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26. 빅토르 바스네쵸프 작품 전시실

 

빅토르 바스네쵸프 (Viktor Mikhailovieh Vasnetsov 1848~1926)는 오늘날에는 키로프라고 불리는 
밧캬에서 멀리 떨어진 로프얄에서 성직자의 여섯 아이 중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이콘 화가였던 할아버지의 피가 흘러서일까, 
훗날 여섯 아이 중 세 명은 화가가 되었고 세 명은 선생님이 되었다.  ​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열 살이 되던 해 뱟캬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는데
그 곳에 와 있던 폴란드 출신 화가 안드리올리라의 조수로도 일을 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가지 길 앞에서 고민하던 바스네초프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왕립 아카데미에 진학하고 싶었던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 두 점을 
경매에 올렸다고 하는데 이미 상당한 수준의 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
열 아홉이 되던 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그 후 7년간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 된다.  

그 곳에서 훗날 이동파의 리더가 되는 크람스코이를 알게 되고 
레핀과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바스네초프는 은메달을 수상한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생활상을 묘사한 판화 작업도 진행하는데 졸업을 앞 둔 해 
런던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그의 판화가 출품되었고, 동메달을 수상한다.

 

Tretyakov Gallery Room 26. 빅토르 바스네쵸프 작품 전시실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 다음 해, 파리에 있던 레핀이 바스네초프를 부른다. ​
파리로 건너 간 그는 당시 유행하던 인상파와 아카데미즘 기법을 두루 공부하고 ​
그리고 살롱전에도 작품을 출품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바스네초프는 러시아의 민담과 동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다음 해 모스크바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전래 동화와 
전통 민요 빌리나를 삽화로 표현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 완성되었을 때 주변의 평가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사실주의를 원칙으로 했던 이동파들의 입장에서 동화와 신화를 주제로 한 그의 작품은 
이동파의 취지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심지어는 유명한 감정인들마저도 그의 작품 구매를 거절했을 정도였다.

 

자화상 Self-portrait. 1873.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71 × 58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빅토르 바스네쵸프 (Viktor Mikhailovieh Vasnetsov 1848~1926)는
러시아 사실주의 민속화 일러스트, 디자이너 및 그래픽 아티스트이다.

성직자의 아들로 뱌트카(Vyatka, Kirov 키로프) 출생, 1862~1867년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67년 페테르부르크 드로잉 학교에 입학하여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1837~1887)에게 

사사하였으며 1869~1875년 세인트 피터스버그 예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여 높은 실력을 쌓았다.

그는 1878년부터 이동파에 참가하고 러시아 민족 미술의 부흥을 꾀한 

아브람체보(Abramtsevo)파 화가로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작품으로 러시아사와 민화를 테마로 한 '3용사', '야료누시카', 

'회색 늑대를 걸터타는 이반 왕자' 등이 있다.

​주위의 각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바스네초프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
동화나 러시아 민담을 주제로 작품을 그린 화가가 바스네초프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러시아 민속미술에서 사용되던 방법과 기법을 새롭게 가져온 화가는 그가 처음이었다. 
결국 바스네초프는 러시아 회화의 새로운 기법의 창시자가 되었다.

바스네초프는 사바 마몬토프가 후원을 하고 있던 모임에도 적극 참여하는데, 
러시아 전통을 되살리는데 초점을 두고 암브라체보라는 곳에 근거를 둔 화가들 모임이었다. 
한편으로는 키에프에 있는 성 블라디미르 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을 맡게 된다. 
이 작업은 거의 5년이나 걸리는 대 작업이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거대한 도전이었고 멋지게 완성해 낸다.

1885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바스네초프의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된다. 
바스네초프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눈 아가씨 (The snow maiden)’라는 
오페라 작품의 무대 장식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
이후 여러 작품의 무대 디자인을 하게 되는데 러시아 미술에서는 이 방면의 선구자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건축에도 관심을 보여 
4대 미술관 중 하나라고 불리는 트레차코프 미술관을 세우기도 했다.

1912년 니콜라스 2세로부터 귀족의 작위를 받은 바스네초프는 
러시아 혁명 기간 중에는 트레차코프 미술관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
그는 그의 수입의 상당 부분을 미술관으로 돌렸고 미술관은 그 돈으로 작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10월 혁명 이후에는 교회의 종교화를 트레차코프 미술관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는데, 
혁명의 어수선함으로 인해 그림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던 것 아닐까 싶다.

1918년, 새로 창설된 소련의 붉은 군대 제복을 디자인했던 
바스네초프의 창조적인 상상력은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
그러나 그의 운명은 그가 꿈꾸고 있었던 모든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

바스네초프는 일흔 여덟이 던 해 7월, 미하일 네스테로프 (Mikhail Vasilevich Nesterov 1862 - 1942)가 
바스네초프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네스테로프의 화실에서 숨을 거둔다. 
​판화와 유화, 무대 디자인과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멋진 인생이었다.

 

Three Bogatyrs, 1881.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446 X 295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러시아의 전설적인 기사들 세 명을 그렸다.
일리아 무로메츠 (Ilya Muromets)가 중앙에 있고, 도브리냐 니키티치(Dobrynya Nikitich)는 왼쪽에, 
알료샤 포포비치(Alyosha Popovich )는 오른쪽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농부의 아들인 일리아 무로메츠 (Ilya Muromets)는 무롬(Murom) 근처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키예프 시를 해방시키고 혼자서 체르니고프 시를 방어했다.
키예프에서 일리아 무로메츠 (Ilya Muromets)는 블라디미르 왕자에 의해 최고 보가티르(bogatyr 중세 기사)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국토와 국민의 보호에 전념하는 뛰어난 육체적, 영적 힘과 성실함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수많은 영화, 그림, 기념물, 만화 등등에서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도브리냐 니키티치(Dobrynya Nikitich)는 러시아 민족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가티르 (bogatyr) 중 하나다.
이 캐릭터는 키예프의 스뱌토슬라브(Svyatoslav) 대왕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아들 블라디미르(Vladimir) 대왕을 가르친 실제 장군 도브리냐(Dobrynya)를 기반으로 한다 .
도브리냐는 종종 왕실과 가깝고 민감한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전문 궁수, 수영 선수 및 레슬러로 고귀한 전사 계급을 대표한다. 

