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Life Is Everywhere. 삶은 어디에나. 1888.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76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시베리아행 열차가 간이역에 잠깐 멈춘 사이, 유형 떠나는 혁명가들이 기차 창틀사이로 햇빛을 즐기며, 
먹기에는 부족한 빵조각을 비둘기에 나눠주며 느끼는 사랑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극한 상황에도 사랑을 실천하며 행복을 느끼는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그림이다.

'삶은 어디에나 (Life is everywhere)'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죄수 호송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쇠창살이 달린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는 차르에 반대하고 개혁을 주장하던 정치범이다.

창가 바로 옆의 젊은 여인과 아기 그리고 머리를 깎은 남자가 한 가족이다. 
아기와 젊은 엄마는 호송 중인 아버지를 따라서 유형 길에 나섰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유형 길에 오를 때 고난의 길에 동행했던 
아름다운 여인들에 대한 숭고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 여인도 사랑의 이름으로 쉽지 않은 삶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동료 죄수들과 함께 아기가 비둘기에게 먹이 주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이 먹을 빵도 넉넉치 않을 형편에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일은 
사치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친 삶을 위로하는 행위이다.

가난할 수록 나누고 척박할수록 풍요로운 영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기원이다. 
두건을 쓴 창백한 젊은 여인과 금발 머리 아기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옛 그림을 연상시킨다. 
비둘기들이 모이를 다 먹기도 전에 기차는 유형지를 향해서 덜컹거리며 떠날 것이다. 
죄수를 싣고 떠난 기차는 더욱 단련된 혁명 전사를 싣고 올 것이다.

​톨스토이는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최고의 감정인 사랑.  
그것의  실천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궁극적 힘이라 말한다. 
그는 자문자답을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인간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이다. 
주인공 미하일은 자신을 돌봐준 구둣방 주인 부부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바로 '사랑'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이다. 
답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견'이다. 
죽음은 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죽음도 삶도 주어진 것일 뿐이다.

세 번째 질문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우리는 바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으로 산다.  
이 소설에  깊은  감동을  받은 야로센코는 바로 이 질문과 답을 시대적 사건을 매개로 형상화했다.

삶은 어디에나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정의를 화폭에 담는다. 
차르에 반대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정치범들의 열차안에도 삶이 생명이 있음을 .. 
형극의 수형길 앞에서도 잠깐의 햇볕을 즐기며 새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눠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 
많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 아님을,   빵조각을 나눠주는 고사리 손을 통해 일깨워준다

화려하지 않아도 빛날 수 있고 가난할지라도 풍요로운 영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엄마의 품에 안겨 미소짓는 아기의 천진한 얼굴에서  우리는 순수의 절대 정의를 읽을수있으며,  
혹한의 미래 앞에 굴하지 않고 찰나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혁명가들의 풍요로운 영혼을 통해서  
러시아의 희망찬  역사를 점칠수 있다는 거다. 
현실의 팍팍함에 투덜대는 내게 일침을 가하는 그런 그림이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감동이 발작처럼 갑자기 그에게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한꺼번에 그의 마음은 녹아내렸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서 있던 모습 그대로 땅에 엎드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센나야 광장 한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는 
달콤한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면서 더러운 땅에 입을 맞추었다>.

그림은 창살 안의 인물들과 아이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날아든 새들로 구성된다. 
새들은 그림 하반부의 정면을 차지하고 있고 
인물들은 정면이 아닌 약간 옆으로 치우친 상반부에 묘사되어 있다. 
죄수 차량 안에 있는 인물들의 시선은 모두 창 밖의 새들에 집중되어 있다. 
정지된 듯한 인물들의 모습은 날개 짓으로 나타난 새들의 동적인 자유로움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왜 새들은 정면에 묘사했으면서 창살 안의 사람들은 측면에 그려놓은 것일까? 
창살 너머로 내민 아이의 손 아래에서 떨어졌을 빵 부스러기를 쪼는 새들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 위의 사람들도 정면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차가 자유로운 세상을 뒤로하고 구속의 땅을 향해 
막 출발하기 시작한 순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닐까?

뒤로 가지 않는 한 기차가 떠나는 방향인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면 
그런 추측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든다. 
이제 막 덜커덩하고 기차가 한 번 움직인 거리인 듯 우리의 시선에서 약간 비껴나간 풍경이다. 
기차는 이미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 안에서 이들이 보고 있는 바깥 세상의 새들은 어떤 모습인가? 

플랫폼을 차지한 새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아이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먹으러 날아들어 먹이를 쪼고 있는 새, 
막 내려 앉으려고 자리를 물색하고 있는 새, 
내려앉아 먹을 기회를 엿보며 목을 빳빳이 긴장한 검은 새, 
그리고 그 옆에서 움츠리고 앉아 또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참새 같이 작은 새. 
모두 두 마리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 작은 놈만 짝이 없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열차 지붕 위에서 꽁무니를 치켜들고 
긴장되게 아래 쪽을 향하고 있는 또 한 마리의 새가 있다. 
새에게 먹이를 주다 보면 옆에서 새들 무리에 끼어들지 못해 
주는 모이도 못 얻어 먹어 마음 짠하게 하는 놈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닥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작은 새가 신호라도 하면 당장 내려갈 양으로 
준비 태세를 갖춘 듯이 모이 쪽이 아닌 작은 새를 향하고 있다. 
힘 센 놈들이 먼저 먹기 마련이다. 
그래도 새들은 창살 안쪽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바깥 세상에 있다. 

빛 바랜 초록색과 황토색이 섞인 낡은 열차 죄수 칸 안에 좌석도 없이 빼곡히 바닥에 
앉아 있을 죄수들 틈에서 창살 너머의 새들에 마음을 빼앗긴 인물들의 표정은 어떤가. 
깡마른 아이 엄마는 한 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자신의 마지막 영양분까지도 젖으로 빼앗긴 듯 지친 얼굴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머리에 쓴 검은 스카프는 
러시아에서 상복으로 쓰이기 때문에 그녀가 상중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남편이라도 죽은 것일까? 
상도 끝나지 않은 그녀는 아이까지 데리고 대체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약간 옆으로 기울인 얼굴의 각도, 지적이면서도상념에 잠긴 듯한 슬픈 표정 등은 
어딘지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수의 고난을 예견하고 걱정하는 마리아처럼 
앞으로 닥칠 아이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근심이 드러난 표정이다.

