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portrait

빅토르 보리소프–무사토프 (Viktor Borisov-Musatov)는 러시아의 화가로서 상징주의와 
순수한 장식적 스타일을 표현했고 사실주의를 혼합한 독특한 후기 인상주의 스타일로 두드러졌다.
작가의 개성이 느껴지는 후기 인상주의 스타일이다.
미하일 브루벨과 함께 그는 종종 러시아 상징주의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상징주의는 보통 꿈과 연결되어 표현을 많이 한다.
그래서 몽환적인 색상도 많이 나오기도 한다.

빅토르 무사토프는 러시아 사라토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노로 태어난 말단 철도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그는 척추 부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그는 평생동안 혹사당했다고 한다.
​옷이나 머리스타일을 보면 그 시대를 유추할 수 있겠는데 1884년 그는 사라토프 실제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그의 스승인 표도르 바실리예프와 코노발로프가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했다.

 

The Pool. 연못. 1902. by Viktor Borisov-Musatov.  oil on canvas. 

빅토르 보리소프–무사토프 (Viktor Borisov-Musatov)의 작품은 
19 세기 후반 ~ 20 세기 초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 중에서도 
아주 개인적이고 친밀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도 때문에 두드러진다. 
그의 작품은 시대를 묘사하지 않고 예술가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때로는 존재와 역사적 요소를 완전히 무시하고, 우울함과 과거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하다.

보리소프–무사토프의 “물”에는 앉아 있는 한 여인이 작은 연못 근처에 묘사되어 있다. 
이 여인은 무사토프의 사랑하는 아내이고, 그 옆에 서 있는 여인은 무사토프의 연약한 여동생이다. 
물은 마치 푸른 하늘에 얼어 붙은 것처럼 구름을 똑같이 나타낸다. 
캔버스 전체가 깊은 침묵으로 가득차서 사람은 그의 위대함과 무의미함을 느낀다.

보리소프–무사토프의 그림 “연못”은 당시 비평가, 예술가 및

모든 동시대 예술인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다. 
탁월한 작업, 눈에 띄는 벨벳 색상, 하늘의 선명도, 나무의 단풍, 연못의 조용한 표면.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성, 즉 아티스트의 아내는 그림의 중심 색과 구성 요소이다. 
그녀의 드레스에 수분이 많은 밝은 청색이 전체 작업의 색 구조와 분위기를 결정한다.

 

May Flowers, 5 월 꽃. 1894. 

 

Self-Portrait with sister, 1898.  oil on canvas.  

보리소프–무사토프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러시아 예술가로 
사라토프 지방에서 태어나 거기에 살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1898년 여동생과 함께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Zubrilovka 가옥에서 초상화를 직접 만들었다. 

자화상에서 보리소프–무사토프는 자신과 여동생 엘레나를 묘사했다. 
그녀는 아주 어렸고 14살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캔버스에 작가가 만든 이미지는 젊고 어린 소녀가 아니라 
과거 시대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는 여성을 보여 준다. 
그녀는 19세기의 40년대에 입힌 드레스를 입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초상화를 반만 묘사했다. 
자매와의 초상은 드라마 속의 영혼을 반영한다. 
침묵, 모든 모습은 영웅들이 다가오는 변화를 얼마나 예리하게 느꼈는지 보여준다.

상징주의 시대, 신사의 은총과 숙녀의 평온이 떠나고 있다. 
새로운 세기가 다가오고 있다. 
형제 자매는 일시적인 달리기를 멈추고 싶었던 과거와 관련된 모든 사건을 살펴보는 것 같다.

작가는 죽기 몇 년 전에 이 그림을 그렸다. 
한 세기 후, 우리는 그 당시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볼 수 있다. 
그림은 햇볕이 잘 드는 여름 날 좋아하는 가옥의 테라스에 그려져 있다. 

 

The Emerald Necklace. 1904. 214. 3 x 125 cm. 
여성이 입은 드레스 치마의 디테일이 매우 독특하다.

 

Phantoms, 1903.  oil on canvas.  

 

Spring Sun, 1899. 

 

Agave, 1897. 

 

Lady in a Rocking Chair, 1897.

 

Daphnis and Chloe, 1901. 

 

Autumn Song. 1905. 

 

Autumn Evening (sketch for a panel), 가을 저녁. 1904. 

 

Without words, by Victor Borisov-Musatov

 

window, 1886. 

 

Cabbage Field with Willows, 1893. 

 

In a Boat, 1893. 

 

Boy with a Dog, 1895. 

 

A Caucasian Study, 1895. 

 

Peasant Women, 1894. 

 

Girl in the Sunlight, 1897. 

 

Boy Seated, 1901. 

 

Autumn Mood, 1899. 

 

Two Ladies, 1899. 

 

Harmony by Victor Borisov-Musatov

 

Cherry Trees in Blossom, 1901. 

 

Lady Embroidering, 1901. 

 

Tapestry, 1901.

 

Lady in Blue, 1902. 

 

Portrait of a Lady, 1902. 

 

Still Life with Flowers, 1902. 

 

Lady Seated, with a Tapestry in the Background, 1903. 

 

Walk at Sunset, 1903. 

 

Bluebells, 1903. 

 

Portrait of Nadezhda Stanyukovich, 1903. 

 

In the Light of the Setting Sun, 1904. 

 

Woman in Blue Dress, 1903. 

 

A Walk in the Park, 1904. 

 

Spring Tale (sketch for a panel), 1904. 

 

Summer Melody (sketch for a panel), 1904. 

 

Dream of deity. Sketch of fresco, 1904. 

 

Garlands of Cornflowers, 1905. 

 

Hazel bush, 헤이젤 부시. 1905. 

작가의 인생의 마지막 해인 1905년 캔버스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보리소프–무사토프는 비현실적인 연무로 덮여 있는 풍경으로 유명하다.
헤이젤 부시 (Hazel bush)는 타루사 (Tarusa)의 테라스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예술가가 살았고 묻혔다. 
그는 특히 오카(Oka)의 강력한 물에서 영감을 받은 그 장소의 풍경을 좋아했다. 
개암 나무 숲이 쓰여진 곳은 보리소프–무사토프가 오카를 묘사한 여러개의 파노라마 사진을 그린 시골집이다. 

캔버스의 색깔에 따르면, 초목과 초록색 잎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가을이 이제 막 넘어서야만 한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날씨는 매우 차갑고, 작가는 회색의 무거운 구름으로 그것을 포착했다.

개암은 가을 차가움에서 떨리는 차가운 나뭇잎. 
모든 색상이 얽혀 있어 일반적인 깊은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오카의 차가운 물이 천천히 백그라운드에서 흐른다. 
지평선의 먼 곳은 푸른 하늘 밴드이다.

강 건너편의 중앙에서, 작가는 수확 후에 쉬는 노란 들판을 그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아지랑이 숲에 의해 매력을 받고 있으며, 
그 숲은 황색의 두꺼운 가지를 전경에 퍼뜨렸다. 
그는 나뭇 가지를 날씬한 실버 펜으로 끌고 있는 것 같다.

보리소프–무사토프의 그림은 러시아의 풍경에 대한 작가의 색채와 깊이가 가득하다. 
캔버스 헤이즐넛 관목의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그 장소에 대한 작가의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각 스트로크는 아티스트의 영혼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단지 35년의 삶으로 긴 인생을 살지 못했지만 이 기간 동안 그는 
유산에 영원히 남을 77 편의 그림을 만들었다. 
그는 가을 주기의 그림이 그려진 곳 근처에 묻혔다.

 

Requiem, 1905. 

 

The Volga. Nizhny Novgorod. 1894. 

도로의 짙은 회색 구멍, 오른쪽과 왼쪽의 진한 녹색 잔디, 앞에 있는 나무의 벽, 
왼쪽의 흰색 벤치. 숲을 넘어서 왼쪽으로, 강은 저녁 달에서 넓고 희끄무레하다. 
요트는 먼 거리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거대한 하늘과 밝은 초승달. 삶의 교착 상태...

 

Crimean etude, 크림 반도. by Victor Borisov-Musatov

집과 나무 뒤에서 막힌 녹색 숲. 집으로 가는 길. 
집 뒤에는 주거가 숨겨진 짙은 녹색 식물이 있다. 
밝은 하늘. 닫힌 삶의 세계와 예술가의 인상.

 

Moleben at the railway station, 기차역에서의 기도. 

기차역 : 역 앞 광장, 표창, 나무, 여인들의 앞치마. 광장에 서 있는 여성, 어린이, 남성.
그림의 깊이, 오른쪽, 펼쳐진 책 앞에 서 있는 제사장, 양초로 장식 된 벽, 
그리고 그것에 아이콘. 어디를 보아야 할까? 

왼쪽의 체크 아웃 창 : 하단이 검은 색, 상단이 노란색, 
창 위에 “체크 아웃”이라는 단어가 흰색 배경에 쓰여 있다. 
오른쪽에는 흑인 성직자가 있다. 
그 앞에서는 노란벽 위에 박스 오피스창 색상의 반복이 있다.

제사장과 달리 모든 사람들은 가볍고 옅은 회색 또는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엄격한 검은 정장을 입은 한 청년. 검정색 및 노란색 박스 오피스에서 구입한 차표는 
가장 가까운 미지의 미래로 여행할 권리가 있다. 
일주일, 한 달. 따라서 플랫폼은 매우 모호하다. 
티켓의 검은 부분은 음식, 주택, 가사일, 가족 및 
즉각적인 계획과 관련된 일상적인 문제를 말한다. 
티켓의 노란색 부분은 영적인 삶, 도덕 원칙 및 사람들 간의 관계를 말한다.

이제 그들은 모두 여행 전에 역에 모여 들었고, 하나님께 축복을 청하고, 
가까운 장래에 그들을 도울 것을 요구했다. 
성직자는 그들의 목소리로 노란색의 영적 벽 앞에 말한다. 
그러나 사제 자신은 검고 뚱뚱하다. 

 

On a Balcony in Tarusa, Tarusa의 발코니에서. 1905.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경치는 Tarsa에 있는 그의 집 발코니에서 볼 수 있다. 
가을의 안개는 흐릿한 빛을 가져다 주었다. 황금 잎은 베란다에 걸쳐 있다.
분홍색과 황록색 반점 뒤에 있는 회색 기둥과 난간 뒤에 조각이 빛난다.

 

Young Girl with a Necklace, 1904. 

 

Lady in a Garden, 1903. 

 

Poppies in the Garden, 1894. 

 

Three Ladies on the Terrace, 1903. 

 

Young Girl on the Balcony, 1900. 

 

Reapers, 1897. 

 

Woman in a yellow shawl, 1904. by Victor Borissow-Mussatow. 
45 x 65 cm. Tretyakov Gallery Room 45

 

On a Balcony, 1899. 

 

A Garden in Blossom, 1900. 

 

Boy in the garden, 1898. 

 

Boy at the seashore, 1895. 

 

Roofs by Victor Borisov-Musatov

 

[영상] borisov musatov kartini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45. 보리소프 무사토프 (Victor Borissow-Mussatow) 작품 전시방

 

The celebration of the wedding agreement, 1777. by Mikhail Shibanov
oil on canvas, 199.9 × 24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미하일 쉬바노프(Mikhail Shibanov ? ~ 1789)의 1777년 작품으로, <결혼 계약의 축하>이다. 
18세기 중반에 그려진 농민을 모델로 한 작품으로 철저한 귀족 중심의 러시아에서 
농민에게도 귀한 삶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그림이다.
당대 농노들의 일상을 주고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의 작품들 중에 꽤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림 속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농노라고 하기에는 조금 잘 차려 입은 듯 하니, 
조금 형편이 나은 농노이거나, 일반 농민일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이 수즈달의 농민을 그린 것이라는 사실은 이 그림 뒤에 화가 본인이 직접 써 놓은 글로 알 수 있다.  
비교적 옷차림이 농노만큼 남루하지는 않으면서도, 전형적으로 소박한 모습이다. 
헌데, 신부의 얼굴은 결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이 아니라 다른 곳인 아래쪽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의문을 자아낸다.  
혹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데 대한 심정이 얼굴에 나타난 것인지, 
가난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여서도 가난한 삶을 계속해야 한다는 그런 걱정들로 가득차서 인지 
보는 사람의 생각에 맡길 뿐이다. 

반면,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은 신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랑인 듯하다.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의 옷차림과 신부의 옷차림은 결혼한다고 
특별히 옷을 새로 해 입은 듯, 딱 보기에도 매우 큰 차이가 난다. 
당대 러시아 농민들도 가난하지만 결혼을 하는 때 만큼은 생애에 한번 
가장 아름답게 치장했던 것은 지금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사진 상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신부가 입고 있는 옷의 
부드러운 느낌과 세밀한 표현은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림의 이름은 결혼축하를 나타내고 있지만, 썩 좋지 않은 주위 사람들의 옷차림새, 
식탁위의 빵들로 보아 당시 농민들의 삶이 가난했음을 알 수 있다.

 

Portrait of A. G. Spiridov, 1772. by Mikhail Shibanov

미하일 쉬바노프(Mikhail Shibanov ? ~ 1789)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부친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망 시점 역시 정확하지 않으며 1789년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략 5-6 점 정도가 있고, 그 중 2 점은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작품들로서, 
러시아 장르화(평범한 일상의 삶이 그려진 작품) 분야에서는 초기 작품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미하일 쉬바노프는 주로 농노의 평범한 일상을 그렸고, 후반에는 초상화도 몇 점 추가했다. 

 

Peasant lunch, 1774. by Mikhail Shibanov. 

이 작품은 윗 작품보다 3년 전 그린 것이다. 작품 이름은 <농노의 점심>이다. 
작품 자체에서는 당대 농노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위 작품보다는 좀 더 농노의 고되고 지친 삶을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 점이 눈에 띈다. 
그림 안에 그려진 농노들의 얼굴에서는 농노로서의 고달프고 노동에 찌들어 
삶의 피로가 겹겹이 쌓인 듯한 얼굴을 하고 있고, 젖을 먹이고 있는 여성 역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기 보다는 무심하게 아이를 응시하며 해야할 일을 해야하는 듯, 
'너의 앞으로의 삶도 역시 힘들 것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위의 두 작품 모두 배경을 어둡게 표현한 것도 당시 농민들의 삶이 
어둠의 지속이었을 것이라고 화가 본인이 느꼈기 때문이 아닐 까 하는 생각도 든다.

 

Portrait of Catherine II in a traveling suit, 1787. by Mikhail Shibanov. oil on canvas. 

미하일 쉬바노프는 작품 활동 후반기에는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 중 예카쩨리나 2세의 초상화를 실어 본다.
궁전의 격식있는 차림이 아니라 비교적 자유로운 차림의 여제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Alexandr Matveevich Dmitriev-Mamonov. 1785. by Mikhail Shibanov. oil on canvas. 

 

Catherine the Great. by Mikhail Shibanov.

 

St. Catherine, 1786. by Mikhail Shibanov. oil on canvas. 

