그는 다시 러시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의 그의 작품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군 관련 위정자들은 병사들과 학생들이 그의 작품 전시회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Road of the War Prisoners, 1878~1879. 
oil on canvas. 181.6 x 280.7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눈 쌓인 길 위로 주검들이 흩어져 있다. 그 사이로 주인을 잃어버린 짐들이 보인다. 
크게 돌아 언덕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있는 이 길은 아마 전쟁 포로들이 끌려 갔던 길일 것이다.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 이 혹한의 길을 무사히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낙오된 포로들은 버려졌거나 살해되었을 수도 있다.

포로로 끌려 가는 길은 그래도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길이었지만, 
길 위에 주검들은 희망의 끝자락도 잡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다. 
길은 문명을 가져 오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야만도 함께 오는 곳이다. 
길 옆 전봇대의 전선 위 까마귀 떼는 마치 진혼곡의 음표처럼 걸려 있다.

 

They celebrate, 1872,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195.5cm x 257cm. Tretyakov Gallery Room 27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그 결과를 알리는 모양이다. 
결과만 자신에게 유리하게 되었다면 과정은 어떻게 되었든 상관 없는 것이 전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고 했다.

사람들 사이로 우뚝 솟은 장대에 걸린 것이 보인다. 사람의 머리이다. 
적의 머리를 베어 전리품처럼 세워 놓았다. 
제3자가 보기에는 야만이지만 당사자에게는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승리의 상징이다.

파리에 도착한 베레시차킨은 장 제롬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그러나 스승인 제롬의 가르침 역시 그가 배우고자 했던 화법과는 맞지 않았다. 
새로운 주제를 찾아 코카서스를 여행하면서 그 곳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스케치하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1867년, 스물 다섯 나이의 그는 투르키스탄에 있는 러시아 군대에 지원한다. 
그리고 사마르칸트 방어전에서 영웅적인 활동으로 그는 러시아 최고의 훈장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참전했던 내용을 그림으로 제작한다. 

 

Moti Masjid (Pearl Mosque), Agra, 1874~1876.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작품의 무대는 인도 북부 아그라에 있는 아그라 요새의 진주 모스크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모스크의 강 건너에는 그 유명한 타지마할이 있다.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흰 대리석이 눈부시다. 건물의 그림자마저도 푸른색으로 담았다. 
계단 아래에서 건물과 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람도 그 아름다움에 취한 모습이다.

전쟁을 묘사한 베레시차킨의 작품은 그에게 상당한 명예와 함께 그의 이름이 러시아 상류 사회에 
알려지는 기회를 주었지만 한 편으로는 러시아를 떠날 수 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참상과 러시아 병사들의 비극적인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몇 몇 작품은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2년 간 러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야만성과 병사들의 죽음, 그리고 모든 전쟁의 파국적인 결과에 대해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고 철학적인 고민이 그의 작품에 담기기 시작했다.

 

Present trophies​, 1872.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The Doors Of Timur, 1872.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Sale Of The Child-Slave, 1872,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Evening on the lake. One of the pavilions on the marble promenade in Radzhnagar 
(Principality of Udaipur), 1874.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Radzhnagar. Marble, adorned with bas-reliefs quay on the lake in Udaipur, 1874.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Afghan, 1867~1868.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A Garden gate in Chuguchak,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Ruins of a Theater in Chuguchak,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Main Street in Samarkand, from the height of the citadel in the early morning,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Chorus of Dervishes, begging, Tashkent. 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Beggars In Samarkand, 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Camel in the courtyard of caravanserai,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Shir Dor madrasah in Registan Square in Samarkand,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Kalmyk chapel,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Kalmyk-lama,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Kyrgyz tent on the Chu River,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retyakov Gallery Room 27

 

The Rich Kirghiz Hunter With A Falcon, 1871.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About the war, 1873,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58.5 x 74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Uzbek Woman in Tashkent, 1873.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Hemis Monastery in Ladakh, 1875.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Taj Mahal Mausoleum  in Agra, 1874~1876,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46.5 x 61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Vehicle of rich people in Delhi, 1875.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The rider in Jaipur, 1780. 1879.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panel. 39 x 26.5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Moslem Servant, 1882~1883.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The porch of the church of John the Baptist in Tolchkovo. Yaroslavl, 1888.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Buddhist temple in Darjeeling. Sikkim, 1874.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Glacier On A Road From Kashmir In Ladakh, 1875.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Fakirs, 1874~1876.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Mounted Warrior In Jaipur, 1881,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7. Vasily Vereshchagin 작품 전시실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Life Is Everywhere. 삶은 어디에나. 1888.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76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시베리아행 열차가 간이역에 잠깐 멈춘 사이, 유형 떠나는 혁명가들이 기차 창틀사이로 햇빛을 즐기며, 
먹기에는 부족한 빵조각을 비둘기에 나눠주며 느끼는 사랑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극한 상황에도 사랑을 실천하며 행복을 느끼는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그림이다.

'삶은 어디에나 (Life is everywhere)'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죄수 호송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쇠창살이 달린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는 차르에 반대하고 개혁을 주장하던 정치범이다.

창가 바로 옆의 젊은 여인과 아기 그리고 머리를 깎은 남자가 한 가족이다. 
아기와 젊은 엄마는 호송 중인 아버지를 따라서 유형 길에 나섰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유형 길에 오를 때 고난의 길에 동행했던 
아름다운 여인들에 대한 숭고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 여인도 사랑의 이름으로 쉽지 않은 삶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동료 죄수들과 함께 아기가 비둘기에게 먹이 주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이 먹을 빵도 넉넉치 않을 형편에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일은 
사치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친 삶을 위로하는 행위이다.

가난할 수록 나누고 척박할수록 풍요로운 영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기원이다. 
두건을 쓴 창백한 젊은 여인과 금발 머리 아기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옛 그림을 연상시킨다. 
비둘기들이 모이를 다 먹기도 전에 기차는 유형지를 향해서 덜컹거리며 떠날 것이다. 
죄수를 싣고 떠난 기차는 더욱 단련된 혁명 전사를 싣고 올 것이다.

​톨스토이는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최고의 감정인 사랑.  
그것의  실천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궁극적 힘이라 말한다. 
그는 자문자답을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인간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이다. 
주인공 미하일은 자신을 돌봐준 구둣방 주인 부부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바로 '사랑'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이다. 
답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견'이다. 
죽음은 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죽음도 삶도 주어진 것일 뿐이다.

세 번째 질문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우리는 바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으로 산다.  
이 소설에  깊은  감동을  받은 야로센코는 바로 이 질문과 답을 시대적 사건을 매개로 형상화했다.

삶은 어디에나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정의를 화폭에 담는다. 
차르에 반대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정치범들의 열차안에도 삶이 생명이 있음을 .. 
형극의 수형길 앞에서도 잠깐의 햇볕을 즐기며 새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눠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 
많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 아님을,   빵조각을 나눠주는 고사리 손을 통해 일깨워준다

화려하지 않아도 빛날 수 있고 가난할지라도 풍요로운 영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엄마의 품에 안겨 미소짓는 아기의 천진한 얼굴에서  우리는 순수의 절대 정의를 읽을수있으며,  
혹한의 미래 앞에 굴하지 않고 찰나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혁명가들의 풍요로운 영혼을 통해서  
러시아의 희망찬  역사를 점칠수 있다는 거다. 
현실의 팍팍함에 투덜대는 내게 일침을 가하는 그런 그림이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감동이 발작처럼 갑자기 그에게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한꺼번에 그의 마음은 녹아내렸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서 있던 모습 그대로 땅에 엎드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센나야 광장 한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는 
달콤한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면서 더러운 땅에 입을 맞추었다>.

그림은 창살 안의 인물들과 아이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날아든 새들로 구성된다. 
새들은 그림 하반부의 정면을 차지하고 있고 
인물들은 정면이 아닌 약간 옆으로 치우친 상반부에 묘사되어 있다. 
죄수 차량 안에 있는 인물들의 시선은 모두 창 밖의 새들에 집중되어 있다. 
정지된 듯한 인물들의 모습은 날개 짓으로 나타난 새들의 동적인 자유로움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왜 새들은 정면에 묘사했으면서 창살 안의 사람들은 측면에 그려놓은 것일까? 
창살 너머로 내민 아이의 손 아래에서 떨어졌을 빵 부스러기를 쪼는 새들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 위의 사람들도 정면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차가 자유로운 세상을 뒤로하고 구속의 땅을 향해 
막 출발하기 시작한 순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닐까?

뒤로 가지 않는 한 기차가 떠나는 방향인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면 
그런 추측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든다. 
이제 막 덜커덩하고 기차가 한 번 움직인 거리인 듯 우리의 시선에서 약간 비껴나간 풍경이다. 
기차는 이미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 안에서 이들이 보고 있는 바깥 세상의 새들은 어떤 모습인가? 

플랫폼을 차지한 새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아이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먹으러 날아들어 먹이를 쪼고 있는 새, 
막 내려 앉으려고 자리를 물색하고 있는 새, 
내려앉아 먹을 기회를 엿보며 목을 빳빳이 긴장한 검은 새, 
그리고 그 옆에서 움츠리고 앉아 또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참새 같이 작은 새. 
모두 두 마리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 작은 놈만 짝이 없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열차 지붕 위에서 꽁무니를 치켜들고 
긴장되게 아래 쪽을 향하고 있는 또 한 마리의 새가 있다. 
새에게 먹이를 주다 보면 옆에서 새들 무리에 끼어들지 못해 
주는 모이도 못 얻어 먹어 마음 짠하게 하는 놈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닥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작은 새가 신호라도 하면 당장 내려갈 양으로 
준비 태세를 갖춘 듯이 모이 쪽이 아닌 작은 새를 향하고 있다. 
힘 센 놈들이 먼저 먹기 마련이다. 
그래도 새들은 창살 안쪽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바깥 세상에 있다. 

빛 바랜 초록색과 황토색이 섞인 낡은 열차 죄수 칸 안에 좌석도 없이 빼곡히 바닥에 
앉아 있을 죄수들 틈에서 창살 너머의 새들에 마음을 빼앗긴 인물들의 표정은 어떤가. 
깡마른 아이 엄마는 한 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자신의 마지막 영양분까지도 젖으로 빼앗긴 듯 지친 얼굴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머리에 쓴 검은 스카프는 
러시아에서 상복으로 쓰이기 때문에 그녀가 상중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남편이라도 죽은 것일까? 
상도 끝나지 않은 그녀는 아이까지 데리고 대체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약간 옆으로 기울인 얼굴의 각도, 지적이면서도상념에 잠긴 듯한 슬픈 표정 등은 
어딘지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수의 고난을 예견하고 걱정하는 마리아처럼 
앞으로 닥칠 아이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근심이 드러난 표정이다.

일반적으로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성상화에서 성모 마리아가 항상 예수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는 반면, 여기서 그녀는 아이의 반대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상념에 잠긴 표정이다. 
그래서인지 성모와는 다른 인간적 고뇌가 느껴진다. 

아이 옆의 사내가 쥐고 있는 빵 조각은 그녀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배를 주리며 남겨놓은 아침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를 안아 올린 손이 창백한 얼굴과 대조되게 붉은 빛을 띤 것을 보면 
아이의 무게마저도 이젠 힘겨운 것 같다. 
그녀의 체념한 듯 부러운 듯 새들을 향한 시선에서 앞날에 대한 걱정이 드리워져 있다. 

침울한 여인의 표정과 대조를 이루는 흐릿하지만 흐뭇한 웃음을 띤 사내는 
귀중한 흑빵을 창 밖의 새들에게 던져주고자 하는 철없는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며 
빵까지 잘게 부숴주는 인정 많은 순박한 촌부의 모습 그대로다.

조금 남은 빵 조각을 쥐고 있는 투박한 손은 그가 살아 온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짧게 깎인 검은 손톱, 굵은 손마디, 꺼칠꺼칠한 피부, 커다란 손바닥과 
짧은 손가락은 평생을 노동으로 일관한 일꾼의 손이다. 
가족을 위해, 그들을 하루 세끼 먹이기 위해 자기 몸뚱이 하나는 
기꺼이 아끼지 않은 순박한 손이다. 
선한 웃음을 띤 그의 표정에서 무엇이든 할 것 같은 우직함과 삶에 대한 긍정이 나타난다. 

메마른 여인과 광대뼈가 드러난 사내의 얼굴과는 대조되는 아이의 둥그스름한 완전함은 
힘겨웠을 고난의 삶을 이겨내며 여인이 지켜낸 아이의 해맑은 표정, 
젖 살 오른 포동포동한 볼, 생기 있는 입술, 통통한 손을 통해 잘 드러난다. 
아이의 하얀 옷과 흰 얼굴이 그들의 순수함과 결백성을 대신해서 드러내는 것 같다. 
창살 아래 가만히 내민 아이의 손은 보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의 뒤에 있는 텁수룩한 수염의 노인은 마치 노년의 톨스토이 같다. 
마을 촌장 같은 이미지의 듬직하고 풍채 좋은 덩치, 강직한 콧대, 넓은 이마를 가진 그는, 
깊이 패인 눈으로 새들을 보는 것인지 아이를 보는 것인지, 
아님 그 둘 다를 보면서 자기 상념에 빠진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이가 펼치는 작은 퍼포먼스로부터 역시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다.

고향에 두고 온, 이제 막 재롱을 피기 시작한 손자 생각이라도 난 것일까?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여생을 보내기 위해 떠나는 유형길이 그에겐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 옆에서 힐끗 곁눈질로 관심을 보이는 옆집 아저씨 같이 생긴 친근한 외모에, 
일용직 노동자 같은 모자를 쓴 사내도 인상적이다. 
풍채 좋은 할아버지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창 밖을 보려고 
아마 까치발이라도 선 듯 약간 기우뚱하고 불안한 자세다.

할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그는 입 꼬리가 약간 올라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고 눈을 아래로 향한 채 바닥의 새들을 주시하고 있다. 
새들을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아마 이 사내인 것 같다. 
그가 부러운 것은 새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아닌 지도 모르겠다. 
부족한 영양 상태를 드러내듯 검게 보이는 마른 얼굴의 그가 부러운 것은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 있는 상황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이 그림에서 마음 한 구석을 답답하게 하는 아픈 부분은 
다른 쪽 창 앞에서 밖을 주시하고 있는 등 돌린 사내의 모습이다. 
그 사내가 없었다면 이 그림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랑곳 하지 않고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사내. 
언뜻 수염도 보이는 듯하고 구리 빛의 얼굴색에 완고해 보이는 얼굴선이 젊지 않은 그의 나이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유형지로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창살 안에 갇혀 버린 듯하다.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문을 닫아 버린 것 같이 무심히 서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도 수 십 년의 유형 생활을 거치고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 
고향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그 무엇에도 관심 없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은 아닐지... 
그런 그의 뒷모습이 마치 앞 사람들의 미래의 모습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사내의 뒷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니콜라이 야로센코 (Nikolai Aleksandrovich Yaroshenko 1846-1898)가 이 그림을 발표한 것은 
1888년 제18회 ‘이동 전람파’ 전시회에서였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여인은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톨스토이 풍이 느껴진다’ 
등의 질문들은 무성했지만 이 그림에 대한 해설은 별로 없다. 
​‘페레드비쥐니키(이동하는 자들)’로 불리던 러시아의 ‘이동전람파’는 
슬라브주의적 경향의 그림들을 선보였던 ‘아브람체보파’와 함께 러시아 회화사에서 양대 산맥을 이룬다. 

이동 전람파 화가 그룹은 1870년대부터 1923년까지 약 48회에 걸쳐 상트 페테르부르그, 모스크바, 
키예프, 하리코프, 카잔, 오데사 등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자신들의 그림을 전시하였다. 
이 그룹에는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 니콜라이 게(1831-1894), 일리야 레핀(1844-1900),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 이사악 레비탄(1860-1900)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이상주의적인 미학과 전통적인 회화 규범을 거부하고, 
일반 민중들의 삶 속에 드러난 ‘민중적 요소들’을 화폭에 옮기려고 하였다. 
이동 전람파 화가들은 그 당시 러시아의 잡계급 인텔리겐치야들, 우스펜스키, 도스토예프스키, 
가르신, 오스트로프스키, 체홉 등등과 교류하면서 비판적 사실주의의 영향도 받게 된다.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과 민중의 생명력에 새롭게 눈뜨면서, 
그것을 화폭에 옮겨 러시아 민중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1861년 농노제 폐지를 단행하여 ‘차르-해방자’로 불렸지만 1881년 ‘인민의 의지’ 당 요원들에 의해 
피살된 알렉산드르 2세 이후 이어진 1880년대 후반의 러시아가 ‘반개혁’의 시기였던 점을 고려하면, 
민중의 삶을 그대로 그린 사실주의적 경향의 그림들이 러시아 곳곳에서 전시된다는 것 자체가 
귀족 사회와 전제 군주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고 민중들에겐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금 각성하게 되는 계기였을 것이다. 

이 그림의 제목 중에서 러시아어 ‘vsudu’는 원래 장소를 나타내는 ‘어디나’ 라는 뜻보다는 
방향을 나타내는 ‘어디로 가나’에 더 가깝다. 
창살 안에 갇힌 그들의 삶은 또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유형지에선 과연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답하고 있다. 
‘어디로 가나 삶’이라고, 러시아 속담처럼 ‘삶은 계속 된다’고…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문학이 모델’​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가들은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들이다. 
러시아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당대 러시아의 삶 자체였다.” 
러시아 미술의 이런 특성은 문학에 빚진 바 컸다. 
19세기 러시아 문화를 이끈 것은 문학이었다고 이진숙씨의 〈러시아 미술사〉는 말한다. 
“푸시킨·고골·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투르게네프·오스트롭스키 등 
위대한 작가들이 러시아 지성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지던 이 시기에 사회에 대한 진지하고도 

급진적인 논의들이 문학비평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미술은 문학으로부터 ‘이야기 특성’만 빌려온 것이 아니었다. 
미술은 문학과 내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고, 작가와 작품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그런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그림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다. 
20년 세월을 바쳐 1858년에 완성한 이 대작에 이바노프는 작가 고골의 얼굴을 새겼다.

희곡 〈검찰관〉(1836)에서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을 예리하게 풍자했던 고골은 
이후 점차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졌다. 
현실에서도 예술 속에서도 해답을 찾지 못한 고골리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는데, 이바노프는 자신의 그림에서 고골리의 그런 마음 상태를 표현했다.

19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크람스코이는 
이 반란에 가담한 13명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묘사된 혁명가들의 
이상적 공동체를 본보기로 삼아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생활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가 이동파의 모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크람스코이는 레프 톨스토이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어 그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안나 카레니나〉에 감명받아 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를 닮은 〈미지의 여인〉을 그렸다.

이동파의 대미를 장식하는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톨스토이의 소설 주제를 그림으로 옮겼다. 
그의 대표작 〈삶은 어디에나〉(1888)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직접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산다고 말한다.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는 죄수 호송열차에 탄 정치범과 그 고난의 길에 동행한 가족을 보여준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가는 열차가 잠시 멈추어 서 있다. 
젊은 죄수의 아기가 호송열차의 창살 밖으로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준다. 
모이를 먹는 비둘기를 보여 잠시 기쁨의 미소를 짓는 죄수와 아내와 아이는 성가족을 연상시킨다. 
“예수가 고난 속에서 사랑의 승리를 성취했듯 그들은 어디에서나 삶을, 생명을 발견할 것이다. 
비둘기들이 모이를 다 먹기도 전에 기차는 유형지를 향해 덜컹거리며 떠날 것이다. 
죄수를 싣고 떠난 기차는 더욱 단련된 혁명 전사를 싣고 올 것이다.”

 

A Student. 학생. 1881.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87 x 60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간혹 이와 같은 눈빛을 그림에서, 주변에서 만나게 된다.
비어 있는 듯하지만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 꿈이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눈빛이다.
가슴에 들어 가 있는 손은 어쩌면 사정없이 뛰고 있는 심장을 지긋이 누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으로도 구별되는 것이 젊음이다. 하여 속 마음을 쉽게 감출 수가 없다.
돌아보면 세월에 실려 가는 동안 심장은 느려지기 시작했고 눈빛은 조금씩 세월 속에 녹아 들어갔던 것 같다.
그림 속 학생을 보다가 언제쯤 저런 눈빛을 가졌을까... 그 때가 그리워진다.

니콜라이 야로센코 (Nikolai Aleksandrovich Yaroshenko 1846-1898)는 폴타바에서 태어났는데, 
당시는 러시아였지만 폴타바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이다. 
이런 경우 야로센코는 러시아 화가인가, 아니면 우크라이나 출신 화가인가? 
미술사에서는 러시아 화가로 분류하고 있다. 
야로센코의 아버지는 군대의 장교였는데 그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게 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들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보고 듣는 것이 친숙하기 때문이겠지만 하늘이 내려준 재주는 감출 수가 없다. 
야로센코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군인이 되지만 군복무를 하면서도 
열 여덟이 되던 해부터는 야간에 크람스코이의 드로잉학교를 다닌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 (방랑파라고도 한다)를 창립해 러시아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였다. ​

3년간 크람스코이 학교에서 공부를 끝낸 야로센코는 
곧 상트 페테스부르그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아마 정규학생은 아니었고 청강생이나 시간이 허락되는 때만 수업을 듣는 학생의 위치였던 것 같다. 
그가 아카데미에 적을 둔 시간은 7년이었다. 
1875년, 스물 아홉의 야로센코는 이동파의 전시회에 참가한다.  

 

Portrait of Actress Pelageya Strepetova. 1884.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4.

이동파는 젊은 화가들 14명이 모여 만든 단체였다.  
이제까지 귀족 중심의 그림 감상을 민중도 참여하게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러시아 전역을 돌며 그림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876년 야로센코는 이동파의 정식 멤버가 된다.  
그리고 1880년대 초 크람스코이가 이동파를 떠나자 실질적인 이동파의 리더로 자리를 잡았다.  

같은 이동파 멤버였던 레핀이 야로센코에게 붙여준 별명은 ‘이동파의 양심’이었다.  
원칙에 충실하고 성실한 그의 자세를 표현한 별명이었다.  
야로센코 작품의 기본 주제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과
혁명애 우호적인 학생들의 적극적인 삶과 모습이었다,   

풍속화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초상화도 남겼는데 그래도 야로센코의 주요 작품은 풍속화이다.  
야로센코는 ‘이동파의 양심’답게 비인간적인 조건 때문에 파괴된 근로자들의 삶을 그림에 담기도 했는데,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들이 마주친 운명에 대해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적인 책임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Portrait of Philosopher Vladimir Solovyov. 1895.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4.

​상트 페테스부르그에 주로 거주했던 야로센코이지만 서부 유럽을 폭넓게 여행했다.  
원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랄지역과 볼가강 유역, 
크리미아 반도와 코카서스 등 그의 발길은 사방으로 이어졌고 
그는 자연에 대한 공부와 함께 수 많은 풍경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1882년부터는 남부 코카서스 지역의 키슬로보드스크에 별장을 짓고 시간이 나면 이 곳을 찾았다.  
그림을 보다가 잠시 잊을 수 도 있겠지만 야로센코의 원 직업은 군인이다.  
1892년, 마흔 여섯의 야로센코는 소장의 계급장을 달고 군대를 제대한다. 장군이 된 것이다.  
그리고 6년 뒤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러시아 화가 중  
가장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제작했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쉰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고 20년 뒤 키슬로보드스크에 훗날 세계적인 소설가 태어난다. 
바로 알렉산더 솔제니친이었다.  

 

The Fireman. 화부 (火夫). 1878.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124cm x 89cm. Tretyakov Gallery Room 24.

화로에 불을 때고 있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기차는 아니고 혹시 선박의 기관실이 아닐까 싶다.
석탄 가루가 묻은 손과 불을 다루기 위해 봉을 들고 있는 손의 팔뚝에는 
간단치 않았던 그 동안의 노동과 세월이 굵은 핏줄로 남아 머리를 향해 달음질 치고 있다. 
그 핏줄은 가슴을 거쳐 등으로 그리고 허벅지와 종아리를 거쳐 발에 이를 것이다.

온 몸을 써야 하는 노동은 그래서 내 몸의 핏줄을 움직이는 일이다. 
그렇게 때문에 당당하지만 한편으로 고단함으로 남는다.
붉게 물든 얼굴, 이마에 자리를 잡은 주름살과 형형한 눈빛은 
그래도 정직하게 온 몸으로 한 세상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 같다.