알료샤 포포비치(Alyosha Popovich )는 러시아 민족 영웅 보가티르 중 막내다.
알료샤 포포비치(Alyosha Popovich )는 "교황의 아들"을 의미하며, 
아버지의 이름은 "Piest Levonty"또는 "대성당 사제 레온티(Leonty)"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이미지 역시 1071년 이교도 봉기에서 살해된 레온티 주교를 본떠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Ivan Tsarevitch Riding the Grey Wolf.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 1889.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249 × 187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2007년 12월 네덜란드 흐로닝겐의 흐로닝어 미술관에서 열린 
‘러시아 민담과 전래동화’전 관람객은 저마다 전시장 입구에 내걸린 안내 포스터에 매료됐다. 
포스터의 바탕 그림은 한 젊은이가 매혹적인 여인과 함께 거구의 회색 늑대 등에 올라 탄 채 
울창하고 어두컴컴한 숲을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

러시아 화가 빅토르 바스네초프가 그린 이 그림은 러시아 전래동화인 

<이반 왕자, 불새, 그리고 회색 늑대>의 한 에피소드로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를 묘사한 것이다.
다소 길지만 동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전래동화에서 유래한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
옛날 옛적에 한 임금님이 세 명의 왕자를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그는 정원에 황금사과나무를 키웠는데 매일 불새가 나타나 
한 개씩 가져가자 왕자들을 시켜 잡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두 형은 게을러서 잡지 못했고 막내 이반은 

잡을 뻔 하다 놓친 채 깃털만을 가져와 왕에게 보여준다. 
왕은 다시 새를 잡아오라고 명령하지만 두 형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용감한 막내는 갈림길 앞의 이정표에 표시된 세 길 중 

‘사람은 살고 말은 죽는 길’을 택해 힘차게 전진한다.

이정표의 예언대로 이반의 말은 거대한 회색 늑대에게 잡혀 먹히지만 
이반을 불쌍히 여긴 늑대가 그를 등에 태워 불새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
늑대는 불새를 가져오되 새장은 건드리지 말라 충고하지만 
이반은 이를 잊고 새장을 건드려 그곳 왕에게 붙잡힌다. 
이에 왕은 아홉제곱 나라 너머 세제곱 왕궁에 가서 

황금 갈기를 한 말을 가져오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한다.

이반을 그곳에 데려다준 늑대는 이번에도 말을 가져오되 
갈기는 만지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그는 다시 이를 어겨 붙잡힌다. 
그곳의 왕이 어여쁜 헬렌 공주를 데려다주면 용서해주겠다고 하자 
이반은 늑대의 도움을 받아 헬렌을 데려온다. 
그러나 헬렌을 사랑하게 된 이반이 슬퍼하자 늑대는 자신이 헬렌으로 변신해 
왕에게 갔다가 도망쳐 나옴으로써 헬렌과 말 모두를 구해낸다.

이반 왕자가 겁에 질린 헬렌 공주를 안고 거대한 회색 늑대 등에 올라타서 탈출을 하고 있다.
​뒤 따라 오는 추적자를 살피기 위해 눈은 커질 대로 커졌지만 손으로는 공주를 굳게 잡고 있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허리에 두른 칼이 허공에 떠 있다. 

이반이 이번에는 불새를 줘야 한다는 생각에 슬퍼하자 늑대는 다시 
불새로 변신했다가 도망쳐 나와 이반은 모든 것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던 이반은 안타깝게도 길에서 쉬던 중 두 형에게 발견돼 죽임을 당한다. 
며칠 뒤 이반의 시신을 발견한 늑대는 생명수를 구해 이반을 소생시키는 한편 이반의 두 형을 죽인다. 
이반은 마침내 왕국에 돌아와 헬렌 공주와 결혼식을 올리고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After Prince Igor`s Battle with the Polovtsy, "Polovtsy와 Igor 왕자의 전투 후" 1880.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167 x 308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앞에서 본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는 바로 이반이 늑대의 도움을 받아 
헬렌 공주를 데리고 숲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또 다른 작품인 ‘갈림길에 선 기사’는 세 갈래 길 앞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고민하고 있는 이반을 묘사한 것이다. 
주변에 널린 해골과 동물의 뼈, 시체를 쪼아 먹기 위해 주변을 맴도는 갈까마귀는 
이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바스네초프는 뱌트카(현 키로프) 주의 벽촌인 로프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자기보다 아래 계층인 농부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열 살 때 뱌트카의 세미나리에 들어간 그는 마침 그곳에 망명 와서 
성당 벽화를 그리던 안드리올리라는 폴란드 화가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19세가 되던 해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신화와 기독교적 주제만을 강요하는 전통 회화 교육에 반기를 들고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스네초프는 그룹의 리더인 이반 크람스코이와 핵심 멤버로 
훗날 최고의 화가가 되는 일리야 레핀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바스네초프는 사실적인 주제보다는 러시아 농촌의 전래동화와 민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76년 레핀의 초대로 파리에 간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의 아카데미즘과 함께 
인상주의 같은 첨단의 미술 사조를 배우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러시아 미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가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를 구상한 것도 파리에서였다. 
이듬해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러시아 전통 민담과 동화를 연구하는 한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져든다.