일반적으로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성상화에서 성모 마리아가 항상 예수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는 반면, 여기서 그녀는 아이의 반대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상념에 잠긴 표정이다. 
그래서인지 성모와는 다른 인간적 고뇌가 느껴진다. 

아이 옆의 사내가 쥐고 있는 빵 조각은 그녀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배를 주리며 남겨놓은 아침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를 안아 올린 손이 창백한 얼굴과 대조되게 붉은 빛을 띤 것을 보면 
아이의 무게마저도 이젠 힘겨운 것 같다. 
그녀의 체념한 듯 부러운 듯 새들을 향한 시선에서 앞날에 대한 걱정이 드리워져 있다. 

침울한 여인의 표정과 대조를 이루는 흐릿하지만 흐뭇한 웃음을 띤 사내는 
귀중한 흑빵을 창 밖의 새들에게 던져주고자 하는 철없는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며 
빵까지 잘게 부숴주는 인정 많은 순박한 촌부의 모습 그대로다.

조금 남은 빵 조각을 쥐고 있는 투박한 손은 그가 살아 온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짧게 깎인 검은 손톱, 굵은 손마디, 꺼칠꺼칠한 피부, 커다란 손바닥과 
짧은 손가락은 평생을 노동으로 일관한 일꾼의 손이다. 
가족을 위해, 그들을 하루 세끼 먹이기 위해 자기 몸뚱이 하나는 
기꺼이 아끼지 않은 순박한 손이다. 
선한 웃음을 띤 그의 표정에서 무엇이든 할 것 같은 우직함과 삶에 대한 긍정이 나타난다. 

메마른 여인과 광대뼈가 드러난 사내의 얼굴과는 대조되는 아이의 둥그스름한 완전함은 
힘겨웠을 고난의 삶을 이겨내며 여인이 지켜낸 아이의 해맑은 표정, 
젖 살 오른 포동포동한 볼, 생기 있는 입술, 통통한 손을 통해 잘 드러난다. 
아이의 하얀 옷과 흰 얼굴이 그들의 순수함과 결백성을 대신해서 드러내는 것 같다. 
창살 아래 가만히 내민 아이의 손은 보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의 뒤에 있는 텁수룩한 수염의 노인은 마치 노년의 톨스토이 같다. 
마을 촌장 같은 이미지의 듬직하고 풍채 좋은 덩치, 강직한 콧대, 넓은 이마를 가진 그는, 
깊이 패인 눈으로 새들을 보는 것인지 아이를 보는 것인지, 
아님 그 둘 다를 보면서 자기 상념에 빠진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이가 펼치는 작은 퍼포먼스로부터 역시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다.

고향에 두고 온, 이제 막 재롱을 피기 시작한 손자 생각이라도 난 것일까?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여생을 보내기 위해 떠나는 유형길이 그에겐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 옆에서 힐끗 곁눈질로 관심을 보이는 옆집 아저씨 같이 생긴 친근한 외모에, 
일용직 노동자 같은 모자를 쓴 사내도 인상적이다. 
풍채 좋은 할아버지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창 밖을 보려고 
아마 까치발이라도 선 듯 약간 기우뚱하고 불안한 자세다.

할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그는 입 꼬리가 약간 올라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고 눈을 아래로 향한 채 바닥의 새들을 주시하고 있다. 
새들을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아마 이 사내인 것 같다. 
그가 부러운 것은 새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아닌 지도 모르겠다. 
부족한 영양 상태를 드러내듯 검게 보이는 마른 얼굴의 그가 부러운 것은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 있는 상황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이 그림에서 마음 한 구석을 답답하게 하는 아픈 부분은 
다른 쪽 창 앞에서 밖을 주시하고 있는 등 돌린 사내의 모습이다. 
그 사내가 없었다면 이 그림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랑곳 하지 않고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사내. 
언뜻 수염도 보이는 듯하고 구리 빛의 얼굴색에 완고해 보이는 얼굴선이 젊지 않은 그의 나이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유형지로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창살 안에 갇혀 버린 듯하다.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문을 닫아 버린 것 같이 무심히 서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도 수 십 년의 유형 생활을 거치고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 
고향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그 무엇에도 관심 없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은 아닐지... 
그런 그의 뒷모습이 마치 앞 사람들의 미래의 모습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사내의 뒷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니콜라이 야로센코 (Nikolai Aleksandrovich Yaroshenko 1846-1898)가 이 그림을 발표한 것은 
1888년 제18회 ‘이동 전람파’ 전시회에서였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여인은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톨스토이 풍이 느껴진다’ 
등의 질문들은 무성했지만 이 그림에 대한 해설은 별로 없다. 
​‘페레드비쥐니키(이동하는 자들)’로 불리던 러시아의 ‘이동전람파’는 
슬라브주의적 경향의 그림들을 선보였던 ‘아브람체보파’와 함께 러시아 회화사에서 양대 산맥을 이룬다. 

이동 전람파 화가 그룹은 1870년대부터 1923년까지 약 48회에 걸쳐 상트 페테르부르그, 모스크바, 
키예프, 하리코프, 카잔, 오데사 등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자신들의 그림을 전시하였다. 
이 그룹에는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 니콜라이 게(1831-1894), 일리야 레핀(1844-1900),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 이사악 레비탄(1860-1900)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이상주의적인 미학과 전통적인 회화 규범을 거부하고, 
일반 민중들의 삶 속에 드러난 ‘민중적 요소들’을 화폭에 옮기려고 하였다. 
이동 전람파 화가들은 그 당시 러시아의 잡계급 인텔리겐치야들, 우스펜스키, 도스토예프스키, 
가르신, 오스트로프스키, 체홉 등등과 교류하면서 비판적 사실주의의 영향도 받게 된다.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과 민중의 생명력에 새롭게 눈뜨면서, 
그것을 화폭에 옮겨 러시아 민중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1861년 농노제 폐지를 단행하여 ‘차르-해방자’로 불렸지만 1881년 ‘인민의 의지’ 당 요원들에 의해 
피살된 알렉산드르 2세 이후 이어진 1880년대 후반의 러시아가 ‘반개혁’의 시기였던 점을 고려하면, 
민중의 삶을 그대로 그린 사실주의적 경향의 그림들이 러시아 곳곳에서 전시된다는 것 자체가 
귀족 사회와 전제 군주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고 민중들에겐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금 각성하게 되는 계기였을 것이다. 

