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반기 회화 <초기 풍속화의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15 파벨 페도토프 작품 전시실

 

Self Portrait 자화상. by Pavel Fedotov. 1848.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Room 15. 

작품을 감상할 때면 화가 자신이 그린 자화상을 자주 보게 된다. 
우선 어떤 얼굴인지 궁금하다.  
파벨 페도토프 (Pavel Andreyevich Fedotov 1815-1852)는 약간 벗어진 머리와 형형한 눈빛 
그리고 멋진 콧수염 등이 그가 쉽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여 주고 있다.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의지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차가운 냉소도 묻어 있다. 
자화상을 그린다면 무엇을 그리게 될까?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을 그릴까? 
보아 주었으면 하는 것을 그릴까? 

화가이자 시인인 파벨 페도토프는 2급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제1군사학교에서 공부했다.   
1954년부터 10년 간 미술아카데미에서 드로잉 수업을 청강했고, 자우에르베이드에게 전쟁화를 배웠다.  
1840년 미술에 몰두하기 위해 군대를 떠나 미술아카데미에 등록하여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소설가 도스토에프스키도 회원이었던 사상가 Mikhail Petra-shevsky가 만든 
철학과 문학 토론클럽  'Petrashevsky Circle'의 진보적인 문필가, 평론가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민중화가가 되어 후대 모스크바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The Major's Proposal. 1851. 소령의 구혼.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58.3cm x 75.4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돈 밖에 없는 상인의 집은 권력을 얻기 위해 딸을 늙은 소령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 
하지만, 늙은 남자를 본 소녀는 온 몸으로 이 현실을 거부한다. 
콩트같은 현실의 한 장면을 '찰칵' 스냅사진 찍은 듯 보여주는 그림이다.

페도도프의 대표작인 <소령의 구혼(1848)>은 <새 수훈자>와 함께 그가 미술 아카데미展에 출품한 작품이다. 
지위를 가졌지만 가난한 남자, 그리고 신분이 낮으나 돈은 많은 집안. 
양측이 이러한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현명한 결합을 일삼던 시대를 풍자한 그림이다. 

‘장르화’란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우리나라의 풍속화쯤으로 보면 된다. 
서양화단에서는 17세기 무렵부터 회화를 주제별로 구분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역사화’와 그 외의 모든 그림을 칭하는 ‘장르화’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그 장르화에서 다시 인물화와 정물화, 풍경화 등이 쪼개져 나갔으며, 
이도저도 아닌 것들만 여전히 ‘장르화’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주로 당대 사람들의 일상과 풍속을 담은 회화들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근래에 가장 사랑받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진주귀걸이 소녀>의 얀 베르메르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그가 자주 그린 17세기 네덜란드의 부엌 풍경들. 
그로부터 우리는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살아가던  모습의 진솔한 단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장르화의 가치는 미학적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그림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정신’이나 ‘가치’가 담기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백치미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름다움이 없는 가치란 자칫 구호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가 단원과 혜원의 풍속도를 사랑하는 것은 우선 그 그림들이 미학적으로도 볼만하지만, 
그 속에서 조선 후기 민초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고, 
생활에 발을 딛지 않은 고고한 문인화에서 벗어나 낮은 데로 임한 화가의 정신을 높이 사기 때문이 아닐까.

러시아 장르화의 뿌리를 찾자면 앞서 소개한 농노화가 미하일 시바노프의 <결혼계약의 축하(1777)>, 
그리고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의 농촌그림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단순한 묘사를 넘어 장르화의 묘미인 ‘풍자’와 ‘해학’이 가미됨으로써 
비로소 맛깔스런 그림들이 탄생한 것은 파벨 페도토프(1815~52)에 이르러서이다. 
민초들의 삶이란 대개 고통스런 것이고, 풍자와 해학은 이를 웃음으로 버무려 이겨내고자 하는 묘약이다. 
우리의 풍속도 군데군데에 풍자와 해학들이 숨어있듯이, 
페도토프를 거쳐 바실리 페로프(1834~82)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장르화들도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장르화(Genre Painting)는 성격상 곧잘 풍자와 해학을 띤다.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파벨 페도토프는 자기 시대의 모순들을 유머러스한 붓길로 재치 있게 묘사했다. 
사리사욕과 기만, 배신 등이 그가 즐겨 다룬 주제인데, 관료주의에 물든 관료들 뿐 아니라 
사랑을 약속한 연인 사이에서도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자주 나타난다. 