 

Alionushka, 알료누쉬카. 1881.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221 x 173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슬픔이 쓰나미처럼 밀려들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신을 단도리한다.
그럴 때 바스네쵸프의 <알료누쉬카>를 본다.
그녀의 절망하는 어깨에 내 슬픔을 올리고 몇 번을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 돌덩이가 되어 버린
그녀의 헐벗은 발을 어루만지다 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진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맥없이 흐느끼는 알료누쉬카의 눈물 한방울이 날 정화시킨다.
살다보면.. 말하려니 우습고 삭이자니 무거운 일들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럴 때마다 그림을 보고 혼자만의 카타르시스를 찾는다.

바스네쵸프의 알료누쉬카는 러시아 전래 동화를 바탕으로 한다.
어릴적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 살이를 하던 알료누쉬카는
그림의 연못가에 앉아 혼자서 눈물짓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었다.
하지만 이 연못에는 무시무시한 용이 산다하여 사람들이 꺼리는 곳.
우연히 알료누쉬카는 악마와 싸우는 용을 돕게 되고 그 용은 마법에 걸린 왕자였으며 악마를 물리친 왕자는 

마법에서 벗어나 자신을 도와 준 알료누쉬카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내용의 동화다.
러시아의 콩쥐 팥쥐, 신데렐라, 소공녀 세라 쯤 될까?

이 그림은 눈물짓는 알료누쉬카를 그리고 있다 .
그녀의 모습에는 절망으로 점철되어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알료누쉬카를 둘러싸고 있는 어린 전나무의 싱그러움은 다가올 미래가 밝음을 암시한다.
그림 전체를 덮고 있는 밝은 초록 또한 행복한 미래를 점치는 소재가 될 수 있으며 ,
누추하고 헐벗은 알료누쉬카지만 우아하고 고결해 보이는 자태는 아름다운 훗날을 가늠케 한다.

사실 바스네쵸프는 좌초에 걸려 서서히 침몰하는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을 알료누쉬카를 빌어 표현했다 하는데, 

결국 그림 속의 암시들이 러시아의 찬란 미래를 가늠하게 해 주고 비탄에 빠져 있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 그녀의 자태에 빗대어 러시아의 근본 클라스를 나타내고자 했다 한다.

슬픔 속에 긍정을 품고 있기에 이 그림을 보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고 고통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건가...
그림은 말이 없지만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주는 힘이 있다.
어려울 때 그림 앞에서면 우리의 영혼은 재충전되고 삶을 향한 용기 또한 새로이 얻게 된다.

 

Tsar Ivan The Terrible, 이반 뇌제. 1897.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247 × 132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하늘 아래 절대 권력 이반 뇌제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며 진리며 법인 러시아 황제다. 
그림에도 그런 고집이 그대로 배어 있다. 
황제로 군림하는 내내 자신의 말에 거역하면 그 어떤 이도 단칼에 베어버린 폭군이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이반 뇌제는 딱 그대로 심술맞고 고집스러운 늙은이다. 
바스네쵸프의 이반 뇌제는 워낙 잘 그려졌다 하여 러시아 오페라 등에 폭군을 표현할 때 
거의 이 그림을 바탕으로 의상이며 분장 등을 한다. 
특히 바스네쵸프는 역사 화가이면서도 당대 최고의 무대 미술 작가이기도 하다.

러시아 류리크 왕조의 황제. 흔히 이반 뇌제(雷帝)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백성들이 그를 부른 칭호이자 별명인 그로즈니(Гро́зный)를 의역한 것으로 
'두렵다', '끔찍하다'라는 의미로 현대 영어에서 사용되는 '형편 없는'이란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적을 두렵게 한다'라는 뜻이 있으며, 이반 4세 통치 초기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때려부수는 동시에 자국내 보야르들을 찍어누르던 시절에 주어진 별명이라 '강한' 리더라는 뜻이 강하다.

'뇌제'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로즈니라는 단어 자체는 '무서운', '두려운'이라는 뜻이지만, 
그 어원이 뇌우를 뜻하는 그로자(гроза)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뇌제라고 번역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뇌(雷) 자에는 우뢰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나운 모양새를 나타내는 뜻도 있으므로 
뇌제 자체가 사나운 황제라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끔 '이반 뇌제' 대신 '폭군 이반'이라고 의역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로즈니'라는 표현에는 폭군 이미지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경외심을 일으킨다는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폭군 이반'이라는 표현은 이반 4세의 폭정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완전히 합당한 번역어는 아니다.

이반 4세는 이전까지 공국의 수준에 불과했던 러시아를 처음으로 
국가의 지위에 올려 놓았고 스스로를 공작이 아닌 '모든 러시아인들의 차르' 라는 이름으로 
대관한 최초의 러시아 군주이기도 하다. 
차르라는 명칭 자체는 선군인 이반 3세 때부터 쓰였지만 
그것은 서유럽 국가들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 
군주의 정식 명칭은 '모든 러시아인들의 대공(大公)' 이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는 주변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러시아를 동유럽의 강국으로 만드는 등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하였다.

 

At a Bookseller's. 서점에서. 1876.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서점 앞이 소란스럽다. ​아이들은 천연색으로 묘사된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고 그림을 골라 든 할아버지도 꼼꼼하게 살피는 중이다.
창문 옆에 여러 종류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책보다는 그림을 파는 곳처럼 보인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벽에 그림 한 장 정도 거는 마음의 여유는 가지고 있는 것이겠다.

가게 안쪽에 앉아 손님을 맞고 있는 주인이 보인다. 
비록 허름한 가게이지만 아마 이 동네 유일의 ‘갤러리’일 것이고 ‘문화살롱’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동네 헌 책방을 자주 기웃거리곤 했다.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냄새도 좋았지만 책방 주인 아저씨의 해박함에 늘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자꾸 사라지는 작은 책방들이 안타깝다.