 

At the Boulevard. 가로수 길에서. 1887. by Vladimir Makovsky. 
oil on canvas. 68 X 53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겨울 초입, 벤치에 앉은 부부의 모습이 애처롭다.  
옆에 보따리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시골에서 도시로 일을 찾아 올라온 것 같다.  
그러나 생각처럼 일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얼굴에는 좌절이 어렸고 눈은 생기를 잃었다.  
남편은 풀리지 않는 삶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겠지.  
부부가 꿈꾸었던 세상은 벤치 뒤 철책 너머이다.  
손풍금을 꺼내 망향가를 불러 보지만 답답한 심사가사라질까?  
어떻게든 겨울을 넘겨야 한다. 부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에서 
"모든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 
라고 소설의 처음을 연다. 
<가로수 길에서> 부부가 만들어내는 쓸쓸한 느낌의 아우라는 
어떤 연유에서 만들어진 불행일까? 
1861년 허울뿐인 농노해방 이후 러시아 현실은 척박하기 그지 없었다. 
수많은 농노들은 토지를 잃고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의 최하층을 구성한다.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으로 전락한다. 
다른 말로 하면 도시 이주 농노들은 춥고 헐벗고 굶주린 최악의 도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로수 길에서>는 이런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하루종일 보드카에 쩔어 사는 젊은 남자가 무릎에 아코디언을 끼고 벤치에 걸터 앉아 있다. 
온몸에 적당히 퍼진 알코올의 힘과 두 손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적 감흥이 더해져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옆에는 시골서 갓 올라온 듯한 그의 앳된 아내가 갓난 아기를 품에 안고 
일하지 않고 돈도 벌지 못하는 남편 곁에서 근심 어린 얼굴로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다. 
곧 눈보라가 휘몰아 칠텐데 아내의 마음엔 이미 걱정이 폭풍우가 되어 내리친다. 
남편의 대책없는 낙관과 아내의 현실 비관이 교차하는 그림의 느낌이 
발밑에 구르는 가을 낙엽만큼이나 메마르고 우울하다. 

이 그림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으로 새로운 틀을 가지기 전에 
보여지는 체제 미성숙을 풍자적으로 꼬집은 장르화다. 
당시 러시아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회화는 가치가 없다라는 예술적 풍토가 만연했다. 
작가들은 붓필의 힘으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스토리 텔러가 되어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정돈 되지 않은 사회, 불평등한 사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찾을 수 없는 사회. 
어디에 서야 할지를 몰라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결국은 알콜에 의존하게 만드는 병든 사회. 
19세기 말엽 제정 러시아의 모습이다. 

<가로수 길에서>는 그림이 주는 메세지 또한 휼륭하지만 

주제를 표현한 회화적 기법이 아주 뛰어나다. 
유화지만 마치 맑고 투명한 수채화처럼 농도가 가볍고 산뜻하다. 
배경의 초록빛과 노란빛의 자연스런 조화, 회색빛 하늘의 쓸쓸한 늦가을 정취, 
오래된 명화의 한 장면처럼 그림이 주는 아우라가 강렬하다. 
그림답다라는 말이 너무도 어울리는 작품이다. 

블라디미르 예고르비치 마코프스키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46~1920)는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인 '콘스탄틴 예고르비치  마코프스키'와 '니코라이 마코프스키'와 형제이고, 
누이동생인 '알렉산드라 마코프스키'도 화가였다. 
러시아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기반이 되는 사실주의 양식에 영향를 끼쳤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마코프스키의 집안은 대단하다. 
아버지는 미술품 수집가였고 모스크바 예술 학교의 설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마코프스키의 아버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타고난 자질에 
집안 환경이 더해진 탓인지 나중에 모두가 유명한 화가가 된다.

​15세가 되던 해, 마코프스키는 러시아 화가들을 소개할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6년간의 학교 성적도 좋았던지 졸업하기 바로 전 해와 졸업하던 해에는 은메달을 수상했다. 
그 뒤로 3년 정도 더 공부를 했는데 학교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당시 학생들의 진학 경로를 참고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아닌가 싶다.

​1870년 공부를 끝낸 마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방랑파(The Wanderers)의 창립 멤버로 참여한다. 
이후 그는 방랑파 소속으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나중에는 방랑파를 이끄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
방랑파는 그때까지 러시아 미술을 좌지우지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대항해서 만든 모임인데 그 멤버들 중 그 학교 출신이 많다는 것이 흥미롭다.

1870년대,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마코프스키는 
두드러진 러시아 사회의 강자와 약자에 대해 관심이 깊어졌다. 
이것은 훗날까지 그의 작품 주제가 된다. 
압제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세계에 대한 그의 연민이 솔직하게 그림에 담겼다. 
서민들에 대한 황제 군대의 학대와 압박도 그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마코프스키의 가슴에는 세상을 향한 불덩어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Date <만남>, 1883. by Vladimir Makovsky. oil on canvas. 
40 x 31.5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부모로서는 자식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지켜볼 때 아마도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께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는 것이 
삶의 가장 큰 행복이고 목표였던 시절에 자주 듣던 말이다.
물론 지금도 다른 형태의 무한 애정을 쏟으며 자식에게 헌신하는 것이 우리 부모들이다.
솔직히 자식을 통해 느껴지는 사랑만큼 벅차고 흐믓하며 행복한 느낌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짝사랑일지라도 말이다.

열살 남짓해 보이는 그림 속의 남자 아이는
어린 나이에 도시로 나와 팍팍한 노동자로서의 눈물겨운 삶을 시작했나 보다.
엄마의 품속에서 좀더 보호 받아야 할 나이로 보이는데 말이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농촌에서의 삶은 아주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굶기를 밥먹듯 했다고 한다.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모들은 어린 아이들을 

도시로 도시로 보내서 끼니라도 연명하게 했다고 한다 .
엄마는 그렇게 떠난 보낸 아들이 그리워 먼길을 찾아온다. .
얼마나 걸었을까? 엄마의 행색을 보아도 그리 쉬운 여정은 아니었을 거라 짐작이 간다.
걱정, 근심, 애틋함, 반가움... 수많은 감정이 엄마의 얼굴에서 교차한다.

얼른 " 엄마 잘 지냈어? 난 괜찮아" 하며 엄마의 하얀 손을 잡아주고 지친 어깨를 감싸주면 좋으련만
무심한 어린 아들은 엄마가 품고 온 빵 한덩이만을 허겁지겁 베어 물고 있다 .
섭섭함이 일기도 전에 엄마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고단함은 잠시 잊어버린다.
분명 엄마도 배고픔을 참으며 달려왔을 텐데 말이다.
그리곤 가슴 한켠에 올라오는 뜨거움과 애틋함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아들을 쳐다본다 .
이들의 랑데뷰는 표현 못할 무엇이 되어 화폭 전체를 메우고 우리의 가슴도 어루만진다.

마코프스키는 이 가난한 모자의 만남을 보여주며 우리 가슴에 잠자고 있는
기본적이고 순수하지만 쉽게 외면해 버릴 수도 있는 절대적 사랑을 차분히 일깨워 준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
요샌 사랑의 척도를 물질로 가늠하는 몹쓸 풍토가 만연하지만
그래도 진정한 사랑은 관계 속에서 서로를 어루만지고 처지를 이해할 때 진정 느낄수 있다.

 

Portrait of the Artist Illarion Mikhailovich Pryanishikov. 1883. ​by Vladimir Makovsky. 
oil on canvas. 70 X 87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어찌 보면 ‘삐딱선’을 타고 있었던 마코프스키였지만 1878년, 
서른두 살의 나이에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다. 
1880년대 러시아 회화가 다양하게 발전되는 ‘민주화’ 시대가 오면서 그의 걸작들이 탄생한다. 
그림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그에게는 신나는 시절이었다.
서른여섯이 되던 해 모스크바 예술 학교의 교수로 임명된다. 
바실리 페로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자리를 이어 받게 된 것이다.

​1880년대 말부터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조금 더 ‘우울’해졌다. 
좀 더 그의 이야기 톤이 높아졌다고 봐야겠다. 
1894년 마흔 여덟의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는데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일흔까지 학생들을 지도한다. 
또 예술아카데미 예비학교의 교장을 맡게 된다. 그는 화가이자 선생님이었다.

마코프스크의 작품은 끝없는 유머와 냉소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풍자가 특징이다. 
초기 작품은 비교적 점잖은 냉소를 깔고 당시의 관습과 도덕 기준을 묘사했는데 
작품 무대는 주로 작은 러시아의 도시들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힘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동정을 비판했다. 
그의 의식 속에 사회적인 문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밑에 깔고 있는 러시아 작품들은 
나중에 정형화된 이념만 걷어내고 보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1870년대,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마코프스키는 
두드러진 러시아 사회의 강자와 약자에 대해 관심이 깊어졌다. 

이것은 훗날까지 그의 작품 주제가 된다. 
압제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세계에 대한 그의 연민이 솔직하게 그림에 담겼다. 
서민들에 대한 황제 군대의 학대와 압박도 그의 눈을 피해가지 못했다. 
마코프스키의 가슴에는 세상을 향한 불덩어리가 있었던 것 아닐까?

1905년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하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제1혁명이 시작된다.  
혁명을 지켜 본 마코프스키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과 같은 약자 편에 선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다. 
마코프스키는 늘 마음에 두었던 힘없고 핍박 받는 사람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완성되고 난 후 2년 뒤, 일흔 넷의 나이로 마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가슴에 담고 그 때 떠났기 때문에 행복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뒤로 흘렀던 역사를 보면 혁명은 혁명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마코프스키는 사실주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연결시켰다.  

 

Episode of the war of 1812, 1812년 전쟁의 에피소드. 1874. by Illarion Pryanishnikov. 
oil on canvas. 76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러시아 화가 일라리온 프리야니시니코프 (Illarion Mikhailovich Pryanishnikov 1840 ~ 1894 )는
티마쇼보(Timashovo, 오늘날의 Kaluga Oblast ) 마을의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56년부터 1866년까지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에서 
Evgraf Sorokin 과 Sergey Zaryanko의 지도아래 공부했다.

1870년에 일라리온 프리야니시니코프는 "1급 화가" 칭호를 받았다. 
187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는 MSoPSA의 교사로 재직했고 그의 제자로 Konstantin Korovin. 
itold Byalynitsky-Birulya, Mikhail Nesterov, Alexei Stepanov 등이 있다.

일라리온 프리야니시니코프는 주로 모스크바에 살았지만 

그는 종종 미술 작업을 위해 러시아 북부를 방문했다. 
그는 1931년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장식에 참여했다. 
모스크바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그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작품 <1812년 전쟁의 에피소드>는 전쟁에 패배하여 후퇴를 하고 있는 프랑스군 병사들의 삽화다. 
질서도 없이 민간인들과 섞여 무질서하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후퇴하는 광경을 그렸다. 
1805년,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물리치며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을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유럽 제패의 걸림돌인 영국을 견제하기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러시아는 영국에 대한 농산물 수출의 길이 막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대륙 체제에서의 탈퇴를 선언하고 영국과의 통상을 재개했다. 
프랑스에게 그런 러시아는 적이었고, 이에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를 직접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폭염 속에서 러시아로 진군했지만, 러시아군은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꾸준히 프랑스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질병과 탈영으로 크게 감소했지만, 모스크바 점령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러시아군이 아직 완전히 궤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러시아인들은 적에게 모스크바를 내줄 바엔 도시를 완전히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많은 나폴레옹의 참모들이 즉시 모스크바를 빠져나가자고 했지만, 17세기 초반  
폴란드와 카자크인 이후에 나폴레옹은 200년 만에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정복한 정복자로써의 자존심을 잃고 싶지 않아했다. 
하지만 10월이 되자 유독 러시아 특유의 혹한이 일찍 찾아 왔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던 병사들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10월 19일, 전면 철수를 하기로 결정한다. 

11월 초가 되자 겨울은 갑자기 찾아왔다. 기온은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졌고, 
막대한 전리품과 식량을 싣고 가던 말들이 먼저 지치기 시작했다. 
겨울에 전혀 대비가 없었던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전리품과 식량을 버리며 후퇴했다.
러시아군의 산발적 공격과 추운 날씨, 거기다 식량문제까지 겹쳐 프랑스군 진영에서는 
영양실조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말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버렸다. 
재앙이 시작된 것이었다. 11월 중순이 되자 애초 60만 대군은 10만 4천 명으로 줄어 있었고, 
나머지는 사망하거나 탈영했다. 

낙오자들의 일부는 러시아군의 전문 추격부대인 코사크기병에 의해 그야말로 도륙 되었다. 
12월이 되자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기온은 영하 40도 가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던 프랑스 병사들은 칼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들고, 
눈꺼풀이 얼어붙었으며, 손가락은 방아쇠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향해 밀려들어간 60만 명의 병력 중 단 3만 명만이 돌아왔다. 
이로써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영국이 워털루전투에서 승리한 1815년, 
프랑스의 국경은 1790년 이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폴레옹시대의 종말이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실패는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기후는 분명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Evening company (A Party). by Konstantin Makovsky. Date unknown. 
oil on canvas. 144 x 108.5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콘스탄틴 마코브스키(Konstantin Makovsky)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초상화가로 
그의 작품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들, 부르주아들의 삶과 일상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는데, 
마코브스키의 아버지 역시 아마추어 화가로, 후에 유명한 모스크바 회화 예술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다.

이러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마코브스키는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했고, 
어린 시절부터 회화와 조각등을 공부하며 화가로서의 면모를 다져 나갔으며, 
1858년 마코브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게되며 
1862년 그곳에서 골드 메달을 수상하게 되는데, 
하지만 다음해 메달을 학교에 반납했고 졸업장도 거부한 채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학생들과 학교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수없지만 화풍으로 보면 사실주의'에 대항한 것이 아닌가 라는 추측이든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낭만적이고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후 그의 정책이 아카데미측에 받아들여져서 
186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Tretyakov Gallery의 홀 24번 방에 있다. 
조명이 어두운 작은 방에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  광원은 갓 아래에서 상승하는 등유 램프다.  
학생들은 테이블 주위에 모여 사모바르가 끓을 때까지 모여 있다.  
테이블이 설정되어 있고 차를 마실 준비가되어 있지만 아무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는다.  
캔버스의 영웅들은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는 어린 소녀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모임은 지하 모임인 듯하다. 

중앙의 소녀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믿고 그녀의 말에 대해 매우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중의 얼굴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있다.  
어떤 이들은 화자의 말을 열심히 듣고, 다른 사람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연설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녀를 인식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련을 극복하고 이 아늑한 방의 벽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어려움을 감수할 준비가되어 있기 때문에 공통의 목표로 묶여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낄 수 있다.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려준다.  
그의 각 그림은 특정 사건에 대한 일종의 이야기이다.  
마코프스키는 러시아 영혼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모두 알고 백성의 운명에 정통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문제를 반영하는 깊은 사회적 주제를 제기했다.  

 

Mental Arithmetic. In The Public School Of S. Rachinsky, <암산, 라친스키 공립학교에서>, 1895. 
by Nikolai Petrovich Bogdanov-Belsky. oil on canvas. 79 x 107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이 그림을 그린 러시아의 화가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리스키

(Nikolai Petrovich Bogdanov-Belsky 1868~1945)는 1868년 12월 8일 러시아 스몰렌스크주 

벨스키(Belsky) 마을 머슴의 아들로 출생하고 라신스키 타트예프(Rachinsky Tatev) 마을에서 공부했다.  
1894년~1895년 벨스키 보그다노프(Bogdanov)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1921년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23년 동안 그곳에서 지냈고 
말년에는 독일로 이주하여 1945년 2월 19일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를린에 있는 러시아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리스키 역시 그림 속 소년처럼 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농민 집안 출신이었으나, 
꿈을 가지고 꾸준히 예술 교육을 받았고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러시아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현실을 바탕에 둔 사실주의적 그림이지만  공통분모는 
많은 작품에 아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그의 작업에 큰 영감이었다.

니콜라이 보그다노프-벨스키가 〈말로 숫자 세기 Oral Counting〉에서 묘사한 
러시아 농촌의 초등학교 수학 수업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품에 등장하는 검정색 나비넥타이의 정장 차림에 학구풍의 금테 안경을 낀 담임 선생님은 
모스코바대학 식물학교수를 지낸 S. A. 라친스키(1832~1902)로 유명한 '나로드니키(인문주의자)이다.
라친스키 교수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몇 마디 말도 없이 칠판에 다음과 같은 수학문제를 적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선생님은 느긋하게 칠판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로드니키는 1825년 '데카브리스트혁명'으로 시작되어 1917년 

프로레타리아 혁명에 이르는 사회변혁운동으로 다양한 이념적 변천 과정에서 

'나로드니체스트보(인문주의)'는 1860년대 후반 이후 러시아 지식인사회를 휩쓸었다.

유럽에서 혁명이 좌절되고 영국 자본주의의 잔혹함에 실망한 러시아 인텔리겐차들이 
사회주의적 전통을 가진 러시아의 농촌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러시아의 독특한 농민공동체 
'미르'의 전통을 살려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사회주의로 나가고자 하였다.  
수많은 학생과 인텔리겐차들이 이러한 신념으로 농촌으로 달려가 1873년에서 1875년까지 
'브 나로드(농민 속으로)'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고 혁명을 선동하였다.

농민은 "그래서 당신들은 네게 땅을 줄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 뿐이었고 
농민의 냉대와 고발 그리고 당국의 대규모 검거로 불운한 인사들을 거의 소탕하였고 
'브 나로드 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이상과 열정으로 평화롭게 세상을 바꿀수 있다고 믿었던 인문주의자들은 차거운 현실에 절망하였다.

이시기 S. A. 라친스키 교수는 자신의 영지인 스몰랜스크 현으로 낙향하여 

타데보라는 마을에 세운 자선학교의 교실 풍경을 화폭에 담은 것이 

바로 보그다노프 벨스키의 <암산(Mental Arithmetic)>이다. 
이 학교 출신이었던 보그다노프 벨스키는 훗날 

그가 공부했던 교실과 잊지 못할 스승을 그린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암산에 몰두하는 아이들이 표정을 리얼하게묘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친스키는 독특한 암산법을 개발하여 가르쳤다고 한다. 
훗날 그의 교육법은 러시아 교육의 모범으로 채택되었고 

차이코프스키에게도 크게 감화를 주어 <안탄테칸타빌레>로 알려진 

<현악 4중주 제 1번 라장조 작품 11>은 라친스키에게 헌정된 것이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를 표방한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스키의 작품들 중 최고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평생 그의 작품 소재로 삼았던 농촌아이들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왼쪽에 있는 선생님이 내주신 수학문제를 암산으로 풀어내고 있는 다양한 학생들의 표정을 통해 
인간이 낼 수 있는 여러가지 표정들과 이런 진지함 속에서 나올수 있는 복잡한 심리상태를 
행동으로 나타낸 재미있는 작품이다.

정답이 뭔지 소곤소곤 지들끼지 토론하는 아이들부터,  턱에 손을 얹고 혼자 궁리하는 아이, 
조용히 몰래 자신이 생각한 답을 선생님께 귀속말로 말하고 있는 아이, 
그런 그 아이가 선생님께 뭐라고 하는지 쳐다보고 있는 아이, 
머리를 쥐어짜듯 괴롭게 여러가지 답안을 생각해 내는 아이까지~
다양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사실주의의 생생함을 느끼게 한 작품이다.

 

칠판을 응시하고 있는 어린이들은 고민을 시작했다. 
선생님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말하는 어린이, 그 어린이가 뭐라고 말하나 궁금한 듯 쳐다보는 어린이, 
그리고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귓속)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어린이도 보인다. 
칠판 아래에는 네 명의 어린이가 서 있는데 왼 편의 두 명은 아직 문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고 
오른편의 두 명은 암산에 들어간 듯하다. 
맨 오른쪽에 있는 두 명의 어린이들은 서로 의논을 하고 있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정면에 위치한 두 명의 어린이다. 
마치 신의 계시를 기다리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어린이는 

실마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뒤통수를 부여잡고 있다. 
그리고 맨 앞에 있는 어린이는 거의 해답에 도달한 듯하다.
못 풀어도 괜찮아 '고민 고민하지 마!' 소년들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서 피식, 웃음이 난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4.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25. ‘숲의 화가’ 이반 쉬스킨 작품 전시실

‘숲의 화가’ 이반 쉬스킨 (Ivan Ivanovich Shishkin 1832~1898) 
이반 쉬스킨은 1832년 러시아의 엘라부가에서 태어났다.
1852년부터 1856년까지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1860년 최고 영예의 금메달을 수상하며 학업을 마쳤다.
이 때 그는 최고 성적을 받은 학생에게 주어지는 정부 장학금으로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862년부터 1866년까지 스위스의 취리히와 독일의 뮌헨, 뒤셀도르프, 체코의 프라하 등지에서 공부했다. 

이반 이바노비치 쉬스킨은 귀국 후 모스크바의 예술가 모임에 참여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교육에 반대하는 젊은 화가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이 모임은 1870년 이동파로 발전했다.
이동파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회를 갖는 미술계의 브나로드 운동으로,
쉬스킨은 화가인 크람스코이와 비평가 스타소프 등과 함께 이 운동의 창립 멤버이자 주요 인물이 되었다.

쉬스킨은 러시아 미술에 '숲의 풍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숲의 황제', '고독한 참나무', '늙은 소나무' 등으로 불렀으며,
크람스코이는 '러시아 풍경화의 길을 연 위대한 교사'라고 그를 칭송했다.
쉬스킨이 그린 숲은 자연 그 자체이며, 삶의 원천으로서
러시아 사람들에게 그들의 대지와 숲이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하며 아름다운지를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특히 그는 북 러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 지역의 토속 식물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다양한 숲의 형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쉬스킨은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로 취임해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 결혼을 했는데, 두 아내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부인은 그의 제자였던 화가 F. 바실리예프의 누이 엘레나로 1874년에 죽었고, 
두 번째 아내는 화가 올가 라고다였는데 역시 1881년 병으로 죽었다. 
1870년대 중반에 쉬스킨은 두 명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까지 겪었지만 
작품에서 만큼은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창작활동 초기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그러한 아픔을 겪고 난 한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기도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말년의 20여 년은 창작에만 몰두, 결국 자신의 화실에서 

‘숲속의 왕국 (Forest kingdom)’이라는 작품을 그리다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 속에는 찬란한 햇빛과 생명의 기운이 넘쳐 나며, 
젊고 강인한 러시아의 기질이 숨을 쉬는 듯하다.
시슈킨은 1898년 66세를 일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으로 '숲속의 양봉(Apiary in a Forest, 1876)', '호밀(Rye Fields, 1878)',
'안개 낀 아침(Foggy Mornign, 1885)', '겨울(Winter, 1890)' 등이 있다.

 

Morning in a Pine Forest. 소나무 숲의 아침. 1889.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213  X 139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소나무 숲의 곰 무리를 묘사한 이 그림은 ‘숲의 화가’라고 불리는 
이반 쉬스킨 (Ivan Ivanovich Shishkin)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이반 쉬스킨과 콘스탄틴 사비츠키 (Konstantin Savitsky)의 공동 작품이라고 한다. 

​처음 이 작품이 발표 되었을 때, 사람들은 쉬스킨이 숲을, 
콘스탄틴 사비츠키 (Konstantin Savitsky)가 곰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따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함께 그렸다. 
그러나 훗날 사비츠키는 자신의 서명을 그림에서 지운다.
자신의 선배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전설이 된 쉬스킨에 대한 예의였다고 한다.
사비츠키, 참으로 멋진 사람이다.

쉬시킨은 러시아의 대자연을 잘 그리는 작가다. 
아침 안개가 신령스럽게 피어오르는 송림 숲에서 곰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녹색, 푸른 색, 옅은 노란색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어둠에서 금방 깨어난 듯 
깨끗한 자연의 느낌은 순수 그 자체이며 직접적으로 햇빛은 비치지 않지만 
곧 숲속 잔체를 수놓을 태양빛의 화려함이 느껴지고 아침이 주는 신선함에 
온 몸이 씻기는 듯한 상쾌함을 준다. 

특히 <소나무 숲의 아침>은 쉬시킨의 대표작으로 1913년부터 러시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초콜릿 포장지 그림으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다. 
잘 아시겠지만 초콜릿은 러시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간식이다. 
그런 초콜릿 포장지 그림으로 쓰일 정도면 이 그림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러시아인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면 초콜릿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Pine Forest in Viatka Province 소나무 숲. 1872.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17 X 165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자연은 인간 삶의 축소판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자연 만물은 태어나면 늙어가고, 그러다 생명이 다하면 세상과 이별하고, 
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다. 
그림 속에는 쭉쭉 뻗은 젊은 소나무가 있는 반면 생명이 다한 듯 초록을 잃은 늙은 소나무도 보인다. 
또 폭풍이 시달렸는지 쓰러진 나무가 보이는가 하면 인간에 의해 잘려 나가 밑동만 보이는 나무도 있다. 
마치 우리 인간들 삶의 한 단편처럼 말이다. 
쉬시킨은 그림을 통해 자연을 보여주며 그 안에서 우리 삶을 반추해 보라 이야기한다.