이 그림의 제목 중에서 러시아어 ‘vsudu’는 원래 장소를 나타내는 ‘어디나’ 라는 뜻보다는 
방향을 나타내는 ‘어디로 가나’에 더 가깝다. 
창살 안에 갇힌 그들의 삶은 또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유형지에선 과연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답하고 있다. 
‘어디로 가나 삶’이라고, 러시아 속담처럼 ‘삶은 계속 된다’고…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문학이 모델’​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가들은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들이다. 
러시아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당대 러시아의 삶 자체였다.” 
러시아 미술의 이런 특성은 문학에 빚진 바 컸다. 
19세기 러시아 문화를 이끈 것은 문학이었다고 이진숙씨의 〈러시아 미술사〉는 말한다. 
“푸시킨·고골·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투르게네프·오스트롭스키 등 
위대한 작가들이 러시아 지성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지던 이 시기에 사회에 대한 진지하고도 

급진적인 논의들이 문학비평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미술은 문학으로부터 ‘이야기 특성’만 빌려온 것이 아니었다. 
미술은 문학과 내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고, 작가와 작품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그런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그림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다. 
20년 세월을 바쳐 1858년에 완성한 이 대작에 이바노프는 작가 고골의 얼굴을 새겼다.

희곡 〈검찰관〉(1836)에서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을 예리하게 풍자했던 고골은 
이후 점차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졌다. 
현실에서도 예술 속에서도 해답을 찾지 못한 고골리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는데, 이바노프는 자신의 그림에서 고골리의 그런 마음 상태를 표현했다.

19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크람스코이는 
이 반란에 가담한 13명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묘사된 혁명가들의 
이상적 공동체를 본보기로 삼아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생활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가 이동파의 모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크람스코이는 레프 톨스토이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어 그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안나 카레니나〉에 감명받아 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를 닮은 〈미지의 여인〉을 그렸다.

이동파의 대미를 장식하는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톨스토이의 소설 주제를 그림으로 옮겼다. 
그의 대표작 〈삶은 어디에나〉(1888)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직접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산다고 말한다.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는 죄수 호송열차에 탄 정치범과 그 고난의 길에 동행한 가족을 보여준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가는 열차가 잠시 멈추어 서 있다. 
젊은 죄수의 아기가 호송열차의 창살 밖으로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준다. 
모이를 먹는 비둘기를 보여 잠시 기쁨의 미소를 짓는 죄수와 아내와 아이는 성가족을 연상시킨다. 
“예수가 고난 속에서 사랑의 승리를 성취했듯 그들은 어디에서나 삶을, 생명을 발견할 것이다. 
비둘기들이 모이를 다 먹기도 전에 기차는 유형지를 향해 덜컹거리며 떠날 것이다. 
죄수를 싣고 떠난 기차는 더욱 단련된 혁명 전사를 싣고 올 것이다.”

 

A Student. 학생. 1881.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87 x 60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간혹 이와 같은 눈빛을 그림에서, 주변에서 만나게 된다.
비어 있는 듯하지만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 꿈이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눈빛이다.
가슴에 들어 가 있는 손은 어쩌면 사정없이 뛰고 있는 심장을 지긋이 누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으로도 구별되는 것이 젊음이다. 하여 속 마음을 쉽게 감출 수가 없다.
돌아보면 세월에 실려 가는 동안 심장은 느려지기 시작했고 눈빛은 조금씩 세월 속에 녹아 들어갔던 것 같다.
그림 속 학생을 보다가 언제쯤 저런 눈빛을 가졌을까... 그 때가 그리워진다.

니콜라이 야로센코 (Nikolai Aleksandrovich Yaroshenko 1846-1898)는 폴타바에서 태어났는데, 
당시는 러시아였지만 폴타바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이다. 
이런 경우 야로센코는 러시아 화가인가, 아니면 우크라이나 출신 화가인가? 
미술사에서는 러시아 화가로 분류하고 있다. 
야로센코의 아버지는 군대의 장교였는데 그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게 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들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보고 듣는 것이 친숙하기 때문이겠지만 하늘이 내려준 재주는 감출 수가 없다. 
야로센코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군인이 되지만 군복무를 하면서도 
열 여덟이 되던 해부터는 야간에 크람스코이의 드로잉학교를 다닌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 (방랑파라고도 한다)를 창립해 러시아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였다. ​

3년간 크람스코이 학교에서 공부를 끝낸 야로센코는 
곧 상트 페테스부르그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아마 정규학생은 아니었고 청강생이나 시간이 허락되는 때만 수업을 듣는 학생의 위치였던 것 같다. 
그가 아카데미에 적을 둔 시간은 7년이었다. 
1875년, 스물 아홉의 야로센코는 이동파의 전시회에 참가한다.  

 

Portrait of Actress Pelageya Strepetova. 1884.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4.

이동파는 젊은 화가들 14명이 모여 만든 단체였다.  
이제까지 귀족 중심의 그림 감상을 민중도 참여하게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러시아 전역을 돌며 그림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876년 야로센코는 이동파의 정식 멤버가 된다.  
그리고 1880년대 초 크람스코이가 이동파를 떠나자 실질적인 이동파의 리더로 자리를 잡았다.  

같은 이동파 멤버였던 레핀이 야로센코에게 붙여준 별명은 ‘이동파의 양심’이었다.  
원칙에 충실하고 성실한 그의 자세를 표현한 별명이었다.  
야로센코 작품의 기본 주제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과
혁명애 우호적인 학생들의 적극적인 삶과 모습이었다,   

풍속화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초상화도 남겼는데 그래도 야로센코의 주요 작품은 풍속화이다.  
야로센코는 ‘이동파의 양심’답게 비인간적인 조건 때문에 파괴된 근로자들의 삶을 그림에 담기도 했는데,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들이 마주친 운명에 대해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적인 책임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Portrait of Philosopher Vladimir Solovyov. 1895.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4.