 

 

Konstantin Flavitsky, Portrait by Fyodor Bronnikov

​콘스탄틴 플라비츠키 (Konstantin Flavitsky 1830-1866)는 1830년 9월 모스크바에서 
관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곧 고아가 되었고 7년간을 꼬박 보육원에서 지냈다. 
그림에 대한 재능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알려지지 않았다가, 미술 단체의 후원으로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고, 회화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1855년 황금메달을 받으면서 졸업을 했고, 그 덕택으로 이탈리아에서 6년간 유학했다.

현재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타라카노바 황녀>가 1864년 공개되면서, 
미술계 내에서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모두들 앞으로의 그의 미술활동에 큰 관심을 나타내었고, 
그가 훌륭한 그림을 많이 그려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라카노바 황녀>를 그리고 있을 당시부터 그는 이미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을 당시 병을 얻어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더욱 심해졌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유럽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36세의 나이로 1866년 9월 짧은 생을 마감했다.

 

Princess Tarakanova, 186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가장 잘 알려진 그의 그림 <타라카노바 황녀>는 러시아어로는 
<타라카노바 황녀의 죽음(Смерть княжны Таракановой)>이다. 
이 그림은 러시아 역사를 소재로 하면서, 신화로 내려져 오는 사건을 그렸다. 

그림 속의 여인은 참으로 아름답다. 
죽음을 직전에 둔 여인이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우아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여인 그림을 꼽으라면 
이 그림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아름다운 것이 선하다는 토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타라카노바 공주의 자태는 
충분히 우리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예카테리나 2세가 철저히 귀족 중심의 정치를 펼치던 시기에 
엘리자베타 여제(1709~1762. 표트르 대제의 차녀)의 딸이었던 타라카노바 공주는 
절대 권력에 정면 도전한다. 
하지만 권력 싸움에서 참패,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고, 
공주는 죽기 전에 홍수의 범람으로 감옥 속에서 수장되고 만다. 
그림은 공주가 죽기 직전에 절망하는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단순히 죽어가는 공주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기 직전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공주의 모습을 빗대어 
도탄에 빠진 러시아지만 공주처럼 기본 클레스가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자 했다 한다.

먼저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타라카노바 황녀는 표트르 1세의 딸인 엘리자베타 여제가 공식적으로 
결혼한 사실이 없는 상태에서 몰래 낳은 자식, 즉 사생아였다. 
일찍이 해외에서 조용히 자라나던 타라카노바 황녀는 예카테리나 2세가 
권좌에 있던 시대에 다시 나타나서 본인만이 러시아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진정한 왕위 계승자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타라카노바 황녀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타 여제가 물러난 후 
왕위를 계승했던 표트르 3세, 즉 본인의 남편을 죽음으로 밀어내고 황권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독일 출신으로 사실 권좌를 이어 받을 혈연적 정통성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고, 
황위 계승자의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예카테리나 2세가 
타라카노바 황녀에게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혈연 관계가 있는 진정한 황위 계승자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권좌에 대단한 욕심을 보였던 예카테리나 2세는 언제고 그런 사람이 나타날까 
노심초사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연히 정통 계승자라 말하는 타라카노바 황녀가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시대적으로 정통성을 확인할 길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황권 유지에 거슬릴 것을 우려해 조용히 사람을 보내 러시아로 불러들여 
수도원에 가둬놓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기록에 수도원에서 칩거하던 사람들 중에 타라카노바 성을 지닌 수녀가 있었고, 
그 수녀가 1775년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있다고 한다. 

타라카노바 황녀의 태생부터 사망까지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문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과 달리 그림에서처럼 요새 감옥에서 수장을 당했다는 것은 
좀 더 비극적이고 불운했던 황녀를 원했던 사람들의 만들어낸 신화인 것이다.  
즉, 콘스탄틴 플라비츠키는 타라카노바 황녀의 마지막 순간을 
실제 사실이 아닌 신화에 기반하여 그림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역사 속 타라카노바 황녀가 황실의 미움을 받아,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신화가 
더욱 자극적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 속 여자의 비운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황실의 권위에 짓눌려 정통성을 가진 황위 계승자가 
처참하게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홍수로 인해 감옥 내부의 침대까지 물이 차오르고 물을 피해보기 위해 이리저리 바쁜 쥐들 사이로, 
죽음이 임박했음을 스스로 깨닫고 체념하듯 무심하고, 절망적인 눈빛으로 
천정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정도로 불쌍하다. 

감옥 내부의 생활은 엄청 열악하면서도,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그녀가 황녀임을 말해준다.  
역사 속 당시에 실제로 1777년 9월에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기록적인 대홍수가 일어나 매우 큰 수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Jacob's Children Selling Their Brother Joseph, 이집트로 팔려가는 요셉. 1855.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콘스탄틴 플라비츠키 (Konstantin Flavitsky, 1830-1866)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타라카노바 공주를 그려 단 한 장의 작품으로 19세기 러시아 최고의 화가가 된 사람이다. 
그가 1855년에 그린 <이집트로 팔려가는 요셉>은 창세기 37장 14-36절이 그 배경이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으로 스켐에 도착했지만 형들은 그곳에 없었다. 
요셉이 그곳을 헤매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형들이 도탄으로 갔다고 말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형들을 찾아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멀리서 요셉을 알아보고, 

요셉이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동생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어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먹히게 할 작정이었다.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요셉이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그를 잡아 물이 없는 빈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 이집트로 내려가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창세기 37,26-27)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그래서 미디안 상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들어 올리고 있고,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겨 돈을 챙기고 있으며, 
두 형들은 요셉의 긴 저고리를 가져다가 양을 잡아 그 피를 옷에 묻히고 있다. 
그런데 구덩이에서 들려 낙타에 실리는 요셉은 마치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님 같고,  
은전을 챙기는 형들의 모습은 유다의 모습 같으며, 요셉의 옷에 묻히는 어린양의 피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신 예수님의 피 같지 않은가? 
화가는 요셉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Judgment of Solomon, 1854. oil on canvas. 

 

Christian Martyrs at the Colosseum, 1862.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The Finding of Moses.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Italian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Kalug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aluga)

 

Christian martyrs in the Colosseum. 

 

[영상] Konstantin Flavitsky Paintings!

 

 

 

11~18세기 러시아 성상화 <이콘>

 

The Virgin of Vladimir. 1130s. 블라디미르의 성모. by 콘스탄티노플 화파. 목판에 템페라. 104 × 69 cm. 

이콘화는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기조의 대상이며 숭배의 대상이다. 
러시아인들은 집안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인 집안의 동쪽 아름다운 모서리란 뜻의 
크라스느이 우골(красный угол, red corner)에 이콘을 모시고 초를 켜 놓고 항상 기도를 한다. 
자신의 일신부터 국가의 큰 일까지 기도하고 그렇게 하면 신의 보호를 받는다 믿는다. 
보통 전쟁이 나도 이콘을 행렬 밴 앞에 두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한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이콘은 콘스탄티노플 화파의 한 화가가 그린 것으로, 
1131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크리소베르게스가 

키예프 러시아의 대공 유리 돌고루키에게 선물한 것이다. 
돌고루키의 아들 보골륩스키 대공이 1155년 블라디미르로 가져와 

<블라디미르의 성모>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이콘이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1395년 티무르의 모스크바 침입 때다. 
이콘을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급히 옮겨온 뒤 

대공 바실리 1세는 그 앞에서 밤새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자 티무르 군대가 전투 한번 치르지 않은 채 퇴각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기적에 놀란 모스크바 사람들은 이 이콘을 블라디미르로 돌려주기를 거부했고, 
결국 모스크바가 계속 간직하게 됐다. 


이 이콘을 통한 성모의 보호 역사는 1451년과 1480년 

타타르 무리의 침입 때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심지어는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해 왔을 때 스탈린이 이 이콘을 비행기에 실어 
주변 상공을 비행하도록 하자 며칠 뒤 독일군이 퇴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교회는 이런 기적이 하나의 그림으로서 이콘 자체가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이콘을 공경하는 것은 그림 속의 성인을 영예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 
그림을 영예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기적이 나타나는 것도 
성인들의 기도를 통해 신이 역사한 것이지 그림 자체가 역사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블라디미르의 성모>를 끝내 돌려주지 않은 모스크바 사람들의 태도가 시사하듯 
이콘은 단순한 기적의 매개 수단을 넘어 그 자체가 기적의 중요한 근거가 되곤 한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사례에서 보듯 다른 이콘을 놔두고 

굳이 특정한 이콘에 집착하는 것은 그만큼 그게 더 ‘영험’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콘을 향한 신도들의 열정은 그림 속의 예수와 성모, 성인들을 향한 열정일 뿐 아니라, 
이 험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 줄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증표에 대한 열정이기도 한 것이다.
정교회 못지않게 교회를 성상들로 장식해온 가톨릭교회 역시 성상 공경이 성상 자체가 아니라 
예수와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성상의 기능과 관련해 기적보다는 교육적 역할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성서”라는 가톨릭교회의 표현이 시사하듯 성화나 성인 조각상은 
글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한 훌륭한 교육 수단이었다.
기적의 매개물로는, 가톨릭의 경우 성상보다 

성인들의 유해를 비롯한 성유물을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었다. 
유럽의 성당이나 수도원은 예부터 예수의 수의, 십자가 조각, 못, 아기 예수의 음경 포피, 
모세의 지팡이, 성인들의 유해 등 갖가지 성유물을 적극적으로 수집했다. 
그 열기의 과격성은, 중세부터 서유럽 시장에 넘친 예수의 십자가 조각들을 다 합하면 
로마 거리를 포장하고도 남을 거라는 주장이나 1231년 튀링겐의 성 엘리자베트가 죽었을 때 
마르부르크 시민들이 유해 쟁탈전을 벌여 성녀의 머리카락뿐 아니라 
손톱, 손가락, 귀, 젖꼭지까지 잘라 갔다는 기록에서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The Virgin of Vladimir - Detai(부분) 

<블라디미르의 성모>는 가장 많이 사랑받는 정교회의 성화상 가운데 하나이자 
비잔티움 양식 초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축일은 6월 3일이다. 
심지어 다른 유명한 성화들 가운데 블라디미르의 성모 성화를 모방하는 것들이 많으며, 
이러한 경우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많은 모방작들은 지금도 예술적, 종교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성화는 어린 시절의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뺨을 맞대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성모자의 다정한 한때를 표현한 것이다.

<블라디미르 성모>는 12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키예프로 전해진 이콘이다. 
1395년 모스크바는 몽고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그 해 모스크바 대공국의 
유리 돌고루키 대공이 블라디미르에 있던 이 이콘을 모스크바로 가져온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몽고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이 <블라디미르 성모>를 가장 성스러운 러시아 이콘이라 칭송한다. 
블라디미르 성모는 트레차코프 미술관 소장이지만 
현재 트레차코프 미술관 교회에 전시되어 있다. 
<블라디미르 성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어 
한 번이라도 보게 되면 이 이콘의 아우라에 경배심마저 가지게 된다고 한다.
이 성화는 약 1131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루카 크리소베르게스가 
키예프 대공 유리 돌고루키에게 선물로 주었다.

 

The Saviour. 구세주. 1410s. by Andrei Rublev. 목판에 템페라. 158 ×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오늘날 우리는 모든 미술작품을 다 감상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많은 미술작품이 순수한 감상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목적과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동굴벽화를 그린 것은 사냥을 잘하기 위한 주술적 목적 때문이었고, 
고대 이집트인들이 조각을 만든 것은 미라처럼 

죽은 사람의 영혼이 거할 용기(容器)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비잔틴문명에서 발달한 이콘도 하늘과 땅을 영적으로 이어주는 

소통 수단이자 공경의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많은 관광객들이 미술관에서 이콘을 단순한 미술작품으로 감상하는 동안,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이콘을 여전히 거룩한 성물(聖物)로 공경하며 

실제 예수와 성인들을 대하듯 그 앞에서 경건한 태도로 기도를 드린다. 
심지어 이콘에 따라서는 기적을 일으키는 이콘이라 하여 

그 미스터리를 인정하고 기적의 체험을 추구한다. 
따라서 이콘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조형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이런 종교적 태도와 신앙을 함께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콘은 그리스어 에이콘(eikon)에서 왔다. 에이콘의 뜻은 ‘상, 꼴’(image)이다. 
그러니까 상을 그린 그림이라는 얘긴데, 상의 대상은 예수나 마리아, 
성인 같은 거룩한 존재와 십자가 같은 성물이다. 
이콘의 기원은 초기 기독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6~7세기에 제작된 게 30여 점 전해져 온다. 
물론 이콘이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는 그보다 더 오래 되었다. 
조형의 측면에서 그 뿌리를 찾아가면 기독교 이전 지중해 일대의 이교도 성상화에 이른다. 
이집트나 시리아에서 발견된 다산의 신이나 

군신(軍神)을 묘사한 2세기 말경의 나무판 그림들이 그 예다.

하지만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런 학술적인 기원과는 다른 기원론을 이야기한다. 
정교회의 시각에서 볼 때 이콘은 사람이 손으로 그린 데서가 아니라 

신이 직접 자신의 상을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콘이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의 상>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성상화가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그려진 이 이콘의 기원을 알아보면 이렇다.
예수 생존 당시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라는 중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편지를 써서 예수에게 보냈다. 
그때 화가를 딸려 보내 예수의 초상을 그리게 했는데, 

불행하게도 화가는 예수의 초상을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예수는 아마포를 들어 땀에 젖은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그러자 그의 이미지가 그대로 천에 새겨졌다. 

신하에게서 이 천을 건네받은 에데사의 왕은 그 자리에서 씻은 듯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손으로 그리지 않은 예수의 상이 세상에 전해졌고 이것이 이콘의 기원이 되었다.


동방정교회의 이런 설명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이콘과 관련한 교회의 두 가지 중요한 생각을 전해준다. 
첫째 이콘은 신으로부터 기원해 이콘을 공경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될 수 없으며, 
둘째 이콘은 때로 놀라운 기적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교회의 신학적 견해로는, 모든 이콘은 거룩하고 신비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 특별히 신의 선택을 받은 그림이 있다. 
신은 그 이콘을 통해 기적의 역사를 베푼다. 이런 이콘은 성유를 발산하거나 병든 이를 치유한다. 
혹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해 주고 백성들을 지켜 준다. 

The Saviour - Detai(부분). 

나무판에 아교를 바르고 달걀, 고무나무 수액, 벌꿀 등을 물감 삼아 그리스도 상을 그렸다. 
당대 최고의 이콘(Icon) 화가  루블레프(Andrei Rublev)는 러시아의 르네상스를 상징한다. 
그림의 여러 부분이 손상되었음에도 그리스도의 깊은 눈은 살아 있다. 
가을 우수 같은 눈, 인간의 죄와 구원을 담고 있는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영혼이 부끄러워진다. 

주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아주 태고의 언어를 말하는 것 같다.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갈망했던 러시아의 타르코프시키는 
끔찍하게 아름다운 흑백 영화 ‘안드레이 루블레프’를 통해 오늘 우리의 구원을 물었다. 

이콘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감동을 낳는다.  
사람들이 이콘으로부터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신앙적 열정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감동에 의해 강한 정서적 자극을 받은 탓이 크다.  
이런 이콘을 앞에 놓고 기적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지 모른다.  
그보다는 거기에 쌓인 수많은 영혼들의 간구와 소망, 눈물이

우리가 응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이 아닐까. 