 

Misty Morning. 안개 낀 아침. 188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08 X 145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숲이 깨어나고 있다. 더불어 숲을 따라 흐르는 물도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밤 숲과 강을 이불처럼 덮어 주었던 안개들이 서서히 자리를 뜨고 걷히기 시작한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숲 속의 순간을 고요하게 잡고 있다. 머리가 맑아 지는 순간이다.
시간이 되면 그는 펜화를 그렸는데 모임에 참가한 화가들은 그의 등 뒤에서 숨을 꼴딱거리며 
그의 어깨 너머로 그가 그리는 펜화를 보았다고 한다.

 

Noon in the Neighbourhood of Moscow. 한 낮, 모스크바 근처. 1869. 

oil on canvcas. 111 X 8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장쾌한 풍경이다. 화면의 3분의 2를 하늘이 차지하고 있다. 세상이 빛으로 꽉 찼다.  
벌판을 가로지르는 길은 황금색 벌판 사이로 끝없이 흰 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멀리 뻗어 있는 길만 보면 발을 멈추는, 눈길을 고정시키게 된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부터 ‘환희의 송가 (Song of joy)’ 라는 평을 받았다. 

 

A Walk in the Forest. 숲 속의 산책. 1869. by Ivan Shishkin. 
oil on vanvas. 34 X 43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햇살 좋은 오후, 가족들이 숲으로 산책을 나왔다.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자작나무도 보인다. 
앞서 가던 개는 나무에 앉은 새가 영 거슬리는 모양이다. 
아버지에게 딸이 무언가를 조르는 듯 하다. 
난처해 하는 아버지의 자세를 보면 아마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쉬스킨은 근처 지역의 스승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모스크바 예술학교를 거쳐 
상페테스부르그 예술아카데미 (Academy of Arts)에 입학한다. 
그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이미 예술가 수준을 넘어섰다’ 였다. 대단한 재능을 보였던 모양이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여름 순례 코스인 바라암 섬에 자주 갔었는데, 자연을 완벽하게 재현하고자 했던 그의 정열이 
바라암 섬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 두 점에 녹아 들어 간 결과,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아르힙 쿠인지가 그린 ‘바라암 섬에서’ 라는 작품도 참 좋다.

 

The Field of Wheat. 호밀밭. 1878.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87 X 107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Cutting of wood(Logging). 1867.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22 x 194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In the Forest of Countess Mordvinov's. Petergof. 189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81 X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Forest Landscape. 1889~1890.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Goutweed-grass. Pargolovo. 1884~188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Evening. 187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In the vicinity of Düsseldorf. 1864~186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Pine Forest in Viatka Province. 1872. oil on canvas.  117 X 165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Oak grove in a gray day. 1873.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34 X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A woman under an umbrella on a flowering meadow. 188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Thickets. 188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42 X 93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At the edge of an oak forest. 1882.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Ferns in the forest. Siverskaya. 1883.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Corner of overgrown garden. Goutweed-grass. 1884.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54.3 X 41.7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The Forest Horizons.(Woodland distance). 1884.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12 X 164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Coast of Oak grove of Peter the Great in Sestroretsk. 188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Oakles. 1886.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37 X 62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The Sun lit Pines. 1886.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70.2 X 102. Tretyakov Gallery Room 25 

 

By the seashore. 1889.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Fir forest. (etude). 1899 ~1890.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55 X 40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Forest Landscape. 1889~1890.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Rain in the Oak Forest. 189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24 x 203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River Kama near Elabuga. 189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06 x 177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Bee families. 1882.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5. ‘숲의 화가’ 이반 쉬스킨 작품 전시실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Children running from the Storm. 1872. <폭풍이 오기 전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167 x 102 cm.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콘스탄틴 마코프스키 (Konstantin Makovsky 1839~1915)
콘스탄틴 마코프스키는 1839년 6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그는 열 두 살이 되던 해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하고 
아버지가 세운 학교가 모태가 된 상트 페테르브르그 종합 예술학교로 진학하여 
2년 뒤부터는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를 시작했고 1869년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다.

비평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고,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의 사실주의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되었다. 
러시아의 중요한 사건을 묘사한 역사화는 그의 또 다른 관심사였으나 1870년 대 중반 
이집트와 세르비아를 여행하고 난 후, 그의 주된 관심이었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문제가 
색과 모양의 예술적인 문제로 작품이 변화되었다.

1880년대 초상화와 역사화의 선두주자가 된 마코프스키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3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대상을 받았고 
그는 당대에 가장 칭송을 받은 러시아 화가이자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화가가 되었으며, 
쉰 두 살이 되던 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다.

<폭풍이 오기 전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지만 벌판 어디에선가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린다. 
놀란 언니는 동생을 등에 업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놀란 동생은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이고,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는 언니의 표정도 불안하다. 
점차 밀려오는 천둥과 함께 바람이 풀들을 흔들고 있는 들판을 걸어온 소녀의 맨발이 애처롭다. 
어렸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천둥이었다. 
하늘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는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소리였다. 
할머니나 어머니에게 안겨 있으면 무서움이 덜했다. 

맨 발의 여자 아이가 어린 동생을 업고 폭풍우를 피해 뛰고 있다. 
이미 바람이 심상치 않고 아이들을 뒤따라 오는 먹구름 또한 예사롭지 않다. 
소녀는 어린 동생을 들쳐 입고 열심히 뛰고 있지만 폭풍우가 그들을 따라 잡을 거 같아 불안하다. 
사실 그림 속의 폭풍우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들 앞에 펼쳐질 험난한 세상사를 말하기도 하고 
바람앞에 등불 같은 러시아의 현실을 풍자한 그림이기도 하다. 
어두운 하늘을 돌아보는  아이의 불안한 표정이 너무도 사실적이며 
몰아치는 바람이 내 피부에도 생생히 느겨지는 것 같다.

 

Portrait of Princess S. Stroganova. 1864.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195 x 138cm. Tretyakov Gallery Room 22. 

콘스탄틴 마코브스키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초상화가이다. 
역사적, 사회적 장면을 그린 작품들도 있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것은 초상화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당시 러시아 귀족들, 부르주아들의 삶과 일상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마코브스키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화가로, 후에 유명한 모스크바 회화 예술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다. 
이러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마코브스키는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했고, 
어린 시절부터 회화와 조각등을 공부하며 화가로서의 면모를 다져 나갔다. 
1858년 마코브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리고 1862년 그곳에서 골드 메달을 수상한다.

하지만 다음해 메달을 학교에 반납했고 졸업장도 거부한 채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학생들과 학교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고 한다. 
화풍으로 보면 '사실주의'에 대항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낭만적이고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1868년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 그는 역사적 그림과 초상화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트의 귀족들부터, 유명인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큰 상을 수상하며 화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일각에서는 그를 러시아 인상파의 선구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백작 부인 스트라가노바의 초상화>
러시아에서 미인을 꼽으라면 그림 속의 여인을 떠올리리면 된다. 
그윽한 눈에, 갸름한 턱 선, 오똑한 콧날, 도톰한 입술, 백옥같은 하얀 얼굴, 
그리고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약간은 거만해 보이는 시선, 도도함을 가지고 있는 이런 여인을 두고 
러시아 사람들은 미인이라 칭한다. 
거기다 우아함까지 덧붙여야 하니 가히 러시아 민족의 미적 기준은 까다롭다 할 수 있다.

 

In Artist's Studio. 1881.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212.4 cm × 155 cm. Tretyakov Gallery Room 22

마코브스키의 작품을 보면 화려한 의상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가 당시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19세기 러시아 살롱 화가로서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현란한 의상과 화려한 묘사를 극적으로 살린 아름다운 초상화들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사회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꼭 인민을 위한 비판적 리얼리즘이 아닌 
서구 낭만주의에 정열적으로 접근한 화가 마코브스키였다

1905년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하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제1혁명이 시작된다.  
혁명을 지켜 본 마코프스키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과 같은 약자 편에 선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다. 
마코프스키는 늘 마음에 두었던 힘없고 핍박 받는 사람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완성되고 난 후 2년 뒤, 일흔 넷의 나이로 
사실주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연결시킨 마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가슴에 담고 그 때 떠났기 때문에 행복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뒤로 흘렀던 역사를 보면 혁명은 혁명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죽음은 조금 어이없는데, 19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트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Dance with Swords. 1881. 검무. by Henryk Siemiradzki. 
oil o n canvas. 120 × 225 cm. Tretyakov Gallery Room 22.

 

겐리흐 세미라드스키(Henryk Hektor Siemiradzki, 1843 – 1902) 는 

로마에 기반을 둔 폴란드 화가로, 그의 기념비적인 학문 예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 - 로마 세계와 유럽의 많은 국립미술관이 소유한 신약의 장면 묘사로 유명했다. 

그의 그림 중 상당수는 고대의 장면, 종종 햇볕에 쬐는 목가적인 장면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타내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는 또한 성서적, 역사적 장면, 풍경 및 초상화를 그렸다. 

겐리흐 세미라드스키는 17세기 말 이래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겐리흐 세미라드스키의 아버지는 러시아 군대의 장교였으며 1871년 장군으로 경력을 끝냈다. 
그러나 가족 안에는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의 분위기가 존재했다. 
그는 예술적 성공을 거두었을 때 언론과 비평가가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에 무관심했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일부 박물관의 국립 예술 부문에 전시되어 있다.

<검무 (Dance with Swords)>는 여성 그룹이 음악을 연주하고 몇 명의 남자가 
시계를 보면서 칼 사이에서 춤을 추는 누드 여성을 묘사한다. 
설정은 이탈리아이며 그림이 정확히 무엇을 묘사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세미라드스키는 4가지 버전의 그림을 만들었으며 각 구성과 색상 구성이 약간 다르다. 
원래 K. T. Soldatenkov가 의뢰한 버전 중 하나는 모스크바의 Tretyakov Gallery에 있다. 
또 다른 버전은 2011년 경매에서 2,098,500 달러에 판매되었으며, 이는 세미라드스키 회화의 새로운 기록이었다. 

London Sothesby 경매장에서 세미라드스키의 검무 (Dance with Swords)가 등장한 것은 꽤나 큰 사건이었다. 
결국, 재포장 된 것은 폴란드가 전쟁 중에 잃어버린 작품 중 하나 일뿐만 아니라 
Jan Matejko와 Józef Brandt와 함께 폴란드 그림의 '3개 바드' 중 하나로 여겨지는 예술가의 작품이기도 하다.

<검무>는 로마 칼이 땅에 똑바로 박혀 있는 가운데 춤을 추는 세 명의 여성과 함께 누드 소녀의 춤을 묘사한다. 
그늘에 앉아 있는 귀족의 무리가 무용수들을 관찰한다. 
따라서 일화는 짧은 서사시보다 조금 더 복잡하며 일반적으로 분수대 옆의 휴식 장면이나 

야외에서 와인을 마시는 것만 묘사한다. 
세심하게 재현된 화려한 장신구, 폼페이우스 스타일의 그림 조각, 호랑이 피부가 석재 계단에 퍼져 있다. 
그림에는 많은 열린 공간이 있으며 전경은 태양 광선이 들어오는 무성한 지중해 식물군이 지배한다. 
세미라드스키의 아들 Leon이 남긴 메모 덕분에 우리는 이 장면이 

시칠리아의 Taormina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은 위대한 학문적 주제에 대한 그의 그림 중 하나이며, 
이 경우 화가의 가장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인 기독교 초기 역사의 장면이다. 
그는 또한 목가적인 작곡을 좋아하여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상상의 삶을 묘사했다. 

 

An Orgy on the Island of Capri. 1881. 카프리섬의 티베리우스 축제. by Henryk Siemiradzki. 
oil on canvas. 120 cm × 225 cm.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겐리흐 세미라드스키는 어린 시절을 하르키우에서 보냈다. 
1864년에 그는 피터스버그 아카데미 예술대학에 처음에는 비등록 학생으로 입학했다. 
많은 노력 끝에 1866년에야 그는 정규 학생이 되었다. 
그는 유명한 전투 화가 Bogdan Willewalde와 Karl Wenig의 후원으로 배웠다. 
아카데미 학생인 세미라드스키는 은메달 5번, 황금 메달 2번을 받았다. 
그는 허미티지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극장을 자주 방문하여 무대 풍경, 장식 및 조명 효과에 주의를 기울였다. 
어린 시절부터 극장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매료되었다. 
1864년과 1865년에 그는 폴란드 지역을 여행했는데 당시 루블린과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1871년에 그는 공부를 마치고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과 닥터 필립 (Philip) 박사의 그림으로 
대상 금메달을 받았고, 그 덕분에 해외 유학을 위한 6년 장학금을 받았다.

1872년 봄 세미라드스키는 짧은 기간 동안 드레스덴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위대한 폴란드 작가 Józef Ignacy Kraszewski와 친구가 되었다. 
그가 베니스와 베로나를 본 후에는 피렌체에서 더 오래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1872년 4월 베수비오 분화를 보고 싶었던 곳 나폴리에 가서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1872년 5월에 영원한 도시에 정착하여 평생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처음에 그는 스페인 광장 근처에 아틀리에를 빌렸다. 얼마 후, 그는 교외에 자신의 빌라를 지었다. 
그곳에서 세미라드스키는 종종 그의 작품에 묘사된 로마와 알바니아 산맥의 멋진 전망을 그렸다. 
세미라드스키의 집은 로마에서 활기찬 폴란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A Scene From the Saint Bartholomew's Day Massacre, 1870. 성바돌로뮤 축제일의 학살 중 한 장면.
by Karl Jacob Wilhelm Huh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칼 훈(Karl Jacob Wilhelm Huhn 1831- 1877)은 러시아의 풍속화, 풍경화가이다. 
이름이 철자가 각각 다르게 여럿으로 표기되어 있고 Huns 훈스라고도 써 있다.  
부친은 선생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는 19살 때 셍페테르스부그로 가서 황립미술학교를 다녔다. 
29살 때 금메달을 받고 일급예술가 자격을 획득했다. 
교회에서 이콘 그림을, 또 러시아 지리학회를 위해 민속 그림을 스케치했다.

1863년 장학금을 받고 독일로 갔다. 그 후 프랑스에 묵으며 살롱전에 출품했다. 
1872년 셍페테르스부그로 돌아와 교수직 받고, 파리에서 시작했던 그림들을 끝내고 

종교적 주제에 몰두하고 이즈음 '이동파'의 일원이 된다.
1874년 결혼했으나 곧 결핵 증세가 나타나고, 

여러 곳에서 요양하다 45세의 나이에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작품의 주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St. Bartholomew's Day massacre)은 기독교의 역사상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부터 10월까지 있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추종자들이 개신교 신도들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샤를 9세 때 어머니인 메디치 가의 카타리나가 아들을 위하여 후견 정치를 하고 있었고, 
프로테스탄트들의 지도자인 나바라의 앙리와 샤를 9세의 누이와의 결혼으로 
화해의 길이 바야흐로 열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카타리나와 기즈 가의 사람들은 1572년 8월 23-24일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에 참석한 

위그노파들을 살해하는 무서운 계획을 시도하기 위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특히 콜리니도 희생으로 쓰러진 이 “파리의 유혈 결혼식”에 이어, 

지방에서 위그노파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잇달았다. 
희생자의 수는 약 3만 명에서 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사건은 세계 역사상 가장 무서운 범죄 중 하나로 낙인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 정치적인 동기가 교회적인 동기를 능가하였다.

이 소식은 곧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신실한 가톨릭교도였던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까지도 
이 소식을 듣고 공포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상복을 입고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제네바에서는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디렉토리 시대의 의상을 입은 아가씨. 1881. by Yuri Yakovlevich Leman. 
Oil on canvas. 170 x 97.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유리 야코블레비치 레만 (Leman Yuri (Egor) Yakovlevich 1834-1901)은
1834년 2월 21일 탐 보프 주 엘라 트마시에서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49년까지 그는 모스크바 알렉산드리아 고아원 연구소에서 자랐고, 
이후 모스크바의 상원 관리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1850-1863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862년에 그는 신랑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그림으로 작은 금메달을 받았다. 
레만은 금메달 경쟁에 참가했지만 메달을받지 못했다. 
1863년에 레만은 5개의 멋진 수채화 초상화로 1급 클래스 아티스트의 칭호를 받고 IAH를 졸업했다.
당시에 레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았다. 
1860년대에 그는 사진 스튜디오 A. I. 의 사진 초상화를 수정하고 채색하는 일에 종사했다. 

1866년부터 레만은 주로 파리에서 살았다. 
파리로 이주한 후 처음 3년 동안 리터처로 일하면서 수채화 초상화를 그렸다.
1870년대 후반부터 레만은 파리의 상류 사회계에서 여성 초상화와 상반신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파리에 정착한 그는 거의 독점적으로 여성의 초상화, 머리, 젊은 여성의 상반신을 그렸다. 

1870년대 후반에 그는 영국에서 몇 달 동안 일하면서 여러가지 의뢰받은 수채화 초상화를 선보였다.
1881년에 그는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1881년부터 이동파 회원으로 초상화뿐만 아니라 장르 구성과 풍경화도 그렸다.
1898년 안구 질환으로 인해 그는 영원히 러시아로 돌아가야 했고 모스크바에 살았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실제로 일하지 않았다.
유리 야코블레비치 레만은 1901년 8월 10일에 사망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묻혔다.

 

At Maecenas' reception room, 1890. 마이케나스 리셉션 룸에서. by Stepan Bakalovich.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화가 스테판 바칼로비치(Stepan Bakalovich 1857-1947)는 

러시아에서 활동한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화가다. 
그는 고대 로마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1936년부터 그는 폴란드 예술가협회의 회원이었다. 

작품의 주제인 마이케나스(Maecenas)와 황제 아우구스투스.
오늘날 우리에게 ‘메세나’(Mecenat)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 마이케나스(Gaius Maecenas)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정치적 조력자로, 
외교와 행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선보인 인물이다. 


새롭게 새워진 제국의 혼란과 갈등을 노련하게 잠재우면서 
황제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던 이 정치가는 흥미롭게도 그 와중에 
호라티우스나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젊은 시인들과 어울리며 전폭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마침내 로마에 문화의 시대를 열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의 이름은 정치가로서 보다는 ‘예술 후원’으로 더욱 빛을 발했으니, 그의 명성은 훗날 베니스 화가 

티에폴로의 <아우구스투스에게 예술을 소개하는 마이케나스>라는 작품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한 사회의 전성이 가시적으로 구현되기까지 거치게 되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제일 먼저가 정치적 안정, 그 다음이 경제적 번영 그리고 맨 마지막에 오는 것이 문화의 발전이다. 
기원전 2세기 경 정복 전쟁에 주력했던 로마의 문화적 번영기는 도래하지 않았으니, 
향후 ‘로또’가 되어줄 엄청난 수의 그리스 미술품을 손에 쥐고도 이를 알아볼 눈이 없었던 로마의 장군 

뭄미우스는 결국 딸의 지참금조차도 제대로 챙겨줄 수 없는 불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무지가 비단 뭄미우스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니, 
무력을 내세워 영토 확장에 사활을 걸었던 로마 지배층 전반에 해당되는 상황이었다. 

이후 로마의 분위기에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바로 뭄미우스 이후 
채 100년이 지나지 않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부터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평화 시대를 열었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BC 63-AD 14)는 ‘돌’로 된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으로 된 로마를 후세에 남겼다는 말로 자신의 업적을 정리했는데, 
그가 남긴 것은 그 외에 ‘마이케나스(Maecenas)’라는 걸출한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술품 수집을 둘러싼 로마 황제들의 좌충우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이유로 

컬렉션에 몰두하는 컬렉터들의 양태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 하다.

 

Michael of Chernigov at the camp of Batu Khan, 1246, 1883. by Vasily Smir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바실리 스미르노프는(Smirnov Vasily Sergeevich 1858년~1890년)는 
고대 역사의 장면을 전문으로 한 아카데믹 스타일의 러시아 화가다.
그는 러시아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친척인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직업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1875년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78년 그곳에서 전시회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받았다.

같은 해에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있는 Imperial Academy of Arts 로 편입하여 
Pyotr Shamshin 과 Pavel Chistyakov와 함께 공부했다. 
1882년에 그는 폐의 "만성 카타르" 로 인해 아카데미에서 휴가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예술가"라는 칭호와 유학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비엔나를 경유하여 이탈리아로 갔고 결국 로마에 정착했다. 
여름 더위가 너무 심해서 그는 토리노로 이사를 갔고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살롱에서 전시했다. 
북서부 유럽을 여행한 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일종의 멘토가 된 Vasily Savinsky와 함께 살았다 .

1885년에 그는 고전 주제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었던 폼페이에서 스케치를 그렸다. 
다음 해에 그는 "네로의 죽음" 작업을 시작했으며, 완성하는 데 2 ​년이 걸렸다. 
이 작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보냈고 여러번의 전시 후 차르 알렉산더 3세가 구입했다.

1889년 그는 아카데미 부교수가되었지만 폐 질환이 계속 악화되면서 잠깐 머물렀다. 
이탈리아의 기후는 유익한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끝이 가까웠음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 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쿠빈카(Kubinka)와 골리치노(Golitsyno) 사이의 기차에서 이동 중에 사망했다. 
그의 형은 1891년에 여러 미완성 그림을 포함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했다.

미하일 프세볼로도비치 (Saint Michael of Chernigov, 1185년경 ~ 1246년 9월 20일)는 
류리크 왕조 출신으로 키예프 대공국의 대공(재위: 1236년 ~ 1240년, 1240년, 1241년 ~ 1243년)이다. 

프세볼로트 4세 대공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2세 공작의 딸인 아나스타시아(Anastasia)이다.
키예프 대공에 즉위하기 이전에는 페레야슬라우 공국의 공작(1206년),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 공작(1219년 ~ 1226년), 체르니히우 공국의 공작(1223년 ~ 1235년, 1242년 ~ 1246년), 
노브고로드 공화국 공작(1225년 ~ 1226년, 1229년 ~ 1230년), 갈리치아 공작(1235년 ~ 1236년)을 역임했다.

1238년 야로슬라프 3세(블라디미르의 야로슬라프 2세 대공)의 뒤를 이어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다. 
1240년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 군대가 키예프를 정복하면서 키예프 대공국은 붕괴된다.
1241년에는 폐허가 된 키예프의 통치자가 되었다. 
1243년 체르니히우 공국으로 귀환했지만 킵차크 칸국 군대에 의해 처형당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Portrait of Princess M. Orlova-Davydova. 1880.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Portrait of V. Morozova. 1884.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2 전시실

 

The sick husband, 1881. 병든 남편. oil on canvas. by Vassily Maximov. 
oil on canvas. 70.8 x 88.6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바실리 막시모프 (Vassily Maximovich Maximov. 1844-1911) 
막시모프는 농가에서 태어나 일찍 고아가 되어 이콘제작소에서 일하며 그림을 처음 배웠다.  
19살에 황립예술학교 입학, 1864년 "아픈 아이"를 그려 재학생 금메달 수상.  
3년의 학교를 마친 1865년, 크람스코이가 이끌었던 14명의 학생처럼, 
막시모프는 학교의 메이저 금메달 경연대회에 불참한다.  
막시모프는 이 금메달의 부상으로 가는 유럽 유학보다는 러시아 농촌에서 그림공부하는 쪽이 낫다 생각했다.  
그는 슈비노 마을로 이주하여 귀족 자제에게 그림지도를 하며, 농촌의 삶을 그렸다.

그림 속 병상에 누워 있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남편을 보살피던 여인은 털썩 무릎을 꿇고 그녀가 섬기는 신에게 하소연한다.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꼭 그를 데려가야 하는가에 대한 절규인지... 
그림에서 처럼 보통 러시아 가정은 집안의 가장 성스러운 곳에 이콘을 걸어놓고 기도를 올린다. 
그래서 러시아 일반 가정집에 초대 받았다면 집안 어디에 이콘이 걸려있는지 
살펴보고 기본적인 예를 갖추는 것이 좋다.

아내는 이콘화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바로 옆 침대에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병이 들어 누워 있는 남편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치마 밑으로 살짝 보이는 그녀의 맨발과 침대 아래 놓인 남편의 쓰러진 신발이 애처롭다.