​상트 페테스부르그에 주로 거주했던 야로센코이지만 서부 유럽을 폭넓게 여행했다.  
원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랄지역과 볼가강 유역, 
크리미아 반도와 코카서스 등 그의 발길은 사방으로 이어졌고 
그는 자연에 대한 공부와 함께 수 많은 풍경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1882년부터는 남부 코카서스 지역의 키슬로보드스크에 별장을 짓고 시간이 나면 이 곳을 찾았다.  
그림을 보다가 잠시 잊을 수 도 있겠지만 야로센코의 원 직업은 군인이다.  
1892년, 마흔 여섯의 야로센코는 소장의 계급장을 달고 군대를 제대한다. 장군이 된 것이다.  
그리고 6년 뒤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러시아 화가 중  
가장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제작했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쉰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고 20년 뒤 키슬로보드스크에 훗날 세계적인 소설가 태어난다. 
바로 알렉산더 솔제니친이었다.  

 

The Fireman. 화부 (火夫). 1878. by Nikolai Yaroshenko. 

Oil on canvas. 124cm x 89cm. Tretyakov Gallery Room 24.

화로에 불을 때고 있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기차는 아니고 혹시 선박의 기관실이 아닐까 싶다.
석탄 가루가 묻은 손과 불을 다루기 위해 봉을 들고 있는 손의 팔뚝에는 
간단치 않았던 그 동안의 노동과 세월이 굵은 핏줄로 남아 머리를 향해 달음질 치고 있다. 
그 핏줄은 가슴을 거쳐 등으로 그리고 허벅지와 종아리를 거쳐 발에 이를 것이다.

온 몸을 써야 하는 노동은 그래서 내 몸의 핏줄을 움직이는 일이다. 
그렇게 때문에 당당하지만 한편으로 고단함으로 남는다.
붉게 물든 얼굴, 이마에 자리를 잡은 주름살과 형형한 눈빛은 
그래도 정직하게 온 몸으로 한 세상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 같다.

 

At the Boulevard. 가로수 길에서. 1887. by Vladimir Makovsky. 
oil on canvas. 68 X 53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겨울 초입, 벤치에 앉은 부부의 모습이 애처롭다.  
옆에 보따리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시골에서 도시로 일을 찾아 올라온 것 같다.  
그러나 생각처럼 일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얼굴에는 좌절이 어렸고 눈은 생기를 잃었다.  
남편은 풀리지 않는 삶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겠지.  
부부가 꿈꾸었던 세상은 벤치 뒤 철책 너머이다.  
손풍금을 꺼내 망향가를 불러 보지만 답답한 심사가사라질까?  
어떻게든 겨울을 넘겨야 한다. 부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에서 
"모든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 
라고 소설의 처음을 연다. 
<가로수 길에서> 부부가 만들어내는 쓸쓸한 느낌의 아우라는 
어떤 연유에서 만들어진 불행일까? 
1861년 허울뿐인 농노해방 이후 러시아 현실은 척박하기 그지 없었다. 
수많은 농노들은 토지를 잃고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의 최하층을 구성한다.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으로 전락한다. 
다른 말로 하면 도시 이주 농노들은 춥고 헐벗고 굶주린 최악의 도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로수 길에서>는 이런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하루종일 보드카에 쩔어 사는 젊은 남자가 무릎에 아코디언을 끼고 벤치에 걸터 앉아 있다. 
온몸에 적당히 퍼진 알코올의 힘과 두 손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적 감흥이 더해져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옆에는 시골서 갓 올라온 듯한 그의 앳된 아내가 갓난 아기를 품에 안고 
일하지 않고 돈도 벌지 못하는 남편 곁에서 근심 어린 얼굴로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다. 
곧 눈보라가 휘몰아 칠텐데 아내의 마음엔 이미 걱정이 폭풍우가 되어 내리친다. 
남편의 대책없는 낙관과 아내의 현실 비관이 교차하는 그림의 느낌이 
발밑에 구르는 가을 낙엽만큼이나 메마르고 우울하다. 

이 그림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으로 새로운 틀을 가지기 전에 
보여지는 체제 미성숙을 풍자적으로 꼬집은 장르화다. 
당시 러시아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회화는 가치가 없다라는 예술적 풍토가 만연했다. 
작가들은 붓필의 힘으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스토리 텔러가 되어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정돈 되지 않은 사회, 불평등한 사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찾을 수 없는 사회. 
어디에 서야 할지를 몰라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결국은 알콜에 의존하게 만드는 병든 사회. 
19세기 말엽 제정 러시아의 모습이다. 

<가로수 길에서>는 그림이 주는 메세지 또한 휼륭하지만 

주제를 표현한 회화적 기법이 아주 뛰어나다. 
유화지만 마치 맑고 투명한 수채화처럼 농도가 가볍고 산뜻하다. 
배경의 초록빛과 노란빛의 자연스런 조화, 회색빛 하늘의 쓸쓸한 늦가을 정취, 
오래된 명화의 한 장면처럼 그림이 주는 아우라가 강렬하다. 
그림답다라는 말이 너무도 어울리는 작품이다. 

블라디미르 예고르비치 마코프스키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46~1920)는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인 '콘스탄틴 예고르비치  마코프스키'와 '니코라이 마코프스키'와 형제이고, 
누이동생인 '알렉산드라 마코프스키'도 화가였다. 
러시아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기반이 되는 사실주의 양식에 영향를 끼쳤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마코프스키의 집안은 대단하다. 
아버지는 미술품 수집가였고 모스크바 예술 학교의 설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마코프스키의 아버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타고난 자질에 
집안 환경이 더해진 탓인지 나중에 모두가 유명한 화가가 된다.

​15세가 되던 해, 마코프스키는 러시아 화가들을 소개할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6년간의 학교 성적도 좋았던지 졸업하기 바로 전 해와 졸업하던 해에는 은메달을 수상했다. 
그 뒤로 3년 정도 더 공부를 했는데 학교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당시 학생들의 진학 경로를 참고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아닌가 싶다.

​1870년 공부를 끝낸 마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방랑파(The Wanderers)의 창립 멤버로 참여한다. 
이후 그는 방랑파 소속으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나중에는 방랑파를 이끄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
방랑파는 그때까지 러시아 미술을 좌지우지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대항해서 만든 모임인데 그 멤버들 중 그 학교 출신이 많다는 것이 흥미롭다.