 

[영상] The Saviour - 구세주 감상

 

The Holy Trinity. 1411. by Andrei Rublev. 142 × 11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여러 이콘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360~1430년 경)

수도자가 그린 <구약성경의 삼위일체>다. 
비슷한 형상을 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께서 식탁 주변에 앉아 

고요한 가운데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모습이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하나를 이루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우면서 거룩하게 표현됐다. 
식탁 앞의 빈 공간은 이 성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마련해 둔 자리처럼 보인다.

이 이콘은 우리가 이미 작은 상본을 통해 많이 보았기 때문에 친숙하지만
실제로 미술관에서 원작품을 보면 생각했던 것 보다는 훨씬 커서 감동도 더욱 깊어진다.
‘구약성경의 삼위일체’에 계시는 하느님과 눈을 마주치면 우리의 혼탁한 마음은
다시 정화되어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향하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루블료프가 표현한 ‘구약성경의 삼위일체’는 다른 이콘 화가들이 그린
‘신약성경의 삼위일체’와는 차이가 많다.
신약 이후에 화가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할 때 대부분 성부를 노인으로,
성자를 젊은이로 그리고 성령을 비둘기로 표현했다.

트레티야코프가 기증한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 박물관은 그 후에도 꾸준히
러시아 작품들을 수집하고 부속 건물을 지으며 큰 박물관으로 성장했다.
1985년에는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고리키 공원 내에 현대식으로 신관을 건립했다.
신관 외부에는 러시아의 많은 조각상을 전시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20세기의 회화 작품이 잘 전시돼 있다.
종교성를 지닌 작품 보다는 러시아의 근 현대사를 담은 작품들과 사회성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작품이 많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예술을 사랑한 개인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트레티야코프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러시아 고유의 미술관에 대한 꿈을 꾸었고
평생동안 수집한 작품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했다.
또한 시 정부도 힘을 보태 아름다운 미술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한 사람이 가진 소박한 꿈과 기증을 통해 이루어진 이 미술관은
오늘날 많은 사람을 내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요즈음 우리나라에도 여러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새롭게 개관하고 있다.
이런 문화기관 중에는 예술을 아끼고 사랑한 사람의 꿈을 바탕으로 해서 건립된 경우가 적지 않다.
한 사람이 가진 꿈을 여러 사람이 함께 꾸면 그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문화와 예술에 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제 이런 관심을 하나로 모아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회의 문화기관을
운영하고 만들 수 있을 지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교구나 주교회의에서 문화 기관을 건립해 주길 바라는 자세 만으로
교회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탄생되는 것은 아니다.
전체 교회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나 단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인이면서 예술을 사랑했던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관한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평생 작품을 구입하고
그것을 모두 기증한 그의 숭고한 삶을 살펴보고 본받을 필요가 있다.

글 : 정웅모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유물 담당)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87년 사제품을 받았다.
홍익대와 영국 뉴캐슬대에서 미술사·박물관학을 전공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장과 성미술 감독, 종로본당 주임, 장안동본당 주임 등을 역임한 바 있다.

 

Mandylion (Image of Edessa). 12세기 후반.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 
by 노보고로트 화파. 목판에 템페라. 77 × 7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의 예수, 세계에서 가장 미남이라 할 만큼 

잘 생긴 예수의 모슴이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하지만 러시아 이콘 속에 예수는 모습이 다르다.  
뭔가 고통이 엿보이고 결의에 찬 듯, 아니면 분노를 느끼는 듯 평범한 느낌은 아니다.  
세상사 모든 고통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이콘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가 중병에 걸려 예수께 병을 낫게 해달라 신하를 보내 간청한다.  
그러자 예수는 천을 꺼내 얼굴을 닦더니 이것을 왕에게 전하라 말하는데, 

천을 펼쳐보니 예수의 얼굴이 이콘의 모습처럼 찍혀 있었다 한다.  
이것을 받은 왕은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로마 병사들이 무서워 가까이 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한 여인이 예수 앞에 나서  
예수의 피와 땀을 닦아주었는데 그때 그 수건에 이 모습의 예수 얼굴이 새겨졌다 한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인들은 이 이콘화 앞에서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염원한다.

 

The Virgin Orans - Great Panagia. 위대한 파나기아의 성모. 12세기 초반. 
by 야로슬라브 화파. 목판에 템페라. 193.2 × 120.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야로슬라블에서 나온 패널 이콘 <파나기아의 성모>는 블라디미르의 화가들이 
키예프파의 이콘 화법을 계승해서 제작했다.  
커다란 판에 엄격한 정면 구도를 따르고 정확한 소묘와 
금빛 바탕의 배경을 사용한 것은 키예프 이콘의 전통이다.  
선명하게 그려진 옷의 주름은 정확하고 정연한 선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마리아의 얼굴에는 단정함과 조각적 아름다운이 있다. 
파나기아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는 수도원의 의식으로 
접시의 빵을 수도사에게 나누기 전에  높이 받든다.

 

The Transfiguration. 그리스도의 변용. 1403. by 페오판 그렉. 
목판에 템페라. 184 × 13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페오판 그렉은 비잔틴의 유명한 이콘 화가였는데  
러시아로 와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여러 작품을 러시아에 남긴다.  
이 <그리스도의 변용>은 타보르 산에서 제자들과 기도를 하던 예수가  
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난다는 신약을 바탕으로 한다.  
서 있는 사람들과 구부리고 있는 사람, 이렇게 2단 구도로 그려진 이콘이다.  
예수의 광채에 눈이 부셔 엎드린 사람들  
그리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제자들을 그린 표현이 역동적이다.  

빛의 색인 흰색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옆으로 왼쪽에 모세, 오른 쪽은 엘리야다.  
아래로 예수를 향해 몸을 구부린 자는 왼쪽부터 베드로, 요한, 야고보이다.  
그림에서 보면 베드로 만이 예수를 보고 있으며 다른 제자들은  
그 빛이 너무 강렬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지만  
모두 예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빛을 받은 영광의 제자임을 이콘이 나타내고 있다.

 

St Demetrius of Thessalonica. 1108. 223 × 132.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the Wonderworker. 1108–1113. 224 × 8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1130-1140s. 230 × 14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nnunciation. 1130-1140s. 238 × 16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doration of the cross (Obverse : The Vernicle). 12세기 후반. 77 × 7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Emmanuel with Angels. 12세기 후반. 72 × 12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Demetrius of Thessalonica. 12세기 후반. 156 ×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ormition. 13세기 초반. 155 × 12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Thaumaturgos (Half-Length) with Selected Saints. 13세기 초반. 

145 × 9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Deesis. (The Savior, The Virgin, St John the Baptist). 13세기 초중반. 

61.5 × 146.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Mandylion (Image of Edessa). 13세기 전반. 104 × 7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ormition. 13th century. 135 × 10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the tolga. 13세기 후반. 140 × 9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Sven with SS Anthony and Theodosius Pechersky. 

1288. 67 ×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pantocrator. 13세기 후반. 110 × 8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3세기 후반. 154 ×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rophet Elijah in the Wilderness with Scenes from His Life and Deesis. 
13세기 후반-14세기 초. 141 × 11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Savior Enthroned with Selected Saints. 13세기 후반-14세기 초. 

106 × 7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hodegetria. 13세기 후반-14세기 초. 

130 × 10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the Wonderworker. 14세기 초. 

141 × 10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Hospitality of Abraham (Old Testament Trinity). 

14세기 초. 116 × 8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of Zaraisk with Scenes from His Life. 14세기 전반기. 

128 × 7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Mandylion (Image of Edessa). 14세기 전반기. 89 × 7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the Wonderworker. 14세기 전반기. 114 × 7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the Wonderworker. 14세기. 152 × 9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14세기. 140 × 5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the evangelist. 14세기. 140 × 4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etrovskaya Virgin. 14세기. 23 × 1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S Boris and Gleb with Scenes from Their Lives. 14세기 초중반. 

134 × 8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Nativity of the Virgin. 14세기 중반. 113 × 7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and the Dragon. 14세기 중반. 55 × 3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S Boris and Gleb. 14세기 중반. 53 ×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S Boris and Gleb on Horseback. 14세기 중반. 128 × 7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with Scenes from His Life. 14세기 후반. 135 × 9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intercession. 14세기 후반. 68 × 4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Intercession. 14세기 후반. 99 × 2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royal doors, SS. John Chrysostom and Basil the Great. 14세기 후반.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Savior with the Apostles. 14세기 후반. 92 × 6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Pantocrator. 1360s. 68 × 4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Hodegetria. 1360s. 68 × 4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crucifixion. 14세기 중후반. 28.2 × 23.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Paraskeva Pyatnitsa, Barbara and Juliana. 14세기 중후반. 

143 ×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Synaxis of the Virgin. 14세기 중후반. 81 × 6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Pimen Virgin Hodegetria. 1380s. 67 × 4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pantocrator. 1387-1395. 149 × 9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1387-1395. 148 × 9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387-1395. 147 × 10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Gabriel. 1387-1395. 146 × 10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eter. 1387-1395. 148 × 9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aul. 1387-1395. 149 × 9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ormition. 1390s. 86 × 6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the Don. 1390s. 86 × 6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Intercession. 14세기 말 - 15세기 초. 58 ×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Transfiguration. 14세기 말 - 15세기 초. 111 × 8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Paternitas with Selected Saints. 14세기 말. 113 × 8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escent into Hell. 14세기 말. 149 × 10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4세기 말. 86 × 6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with Scenes from His Life. 14세기 말. 94 × 6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Hodegetria of Smolensk. 14세기 말. 102 × 8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nnunciation. 14세기 말. 43 × 3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hodegetria. 14세기 말. 40 × 3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the don. 14세기 말. 33 × 2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rophet elijah. 14세기 말. 75 ×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S Boris and Gleb. 14세기 말 - 15세기 초. 

164 × 11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S. Florus, Nicholas, Blasius and Anastasia. Tryptych. 14세기 말 - 15세기 초. 

24 × 1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Intercession. 15세기 초. 74 × 5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eter. 15세기 초. 150 × 5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aul. 15세기 초. 150 × 5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Paraskeva Pyatnitsa, Gregory the Theologian, John Chrysostom, Basil the Great. 15세기 초. 
147 × 13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ltar with the Instruments of the Passion. 15세기 초. 104 × 6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Nativity of the Virgin with Selected Saints. 15세기 초. 

80 × 61.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the Sign (Blacherniotissa) with Selected Saints. The Prophet Elijah, Nicholas and Anastasia. 
15세기 초. 66 × 5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and the Dragon. 15세기 초. 39 × 2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Pantocrator. 15세기 초. 110 × 6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Nativity with Selected Saints. 15세기 전반. 57 ×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The Baptist. 15세기 전반. 110 × 6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and the Dragon. 15세기 전반. 

82.8 × 64.2 × 3.2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15세기 전반. 110 × 6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in Majesty. 15세기 전반. 116 × 8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15세기 전반. 115 × 4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The Baptist. 15세기 전반. 115 × 4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aul. 15세기 전반. 111 × 4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eter. 15세기 전반. 113 × 4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Gabriel. 15세기 전반. 111 × 4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5세기 전반. 111 × 4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15세기 전반. 114 ×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Demetrius of Thessalonica. 15세기 전반. 117 × 4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Enthroned. 15세기 전반. 36 × 2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Alexander of Thessalonica. 15세기 전반. 

116 × 4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regory The Theologian. 15세기 전반. 

116 × 4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Metropolitan Peter. 15세기 전반. 158 × 9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15세기 전반. 22 × 1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Demetrius of Thessalonica. 15세기 전반 - 중반. 

22 × 1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Mandylion (Image of Edessa). 15세기. 22 × 1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Mandylion (Image of Edessa). 15세기. 128.5 × 91.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resentation in the Temple. 15세기. 61 × 4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5세기. 51 × 3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and the dragon. 15세기. 110 × 7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Great Martyr Barbara. 15세기. 73 × 5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Intercession. 15세기. 66 × 5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with Scenes from His Life. 15세기. 122 × 8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escent into Hell. 15세기. 25 × 19.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rophet Elijah. 15세기. 45 × 3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Nativity of the Virgin. 15세기. 44 × 3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Arsenius the Great, Pachomius the Great, Simeon Stylites. 15세기. 

25 × 19.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Eleusa. 15세기. 26 × 2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15 - 16세기. 55 × 4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in Majesty. 1408. 314 × 22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scension. 1408. 125 × 9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영상]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콘화 모음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5세기, 타타르 제국의 침략을 받은 격동기의 러시아.

수도사 안드레이, 다닐, 키릴은 일을 찾아 수도원을 떠나는데,

떠돌아다니던 그들은 전쟁과 약탈, 강간과 살인 등 참혹한 현실과 만난다. 

그들은 마침내 성상화의 대가 테오판을 만나게 되고,

테오판은 우직한 안드레이를 제자로 선택한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수도원 밖의 현실,

용서와 구원에 대한 내적 갈등으로 더 이상 벽화를 그릴 수가 없다.

 

격정의 15세기 미술계의 아이콘이었던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삶을 그린 영화. 

역사의 기록에만 몰두하며 순수 예술가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정치와 시류의 흐름을

쫓아 갈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는 종교화가의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고뇌를 통해

예술의 본질 탐구와 동시에 당시의 사회상을 꼬집은 수작. 

침략 전쟁, 기아, 질병에 고통받는 러시아 민중의 삶을 배경으로

'예술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중 가장 '역사'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프레스코'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마치 거대한 프레스코 벽화를 보는 듯한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폭주 기관차>의 감독 콘찰로프스키와

사석에서 대화하던 중에 신비의 베일에 싸여있던 15세기의 성상 화가

루블레프에 매력을 느껴 영화화할 것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삼위일체’로 유명한 15세기의 성상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인생과 고뇌를 그린

타르코프스키의 두 번째 장편으로, 9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된 프레스코 구조를 지닌다.

공개 당시 당국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11~18세기 러시아 성상화 <이콘>

마지막 56번부터 62번까지의 방은 고대 러시아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기 전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종교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종교화라면 이콘화를 말한다.

​이콘은 러시아 정교에서 사용하는 종교 도상을 담은 그림으로 
예수와 성모,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컴퓨터에서 쓰는 '아이콘(icon)'이란 단어가 바로 이 러시아어 이콘(Икон)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아이콘은 작게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누구나 쉽게 알아보도록 만들어 놓은 것처럼 
이콘 또한 글을 몰라서 성경을 읽을 수 없었던 중세 민중들이 교리와 성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신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트레챠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콘 중 대표작으로는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구세주>와 <삼위일체>를 들 수 있다. 
루블료프는 정형화되어 있고 틀에 짜여 있던 동방 정교 형식의 이콘을 변형시키면서 
러시아의 정서에 맞는 예술성 짙은 작품들을 탄생시킨다. 
그래서 루블료프가 활동한 15~16세기를 러시아 이콘 예술의 황금 시대라 부른다. 
또 트레챠코프 미술관에 이콘 전시실이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는 이유는 
이콘 제작이 러시아인들의 일상 생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으나 
예술품으로서의 이콘이 본격적으로 연구 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 말엽에 와서라 한다. 
그래서 이콘이 전시실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이콘의 기원과 지역별 화파들

1. 초기 교회의 예술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게 되면서부터 
회화도 신이나 성인들을 주제로 하여 그리게 되었는데, 
그 기법이나 재료는 고대보다 매우 진보되고 복잡해졌다. 
로마 근교에서 수없이 발견되는 카타콤바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초기 예술의 정수가 잘 보여 지고 있다. 
이들 카타콤바에는 이교도들이 무덤에 장식하였던 그림들도 보여지나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물고기나 십자가, 또는 착한 목자, 요나의 이야기 등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들 그림에서는 이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오란스형),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성인들의 초상도 그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도 유다이즘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인물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물고기, 십자가, 종려 나무 가지 등의 상징물이 더 많았다.