​남편이 누워 있는 침대도 나무 위에 짚을 깔고 모포를 그 위에 깐 것이다. 
가난한 생활에 남편까지 병들었으니 이 부부의 앞날이 그을린 마루 바닥 같은 색일까? 
그런데 울어 본 사람은 알지만 눈물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많지 않다.
눈물은 절망의 가장 밑 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빛을 막기 위해 창에 걸어 놓은 천도 이제 곧 내리게 될 게다.

막시모프는 상페테르부르크에서 140km 정도 떨어진 노바야 라도가 근처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부였는데, 어려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가 수도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이콘 화가의 견습생 일을 시작한 것이 열 한 살 때였으니까,
부모를 여읜 것은 그 이전이나 그 언저리쯤의 나이가 아닐까 싶다. ​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는 부모의 마음만큼 절절한 것이 또 있을까?

 

Everything is in the past. 1889. <모든게 다 지난 일이야>. by Vassily Maximov. 
oil on canvas. 72 x 9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겨울의 차가움을 끝내고 봄의 화사함을 즐기는 두 노인.
귀족과 하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뒤로하고 함께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피붙이처럼 보내며 세속의 어떤 구속도 뛰어넘는 삶을 견디고 있다. 
소파에 몸을 기대 할머니의 표정이 아련하다. 
땅 바닥인데도 발 받침을 깔아 놓았고 테이블 위에는 고급 그릇들이 놓여 있다.

​한 때 아주 부유했던 모양이다. 
그 옆의 노인은 시중을 드는 역할인 것 같은데, 두 여인의 표정이 대조가 된다. ​
소파에 앉은 여인은 하늘을 보고 있고 계단에 앉은 여인은 땅을 보고 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바로 앞의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전에는 꽤 근사했을 집이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햇빛 아래 서 있는데, 
할머니에게는 그 것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모든 과거는 소중한 것이지만 지금 내가 당당하게 땅을 밟고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법이다.

1872년, 막시모프는 이동파의 멤버가 되었고 가입하자 마자 곧 이동파의 중요한 그리고 열성적인 멤버가 된다.  ​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이동파의 취지가 맞았으니 흥이 날 수밖에 없었겠다. 
막시모프의 작품에는 러시아 농민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이야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처럼 다가 오기도 한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Detail (부분)

허공을 바라보는 노파의 시선엔 그리움이 가득하다. 
찬란하게 빛나던 젊음의 시간 속에 인생의 굽이마다 널려 있던 아련한 사연을 떠올린다. 
그런 그녀를 위해 햇살은 아름다운 교향곡을 울려준다. 

나이 들고 병들어 육신의 계절은 차디찬 겨울이지만 
과거에 두고 온 젊음을 떠올리며 이렇게 또 하루를 견딘다.
노파는 보라색 라일락이 만개한 화려한 계절을 따라 타임머신을 타고 있다. 
과거를 아련히 떠올리는 표정엔 만감이 교차한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Detail (부분)

묵묵히 바느질하고 있는 여인은 하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무채색으로 이뤄진 그녀. 
지금의 밝은 햇살이 고마울 따름이지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 봄날은 없다. 
오히려 머리맡에 앉아 뜨개질 하던 지난 과거를 지우고 싶은 듯하다.

세월의 눈이 하얗게 내려 앉은 그들은 
하나의 사모바르 (러시아 차주전자)에서 차를 따라서 함께 마신다. 
신분의 고하를 떠나 두 노인은 이미 서로를 의지하는 친구가 되었다. 
험난했던 인생의 골짜기 굽이굽이 마다 함께 견뎠을 그들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려 앉는 것, 
평생을 함께 해온 인생의 동반자로서 이 순리에 순응하며 끝까지 생을 함께 할 것이다. 
반상의 차이는 물리치고 인간으로서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갈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조용히 가르친다.

이 한편의 그림에서 그들이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며 
현재를 읽으며 그리고 함께할 미래를 가늠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삶도 그들과 함께 그림 속에 투영된다.
“그렇게 우린 그림에서 인생을 배우고, 삶을 느낀다.”

 

A Sorcerer comes to a peasant wedding. 1875년.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
by Vassily Maximov. oil on canvas. 116 x 188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장면은 겨울 해질 무렵 노브고로드의 한 농가의 방이다. 
결혼 축하연이 벌어지고, 성스런 이콘 아래 신랑 신부가 자리잡고 있다. 
돌연 눈을 잔뜩 뒤집어 쓴 주술사가 방으로 들어온다. 
초대받지 못한 것에 대해 심술이라도 난 듯 주술사의 이미지가 뾰로통하다. 
부모님은 빵과 소금을 들고 황급히 주술사를 맞이하고, 신랑 신부는 놀란 듯 일어선다. 
사람들은 소곤거리기도 걱정스런 눈 빛을 보내기도 한다. 

키가 아주 큰 주술사는 손에 목발을 짚고 마을 주민들을 쏘아본다. 
그러자 그들은 돈주머니로 손을 옮기고 있다. 
모두가 주술사가 어떤 말을 쏟아낼 지 긴장한 듯 보인다.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마을 사람들에겐 빛을 주고 
주술사가 서 있는 쪽은 어둠에 묻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 에서 주술사 부분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에서 신랑 신부 가족들 부분 

 

Grandmother's tales, 1867.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by Vassily Maxi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3.

우리에게도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 얘기를 
화롯가에서 듣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 
막시모프는 1867년 "이동파"의 전시에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Grandmother's tales)를 내어 
입상하고 파벨 트레치코프가 구입한다.  

1872년 "이동파" 회원이 된 후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주요 화가이다.  
일리아 레핀은 막시모프를 가리켜, "이동파' 모임에서 가장 부서지지 않을 기반석"이라 평하기도.
1900년 전후로 러시아 사실주의는 쇠퇴했는데도 막시노프는 여전히 농부의 삶만 그려서 
그림 구매자가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말년은 가난과 질병의 삶이었다.  
상트 페테르스부그에서 사망했다.

 

Repairing the Railroad, 1874. 철도 복구작업. oil on canvas. 100cm x 175 cm. 
by Konstantin Savitsky. Tretyakov Gallery Room 23.

화가 콘스탄틴 사비츠키 (Konstantin Savitsky 1844~1905)
1870년 크람스코이에 의해 조직된 ‘이동 전시협회 (이동파)’는 러시아 미술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화가였지만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이동파 멤버들은 러시아 민중의 신산스러운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장엄한 풍경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담아냈다.
그 멤버들 중 한 명인 콘스탄틴 사비츠키에 대해 알아본다.

얼마 전 내린 비로 작은 산사태가 일어 났던 모양이다. 
철길을 다시 살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자세히 보니 대부분 나이 많은 사람이거나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들이다. 장비도 변변치 않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지구 끝까지 연결되어 있는 철길들은 
대부분 이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 철길에 담긴 눈물은 얼마나 될까? 철길이 열리면서 부를 쌓은 계층은 따로 있다.
​이 작품은 사비츠키의 대표작이 된다.

사비츠키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항구 도시인 타칸로그에서 태어났다.
이 곳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안톤 체홉도 있다. 
사비츠키 식구는 타간로크 남자고등학교 건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학교에 거주하는 의사였다. 혹시 관사 같은 곳 아니었을까?

 

Ikon on the road, 1878. 이콘 환영식. by Konstantin Savitsky. 
oil on canvas. 144 × 230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마을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담긴 이콘화가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경배를 올리고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도 보인다.
이 그림이 마을의 평화와 가족의 행복을 지켜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콘화는 그림이 아니라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사비츠키는 부모를 따라 해변가에서 스케치 하는 것을 좋아했고, 
드로잉 과목은 가장 좋아하는 학교 수업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갑자기 그의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오늘날의 라트비아에 살고 있던 삼촌이 사비츠키의 보호자가 된다. ​
삼촌은 그를 사립 기숙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사비츠키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얼마 되지 않아 우등생 중 한 명이 된다. 
좋아하는 것을 잘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여러번 은메달을 땄던 사비츠키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작품으로 마침내 금메달을 수상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비츠키는 2년간 유럽 여행을 다녀온다. 
이 시기에 많은 러시아의 젊은 화가들이 서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상파 화풍을 접했지만 그 기법을 바로 수용한 화가는 거의 없었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사비츠키는 이동파의 멤버가 된다. 
민중 속으로 들어 가고자 했던 이동파에게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주제였다. 
상대적으로 인상파는 주제보다는 기법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인상파 기법이 러시아 미술에 정착되는 데는 시간이 다소 필요했다.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귀국한 화가들에 의해 바로 인상주의가 자리를 잡은 미국과는 차이가 난다.

 

Morning in a Pine Forest, 1886. 소나무 숲의 아침. oil on canvas. 139 x 213 cm. 

소나무 숲의 곰 무리를 묘사한 이 그림은 ‘숲의 화가’라고 불리는 
이반 쉬스킨 (Ivan Ivanovich Shishkin)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처음 이 작품이 발표 되었을 때, 사람들은 쉬스킨이 숲을, 사비츠키가 곰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따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함께 그렸다. 
그러나 훗날 사비츠키는 자신의 서명을 그림에서 지운다.
자신의 선배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전설이 된 쉬스킨에 대한 예의였다.
사비츠키, 참으로 멋진 사람이었다.

사비츠키는 민중의 삶의 실제를 그림에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동파 대부분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개인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이것도 이동파 풍속화가들의 특징이 되는데 바실리 막스모프나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의 작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사비츠키는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동파 멤버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차르 체제 아래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비평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끝없이 묘사한 중요 멤버이자
러시아 혁명 전에 가장 뛰어난 풍속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사비츠키는 화가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모스크바, 펜자 
그리고 상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20년 넘게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개인 삶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1897년, 쉰 셋의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니까 
화가로서 사회적인 지위도 확실했다. 
사비츠키는 예순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사비츠키가 세상을 떠나고 9개월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12년 뒤, 러시아 혁명이 완성된다.
혹시 그가 그 때까지 살았다면 그가 평생 애정을 담고 그림에 담았던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회를 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The road in the rye, 1881. 호밀밭 길. by Grigory Myasoyedov. 
oil on canvas. 65 x 145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러시아 회화의 대가 그리고리 마이소도프(Grigory Grigorievich Myasoedov 1834-1911) 

역시 이동파 그룹에 속해 있었다.
마이소도프는 툴라 지방의 판코보(Pankovo) ​​마을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853년 그는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861년 마이소도프는 "지주 꾼의 집에 있는 젊은이에게 축하"라는 작품으로 작은 금메달을 받았다. 

1862년 그는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리투아니아 국경에 있는 선술집에서 나온 Grigory Otrepiev의 탈출"이라는 작품으로 큰 금메달을 수상했다. 
1863년 그는 이탈리아, 독일, 벨기에, 스위스를 방문하여 파리와 스페인에서 일했다. 
로마에서 그는 사립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869년 그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The Conjuration" 그림을 그렸고, 이로 그는 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1860년대 후반 해외에서 마이소도프는 이동파 협회를 조직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1870년 12월 16일, TPHV 회원들의 첫 번째 총회가 열렸고, 
그곳에서 마이소도프를 포함한 이사회가 선출되었다. 
그는 TPHV의 첫 번째 헌장의 저자가 되었으며 40 년 동안 이사회의 영구 회원으로 남아 있다. 
1871년 11월 29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의 이동파 순회 미술전시회가 열렸고 
이어서 모스크바, 키예프, 하르코프에서 전시되었다. 

 

Before confession, 1877. 고백 전. by Alexey Ivanovich Korzukhin. Oil on canvas. 

러시아 장르 화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코르주힌 (Alexey Ivanovich Korzukhin 1835년~1894년)은 
예카테린부르크 근처의 금광 채굴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지역 철도 공장과 조폐국에서 일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58년에 제국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861년 그는 여행 경비로 금메달과 금일봉을 받았다. 


그러나 1863년에 그는 사실주의를 선호하고 회화에 대한 아카데미의 주장에 
항의하는 학생들 그룹인 "14 명의 반란" 의 일원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예술 공동체인 Artel of Artists에 합류하여 1871년 해산될 때까지 그들과 함께 했다. 
그는 또한 이동파의 회원이 되었다.
 
일상 그림 외에도 초상화와 종교 작품을 그렸다. 
그는 1881년 차르 알렉산더 2세의 극도로 피비린내나는 암살을 목격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신경 쇼크가 발생 했으며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Wake for a Deceased Merchant, 1870. 죽은 상인을 위해 깨어남. by Zhuravlev Firs. 
oil on canvas. 98 x 142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러시아 장르 화가 Firs Sergeyevich Zhuravlev (1836-1901)는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다니며 역사 회화를 공부했다. 
1863년에 그는 리얼리즘을 지지하고 아카데미의 고전 스타일을 장려하려는 주장에 
항의하는 학생 그룹인 "14명의 반란"의 일원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i)와 함께 그는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워크샵을 공유하고 공동 가정을 유지하는 화가 그룹인 이동파를 설립하는 데 참여했다. 
1862년부터 1874년까지 그는 농민 생활에 대한 많은 묘사에 내재된 사회적 비판으로 인해 
혁명 집단과의 유대 혐의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아카데미에서 그의 첫 번째 전시회는 1868년에 열렸고 6년 후 작품 전시로 
그는 "아카데미션"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888년과 1889년에 그는 이동파의 전시에 참여했지만 정식 회원이 되지는 못했다. 
그는 또한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00주년 박람회, Universelle 박람회 (1889) 및 
1896년 전 러시아 전시회에 참가했다 .
유화 외에도 그는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과 리가의 탄생 대성당을 
장식하는 일을 도왔고 구세주 성혈교회의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3 전시실

 

 

 

 

[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 작품 전시실

 

이반 크람스코이 (Ivan Nikolaevich Kramskoy 1837-1887)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미술 비평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 그룹인 '이동파'의 창시자이다.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일리야 레핀과 니콜라이 야로셴코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낸 스승이기도 하다.
 
1837년 러시아 오스트로고쥬스크 시의회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863년 아카데미 졸업 작품 주제에 반발해 다른 13명의 학생들과 함께 작품 주제 선정의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졸업 직전 아카데미에서 나왔다. 
스스로를 '14인의 반란자'라 칭하며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을 결성한 이들은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에 들어갔다.

1870년 이반 크람스코이는 비평가 스타소프(V.V. Stasov)와 

전격적인 합의로 '러시아 이동 전시 협회'를 창립하였다. 
여기에는 일리야 레핀(Ilya Repine),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이사크 레비탄(Isaak Levitan) 등 19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러시아 화가들이 참여했다. 
이 그룹은 여러 도시를 이동하면서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이동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몇몇 특수한 사람 만을 위한 미술 전시회가 아닌 모든 사람이 함께 미술품을 감상하고 즐기자는 취지로 
거의 해마다 개최된 이 전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지었다.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 작품 전시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미술은 세계 미술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자기만의 색을 드러낸다. 
러시아 미술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동파'가 등장한다. 
이동파는 정치적.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고 했던 지식인들 중심의 민주적인 미술 유파였다.

세계 미술사 곳곳에서 미술이 정치와 갈등을 일으킨 적은 있지만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한 미술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의 추구라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이동파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이반 크람스코이다. 
크람스코이는 뛰어난 화가이자 탁월한 미술 비평가였으며, 
레핀과 야로센코와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 낸 스승이자 이동파를 결성한 탁월한 조직가였다.

그는 19세기 후반기 러시아 문화계의 대표적인 민주 인사였다. 
지방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크람스코이는 귀족과 농민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직종의 중간 계급을 뜻하는 소위 잡계급 출신의 전형적인 러시아 인텔리겐챠였다. 

그의 활동과 작품은 당시의 '양심적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 준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그린 자화상은 이런 사회적 책임 의식에 가득 찬 지식인 크람스코이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 준다.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인물의 지성이 강조되어 있다. 
사선으로 뜬 깊은 눈은 날카로운 지성으로 번뜩인다. 
창백하게 야윈 뺨과 부스스한 머리칼은 그가 고뇌하는 지식인이라는 인상을 더한다.

 

Self Portrait. 이반 크람스코이 <자화상> 186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크람스코이의 자화상은 '1860년대 전형적인 지식인 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텔리겐치아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헌신적으로 만연한 사회악과의 고독한 싸움을 수행해 나갔다. 
크람스코이가 남긴 여러 그림에는 이런 지식인적 책무에 충실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크람스코이가 지식인으로서, 또 화가로서 러시아 미술계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사건은 1863년 크람스코이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직전에 시작된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 주제로 얼마 전 일어났던 농노 해방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농노 해방은 더 큰 불안 요인이 되어 사회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이 주제를 학생들에게 그리라고 하는 것은 차르의 치적을 찬양하라는 의도였다. 
크람스코이를 포함한 열 네 명의 학생들은 이에 반발해 졸업 작품 주제 선정의 자유를 요구하며, 

졸업 직전 집단 자퇴를 한다. 
화가로서의 안정적인 길을 포기한 이 겁 없는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14인의 반란자'라고 불렀다. 
아카데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예술아카데미의 교수이며 레핀의 스승이었던 크람스코이는 
러시아 미술계의 방향을 틀은 ‘14인의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예술아카데미의 정형화된 교육에 반대하여 몇몇의 뜻있는 화가들과 결합하여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열고 이로부터 이동파, 방랑자파 등의 러시아의 새로운 화파가 등장하게 된다.

14인의 반란자들은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을 결성한다. 
이것은 1863년에 발표되어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생활 공동체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또 이런 생활 공동체에 관한 생각은 러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전시 공동체인 

이동파의 탄생을 예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1860년대 러시아 화가들은 광범위한 활동을 통해 

보다 조직적인 단체를 결성할 수 있을 만큼 세력을 키워 갔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던 바실리 페로프를 중심으로 한 여섯 명의 화가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화가들 사이에 공동체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1870년 크람스코이와 비평가 스타소프의(V.V. Stasov) 전격적인 합의로 '이동 전시 협회'를 결성함으로써  
마침내 미술사에 '이동파'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이동파의 목표는
첫째, 러시아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대 예술 작품의 감상 기회를 주는 것,
둘째, 러시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함양하는 것,
셋째, 작품 판매를 보다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한편으로는 미술계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관과 중앙 귀족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컬렉터 층을 확보해 작가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려는 의도였다.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이동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특수한 몇몇 사람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술계 브나르도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 말) 운동이었다. 
거의 해마다 개최된 이 전시들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지었다.

반면 아카데미 미술은 급격히 쇠퇴해갔다. 
위기감을 느낀 아카데미가 1893년 거장 레핀을 교수로 영입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이동파는 재야 조직으로서의 의미가 다소 퇴색하기는 했지만, 
1923년 마지막 전시를 갖고 혁명 정부 하에서 조직 개편을 위해 해체되기까지 
무려 52년간 존속했던, 세계 미술사상 유래 없이 장수한 화가 그룹이었다.

일리야 레핀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는 

러시아 사실주의 발전의 공로자이고 이동전람파 결성의 주역이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은 문학과 음악 분야 뿐만 아니라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이 수도사인 정교회의 이콘 화가들을 제외하고, 서구 화풍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의 근대 화가들은 
주로 황실에 소속되어 황제 일가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실주의적인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 

민중들의 일상적 삶의 풍경이나 러시아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1860년대에 들어와 인텔리겐치야들의 영향을 받은 바실리 페로프와 같은 화가들은 

술을 마신 성직자나 마을의 어린이, 장례식 등과 같은 

러시아 민중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

러시아 민중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사실주의 화풍은 187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반 크람스코이의 주도로 결성된 이동전람파가 그것이다.
이동 전람파 화가들 사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크람스코이는 
인물의 외면적인 모습만을 재현하는 초상화 기법과 아카데미즘 화풍의 구태의연한 기법에서 벗어나 
러시아 민중들에게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들을 선보였다.

크람스코이는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
우리 같은 관객들이 보기에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는 자신의 기법을 바꾸지는 않았다. ​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흔들리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쉰 살이던 해 크람스코이는 의사 라우흐푸스의 초상을 그리다가 
손에 붓을 든 채로 이젤 앞에서 세상을 떠난다. 
크람스코이다운 마지막 순간이었다. 
​라우후푸스의 초상화는 미완성인 채로 남았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1873)>, <황야의 그리스도(1872)>,<산지기(1874)>,<미지의 여인 (1883)>,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막에 홀로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Unknown Woman. <미지의 여인>. 188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75.9 x 99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는 시대에 대한 의무와 정의감에 넘치는 인물들을 주로 그렸다. 
1873년에 발표한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화는 위대한 사상가의 결단과 
강인한 정신이 크람스코이 특유의 한색 계열의 색감으로 표현되었다.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었고 
크람스코이를 모델로 미할코프라는 인물을 창조하였다. 

한편 크람스코이는 1883년 <미지의 여인>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의 모델이 바로 톨스토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라는 설이 유력하다.
<미지의 여인>은 크람스코이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늘 진지하게 설명하던 크람스코이는 이 작품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매혹적인 미인은 높은 마차 위에서 관람자를 내려다 본다.

그림을 어느 높이에 걸든 그녀가 내려다보기 때문에 우리는 경외심을 갖고 올려다 볼 수밖에 없다.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여인은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전형적인 러시아 미인이다. 
그녀는 경멸하는 듯 유혹하는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카리스마에 설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추측만이 나돌았다. 
후대의 미술 사학자들은 이 그림을 다시 톨스토이와 관련시켰다. 
바로 톨스토이 소설의 여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다.

소설 속에서 안나는 검은 머리에 짙은 회색 눈동자를 가졌다고 묘사되어 있다. 
안나가 브론스키와 처음 사랑을 교감하게 될 때 그녀는 검정 벨벳 드레스 차림이었다. 
지금 마차에 탄 안나는 브론스키가 기다리고 있는 파티 장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 길의 끝에는 지독한 운명적인 사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그림은 그 아찔한 아름다움 만큼이나 아찔한 위험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크람스코이 작품이 처한 위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아카데미 화풍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아카데미즘적인 화법은 기본적으로 실내의 인공 조명 아래서 인물을 그리는 방식이다.
그림에서 여인은 실내가 아니라 거리 한복판에 있는데, 

희뿌연 안개에 잠긴 도시 풍경으로부터 분리된 듯이 느껴진다. 
즉 크람스코이는 야외에서 인물을 그린다는 것의 의미를 회화적으로 풀어내지 못한 것이다.

9년 전 1874년 파리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최초의 전시회가 열렸다. 
파리의 화가들은 고전주의적 화법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의 색채의 자유로움을 향유했다. 
이에 비추어 보면 흑백사진을 연상케 하는 단색톤의 크람스코이의 그림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크람스코이는 색채의 매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몇 명 안 되는 작가들(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모든 화가들을 조롱했다. 그러나 미래는 그들의 것이다." 
탁월한 안목을 지닌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하지만 실제 그림을 그리는 데에서는 인상주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기 방식은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크람스코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숙기에 접어든 이동파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명민한 크람스코이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다. 
우리 러시아 이동파 화가들에게는 형식은 없고 내용만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이 형식의 문제를 풀어낸 사람은 그의 제자이자 이동파의 다음 세대인 일리야 레핀이었다.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화가였던 크람스코이는 1887년 3월 24일 
<닥터 라우흐푸스의 초상>을 그리다가 손에 붓을 든 채로 세상을 떠났다.

 

Unknown Woman.1883. <미지의 여인>, Detail (부분)

시선처리가 하단부로 되어 있다. 
복장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전형적인 러시아 사람의 복장을 하고 있다.  
보라색 벨벳소재의 옷이 보라색 마차와 잘 어울리고 있다. 
황금색 팔찌라던지 모자에 달린 술도 나름 패셔너블하다. 
주변 배경처리를 황사처리해놔서 그런지 주인공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크람스코이가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고위 관료의 아내였던 안나는 어느 날,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우연히 브론스키라는 귀족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 운명적인 만남 이후 브론스키는 보수적인 상류사회에 억눌려 있던 안나의 

열정과 자유를 일깨워주었고, 둘은 폭풍과도 같은 사랑에 빠져 버린다. 
그리고 안나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을 버리고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은 안나에게 자신의 행복했던 삶을 

'아무것도 아니었던 무료한 삶' 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존경하는 남편을 권위적이고 따분한 관료로, 행복했던 가정을 인형의 집처럼 의미없는 공간으로, 
우아한 귀족부인을 사랑에 목말라하는 한 여인으로 뒤바꿔 버린 것이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불륜이었다. 
안나는 사교계에서 냉대를 당했고,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안나와의 스캔들로 브론스키의 명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철저하게 혼자가 된 안나는 점점 브론스키에게 집착하게 되고 

그럴수록 안나에 대한 브론스키의 마음은 식어갔다.