 

New from the Front. 전선으로부터의 소식. 1878.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79.7 X 62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골목길,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벽에 붙은 소식을 보기 위해 잠시 우산도 접었다.
전선으로부터 날아 온 기사를 읽는 사람들의 표정이 침통하다.

나이든 노인들과 여인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들이고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는 
사람들의 생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편한 얼굴일 수는 없다. 
전쟁은 살아 남은 자에게 더 큰 고통이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세상은 여전히 전쟁에 관한 한 진행형이다. 
진정한 평화는 언제쯤 올 수 있는 것일까?
전선에 나갔던 사람들이 어서 돌아 오기를 기대하면서 
벽보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움직일 줄 모르고 있다.

 

Moving House. 이사. 1876.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53 × 67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추운 겨울, 남루한 옷차림의 부부가 길을 나섰다. 
그동안 살던 집에서 또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중이다.
커다란 보퉁이 하나에 모두 담았으니 짐이라고 할 것도 없다.

​주전자를 든 여인의 표정에는 삶의 피곤이 덕지덕지 내려 앉았고 
초점 잃은 눈에는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는 절망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아내를 여기까지 몰고 간 것이 미안했던지 남편은 곁눈으로 아내를 보고 있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남자들은 가장 괴롭다.
하늘은 낮게 내려 앉았고 항구는 얼어 붙었다. 
힘든 고비를 넘는 두 사람에게 어서 봄이 와야 할 것 같다.

 

Samolet. (The Flying Carpet), 하늘을 나는 양탄자. 1880.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165 × 297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하늘을 나는 카펫’도 러시아 민담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보통은 ‘천일야화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후세인 왕자가 타고 다니던 카펫을 연상하기 쉽지만 
러시아 민담에서는 바바야가 여신이 바보 이반에게 내린 신비로운 선물 중 하나다. 
바보 이반은 러시아 민담에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로 순진하지만 행운의 청년으로 
늘 형제들의 질투로 위험에 빠지곤 한다. 
바보 이반은 바바야가가 준 신비의 카펫을 타고 이곳저곳을 여행한다. 
바스네초프는 그런 이반을 그림에서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양탄자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바보 이반이다.
여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세상 이 곳 저 곳을 여행하는 중이다. 
칼을 들고 아래를 내려다 보는 이반의 눈에는 긴장감과 당당함이 담겨 있다.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무모함과는 구별되는 당당함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러시아 철도 회사가 주문한 것이라고 하는데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던 철도와 
하늘을 나는 양탄자의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한창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19세기 말 러시아인의 낙관주의와 도전 정신이 표현돼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반이 타고 있는 양탄자 한 장쯤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다.

 

Portrait of Helena Adrianovny Prahovo. 1894.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A Game of Preference. 1879.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136 X 84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Three Tsarevnas of the Underground Kingdom. 1879~1881.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165.2 X 152.7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The Baptism of Russia. Date unknown.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In a suit buffoon. (Boy in the Jester's Costume). 1882.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Ivan Petrov, a Peasant from Vladimir Province. 1883.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Oak Grove at Abramtsevo. 1883.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Portrait of Natalia Anatolevna Mammoth. 1883. by Viktor Vasnetsov. Tretyakov Gallery Room 26

 

Portrait of sculptor Mark Matveevitch Antokolsky. 1884. by Viktor Vasnetsov. 
Tretyakov Gallery Room 26

 

Portrait of Boris Vasnetsov, son of the artist. 1889.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Sirin and Alkonost The Birds of Joy and Sorrow. ‘시린과 알코노스트-기쁨과 슬픔의 새’, 1896.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한 나무에 기쁨과 슬픔의 새가 나란히 앉아 각자의 소리를 내고 있다.
밝고 환한 얼굴의 기쁨의 새는 부드럽고 여유로워 보이는데 반해 
슬픔의 새는 퀭한 눈으로 안간힘을 다하는 것 같다.
그런 그녀 자신이 더 슬퍼 보인다. 슬픔은 슬픔 자신도 슬프게 하는 모양이다.

​문득 슬픔과 기쁨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처럼 나란히 다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기쁨이 올 수 도 있고 슬픔이 올 수도 있겠다.
무슨 소리를 들을 것인가는 결국 자신의 몫이다.

바스네초프의 그림에 대한 당대 화단의 평가는 냉혹했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같은 비평가는 
“미적인 아름다움은 오로지 물리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데 있는 것이지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바스네초프는 이런 비판에도 자신의 소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모두가 유행을 뒤쫓던 근대화의 문턱에서 그는 오히려 사라져가는 러시아의 전통을 되살려 
문화적,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의 그런 노력은 뒤늦게 인정받아 이제 그는 러시아의 전통을 확립한 대표적인 화가로 기억된다. 
그는 도전 정신으로 가득한 이반 왕자요, 순진무구한 바보 이반이었다.