4세기 말경에는 순교자들의 일생을 그린 작품들이나 성인들의 초상화로 
교회 내부를 장식하도록 장려하였는데, 이는 성서를 읽을 수 없는 문맹자들이 
그림을 관람함으로써 성인들의 덕행을 본받아 행하도록 자극을 주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일종의 교육적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아직 공경의 대상으로서는 논의되지 않았었다. 
가이사리아의 에우세비오도 자신의 저서 <교회사>에서 
"사도 성 바울로나 성 베드로, 주 그리스도의 이콘이 
가이사리아 필립보 마을에 자신의 시대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고 증언하고 있다.

목판에 그려진 이콘들 중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려져 
후에 시나이의 성 가타리나 수도원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모자 이콘과 
콥트 교회에 기원을 둔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이콘으로 알려져 있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2. 비잔틴 예술
비잔티움 제국 및 그 세력이 미친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미술의 중심지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330년 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짐에 따라, 
예술의 주요 후원처인 궁정과 교회도 같이 옮겨지게 되었다.

비잔틴 예술은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을 바탕으로 하여 소아시아, 시리아, 알렉산드리아 등의 
미술을 첨가한 것으로 5세기 경에 발달하여 이후 대략 천년 간에 걸쳐 얼마 간의 성쇠 및 
변화는 있었으나, 대체로 이미 확립된 여러 형식들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독자적인 미술을 형성하였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세에는 그 절정에 달했으며 성화상 논쟁(726~843)을 거쳐 
마케도니아 황제 시대에는 이른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9~11세기)를 출현시켰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527~565)에는 황제의 후원 하에 새로운 건축물과 모자이크를 비롯하여 
상아 조각, 금속 공예 등의 다양한 재료의 작품들이 고루 발달할 수 있었는데 
조각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거의 부조에 한정되었다. 
당시 조각가들이 고전주의 시대에서 다루어지던 방법을 종전 그대로 사용하면서 
당대의 시대성을 잘 반영시킨 탁월한 상아 작품을 제작했다.

또한 건축가들은 교회의 건축에 있어서 장방형, 정방형, 십자가형 평면도상에 
돔을 얹은 집중식 건축을 시도하였는데, 종종 바실리카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 작품은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며 
이후 비잔틴 세계 도처에서 돔 양식은 보편화 되었다.

당시 세계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에 의해 위로부터 통제된 일종의 직사각형 상자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사상은 교회 건축에서 잘 드러나 교회 내부의 장식도 그에 따라 제작되었다. 
하느님이 세계를 지배함을 묘사하기 위하여 <전능하신 그리스도(판토크라토르)>의 그림을 
중앙의 돔에 그려 신자들을 굽어 보게 하였고 주위 동서남북으로 4명의 대천사들, 
또는 그보다 많은 천사들이 둘러싸 있고 그 아래에는 사도들을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예배에서 재현되듯이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여겨져, 
성당 내부에 그려지는 그림들은 지상에서 예수가 체류했던 특정 장소들을 연상하도록 의도되었고 
성당 안에서 각기 적절한 위치에 배치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은 베들레헴을 연상시키며, 세례 장면은 요르단 강을, 성모 영보는 나자렛을, 
성 라자로의 부활은 베다니아를 연상시키고 있다. 
이렇게 성당 안에 그려지는 장면이나 인물의 배열 등은 교회가 정한 규약을 충실히 따라야만 되었다. 
따라서 화가는 제멋대로 그 규약을 이탈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성당 안의 장식들은 위의 원칙에 따른 모자이크, 이콘, 미니어쳐 등으로 제작되었으며, 
비잔틴 예술의 최후의 전성기였던 팔라이올로고스 황조 시대에는 프레스코화가 융성하게 된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비잔틴 모자이크 제작자들은 뛰어난 구성의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모자이크는 9세기와 10세기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많이 제작되었는데 
초기 작품에서 인물 구성은 이교의 원형을 답습한 것에 불과한 것도 있었지만, 
표현이나 개념에 있어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고전 시물의 특징인 장엄함과 다소 설명적이지만 
보다 새롭고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양식을 결합한 것이었다. 
인물을 배경과 분리시켜 공간으로부터 고립된 채로 서 있도록 하였으며, 
흑색 반면 영상(半面影像)으로 처리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성화상 논쟁 이전에는 대체로 초기 그리스도교적 주제 밖에 다루어지지 않았으나 
논쟁이 종식된 이후에는 전적으로 도그마의 설명적 묘사가 행해졌고 동시에 인물의 표현은 
점차 도상학적으로 통일된 상(像)이 생겨 11세기에는 인물의 얼굴을 그리기 위한 
모자이크용 각석이 엄격하게 평행선으로 되고, 인물들은 엄격하게 
정면을 향한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무표정한 인상이 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초에는 그와 대조적으로 부드러움과 친근감 있게 묘사되어 
휴머니즘을 새롭게 강조하는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양식을 반영한 것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블라디미르의 성모>이다. 
이 양식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발생된 후 곧 비잔틴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가 
오늘날도 러시아, 발칸 반도 등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잔틴 예술은 중세 유럽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쳐 
특히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로마네스크, 고딕 및 13세기 이탈리아의 예술에서도 
그 영향을 뚜렷하게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3. 성화상 논쟁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이 신에 대한 거리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우상 숭배의 위험을 염려하여 신자들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미 성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형상으로, 
또는 인간을 신의 형상 중 하나로 보았다. 
즉 그리스도는 본성이 신에 가까운 데 비하여 인간은 다만 그 외모만 신과 가깝다. 
따라서 이콘들에 묘사된 그림들도 원상의 모상이므로 원상에 유사한 점을 교려하면 
원상의 한 몫을 차지한다고 간주하는 신 플라톤 철학에 의거한 회화 사상이 
이러한 목판에 그려진 그림들에 다시 적용되었다.

691년에서 692년에 걸쳐 개최되었던 트룰란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함을 규제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성화상에 대한 문제가 다시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726년 성화상을 논박하기 시작했고 
잇달아 성화상과 성화상을 공경하는 자들을 제거하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슬람교도들과 유다인들의 개종을 가장하여 절대 군주가 되고자 하는 야심으로 
교회를 자신의 권위에 굴복시키려고 성화상 공경자들을 박해한 것이었다. 
그는 군대에 의한 폭력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도 
아나스타시오스로 교체하여 그의 동의를 얻어 730년에 성화상 파괴에 대한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성화상 논쟁이 일어났고 84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성화상들이 파괴되었고 성화상 공경자들은 박해를 당했으며 
수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순교까지 당해야 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2세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성화상 파괴 중지를 요청하고, 
성화상에 대한 파괴와 비방의 행위에 파문이라는 벌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레오 3세의 아들인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741~775) 치하의 동방에서는 
성화상에 대한 박해가 더욱 격렬해졌다. 
그는 754년 히에레야에서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주교 338명을 모아 놓고 공의회라 명명하였다
하지만 총대주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아 공의회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회의에서 황제는 자신의 원의에 따라 성화상 파괴를 재가받았고 
성화상 공경은 우상 숭배라고 선언되었으며 성화상 공경 옹호론자들을 파문하였다. 
이후로 제국의 모든 주교들은 이 결정에 동의를 해야 되었으며 모든 성화상들은 일제히 교회에서 
제거되어야 했고, 벽화와 모자이크에는 석회칠을 했고, 그 자리는 세속적인 풍경화로 대처하였다. 
이러한 조처에 반대한 것은 거의 수도자들이었다. 
그로 인해 761년 이래 수도자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받아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고, 
또 많은 수도원들은 몰수되어 무기고 등으로 바뀌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 5세와 레오 4세 치하에서는 좀 완화된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역시 전대의 형법이 존속하고 있었기에 신고가 있을 때는 형이 집행되고는 했다.

레오 4세 서거 후 그의 미망인 성 이레네 황후가 미성년자인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 섭정을 맡았을 때(780~790)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그녀는 이콘은 공경했고 또 그로 인해 추방당한 일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타르시오스의 도움으로 
교황 아드리아노 1세와 일치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787년 가을에 니카이아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약 350명의 주교들은 
754년의 시노두스의 결정 사항을 배척하고, 옛 전통에 의하여 십자가, 그리스도, 천사, 
성인에게 촛불, 향 등과 함께 무릎을 꿇어 공경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함을 선언했고, 
그럼에도 참다운 흠숭은 오로지 신에게만 합당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결의는 이후 약 30년 동안 비잔티움 제국에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출신 황제인 레오 5세(813~820)는 815년에 성화상 파괴를 
다시금 명했고 754년의 성화상 공경 반대의 결의를 다시금 복귀시켰다. 
이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니케포로스가 해임, 추방되었으며 
또 다시 무수한 수도자들이 종교 재판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레오 5세를 이른 미카엘 2세와 테오필로스 황제 때도 계속되어 거의 30년이나 지속되었다.

이상한 일치 속에서 세 사람의 성화상 박해자들이 지나간 다음, 
다시금 테오필로스 황제의 미망인 테오도라는 미성년자인 아들 미카엘 3세의 섭정이 되어 
신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메토디오스의 도움으로 843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이콘 공경을 다시금 인정케 하였고,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사순절 첫 주일을 '정교 주일'로 정하였다. 
이 기념 축일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고 기념되고 있다. 
정교 주일에는 정교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특별 의식을 거행한다. 
이 의식은 대영광송, 삼덕송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이콘을 높이 치켜 들고 행렬한다. 
그 다음 사제는 제 7차 니카이아 공의회의 기록을 큰 소리로 낭독한다.

"예언자들이 본 대로,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교회가 이어 받은 대로, 교부들이 가르친 대로, 
온 세상의 교회가 합의한 대로, 거짓이 쫓겨난 대로, 지혜가 떳떳하게 전파한 대로, 
그리스도가 치하하신 대로,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생각하며, 말하며, 전파하라. 
그 분의 성인들의 말로, 저서로, 명상으로, 성제로, 성당에서 이콘으로 공경하라.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경배하라. 
그리고 또한 그 분의 성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사자들로서 연관적으로 공경하라."

이렇게 성화상 논쟁 이후 종교적 감동, 강한 영성과 절제에서 나온 형태의 이콘들이 나타났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참담한 멸망 때까지 이콘의 표준이 되었다. 
성화상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성서와 교회의 전통에 의거하였는데, 
그러한 것들 중 하느님을 그림으로 묘사해도 되는 가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부인하는 데는 모두 합의를 보았는데, 
그 이유는 그 누구도 그를 눈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그림은 성화상 지지파들의 입장이 관철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었으므로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이콘에 대한 공경은 인간의 손에 대한 작품에 대한 공경이 아니고 
성 바실리오의 말처럼 그 원상에 대한 경배인 것이다. 
따라서 787년 니카이아 공의회에서는 성화상에 대한 의무적인 규정과 
이콘에 관계 되는 사랑들을 결정했고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의 
"그림이란 원상을 표현한 유사란 것이어서 원상과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라는 주장도 받아 들여 졌다. 
이렇게 니카이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성화상에 대한 규정은 훗날 이콘 제작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이콘 제작자들이 가능한 한 원상에 가깝게 그리도록 촉구하였고 
이러한 그림만이 진정한 성화로 간주되었다. 
이로써 화가들은 그림의 전형에 따라 제한된 묘사를 하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이콘 제작 기술은 제국의 선교가 이루어진 여러 나라들로 전파되었다. 
따라서 러시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헬라스, 아토스, 루마니아, 폴란드 등에 전해져서 
각 민족 고유의 독창력과 그에 상응하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발전되어 여러 화파들을 발생시켰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1) 헬라스 지역의 화파들
헬라스 지역에서는 비잔틴 화법을 계승하여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이 지역의 이콘들은 비교적 소박하며 극도로 정제된 특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많은 이콘들은 이슬람교도들에게 반항하던 헬라스 민중이 겪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표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성화상에 나타나는 성인들 중 성 니콜라스, 세례자 성 요한 등이 매우 사랑받고 있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2) 러시아 지역의 화파들
러시아의 모든 문화적 성과들 중에서 이콘만큼이나 러시아적 국민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없다. 
모자이크, 또는 나무판 위에 눈부신 색깔로 그려진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 천사 등은 
종교적 정열이 일상 생활의 일부였던 러시아 국민들의 신앙심을 그대로 표현해 놓았다. 
이콘은 황제의 궁전에서부터 농부의 오두막집에까지 모셔져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키예프의 성 블라디미르 대공이 989년에 동방 정교회로 개종했을 때 
사제들과 함께 초청되어 새로운 교회의 건축과 장식을 담당하였던 비잔티움 제국인들에게서 
이콘의 제작 기술을 배웠으나 곧 러시아 특유의 민족적 양식을 지닌 이콘들이 출현하게 되어, 
슬라브 의상을 입은 생기가 넘치는 상이 딱딱한 비잔틴 양식의 그림들을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콘의 깊은 종교성만큼은 상실되지 않았다. 
따라서 완성된 이콘은 성직자에 의해 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 물감이나 
붓까지도 축성을 받았으며 이콘 제작자 자신도 신적인 영감에 싸여 일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1. 키예프 화파
988년, 키예프 대공 성 블라디미르는 비잔틴 의식에 따라 세례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러시아인들이 동방 정교회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 
성 블라디미르 대공은 새로 건축되는 교회들을 위해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건축업자, 모자이크 제조자, 이콘 화가들을 불러 들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돕기 위해 러시아인들을 고용해 여러 조형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이들 러시아인들은 다시 러시아인 제자들을 받아 들여 그 당시의 수도였던 키예프를 중심으로 
점차 러시아의 건축 양식과 러시아 회화의 고유한 예술적 표현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몽고족의 침입으로 살펴 볼 수는 없으나, 다만 키에프의 동굴 수도원에서 나온 성직자 화보를 통해서 
우리들은 그 곳에서 이콘을 제작했던 사실과 성인으로 인정받은 이콘 화가 알림피가 
바로 그 동굴 수도원에서 활동한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2. 노브고로드 화파
노브고로드는 러시아 서북쪽 일멘 호수 근처의 볼초프 강가에 위치한 도시로 
중요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또한 그 당시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타타르인의 침입을 받지 않아 많은 예술가에게는 
보다 유리한 작업 환경과 생활이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11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러시아 이콘의 황금 시기를 이루었으며 따라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들도 많다.