행복보다 가문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시하는 남편의 위선적인 태도, 불타는 사랑이 식자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버린 브론스키에 대한 불안함,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에 견디지 못한 안나는 결국 상트 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서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전쟁과 평화>,<부활>과 함께 톨스토이의 3대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예술가로서 가장 원숙한 시기인 1873년에서 1877년에 걸쳐 쓴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 받는 작품이다.

1870년대 러시아 귀족 사회와 러시아 농노해방 이후 변화하기 시작한 사회상, 

남녀의 애정 심리가 150명이 넘는 등장 인물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만들어 낸 사회 제도와 구조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진실을 파헤쳤다.
<안나 카레니나>가 시대와 언어를 초원해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 그룹인 이동파의 수장이었던 이반 크람스코이는 
1883년 <미지의 여인>이라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발표하는데, 
이 작품의 모델이 바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이다.

사실 크람스코이는 톨스토이와 각별한 사이로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할 때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린 적도 있다. 
크람스코이는 <안나 카레니나>에 큰 감명을 받았고 주인공 안나를 그리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정열적이고 순수했던 안나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4년의 작업 끝에 완성한 안나의 초상, 

눈 덮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거리의 정적을 깨고 마차 한대가 멈춰섰다. 
그 위에는 화려한 차림의 한 여인이 앉아 있다. 
도도한 표정과 어딘지 모를 처연한 느낌의 눈빛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당신이 안나인가요?  그러나 화가는 이 작품에 <미지의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모델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겨 놓았다.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든, 또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것은 우리가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Portrait of Leo Tolstoy. <톨스토이의 초상>. 1873. Oil on canvas. 79.5 x 98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는 대문호 톨스토이와 친교를 맺고 그린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1873) 또한 유명하다. 
말년에는 밝은 색채를 많이 썼고 그의 초상화는 눈의 표정이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크람스코이는 시대에 대한 책임감과 정의감에 넘치는 인물을 주로 그렸다. 
특히 그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미술관 설립자 트레티야코프는 마치 인물 박물관을 만들려는 듯이 
여러 화가들에게 러시아 문화계와 과학계 인물들의 초상화를 주문했다.

1873년에 트레티야코프는 크람스코이에게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주문했다. 
크람스코이는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의 모습을 남기는 것은 

후대를 위해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해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몇 번이고 이 제안을 고사했다.

이 일과 관련해서 트레티야코프는 크람스코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매력을 능력껏 발휘해서 톨스토이를 설득해 주십시오." 
결국 톨스토이는 크람스코이 앞에서 포즈를 취했고, 두 예술가는 서로의 인격에 매료되었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작가들이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렸다. 
니콜라이 게는 툴라의 영지에서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톨스토이를 그렸다. 
일리아 레핀은 숲에 누워 책을 읽고 있거나, 작업복 차림으로 밭을 갈고 있는 톨스토이를 그렸다. 
이것들은 초상화에 에피소드적인 요소를 가미한 그림들이었다.

이와 달리 크람스코이는 진검 승부를 했다. 

사상가이자 지식인인 톨스토이를 정면으로 그린 것이다. 
크람스코이가 그린 톨스토이는 소박한 러시아 농부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미남은 아니지만 위대한 사상가의 풍모가 느껴진다. 
깊은 생각에 잠긴 톨스토이의 얼굴에는 결단과 강인한 정신성이 느껴진다.

크람스코이 특유의 한색 계열의 색감은 톨스토이의 금욕적 도덕성을 강조한다. 
크람스코이가 톨스토이를 그렸듯이 톨스토이도 크람스코이를 그렸다.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었고 
크람스코이를 모델로 미할코프라는 인물을 창조했다. 
톨스토이가 묘사한 미할코프는 예민하고 열정적이며 매우 지적인 화가였다. 

이 작품은 날카로우며 다부진 풍모가 먼저 다가오는 초상화다. 
지성미에서는 다른 작가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상주의자라기 보다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인상이다.
같은 모델을 놓고서도 화가의 주관과 개성, 세계관에 따라 
그 특징을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크람스코이의 초상화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깊은 고뇌의 표정과 이지적인 인상이 두드러진다.

그들은 현실에 대해 불안해 하지만, 현실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기도 하다. 
크람스코이는 전형적인 잡계급 인텔리겐치아 출신이다. 
잡계급이란 19세기 러시아의 귀족, 성직자 계급과 농민, 서민 계급 사이의 중간 계급으로, 
지식인을 비롯하여 출신과 직업이 다양하고 의식적으로는 진보 성향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계급 출신답게 크람스코이는 사회의 부정과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깊이 고뇌했다. 
그리고 그 고뇌의 흔적을 초상화에 고스란히 쏟아 놓았다.  
자연히 그의 톨스토이는 다른 누구의 톨스토이보다 현실의 모순을 깊이 성찰하고 
엄격한 자기 통제와 진지하고 이성적인 탐구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려는 위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청록색 화면과 돌처럼 다부져 보이는 모델의 인상이 
이런 자기 통제와 이성의 힘을 반영한다. 볼수록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초상화다.

 

Christ in the Wilderness. 1871. < 광야의 그리스도>.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180 x 215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다시 아침이 밝기 시작했다. 
황무지와 바위투성이인 광야에서 기도를 시작한 지 꽤 오랜 날들이 지났다. ​
맨발의 그리스도는 밤새 올린 기도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 두 손을 풀지 않고 있다. 
먹을 것도 없고 밤의 찬 기운을 피할 곳도 없는 생활은 
얼굴을 핼쑥하게 만들었지만 눈빛은 점점 깊어 가고 있다. 
지금 세상과 다가올 세상에 대해 새로운 약속을 준비해야 하는 길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

이 그림은 크람스코이의 기념비적인 작품인데, 
작품을 통해서 그는 사회에 대한 도덕성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
그리고 도덕성은 그가 평생 가지고 갔던 기준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두고 ‘내가 본 그리스도 중 최고’라고 말했다 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무렵 크람스코이에게 중대한 일이 일어난다. 
학교에서는 졸업 작품으로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할 것을 지시했지만 
그를 중심으로 한 친구들이 학교의 지시를 거부한 것이었다. 
자유로운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결국 크람스코이를 포함, 총 14명은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한다. ​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해 가는 길이 평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림의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마귀의 유혹을 뿌리친 성경 말씀을 그린 것이다. (마태복음 4장)
크람스코이는 참혹한 현실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과 악을 향해 
고뇌하는 참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황야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준다. 
바위에 주저 앉은 예수의 흙투성이 발,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며 생긴 
흉터 투성이의 발을 그려 녹녹치 않은 현실을 가늠케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신음하지만 어떤 불의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크람스코이의 굳은 의지를 예수의 깍지 낀 손에서 느끼게 한다.

광야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Wilderness)는 크람스코이의 대표 작품으로, 
종교적 주제를 도덕적, 철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인본주의적 전통을 계승했다.  
예수의 이미지에 깊은 심리적 해석으로 극적인 경험을 불어 넣어서 
고뇌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려낸 러시아 종교 미술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사막에 홀로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 1926)의 시에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Tretyakov Gallery Room 20. 크람스코이 작품 전시실

 

Inconsolable grief, 1884. <위로할 수 없는 슬픔>. by Ivan Kramskoy. 
22.8x14.1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제목이 아니어도 그림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지가 매우 무겁다. 
​검은 옷을 입을 여인은 수건으로 입을 가렸지만 흐느낌마저 막을 수는 없다. 
흐트러진 앞머리 밑, 여인의 눈은 슬픔을 넘어 절망에 빠진 모습이다. 
시간이 지나면 절망에서 나오는 법을 알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

슬픔도 힘이 된다는 말을 믿었던 적이 있다. 
지나고 보니 슬픔은 슬픔이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의지였다. ​
여인에게 슬픔이 세상 끝까지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

그런데 도대체 여인은 누구를 떠나 보낸 것일까.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저만큼 깊은 상처를 준 것이라면 
아무래도 남편이나 부모보다는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를 길러본 사람은 그 의미를 안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에 만연해 있던 외도와 스캔들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뒤에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역시 이 작품은 자식을 잃은 크람스코이의 아내를 그린 것이었다.    

Inconsolable grief, 1884. <위로할 수 없는 슬픔> Detail (부분) 

크람스코이의 아내를 그린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은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갤러리 20번 방에 걸려 있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러시아미술관’에 소장된 것을 비롯하여 

두 개의 다른 버전들을 본 적이 있다.  
이만한 그림이라면 아마도 더 많은 에튀드(습작)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걸작의 에튀드들을 보노라면, 우리가 찬탄하는 최종작품이 나오기까지 
작가가 어떤 고심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에 대해 가졌던 신비감이 어째 덜해지는 부작용도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좋고 싫은 것들은 그처럼 양날의 칼인 경우가 많다.  

 

Portrait of Pavel Tretyakov. 1876.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설립자 파벨 트레티야코프 초상화
모스크바에 있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러시아 4대 유명 미술관 중 하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9세기 말, 러시아 최대 재벌이던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Tretyakov 1832-1898)가 세웠다. 


그는 1854년(22살)부터 시작해 거의 생애 끝까지 40년간 작품들을 수집했다. 
당시 러시아 미술 수집상들은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 작품을 즐겨했지만 
트레티야코프는 본토 작품에 몰입했다. 
그는 전시회를 찾아 다녔고 직접 작가의 스튜디오를 찾아가 그림을 샀다. 
1856년, 파벨은 자택을 미술관으로 만들었고 1892년에는 작품과 미술관을 모두 국가에 기증했다. 
한 개인이 소장한 것들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재벌,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가다. 
이 미술관은 긴 세월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명성은 자자하다. 
현재 러시아 미술의 메카로 러시아 미술사를 관통하는 보고(寶庫)다. 
러시아 미술 전공자에게 필수 방문 코스가 됐고 여행객이라면 필히 가봐야 할 곳이다.

 

Portrait of Vera Tretyakova, Wife of the Collector Pavel Tretyakov. 1876.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미술관 설립자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아내인 E. A. 트레티야코바

 

Moonlit Night. <달빛 서린 밤>. 1880.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178.8 x 135.2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약간은 새초롬하고, 약간은 거만하게 그러면서도 섹시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 
달 빛이 따스하게 비치는 연못가에서 상념에 잠겨 있다. 
크람스코이에 의해 탄생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매력적인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분위기를 모두 품고 있다. 

세계적인 단편작가 안톤 체홉도 이 그림을 보고 자신의  희곡 <갈매기>에서 
항상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여 주인공 니나를 탄생시켰다하니, 그림 속 여인의 위력은 대단하다. 
이 여인의 이미지를 그대로 눈에 담고, 체홉의<갈매기>를 읽어 보자.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의 모델이  
미술관 설립자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아내인 E. A. 트레티야코바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Sophia Kramskaya Reading. 1863. <독서 중인 소피아 크람스카야>.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64.5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그림의 제목을 보면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은 크람스코이의 아내 소피아인 것 같다. ​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타고 넘은 다음 
그녀가 읽고 있는 책에 내려 앉았다. 
​독서 중인 그녀의 얼굴이 책에서 반사된 빛으로 환하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독서삼매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더욱 고혹적으로 만들었다.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은 언제 봐도 좋다. ​
용감한 14 명의 ‘안주인’다운 모습이다.

아카데미를 나온 14명의 용감한 젊은 화가들은 집과 화실을 나누어 쓰는 모임을 만들게 된다. ​
이들의 뒷바라지는 크람스코이의 아내인 소피아의 몫이었다. 
‘새우잠을 자도 함께라면 행복한 것’이 신념이다. ​
크람스코이는 젊은 화가들을 위한 드로잉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재능 많은 선생님이었던 그에게서 배운 학생 중에는 일리야 레핀과 야로센코도 있었다.

 

Portrait of Sophia Kramskaya, the Artist's Wife. 1879. 크람스코이의 아내 소피아 크람스카야 초상화.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Ivan Kramskoy Working on Portrait of his Daughter, 1884. 크람스코이의 딸 초상화 작업.
oil on canvas. 76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Nikolay Kramskoy, the Artist`s Son. 1882. 화가의 아들 니콜라이 크람스코이 초상화.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The Actor A. P. Lensky as Petruchio in Shakespeare`s Comedy "The Taming of the Shrew". 188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셰익스피어 코미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Petruchio 역을 맡은 배우 A. P. Lensky 초상화.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렌스키(1847-1908 )는 러시아 배우, 연극 연출가.
렌스키는 러시아 연극의 리얼리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했다. 
한 사람의 내면 세계와 현실과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는 연극은 

실생활의 예술적 재현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에서 그의 매력, 미묘한 유머 및 우아함이 두드러졌다. 
그는 러시아 연극을 개혁하고 높은 문화와 연극 교육을 우선시하며 창의적인 영감, 
높은 기술 장면 및 연기 예술을 돌보았다. 

감독으로서 그는 난간을 내부 섹션과 모서리로 교체하여 날개를 제거하는 등 
무대에서 회전의 사용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그는 1888년 부터 모스크바 극장학교에서 연기 과정을 가르쳤다. 
그는 연출 기법과 연기 예술에 관한 수많은 에세이를 썼으며, 이는 많은 관심과 영향을 미쳤다. 
렌스키는 1908년 10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Nikolay Nekrasov in the Period of "Last Song" 1877~1878.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니콜라이 네크라소프(1821~1878))는 러시아의 시인, 작가, 평론가, 잡지 편집자이다.
네크라소프는 난폭하고 거친 성격을 가진 아버지가 농노를 학대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농노의 아픔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을 집필했다. 
1840년에는 자신의 첫 시집인 <꿈과 울림>(Mechty i Zvuki)을 출간했고 
1847년에는 표트르 플레트뇨프로부터 문학 잡지 
<소브레멘니크>(Sovremennik, 현대인)를 인수하고 문학 평론가, 잡지 편집자로 활동했다.

문학 잡지 <소브레멘니크>는 비사리온 벨린스키, 이반 투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급진주의 문학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1866년에 알렉산드르 2세 황제 암살 시도 사건을 계기로 발매가 금지되었다. 
1868년에는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과 함께 문학 잡지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Otechestvennye Zapiski, 조국의 수기)를 인수하고 편집자,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878년 1월 8일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치되었다.

 

Portrait of Writer Alexander Griboyedov. 1873. oil on canvas. ​68 x 58.5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Actor Vasily Samoilov. 1881.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a poet and artist Taras Shevchenko. 1871.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artist Alexander Dmitrievich Litovchenko. 1878.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writer Mikhail Evgrafovich Saltykov (N. Shchedrin). 1879.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Woodsman. 1874.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Adrian Viktorovich Prahova portrait, art historian and art critic. 1879.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88.5 x 69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Dr. Sergei Petrovich Botkin. 1880. by Ivan Kramskoy.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a Girl with Hat. 188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a Woman.1885.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Herodias​. 1884-1886.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Girl with a Tress. 187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Mermaids (Based on Night in May by Nikolai Gogol) 인어들. 1871.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painter Ivan Shishkin. 화가 이반 쉬쉬킨의 초상. 187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78 x 110.5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Vera Nikolaevna Tretyakova. 1876.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poet Nikolai Nekrasov. 1877.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Doctor Sergey Botkin. 1882.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Woman with an Umbrella. (In the Grass. Midday). 188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 작품 전시실

 

Night on the Dnieper, 1882. <드네프르강의 달빛 어린 밤>,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104 x 143cm. Tretyakov Gallery Room 21.

화가 아르힙 쿠인지 (Arkip Kuindzi, 1842~1910) 
우크라이나의 음류시인이라 일컬어 지는 아르힙 쿠인지의 집안은 원래 그리스 출신이다. 
쿠인지의 아버지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그나마도 
그가 어려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리고 만다. 
친척집에 맡겨진 쿠인지는 일찍부터 옥수수를 팔거나 
사진을 수정하거나 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성장한다.

어린 시절 운 좋게도 친척의 친구 중에 교사가 있었다. 
그를 통해서 쿠인지는 기초교육을 받았다. 
역시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어서인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벽, 울타리, 자투리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청운의 꿈을 안고 상페테스부르그 예술아카데미 (Academy of Arts)에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두 번째도 실패하지만 끈질긴 이 젊은이의 열정에 예술 아카데미는 
그를 정원 외 학생이라는 조건으로 문을 열어준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독일,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대가들의 작품도 공부하고 , 많은 친구들도 만든다. 
그러나 귀국 후 그의 작풍을 보면,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56세가 되던 해 그는 아카데미에서 풍경화를 지도하는 교수가 된다. 
그는 학생들이 그가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창의력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도 배우기를 원했고 실제로 대단히 열성적으로 지도 했다. 
학생들도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항하는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이틀간 집에 감금된 후에 교수직을 박탈당 한다. 
그래도 그는 개인적으로 학생들을 계속 지도하였다고 한다,

교수직에서 해임 된 다음 해, 자신의 비용으로 젊은 화가들을 해외로 보낼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하여 아카데미에 10만 루블을 기탁하고 또한 자신의 이름을 붙인 단체를 만들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림과 돈, 자신 소유의 크리미아 반도에 있던 땅을 모두 기부한다. 
이 모두가 모두 젊은 화가들을 위한 배려였다.
중년부터 말년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침묵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물었자 그가 대답했다.

“ ... 예술가는 가수처럼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한,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야 하지. 
그러나 목소리가 더듬거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바로 은퇴한 후 자신을 숨겨야 해. 
그동안 나는 명성을 쌓아 왔어.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했고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러나 내 목소리가 더듬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더 이상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사람들은 쿠인지이라는 화가가 있었다고 말하겠지. 그러나 나는 영원히 쿠인지로 남고 싶어...“

실제로 그는 가끔 친구들을 화실로 초대해서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곤 했는데 
하나 같이 친구들의 넋을 놓게 한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스스로에 대해 경계했던 쿠인지의 깔끔한 면모를 엿 볼 수 있다 

쿠인지의 <드네프르강의 달빛 어린 밤 (Moonlight Night on Dneper)>은  
그림이 시가 되고 시가 그림이 되는 작품이다.  
그림 속 드네프르강은 짙은 어둠 속에 휩싸여 있으며 청아한 달빛에 물들어 있다.  
마치 눈 앞에서 생생히 펼쳐지듯 노란 색의 강한 달빛은 
서서히 녹색빛을 품으며 가장자리로 퍼져나가고 있다.  
색채의 움직임이 탁월하다. 

이 작품으로 쿠인지는 대중들의 우상이 되었다.  
중앙에 떠 있는 달은 점차 옮겨 가며 빛을 뿌리고 있다.  
작품 전체에 깔린 낭만을 어떤 말로든 표현하고 싶은데 도대체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일반적인 기법으로 이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의 평가였다.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여기에는 고집스러운 그의 노력이 밑에 깔려 있다.  
그의 화실은 일종의 연구소 같았는데 그 ‘연구소’에서 색깔의 성질, 그림자의 성질,  
자연과 색상과의 관계에 줄기차게 매달렸고 마침내는 이런 걸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A Birch Grove, 1879. <자작나무 숲>. oil on canvas, 97 x 181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자작나무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라고 한다.  
풀 밭에 내려 앉은 부드러운 햇빛과 숲을 돌아 멀리 사라지는 길 위로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관객들은 몇 시간씩 이 작품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사실적이면서도 정형화된 기법이지만 표현력이 풍부한 이 그림은 그가 늘 추구했던,  
표현력이 가득 찬 구성이 나타나 있다.  
끝없는 스케치를 통해서 나무와 풀 밭을 완벽하게 배열하고 색깔의 구성을 통하여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햇빛이 전시관 벽을 뚫고 그림 뒷면에 닿아 있는 느낌 때문에 관객들은 그림의 뒤로 돌아가서  
다른 빛이 있는지 확인했다고 하니까 대단한 반응을 얻은 것은 확실하다. 

 

Dnieper in the morning, 1881. <드네프르 강의 아침>,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105 x 167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끝을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마음 둘 곳 모르네.
눈물 되어 흐르는 이슬을 머리에 이고
희미하게 터오는 여명을 마주한 채
강을 따라 흐르는 물안개에 내 마음을 싣네.

또 하루가 시작되면 그대 향한 그리움도 고개를 들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의 목마름이 더욱,
그리움의 속살을 파고드네.

어느 누가 답해줄 수 있을까. 그 끝이 머지 않았다고.
어느 누가 전해줄 수 있을까. 그 마음 변치 않았다고.

끝도 보이지 않는 벌판을 흘러가는 강물 위로
사랑을 떠나보낸 이들의 그리움이 일제히 피어나네.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지는 그리움 때문에 눈앞이 흐려지네.

끝내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마저 놓쳐 버리고,
강물에 채 몸을 싣지 못한 물안개 한 아름
흘려보내지 못한 그리움의 덮개를 삼아 가슴 깊은 곳에.

흐르는 강물 위로 태양이 떠오르네.
그대 그리워해도 좋을 하루가 다시 시작되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끝을 알 수 없어 더욱 커지는 그리움에 나를 맡겨
흘러흘러 그대 곁으로 가리니.

 

Evening in Ukraine, 1878. <우크라이나 저녁>.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81 x 163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석양 빛이 동네를 감싸고 있다. 이 작품도 시와 같은 느낌이 가득하다. 
빛에 의한 색깔의 변화로 전체를 구성하는 그의 능력은 
화실에서 끝없이 그가 반복적으로 실험한 결과였다.
그런 노력 끝에 얻은 테크닉으로 그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달빛 어린 밤과 
그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Ukrainian Night, 1876. <우크라이나의 밤>.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79 x 162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위 그림과 같은 구도이다.  
전형적인 우크라아나 시골집에 밤이 찾아 왔다. 
조그만 언덕 위에 마을이 서 있고 포플러 나무는 위로 뻗어 있다.  
고요와 침묵이 만상을 덮고 있다.  
그러나 달빛은 얼마나 맑은지 마을의 길과 집을 환히 비추고 있다. 
이 작품이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 출품되었을 때 같은 러시아 화가들로부터는 환호를,  
외국의 비평가들로부터는 대단한 관심을 받았던 작품이다

 

The North, 1879. <북쪽>.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1.

이 작품도 연작 중의 하나다.  
아마 호수에서 바라 본 북쪽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에는 쿠인지의 상상과 추억이 있지 않았을까?

 

On a Valaam Island, 1873. <발라암 섬에서>.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76 x 103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쿠인지가 라도가 호수로 여행을 하면서 그린 연작 중의 하나이다.  
바닥에 뒹구는 나무와 컴컴하고 뻑뻑한 숲, 화강암 돌 덩어리에 눈을 맞추다 보면 숲 어디선가 
조용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러시아의 깊고 깊은 전설을 이야기해 줄 사람이 나올 것 같다. 
이 작품이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신문들은 쿠인지의 재능에 대해서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After a Rain. 1879. oil on canvas. 102 x 15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n Abandoned Village, 1874.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1.

 

Ukrainian Landscape, <우크라이나 풍경>. by Vladimir Orl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1.

드네프르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한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앉았다.
강 건너 마을은 햇빛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고 강은 

저 멀리서 크게 몸을 뒤틀며 지평선을 향해 사라지고 있는데,
​장쾌하게 펼쳐진 풍경 속에 앉아 있는 사내도 점차 그 속으로 녹아 들고 있다.

거대한 바람개비를 달고 있는 건물은 아마 방앗간 같은 건물이 아닐까 싶다. 
간혹 이런 풍경 속에 빠져들고 싶다.
시선은 거리낄 것 없어 무한대로 뻗어가고 바람 소리, 풀잎들이 서걱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곳,
그 곳에 있으면 온 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깨어날 것 같다.

블라디미르 오를로프스키(Vladimir Orlovsky 1842-1914)는 당시에는 러시아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그를 선생님들이 상트페테스부르그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 추천서를 써 줄 정도였으며, ​재학 중일 때 은메달을 수상, 
1868년 스물 여섯의 나이에 학교를 졸업하면서 금메달을 수상하였고, 
자신이 졸업한 상트페테스브르그 아카데미의 풍경화 담당 교수가 되었다.

작품의 크기와 사실적인 풍경 모사는 독특한 그만의 스타일로 자리를 잡았고 
오를르프스키는 풍경화의 대가로 우뚝 서게 되었고, 쿠인지의 영향을 받은 오를로프스키에 대해 
‘사실적인 러시아 풍경화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화가’라는 평가가 주어졌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스부르그의 상류층이 오를로프스키의 주요 고객들이었지만 
곧 그의 작품은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는다.
아울러 명성이 올라가는 동안 그에게 작품 주문은 계속 되었고 
그의 작품을 구매한 사람 중에는 알렉산더 3세도 있었다.