페도토프의 이 작품은 인륜지대사인 결혼이 철저한 계산과 이기심에 따라 
일종의 거래로 타락한 모습을 고발한 작품이다. 
오른쪽 문간에 기댄 남자는 이 집 딸에게 구혼하러 온 소령이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왼쪽 문으로 부리나게 달려가는 처녀는 그의 구애 대상인 아가씨다.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소령의 모습이 볼수록 역겨운데, 
그래도 그는 소령이라는 자랑할 만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 신분을 밑천으로 열악한 경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부유한 상인의 집에 찾아와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콧수염을 만지는 그의 모습은 일이 잘 풀려 
곧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차리라는 기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사람의 느낌과 관계없이 스스로는 지금 기분이 매우 고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문안의 풍경을 보자. 문을 들어서는 노파는 중매쟁이다. 
그녀가 나타난 것을 보고 이 집 주인인 상인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노파에게 다가가고 있다. 
딸은 신랑감 도착 소식에 깜짝 놀라 옆방으로 숨으려 한다. 
손님을 맞기 위해 한껏 차려 입었지만,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되는 이 중매에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그러자 어머니가 딸의 드레스를 잡아당기며 대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경고한다. 
식탁에서 음식을 차리는 요리사와 집사 등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하며 서로 관심을 주고 받는다.

파벨 페도토프는 좀 더 발전된 소재를 가지고 풍속화를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연극이나 판토마임 무대예술과 많은 관련을 보이고 있다. 
그림을 보는 것 만으로도 그가 풍자하고자 하는 것을 아주 잘 볼 수 있다. 
이 작품 <소령의 구혼>은 국내에도 꽤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엄마의 강요로 예쁘게 머리도 말아올리고,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 하나가 
현관 입구에서 등을 돌린 채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현관 밖에는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소령이 멋쩍게 벽에 기대어 있고, 
왠지 여인이 결국은 자신에게 시집을 올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듯 불안감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앞의 여자는 여인의 아버지로 보이는 수염이 길게 자란 남자에게 
밖에 사윗감이 왔노라고 설명을 하는 것 같고, 
여인의 엄마는 여인의 드레스 자락을 꽈악 움켜쥐고, 여인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 
여인은 하얀 레이스 손수건도 바닥에 떨어뜨린채 현관을 넘어서 소령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는 듯 결혼을 거부하는 몸짓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파벨 페도토프는 사실주의 화가였던 만큼 
19세기 중반의 러시아 가정의 집안 인테리어도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바닥, 벽지, 천장, 벽면에 걸려있는 그림들, 소품들까지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각 인물이 입고 있는 옷감의 느낌도 충분히 살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림 오른쪽 앞의 고양이도 빼 놓을 수 없다. 
주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양 고개를 돌리고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아마도 빈털터리일 가능성이 높은 소령이, 그를 경제적 곤궁으로부터 구해줄 가문을 찾아 왔다. 
청혼의 자리이긴 하지만 거래의 실질적 합의는 이미 끝난 상태일 것이다. 
매파가 바깥주인에게 소령을 소개하는 동안, 처녀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며 다른 방으로 달아나고 있다.

그녀는 이미 통보를 받아 잘 차려입은 채 소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도착한 신랑 후보의 나이 들고 통속적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것이리라. 
이 광경을 지켜보며 수군거리는 하녀들. 
여러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가 워낙 정교해서 실물을 보기 전에는 
사이즈가 상당히 큰 대작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림의 크기는 58.3cm X 75.4cm에 불과하다. 
어떤 이는 이 그림을 두고 ‘결혼이 거래이던 시절의 풍경’이라 말하지만,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닐까...