1223년 몽고의 침입에 의해 러시아의 수많은 도시들은 비잔티움과 발칸 반도와의 
문화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었고, 따라서 비잔티움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민족적 특성이 
강조되어 지엽적인 독자성을 형성함으로써 완전히 창작품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옛 비잔티움의 관점을 여전히 느낄 수 있었으나 엄격했던 인물 묘사는 
보다 가볍고 역동적인 요소와 혼합되었고, 색채도 새로운 다양성과 생동감을 얻고 있으며, 
얼굴의 표정들도 보다 자연적이며 민족적 유형의 얼굴들로 전환되었다. 
또 복잡하고 추상적인 상징주의를 피하고 설명이 필요없는 단순하고 쉽고, 
빠르게 이해할수 있는 주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즉 이 지방에서 특히 존경을 받던 농경, 목축, 상업 교역을 보호하고 성인들을 많이 그렸다. 
예를 들면 화재를 막고자 옛날 가르멜 산에서 불을 불러 내린 성 엘리야 예언자를 진홍의 배경에 
반신상으로 그리기도 했고, 금요일이 교역 시장의 장날이었기 때문에 성녀 파라스케비(금요일이라는 의미)를 
그렸고, 목축이나 마부의 보호자로 성 라오로스나 성 풀로로스를 그렸다. 
이와 같이 비잔티움의 영향에서 벗어나 러시아의 독자적 이콘을 제작하려 하였던 것이다.

12세기에는 키에프와 노브고로드 외에도 여러 지방에 새로운 화파들이 생겨나고 발전하였는데 
블라디미르와 수즈달, 야로슬라브, 프츠코프등이 그 중심지였다. 
이들을 북러시아 화파라 부른다. 이러한 최초의 독창적인 러시아 이콘 화파는 13세기 말에 
수즈달에서 등장하여 14세기에 꽃을 피웠으며 15세기 초에 모스크바 화파와 합해졌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① 블라디미르, 수즈달 화파
이 화파의 절정은 1250년 경이며, 이 시기에 볼가 강 북쪽 지역에서는 
데에시스 이콘들이 큰 인기를 끌어 자주 그려졌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시는 1238년과 100여년 후 타타르인들에 의해 파괴되어 
오늘날 순수한 이콘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블라디미르의 이콘은 비잔티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귀족적이고 정교하며 
우아함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부드러운 색상으로 그려졌다는 특징을 지닌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② 프스코프 화파
프스코프 시는 노브고로드 시 다음으로 러시아 북부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다. 
프스코프 시도 역시 타타르의 침입을 면하여 12세기와 14세기 사이에 안정된 발전을 했다. 
이 도시의 이콘 화가는 노브고로드 화파의 이콘에 많이 종속되어 있었고, 비잔틴식의 엄격함을 
재차 현저히 감소시켰고, 좌우대칭으로 그리는 것이 특징으며, 색상이 독특하다. 
즉 비잔틴식 회화의 육중하고 어두운 색조들을 피하고 보다 생생하고 밝은 색채로서 대치되었는데 
짙은 바다 초록색과 약간 갈색이 나는 붉은 색이 지배적이다. 
그 양식은 간결하고 형상들은 극히 양식화되었으며, 제스츄어는 단순하고 움직임은 완만하다.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③ 야로슬라프 화파
야로슬라브 화파의 전성기는 13세기 초이다. 
그러나 몽고족의 침입으로 이 문화 중심지는 막을 내려야 했다. 
그러다 16세기에 새로운 발전을 시작했다. 
이 화파의 작품의 특징은 배경을 채우는 쪼개진 건축 재료들이 특징들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사람을 많이 그려 넣는 묘사가 전형적이다.

15세기 후반에는 노브고로드 회화는 모스크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자그마하고 힘이 세어 보이는 인물 대신에 깡마르고 신장이 과장되게 긴 인물들로 
대치되고 지금까지 사용되던 짙은 색들이 은은한 색으로 바뀌었는데, 
분홍색, 보라색과 은색을 띈 초록색들을 즐겨 사용하였다. 
1478년 노브고로드 시는 자치권을 상실하고 모스크바가 장치 중심지로 선두에 서서 
통치하는 모스크바 공국에 합병된 이후에는 의복의 묘사에 있어서 많은 문양을 가미하고 
전체 구도에 있어서도 우아한 조화를 보이는 새로운 양식이 대두되었다. 
1570년, 이반 4세의 대정벌로 노브고로드 시는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St John The Baptist. 1408. 313 × 10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Andrew the First-Called. 1408. 

313 × 10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the evangelist. 1408. 312 × 10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Gregory The Theologian. 1408. 314 × 10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Chrysostom. 1408. 313 × 10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gabriel. 1408. 

317 × 12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408. 314 × 12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nnunciation. 1408. 125 × 9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escent into Hell. 1408. 124 × 9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in Majesty. 1410s. 18 × 1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410s. 158 ×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aul. 1410s. 160 × 11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Nativity. 1410-1430. 71 × 5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scension. 1410-1420s. 71 × 5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Cyril of Belozersk. 1424. 28 × 2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Transfiguration. 1425. 31 × 2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Pantocrator. 15세기 중반. 30 × 2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the sign. 15세기 중반. 133 × 10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ormition. 15세기 중반. 113 × 8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 15세기 중반. 103 × 8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Nativity. 15세기 중반. 103 × 8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scension. 15세기 중반. 102 × 8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Royal Doors. 15세기 중반.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Entry into Jerusalem. 15세기 중반. 103 × 8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Hodegetria of Smolensk. 15세기 중반. 131 × 10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S Boris and Gleb. 15세기 중반. 119 ×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Hodegetria, The Trinity and Selected Saints. 15세기 중반. 

32 × 2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Last Judgement. 15세기 후반. 162 × 11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eter. 15세기 후반. 158 × 5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5세기 후반. 158 × 5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15세기 후반. 160 × 5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The Baptist. 15세기 후반. 159 × 5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Gabriel. 15세기 후반. 159 × 5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aul. 15세기 후반. 159 × 5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nnunciation. 15세기 후반. 44 × 3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Demetrius of Thessalonica. 15세기 후반. 

162 × 5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King of Kings. 15세기 후반. 29 × 2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eesis. 15세기 후반. 102 ×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Exaltation of the Virgin. 15세기 후반. 25 × 1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Saviour Enthroned. 15세기 후반. 157 ×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475. 146 × 5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Gabriel. 1475. 146 × 5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The Baptist. 1475. 146 × 5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Holy Women at the Sepulchre. 1475. 80 × 5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1475. 146 ×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Chrysostom. 1475. 146 × 5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15세기 말. 108 ×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In Thee Rejoiceth. 15세기 말. 60 × 4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Alexis the Metropolitan with Scenes from His Life. 1480s. 197 × 15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Hodegetria. 1482. 135 × 11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Entombment. 1488. 34 × 2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and the Dragon. 15세기 말 - 16세기 초. 89.2 × 67.2 × 3.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ormition. 15세기 말 - 16세기 초. 117 × 92 × 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Entry into Jerusalem. 15세기 말. 30 × 2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Battle Between the Novgorodians and the Suzdalians. 15세기 말. 133 ×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S Florus and Laurus. 15세기 말. 47 × 3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escent from the Cross. 15세기 말. 91 × ​​6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Entombment. 15세기 말. 90 × 6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resentation in the Temple. 15세기 말 - 16세기 초. 24 × 19.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scension. 15세기 말 - 16세기 초. 24 × 19.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Hospitality of Abraham (Old Testament Trinity). 15세기 말 - 16세기 초. 

145 ×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in majesty. 15세기 말 - 16세기 초. 145 × 10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Pantocrator. 15세기 말 - 16세기 초. 24 × 19.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Forty Sebastean Martyrs. 15세기 말 - 16세기 초. 24 × 19.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Entry into Jerusalem. 15세기 말 - 16세기 초. 24 × 19.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ormition. 15세기 말 - 16세기 초. 24 × 19.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Dormition. 1497. 145 × 11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rophets Daniel, David and Solomon. 1497. 67 × 17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Christ in Majesty. 1500. 192 × 13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Crucifixion. 1500. 85 × 5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Doubting Thomas. 1500. 100 × 8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and the dragon. 16세기 초. 115 × 9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George. 16세기 초. 31 × 2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Holy Trinity. 16세기 초. 132 × 104 × 3.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In Thee Rejoiceth. 16세기 초. 146 × 11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S Florus and Laurus. 16세기 초. 66.7 × 51.5 × 3.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Hexameron. 16세기 초. 110 × 9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S Florus and Laurus. 16세기. 84.3 × 60.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Paraskeva Pyatnitsa. 16세기. 31 × 2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Simeon Stylites. 16세기. 35.4 × 28.5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Demetrius of Thessalonica. 1502. 157 × 6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1502. 155 × 6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The Baptist. 1502. 157 × 6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rchangel Michael. 1502. 157 × 6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postle paul. 1502. 158 × 6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Demetrius of Thessalonica. 16세기 후반. 144 × 4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rophet Elijah and the Fiery Chariot. 16세기 후반. 100 × 64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Nicholas with Scenes from His Life. 16세기 후반. 128 ×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Lucas Paints the Virgin. 16세기 후반. 45 × 36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rophet Jeremiah. Annunciation. Basil the Great. 1589. 70 × 1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Resurrection-The Descent into Hell. 17세기 초. 31 × 2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The Baptist in the Wilderness. 1620–1630s. 33 × 2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Nativity of St Nicholas. 17세기. 36 × 3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Vladimir. 1652. 104 × 70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Mandylion (Image of Edessa). 1661. 55 × 48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nnunciation. 1670s. 87 × 71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Mandylion (Image of Edessa). 1673. 32 × 2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Annunciation. 1673. 56 × 4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Presentation in the Temple. 1673. 56 × 3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Old Testament Trinity with Scenes from Genesis. 1675. 133 × 12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Mandylion (Image of Edessa). 1678. 53 ×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St John the Baptist-Angel of the Wilderness with Scenes from His Life. 17세기 후반. 

198 × 14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Vladimir. 1697. 101 × 7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 Mother All-Glorified”. 18세기. 45 × 39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Vladimir. 18세기 후반 - 19세기 초반. 33.3 × 26.7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The Virgin of Vladimir. 19세기. 40 × 33 cm. Tretyakov Gallery Room 56-62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56-62. 러시아 <이콘> 전시실

 

 

<Room 55> 12~20세기 러시아 유물

Room 55에는 값진 금속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예술품과 미니어쳐, 이콘 등이 있고, 
은으로 상감된 이콘, 금으로 장식된 예배당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Tretyakov Gallery Room 55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55. 12~20세기 러시아 유물

 

 

<Room 49-54> 18~20세기 초반 그래픽 아트

Room49에서 Room54번 방은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그래픽들이 전시되어 있고, 
Room55번 방에는 12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그래픽이란 드로잉, 수채화, 파스텔, 프린트와 같은 형태의 그림으로 
6개월 마다 전시품이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Room55번 방에 있는 보물이란 값진 금속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예술품과 
미니어쳐, 이콘 등을 말하며, 은으로 상감된 이콘, 금으로 장식된 예배당 등이 대표적이다.

 

Tretyakov Gallery Room 49

 

Tretyakov Gallery Room 49

 

Tretyakov Gallery Room 49

 

Tretyakov Gallery Room 49

 

Tretyakov Gallery Room 49

 

Stairway to Heaven. 천국으로가는 계단. 

A poster-screen for decorating a poetry evening 
by V.V. Kamensky on May 14, 1919.
Theater of the "Artistic Society". Tiflis. 1919. Watercolor

바실리 카멘스키(Vasily Vasilevich Kamensky 1884-1961)는 러시아 미래파 시인, 

극작가, 예술가이자 최초의 러시아 비행가 중 한 명이었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49 18~20세기 초반 그래픽 아트 전시방

 

Tretyakov Gallery Room 50

 

Tretyakov Gallery Room 50

 

Tretyakov Gallery Room 51

 

Tretyakov Gallery Room 51

 

Tretyakov Gallery Room 51

 

Tretyakov Gallery Room 52

 

Tretyakov Gallery Room 52

 

Tretyakov Gallery Room 53

 

Tretyakov Gallery Room 53

 

Tretyakov Gallery Room 53

 

Tretyakov Gallery Room 53

 

Tretyakov Gallery Room 53

 

Tretyakov Gallery Room 53

 

Tretyakov Gallery Room 53

 

Tretyakov Gallery Room 53

 

Tretyakov Gallery Room 53

 

Tretyakov Gallery Room 54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54. 18~20세기 초반 그래픽 아트 전시방

 

 

 

Krishna, 1946. by Nikolai Roerich.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7

니콜라이 레리흐(Nikolai Konstantinovich Rerikh 1874-1947)는 러시아어 화가, 작가, 고고학자, 
신지학, 철학자, 그리고 그의 젊은 시절에 러시아 사회의 영적 운동에 영향을 받은 공인이다. 
그는 최면 및 기타 영적 관습에 관심이 있었고 그의 그림은 최면 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9세기 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자란 레리흐는 1893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과 제국예술아카데미에 동시에 등록했다. 
그는 1897년에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고 다음 해에는 법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06년부터 1917년까지 학교를 이끌었던 제국예술장려협회에 일찍 취업했다. 
그룹과의 초기 긴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 예술의 세계 "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예술적으로 레리흐는 고고학에 대한 평생의 관심과 양립할 수 있는 주제인 러시아 고대의 
가장 재능 있는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무대 디자이너로 성공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디자인은 보로딘의 이고르왕자 (1909 년 이후 제작), 
의상과 세트로 이고르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봄의 의식을 위한 것이다.

색채와 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레리흐 (1874-1947)의 히말라야다 .
인간이 쉽게 정복할수 없는 히말라야의 신비가 그의 다채로운 색채에 의해 재탄생된다.
접해 보지 못한 히말라야지만 그림의 색채 만큼이나 다양하리라.
그런 레리흐의 빛깔과 과감히 사랑에 빠진다.

 

Guga Chohan, 1931. 구가 초안. by Nikolai Roerich. 
Tempera on cardboard, 73.5 x 117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구가 초안은 고대 인도왕자로 레리흐가 어릴 적 살던 클루가에 이 동상이 서 있었다 한다. 
그때 보았던 고향 마을의 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역사화가 레리흐는 러시아 역사의 근원을 다루면서, 고고학적 연구와 
역사적 고증에 기반하여 키예프 루시에 대한 새로운 회화적 시각을 창출해 내었다. 
레리흐 가문 자체의 발원이 류리크와 바랴그족과 관련된다는 믿음은 
화가 레리흐로 하여금 키예프 루시의 발원을 다루는 역사화를 구상하도록 이끌었다. 
바랴그의 러시아 도래를 다룬 그의 역사화는 고고학적․역사적 고증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유년 및 청년시절의 영지 이즈바라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즈바라 영지 근처의 옛 고분들을 발굴하고 탐구하면서 느꼈던 
머나먼 과거가 지닌 조화와 아름다움의 감정, 고고학적 자료 등을 
화가 레리흐는 자신의 역사화 화폭에 그대로 담아내었다. 
또한 이즈바라의 어원처럼 신의 지혜를 찾아 순례하는 구도자의 길을 평생 걸으며, 
역사의 근원과 세계문명의 원천들을 탐구해 얻어낸 지혜들을 인류에게 알리는 
‘전령’으로서의 소명도 이 영지의 삶에서 영향 받았다. 
슬라브 문화의 원천에 대한 사유가 결국 다양한 문화와 
문명권의 근원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으며, 평생을 역사의 전령, 
인류 정신의 전령으로서 자신의 존재론적 사명을 예술적 방법으로 풀어내었다.