그는 풍경화에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다.
작품 제작은 아주 신중하고 꼼꼼하게 진행되었고 장식성이 포함되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동시에 두 가지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을 하나로 묶는 그의 재능은 타고 난 것이 아니었을까?
일흔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고향에서도 많은 작품을 그리지 않았을까?

 

Tretyakov Gallery Room 21 작품 전시실 

 

 

 

[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he Rooks Have Come Back.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 1871.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62 × 48.5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 (Aleksei Kon Dratevich Savrasov 1849~1860)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하고 사망했다.
이동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서 많은 풍경화가를 배출했다.
대표작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1871)는 러시아 풍경화의 걸작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미를 서정적으로 파악하연서 
동시에 전혀 새로운 뜻을 더해 주고 있다는 데에 특색이 있다.

러시아 자연의 풍부한 표정을 최초로 주목한 것은 이동파 화가들이었다. 
이전에 아카데미 풍의 풍경화는 아름다운 풍경, 곧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아름답고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이란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남국의 이상향을 연상시키는 그림, 
구체적으로는 이탈리아 같은 지중해 지방을 그린 그림이었다.

추운 겨울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러시아의 자연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함양 하고자 했던 이동파는 풍경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이동파 풍경화가들은 조국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그려질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시골 모습을 고스란이 담아낸 19세기 대표적인 풍경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는 심오하고 가치 있는 삶을 화폭에 담아냈다. 
1871년 딸의 죽음 이후 예술활동의 위기가 찾아왔다. 
결국 알콜중독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지생활을 하다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는 러시아 무드 풍경화를 처음 연 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의 봄 그림이다. 
한국의 봄은 알록달록 꽃피고  새 우는 그런 환한 햇살 속의 자연을 말하는 거지만 러시아의 봄은 다르다. 
그림에서처럼 눈이 반쯤 녹아 곳곳에 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세상 만물이 겨울을 털어내고 새롭게 약동하듯 기지개를 편다. 
까마귀가 날아 오는 풍경에도 봄의 온기를 받아 만물이 살아나는 느낌, 
꿈틀대는 공기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러시아 봄의 시작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는 사브라소프의 최고의 작품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어느 흐린 날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자작나무 위로 어수선하게 산까마귀 떼가 날아든다. 
언덕 아래에는 러시아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조교회가 눈에 띈다. 
화면은 언덕 능선에서 가로로 잘려 있어
원근법적 깊이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 작은 신의 집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만큼이나 소박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의 위력을 느끼게 하는 장관도 아니고, 
물레방앗간과 오리들이 있는 아기자기한 전원풍경도 아니다. 
그저 문을 열고 나가면 불 수 있는 러시아 시골마을 어귀의 평범한 풍경이다.  
하지만 사브라소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산까마귀떼가 둥지로 돌아오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을 통해 깨닫게 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자연의 미묘한 변화다.  
무거운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얼굴을 내밀고 봄은 눈을 조금씩 녹이면서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다 

러시아의 봄 날씨는 여자보다도 변덕스럽고 흐린날이 많다고 한다.  
러시아인의 기억 속에서 산까마귀의 부산한 날갯짓 소리는 봄이 다가오는 가슴 설레는 전조다.  
풍경은 이런 기억과 주관적인 느낌속에서 재해석 되어 표현되고 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무드 풍경화(mood landscape)'라 일컬어지는 흐름의 시조로 여긴다.  
이런 서정적인 그림은 관람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낯선 풍경이지만 친숙한 감정을 통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서정성 있는 풍경화였고, 이 그림으로 사브라소프는 유명해졌다.   
1870년대에 사브라소프는 정부 지원의 아카데미 미술과 결별하고 Peredvizhniki(이동파) 운동에 합류했다. 
그림을 살펴보면 기념비적 작품이라기에는 평범해 보인다.  
이제 날이 조금 풀렸는지 눈이 녹는 언덕과 그 위에 자작나무,  
그리고 그 나무에 어수선하게 몰려드는 까마귀들이 먼저 보인다.  


또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러시아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목조건물의 교회가 등장한다.  
들판에서 언덕을 배경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구도가 아니라 원근법적 깊이를 느끼기도 힘든 구도다. 
눈이 부시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절경도 아니고 자연의 위력을 보여주는 장관도 아니고  
러시아의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풍경에 
트레티아코프 미술관을 찾는 러시아 사람들이 감탄하는 이유가 뭘까? 

사브라소프가 이 단순한 풍경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작은 변화다.  
겨우내 먹이를 찾아 떠났던 까마귀들이 둥지를 찾아 돌아와서 날갯짓을 하고 있다.  
겨우내 하늘을 차지했던 무거운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그 기운을 받아서인지 자작나무 주변에는 눈들이 녹아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자작나무 가지들은 혹한의 강풍을 이겨내고 돌아온 까마귀들을 맞이하며 
다시 잎사귀를 튀울 준비가 되어 있나 보다.  
왼쪽에 있는 어느 집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고향에 돌아온 까마귀는 그 동안 겨울바람에 부서진 집을 수리하려고 하는지 
땅에 떨어진 자작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교회의 종탑에서는 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듯하고 집안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도  
내일부터는 봄 농사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시기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브라소프가 그린 비슷한 내용의 그림은 이후에도 계속 제작되었다.

 

Country Road, 1873. 시골길.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70 cm X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1873년에 그려진 <시골길>이란 작품도 러시아 풍경화의 백미다.  
하늘과 몇그루의 나무가 있는 휘어진 시골 길.  
일렬로 늘어선 나무는 화면의 중간 부분부터 시작해 우리의 시선을 더 먼 공간으로 유도한다.  
눈 앞에는 비가 지나간 뒤의 온통 질퍽거리는 길이다.  
채 얼굴을 내밀지 못한 태양은 구름 속에서 그 황금빛 파장을 길에 적셔 줄 뿐이다.  
깊이 파인 마차 바퀴자국으로 누군가 방금 지나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진흙탕 속에 발이 빠져서 한 걸음도 움직이기가 힘들고 
옷은 흙탕물이 튀어 금방 더러워질 것이다.  
현실속에서는 쉽게 걸을 수 없는 길을 시각적으로 걷는 것은
힘들었던 보행마저도 따뜻한 기억으로 재생시킬 것이다.  
몇 그루의 나무와 비에 젖은 질척거리는 길 하늘에 떠 있는 구름으로  
러시아 시골의 기억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웅대한 장관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을법한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런데 사브라소프가 걸어간 마지막 길은 고통스러운 진흙탕 길이었다.  
1870년대에서 1880년대에 걸쳐 매우 생산적인 작품 활동을 보여주었던 그는 알콜중독에 빠졌다 
그를 이 병에서 구해 내려고 친지들과 친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구제불능의 알콜 중독자가 되어 거렁뱅이처럼 떠돌아다니다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에는 그가 가르쳤던 미술학교의 문지기와 파벨 트레티야코프만이 참석했다.

 

Losiny Ostrov in Sokolniky, 1869,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62 cm X 88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Landscape with Oaks, circa 1855.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66.5 cm X 77.5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Village Bulgarians. 1872.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View in the Neighborhood of Oranienbaum. 오라니엔바움 이웃의 전경. 1854.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View of the Kremlin from the Krymsky Bridge in Inclement Weather. 1851.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혹독한 날씨에 크림스키 다리에서 바라본 크렘린 전경. 67 cm X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Spring is coming. 1874.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Autumn. 1871. oil on canvas. by Aleksei Savrasov. Tretyakov Gallery Room 18.

 

Yard. Winter, 겨울의 뜰. 1875,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53 cm X  43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A Provincial Cottage. Spring, 1878,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Rye. 1881.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218-10-5. Country Landscape, 1867.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Volga lagoons, 볼가 라군. 1870. by Fyodor Vasiliev. oil on canvas. 71.8 x 134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표도르 바실리예프(Fyodor Alexandrovich Vasilyev 1850–1873)는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 4년 후 부모가 결혼했지만 그는 항상 사생아로 여겨졌다 한다.  
바실리예프는 12살부터 우편배달, 사본 필사, 미술품 재생의 일로 돈을 벌었고, 부친의 사후에는 가족을 부양했다.

1863년(13세때) 바실리예프는 미술학교의 야간학생으로 다니며, 그를 돌봐준 여러 화가를 만났다.  
1866년 유명한 풍경화가 쉬시킨이 그의 누나와 사랑에 빠졌고, 
틈틈이 바실리예프에게 풍경화를 가르쳤고, 후에는 크람스코이, 트레치코프 등에게 소개도 해 주었다.  
그러나 바실리예프가 자신의 그림과 강한 경쟁상대가 되자 쉬쉬킨은 집행부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이 상을 받도록 했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표도르 바실리예프는 가난한 페테르부르크 우편 관리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돈이 부족하여 12 세의 청년이 우체국에서 일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15살 때 예술진흥협회의 드로잉 스쿨에 입학하여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등 저명한 예술가들을 만났다. 
크람스코이는 표도르 바실리예프보다 나이가 13살이 더 많았지만 나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우 가까워졌다. 
크람스코이는 바실리예프에게 편지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여 보존되고 있다. 
“내 인생은 부자가 아니고 인생에서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내 자존심이 그렇게 근본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매우 귀중하다. 당신의 개발은 나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신의 인생 - 내 응답 ... " 

아티스트로서 바실리예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은 이반 쉬스킨(Ivan Shishkin)이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친척이 되었다. 
쉬스킨은 바실리예프의 여동생 예브게니(Yevgeny Vasilyeva)와 결혼했다. 
쉬스킨은 처남에게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가르치고 그림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젊은 예술가 바실리예프가 쉬스킨 부부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 통 남아 있다. 
1872년 8월 11 자 그들 중 한 명은 얄타 (Yalta)에서 쓰여졌으며 그곳에서 예술가는 폐 질환 때문에 움직였다. 
“저는 항상 그렇듯이 돈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데 항상 저를 화나게 합니다. 
이미 내 그림 중 하나를 받은 대공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B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는 4점을 더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 그림들은 12월 24일 마감일까지 완료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된 그림은 낭비되고 올해 내년 1월과 2 월에만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대회에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2 개월 후 1873년 10월 6일에 일을 끝내지 못했다.

1870년, 20세의 표도르 바실리예프는 그의 예술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 및 
예브게니 마카로프(Evgeny Makarov)와 함께 볼가 강을 따라 여행을 갔다. 
몇 년 후, 일리아 에피모비치 (Ilya Efimovich)는 그의 저서 “먼 거리”에서 
그 젊은이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 동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의 오랜 동지들에게 “훌륭한 교사”가 되었다고 썼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교사였다. 
” 그에 따르면“ 머그컵 앨범의 작은 잎을 따라 재봉틀 바늘의 속도를 가진 얇은 연필은 
가파른 곳으로 구부러진 집들이 있는 가파른 은행의 사실적이고 인상적인 전체 그림을 그렸다. 
먼 거리에서 뾰족한 곤경과 뾰족한 스파이크 ... 
" 여행 중에 만들어진 연구는 나중에 볼가 라군을 포함한 여러 그림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앞으로 캔버스는 Pavel Tretyakov 컬렉션에 떨어졌다. 
그는 바실리에프가 병과 사망으로 인해 후원자에게 지불할 수 없는 부채 때문에 
1874년 작가의 그림을 사후에 전시한 후에 그것을 가져갔다.

 

해동. 1871. by Fyodor Vasiliev. oil on canvas. 53.5 x 107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그림은 특별한 유형의 풍경이다. 
추위에 휩싸인 음울하고 탐욕스럽지 않은 바람에 휩쓸리는 공간을 묘사한 것이다. 
작가는 시야를 넓게 확대하여 거의 파노라마처럼 보이도록 하여 
어렵고 목적없는 여정, “고통으로 가득 찬 길”의 느낌을 육체적으로 볼 수있게 한다. 
절망감은 배경의 세부 사항에서 강조된다. 
얼음으로 덮인 나무와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농민 오두막. 
삶의 순환을 상징 할 수있는 여행자와 어린이는 길과 약간 녹은 개울로 형성된 교차로의 중심에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에서 “충돌”이다.

바실리예프의 "해빙"은 발표되자마자 그를 유명하게 했다.  
알렉산더 왕자 즉 미래의 알렉산더 3세가 카피 한 점을 주문했고, 
Society for Promotion of Artists는 그에게 일등상을 수여했다.  
이 그림은 1872년 런던 박람회에서 메달을 받았다. 
바실리예프는 황립예술학교의 인턴이 되었고, 군대징집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천재소년" (바실리예프가 러시아 예술가들 사이에 불렸던)에겐 그 인기를 즐길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폐결핵 진단을 받아 셍페테르부르그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리미아로 이주했던 바실리예프를  Society for Promotion of Artists가 계속 후원했으나, 
그는 그림으로 비용을 갚아야했다.

 

Wet Meadow, 1872. 젖은 초원.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70 x 114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바실리예프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젖은 초원(Wet Meadow)"
1871에 바실리예프는 치료를 위해 크림 반도에 있었다. 
날씨가 변하는 순간이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 
뇌우에서 햇빛으로의 전환. 그림은 시각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왼쪽에서는 하늘이 더 밝지만 여전히 우울하고 

오른쪽에서는 하늘이 어둡고 때로는 진한 파란색이다. 
이것들은 멀리 떨어진 뇌운이다. 
하늘에 작은 줄무늬가 있고 비가 내린다. 
작가는 대부분의 그림에 그것을 주었다.

조금 아래는 넓은 녹색 초원을 묘사했다. 
비가 막 지나가고 풀과 땅이 모든 물을 흡수했다. 
여름 비가 내린 후 공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선한 지 떠올려본다. 
그리고 예술가가 묘사한 곳에서 얼마나 깨끗하고 가벼운 공기. 
이 순간 관객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잔디 위를 달리며 이슬 방울을 모으고 싶다. 
불행히도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림이다.

지평선에는 크고 푹신한 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들은 짙은 녹색이다. 
나무는 그림의 오른쪽에 있다. 중앙에는 작은 호수가 있다. 
그것은 거울과 같으며 구름을 통과하는 태양 광선을 그 자체로 반사한다.

작가가 그림자로 어떻게 연주하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그림의 가장 가장자리에는 풀과 초원 꽃이 태양에 의해 선물되며 조금 더 구름이 그를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
사진 자체는 시골에서 보낸 멋진 어린 시절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관객은 그런 초원을 보았고, 비가 방금 지나가는 순간에 얼마나 멋질 지 알고 있으며, 
가슴이 가득한 이 향기를 숨 쉬고 있다. 
신선한 공기와 초원 꽃의 향기. 저 멀리 어딘가에 천둥 소리가 들리고 뇌우도 볼 수 있다. 
이들은 되돌릴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언뜻 보기에 그림 "Wet Meadow"는 친숙함과 단순한 동기로 모든 시청자를 매료시킨다. 
넓은 공간의 깊숙한 곳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솟아 오르고 
멀리 나가는 거대한 구름 아래에서 작은 하늘 조각이 나타난다. 
앞서 틈새 시장을 따라 부드럽고 촉촉한 푸른 잔디로 덮인 가파른 경사면이 있다. 
그림의 거의 중앙 전경에서 검은 뇌운을 통해 따뜻한 태양이 늪지대의 역류에 반사되려고 한다.
얽히고 설킨 회색 구름이 소용돌이 치고 강력한 힘으로 충돌한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천둥 소리가 들리고 끝없는 공간에 반영된다. 

그림은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여기 주변의 모든 것이 숨을 쉬고 살아간다. 
나무가 강한 바람에 구부러지고 물이 물결 치며 하늘과 멀리서 보이는 숲...
표도르 바실리예프의 그림에서 하늘은 변함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Wet Meadow"에서는 거의 핵심 수단이며 작가의 시적 사고를 표현한다. 
푸른 초원 위 구름 위의 따뜻하고 반짝이는 채광창은 물에 반사되어 풀에 비추며 
크고 차가운 검은 구름과 전쟁을 벌이며 젖은 땅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긴장된 하늘의 존재와는 대조적으로 그림의 나머지 부분은 매우 단순하다. 
그녀의 그림의 선은 더 차분하고 부드럽다. 
풍경의 모든 세부 사항은 주요 아이디어의 변형이며 

모든 세부 사항이 전체적으로 용해되어 신중한 고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바실리예프는 새 풍경에 익숙해질 수 없었기에, 그는 계속 러시아의 풍경을 기억이나 
옛 스케치에 의존해서 또는 상상으로 그렸다.  
이때의 예가 1872년의 "젖은 초원"이다.  
그후 크리미아의 풍경에 매료되며 그린 그림이 "크리미아의 산"이다.

바실리예프는 23세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셍페테르부르그에서 열린 추모전시회는 대성공이었고, 전작품은 사전에 예매되었다.  
그의 그림은 러시아의 다음 세대 풍경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니콜라이 게는 "바실리예프가 우리를 위해 '하늘'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미술사가들은 바실리예프가 이사크 리비탄, 발렌틴 세로프, 빅토르 보리스-무사토프에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Hot Summer Day, 뜨거운 여름 날. 1869.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In the Crimean Mountains, 1873. 크림반도의 산들.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116 x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뿌연 안개 사이로 내비치는 산의 모습 표현이 대단하다. 
소가 끄는 수레가 내려왔을 길이 그대로 보여지며 크림 산의 위용이 가슴에 와 닿는다. 
조금 세심히 들여다 보면 소나무, 풀, 작은 길 등 작가의 사실적이고 섬세한 표현에 아~하고 탄성 짓게 된다. 
설명이 필요없는 풍경화, 마치 내가 산길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내 눈 앞에서 자연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풍경화다.

캔버스의 오른쪽 하단에서 왼쪽 상단까지 빛이 점차 물결 모양으로 짙어지고 
왼쪽으로 뒤덮인 래그 가드의 플레어를 잡아 두 마리의 황소를 사용한다. 
또한 흰 가운에 기대는 사람이 있는 앞 부분에만 조명이 비치고 있다. 
마차의 나머지 부분과 그 바퀴 근처의 사람은 더 어두운 지역에 있다. 


그림의 상단 부분도 비슷하게 강조하고 표시된다.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잔디로 덮여 있는 경사는 조명이 밝지만 왼쪽의 협곡은 그늘에 있다. 
이 경우 캔버스의 상단 부분인 하늘이 전체적으로 조명된다. 
그러나 왼쪽 위 모서리가 약간 더 밝다. 
내부에서 하늘을 통해 광원이 지구를 비추고 점차 빛을 움직인다. 
그것은 빛이 움직이는 느낌을 만들어 내고, 화가가 쓴 거의 모든 것이 빛으로 비춰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예술가 지원협회 (Society for the Supports for Artists)를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죽음 직전에 기록된 이 작품은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승천, 
하늘에 있는 표도르 바실리예프를 기다린 미지의 것으로 찬송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8 전시실

 

'바다의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Self-portrait. 자화상. 1874. by Ivan Aivazovsky

이반 콘스탄티노비치 아이바조프스키(Ivan Konstantinovich Aivazovsky, 1817 ~ 1900)는 
러시아 제국의 크림반도에 있는, 페오도시야의 마을에서 가난한 아르메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가 유럽 전역을 여행하기 전인 그의 인생 전반기에는 풍경화와 바다 그림마다 
수상작이 되면서, 그는 해안 마을의 크림반도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 후반기에, 해군 장면을 그린 작품들은 
러시아 해군으로부터 오랫동안 지속되는 직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1845년, 아이바조프스키는 술탄 압둘마지드의 초대에 응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는 1845~1950년 사이 8회에 걸쳐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여행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긴 체류 기간 동안에, 몇 점의 그림들을 그리기 위하여  
오스만 술탄 압둘마지드와 압둘아지즈, 압둘하지즈에 의해 황실 화가로 임명되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 30 점은 현재 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터키의 돌마바흐체 박물관과 다른 많은 박물관들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시 미술관과  
우크라이나 페오도시야에 있는 아이바조프스키의 미술 작품전시관을 포함하여,  
러시아와 과거 소비에트 연방 전역의 박물관들에서도 수십 점이 발견된다.  
터키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압둘라 귈의 장관실 벽에는 아이바조프스키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31세 때, 영국인 가정교사 줄리아 그레이브스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네 명의 딸을 두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이 끝나고, 아이바조프스키는 65세때, 
페오도시야의 젊은 아르메니아인 과부 안나 부나지언과 재혼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1985년, 소아시아의 아르메니안들의 하미디안 대학살에 의해 짙은 영향을 받아,  
몇몇 작품들은 "터키 함선의 축출", "트라브존에서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과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때, 모든 메달들의 수여를 거절하였다.  


그는 그의 인생 후반기를 페오도시아에서 보냈다.  
그는 데오도시아에서 그의 사유지로부터 마을에 불을 공급했으며, 예술 학교를 열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첫 고고학적 유적 발굴을 시작했고, 역사 박물관을 건축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페오도시아에는 무역 항구가 건설되었고, 철도 기차역 네트워크가 연결되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1900년 사망하였다. 

아이바조프스키는 바다 그림과 해안 장면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파도와 바다 거품의 아른아른 빛나는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그의 화법과 상상력을 특히 감탄하게 된다.  
특별히 인상적인 점은 달빛이 퍼짐을 묘사하는 그의 능력은 참으로 탁월했다. 
아이바조프스키 그림의 햇빛과 달빛은 대부분은 투명한 대기층에 있지만,  
구름 뒤로부터 퍼지기도 하고, 안개를 지나기도 한다.  

그가 그린 1840년대의 해군 전투 작품 시리즈들은 물과 구름에 반사된 
불타는 배의 불길을 묘사한 것과 함께, 그의 극적인 역량을 그림의 앞 부분에 나타나게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농부의 삶과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삶의 장면들을 포함하여, 풍경화들도 그렸다.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은 콘스탄티노플 동양학자의 작품이라고 하며,  
그의 수백 점의 그림들은 반복적이고 멜로드라마적 일 수 있는 다른 느낌이 있다고 한다. 

아이바조프스키는 그의 일생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그렸다.  
1900년, 그가 죽을때, 6,000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재산은 그가 예술가로써 데오도시아의 고향에서 예술 학교를 열고  
전시관을 개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성공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에 축적되었다. 

2006년에는, 아비아조브스키의 작품들은 3,200,000 달러 정도의 가격에 
경매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계속하여 커지고 있다.  
2007년 7월 14에는 그의 그림 "지브롤터 암초에 밀린 아르메니안 선박
(American Shipping off the Rock of Gibraltar)"이  2,710,000 파운드에 낙찰되어 되어, 
그 가격은 "아이바조프스키 작품 중에서 경매 낙찰 최고가"이다.  
그는 모든 아르메니아인 화가들의 최고의 용광로라고도 불린다. 

1977년, 소비에트 천문학자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체르닉에 의해 발견된  
소행성 아이바조프스키 3787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 작품 활동에도 참고되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에서는 아이바조프스키의 작품이 담긴 우표가 발행되고 있다.

 

The Black Sea. 1881. 흑해.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49 X 208cm, Tretyakov Gallery Room 19.

바다를 사랑한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그는 바다의 위대함과 무한의 광대함을 평생 그렸다. 
이 <흑해>는 아이바조프스키의 대표작으로 
우리에겐 익숙치 않은 검은 바다에 대해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검은 구름과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는 마치 하나의 세상인 것처럼 어우러져 있다.

이반 아이바조프스키는 러시아 회화의 별과 같은 존재이며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바다를 표현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비평가들조차 그를 가리켜 "아마도 유럽에서 아이바조프스키처럼 풍부한 감정과 표현력으로 
바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25살의 나이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사실을 
19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흥미있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나이에 러시아, 스투트가르트, 피렌체, 로마,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The Black Sea. 1881. 흑해.

 

달빛이 비치는 바다는 그의 주요 주제이다. 
낭만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초기 작품들은 마음을 편하게 하는 고요함이 있다. 
물론 소위 ‘내공’이 쌓이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무르익으면 바다도 거칠어지지만 말이다.

시장의 도움으로 상페테스브르그 미술학교에 진학하게된 아이바조프스키는 
풍경, 특히 바다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에게 외국 유학의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는 바로 유학을 가지 않고 크리미아 반도를 돌면서 
자신의 풍경화 세계를 더욱 단련시키기로 결심한다.
크리미아 반도에서의 ‘내공 쌓기’를 끝내고 유학을 간 이태리에서 머무는 동안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홀란드를 여행하면서 
전시회와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그에 관한 신문 기사가 있다. 
"‘... 교황 그레고리 16세가 아이바조프스키의 ‘카오스 (Chaos 1841)’를 구입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의 가치가 있는 작품만 전시하는 바티칸에 걸었다. 
그의 ‘카오스’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예술 기교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림에 대한 신문의 평이 대개 호의적임을 감안해도 극찬에 가까운 기사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 다섯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낭만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써 한참이나 선배화가였던 영국화가 윌리엄 터너는 그를 천재라고 칭했고 
프랑스의 들라크루와는 자신의 우상이라 말했다고 할 정도로 국제적인 화가였다.