페도토프는 당시 주류 화가들의 교육기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 출신이었지만, 
귀족이나 성직자, 관리 등 ‘지도층 인사’들 뿐 아니라 밑바닥 인생들이 살아가는 막장까지 
구석구석 돌아보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 
그렇게 그가 발굴한 이야기들은, 트레차코프 갤러리 Room 15에서 만나게 되는 
가로 세로 50cm 내외의 크지도 않은 화폭들에 치밀하게 담겨 있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무슨 일일까? 옅은 분홍빛 드레스 여인은 아름답다.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을 거다.
제일 예쁜 옷을 골라 입고 정성스레 머리를 빗고 
'내 님은 누구일까, 어찌 생겼을까? 처음 보는 내게 어떤 눈빛을 아니 어떤 첫마디를 건넬까?' 
두 볼을 붉게 물들이며 그분을 기다렸을 거다. 
낭만 소설에서 읽어 얻은 아이디어로 미래의 그분 앞에 
살짝 떨어뜨릴 손수건을 준비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떨어뜨린 손수건을 집어 들며 첫마디를 건네 올 그분과의 낭만을 기대하며 가슴 떨려 했을 그녀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는 건가! 심쿵을 기대했던 그 분과의 만남에서 
그녀는 '이건 아니야' 를 외치며 몸을 돌린다. 낭만의 징표인 손수건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이럴 수는 없어요. 등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여인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리는 듯하다. 
청혼을 거절당한 소령은 멋적게 턱을 괴고 있지만 별로 부끄러운 기색은 아니다. 

어머니는 딸의 치마를 끌어 당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가만히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모든 광경은 사전에 딸이나 남편에게 
아무런 상의 없이 저지른 어머니의 욕심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의 마음에는 딸의 사랑보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위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방 구석 그늘에 있는 아버지는 있는 듯 마는 듯 하다.

하인들은 서로에게 귓속말로 이 상황을 따져 보고 있다.
아가씨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아직도 모르겠어? 
결국은 주인 마님 의견대로 아마 저 늙은 소령하고 결혼하게 될 거야.
어휴, 안타까워라. 도시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를 숨기지 않았던 
페도토프의 성숙된 테크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군대에서 종군 화가라는 직책도 매력적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페도토프는 진정한 창의력 있는 화가는 미술에 모든 것을 받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10년간 복무하던 부대에 전역을 신청한다.
그 때 그의 나이 28세 되던 1843년 11월이었다. 
제대를 하기 위해 황제로부터 미술에 전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페도토프는 
우선 공부를 위해 미술 아카데미에 정규 출석한다. 
처음 그는 전쟁화를 그리는 반에 들어 갔으나 곧 풍속화반으로 자리를 옮긴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이 그림은 아마도 러시아 귀족계급일 고위 장교와 상인계급의 처녀와의 결혼을 암시한다.  
당시는 자본주의가 퍼져 혈통보다는 돈이 더 중시되던 때여서, 
가난한 귀족의 자제가 경제적 이득을 위해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하는게 드물지 않았다.  
이 때, 귀족뿐 아니라 결혼의 상대인 상인 가정도 정략결혼의 덕으로 상류사회에 접하게 되는 것을 반겼다.  
아버지일 노인은 표정은 매우 흡족하다. 특히 신부감은 엘리트 러시아 살롱에 속하게 되어 매우 행복하다.  
모두가 서두르는 분위기. 아랫쪽의 고양이만 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심한 유일한 존재이다. 
이는 전체 장면을 풍자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매우 강한 정치적 메세지를 담고 있다. 
러시아 최고의 계층에서의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주제는 러시아 황실의 검열을 벗어나기 힘들었을 터이지만 
페도토프는 자신의 친구나 후원자를 위한 사적인 그림을 그렸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훗날 알렉산더 2세가 즉위 후 여러가지 민주적인 개혁을 벌이는 시대가 되자 
페도토프의 뛰어난 풍자의 기술은 더욱 인기를 얻었다.  

브륄로프와 대조적으로, 페도토프는 러시아 화화사에서 최초로 사실주의를 보인 화가중의 하나이다.  
그는 과장이나 미화없이 객관적으로, 그러나 약간의 유머를 담아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런 배경에는 페도토프가 황립미술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아 
신고전주의적 화풍에 훈련되지 않은 것이 이유일 것이다.  
독학의 화가로 군대와 지방에서 경험을 쌓아 그는 과거의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현재였고, 현재를 가능한 한 자신의 능력대로 잘 그려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녀의 그분이 될 남자는 딱 봐도 풋풋한 아가씨와는 어울리는 나이가 아닌 듯하다. 
세상 물정 알만큼 다 알고 설렘, 순수 이런 것들은 아주 예전에 묻어 버린 나이 먹을 대로 먹어버린, 
고작 소령이라는 사회적 지위 하나만 부여잡고 상인의 집에 
지참금 두둑이 뜯어내 앞으로의 일신을 편안히 돌보려는 속물이다. 
문 앞에서 '혹시 나 홀대하는 거요? 감히 내게?'라는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는 소령의 모습이 참으로 느끼하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번들거리는 비단옷에 거대한 몸을 맡긴 드레스 여인의 엄마는 휙 

돌아서는 딸의 철딱서니가 못마땅하다. 
결혼은 남녀에게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는 일. 
이 불변의 절대적 진리를 두고 철없이 구는 딸아이를 세게 잡아당긴다. 