러시아 역사의 근원인 키예프 루시를 다루는 역사화를 창출하면서, 
화가 레리흐는 기존의 다른 화가들이 키예프 루시를 다루는 방식인 
영웅적인 인물과 극적인 사건 중심의 접근법, 서사성과 세밀한 장면 묘사 등에서 탈피하여, 
익명화된 인물과 시대 전체의 색채와 사건의 전반적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는 최소화한 디테일, 선명한 선과 리듬, 보편적이고 장식적인 형태,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 
장식적 스타일, 색채를 통한 상징 등을 통해 망각되거나 저평가된 
먼 중세인 키예프 루시의 역사를 자신만의 모던한 화법으로 신선하고 활기차게 부활시켰다. 
역사의 근원과 정신의 본질에 대한 평생의 추구를 멈추지 않았던 화가 레리흐는 
자신의 모던한 역사화를 통해 러시아의 중세 역사를 소환하고, 
다가올 미래의 역사를 예감하였으며, 러시아 국가의 기초와 방향성에 대해 통찰한 역사의 '전령'이었다.

 

Guests from Overseas, depicting a Viking raid. 1901. 바이킹 습격을 묘사한 해외에서 온 손님
by Nicholas Roerich, oil on canvas. 85 x 112.5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새로운 문명의 유입,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레리흐만의 독특한 표현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장식적이고 패턴적인 아르누보의 효과가 강렬한 색채와 함께 빛을 발한다. 
러시아 최초의 철권 통치자 바이킹(바랑기아)의 선장 류리크가 러시아로 들어와 통치한다는 
러시아 역사를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Shadow of the Teacher. Tibet. by Nikolai Roerich.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7

20세기 초, 니콜라이 레리흐는 인도 철학을 직접 배우게 되었다. 
인도의 형이상학적 교리, 우주적 및 역사적 주기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레리흐를 사로 잡았다. 
티베트와 티베트 기적의 일꾼들은 그에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191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최초의 불교 사원이 건립되었을 때
니콜라스 레리흐의 동방에 대한 관심이 너무 확실했던 그는 건축 지원위원회에 참여했고 
인도는 레리흐의 그림과 에세이에 점점 더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Roerich는 인생의 대부분을 Petersburg에서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예술 아카데미와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예술가, 고고학자, 시인, 교사가 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멋진 그림을 만들어 명성을 얻었다. 
여기서 그는 예술가, 시인, 과학자와 같은 러시아 문화의 많은 뛰어난 인물과 교류했다. 

 

Chenrezig. 1931. by Nicholas Roerich. Tempera on canvas. 74 × 107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St. Panteleimon the Healer, 1916. by Nicholas Roerich. Tretyakov Gallery Room 47

 

Messenger. Clan revolted against to clan. 1897, by Nicholas Roerich. Tretyakov Gallery Room 47

 

Solveig`s Song, Set design for the theatre production of "Peer Gynt" titled 'Solveig' Song' 1912.
오페라 'Solveig'Song '의 "Peer Gynt" 극장 제작을 위한 세트 디자인. by Nicholas Roerich. 
tempera on paper mounted on canvas. 64.7 x 85.7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Ashram (Ceylon), 1931. by Nicholas Roerich. 
canvas, tempera. 117.5 x 74.5 cm. Tretyakov Gallery Room 47

 

Rostov the Great, 1903. by Nicholas Roerich. Tretyakov Gallery Room 47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47 니콜라이 레리흐(Nicholas Roerich) 작품 전시실

 

[영상] Nicholas Roerich: A collection of 261 works (HD)

 

Moscow landscape. Rainbow. 모스크바 풍경화 무지개. by Nikolai Krymov
oil on canvas. 59 x 60 cm. Tretyakov Gallery Room 48

니콜라이 크르이모프(Nikolay Petrovich Krymov 1884~1958)의 작품은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림처럼 단순하고 동심에 가득 차 있다. 
소묘는 단순하고 밝은 색채가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으며 
인물이나 동물은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표현되어 있다. 
크르이모프의 이런 작품은 밝은 유머와 맑은 감각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이 그림은 산업화 이후 도시화된 모스크바의 모습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반적인 풍경화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도시 주택과 여러가지 색깔의 지붕이며, 
작가의 상상속에 모든 도시의 소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Windy day : Bull, 1908. 바람 부는 날. by Nikolay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이 작품을 볼 때 불안감과 설렘이 느껴지고, 참을 수 없는 힘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무섭고,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고 바람은 땅에서 먼지 구름을 일으킨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곧 밀어 닥칠 것이다.
태풍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가축을 마구간에 몰아 넣는 목자가 보인다. 
문에서 그의 조수는 마치 동물들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하듯 팔을 흔든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다가오는 태풍으로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흰 암소는 천천히, 은밀하게 올바른 위치로 이동하고, 
작품에 검은 색으로 그려진 황소는 두려움에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의 꼬리는 쏠리고 뿔은 두려움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 땅에 몸을 숙였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두려움에서 황소가 태풍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 
태풍은 황소와 비교할 수 있으며 기질과 반항적인 성격이 닮았다.

 

Landscapes. Cloud, 1910. by Nikolai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니콜라이 크르이모프(Nikolay Petrovich Krymov 1884~1958)는 러시아 화가이자 예술 이론가였다.
그는 예술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크르이모프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 에서 공부했으며
세로프(Valentin Serov) 및 코로빈(Konstantin Korovin) 스튜디오에서 공부했다 .
그는 1910년부터 1923년까지 Union의 회원이었고 

1923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 예술가협회 회원이었다. 

그는 주로 지방 도시와 마을 풍경을 그렸으며, 특히 시골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원시 민속의 영향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더 고전적인 접근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처음에 그는 인상이 아닌 감정을 묘사하면서 주로 기억으로 그렸다. 
1920년대부터 크르이모프는 plenair 작업을 시작했고 

유명한 무대 세트를 디자인하면서 극장에서 일했다.

1949년 크르이모프는 소련 예술아카데미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 그는 러시아 연방 명예예술노동자계급, 그리고 
1954년 노동레드배너 훈장, 1956년 러시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
크르이모프는 1958년 5월 6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

 

A New Pothouse, by Nikolay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Yellow Shed. by Nikolay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Sunny day, 1906. TG. by Nikolay Kry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영상] Nikolai Petrovich Krymov 작품 모음

 

Self-portrait. 1909. by Martiros Saryan. paper, gouache. Tretyakov Gallery

마르티로스 사리안 (Martiros Sergeevich Sariyan 1880~1972)은

아르메니아의 현대 미술가이자 현대 아르메니아 국립 회화학교의 설립자였다.
사리안은 돈 강변의 로스로프에서 아르메니아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5년 15세의 나이로 Nakhichevan 학교를 수료했고 
1897년부터 1904년까지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Valentin Serov 와 Konstantin Korovin 등과 함꼐 공부했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사리안은 터키, 이집트, 이란을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이탈리아, 프랑스에 유학했다. 
고갱과 마티스의 영향을 받아 생명력이 넘치는 색채 감각과 자유로운 터치에 의한 
풍경화, 초상화에 뛰어나고, 침체기의 소련 화단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A Date Palm. Egypt, 1911. by Martiros Saryan. 
Tempera. 106 × 71 cm. Tretyakov Gallery Room 48

1915년 사리안은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에서 탈출한 

난민들을 돕기 위해에 흐미아진으로 갔다. 
1916년에 그는 Tiflis (현재 Tbilisi )로 여행하고 루식 어가얀(Lusik Agayan)과 결혼했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 그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에서 살았다. 
1921년에 그들은 아르메니아로 이사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아르메니아 풍경을 반영했지만, 
한편 아르메니아 SSR의 문장을 디자인하고 최초의 아르메니아 국립극장의 커튼을 디자인했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파리에서 살면서 일했지만,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은 그가 소련으로 돌아오는 배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192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사리안은 소련 아르메니아에 살았다.
사리안은 이집트, 터키를 여행하고 자신의 고향 아르메니아에 살면서 여러 작품을 남긴다. 
중동의 아름다운 자연, 작열하는 태양, 낙타와 나귀를 탄 사람들, 과일 꽃 등을 많이 그린다. 
또한 동방의 원시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오렌지 색, 청색, 녹색, 황색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색채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성취한다. 
사리안은 색채, 구조 소묘를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지만 높은 예술성에 근거한 신선한 감각이 있다.

 

The outside. Noon. Constantinople, 1910. 정오 콘스탄티노플의 거리.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66 x 39 cm. Tretyakov Gallery Room 48

1930년대의 어려운 시기에 그는 주로 초상화뿐만 아니라 풍경화에 전념했다. 
그는 또한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대리로 선출되었고 레닌 훈장을 3회 수상하고 다른 상과 메달도 받았다 . 
그는 소련 미술 아카데미 (1974)와 아르메니아 과학 아카데미 (1956) 의 회원이 되었다.

사리안은 1972년 5월 5일 예레반에서 사망했다. 
예레반에 있는 그의 이전 집은 현재 수백 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되었다. 
그의 아들 Ghazaros (Lazarus) Saryan 은 작곡가이자 교육자가 되었고
그의 증손녀 Mariam Petrosyan은 화가, 만화가이자 수상 경력에 빛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아르메니아'(1923, 예레반 아르메니아 화랑), '남국의 겨울', 
'자화상'(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 등이 있다.

 

The outside. Constantinople, 1910.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Wistarias 1910.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Green jug and bouquet. Still life. 1910. 녹색 용기와 꽃다발. 정물.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Grapes. Still life, 1911. by Martiros Sariya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영상] Martiros Sarian 작품 모음

 

Indian summer. 1916. 인도 여름. by Sergey Sudeikin. 
Oil on carton. 51×76 cm. Tretyakov Gallery Room 48

세르게이 수데이킨 (Sergey Yurievich Sudeikin 1882-1946)은 발레루스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관련된 러시아 예술가이자 세트디자이너였다.

 

Flowers and a Statuette. by Sergey Sudei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Flowers in a Vase. by Sergei Sudei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8

 

[영상] Sergey Yurievich Sudeikin 작품 모음

 

Salome. ‘살로메’. by Leon Nikolaevich Bakst. Tretyakov Gallery Room 48

레온 박스트(Leon Nikolaevich Bakst 1866-1924)는 러시아의 화가, 무대 미술가, 의상 디자이너이다.
레온은 현재의 벨라루스 흐로드나 지방인 로젠베르크에서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학교에서 비정규 학생으로 공부하면서, 
시간제로 책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였다.

1889년 그의 첫 번째 전시회에서 그는 어머니의 할머니의 이름인 Baxter를 기초로 
Bakst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890년대 초기에 박스트는 수채화가 조합과 함께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는 1893 - 1897년 동안 파리에 살면서, Académie Julian에서 공부하였으며, 
자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였다. 
189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알렉산드르 브누아가 구축한 
작가와 화가들의 집단의 구성원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Mir Iskusstva 미술 운동이 되었다.

1899년 박스트는 디아길레프와 함께 영향력있는 정기 간행물인 
《미술 세계》를 공동으로 설립하였다. 
그의 그 잡지를 위한 그래픽 디자인은 박스트의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1900년대 10년 동안 박스트는 대부분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박스트는 그리스 비극을 위한 무대를 디자인했고, 1908년에 디아길레프와 
발레루스를 위한 무대 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클레오파트라》(1909년), 《세헤라자데》(1901년), 《사육제》(1910년), 
《나르시스》(1911년), 《다프네와 클로에》(1912년) 등이 있다. 
유태인은 영구적으로 러시아에서 유태인 거주지 바깥에서는 살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박스트는 이때 유럽에서 살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있는 동안 박스트는 Zvantseva's school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마르크 샤갈도 그의 제자 중 한 명이다. 
박스트는 샤갈에게 파리에 가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박스트에 따르면 파리로의 이주는 샤갈의 예술과 재정적으로도 위험하기에 
아마도 그가 굶어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1914년 박스트는 황실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박스트는 1918년 디아길레프와 발레루스의 관계를 끝냈다. 
그는 1924년 파리에서 폐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48 작품 전시실

 

 

 

20세기 초반 회화. 다양성의 시대 - 예술 세계파의 시대

 

The Pool. 1902. 연못에서. by Victor Borissow-Mussatow. 
Tempera on canvas, 177 x 216 cm, Tretyakov Gallery Room 45

빅토르 보리소프 무사토프 (Victor Borissow-Mussatow 1870~1905)는 상징주의와 
순수한 장식적 스타일을 나타냈고 사실주의를 혼합한 독특한 후기 인상주의 스타일로 두드러졌다.
미하일 브루벨과 함께 그는 종종 러시아 상징주의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상징주의는 보통 꿈과 연결되어 표현을 많이 한다. 
그래서 몽환적인 색상도 많이 나오기도 한다.

빅토르 무사토프는 러시아 사라토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노로 태어난 경미한 철도 공무원이었다.
​어린 시절에 그는 척추 부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그는 평생 동안 혹사당했다고 한다.
1884년 그는 사라토프 실제 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그의 스승인 표도르 바실리예프와 코노발로프가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했다.

연못가에 서 있는 두 여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연못 수면에 비친 구름과 나무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늘도, 물도, 나무 숲도, 여인들도 작가가 만들어 놓은 은색의 색채에 싸여 있으며 
현실은 없고 시간은 정지한 채 과거와 추억만이 존재하는 듯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그곳은 혁명도 전쟁도 싸움도 없는 그런 조용한 곳처럼 느껴진다. 
연못에 비친 주변의 표현이 탁월하다. 
또한 여인의 드레스 주름에서 반복되는 리듬은 마치 파도가 치는 듯한데, 
연못의 매끈한 수면과 대조되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Phantoms, 1903. by Victor Borissow-Mussatow. Tempera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5

 

The Emerald Necklace, 1903-1904. by Victor Borissow-Mussatow. 
oil and tempera on canvas. 125 x 214.3 cm. Tretyakov Gallery Room 45

 

May Flowers, 1894. by Victor Borissow-Mussatow. Tretyakov Gallery Room 45

 

The Gobelin 1901. by Victor Borissow-Mussatow. 
Stretched Canvas. 18 x 24 cm. Tretyakov Gallery Room 45

 

Woman in a yellow shawl, 1904. by Victor Borissow-Mussatow. 
45 x 65 cm. Tretyakov Gallery Room 45

 

In the summer, 1897. by Victor Borissow-Mussatow. Tretyakov Gallery Room 45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45. 보리소프 무사토프 (Victor Borissow-Mussatow) 작품 전시방

 

[영상] Victor Borisov-Musatov - Artist - A Slavic Seduction

 

Sleeping in a koshara. 1911. by Pavel Kuznetsov. Tretyakov Gallery Room 46

파벨 쿠즈네쵸프 (Pavel Kuznetsov 1878-1968)는 러시아의 고갱이라고 불리기도하는 화가였다. 
발렌틴 세로프(Valentin Serov)와 콘스탄틴 코로빈(Konstantin Korovin)의 학생인 그는 
20 세기 초 러시아 상징주의 예술가협회 창설의 기원에 서 있었다. 
그리고 소비에트 시대에 그는 "원예에서 화초 재배, 집단 농장 노동의 과정에서 휴일 수확에 이르기까지"
노동 주제에 빠져 들었다.