1870년대,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마코프스키는 
두드러진 러시아 사회의 강자와 약자에 대해 관심이 깊어졌다. 
이것은 훗날까지 그의 작품 주제가 된다. 
압제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세계에 대한 그의 연민이 솔직하게 그림에 담겼다. 
서민들에 대한 황제 군대의 학대와 압박도 그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마코프스키의 가슴에는 세상을 향한 불덩어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Date <만남>, 1883. by Vladimir Makovsky. oil on canvas. 
40 x 31.5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부모로서는 자식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지켜볼 때 아마도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께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는 것이 
삶의 가장 큰 행복이고 목표였던 시절에 자주 듣던 말이다.
물론 지금도 다른 형태의 무한 애정을 쏟으며 자식에게 헌신하는 것이 우리 부모들이다.
솔직히 자식을 통해 느껴지는 사랑만큼 벅차고 흐믓하며 행복한 느낌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짝사랑일지라도 말이다.

열살 남짓해 보이는 그림 속의 남자 아이는
어린 나이에 도시로 나와 팍팍한 노동자로서의 눈물겨운 삶을 시작했나 보다.
엄마의 품속에서 좀더 보호 받아야 할 나이로 보이는데 말이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농촌에서의 삶은 아주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굶기를 밥먹듯 했다고 한다.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모들은 어린 아이들을 

도시로 도시로 보내서 끼니라도 연명하게 했다고 한다 .
엄마는 그렇게 떠난 보낸 아들이 그리워 먼길을 찾아온다. .
얼마나 걸었을까? 엄마의 행색을 보아도 그리 쉬운 여정은 아니었을 거라 짐작이 간다.
걱정, 근심, 애틋함, 반가움... 수많은 감정이 엄마의 얼굴에서 교차한다.

얼른 " 엄마 잘 지냈어? 난 괜찮아" 하며 엄마의 하얀 손을 잡아주고 지친 어깨를 감싸주면 좋으련만
무심한 어린 아들은 엄마가 품고 온 빵 한덩이만을 허겁지겁 베어 물고 있다 .
섭섭함이 일기도 전에 엄마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고단함은 잠시 잊어버린다.
분명 엄마도 배고픔을 참으며 달려왔을 텐데 말이다.
그리곤 가슴 한켠에 올라오는 뜨거움과 애틋함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아들을 쳐다본다 .
이들의 랑데뷰는 표현 못할 무엇이 되어 화폭 전체를 메우고 우리의 가슴도 어루만진다.

마코프스키는 이 가난한 모자의 만남을 보여주며 우리 가슴에 잠자고 있는
기본적이고 순수하지만 쉽게 외면해 버릴 수도 있는 절대적 사랑을 차분히 일깨워 준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
요샌 사랑의 척도를 물질로 가늠하는 몹쓸 풍토가 만연하지만
그래도 진정한 사랑은 관계 속에서 서로를 어루만지고 처지를 이해할 때 진정 느낄수 있다.

 

Portrait of the Artist Illarion Mikhailovich Pryanishikov. 1883. ​by Vladimir Makovsky. 
oil on canvas. 70 X 87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어찌 보면 ‘삐딱선’을 타고 있었던 마코프스키였지만 1878년, 
서른두 살의 나이에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다. 
1880년대 러시아 회화가 다양하게 발전되는 ‘민주화’ 시대가 오면서 그의 걸작들이 탄생한다. 
그림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그에게는 신나는 시절이었다.
서른여섯이 되던 해 모스크바 예술 학교의 교수로 임명된다. 
바실리 페로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자리를 이어 받게 된 것이다.

​1880년대 말부터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조금 더 ‘우울’해졌다. 
좀 더 그의 이야기 톤이 높아졌다고 봐야겠다. 
1894년 마흔 여덟의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는데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일흔까지 학생들을 지도한다. 
또 예술아카데미 예비학교의 교장을 맡게 된다. 그는 화가이자 선생님이었다.

마코프스크의 작품은 끝없는 유머와 냉소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풍자가 특징이다. 
초기 작품은 비교적 점잖은 냉소를 깔고 당시의 관습과 도덕 기준을 묘사했는데 
작품 무대는 주로 작은 러시아의 도시들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힘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동정을 비판했다. 
그의 의식 속에 사회적인 문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밑에 깔고 있는 러시아 작품들은 
나중에 정형화된 이념만 걷어내고 보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1870년대,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마코프스키는 
두드러진 러시아 사회의 강자와 약자에 대해 관심이 깊어졌다. 

이것은 훗날까지 그의 작품 주제가 된다. 
압제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세계에 대한 그의 연민이 솔직하게 그림에 담겼다. 
서민들에 대한 황제 군대의 학대와 압박도 그의 눈을 피해가지 못했다. 
마코프스키의 가슴에는 세상을 향한 불덩어리가 있었던 것 아닐까?

1905년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하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제1혁명이 시작된다.  
혁명을 지켜 본 마코프스키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과 같은 약자 편에 선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다. 
마코프스키는 늘 마음에 두었던 힘없고 핍박 받는 사람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완성되고 난 후 2년 뒤, 일흔 넷의 나이로 마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가슴에 담고 그 때 떠났기 때문에 행복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뒤로 흘렀던 역사를 보면 혁명은 혁명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마코프스키는 사실주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연결시켰다.  

 

Episode of the war of 1812, 1812년 전쟁의 에피소드. 1874. by Illarion Pryanishnikov. 
oil on canvas. 76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러시아 화가 일라리온 프리야니시니코프 (Illarion Mikhailovich Pryanishnikov 1840 ~ 1894 )는
티마쇼보(Timashovo, 오늘날의 Kaluga Oblast ) 마을의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56년부터 1866년까지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에서 
Evgraf Sorokin 과 Sergey Zaryanko의 지도아래 공부했다.

1870년에 일라리온 프리야니시니코프는 "1급 화가" 칭호를 받았다. 
187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는 MSoPSA의 교사로 재직했고 그의 제자로 Konstantin Korovin. 
itold Byalynitsky-Birulya, Mikhail Nesterov, Alexei Stepanov 등이 있다.