'우리가 가진 돈만 있으면 세상 편히 살 줄 아니? 
돈을 뿌리면 반짝거리게 해 줄 권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거늘. 쯧쯧…...' 
이런 잔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결국은 가장 힘 세 보이는 엄마는 의지대로 소령에게서 권력을 사 딸에게 안겨 줄 거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이 거래로 중매 비용을 두둑이 챙겨야 하는 중매쟁이는 아가씨의 돌발행동에 몹시도 불편하다. 
혹시라도 이 결혼이 깨질까 노심초사한다. 
거래의 성사에 전혀 힘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아버지라도 다그쳐 본다. 
검은 옷의 사내는 중매쟁이를 묵묵히 받아낼 뿐이다.

“난 이 집에서 힘이 없다우.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도 아내가 가져온 지참금 때문이라오.
난 무능력한 상인. 아내는 그게 철전지 한이 된 사람이라오”라고 소심하게 중얼대는 듯하다.
수십 년 알코올에 절어 붉어진 아빠의 콧잔등이 현실에 흥분하는 항변으로 착각되는 씁쓸한 현실이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안타까운 눈빛으로, 인간다운 눈빛으로 딱 한 사람만이 드레스 여인을 쳐다본다. 
손님 접대 상차림에 분주한 앞치마 두른 여인은 어릴 적부터 그녀를 키운 유모인가 보다. 
딸 같은 그녀가 사랑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현실에 희생되는 지금이 못마땅하다. 
하지만 유모는 힘이 없다. 체념하고 지켜볼 뿐이다.
결혼이 거래이던 19세기 러시아. 찰나의 이 그림이 과연 과거 러시아에서만의 일일까?
세상사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현실 한 자락을 

따끔히 꼬집어내는 페도토프의 천재성이 참으로 대단하다.

 

The fresh cavalier - Newly Awarded. 
Morning of an Official Who Had Been Decorated with  His First Medal, 1848.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48.5 x 42.5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아침부터 난감한 상황에 빠진 관리이다. 
방안은 깨진 그릇과 나뒹구는 빈 병에다가, 세간과 옷, 줄 끊어진 악기 등으로 난장판인데, 
그는 한 아낙네와 다투고 있다. 
구두를 비롯하여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돈 될만한 물건들과 

그녀의 표정을 보면 상황이 대강 짐작된다.

여인은 여러 달째 하숙비를 받지 못한 집주인쯤 되지 않을까. 
혹은 아침부터 작정을 하고 들이닥친 빚쟁이거나. 

채귀(債鬼)라고 했다. 아무리 고귀하신 분이라도 빚쟁이한테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관리는 어제 받은 소중한 훈장을 가리키며, 국가가 인정한 공훈의 권위를 
코웃음 치는 여인에게 눈을 부릅뜨고 일갈하고 있다.  
“나, 훈장 받은 남자야!”

그러나 자랑스런 훈장이 달려 있는 너덜너덜한 가운의 구멍들, 
세수도 안 한 것 같은 얼굴에 롤을 감아놓은 머리의 꼬락서니, 
탁자 밑에 숨어 있는 친구의 몰골, 이런 모든 상황이 이제 지겹다는 듯 기지개를 켜고 있는 고양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그림의 압권인 여인의 조롱 섞인 표정을 볼 때, 
그런 호통은 부질없는 허세임이 분명하다.