"그는 모든 것에서 영감의 원천을 찾았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사람의 아름다움, 기념비 성, 지구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이 사진을 볼 때 우리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아주 사소하지 않고 
비표준적인 것을 볼 때 움직임, 당신은 이 예술가가 적합하고 이미 국내뿐만 아니라 
1920 ~ 1930 년대 유럽 미술의 역사에 새겨 져 있음을 이해합니다. "
이것은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Zelfira Tregulova 감독이 파벨 쿠즈네쵸프에 대한 평이다.

여자는 힘들고 다양한 집안 일을 마치고 잠시 낮잠을 잔다. 
수면 위치는 연속적인 부드러운 선으로 표시된다. 
캔버스 위의 여성은 삶과 침묵의 영원한 조화를 상징한다. 
섬세하고 쉽게 윤곽을 그리는 동양적인 얼굴의 특징은 삶의 스릴을 전달하는 것 같다. 
배경은 장식용 아플리케가 있는 펠트 카펫이다.

 

Still Life. Morning, 1916. by Pavel Kuznetsov. 
oil on canvas. 106 × 97.5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In the steppe at work. Shearing, by Pavel Kuz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6

전경에서 화가는 양털 깎기와 같은 일상적인 일에 종사하는 키르기스스탄 여성을 묘사했다. 
그들은 마치 석화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으며, 고대 대초원 여신처럼

위엄이 끝없는 대지와 끝없는 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그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미지가 구성되고, 인간 유형이 해석되는지, 

고대 러시아 전통의 메아리가 보인다.

 

Sartyanka, 1920. by Pavel Kuznetsov. oil on canvas. 86 × 59.8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Morning. 1905. 아침. by Pavel Kuz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6

 

Mirage in the Russian Steppes, 1912. 대초원의 신기루, by Pavel Kuznetsov. oil on canvas. 
oil on canvas.  95 x 103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쿠브네초프는 중앙 아시아 초원 지대를 여행하며 
그곳이 엮어내는 태초의 모습을 그림에 담으려 했다. 
고갱의 원시주의처럼 자연의 법칙을 순응하고 살아가는 
중앙아시아 여인들의 소박한 모습이 그림에 나타난다. 
2차원의 화폭에 원근도 명암도 없이 단순화된 사람과 
자연이 푸른 색으로 어우러져 통일 되어 있다. 
이런 색채와 구도의 변화는 러시아 모더니즘과 추상주의로 가는 밑거름이 된다.

 

Blue Fountain, 1905. by Pavel Kuznetsov. 
Tempera on canvas. 127 x 131cm. Tretyakov Gallery Room 46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한 대표 작가다. 
주제를 표현하가 위해 통일된 패턴과 하나의 색채가 주를 이룬다. 
푸른 색 분수아래 함께 모여 있는 가족, 여러 개의 조각들이 모여 형태를 이루는 
모자이크 같은 느낌을 주며 색채의 통일이 뛰어 난 작품이다. 
쿠브네초프는 당시 팽배해 있던 퇴폐적 낭만주의에서 머무르지 않고 

원초적인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다. 
즉, 죽음과 소멸의 주제에서 벗어나 과거를 버리고 

새것을 태동시키는 생명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탄생된 가족이다.

 

In the Steppe, 1911. 초원에서. by Pavel Kuznetsov. oil on canvas. 21.4 x 20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그리고 49에서 54번까지 방에 있는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그래픽들을 볼 수 없었고, 
55번 방에 있는 12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보물들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이들 방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이 닫힌 경우는 작품의 수리와 교체를 위해 작업을 하는 중이거나, 
순회 전시를 위해 해외 박물관에 대여 중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래픽이란 드로잉, 수채화, 파스텔, 프린트와 같은 형태의 그림으로 
6개월 마다 전시품이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보물이란 값진 금속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예술품과 미니어쳐, 이콘 등을 말하며, 
은으로 상감된 이콘, 금으로 장식된 예배당 등이 대표적이다.

 

Mr. Jourdain's room. On the plot of the comedy-ballet by J.-B. Moliere 
"Bourgeois - nobleman". 1911. 주르젠의 방. 몰리에르 코미디 "서민 귀족 무대".
by Nikolai Nikolaevich Sapunov. Tempera on canvas. 92.2 x 140.5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사프노브(Nikolai Nikolaevich Sapunov, 1880-1912)는 

아티스트이자 무대 디자이너, 러시아 연극 역사상 최고의 배경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이삭 레비탄(1893–1901) 아래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 에서 공부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제국 예술아카데미에서 콘스탄틴 코로빈(Konstantin Korovin), 이삭 레비탄(Isaac Levitan), 
발렌틴 세로프(Valentin Serov) 등의 저명한 화가 밑에서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을 공부했다. 
일찍이 무대 디자이너와 화가로서 성공하였지만, 보트 익사 사고로 33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사프노브의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은 꽃과 도자기가 있는 정물이다.
사프노브의 생애가 끝날 무렵 그는 일련의 아이러니한 장르 사진을 시작했는데, 
그는 해외로 가고 싶었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다. 
니콜라이 사푸노프는 핀란드의 Terioki (현재 Zelenogorsk )에서 보트 사고로 33세에 익사했다 .

사푸노프는 선술집, 극장, 회전목마, 꽃 등 여러 소재를 그린다. 
꿈꾸듯 세상을 바라보고 그 시선 그대로 화폭에 담는다. 
그의 그림에는 색과 빛으로 가득 채워진 색채의 하모니가 있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의 빛깔이 서로 어우러져 빛을 발한다. 

 

Flowers and porcelain, 1912. 도자기와 꽃. by Nikolai Sapunov. 
oil on canvas. 178 х 161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The Tea Party, 1907. 다과회. by Nikolai Nikolaevich Sapunov. 
Canvas, silver, gold, colored bronze. 93 × 128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Hotel Green Bull, 1910. by Nikolai Sapunov. 
Tempera on cardboard. 73.5 x 103.5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Blue Hydrangea, 푸른 수국. 1907. by Nikolai Sapunov. 
Tempera on canvas. 114.5 x 132.5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Still life. Vases, flowers and fruits, 1912, 꽃과 과일, 꽃병이 있는 정물. 
by Nikolai Sapunov. Tempera on canvas. 147 × 116 cm. Tretyakov Gallery Room 46

 

[영상] 니콜라이 사프노브(Nikolai Nikolaevich Sapunov) 작품 모음

 

Flood-Lands, 1908. 목초지. by Utkin Pyotr Savvich. 
Tempera on canvas. 41 x 42.5cm, Tretyakov Gallery Room 46

표트르 우트킨 (Utkin Pyotr Savvich 1877-1934)은 1900년대 초반 '푸른 장미' 전시회 
기획자로 활동하였으며, 러시아 상징주의가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다. 
그의 대표작 '목초지'는 파란 색과 붉은 색의 조화가 탁월한 작품이다. 
푸른 장미파의 작가들이 선호했던 꿈의 세계, 이상의 세계를 표현하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또 우트킨은 <황금 깃털>이라는 미술 잡지의 편집자가 되어 상징주의적인 색채의 세계를 피력했다.

푸른장미파(Golbaya Rosa)는 1904년에 결성되어 1908년까지 계속된 러시아의 상징주의 그룹이다.
파벨 쿠즈네초프를 중심으로 하여 우트킨, 니콜라이 사푸코프, 알렉산드르 마트베에프, 
마르티로스 사리얀, A. V 폰비진, G. B 야쿨로프, N. P. 울리야노프 등이 그 회원이었다.
푸른장미파에 직접 영향을 준 사람은 빅토르 보리소프 무사토프였다. 보리소프 무사토프는 샤반과 
나비파의 분위기를 러시아에 전했다.
푸른장미파는 단명했지만, 칸딘스키나 샤갈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46. 작품 전시방

 

 

 

 

 

20세기 초반 회화. 다양성의 시대 - 예술 세계파의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44. 콘스탄틴 소모프(Konstantin Somov) 전시실

 

Lady in Blue. Portrait of the Artist YelizavetaMartynova (1868-1904) 1897 - 1900, 
푸른 옷을 입은 여인. by Konstantin Somov. oil on canvas. 103 x 103 cm. Tretyakov Gallery Room 44

콘스탄틴 소모프(Konstantin Somov 1869~1939)는 러시아 아르누보아 
상징주의의 대표 작가이며 예술 세계파의 핵심 멤버였다. 
'예술은 예술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라고 주창했던 예술 세계파는 
18세기의 화려했던 시대로의 부활을 피한다. 
그림 속 여인 또한 오래된 고서를 손에 들고 유행 지난 드레스를 입고는 
핏기 가신 얼굴로 마치 유령처럼 서 있다. 

당시 이 시기 화가들은 세기말의 퇴폐적 낭만주의에 젖어 있어 
전체적인 그림의 분위기가 어둡고 절망적이다. 
하지만 우울과 암울함 속에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모프도 러시아에서 살지 못하고 
1923년 파리로 떠난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2007년 그의 작품<무지개>(1927)가 런던 경매에서 100억원에 낙찰되면서 
세계 예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는다.

 

Evening, 1900-1902. by Konstantin So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콘스탄틴 소모프(Konstantin Somov)의 모든 작품은 삶을 사랑하고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며 
동시에 회의론과 우울한 느낌으로 내재적 인 슬픔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Alexander Benoit의 작품이 특징이다.

20 세기 초, 더 정확하게는 1900년부터 1902년까지의 기간에 
이러한 현실은 소모프의 관점에서 “저녁” 그림에 구체화되었다. 
가장 무도회 참가자일 가능성이 있는 신사 숙녀 여러분이 살아난다. 
그들은 절묘하지만 동시에 깊은 에로틱, 자세의 친밀감이다.

그림은 완전히 스타일리시하게 생각되고 모든 세부 사항은 매우 얇은 색상 행진에 따라 선택된다. 
이것은 소모프가 그의 삶을 위해 선택한 스타일, 
즉 깊은 감정의 폭동에 접한 정교함과 우아함과 매우 일치한다. 
18세기의 스타일은 여기에서 느려지고 있다. 
하늘은 정적이며 공원의 조각품은 행동의 조용한 증인이며 아케이드는 반복되며 
bosquets는 번갈아 가며 멀리 이동하며 캐릭터는 일부 의식 동작을 받아들인다.

동시대인들은 “저녁”을 현실과의 분리, 반대로 인식했다. 
선로까지 올라가지도 않은 과거 시대의 과시적인 순진함, 그리고 하늘 표면에 
더 멀어 질수록 정복하기 위해 어떻게 자연을 차지할 수 있는지, 유혹을 받아들인다.

물론 Somov의 그림은 과거 세대에 대한 회고 적 분석과 심지어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분석을 결합하지만 상상력,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부조리가없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전혀 없는 이 게임은 시청자를 감싸고 
신비롭고 심지어 자동적인 에로티시즘의 분위기에 그를 몰입시킨다.

 

Portrait of Euthymia Nosova, nee Ryabushinskaya (1875-?) 1911, 
by Konstantin Somov. oil on canvas. 88 x 139 cm. Tretyakov Gallery Room 44

 

Letter (also known as Mysterious Messenger), 1896. by Konstantin So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44

 

Bathers, 1899. by Konstantin So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영상] 콘스탄틴 소모프(Konstantin Somov) : A collection of 255 works (HD)

 

Tretyakov Gallery Room 44. 알렉산드르 골로빈(Alexander Yakovlevich Golovin) 전시실

 

Portrait of Fyodor Chaliapin in the role of Holofernes in Serov's Opera "Judith" 1908. 
by Alexander Golovin. Gouache, Pastel, Tempera on canvas. 163 × 212cm. Tretyakov Gallery Room 44

알렉산더 세도프(Alexander Sedov)의 발레 오페라 "쥬디스(Judith)"에서 
홀로페르네스(Holofernes) 역을 하고 있는 표도르 살랴핀(Fyodor Chaliapin)의 초상화.
알렉산드로 골로빈은 당시 러시아 무대 미술에 열정을 쏟은 대표적인 작가다. 
이 그림에도 발레 쥬디스에서 홀로페르네스 역을 하는 샬랴핀을 그린 그림으로 
쥬디스에 매료된 왕의 표정 표현이 압권이다.

전장에 여자의 몸으로 잠입해 전장의 목을 벤 여인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선 기원전 8세기로 돌아가야 한다. 
군사 강국이었던 아시리아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던 이스라엘의 북쪽부터 점령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남쪽 이스라엘, 유다의 왕이었던 아하즈는 북쪽의 패전을 지켜보며 
강력했던 아시리아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전쟁의 영웅들이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도 명예를 위해 전장에 나갔지만 
아하즈의 선택은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는 것이었다.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왕자를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는 등 
비굴하다는 단어도 부족할 정도로 아시리아에 충성했다. 
아하즈는 어떠한 것보다도 전쟁과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시리아와 메디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생겨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시리아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 주변 국가에 사신을 보내 
전쟁에 참전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요구에 응답한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는 몹시 분노했지만 진행 중이던 전쟁을 멈출 수도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변국의 도움 없이도 아시리아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승리의 기쁨과 함께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요청을 거절했던 나라들에 보복을 가할 준비를 한다.
그 보복 전쟁에 책임자로 뽑혔던 것이 바로 '홀로페르네스'이다. 

왕은 그에게 킬리키아와 다마스쿠스, 시리아의 온 영토와 모압 땅의 모든 주민들, 
암몬의 자손들, 유다 주민들을 처단하라 명한다. 
기병과 보병으로 조직된 홀로페르네스의 군대는 왕의 명에 따라 
여러 나라를 굴복시키고 유다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유다가 자신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울 대비를 하자 
홀레페르네스는 그대로 부대를 움직여 유다의 배툴리아를 포위했다.

그는 군대의 손실 없이 전쟁에 승리하길 바랐기 때문에 배툴리아로 흐르는 물길을 막아 
배툴리아의 사람들의 식수를 끊어 항복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홀로페르네스의 군대에 대응할 힘이 없던 배툴리아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 기도를 해 보고 그래도 소용이 없다면 그대로 투항하자고 결의한다.

이 소식을 들은 배툴리아의 과부 유디트는 모두가 무기력하게 패배를 외칠 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녀는 맑은 물로 몸을 씻소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머리를 빗고 띠를 두른 후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입던 화려한 옷을 입었다. 
그리곤 자신의 시녀와 홀로페르네스의 부대로 들어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기회를 엿보며 
며칠간 홀로페르네스의 신임을 얻으려 노력한다. 
아름다운 용모에 기품 있고 정숙했던 유디트 또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얼굴로 드러날 정도였지만 모두의 평안을 위해선 자신의 계획을 완수해야만 했다. 