일라리온 프리야니시니코프는 주로 모스크바에 살았지만 

그는 종종 미술 작업을 위해 러시아 북부를 방문했다. 
그는 1931년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장식에 참여했다. 
모스크바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그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작품 <1812년 전쟁의 에피소드>는 전쟁에 패배하여 후퇴를 하고 있는 프랑스군 병사들의 삽화다. 
질서도 없이 민간인들과 섞여 무질서하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후퇴하는 광경을 그렸다. 
1805년,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물리치며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을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유럽 제패의 걸림돌인 영국을 견제하기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러시아는 영국에 대한 농산물 수출의 길이 막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대륙 체제에서의 탈퇴를 선언하고 영국과의 통상을 재개했다. 
프랑스에게 그런 러시아는 적이었고, 이에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를 직접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폭염 속에서 러시아로 진군했지만, 러시아군은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꾸준히 프랑스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질병과 탈영으로 크게 감소했지만, 모스크바 점령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러시아군이 아직 완전히 궤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러시아인들은 적에게 모스크바를 내줄 바엔 도시를 완전히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많은 나폴레옹의 참모들이 즉시 모스크바를 빠져나가자고 했지만, 17세기 초반  
폴란드와 카자크인 이후에 나폴레옹은 200년 만에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정복한 정복자로써의 자존심을 잃고 싶지 않아했다. 
하지만 10월이 되자 유독 러시아 특유의 혹한이 일찍 찾아 왔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던 병사들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10월 19일, 전면 철수를 하기로 결정한다. 

11월 초가 되자 겨울은 갑자기 찾아왔다. 기온은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졌고, 
막대한 전리품과 식량을 싣고 가던 말들이 먼저 지치기 시작했다. 
겨울에 전혀 대비가 없었던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전리품과 식량을 버리며 후퇴했다.
러시아군의 산발적 공격과 추운 날씨, 거기다 식량문제까지 겹쳐 프랑스군 진영에서는 
영양실조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말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버렸다. 
재앙이 시작된 것이었다. 11월 중순이 되자 애초 60만 대군은 10만 4천 명으로 줄어 있었고, 
나머지는 사망하거나 탈영했다. 

낙오자들의 일부는 러시아군의 전문 추격부대인 코사크기병에 의해 그야말로 도륙 되었다. 
12월이 되자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기온은 영하 40도 가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던 프랑스 병사들은 칼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들고, 
눈꺼풀이 얼어붙었으며, 손가락은 방아쇠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향해 밀려들어간 60만 명의 병력 중 단 3만 명만이 돌아왔다. 
이로써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영국이 워털루전투에서 승리한 1815년, 
프랑스의 국경은 1790년 이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폴레옹시대의 종말이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실패는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기후는 분명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Evening company (A Party). by Konstantin Makovsky. Date unknown. 
oil on canvas. 144 x 108.5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콘스탄틴 마코브스키(Konstantin Makovsky)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초상화가로 
그의 작품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들, 부르주아들의 삶과 일상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는데, 
마코브스키의 아버지 역시 아마추어 화가로, 후에 유명한 모스크바 회화 예술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다.

이러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마코브스키는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했고, 
어린 시절부터 회화와 조각등을 공부하며 화가로서의 면모를 다져 나갔으며, 
1858년 마코브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게되며 
1862년 그곳에서 골드 메달을 수상하게 되는데, 
하지만 다음해 메달을 학교에 반납했고 졸업장도 거부한 채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학생들과 학교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수없지만 화풍으로 보면 사실주의'에 대항한 것이 아닌가 라는 추측이든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낭만적이고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후 그의 정책이 아카데미측에 받아들여져서 
186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Tretyakov Gallery의 홀 24번 방에 있다. 
조명이 어두운 작은 방에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  광원은 갓 아래에서 상승하는 등유 램프다.  
학생들은 테이블 주위에 모여 사모바르가 끓을 때까지 모여 있다.  
테이블이 설정되어 있고 차를 마실 준비가되어 있지만 아무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는다.  
캔버스의 영웅들은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는 어린 소녀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모임은 지하 모임인 듯하다. 

중앙의 소녀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믿고 그녀의 말에 대해 매우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중의 얼굴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있다.  
어떤 이들은 화자의 말을 열심히 듣고, 다른 사람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연설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녀를 인식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련을 극복하고 이 아늑한 방의 벽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어려움을 감수할 준비가되어 있기 때문에 공통의 목표로 묶여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낄 수 있다.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려준다.  
그의 각 그림은 특정 사건에 대한 일종의 이야기이다.  
마코프스키는 러시아 영혼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모두 알고 백성의 운명에 정통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문제를 반영하는 깊은 사회적 주제를 제기했다.  

 

Mental Arithmetic. In The Public School Of S. Rachinsky, <암산, 라친스키 공립학교에서>, 1895. 
by Nikolai Petrovich Bogdanov-Belsky. oil on canvas. 79 x 107 cm. Tretyakov Gallery Room 24.

이 그림을 그린 러시아의 화가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리스키

(Nikolai Petrovich Bogdanov-Belsky 1868~1945)는 1868년 12월 8일 러시아 스몰렌스크주 

벨스키(Belsky) 마을 머슴의 아들로 출생하고 라신스키 타트예프(Rachinsky Tatev) 마을에서 공부했다.  
1894년~1895년 벨스키 보그다노프(Bogdanov)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1921년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23년 동안 그곳에서 지냈고 
말년에는 독일로 이주하여 1945년 2월 19일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를린에 있는 러시아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리스키 역시 그림 속 소년처럼 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농민 집안 출신이었으나, 
꿈을 가지고 꾸준히 예술 교육을 받았고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러시아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현실을 바탕에 둔 사실주의적 그림이지만  공통분모는 
많은 작품에 아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그의 작업에 큰 영감이었다.

니콜라이 보그다노프-벨스키가 〈말로 숫자 세기 Oral Counting〉에서 묘사한 
러시아 농촌의 초등학교 수학 수업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품에 등장하는 검정색 나비넥타이의 정장 차림에 학구풍의 금테 안경을 낀 담임 선생님은 
모스코바대학 식물학교수를 지낸 S. A. 라친스키(1832~1902)로 유명한 '나로드니키(인문주의자)이다.
라친스키 교수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몇 마디 말도 없이 칠판에 다음과 같은 수학문제를 적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선생님은 느긋하게 칠판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로드니키는 1825년 '데카브리스트혁명'으로 시작되어 1917년 

프로레타리아 혁명에 이르는 사회변혁운동으로 다양한 이념적 변천 과정에서 

'나로드니체스트보(인문주의)'는 1860년대 후반 이후 러시아 지식인사회를 휩쓸었다.