 

The Rainbow, 1873. 무지개.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02 X 132cm, Tretyakov Gallery Room 19.

바다에서 배가 난파당하고 사람들은 조그만 배에 몸을 싣고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들은 살 수 있을까? 작가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무지개가 떠 있으니 곧 폭풍우는 잠잠해질 것이고, 
저 멀리 갈매기가 나는 것을 보니 육지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아이바조프스키의 <무지개>는 희망을 상징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우리 삶을 끌어주는 힘인 희망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세계 미술 경매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러시아 작가로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작품의 가격은 520만 달러(약 60억 원)에 달했다 하니, 
러시아 그림의 세계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The Billowing Sea. ‘파도가 크게 이는 바다’. 1889.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아마도 유럽에서 아이바조프스키처럼 풍부한 감정과 표현력으로 
바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진을 넘어서 동영상을 보는듯한 착각마저 들만큼 정교하다. 
그가 파도를 그리는 기법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의 탁월한 기억력과 풍부한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는 사전 스케치 작업없이 기억 속에 있는 바다와 파도를 
연필로 대강 윤곽을 잡은 후 바로 채색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윌리엄 터너가 왜 그를 두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천재라고 극찬했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 작품에 잠재된 공포를 바깥으로 꺼내어 극대화하면 
‘파도가 크게 이는 바다(The Billowing Sea)' 같은 화면이 도출된다.  
작품에 묘사된 바다는 흑해(Black Sea)인데, 피쿼드 호를 침몰시켰던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 만큼이나 바다는 분노로 들끓고 있다. 

“버들잎 같은 배가 산마루 같은 파도마루에 올라떴다가는 또 눈 깜박할 사이에  
파도골로 떨어져 내려 가고 또 올라떴다가는 떨어져 내리고 하는” 
어느 거친 바다의 실물을 이 그림 앞에서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2019. 08. 18 인증샷

 

2019. 08. 18 인증샷

 

On The Storm, 1872.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92 X 72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그가 살았던 당시,  러시아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흐름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끝나고 시작된 러시아의 문화가 거대한 꽃을 피우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니콜라스 1세의 가혹한 전제정치와 불경기가 러시아를 휩쓸던 때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러시아, 그 거대한 역사와 혼란했던 시대를 목격한 아이바조프스키는 
그의 작품에 자유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시대 정신 등을 작품에 쏟아부었다.

 

The shores of Dalmatia. 1848.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View of the Coast Near St. Petersburg. 1835.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07 X 133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Sea coast. 1840.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61 X 40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View of Leandrovsk tower in Constantinople. 1848.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45 X 58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Meeting of a fishermen on coast of the bay of Naples. 1842.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85 X 58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Near Crimean coast. 1890.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The Bay of the Golden Horn in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의 골든 혼. by Alexey Bogolyubov. 
oil on canvas. 51.1 X 29.4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알렉세이 보골류보프 (Alexey Petrovich Bogolyubov 1824 ~ 1896)
알렉세이 보골류보프는 Novgorod Gubernia 의 Pomeranie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은퇴한 대령 표트르 가브리일로비치 보골류보프다. 
보골류보프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비평가 Alexander Radishchev다.

1841년 알렉세이 보골류보프는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해군에서 복무하고 함대와 함께 여러 국가를 여행했다. 
1849년에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서 Maxim Vorobiev 지도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젊은 화가 보골류보프는 Ivan Ayvazovsky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53년 그는 메이저 금메달로 아카데미를 마쳤다. 
그는 해군 장교로 은퇴하고 해군 본부의 예술가로 임명되었다.

1854년부터 1860년까지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많은 일을 했다. 
한편 Alexander Nevsky 대성당에 프레스코 화를 그렸다. 
Bogolyubov는 1860년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교수직을 받았다. 
얼마 동안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다. 


1860 년대에 그는 볼가 강을 따라 여행했다. 
그의 그림은 낭만주의의 모든 흔적을 잃어 버렸고 

그 요소를 자연의 확고한 사실주의로 대체했다. 
1871년에 그는 Imperial Academy of Arts 에 선출되었다 .

1870년부터 그는 Wanderers 미술 운동에 가까워 졌고 모든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운동의 다른 구성원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생각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3년, Bogolyubov는 동료 순회자들과 연대하여 아카데미를 떠났다. 
그는 심지어 로마에 대안적인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를 만들려고 했다. 

1873년 이후, 보골류보프는 그의 심장 상태 때문에 주로 파리에 살았다. 
그의 집은 러시아 예술가 사랑방 같았다. 
빈번한 방문객으로는 Ivan Turgenev, Ilya Yefimovich Repin, Vasily Polenov, 
Mark Antokolski, Vasili Vasilyevich Vereshchagin 등이 있었다. 

1885년, 보골류보프는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사라토프에 
Radischev Art Museum 이라는 미술관을 열었다. 
"러시아 최초의 혁명가"인 Alexander Radishchev 의 이름을 딴 

박물관 이름은 당국에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보골류보프는 허가를 얻기 위해 법적 싸움을 견뎌야 했다.

보골류보프는 1896년 2월 3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 후, 보골류보프의 모든 돈과 자본은 그의 회화학교에 기증되었다. 

 

Nizhny Novgorod Fair (Row of Bells), 니즈니 노브고로드 시장. by Alexey Bogolyubov. 
oil on canvas. 51.8 X 29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The Mouth of the Neva, 1872,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54.5 x 110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The Ipatiev Monastery near Kostroma, 1861,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Auvers, 1881,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Treport, Date unknown,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Fountain of Annibal in Rocca di Papa near Rome, 로마 근처 로카 디 파파에 있는 한니발 분수.
1857. by Lev Felixovich Lagorio. oil on canvas. 48 X 31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레브 펠릭소비치 라고리오(Lev Felixovich Lagorio, 1826-1905)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수채화가였으며 특히 크림반도 주변의 바다와 해양, 코카서스 산맥의 경치를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남부 크림반도에서 일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Cimmerian" 회화학교와 관련이 있다 .

그의 아버지 펠리체(Felice Lagorio 1781-1857)는 시칠리아 왕국의 부영사를 역임하는 제노바 상인이었다. 
1839년부터 1840년까지 그는 Ivan Aivazovsky의 스튜디오에서 첫 번째 예술 교육을 받았다. 
1842년에 Taurida의 주지사인 Alexander Kaznacheyev의 지원으로 
그는 Imperial Academy of Arts에 등록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는 아카데미의 새로운 회장인 로이 히텐베르크 공작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선생님들 중에는 Alexander Sauerweid, Maxim Vorobiev 및 Bogdan Willewalde 등이 있다.

1850년에 그는 자신의 그림인 "View of Lakhta" 로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2년 후 러시아 시민이 되었다. 
그는 또한 해외 유학 연금을 받았는데, 파리를 먼저 방문(1853)하고, 

그 다음 로마를 방문하여 1859년까지 머물렀다가 추가로 2년 동안 자비로 머물렀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1860년 교수로 임명되어 이탈리아에서 자신이 만든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1861년 코카서스로 여행하여 그곳에서 성 안나교단을 수여한 

차르 알렉산더 2 세에게 일련의 풍경을 선물했다.

그는 1863년과 1864년에 코카서스 전쟁에 참가한 

대공 Mikhail Nikolayevich의 수행원과 함께 코카서스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종종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1885년에 그는 1877-1878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에 관한 일련의 작품을 그리는 의뢰를 받고 
유럽과 아시아 전역의 전장을 방문했다. 
1900년에 그는 아카데미 명예 회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노보데비치 묘지(Novodevichy Cemetery)에 묻혔다.

 

On the island of Capri. Fisher's house, 노르망디 해변, 1859. by Lev Felixovich Lagorio.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9

 

 

 

[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작품 전시실.

 

Self Portrait. 1870. 바실리 페로프 자화상.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Vasily Grigorevich Perov 1833-1882)는 1833년 시베리아에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회화조각학교에서 수학했다(1853~62).   
이때의 스승들 중에는 세게이 자란코 (Sergey Konstantinovich Zaryanko 1818~1870)가 있었다.   
학교를 마치던 무렵 러시아 현실에 대한 분노와 민초들에 대한 연민을 버무려 

그가 그려낸 풍자화들은 러시아 화단이 바실리 페로프란 이름을 주목하도록 만든다.   

‘키치(Kitsch)’라는 용어가 있다.   
고매한 품격을 갖지 못한, 싸구려 또는 사이비 미술품을 조롱하는 말이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는 머리 깎는 이발소에 꼭 그런 그림들이 걸려 있어서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던 것들이 바로 이런 부류이다.  

세계 미술사의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19세기 러시아 회화들을  
서유럽 쪽 화단에서는 흔히 키치로 취급했었다.   
외관상으로 어딘지 그 ‘이발소 그림’의 냄새가 나는 듯한 작품들이 없지 않다.   
현란한 빛이 세련되게 부서지는 인상파 그림들을 익숙하게 보며 자라온 우리 눈에는,   
러시아 회화들의 칙칙한 색채나 가끔 좀 갸우뚱한 사실적 묘사는 뭔가 촌스러운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바실리 페로프는 러시아 회화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상당수는 이발소 그림을 닮은 데가 있다.   
그의 독특하고 우울한 화면 분위기는 세련된 도회인들의 입맛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처음 러시아 회화들에 매혹되었을 때도 그 대상은 주로 레핀이나 크람스코이, 
세로프처럼 기존의 취향으로도 충분히 전율할 수 있는 화가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로프 미학의 핵심은 시대정신과 휴머니티에 있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변함 없이 피어나는 모네의 수련이나   
고흐의 해바라기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의 그림에 접근해야 한다.   
페로프가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현실에 발을 딛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의 그림은 어떤 예술 작품들보다도 깊은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런 점에서 페로프의 그림들은, 투박하지만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러시아의 흑빵을 닮았다.   

그의 장르화들을 특징에 따라 구분해 보면 사회비판, 해학, 

그 외 인물과 역사 쯤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현실 비판적 시각의 그림들을 살펴보자.   
그가 비판한 ‘현실’, 즉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는 농노이거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농노는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지대를 납부할 뿐 아니라  
주 3일 이상 지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으로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국가는 그들로부터 인두세를 걷고 병역의무를 부과했지만 그 대가로 어떤 보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지주는 재판 없이 그들에게 체형을 가할 수 있었으며 매매할 수도 있었다.   
농민들은 농노에 비해 다소 덜 예속적이었지만, 그 궁핍한 삶은 농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은 상상 속의 지옥 풍경이 아니고 노예가 콜로세움에서 사자와 싸우던 글래디에이터 시대의 이야기도 아니다.   
불과 150년 전의 러시아 사회는 그런 곳이었다.  

그뿐이랴. 갓 불붙은 산업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이 탄생하면서 지옥은 농촌에서 도시로 확산된다.   
초기 자본주의 시절, 서로 먹고 먹히는 자본 간의 처절한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그때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이 노동자의 육신과 영혼을 

깡그리 망가뜨리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런 러시아 사회의 정점에는 무능하며 폭압적인 로마노프 황실과  
한줌도 안 되는 귀족들의 화려한 삶이 놓여 있었다.   
이런 세상을 점진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했던, '브나로드 운동'처럼  
평화적이고 낭만적인 시도는 무참히 좌절되었다.   
우리 앞에 그런 상황이 놓이게 된다면 이제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처럼 그들의 혁명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살아가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일상이 

카키색 톤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르화 (풍속화)의 대가 바실리 페로프의 걸작들이 

트레차코프 갤러리 Room 17을 가득 매우고 있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also known as Children Carrying Water). 1866.  
by Vasily Grigorevich Perov. Oil on canvas. 123.5cm x 167.5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의 작품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빈번하게 언급되는 작품이 바로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Carrying Water. 1866)>이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밤, 행복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길에 나와 있지 않을 그 시간에 이를 악물고 물을 길어 나르는 어린 도제들의 모습이다. 

페로프는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여 그린 대표적 화가이다.  
그의 유명한 그림 ‘트로이카'에서는 세 명의 어린 아이들이 눈보라가 치고 얼어 있는 길을  
아주 커다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의 비참하던 아이들의 생활과 처지를 그림으로서 어른들의 횡포와 무자비함을 고발하고 있다.  
3을 뜻하는 ‘트로이카' 라는 말은 황제의 마차를 끄는 말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와 대비되어 아이들의 모습은 더욱 더 서글프게 느껴진다. 

추운 겨울날 말이 대신해야 할 수레끌기를 열 살 남짓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하고 있다.  
핏기 없는 얼굴에 피곤에 찌든 아이들, 삶에 지쳐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참혹했던 당시 러시아 현실을 읽어 낼 수 있다.  
이 그림은 당시 러시아 현실을 담아 낸 민중화, 풍속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칼바람에 건물 지붕의 눈가루가 모래처럼 휘날리고,  
넘쳐흐른 물은 이내 수레에 얼어붙어 고드름을 만들었다.  
이런 길이라면 튼실한 말들이 삼두마차를 끌고 지나가더라도 안쓰러울 법하다.  
맨 왼쪽의 작은 아이는 오르막을 넘어서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튿어진 모자, 그리고 얻어 입은 어른 코트의 소매 안으로 주먹 쥔 고사리 손.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가운데 녀석은 셋 중 제일 덩치가 크지만 아직 이 빠진 구멍이 숭숭한 어린아이다.  
길이 아직 많이 남은 것일까, 수레의 무게와 추위에 그는 혼이 거의 빠져버린 것 같다.  
오른쪽 계집아이는 오히려 처연한 표정이다.  
발에 맞지 않아 덜그럭 거리는 구두의 끈은 풀어져 있고,  
실제 그림을 보면 그러쥔 조그만 주먹에는 핏줄과 힘줄이 솟아 있다. 

세상은 저 어린 것에게 낡은 장갑 하나 건네줄 여유가 없다.  
헌 외투 사이로 드러난 분홍치마. 아이가 저 옷을 처음 가졌을 때, 저 꽃무늬를 보고 기뻐하지 않았을까.  
꽃분홍 치마는 그가 현실에서 가 닿을 수 없는 행복의 신기루 같다.  
세 아이의 뒤에는 비슷한 운명의 소년 하나가 온힘을 다해 수레를 밀고 있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그들과 함께 하는 건 오직 앞장서서 뛰어가는 개 한 마리뿐이다.  
힘차게 뛰어가는 털북숭이 개.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그 모습에 화가 페로프가 자꾸 겹쳐 보인다.  
민초들의 고난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한 바실리 페로프.  
털북숭이가 날카롭게 드러난 이빨은 냉혹한 세상에 대한 그의 분노이며,  
힘찬 뜀박질은 어떻게든 이겨나가야 한다고 아이들을 독려하는 그의 애틋한 마음이 아닐까.  
안타까움이 가득한 털북숭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도록에서는 잘려버렸지만, 그림 왼쪽 끝에는 건물의 창이 그려져 있다.  
유리를 통해 비치는, 따뜻하지만 온기 한 점을 나눌 수 없는 촛불은  
오히려 아이들을 더 큰 절망에 빠트릴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수레 뒤쪽 어둠 속의 사내도 추위에 몸을 웅크린 채 종종 걸음으로 제 길을 가고 있다.

 

Portrait of Writer Fedor Dostoyevsky. 도스토예프스키. 1872. by Vasily Grigorevich Perov. 
oil on canvas. 94 x 80.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로 유명하다.   
페로프는 개인적으로 19세기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러시아 민중을 대표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무척 존경했다.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그려내고, 사실주의에 자부심을 가졌던 작가와 화가는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페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주제와 유사한 현실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페로프의 초상화는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빛을 비춤으로서   
미묘한 음영을 만들어 인간의 내면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페로프는 기민한 관찰력으로 대상을 포착해 내면 심리를 화폭에 담아 냈다.  
하나의 초상화 속에 인물의 성격을 포착한 페로프의 묘사로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한층 리얼리즘의 가치를 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말년에 이르러 추락했다고 한다. 페로프는 1882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고 민중들에게 진정성을 가르쳤던 예술가들은 
1917년 소련의 출발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정치가들과 볼셰비키 정부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사실적'인 그림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의 정치 이상을 지지하는 작품들만을 원했다.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전제 정치 하에 점차 독창적인 예술이 사라지고 국가 조직으로부터의 압력은 점점 강화되었다.   
정부에 대항하면 즉각적으로 강력한 처벌이 내려졌고,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을 출판, 전시, 공연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고립시켰고,  
이를 어긴 예술가들은 강제노동수용소에 구류, 감금시켰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에서 되돌아오지 못했다.  
이 시기에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1930년 천재시인이라 칭송 받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자살 사건이다.   
마야코프스키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성향을 가진 예술가였다.  
물론 스스로 열렬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삶은 정말 인간적이고 처절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청춘을 불사르며 혁명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3번의 구속까지 거치며 혁명을 향해 달려온 시인에게  
막 눈앞에 시작된 관료주의는 참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철저하게 관습을 거부했던 그의 눈에 이런 현실은 배반당한 혁명으로 비쳐졌다.   
게다가 그는 끊임없는 검열과 감시 속에서 거대한 정치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비열하고 남루한 현실에 절망,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한다.  
더욱 끔찍스러운 일은 1937~53년 소련 정부가 수백 명에 달하는 뛰어난 예술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던 수백만 명의 시민들을  문화영역에 미친 이같은 정부의 강압정책의 결과   
1930년대에서부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소련에서 창작된 예술작품의 대부분은   
소련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책상서랍' 속에 쌓아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은 출판이나 전시, 공연활동을 위해 결코 제출되지 않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경우에는 1980년대말까지 숨겨져 왔다.  
하지만 40대에 접어들며 페로프의 그림은 상당히 변화한다.  

미술사가들은 종종 그것을 ‘성숙’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숙'이란, 그 의미가 매우 주관적인 단어가 아닐지.   
어쨌거나 ‘성숙’해 가는 페로프의 작품 세계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 소재가 매우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반면 그의 초기작들이 하나같이 품고 있던, 

심장에 사정없이 날아와 꽂히던 그 서슬 퍼런 비수는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1872)>은   
페로프가 40대에 들어서기 직전 그린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소개할 때면 어김없이 인용되는 이 그림도   
페로프의 ‘성숙’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그림 속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금욕적인 구도자 같은 모습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어떤 평자는 이 그림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기술한 수천 편의 논문보다도   
더 함축적으로 그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감탄한다.  

그쯤에서 나는 좀 혼란스럽다.   
만약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강고한 신념과 지혜를 가진 구도자였다면,   
이 초상은 대단한 걸작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잘 알려진대로 금치산자에 가까운 낭비벽과 도박으로  
평생 가난의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가.  

돈 몇 푼을 빌리기 위해 주변사람들에게 아첨과 자학으로 가득한 비굴한 편지를 보내고,   
그렇게 빌린 돈을 또다시 허망하게 탕진해버렸던 그가 아닌가.   
그가 온갖 남루한 인생들의 심리를 탁월하게 기술한 기념비적 소설들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허점투성이인 그의 삶은 구도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멀다. 

이 초상화는 1872년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요청으로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것인데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트레티야코프는 당시 유명 문인들의 모습을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부탁해 그리도록 했다.  
이 그림은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에서 귀국한 그해인 1871년 말에 시작돼 이듬해 완성됐다.  
도스토옙스키가 귀국해 보니 <백치>, <악령>등의 성공으로 그의 명성이  
트레티야코프가 초상화를 부탁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짙은 그린색 두터운 재킷 차림의 수수한 그의 복장은  
당시 넉넉지 않았던 그의 경제 상황을 짐작케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초상화에 대해서 안나는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해(1871년) 겨울에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이자 미술관 소유주인  
트레티야코프가 남편에게 미술관에 소장할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위해 유명한 화가인 페로프가 모스크바에서 왔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일주일 간 그는 매일 우리를 찾아왔다.  
페로프는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 상태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유도하면서 남편의 얼굴에서 가장 특징적인 표정을 포착해 냈다.  
그것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예술적 사고에 몰입해 있을 때의 표정이었다.  
페로프는 ‘도스토에프스키의 창작 순간’을 초상화에 붙박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른 것을 여러번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마치 ‘자기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을 때는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빠져나오곤 했다.  
나중에 이야기하다 보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자기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내가 자기 방에 다녀갔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페로프는 똑똑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남편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참석했다.  
페로프에 관해서는 정말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페로프가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완성한 것은 1872년 5월이었다. 다섯달이나 걸린 것이다.  
이 초상화에 대해 트레티야코프가 페로프에게 준 사례비는 6백 루블이었다.

 

Christ in the Garden at Gethsemane.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1879. by Vasily Perov. 
tempera on canvas. 151.5 X 23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제자들이 잠든 사이 예수는 땅에 엎드려 기도한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화폭 속은 지금 깊고 푸른 밤이다. 페로프에게서는 일찍이 엿볼 수 없었던 특이한 암록색.  
그 두꺼운 어둠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비장하게 엎드려 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이곳에 오른 그는 곧이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잘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림에서 건너오는 서늘한 기운.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둡고 푸른빛 탓일 수도 있다.  
혹은 필생의 사건을 앞둔 예수의 고뇌가 그만큼 처절한 탓일지도 모른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은 누구와도 이 두려운 짐을 나눌 수 없는 예수의 고독을 더 사무치게 드러낸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잇는다. 페로프는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젊은 시절의 대표작 <트로이카>와 이 그림은 어떤 맥락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혹시 '성숙'한 페로프는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며 그랬듯이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덧없이 여기고 종교의 세계로 침잠해 갔던 것일까. 

페로프의 작품세계에서 이 그림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건 간에,  
보는 이의 가슴을 단숨에 꿰뚫고 지나가는 힘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건, 니콜라이 게(1831~94)가 내놓은 예수 연작들과의 유사성이다.   

19세기 러시아 풍속화가들의 작품은 시대를 대변하는 대변인이요,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이 시기 그림을 보며 당시 러시아가 얼마나 피폐하고 궁핍하며 아파했는지를 가늠 할 수 있다.  
그런 러시아의 시대상을 걱정하는 작가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았다.  
겟세마네 동산에 쓰러져 절규하는 예수의 모슴을 통해 아픈 러시아의 치유을 작가는 바라고 있다.  
예수의 머리 위로 떠있는 가시 면류관이 현실의 고통을 상징하는 듯 해서 참으로 가슴 저린 그림이다.

 

Nikita Pustosviat. Dispute on the Confession of Faith.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1880 - 188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12 x 337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은 페로프 이야기에서 대단원을 장식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페로프가 49세로 세상을 뜨기 한 해전에 완성한 대작이다.    
화사한 색채로 가득한 화면. 페로프가 집착하던 카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게다가 그려진 내용은 생뚱맞게도 17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내분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988년 비잔틴으로부터 러시아로 전래된 동방정교는   
몽골의 지배기(1240~1480)에 급성장하여 부와 세속적 권력까지 틀어쥐게 된다.   
그러나 한때 차르와 맞설 정도의 위세를 떨치던 러시아 정교회는 16세기 초 그 세속화에 대한   
내부적 비판이 터져 나오며 소유파-무소유파의 충돌이라는 내홍에 직면한다.  

소르스키를 중심으로 한 ‘무소유파’ 수도자들은,   
교회는 국가와 분립하여 과다한 토지를 포기하고 원래의 청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권력과 연대한 소유파들이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무소유파들을 축출하여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러한 교회의 분열에 따라 그 세속적 힘은 이미 현저히 약화되고 있었다.      