페도토프는 장교로서 주간 근무를 끝내고 밤에는 미술 아카데미의 야간 수업에 참석했다. 
학생으로서는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부대의 모습과 장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는 부대 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미 일반적인 수채화와 초상화에 관계된 테크닉은 모두 끝낸 그였다. 
이 때 페도토프의 작품은 수채화와 연필로 제작되었다. 
그가 유화로 방향을 바꾼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페도토프는 초상화에 이어 캐리커처로 범위를 넓혔다. 
이 때까지는 신랄한 풍자를 담은 작품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30년에 걸친 시대착오적 반동정치를 통해 러시아를 유럽의 후진국으로 퇴화시켜버린 
차르 니콜라이 1세 (1825~55).  그를 받치고 있는 기둥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의 관리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허세에 찬 존재인가를 풍자하는 그의 붓놀림은 좀 아슬아슬해 보이기까지 한다.
국가를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고 비밀경찰까지 창설하어 국민을 억압했던 당시에, 
이런 비판적 그림이 무사할 수 있었을까.

돈 없는 몰락한 귀족은 사교계에 진출해 부자 여인을 꼬시는 것이 삶의 전부다. 
집세를 내지 않았는지 하숙집 주인의 신발과 커피분쇄기를 압수하려 한다. 
하지만 그림 속 살림을 보면 집세만 없는 거 같다. 
새장 속 새에, 포도부에, 기타에, 커피 분쇄기까지. 
주인의 압수에 '조금만 기다려 주면 한 번에 다 갚아 버릴텐데,' 하며 
남자는 입을 삐죽이 내밀며 귀족 징표인 훈장을 가르키고 있다. 
페도토프는당시 풍자적 풍속화를 이끈 대표 작가로 
폼생폼사로 사는 귀족의 허영심을 재미있게 꼬집고 있다.

 

Aristocrat's breakfast. 1850. 불청객, 아침을 먹고 있는 귀족.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51cm x 42cm. Tretyakov Gallery Room 15.
 
<불청객, 아침을 먹고 있는 귀족 (1848)> 19세기 중반 몰락해 가던 러시아 귀족의 어느 아침.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법 격조가 있는 집의 방안이다. 
아직 가운차림인 귀족은 아침 요기를 하고 있다가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맞아 당황하는 모습이다. 
애견은 커튼을 젖히며 들어서는 낯선 손을 경계하고 있고, 주인공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며 돌아본다. 
이 그림에서 화가가 표현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남자가 황급히 책으로 덮고 있는 것은 러시아 서민들의 전통음식인 흑빵이다.

농노제에 기초한 러시아 농업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하게 된다. 
기술의 발전 없이 오로지 농노의 고혈을 짜는 데만 의존한 생산방식의 비능률 때문이었다. 
토지에 부를 의존하고 있던 러시아 귀족계급은 이로 인해 급격히 몰락한다.
그들은 땅과 농노를 저당 잡힌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그림 속 귀족의 입성이나 가구며 방안의 풍경은 아직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곤궁한 처지는 달랑 흑빵 한 조각뿐인 아침식사가 잘 시사해주고 있다.

하필 이런 때에 누가 집을 방문하다니, 그는 황급히 흑빵을 책으로 덮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은 그걸로 덮어질 수 없을 듯하다. 
의자에 놓인 팸플릿의 제목은 ‘устрицы(굴, oyster)'이다. 
아침의 허기를 고작 흑빵 한 조각으로 때우는 그는, 지난 밤 저 팸플릿을 읽으며 
오래 전 풍족하던 시절 맛보았던 굴의 향을 추억하였는지도 모른다.              

<소령의 구혼>과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는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원화는 판매될 수 없었고 석판화도 검열에 걸려 발매가 중단되었다. 
게다가 그는 미술아카데미전에 출품이 금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리얼리즘에 대해 호의적이던 모스크바의 화단에 그의 작품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의 계승자라 할 수 있는 바실리 페로프, 바실리 푸키레프, 
일라리온 프랴니시니코프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파벨 페도토프가 비판적 사실주의를 실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귀족의 실상을 폭로하듯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언뜻 생각하기에 제목과는 달리 귀족의 아침식사라고는 보기 힘들다. 
오른쪽 구석에 커튼을 젖히며 누군가 들어오려고 하자 황급히 책상위의 빵을 책으로 덮으려 하는 모습이다. 
귀족이라면 엄청 큰 식탁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음식을 조금씩 입에 물고 오물오물 
우아하게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 그림 안의 귀족은 아주 편안한 차림에 쟁반도 없이 
종이 위에 올려 놓은 음식을 양 볼이 터져라 집어 넣고 먹고 있다. 
겉으로는 우아한 척 다하면서 품위있고 격조 높은 모습을 하고 일반 평민을 업신여기는 귀족도 
실제로는 일반 사람과 똑같이 입안에 음식을 가득 물고 우걱우걱 먹는 다는 설정인가 보다. 
들어오는 사람을 경계하는 듯 낯선 사람을 향하고 있는 강아지는 귀족이 키우는 강아지 답게 
결이 아주 부드러워 보이고, 미용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막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인데 예기치 않은 손님이 방문했다. 
손님도 어지간히 급한 성격인지 한 손으로는 벌써 커튼을 열고 있다. 
손님을 보고 짖는 개도 놀랐겠지만 더 놀란 사람은 귀족이다. 
근사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귀족의 아침 식사 모습은 보잘것 없다. 
급한 마음에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책을 들었지만 책상에 놓인 음식은 어떻게 하나? 
더 큰 문제는 입이 불룩 튀어 나오도록 먹은 음식이다.