유럽에서 혁명이 좌절되고 영국 자본주의의 잔혹함에 실망한 러시아 인텔리겐차들이 
사회주의적 전통을 가진 러시아의 농촌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러시아의 독특한 농민공동체 
'미르'의 전통을 살려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사회주의로 나가고자 하였다.  
수많은 학생과 인텔리겐차들이 이러한 신념으로 농촌으로 달려가 1873년에서 1875년까지 
'브 나로드(농민 속으로)'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고 혁명을 선동하였다.

농민은 "그래서 당신들은 네게 땅을 줄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 뿐이었고 
농민의 냉대와 고발 그리고 당국의 대규모 검거로 불운한 인사들을 거의 소탕하였고 
'브 나로드 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이상과 열정으로 평화롭게 세상을 바꿀수 있다고 믿었던 인문주의자들은 차거운 현실에 절망하였다.

이시기 S. A. 라친스키 교수는 자신의 영지인 스몰랜스크 현으로 낙향하여 

타데보라는 마을에 세운 자선학교의 교실 풍경을 화폭에 담은 것이 

바로 보그다노프 벨스키의 <암산(Mental Arithmetic)>이다. 
이 학교 출신이었던 보그다노프 벨스키는 훗날 

그가 공부했던 교실과 잊지 못할 스승을 그린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암산에 몰두하는 아이들이 표정을 리얼하게묘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친스키는 독특한 암산법을 개발하여 가르쳤다고 한다. 
훗날 그의 교육법은 러시아 교육의 모범으로 채택되었고 

차이코프스키에게도 크게 감화를 주어 <안탄테칸타빌레>로 알려진 

<현악 4중주 제 1번 라장조 작품 11>은 라친스키에게 헌정된 것이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를 표방한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스키의 작품들 중 최고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평생 그의 작품 소재로 삼았던 농촌아이들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왼쪽에 있는 선생님이 내주신 수학문제를 암산으로 풀어내고 있는 다양한 학생들의 표정을 통해 
인간이 낼 수 있는 여러가지 표정들과 이런 진지함 속에서 나올수 있는 복잡한 심리상태를 
행동으로 나타낸 재미있는 작품이다.

정답이 뭔지 소곤소곤 지들끼지 토론하는 아이들부터,  턱에 손을 얹고 혼자 궁리하는 아이, 
조용히 몰래 자신이 생각한 답을 선생님께 귀속말로 말하고 있는 아이, 
그런 그 아이가 선생님께 뭐라고 하는지 쳐다보고 있는 아이, 
머리를 쥐어짜듯 괴롭게 여러가지 답안을 생각해 내는 아이까지~
다양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사실주의의 생생함을 느끼게 한 작품이다.

 

칠판을 응시하고 있는 어린이들은 고민을 시작했다. 
선생님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말하는 어린이, 그 어린이가 뭐라고 말하나 궁금한 듯 쳐다보는 어린이, 
그리고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귓속)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어린이도 보인다. 
칠판 아래에는 네 명의 어린이가 서 있는데 왼 편의 두 명은 아직 문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고 
오른편의 두 명은 암산에 들어간 듯하다. 
맨 오른쪽에 있는 두 명의 어린이들은 서로 의논을 하고 있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정면에 위치한 두 명의 어린이다. 
마치 신의 계시를 기다리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어린이는 

실마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뒤통수를 부여잡고 있다. 
그리고 맨 앞에 있는 어린이는 거의 해답에 도달한 듯하다.
못 풀어도 괜찮아 '고민 고민하지 마!' 소년들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서 피식, 웃음이 난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4.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25. ‘숲의 화가’ 이반 쉬스킨 작품 전시실

‘숲의 화가’ 이반 쉬스킨 (Ivan Ivanovich Shishkin 1832~1898) 
이반 쉬스킨은 1832년 러시아의 엘라부가에서 태어났다.
1852년부터 1856년까지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1860년 최고 영예의 금메달을 수상하며 학업을 마쳤다.
이 때 그는 최고 성적을 받은 학생에게 주어지는 정부 장학금으로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862년부터 1866년까지 스위스의 취리히와 독일의 뮌헨, 뒤셀도르프, 체코의 프라하 등지에서 공부했다. 

이반 이바노비치 쉬스킨은 귀국 후 모스크바의 예술가 모임에 참여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교육에 반대하는 젊은 화가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이 모임은 1870년 이동파로 발전했다.
이동파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회를 갖는 미술계의 브나로드 운동으로,
쉬스킨은 화가인 크람스코이와 비평가 스타소프 등과 함께 이 운동의 창립 멤버이자 주요 인물이 되었다.

쉬스킨은 러시아 미술에 '숲의 풍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숲의 황제', '고독한 참나무', '늙은 소나무' 등으로 불렀으며,
크람스코이는 '러시아 풍경화의 길을 연 위대한 교사'라고 그를 칭송했다.
쉬스킨이 그린 숲은 자연 그 자체이며, 삶의 원천으로서
러시아 사람들에게 그들의 대지와 숲이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하며 아름다운지를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특히 그는 북 러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 지역의 토속 식물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다양한 숲의 형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쉬스킨은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로 취임해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 결혼을 했는데, 두 아내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부인은 그의 제자였던 화가 F. 바실리예프의 누이 엘레나로 1874년에 죽었고, 
두 번째 아내는 화가 올가 라고다였는데 역시 1881년 병으로 죽었다. 
1870년대 중반에 쉬스킨은 두 명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까지 겪었지만 
작품에서 만큼은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창작활동 초기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그러한 아픔을 겪고 난 한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기도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말년의 20여 년은 창작에만 몰두, 결국 자신의 화실에서 

‘숲속의 왕국 (Forest kingdom)’이라는 작품을 그리다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 속에는 찬란한 햇빛과 생명의 기운이 넘쳐 나며, 
젊고 강인한 러시아의 기질이 숨을 쉬는 듯하다.
시슈킨은 1898년 66세를 일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으로 '숲속의 양봉(Apiary in a Forest, 1876)', '호밀(Rye Fields, 1878)',
'안개 낀 아침(Foggy Mornign, 1885)', '겨울(Winter, 1890)' 등이 있다.