 

Portrait of the Artist A M Vasnetsov. 1878.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6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6. Viktor Mikhailovieh Vasnetsov 작품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27. 바실리 베레시차긴 작품 전시실

 

러시아의 전쟁 역사화가 바실리 베레시차긴 (Vasily Vasilyevich Vereshchagin 1842-1904)은
러시아 제국의 가장 유명한 전쟁 화가로 해외에 널리 알려진 최초의 러시아 화가이다.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정복과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전장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러일 전쟁에서 취재를 위해 타고 있던 러시아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침몰하면서 사망했다. 
그의 사실주의 화풍으로 인해 많은 작품들이 출판되거나 인쇄나 전시가 금지되었다

바실리 베레시차킨은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주 체레포베츠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 부모의 희망에 따라 군에서 운영하는 유년학교에 들어갔다. 
185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58년에 프리깃함 ‘캄차카’를 타고 서유럽과 이집트를 방문했다. 
1859년에 장교가 되지만, 군을 제대하고 이듬해부터 페테르부르크 미술 학교에서 배운다.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지루한 수업 방식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3학년 때 퇴학을 한다. 
트빌리시에서 장기간 체류한 뒤, 프랑스로 건너 가 피레네 산맥 등을 찾아 파리에서 1년을 보냈다. 
파리에서 에콜 데 보자르에서 배웠고, 장레옹 제롬에게 사사한다. 
화가로서 그는 프랑스 파에 속하는 정밀한 묘사, 날카로운 조형, 
그리고 부드럽고 밝은 다채로운 색상 조합을 특징으로 했다.

1867년,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과 함께 
투르키스탄 원정에 종군하여 사마르칸트 공격 등을 목격한다. 
1868년 카우프만 장군의 후원으로 투르키스탄을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1870년 뮌헨에 머물면서 종군을 하는 동안 그려 모은 스케치와 연구를 
그림으로 완성시키는 작업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관심사는 전투 장면보다는 
오히려 중앙아시아의 이국적인 건축과 풍속이었다. 
1874년에는 인도를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영국에 식민지 지배를 받는 인도의 실태를 보고 듣는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사령관의 조치로 부관의 지위와 
군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를 부여받고 시푸카 고개 전투를 목격한다. 
플레벤 공략전에서는 군인으로 복무한 그의 형제가 죽고, 자신도 중상을 당한다. 
이 비참한 전투는 그의 세계관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의 비참함을 
현지에서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전쟁을 그린 그의 그림에는 사망자, 부상자, 약탈, 
야전병원, 눈에 덮힌 병사의 시신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테마는 평소 그림이나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민주주의 사상은 이동파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영웅 예찬이었던 전쟁 회화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었다. 

연속작이 많아 투르키스탄 원정 (1871년 ~ 18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 ~ 1878년, 1880년 이후), 러시아 원정을 테마로 그린 것이 있는데, 
특히 후자에서는 보로디노 전투를 그린 대표작 ‘보로디노의 나폴레옹’이 탄생했다. 
그의 그림은 그 주제로 인해 선전 선동(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다른 대표작 ‘전쟁의 결말’은 두개골의 산을 그린 것이지만 1980년에 출판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쓰여진 책 표지에 ‘1916년 서부 아르메니아에서 터키에 의한 잔학 행위’라는 
캡션을 달아 게재된 후에 베레샤긴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188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비엔나와 베를린 등 긴 여행을 떠난다. 
온천에 체류 중인 바트엠스는 성 알렉 교회의 제단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렸다. 
1884년에는 두 번째 인도 여행을 떠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도 발길을 뻗었다.

팔레스타인 성지를 방문한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일련의 작품으로, 지금까지의 
서구의 유럽화된 그리스도 상이 아니라 현지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풍속과 풍경을 그려 넣은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중동의 인간상으로 묘사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단 정교회의 아이콘은 서구의 회화와는 달리 원래 중동의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
그의 발길은 고향 러시아, 동유럽은 물론, 심지어 미국까지 가게 된다. 
미국에서 미국-스페인 전쟁의 전장이 되었던 쿠바, 필리핀을 방문한다. 
또한 1903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친숙 인물상 등을 남겼다.

1904년에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러시아 조차지 뤼순으로 갔다. 
여기에서도 종군한 그는 여순 함대사령관 스테판 마카로프에 초대를 받아 
기함인 〈페트로파블롭스크〉에 탑승하여, 전쟁의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4월 13일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일본군이 부설한 기뢰에 닿아 폭발하였고, 
불과 몇 분 만에 화약고가 폭발했기 때문에 
마카로프 제독과 베레시차킨을 비롯한 승무원 대부분이 전사했다. 

베레시차킨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던 마카로프의 회의의 모습을 그린 스케치가
파도에 떠다니다 무사히 회수되었다.
그의 죽음은 적국 일본에서도 보도되어 
사회주의자였던 고토쿠 슈스이와 나카자토 카이자 등이 추모의 글을 남겼다.

이동전파에 속하는 화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학교를 나온 후 
1863년 파리로 나가 J.L.제롬에게 사사하였다. 
주로 파리 · 뮌헨 등지에서 살았으며 유럽 각지와 아시아를 여행한, 
당시로는 저명한 러시아의 예술가였다. 
투르케스탄 전쟁(1867∼1868) 및 러 · 터 전쟁(1877∼1878) 때에는 보도화가로 종군하여 
톨스토이풍의 평화주의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전쟁을 묘사하였다.

캅카스 · 인도 · 팔레스티나 여행에서의 풍경화와 풍속화에서도 같은 작풍을 찾아볼 수 있으며, 
1890년대에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입의 연작(聯作)을 제작하였다.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비전론(非戰論)을 강력히 호소하였으며, 
러일전쟁 때 여순항(旅順港) 밖에서 전사하였다. 
대표작에 '전쟁의 화신(Apotheosis of War)' 등이 있다. 
전쟁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다닌 후 파리에서 공부했다. 
평생을 여행하는 데 바친 그는 러시아 군대와 함께 카프카스와 크림 반도, 도나우 강 연안 및 
투르키스탄을 돌아다니며 현장에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부상당하고 이때 발칸 반도에서 본 것을 그린 전쟁화들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그림을 그렸고 1885~1903에는 러시아 · 미국 · 일본 등지를 여행했다. 
그는 러일전쟁 때 중국 뤼순 앞바다에 떠 있던 S. O. 마카로프 제독의 기함에서 죽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의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대단한 인기를 누려, 수없이 복제되었다. 
당시의 평화주의자와 인도주의자들은 해골 더미가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는 그의 그림 
〈전쟁의 화신 Apotheosis of War〉 (1871, 모스크바 트레탸코프 국립미술관)을 그들의 운동에 이용했다.
그의 작품들은 모스크바의 트레탸코프 국립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러시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The Apotheosis of War, 전쟁 예찬. 1871.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127 X 197cm. Tretyakov Gallery Room 27
 