보여주는 모습과 보여지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세상 사람 대부분은 알고 있다. 
그 간극이 차이가 그 사람의 당당함을 결정하는 것이다. 
군에서는 정직하고 매우 열심히 일하는 장교로 인정을 받았던 페도토프도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다른 많은 동료들처럼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플룻을 연주하는가 하면 아마추어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드로잉과 그림을 그리는데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군인 신분인 것을 감안하면 참 대단한 열정이다. 

 

Young Widow 아기가 태어나기 전 젊은 미망인, 1851-1852.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63.4 x 48.3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촛불을 켜 놓고 기도를 올리다가 벌떡 일어나 세상을 떠나 
지금은 옆에 없는 남편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림 속 남편과 눈을 맞추다가 결국 아내는 등을 돌리고 말았다. 
조금 더 그렇게 순간이 흐르면 그냥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인의 손이 배 위에 머물렀다. 
남편이 남겨 준 생명은 엄마의 격한 마음을 알고 있겠는지...

아직도 여린 소녀처럼 보이는 여인이 상복을 입고 뱃속의 아이를 감싸며 슬퍼하고 있다. 
절망하는 그녀 뒤로 남편의 영정 사진이 보인다. 
앞으로 태어 알 아이는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탁자에 기대서 한숨짓는 어린 미망인의 눈물이 너무도 깊어 보인다.
바로 다음 그림과 함게 비교해서 보면 좋다. 

 

Young Widow. 아기가 태어난 후 젊은 미망인. 1851~1852년,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44.8 x 57.8 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5.

그렇게 시간이 흘러 미망인은 상중에 아이를 낳았나 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뎌내고 아이를 낳았을 여인은 어떻게든 살아보려 하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은 거 같다. 
이 그림의 톤이 한층 어두워진 걸 보면, 미망인이 짊어질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느껴진다. 
방안을 가득 메웠던 세간살이가 사라진 걸 보니 금 촛대며 
집안의 물건들을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한 것 같기도 하다. 
여인의 얼굴에 수심이 한 층 더 깊어지고 눈물도 메말라 지쳐 보인다.

 

Police Commissary's Reception Room the Night Beforea Holiday 1837. <명절 전 관리의 방 대기실> 
by Pavel Fedotov. Watercolor, pen and Indian ink on paper mountedon paper, 24 x 18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손바닥만한 종이에 수채화로 별 것이 다 그려져 있다.
페도도프는 이미 오래 전에 어쩌면 더 위험한 그림을 그린 바 있다.  
<명절 전 관리의 방 대기실(1837)>이 그것이다.  
그곳에는 명절을 맞아 관리에게 무엇인가를 바치고 눈도장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가로 세로 20cm 내외인 이 손바닥만 한 수채화 속에서 
흰옷을 입은 농부는 아예 돼지 한 마리를 업고 들어선다.

페도토프의 대표작인 <소령의 구혼(1848)>은 <새 수훈자>와 함께 
그가 미술 아카데미展에 출품한 작품이다. 
지위를 가졌지만 가난한 남자, 그리고 신분이 낮으나 돈은 많은 집안. 
양측이 이러한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현명한 결합을 일삼던 시대를 풍자한 그림이다.    