 

Morning in a Pine Forest. 소나무 숲의 아침. 1889.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213  X 139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소나무 숲의 곰 무리를 묘사한 이 그림은 ‘숲의 화가’라고 불리는 
이반 쉬스킨 (Ivan Ivanovich Shishkin)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이반 쉬스킨과 콘스탄틴 사비츠키 (Konstantin Savitsky)의 공동 작품이라고 한다. 

​처음 이 작품이 발표 되었을 때, 사람들은 쉬스킨이 숲을, 
콘스탄틴 사비츠키 (Konstantin Savitsky)가 곰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따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함께 그렸다. 
그러나 훗날 사비츠키는 자신의 서명을 그림에서 지운다.
자신의 선배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전설이 된 쉬스킨에 대한 예의였다고 한다.
사비츠키, 참으로 멋진 사람이다.

쉬시킨은 러시아의 대자연을 잘 그리는 작가다. 
아침 안개가 신령스럽게 피어오르는 송림 숲에서 곰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녹색, 푸른 색, 옅은 노란색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어둠에서 금방 깨어난 듯 
깨끗한 자연의 느낌은 순수 그 자체이며 직접적으로 햇빛은 비치지 않지만 
곧 숲속 잔체를 수놓을 태양빛의 화려함이 느껴지고 아침이 주는 신선함에 
온 몸이 씻기는 듯한 상쾌함을 준다. 

특히 <소나무 숲의 아침>은 쉬시킨의 대표작으로 1913년부터 러시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초콜릿 포장지 그림으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다. 
잘 아시겠지만 초콜릿은 러시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간식이다. 
그런 초콜릿 포장지 그림으로 쓰일 정도면 이 그림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러시아인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면 초콜릿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Pine Forest in Viatka Province 소나무 숲. 1872.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17 X 165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자연은 인간 삶의 축소판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자연 만물은 태어나면 늙어가고, 그러다 생명이 다하면 세상과 이별하고, 
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다. 
그림 속에는 쭉쭉 뻗은 젊은 소나무가 있는 반면 생명이 다한 듯 초록을 잃은 늙은 소나무도 보인다. 
또 폭풍이 시달렸는지 쓰러진 나무가 보이는가 하면 인간에 의해 잘려 나가 밑동만 보이는 나무도 있다. 
마치 우리 인간들 삶의 한 단편처럼 말이다. 
쉬시킨은 그림을 통해 자연을 보여주며 그 안에서 우리 삶을 반추해 보라 이야기한다.

 

Misty Morning. 안개 낀 아침. 188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08 X 145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숲이 깨어나고 있다. 더불어 숲을 따라 흐르는 물도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밤 숲과 강을 이불처럼 덮어 주었던 안개들이 서서히 자리를 뜨고 걷히기 시작한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숲 속의 순간을 고요하게 잡고 있다. 머리가 맑아 지는 순간이다.
시간이 되면 그는 펜화를 그렸는데 모임에 참가한 화가들은 그의 등 뒤에서 숨을 꼴딱거리며 
그의 어깨 너머로 그가 그리는 펜화를 보았다고 한다.

 

Noon in the Neighbourhood of Moscow. 한 낮, 모스크바 근처. 1869. 

oil on canvcas. 111 X 8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장쾌한 풍경이다. 화면의 3분의 2를 하늘이 차지하고 있다. 세상이 빛으로 꽉 찼다.  
벌판을 가로지르는 길은 황금색 벌판 사이로 끝없이 흰 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멀리 뻗어 있는 길만 보면 발을 멈추는, 눈길을 고정시키게 된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부터 ‘환희의 송가 (Song of joy)’ 라는 평을 받았다. 

 

A Walk in the Forest. 숲 속의 산책. 1869. by Ivan Shishkin. 
oil on vanvas. 34 X 43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햇살 좋은 오후, 가족들이 숲으로 산책을 나왔다.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자작나무도 보인다. 
앞서 가던 개는 나무에 앉은 새가 영 거슬리는 모양이다. 
아버지에게 딸이 무언가를 조르는 듯 하다. 
난처해 하는 아버지의 자세를 보면 아마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쉬스킨은 근처 지역의 스승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모스크바 예술학교를 거쳐 
상페테스부르그 예술아카데미 (Academy of Arts)에 입학한다. 
그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이미 예술가 수준을 넘어섰다’ 였다. 대단한 재능을 보였던 모양이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여름 순례 코스인 바라암 섬에 자주 갔었는데, 자연을 완벽하게 재현하고자 했던 그의 정열이 
바라암 섬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 두 점에 녹아 들어 간 결과,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아르힙 쿠인지가 그린 ‘바라암 섬에서’ 라는 작품도 참 좋다.

 

The Field of Wheat. 호밀밭. 1878.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87 X 107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Cutting of wood(Logging). 1867.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22 x 194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In the Forest of Countess Mordvinov's. Petergof. 189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81 X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Forest Landscape. 1889~1890.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Goutweed-grass. Pargolovo. 1884~188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Evening. 187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In the vicinity of Düsseldorf. 1864~186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Pine Forest in Viatka Province. 1872. oil on canvas.  117 X 165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Oak grove in a gray day. 1873.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34 X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A woman under an umbrella on a flowering meadow. 188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Thickets. 188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42 X 93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At the edge of an oak forest. 1882.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Ferns in the forest. Siverskaya. 1883.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Corner of overgrown garden. Goutweed-grass. 1884.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54.3 X 41.7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The Forest Horizons.(Woodland distance). 1884.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12 X 164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Coast of Oak grove of Peter the Great in Sestroretsk. 188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Oakles. 1886.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37 X 62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The Sun lit Pines. 1886.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70.2 X 102. Tretyakov Gallery Room 25 

 

By the seashore. 1889.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Fir forest. (etude). 1899 ~1890.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55 X 40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Forest Landscape. 1889~1890.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Rain in the Oak Forest. 1891.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24 x 203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River Kama near Elabuga. 1895.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106 x 177 cm. Tretyakov Gallery Room 25

 

Bee families. 1882. by Ivan Shishk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5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5. ‘숲의 화가’ 이반 쉬스킨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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