홀로페르네스는 그런 그녀의 계획도 모른 채 그저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군대에 들어간 지 4일 째 되던 날, 
홀로페르네스는 자신의 종들을 위해 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유디트를 불러 연회에서 함께 어울릴 것을 권유했다. 
유디트는 그의 권유대로 연회에서 함께 어울렸고 홀로페르네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지금까지 먹어본 적 없는 양의 술을 들이켜고 말았다.

저녁때가 되어 연회가 끝나고 홀로페르네스는 술에 잔뜩 취해 자신의 천막 침상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 안엔 유디트도 함께 남았다. 
정신이 멀쩡했던 유디트는 자신의 계획의 기회가 찾아 왔음을 직감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에 기둥에 기대어져 있던 홀로페르네스의 검이 들어왔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채를 쥔 채 "주 하느님, 오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온 힘을 다하여 그의 목덜미를 칼로 두 번 내리쳐서 머리를 잘라 냈다. 
그녀는 잘라낸 머리를 그녀와 함께 왔던 시녀에게 넘기고 시녀는 머리를 받아 음식 자루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둘은 그대로 진영을 가로질러 빠져나와 배툴리아로 향했다.

배툴리아의 사람들은 그녀가 가져온 적장의 머리를 보곤 환호했다. 
유디트는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으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성벽에 걸고 동이 트고 해가 뜨면 
무기를 들고 홀로페르네스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향하라고 말했다. 
단, 진짜로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장군의 목이 날아간 
전장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거리까지만 나아가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아시리아의 병사들은 머리 없는 홀로페르네스의 시신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 막 눈을 뜨고 있던 병사들과 장수들은 적군이 몰려온단 소식과 
장군의 죽음을 알게 되며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누구를 기다릴 것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나가 산과 들길로 달아났다. 

 

In the old park. 오래된 공원에서. by Alexander Yakovlevich Golov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알렉산드로 골로빈 (Alexander Yakovlevich Golovin 1863~1930)은 러시아와 소련에서 
뛰어난 화가, 무대 장식가 및 세트 디자이너이며 
제국 회화 아카데미 및 공화국 인민 예술가의 정회원이다.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Constantin Stanislavski), 
마이어홀드(Vsevolod Meyerhold)의 작품을 디자인했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골로빈은 처음에 건축을 공부하고 나중에 회화로 전환했다. 
그는 또한 아카데미 콜라로시(Académie Colarossi)에 참여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졸업 후 그는 인테리어 화가와 장식가로 일했다. 
가구 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도 손을 뻗었다. 
1900년 그는 친구 코로빈(KA Korovin)과 함께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러시아 제국 파빌리온 디자인에 참여했다. 
당시 그는 파리의 아카데미 비티(Académie Vitti)에서 공부했다. 

 

Pavlovsk. 경치. by Alexander Yakovlevich Golov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알렉산드로 골로빈은 1901년에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역으로 옮겨서 
오페라 및 연극적인 프로덕션에서 상징주의와 모더니즘을 결합하여 
무대 디자이너로 자신의 삶을 살게 되었다. 
1917년 혁명 이후 골로빈은 극장에서 작품을 공연하는 빈도가 점점 줄어 들었고 
그에 따라 그림과 그래픽 일러스트레이션에 보다 더 깊이 빠져 들었다.

골로빈은 1910년 스트라빈스키(Stravinsky)의 파이어버드(The Firebird) 
발레를 제작하기 위한 세트 디자인을 했다.
골로빈은 장면 변경을 가속화하기 위해 회전 무대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작품은 개막 날 밤 10번의 커튼콜을 거두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골로빈은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인민 예술가로 임명되었다. 
그는 1930년 4월 17일 데츠코이 셀로(Detskoye Selo)에서 사망했다.

"Orpheus and Eurydice" performed at the Marlinsky Theatre in St. Petersburg in 1911. 
by Alexander Golovin. Gorache, pastel and carbon pencil on paper. 69.7 × 97 cm. 

 

191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말린스키 극장에서 공연한 오페라 

"Orpheus and Eurydice"의 세트 디자인 그림 

 

소녀와 도자기. by Alexander Yakovlevich Golov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정물. by Alexander Yakovlevich Golov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여성 초상화. by Alexander Yakovlevich Golov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움브리아 계곡. by Alexander Yakovlevich Golov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44. 알렉산드로 골로빈(Aleksandr Golovin) : A collection of 120 works (HD)

 

Tretyakov Gallery Room 44.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전시실

 

Beauty. 러시아 미녀. 1915. by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oil on canvas. 141 × 185cm. Tretyakov Gallery Room 44

보리스 쿠스토디예프(Boris Mikhaylovich Kustodiev 1878-1927)의 그림 속 여인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처럼 풍성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 
그런 뚱뚱한 여인을 러시아 미녀라 칭한 제목을 보고 '말도 안돼'를 연신 되뇌이겠지만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미는 시대가 요구하는 러시아 미인의 표상인 '민중적 미의 이상형'을 말하는 거다. 
기근에 시달려 못 먹고 못 입고 말라 비틀어진 그런 나약한 여인이 아니라 
앞으로 시대를 이끌어갈 여인의 강인함과 건강함의 기준을 보여준다 하겠다.

 

Maslenitsa, 1916. 마슬레니짜. by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마슬레니차는 춘분 무렵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러시아인들의 축제다. 
일주일간 행해지는 축제 기간 중 많은 파티가 벌어지며 사람들은 실컷 마시고 신나게 놀았다고 한다. 
아직 눈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이제 봄에게 자리를 내 주어야겠다. 
동화 속 세계처럼 선명한 색으로 묘사되어서 춥다기 보다는 오히려 환하게 다가온다. 
혹한의 겨울 동안 집안에 갇혀있다가 밖에 나오면 누구를 만나도 반갑겠다. 
생명이 시작되는 시기는 늘 소란스럽고 유쾌하다.

 

Maslenitsa (Pancake Tuesday), 마슬레니짜 (참회의 화요일). 1916. 
by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oil on canvas. 61 x 123 cm. Tretyakov Gallery Room 44

마슬레니차 둘째 날은 유희의 날이다. 
유희의 날에는 러시아의 민속놀이가 시작되는 날인데 젊은 남녀들은 
얼음 덮인 산에서 미끄럼을 타거나 썰매를 탔다. 
앞 부분에는 마차 썰매를 타는 모습이 있지만 

왼쪽 뒤편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는 모습에 눈길이 간다. 
지금도 그렇지만 눈 덮인 비탈을 얇은 판에 앉아 미끄러져 내려올 때는 

한없이 이렇게 내려갔으면 하게 된다. 
이야기 소리는 명쾌하지 않지만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건너오고 있다.

 

Portrait of P. L. Barc, 1909. by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Portrait of Y. E. Kustodieva with daughter Irina, 1908. 아내 Y. E. 쿠스토디예프와 딸 이리나의 초상
by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Moscow Tavern, 1916, by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oil on canvas, 99.3 x 129.3 cm. Tretyakov Gallery Room 44

 

Haymaking, 1917. by Boris Mikhaylovich Kustodie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44

 

[영상] 보리스 쿠스토디예프(Boris Kustodiev) : A collection of 357 paintings (HD)

 

Tretyakov Gallery Room 44. 지나이다 세레브라코바 (Zinaida Serebryakova) 전시실

 

Serebriakova Zinaida For the toilet. Self-Portrait. 화장대 앞에서 자화상. 1909.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65 x 75 cm. Tretyakov Gallery Room 44

지나이다 세레브라코바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1884~1967)
화장대 앞에서 포즈을 취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다. 
1900년대 그려진 초상화라 믿겨지지 않을 만큼 독특한 매력을 지녔다. 
당시 이 그림이 발표되었을 때 러시아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넣어 줄
 커다란 선물같은 작품이다 라고 칭송받았다 한다. 
사실적이면서도 마치 일러스트 같은 느낌을 주는 매력 넘치는 초상화다.

자화상 속에서 나타난 그녀는 마치 현대시대의 전문 모델같은 모습으로 
익숙하고 세련된 자세로서 그림을 보는 사람을 유혹하듯이 고혹적이고 매력적인 자세를 취한다. 
또한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녀 자신 앞에 놓아둔 그녀의 소품들 
화장품들 또한 그녀를 의도적으로 돋보이게 만든다. 

그녀 내부에 모델처럼 자신을 매혹적으로 카메라에 비치게 만드는 타고난 끼와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백색의 옷은 그녀를 겸손과 흰색으로서 지배하는 
아름다운 신부로서의 모습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녀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흰색의 옷과는 대조적으로 도발적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 상태는 서로 어울림으로서 아름답게 빛난다.

 

Bleaching Cloth, 1917, 세탁부.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141.8 x 173.6 cm. Tretyakov Gallery Room 44

러시아 최초 여류 작가인 세례브라코바의 역동적이고 활기찬 힘을 가진 그림이다. 
강렬한 색채 대비와 과감한 구도는 세탁부의 역동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At breakfast, 1914. 아침식사.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107 x 88,5 cm. Tretyakov Gallery Room 44

아침 식사하는 어린애들을 참 생기있게도 그려 놓았다. 
귀여운 아이들이 식탁에서 물을 마시거나 스프를 먹고 있는 모습이다.
여자아이는 스프 접시에 손을 얹고 관객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애는 셋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기도 하지만 
뭔가 시크한 표정으로 관심 없다는 듯 물을 마시고 있다.

가운데 큰 수프 볼에 들어 있는 것은 아마 순무와 야채, 
고기를 넣고 끓인 러시아 전통 수프인 보르쉬나 양배추 수프인 쉬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접시에 담긴 수프에 건더기가 안보이는 걸로 봐서 양배추 수프일 것 같다. 
왼편에 있는 빵도 맛이 있어 보인다.

 

Self portrait. 1906. 자화상.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69.5 x 6.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그녀는 대체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비록 한때의 우울이 있었지만 그녀는 비교적 행복하게 살았다. 
1900년대 러시아에서 여자로 태어나 그녀는 어느 남자들보다도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녀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데에는 타고났던 낙천적이고 선량하며 
동시에 여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용감했던 성격 탓도 있었다. 
그녀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Self-portrait, 1907. 자화상.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Girl with a candle. Self portrait, 소녀와 촛불, 자화상. 1911.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72 x 58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촛불은 곧바로 보이지 않지만 빛을 통해 인물에게 집중을 시켜놓았다.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가 태어난 집안은 예술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가정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건축가였으며 건축가들의 사회의장인 동시에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일원이었다. 
그녀의 삼촌 알렉산드레 베노이스는 꽤 유명한 화가였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 에브게니 니콜라이에비치 란세레이는 유명한 조각가였다. 
또한 알렉산드레 베노이스의 자매였던 그녀의 어머니도 그림을 그리는 소질이 있었다.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는 그녀의 집안에 가득한 예술적 풍취에 의해서 
화가가 될 소질을 이미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의 아버지와 어머니 뿐만 아니라 그녀의 형제 중의 하나인 
니콜라이 에브게니에비치 란세레이 또한 재능 있는 건축가였으며 
그녀의 형제인 란세레이가 지은 미술관은 러시아에서 중요한 예술적 문화재가 되었다. 
러시아인이자 영국인이었던 배우이자 작가 피터 유스티노프 또한 그녀와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녀의 예술적 소질은 이미 타고났던 것이다. 
그녀는 어린시절 러시아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며 1902년과 1903년에 이탈리아에서 미술을 배웠다. 
1905년에는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같은 해에 러시아로 돌아온 세레브랴코바는 철도 기술자인 그녀의 사촌 보리스 세레브랴코바와 결혼했다. 
그녀의 예술은 젊은 시절부터 계속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사랑의 시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녀의 첫 시도는 대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젊고 여성이었지만 표현에 있어서 용감했고 그녀가 표현하려는 주제에 대해서 망설이지 않았다.

 

House of cards, 1919. 카드로 만든 집.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65 x 75.5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세레브랴코바의 네 자녀들이다.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아르누보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유지했다. 
비록 그녀가 그 누구의 스타일을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그림들 속에서 
르느와르의 그림들이 지니고 있는 따뜻하고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녀는 꽤 안정된 집안에서 자라났다. 
매력적인 소녀들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집안의 안정된 보호를 받으며 자라났다. 
그녀는 대채로 그녀의 인생에 대해서 낙천적이었고 항상 성실했다. 
일하는 화가로서도 집안의 어머니로서도 남편의 아내로서도 그녀는 항상 성실했다.

 

Portrait of Eugene Serebryakov, 1909.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그녀는 그녀의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서 그녀 자신의 카논(이상적인 인체비례)을 창조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카논에 따라서 그녀 자신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 카논의 모습은 강렬한 밝고 아름다운 순수로 가득 차 있다. 
그녀의 아이들 그림에서 그녀의 아이들은 섬세하며 강하고 온순한, 
독립된 에너지가 가득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릴 때 심리학도 활용했다. 
그녀는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지식에도 밝았다.

 

Dressing-room, Ballet Dancers. 1923.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105 x 85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예술가의 집안이라 그런지 세레브랴코바의 딸 타티야냐(Tatiana)는 발레 댄서가 되었다. 
세레브랴코바는 자녀들의 그림과 발레 장면과 분장실, 대기실 등의 장면을 여러 점 화폭에 남겼다.

 

Young Sylphids, 1924. 작은 공기의 요정들.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82.5 x 103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세레브랴코바의 딸 타티야냐가 발레 댄서가 되어서인지 
1920년대 전반기에 발레 관련 그림을 많이 그렸다.

 

Ballerinas in the Dressing Room, 1923.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드레스룸에서 발레슈즈 끈을 매고 있는 발레리나 딸 타티야나의 모습.

 

Portrait of the artist Bush in a fancy dress. 1922. by Zinaida Serebryakova. 
Pastel on paper. 64 x 45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Portrait of S. R. Ernst. 1921.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81 x 72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Self-Portrait in a Scarf, 1911. by Zinaida Serebryakova. 
Tempera on paper, 36.9 x 29.6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Self-Portrait in a White Blouse. 1922.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69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44

'흰 블라우스를 입은 자화상'은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가 삼십대 후반 때인 1922년의 자화상이다.
아프리카와 모로코에서 그녀는 아프리카의 풍경에 매료되었고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 아프리카의 아랍여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묘사한다. 
그녀가 주로 표현하려고 했던 지향점은 이 대자연의 모습과 
대자연에서 어울리는 바로 자기자신과 같은 여성들의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Bather, 1911.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98 x 89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Footwear peasant woman, 1915.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2명의 농부 소녀들. 1915.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Peasants, 농민들. 1914.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123.5 x 98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Cypress trees in the Crimea. 1911. by Zinaida Serebryakova. 
Tempera on paper. 43.3 x 43.5 cm.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The Shoots of Autumn Crops, 1908.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In the meadow, 1912. by Zinaida Serebryakova. 
oil on canvas. Zinaida Evgenevna Serebryakova 특별전시회

 

Tretyakov Gallery Room 44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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