베레시차킨의 투르키스탄 전쟁 연작의 시리즈의 마지막 그림이자
그의 반전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베레시차킨은 이 그림의 주석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정복자에게 바친다"라고
명시하여 전쟁의 비극와 무의미를 강조하였다.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쌓아 놓은 해골들이 작은 산을 이루었다.  
까마귀들은 하늘에서, 해골 위에서 햇빛 아래 탈색되고 부서져가는 해골들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그리고 몸은 다 어디에 가고 머리만 모여 있는 것일까? 

전쟁이 끝나고 미처 치우지 못한 주검들은 푸른 하늘 밑에서 풍화되어 가고 있다.  
너무 맑은 날이어서, 너무 밝은 때여서 더 처참하다. 
전쟁은 살아 있는 영(靈)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죽은 혼(魂)도 비참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베레시차킨은 러시아의 체레포베츠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땅을 소유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집안은 부유했고 지주나 귀족의 아이들이 
장교가 되거나 외교관이 되던 당시의 풍습대로 그의 부모도 그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알렉산더 예비 사관학교에 그를 입학시킨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정식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베레시차킨은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전쟁이라는 행위는 모든 국가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중요한 일이지만, 
러시아에서는 특히 수없이 반복된 침탈과 전쟁의 역사로 
전쟁이 국민모두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시대는 표트르 대제를 지나고 지나, 19세기 근대의 문턱까지 달려온 상태였다. 
그 사이 러시아의 국력과 병력수준은 획기적으로 높아졌지만, 
그 못지 않게 숱한 전쟁을 치러야했다.

그 전쟁은 때때론 '영웅적인 조국방어 전쟁'이었으며,  
때때론 '영웅적인 조국확장 전쟁'이었다. 
그러나 모든 전쟁에서 격렬한 피가 흘렀다는 것은  어느 전쟁 할 것 없이  공통적 분모였고, 
여기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것은 징집된 병사들이었다. 

러일전쟁을 지휘한 쿠로파트킨 장군의 회고록에서 나오듯이, (이 회고록은 국내에도 번역, 발간되어 있다.) 
18~19세기 러시아 군대의 숫자는 약 100만에서 150만을 헤아렸으며 
이들 상당수는 서유럽, 그리고 중앙의 코카서스 산맥 일대, 남측 터키국경 등과 같이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군대의 운용과 전쟁은 국가적인 부채 증가, 남성 인력의 징집으로 인한 
농업생산력 저하, 농촌피폐, 농촌의 식량생산 저하로 인한 식량부족의 만연, 기아발생 등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농민이 일을 아무리한다해도 대부분을 세금으로 빼앗기고, 
징집되어 군대로 간 아들들은 시체로 돌아오고......
이것이 당시 러시아 인구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민을 고통의 수렁 속에 빠뜨린 원인이었다.

이러한 침략전쟁과, 비효율적인 전쟁 운용방식에 대해 비난을 제기한 화가가 
바로 바실리 베레시차킨이었다. 
베레시차킨의 작품을 보자면, 거의 모든 작품이 전쟁 및 국경지대와 관련된 그림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전쟁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중요한 주제였다.

베레시차킨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1842년), 군사적 문화를 많이 접할수 있었던 어릴적
환경에 의해 이미 10대에 러시아 해군학교를 다녔고, 투르키스탄 전쟁, 발칸전쟁, 
러시아-터키 전쟁(투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몇 번의 가벼운 부상, 한번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작품세계는 반전(反戰)의 주제가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이 <전쟁예찬>이라는 그림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쌓여 있는 해골에는 일자(一)로 가로로 긴 도끼자국으로 보이는 상흔이 남아 있다. 
이미 전투 중에 도끼로 살해당한 시신을 왜 또다시 목을 잘라 그 목을 전시하듯 높게 쌓았는가.... 
일찍이 인간이 해 왔던 전쟁 속 '승리의 자랑'으로 으레 행해진 적군의 목베기와
대상자가 살았든 죽었든 그것을 자랑하게끔 만드는 
인간과 전쟁의 잔인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된다.

이 셀 수 없이 높게 쌓인 해골의 수, 그것을 파먹었을 법한 통통하게 살이 오른 까마귀들,  
전쟁으로 파괴되었을 집(우측 후편)과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푸르고 푸른 하늘....
이러한 장치들이 기묘하게 얽혀들어가면서 이 그림은 "전쟁을 하지 말자"는 몇백 장의 포스터와 
몇만 글자의 연설보다 전쟁을 하면 안되겠구나...라는 감성에 젖게 만든다. 
이처럼 베레시차킨은 전쟁에 대해 극구 반대하는 의사를 표현하였으며, 실제로도 어러한 말을 남겼다. 
"나는 화가로써 전력을 다해 전쟁을 비난한다. 나의 비난이 효과적인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정면으로 맞서 가차없이 비난한다."
때문에 베레시차킨은 위의 <전쟁예찬> 말고도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는
<시프카에서 모두 평온하다>, <치명상>, <전리품을 보이다> 등의 그림을 다수 남겼다. 
한편으로는, 전쟁화의 주인공을 항상 말단에 있는 병사로 내세움으로써 
민중화가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적국의 침략에 맞서 단호히 싸우는 러시아 병사와 민중, 
곤혹스러워하는 적군에 대해서도 그림으로 표현하여
합당한 전쟁 수행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그린 나폴레옹 전쟁 당시를 묘사한 그림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나폴레옹 전쟁 관련한
그림 중에 가장 극적이라고 평가받으며, 엄청나게 많은 화가들이 그의 그림을 모사하게된다.