러시아정교회가 더 결정적으로 분열함으로써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Patriarch, 가톨릭의 교황에 해당함)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종속되는 계기는 17세기 전례 개혁을 둘러싼 개혁-분리파의 분열(‘라스콜 Раскол’)이었다.   
정교회는 갖가지 화려한 비잔틴 문화와 함께 러시아에 도입되었지만, 수백 년이 지나면서 점차 토착화한다.   
이에 따라 종교예식의 세부적 내용에 있어서 원래의 비잔틴 양식과 상이한 점이 하나둘 나타나게 된다.  
이는 모든 외래종교의 전래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가톨릭이 조선에 전래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와 달리 러시아의 전례개혁은 비극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1654년 당시 러시아정교의 수장은 총대주교 니콘(니키타 미노프, 1605~1681)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러시아 교회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기도서와 예배의식을 비잔틴 본래의 양식으로 되돌리겠다고 선언하고 주교회의의 승인을 받는다.   
표면상 이는 단순한 전례형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신자들은 이러한 조치가 사실은 신앙의 본질과 무관하며,   
‘개혁파’들이 교회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꾸미는 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많은 고위 성직자와 수백만의 신도들이 이에 대해 강하게 저항한다.   
그들은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토착화한 전례의 전통을 고집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라스콜니키 파’ 즉 ‘분리파’ 또는 '구교도'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두 번째 차르 알렉세이 (재위 1645~76)는 이 대목에서 개혁파의 손을 들어주었고,   
분리파는 차르에게도 맞서다가 무려 80년 간 갖은 고난을 겪는다.   
분리파의 수장인 수좌대주교 아바쿰 페트로비치(1621~82)가 화형 당하고,   
수많은 신도들이 분신으로 이에 저항하는 처참한 사건도 발생한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 전례의 차이란 실상 매우 사소해 보이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성호를 긋는 손가락의 수였는데, 비잔틴의 원래 방식은   
손가락 3개를 사용하였으나 러시아에서는 2개로 토착화함으로써 문제가 된 것이다.  
이는 Room 28에 전시되어 있는 19세기 역사화의 대가 바실리 수리코프의 작품  
<대귀족 모로조바(1887)>에 잘 나타나 있다.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은 분리파의 거물이었던 대귀족 모로조바가 어느 겨울날 먼 귀양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사슬에 묶인 채 짚으로 바닥을 깐 초라한 썰매에 몸을 맡긴 모로조바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  
그는 오른손을 들어 두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 내지르며 저항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화면 우측에는 분리파들이 안타깝고 슬픈 얼굴로 그를 배웅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개혁파들이 유쾌한 얼굴로 패배자를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대립의 패배자는 분리파뿐이었을까.  
니콘은 러시아정교회를 과도한 민족주의로부터 구하고  
교회의 일체성을 강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투쟁의 과정에서 파문한 수많은 인재들을 상실함으로써 교회의 역량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우위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하다가 1667년 주교회의에서 파면되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1681년 아바쿰보다 오히려 한 해 먼저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실행한 사회전반의 개혁에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정교회의 수장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복속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 정교회는 두 번에 걸친 내부분열을 거치면서  
그 화려했던 권력을 세속 군주에게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Detail (부분 1) 

아수라장이 된 분리파 진영. 왼쪽 위 흰수염의 사나이가 니키타이다.  
오른쪽 붉은 망토의 병사가 바로 '스트렐치' 부대원이다.  
왼손에는 머스켓 소총을, 오른손에는 도끼의 일종인 '바디쉬'를 들고 있다.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Detail (부분 2) 

헤게모니를 쥔 자들의 냉랭한 여유, 오른쪽 흰수염이 개혁파의 수장 총대주교 요아킴.   
페로프의 그림은 이러한 개혁파-분리파의 대립이 극점에 있었을 때  
차르의 궁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주연은 분리파 구교도 사제 니키타 푸스토스뱌트(? ~ 1683)이며,  
조연은 총대주교 요아킴과 소피아 공주이다.  
요아킴은 개혁파의 수장이었고, 소피아는 공동 차르를 맡은 어린 동생들 위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사실상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었다(재위 1682~9). 

수즈달의 사제 니키타는 당시 구교도 측의 리더 중 한 명이었다.  
반대파들은 그에게 '헛일 하는자'란 의미의 '푸스토뱌트(Пустосвят)'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1659년 수즈달의 대주교인 스테판을 이단으로 고발하였으며,  
그의 무죄가 선고되자 다시 차르 알렉세이에게 고발하였다. 

대세는 개혁파 쪽으로 이미 기울어 버렸지만, 1682년 구교도들은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된다.  
차르의 근위대 역할 맡았던 머스켓 소총부대 ‘스트렐치’ 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스트렐치는 소피아를 위해 세 차례나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있는, 그녀의 핵심적 권력 기반이었다.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니키타 푸스토뱌트는 그해 7월 5일 차르 소피아의 면전에서  
개혁파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기회를 얻게 된다.  
페로프의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도 이 그림을 보면  
그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우측의 수염 덥수룩한 무리들은 전통을 고집하는 분리파 구교도들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좌측의 세련된 귀족풍 인사들은 총대주교 요아킴과 개혁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수렴청정의 억센 통치자 소피아가 서 있다.  
그녀와 개혁파 인사들이 한통속으로 냉랭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만 보아도  
니키타의 상황이 절망적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분에 못 이겨 돌진하며 몸싸움을 하느라 니키타의 웃옷이 반쯤 벗겨져 있다. 

발밑에 어지러이 펼쳐진 책, 그리고 나동그라진 그릇과 사람들.  
분리파 진영은 수라장이 되어있다.  
니키타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손에 쥔 십자가와 등 뒤의 이콘 밖에 없다.  
당신들,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라고 외쳐보지만, 하늘은 늘 멀리 있다. 

 

△ 바실리 페로프 <신앙에 관한 논쟁 중 소피아 (부분)> △ 일리야 레핀 <공주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부분)>

소피아의 냉랭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표정은 이태 전에 그려진  
일리야 레핀의 <공주 소피아 알렉세예브나(1879)>를 연상케 한다.  
그녀의 권력기반인 스트렐치는 니키타를 배신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개혁파의 손을 들어준다.  
가련한 니키타는 다음날 처형되고 만다.     

크기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범상찮은 이 그림은 왜 페로프의 대표작으로 도록에 소개되지 않았을까.  
비록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나 이 그림이나 종교적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고통 받고 억압 받는 자에 대한 연민’이란 코드로 작가의 시선을 이해한다면  
젊은 시절로부터 시종일관한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페로프는 모교인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교수가 되어  
네스트로프, 코로빈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직 오십이 되지 못한 나이였다. 

 

The Funeral Procession / Last Journey, 1865. 마지막 여정.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7 x 4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Funeral Procession / Last Journey 마지막 여정>   
도록에 따라서는 <Following a Dead Man> 또는 <Bidding Farewell to the Dead Man>로도 번역되어 있다.   
앞에서 소개한 걸작 <Troika Apprentices Carrying Water>의 왼쪽 아랫부분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은   
크기도 작을 뿐 아니라 전혀 아름답다고도 할 수 없는 을씨년스런 작품이다.  

그러나 이는 트레차코프 갤러리에 걸린 어떤 화려하고 거대한 그림들에도 뒤지지 않을  
강력한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화폭에 담긴 것은 겨울 눈길을 헤치고 가장의 시신을 운구하는 한 가족의 절망적 모습이다.  
고개를 숙이고 웅크린 채 썰매를 끄는 여인의 막막한 등,   
마른 풀을 깔고 누운 사내아이는 잠든 것이 아니라 신열에 들떠 눈을 뒤집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서질 듯 엉성한 관을 꽉 부여잡고 있는 딸아이는 제법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넋 나간 표정이긴 마찬가지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눈길은 아주 춥고 멀 것만 같다.  

봄이 올 때까지 그들이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페로프의 전매특허인 카키색조는 이 작품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누렇게 떠 있어 황폐한 느낌을 더 해준다.   
이 그림은 무심히 지나가던 사람의 발길을 한동안 묶어놓는다.  
그리고 그림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언가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 기분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을 붙일 수가 없다. 그것이 이 조그만 그림에 담긴 페로프의 힘이다.

 

The Last Tavern at the City Gates. 1868.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66 x 51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트로이카의 우측에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The Last Tavern by the City Gates)>이다.  
도록마다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작품이지만 생각보다 크기가 아주 작은 소품이다.  
이 조그만 그림으로부터 사람들은 무얼 찾아 내었을까.  
도시 관문에 인접해 있는 작은 여관, 먼 길을 왔거나 떠날 사람들은 

따뜻한 불빛이 비치는 창안에서 휴식하고 있다. 

그 안에 들지 못한 소녀는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다.  
밤이 시작되는 것인지 새벽의 미명인지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그 속의 디테일은 하나하나 살아 있다.  
얼어붙은 먼 길을 다시 떠나야할 말은 눈 위에서도 건초를 씹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혹독하더라도 이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인 건지.  
눈길에는 역시 개 한 마리, 그리고 하늘에는 차가운 새 몇 마리.  
이 시기 페로프의 대표작들에는 어김없이 먼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이 등장한다.    
페로프의 매서운 새들은 무슨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이 작품을 어떻게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후세의 사람들이야 페로프의 주요 작품으로 소개되니 곰곰이 뜯어보게 되는 것일 테지만,  
이 그림의 핵심은 아마도 어둠 속 소녀가 아닐까 싶다.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The Last Tavern by the City Gates) - detail (부분) 

이발소 그림을 연상할 정도로 어수룩해 보이는 이 작품을  
빛나는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바로 이 소녀라 생각된다.  
계집아이는 추위에 웅크린 채 불안과 천진함이 담긴 눈빛으로 돌아보고 있다.  
눈밭에 나앉은 어린 것의 그 눈빛과 마주친다면

아무리 가슴 두꺼운 당신이라도 그만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페로프가 전하고자 했던 모든 생각들이 아무 설명할 필요 없이 온몸으로 젖어든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A Drowned Woman (also known as Found Drowned). 익사한 여자. 1867. oil on canvas. 68 X 108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익사한 채로 발견 된 여인의 시신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형사의 모습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큐폴라들과 강위를 떠가는 큼직한 배를 볼 때 무대는 필경 모스크바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스카이라인은 모스크바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어 어렵지 않게 구별된다. 

강에서 건져낸 여자는 밀랍 같은 얼굴로 누워 있고, 관리 하나가 그 곁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왜 죽은 것일까. 혹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그림만 보아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채 감지 못한 그녀의 눈으로 미루어 한이 많은 죽음이란 느낌은 분명하다. 

시체 옆에서 태연히 담배를 물고 있는 관리의 무심한 얼굴은 또 무엇인가.  
이제 이골이 난 타인의 불상사 같은 건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는 의미일까.  
또는 그치지 않는 불행들에 그도 덤덤해져 버린 것일까.  
주검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접근하고 있다.

한 마리는 머리맡을 어슬렁거리며 시신을 넘본다. 

병든 러시아에 바싹 다가선 재앙의 예고편처럼 

그녀의 다리와 손을 휘감고 있는 건 아마도 물풀인 것 같다.  
경직되어가는 여자의 시신에 작가가 감아놓은 부드러운 물풀의 줄기와 꽃.  
페로프의 전형적인 황색 색조만으로도 이미 더할 나위 없이 황량한 느낌을 주는 화면에서  
그나마 위로 받을 대상이라고는 그것들 밖에 없다. 

 

<익사한 여자 (1867)> detail (부분) 

화면상 잘 보이지 않지만,  왼쪽의 동그란 물체 둘은 물풀(?)의 꽃이고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녀의 오른손에 남은 반지는 한때 지상에서 그녀가 꾸었던 꿈의 흔적이리라.   
19세기 러시아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 비판적 리얼리즘 회화의 기수 바실리 페로프.   
격동의 1860년대는 갓 삼십대에 접어든 그가 슬픈 러시아의 현실과 고통스럽게 교감한 시기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분노를 에두르지 않고 우리의 눈앞에 그대로 들이민 시절이다.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그래 세상이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외치는 그의 절규를 듣는다.  
얼어붙은 땅에 가장의 시신을 묻으러 가는 초라한 장례행렬,  
그리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자기 덩치보다 훨씬 큰 물수레를 끌어야 하는 어린 것들의 모습.  
이 정도라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절망의 깊이 만큼 분노하고 분노한 만큼 내지르는, 삼십대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크람스코이 등 주류 미술에 반기를 든 일단의 진보적 화가들이 1871년 ‘이동파’를 발족하였을 때  
페로프가 창립 멤버로 참여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The bird-catcher. 새 사냥꾼. 1870.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가 흥미를 가진 또 다른 소재는 '사냥하는 사람들'이다.   
페로프 자신의 말에 의하면 <새 사냥꾼(1870)>, <휴식 중인 사냥꾼들(1871)>, <낚시꾼(1871)>에서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고 세속적 행복에 취한" 젠틀하고 유머러스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들을 보면 그는 앞서 Room 15에서 살펴본 파벨 페도토프 (Pavel Fedotov 1815~52)를 계승하여   
해학적 풍속화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The Hunters at Rest. 1870. 휴식 중인 사냥꾼들.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119 X 183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낚시꾼 The Angler. 187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Room 15에서 살펴본 파벨 페도토프 (Pavel Fedotov)의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  
<불청객, 아침을 먹고 있는 귀족>을 페로프의 '사냥꾼과 낚시꾼 시리즈'와 섞어 놓으면   
처음 보는 사람은 같은 화가의 그림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후자에는 바실리 페로프의 전매특허인 카키색조가 좀 더 진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림의 분위기나 묘사가 아주 비슷하다.

 

The Sermon in a Village. 마을에서의 설교. 186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이 작품을 얼핏 보면 주일을 맞아 시골마을 교회에 모여 앉은 부자와 빈자가  
사제의 설교를 오순도순, 그러나 좀 따분하게 듣고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뒤쪽 어둠 속에서  
완전히 따로 놀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에 주목해야한다. 

 

The Sermon in a Village. 마을에서의 설교. Detail (부분) 

그들은 설교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화면 제일 오른쪽의 서류를 든 사내가 하는 말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있다.   
그는 마을 학교의 교사쯤 될 것이고, 그가 들고 있는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은   
아마도 농노해방을 알리는 차르의 칙령일 것이다.   
당시 러시아 방방곡곡에서는 해방령 칙서가 주로 교회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반노예나 다름없던 오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소식이건만 군중들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은 회색 어둠 속에서 여전히 깊은 시름에 잠겨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4년의 준비 끝에 단행한  
역사적 농노해방은 매우 불충분한 것이었다.   
노예의 사슬만 끊어준다고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해방된 농노들이 농민으로 살아남으려면 경작할 토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국가는 그들에게 토지를 배분하였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땅이 여전히 지주의 손에 남아 있었으므로  
농민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매우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토지 대금의 일부를 자신이 직접 부담해야 했다.  

또한 농민공동체의 연대책임이 강화됨으로써 농민은 공동체에 강하게 예속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농노들은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그 신분이 자유롭지 못했고,   
경제적 부담의 증가로 궁핍이 가속화 되었다.

 

Wanderer(Pilgrim). by Vasily Perov. 1870 Oil on canvas, 54 x 8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정이 들어설 때까지  
리얼리즘은 부르주아들의 부정적인 면을 고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비인간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모습을 묘사한 리얼리즘을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그리고 나중에 고리끼가지 이어지는 흐름인데  
페로프도 작품 활동을 할 때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예술가가 눈을 감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그런시기였다.    
  
1861년, 27세가 되던 해 페로프는 졸업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다.  
부상으로는 해외 유학이 주어졌으나 그 해 그가 제작해서 전시한 작품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부활절의 마을 십자가 행렬’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성직자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전시회에서 철거되고 말았다.  
비판적 사실주의 작품이기 때문이었고 한다.   
당시 페로프의 친구가 남긴 글 중에는  
‘이태리 유학 대신에 솔로베츠키섬으로 유배를 갈지도 모른다’라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The Organ-Grinder. 1864. by Vasily Perov. Oil on panel,  
25 x 31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떠돌이 음악가의 삶이 참으로 만만치 않다.   
곁에 내려 놓은 것은 등에 지고 다니던 소형 오르간 ‘샤르만카(шарманка)’이다.   
퇴락한 돌담 곁 벤치에 팔을 괴고 앉은 그의 모습은 Savoyard 만큼 남루하지는 않다.   
하지만 표정없이 멍한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에서는 내일에 대한 작은 희망의 기미마저 찾아볼 수 없다.       
   
2년 동안의 짧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페로프는 곧바로 그의 대표적 걸작들을 그려 나간다.   
그의 사회비판 정신은 이무렵 절정에 이른 듯하다.   
그림에서는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힘겨운 가련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아울러 그들을 그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The  Organ-Grinder in Paris. 파리 거리의 악사. 1864.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6 x 76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다음 해 독일의 몇 개 도시를 거쳐 파리로 유학을 간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서유럽 거리의 풍경은 이 때 그려진 것이다.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에 대해 그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기술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라고 했지만   
실제로 뚜렷하게 남긴 것은 없다고 한다.

 

Savoyard Boy. 1863. 거리의 아이.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32 x 41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짧은 파리 시절 그가 남긴 작품들인 거리의 아이(Savoyard Boy)  
그리고 <파리 거리의 악사(Organ-Grinder in Paris)>를 보자.   
Savoy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서 휴양지로 유명하다.   
‘Savoyard’를 직역하면 ‘사보이 사람’이지만, 그곳에 거지가 많았는지 19세기 유럽에서는   
거리의 거지아이들을 ‘Savoyard’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림에서 길가 돌 위에 주저앉은 아이는 곤한 잠에 빠져 있다.   
남루한 행색. 비정상적으로 커 보이는 얼굴에 담겨 있는 고단함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정말 ‘아이’가 맞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시골의 부활절 행진-Easter Procession in the Country. 186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71.5cm x 89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 역시 19세기 유명한 사실주의 화가이자 초상화가이다.   
그는 <도스도예프스키의 초상화>로 유명한데 페로프의 작품은 대부분  
강한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으며, 당시 러시아 회화 역사에서 중요한 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현실과 사건을 들여다보는 냉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고고하고 가식적인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다.   
보이는대로 과장없는 색감이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페로프는 1834년 유형에 처해진 급진 귀족의 서자로 태어났다.   
검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에 적극적이었고,   
아버지의 후원으로 1854~1861년까지 모스크바 예술 학교에서 회화, 조각, 건축등을 공부한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현실의 어두움을 직시한 페로프는  
성직자의 타락을 폭로한 <시골의 부활절 행진>을 비롯하여  
통렬한 풍자와 사회적 항의를 담은 그림을 그렸다.  
당시 <시골의 부활절 행진>은 그 풍자로 인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1862년부터 2년 동안 유럽 체류 후의 일련의 작품 <트로이카>, <들판의 환송> 등에도  
사회적 항의의 자세가 역력하다.   
크람스코이와 레핀 등 젊은 미술가 그룹이 '이동파'를 결성했을 때,  
선배 화가로서 그는 그들과 함께 행동하기도 했다.    

먼저 <시골의 부활절 행진 Easter Procession in the Country(1861)>을 보자.   
부활절을 맞아 시골교회의 문을 나선 사람들은  
십자가와 깃발을 앞세우고 성가를 부르며 행진하기 시작한다.   
그림이 그려진 1861년은 러시아 역사상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농노해방령이 내려진 해이다.  

게다가 이날은 또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쯤 되면 그림 속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대와 환희에 들뜬 표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모습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깃발과 십자가를 든 사내, 그리고 이콘을 가슴에 안은 여인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교회문 앞 좌우로는 고주망태가 된 사내 셋이 널브러져 있으며,   
기둥에 몸을 의지한 정교 사제 역시 술에 취해 계단을 잘 내려 설 수 있을지 아슬아슬하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는 남루한 사내가 굽은 등을 하고 또 다른 이콘이 그려진듯한 널빤지를 안고 있다.   
만약 오랜 숙원이던 농노해방 조치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면   
화가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페로프는 음산한 잿빛 하늘과 눈이 녹아 질척한 시골 흙길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미래에 대한 음울한 전망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Tea party in Mytischi near Moscow. 186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모스크바 근교 므이치시치에서의 다회 (Tea party in Mytischi near Moscow)> 역시 암울한 그림이다.   
값비싼 옷을 입고 차를 마시는 사제.   
그의 혈색 좋고 거대한 몸집에 비해, 적선을 구걸하는 눈먼 거지부자의 행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다.   
사제의 반들거리는 구두 한 켤레면 이들은 며칠간 배고픔을 잊겠지만,   
거대한 기름덩어리로 타락한 짐승은 인간의 불행에 도통 관심이 없고 시종은 그를 냉정하게 밀어낸다.  

당시 귀족들과 함께 특권지배계급에 속했던 정교회의 사제들은   
이처럼 페로프 초기 그림에서 집중적인 풍자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귀족들보다는 사제가 아무래도 좀 만만해서일까.   
혹은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들의 타락한 영혼이 그만큼 더 가증스러워서일까.   
150년 전 먼 러시아에서 그려진 이 그림 속 비계덩어리들이 그리 낯설지 않음은,   
그 수많은 아바타들을 오늘 이 땅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유럽의 화가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바실리 페로프도 세상의 중심이었던 파리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머무른 것은 1863~4년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이 무렵은 파리에서 인상파가 막 태동하던 시기로서, 1863년은 마네가 낙선화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풀밭위의 점심>을 두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던 기념비적인 해이다.  

대혁명과 그에 뒤이은 두 차례의 혁명을 거치며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횃불을  
가장 치열하게 들었던 나라 프랑스. 누구 하나 빠짐없이 사회의식으로 충일하였을 것 같은 그곳에서,   
사회의식을 가장 멀리 하는 예술가 집단인 인상파가 탄생한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이다.  

이는 19세기 후반 들어 노동조건이 조금씩 개선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예술가란 원래가 앞 사람이 해 오던 방식을 좇아 생각하고 살아가기를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먹고살기가 조금 나아지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근대 시민사회의 새로운 생활양식들이 등장하자   
파리의 화가들은 대번 그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공원과 카페, 나이트클럽의 풍경은 그들의 단골소재였다.   
화가들은 그곳의 무용수와 가수, 여급, 창녀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으되,   
그를 통해 무거운 메시지를 전하거나 사회진보 따위를 꾀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을 빼앗은 건 새로운 세상을 비추는 빛과 우연성의 미학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 국가였던 러시아의 사정은 프랑스와 전혀 달랐다.   
1861년 농노해방령이 내려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곤궁한 처지에 있던 농민들,   
그리고 산업혁명의 태동과 함께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도시노동자들.   
러시아는 여전히 참혹한 환경 속에서 빵과 자유를 갈구하는 존재들로 가득했고,   
프랑스와는 달리 어디서도 희망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페로프의 눈에,  
빛과 색채에 혼을 빼앗긴 파리 인상파의 그림들이 탐탁하게 느껴졌을 리 만무하다.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볼 준비가 되어있는 것만 보게 된다.   
모네와 르느와르, 드가의 현란한 그림들이 태동하고 있는 파리에서도   
페로프의 눈길은 그 사회의 가장 아랫바닥 사람들에게 닿아있었다.

 

Lent Monday (Going to the Bath House). 1866. by Vasily Perov.  

19세기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비참했다. 짓밟히고, 고통받고, 숨 막히는 삶이었다.   
사회는 부패했고, 비판세력이나 국민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언론을 장악하고 전 러시아를 향해 광범위한 세뇌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은 러시아인의 민족적 자각을 낳았다.  

이어 1825년 터진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이 자각이 사회변혁의 열정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러시아 미술은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화하고 변모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화가들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지식인이었다.   
그들에게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변혁하는 도구였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러시아 화가들의 창작 규범이었다. 그들은 사회를 비판했고, 정부에 맞섰다.   
그런 예술가 정신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이 1870년 결성된 ‘이동파’였다.  

이동파의 등장이야말로 근대 러시아 미술을 서유럽 미술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는 지점이다.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동파란 러시아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려고   
여러 도시로 옮겨다니며 전시회를 연다는 취지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이동파는 말하자면, 미술계의 브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이었다.  

이동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했던 지식인들 중심의 민주적 미술 유파였다.   
세계 미술사에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한 미술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을 추구한다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Arrival schoolgirl to a blind father(Visiting the Blind Father). 눈먼 아버지에게 돌아온 여학생.   
1870. by Vasily Perov. sketch and study. 53 x 60.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Sleeping children. 잠자는 아이들. 1870.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61 x 53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Playwright Alexander Ostrovsky. 187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0.7 X 103.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Old Parents Visiting the Grave of Their Son. 아들의 무덤을 찾아온 노부부. 1874.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37.5 X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Seller of Song Books  in Paris. 1864.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Vasily Bezsonov. 1869.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62.5 X 74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Author Vladimir Dahl.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80.5 X 99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Historian Mikhail Pogodin.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4.3 X 104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Poet Apollon Maikov.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9.8 X 103.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Caretaker-Letting-an-Apartment-to-a-Lady. 숙녀에게 아파트를 세주는 관리인. 1878.  
by Vasily Perov.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Judgement of Pugachev. 1873.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Painter Alexei Savrasov. 1878.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Arrival of a New Governess in a Merchant House. 상인의 집에 도착한 가정교사. 1866,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4 x 44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Investigation (Arriving at an the inquiry). 1867.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43 X 3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Festivities in Paris. 1863-1864. by Vasily Perov.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historian Mikhail Petrovich Pogodin.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8.8 X 11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Fomushka-owl, 1868. by Vasily Perov.  
oil on panel. 36.8 X 44.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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