 

Difficult Bride. 다루기 힘든 신부. 1847. by Pavel Fedotov. oil on canvas. 
45 X 37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공주과’ 신부인 모양이다. 무릎을 꿇고 꽃을 건넨 남자는 여인의 손을 잡았지만 
여인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표정이다. 
커튼 밖에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관이다. 
여자의 치켜든 손가락에서, 미간을 잡고 ‘아이구 머리야’ 하는 사내의 몸 짓에서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돈 많은 집의 외동딸쯤 되는 것 같다. 당연히 유서 깊은 집안은 아니겠고... 
여인의 손을 잡고 있는 사내의 표정은 아주 간단하다.

‘너하고 결혼 할 수 만 있다면 이런 수고쯤이야’
여인보다는 돈을 보고 있는 음흉한 사내의 속마음이 들려 온다.
내용은 우습지만 장면을 바라보는 페도토프의 눈은 차갑다.
19세기 전반부에 시작된 러시아의 아마추어리즘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예술가의 흉내를 내는 것인데 (따라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도 같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광범위한 예술적 토대가 쌓이는 효과가 있었다.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구축된 역량은 젊은 예술가들이 끝없이 탄생하는데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물질 숭배를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답답하다.

 

Portrait of Princess Maria V. Vorontsova, 1851. 황녀 보론초바의 초상, by Sergey Zaryanko. 
oil on canvas. 146.4 x 120.5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S.K. 자란코 작, 황녀 보론초바의 초상 (1851)
세게이 자란코 (Sergey Konstantinovich Zaryanko 1818~1870)는 벨라루스 혈통의 
러시아 초상화 화가이자 미술 교사였다.
1834년 Alexey Venetsianov 의 추천 덕분에 그는 Imperial Academy of Arts 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초상화보다는 인테리어를 그렸고 Maxim Vorobiev 와 함께 풍경화를 공부했다 . 

1836년 그는 은메달을 받았고 2년 후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은 후 1841년에 또 다른 은메달을 수상했다.
1843년에 그는 "학자"로 지명되어 모스크바로 가서 알렉산드로프 군사 연구소의 
교사가 되었고 아이콘 화가로 일했다. 
1846년부터 그는 모스크바 궁전 건축학교에서 수업을 했지만 

곧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초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1856년 Feodor Pryanishnikov의 추천으로 그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서 
회화 선임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는 바실리 페로프, Illarion Pryanishnikov 와 
바실리 푸키레브 등 주목할만한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1860년대에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고 대신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 
수년 동안 눈의 피로를 앓아 온 그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갑자기 죽었다.

자란코의 예술 작업을 보면 그림을 바라보는 느낌이 사라진다. 
우리는 눈에 반짝이거나 약간의 슬픔이 있는 실제 인물을 보게 된다. 
독특한 특징과 미묘한 감정의 음영이 있다. 
이같은 기술로 자란코는 1851년 황녀 보론초바의 초상화를 그렸다.


한 젊은 여성이 오토만에 앉아 있다. 모델의 몸에는 장식이 없다. 
하지만 솜씨 좋은 헤어 스타일과 절묘한 화이트 드레스가 이 부족함을 메워 준다. 
보론초바의 얼굴은 아름답고, 건강한 홍조가 있고 사려깊다. 갈색 눈동자는 어딘가 멀리 보고 있다. 
자연스러운 광택은 전체 이미지를 끌어 당기고 되살린다.

 

Collapse (Street Market), 야외 시장. by Sorokin Evgraf Semenovich.

소로킨 세묘노비치 (Sorokin Evgraf Semenovich 1821 - 1892)는 러시아 예술가이자 교사였다. 
역사, 종교 및 장르 그림으로 유명다.
세묘노비치는 야로슬라블의 아이콘 화가로 견습 기간을 보냈다. 
그의 작품을 좋아했던 한 현지 신부는 차르 니콜라스 1세가 방문할 것을 대비해 
그에게 피터 대제의 작품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 그림을 선물로 받은 니콜라스 1세는 소로킨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그를 임페리얼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

1841년 세묘노비치는 Alexey Tarasovich Markov의 감독 하에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 
이듬해 그는 이미 아카데미 위원회로부터 인정받고 칭찬을 받게 되었다. 
그는 몇 개의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1847년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1851년부터 1854년까지 스페인에, 1855년부터 1859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그 사이에 그는 서유럽을 여행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도 방문했다. 
그가 스페인에서 만든 작품 중 일부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1859년에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의 교사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1861년에 그는 "학술가"로 지명되었고 파리의 새로운 알렉산더 네프스키 대성당의 상징성을 창조했다. 
나중에 그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일하면서 상징성을 창조하고
 Fyodor Bruni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일부 이미지를 완성했다. 
그 작업을 위해 그는 1878 년에 "교수"로 승진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날짜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Spanish beggar girl. 1852. 스페인 거지 소녀. by Sorokin Evgraf Semenovich.