자국의 침략 전쟁에 대해 비난하고, 적국의 침략에 대한 방어 전쟁에 대해 찬사를 높힌 이 화가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사령관 마카로프 제독이 타고 있던 러시아 해군 기함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호가 침몰할 때 배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전쟁을 하기는 쉬워도, 전쟁을 알기는 어렵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At  the City Wall, 'Let them enter'. 도시 성벽에서 ‘안으로 진격’. 1871.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95 X 160.5cm, Tretyakov Gallery Room 27

 

도시를 둘러 싸고 있는 성벽의 한 구석이 허물어졌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그 틈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맨 앞 줄의 병사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적의 공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성급하게 덤비는 병사를 손으로 막는 병사는 분위기로 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처럼 보이다.

벽 너머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짐작을 하고 있겠지만 
그 위험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은 애써 피하고 싶겠다. 
뒤쪽에 줄을 지어 계속 행진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전쟁터에서의 인간의 목숨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베레시차킨은 학교 재학 시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고 
때문에 앞으로 잘 나가는 장교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순간에 길을 바꾸기도 한다.  
군사 미술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사관학교를 다니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야간반에서 그림을 배운다.

열 여덟 살 되던 해 베레시차킨은 우등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종일반에 입학한다. 
장교가 되는 길을 걷어 차고 화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Mortally Wounded, 치명상. 1873.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요새 공격 중 치명상을 입고 후퇴하는 러시아병사. 
그의 주변에 이미 많은 병사가 쓰러져 있다.

 

Unawares attack. 1871. Turkestan series. military-and-soldiers, battles-and-wars, mountains-and-cliffs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82 x 206.7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터키 기병의 기습에 맞서, 소수이나마 대열 정연히 중대를 편성한 러시아 육군의 용맹을 보여준다.
바실리 베레시차킨은 러시아의 체레포베츠라는 곳에서 태어나 여덟 살이 되던 해 
알렉산더 예비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군사 미술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사관학교를 다니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야간반에서 그림을 배우고, 열 여덟 살 되던 해 베레시차킨은 우등으로 사관학교를 졸업 직후 
미술 아카데미 종일반에 입학하여 그림을 배우다가 파리로 유학하여 
장 제롬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되였으나 배우고자 했던 화법과는 맞지 않아 
새로운 주제를 찾아 코카서스를 여행하면서 그 곳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스케치하며 공부했다.

1867년, 스물 다섯 나이의 그는 투르키스탄에 있는 러시아 군대에 지원하여 
사마르칸트 방어전에서 영웅적인 활동으로 그는 러시아 최고의 훈장을 받게 되었고, 
처음 전쟁에 참여 한 10년 뒤에 전쟁의 참상은 꼼꼼하게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러시아-터키 전쟁에 다시 참여하면서 그의 작품에는 전쟁의 희생자들이 등장하는데, 
전쟁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병사들이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무능하고 무모한 러시아 장군들이 묘사되었다.

러일 전쟁 중 그는 러시아 기함 페테로 파블로프스키호에 타고 있었는데, 
전쟁을 증오했지만 두 번이나 전쟁에 참여하여 일본군이 쏜 어뢰에 의해 
이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 앉아 예순 둘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Battlefield at the Shipka Pass. 시프카 전투에서의 소코블레프 (러시아군 장성). 1878.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자료를 보니 시프카 고개는 불가리아의 발칸산맥을 넘는 고개로 
러시아와 터키 전쟁 당시 격전지였다고 한다. 
전투 중에 죽은 병사들의 모습이 처참하다. 
푸른 색 옷과 밝은 색 옷을 입을 주검들이 하늘을 향해, 
더러는 땅을 향해 얼굴을 눈 속에 파 묻고 있다.

살아 남은 병사들은 환성을 지르고 있지만 눈 쌓인 고개에서 

젊은 나이를 마감한 혼들은 아득한 산 너머를 향하고 있겠지... 
혼들이 넘어 가는 산을 올려다 보았다. 산 전체가 흘러 내릴 것 같은 느낌이다. 

러시아를 떠난 후 베레시차킨은 인도 여행과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여행한다. 
인도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인들에 대한 
인도인들의 저항과 건축물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했다. 
팔레스타인 여행을 통해 제작된 신약 성경 관련 작품은 그 표현이 가톨릭교회와 문제를 일으켜 
결국 비엔나에서 전시회를 할 때는 광신도들에 의해 작품 두 점이 염산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난다.

 

Defeated, Servise For The Dead, 망자를 위한 의식. 1878-79.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망자를 위해 사제는 향을 피워 흔들었다. 
군인이 되기 전에 각자의 삶이 있었겠지만 세상을 떠나는 순간은 모두 군인이었다.  
편안한 어딘가에 앉아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이 사람들을 전장으로 몰아낸
그 사람들은 이 광경을, 이 느낌을 알 수 있을까? 하늘은 온통 잿빛이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내리는 빛은 망자들이 하늘로 오르는 길처럼 보인다.

1890년이 넘어서라야 베레시차킨은 러시아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 정착한 그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제작하는데 여전히 냉정한 사실주의 기법이 사용되었지만 
초기에 비해 훨씬 낭만적이고 애국심이 담긴 작품이었다. 
그의 마지막 길은 화가가 아니라 군인의 모습이었다.

러일 전쟁 중 그는 러시아 기함 페테로 파블로프스키호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쏜 어뢰에 의해 이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 앉았다. 예순 둘의 나이였다. 
전쟁을 증오했지만 두 번이나 전쟁에 참여했고 
그리고 전투함과 생을 마감한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의 몸 속에는 화가의 피가 더 강했을까? 아니면 군인의 피가 더 진했을까?

 

A Resting Place of Prisoners. 죄수들의 휴식 장소. 1878~1879.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눈보라가 치는 길, 전쟁에서 포로가 된 죄수들이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가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들판에서 그냥 주저 앉아 쉬는 것이 전부이다.  
불어오는 바람은 쌓인 눈을 하늘로 올리고 있다.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상황, 모두가 팔에 얼굴을 파 묻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휴식처럼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고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고장이 나서 눈 속에 버려져 있는 바퀴가 마치 역사를 움직이는 바퀴처럼 보인다. 
전쟁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주저 앉게 한다. 
러시아 - 터키 전쟁을 주제로 한 베레시차킨의 작품들에는 
무능하고 무모한 러시아 장군들이 묘사되었다.

결국 러시아 정부와 갈등이 생겼고 알렉산더 2세는 그를 가리켜 
‘인간 쓰레기가 아니면 미친 놈’이라고 했다. 
그는 다시 러시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의 그의 작품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군 관련 위정자들은 병사들과 학생들이 그의 작품 전시회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Road of the War Prisoners, 1878~1879. 
oil on canvas. 181.6 x 280.7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눈 쌓인 길 위로 주검들이 흩어져 있다. 그 사이로 주인을 잃어버린 짐들이 보인다. 
크게 돌아 언덕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있는 이 길은 아마 전쟁 포로들이 끌려 갔던 길일 것이다.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 이 혹한의 길을 무사히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낙오된 포로들은 버려졌거나 살해되었을 수도 있다.

포로로 끌려 가는 길은 그래도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길이었지만, 
길 위에 주검들은 희망의 끝자락도 잡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다. 
길은 문명을 가져 오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야만도 함께 오는 곳이다. 
길 옆 전봇대의 전선 위 까마귀 떼는 마치 진혼곡의 음표처럼 걸려 있다.

 

They celebrate, 1872,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195.5cm x 257cm. Tretyakov Gallery Room 27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그 결과를 알리는 모양이다. 
결과만 자신에게 유리하게 되었다면 과정은 어떻게 되었든 상관 없는 것이 전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고 했다.

사람들 사이로 우뚝 솟은 장대에 걸린 것이 보인다. 사람의 머리이다. 
적의 머리를 베어 전리품처럼 세워 놓았다. 
제3자가 보기에는 야만이지만 당사자에게는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승리의 상징이다.

파리에 도착한 베레시차킨은 장 제롬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그러나 스승인 제롬의 가르침 역시 그가 배우고자 했던 화법과는 맞지 않았다. 
새로운 주제를 찾아 코카서스를 여행하면서 그 곳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스케치하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1867년, 스물 다섯 나이의 그는 투르키스탄에 있는 러시아 군대에 지원한다. 
그리고 사마르칸트 방어전에서 영웅적인 활동으로 그는 러시아 최고의 훈장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참전했던 내용을 그림으로 제작한다. 

 

Moti Masjid (Pearl Mosque), Agra, 1874~1876.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작품의 무대는 인도 북부 아그라에 있는 아그라 요새의 진주 모스크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모스크의 강 건너에는 그 유명한 타지마할이 있다.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흰 대리석이 눈부시다. 건물의 그림자마저도 푸른색으로 담았다. 
계단 아래에서 건물과 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람도 그 아름다움에 취한 모습이다.

전쟁을 묘사한 베레시차킨의 작품은 그에게 상당한 명예와 함께 그의 이름이 러시아 상류 사회에 
알려지는 기회를 주었지만 한 편으로는 러시아를 떠날 수 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참상과 러시아 병사들의 비극적인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몇 몇 작품은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2년 간 러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야만성과 병사들의 죽음, 그리고 모든 전쟁의 파국적인 결과에 대해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고 철학적인 고민이 그의 작품에 담기기 시작했다.

 

Present trophies​, 1872.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The Doors Of Timur, 1872.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Sale Of The Child-Slave, 1872,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Evening on the lake. One of the pavilions on the marble promenade in Radzhnagar 
(Principality of Udaipur), 1874.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Radzhnagar. Marble, adorned with bas-reliefs quay on the lake in Udaipur, 1874.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Afghan, 1867~1868.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A Garden gate in Chuguchak,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Ruins of a Theater in Chuguchak,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Main Street in Samarkand, from the height of the citadel in the early morning,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Chorus of Dervishes, begging, Tashkent. 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Beggars In Samarkand, 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Camel in the courtyard of caravanserai,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Shir Dor madrasah in Registan Square in Samarkand,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Kalmyk chapel,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Kalmyk-lama,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Kyrgyz tent on the Chu River, 1869~1870.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retyakov Gallery Room 27

 

The Rich Kirghiz Hunter With A Falcon, 1871.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About the war, 1873,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58.5 x 74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Uzbek Woman in Tashkent, 1873.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Hemis Monastery in Ladakh, 1875.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Taj Mahal Mausoleum  in Agra, 1874~1876,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46.5 x 61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Vehicle of rich people in Delhi, 1875.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The rider in Jaipur, 1780. 1879.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panel. 39 x 26.5 cm. Tretyakov Gallery Room 27

 

Moslem Servant, 1882~1883.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The porch of the church of John the Baptist in Tolchkovo. Yaroslavl, 1888.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Buddhist temple in Darjeeling. Sikkim, 1874.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Glacier On A Road From Kashmir In Ladakh, 1875.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Fakirs, 1874~1876.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Mounted Warrior In Jaipur, 1881, by Vasily Vereshchag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7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7. Vasily Vereshchagin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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