 

Sophia Vasilievna Sukhovo-Kobylina - Self-portrait, 1847. 화가 수코보-코빌리나 자화상.
Oil on carboard. 37.9 x 27.9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화가 수코보-코빌리나 (Sukhovo-Kobylina Sophia Vasilievna 1825~1867) 자화상.
소피아 코빌리나는  Imperial Academy of Arts 에서 우등으로 졸업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여동생 Evgenia Tur와 형제 Alexander Sukhovo-Kobylin 은 모두 유명한 작가다.

코빌리나는 부유한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Vasily (1782-1873)는 귀족 원수였다. 
코빌리나와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모스크바 대학의 교수들로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예술가로 진로를 결정한 후 코빌리나는 풍경화가 Yegor Meyer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코빌리나가 재능이 있다고 확신한 Yegor Meyer는 그녀의 임페리얼 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로비했다. 
1849년 코빌리나의 작품 중 하나는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높은 평가와 함께 은메달을 받았다

1850년부터 1851년까지 코빌리나는 Meyer와 그외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1852년부터 1853년까지 그녀는 Meyer와 함께 크림 반도로 또다른 여행을 떠났다. 
코빌리나가 그곳에서 보낸 그림은 금메달을 받았다. 
그녀는 1854년 또 다른 금메달로 졸업했고, 이 학문적 경로가 앞으로 여성에게도 
화가로서의 길이 열려 있다는 메시지가 되어 메달을 받은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1857년에 코빌리나는 로마에서 살기 시작했고 그녀의 집은 
이탈리아를 방문하는 러시아 예술가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코빌리나는 또한 로마를 방문했거나 로마에 살았던 유명한 러시아인들에 대한 에세이를 
러시아 잡지에 썼는데, 이 글의 대부분은 오늘날에도 ​​역사가들에게 가치가 있다.

코빌리나의 삶의 마지막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지 않다. 
1868년 임페리얼 아카데미에서 주요 회고전이 열렸고 그녀의 작품 150점 이상이 판매되었다.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풍경과 유명한 이탈리아인의 초상화이다. 
코빌리나의 그림의 대부분은 개인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Religious procession at the Cathedral of the Annunciation in the Moscow Kremlin, 1860. 
by Karl-Friedrich Petrovich Baudry. oil on canvas. 61 x 85 cm. Tretyakov Gallery Room 15.

화가 칼 프리드리히 보드리 (Karl-Friedrich Petrovich Baudry 1812~1894) 작품,

크레믈 궁 블라고베쉔스키 사원과 소보르나야 광장이다.
크레믈 궁 안에는 사원이 많다. 
특히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대표 사원 세 개가 있는데, 
우스펜스키 사원, 아르항겔스키 사원, 블라고베쉔스키 사원이라 불린다. 


이 세 개의 사원으로 둘러 싸인 곳을 소보르나야 광장(Соборная плошадь)이라 부르고 
이 곳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행사가 다양하게 열린다. 
그림 속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바로 그곳이다. 
이 그림 또한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사실적이며 환한 빛에 노출된 사원 광장의 
화사한 느낌이 너무도 잘 표현된 작품이다.

 

In the Room, 1854. 방에서. by Ivan Fomich Khrut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5.

화가 이반 크루츠키 (Ivan Fomich Khrutsky 1810-1885)
그는 후손 벨라루스어 가정에서 태어났다. 
1827년 크루츠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왔고 1830년에는 Imperial Academy of Arts에 들어갔다 .
크루츠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도 일했으며 부유한 주택 소유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836년에 그는 정물화로 아카데미의 메이저 은메달을 수상했다. 
크루츠키는 또한 멋진 장르 사진과 초상화를 그렸다. 
1840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 한 후 크루츠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영원히 떠나 
폴로츠크 지역의 자카르니치 (Zakharenichi, Zacharniczy) 가족 소유지에 정착했다. 
그는 1885년 자카르니치의 영지에서 사망했다.

 

Tretyakov Gallery Room 15.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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