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he Rooks Have Come Back.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 1871.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62 × 48.5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 (Aleksei Kon Dratevich Savrasov 1849~1860)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하고 사망했다.
이동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서 많은 풍경화가를 배출했다.
대표작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1871)는 러시아 풍경화의 걸작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미를 서정적으로 파악하연서 
동시에 전혀 새로운 뜻을 더해 주고 있다는 데에 특색이 있다.

러시아 자연의 풍부한 표정을 최초로 주목한 것은 이동파 화가들이었다. 
이전에 아카데미 풍의 풍경화는 아름다운 풍경, 곧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아름답고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이란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남국의 이상향을 연상시키는 그림, 
구체적으로는 이탈리아 같은 지중해 지방을 그린 그림이었다.

추운 겨울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러시아의 자연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함양 하고자 했던 이동파는 풍경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이동파 풍경화가들은 조국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그려질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시골 모습을 고스란이 담아낸 19세기 대표적인 풍경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는 심오하고 가치 있는 삶을 화폭에 담아냈다. 
1871년 딸의 죽음 이후 예술활동의 위기가 찾아왔다. 
결국 알콜중독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지생활을 하다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는 러시아 무드 풍경화를 처음 연 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의 봄 그림이다. 
한국의 봄은 알록달록 꽃피고  새 우는 그런 환한 햇살 속의 자연을 말하는 거지만 러시아의 봄은 다르다. 
그림에서처럼 눈이 반쯤 녹아 곳곳에 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세상 만물이 겨울을 털어내고 새롭게 약동하듯 기지개를 편다. 
까마귀가 날아 오는 풍경에도 봄의 온기를 받아 만물이 살아나는 느낌, 
꿈틀대는 공기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러시아 봄의 시작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산까마귀 떼가 돌아오다>는 사브라소프의 최고의 작품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어느 흐린 날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자작나무 위로 어수선하게 산까마귀 떼가 날아든다. 
언덕 아래에는 러시아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조교회가 눈에 띈다. 
화면은 언덕 능선에서 가로로 잘려 있어
원근법적 깊이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 작은 신의 집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만큼이나 소박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의 위력을 느끼게 하는 장관도 아니고, 
물레방앗간과 오리들이 있는 아기자기한 전원풍경도 아니다. 
그저 문을 열고 나가면 불 수 있는 러시아 시골마을 어귀의 평범한 풍경이다.  
하지만 사브라소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산까마귀떼가 둥지로 돌아오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을 통해 깨닫게 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자연의 미묘한 변화다.  
무거운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얼굴을 내밀고 봄은 눈을 조금씩 녹이면서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다 

러시아의 봄 날씨는 여자보다도 변덕스럽고 흐린날이 많다고 한다.  
러시아인의 기억 속에서 산까마귀의 부산한 날갯짓 소리는 봄이 다가오는 가슴 설레는 전조다.  
풍경은 이런 기억과 주관적인 느낌속에서 재해석 되어 표현되고 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무드 풍경화(mood landscape)'라 일컬어지는 흐름의 시조로 여긴다.  
이런 서정적인 그림은 관람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낯선 풍경이지만 친숙한 감정을 통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서정성 있는 풍경화였고, 이 그림으로 사브라소프는 유명해졌다.   
1870년대에 사브라소프는 정부 지원의 아카데미 미술과 결별하고 Peredvizhniki(이동파) 운동에 합류했다. 
그림을 살펴보면 기념비적 작품이라기에는 평범해 보인다.  
이제 날이 조금 풀렸는지 눈이 녹는 언덕과 그 위에 자작나무,  
그리고 그 나무에 어수선하게 몰려드는 까마귀들이 먼저 보인다.  


또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러시아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목조건물의 교회가 등장한다.  
들판에서 언덕을 배경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구도가 아니라 원근법적 깊이를 느끼기도 힘든 구도다. 
눈이 부시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절경도 아니고 자연의 위력을 보여주는 장관도 아니고  
러시아의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풍경에 
트레티아코프 미술관을 찾는 러시아 사람들이 감탄하는 이유가 뭘까? 

사브라소프가 이 단순한 풍경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작은 변화다.  
겨우내 먹이를 찾아 떠났던 까마귀들이 둥지를 찾아 돌아와서 날갯짓을 하고 있다.  
겨우내 하늘을 차지했던 무거운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그 기운을 받아서인지 자작나무 주변에는 눈들이 녹아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자작나무 가지들은 혹한의 강풍을 이겨내고 돌아온 까마귀들을 맞이하며 
다시 잎사귀를 튀울 준비가 되어 있나 보다.  
왼쪽에 있는 어느 집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고향에 돌아온 까마귀는 그 동안 겨울바람에 부서진 집을 수리하려고 하는지 
땅에 떨어진 자작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교회의 종탑에서는 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듯하고 집안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도  
내일부터는 봄 농사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시기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브라소프가 그린 비슷한 내용의 그림은 이후에도 계속 제작되었다.

 

Country Road, 1873. 시골길.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70 cm X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1873년에 그려진 <시골길>이란 작품도 러시아 풍경화의 백미다.  
하늘과 몇그루의 나무가 있는 휘어진 시골 길.  
일렬로 늘어선 나무는 화면의 중간 부분부터 시작해 우리의 시선을 더 먼 공간으로 유도한다.  
눈 앞에는 비가 지나간 뒤의 온통 질퍽거리는 길이다.  
채 얼굴을 내밀지 못한 태양은 구름 속에서 그 황금빛 파장을 길에 적셔 줄 뿐이다.  
깊이 파인 마차 바퀴자국으로 누군가 방금 지나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진흙탕 속에 발이 빠져서 한 걸음도 움직이기가 힘들고 
옷은 흙탕물이 튀어 금방 더러워질 것이다.  
현실속에서는 쉽게 걸을 수 없는 길을 시각적으로 걷는 것은
힘들었던 보행마저도 따뜻한 기억으로 재생시킬 것이다.  
몇 그루의 나무와 비에 젖은 질척거리는 길 하늘에 떠 있는 구름으로  
러시아 시골의 기억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웅대한 장관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을법한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런데 사브라소프가 걸어간 마지막 길은 고통스러운 진흙탕 길이었다.  
1870년대에서 1880년대에 걸쳐 매우 생산적인 작품 활동을 보여주었던 그는 알콜중독에 빠졌다 
그를 이 병에서 구해 내려고 친지들과 친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구제불능의 알콜 중독자가 되어 거렁뱅이처럼 떠돌아다니다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에는 그가 가르쳤던 미술학교의 문지기와 파벨 트레티야코프만이 참석했다.

 

Losiny Ostrov in Sokolniky, 1869,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62 cm X 88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Landscape with Oaks, circa 1855.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66.5 cm X 77.5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Village Bulgarians. 1872.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View in the Neighborhood of Oranienbaum. 오라니엔바움 이웃의 전경. 1854.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View of the Kremlin from the Krymsky Bridge in Inclement Weather. 1851.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혹독한 날씨에 크림스키 다리에서 바라본 크렘린 전경. 67 cm X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Spring is coming. 1874.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Autumn. 1871. oil on canvas. by Aleksei Savrasov. Tretyakov Gallery Room 18.

 

Yard. Winter, 겨울의 뜰. 1875,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53 cm X  43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A Provincial Cottage. Spring, 1878,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Rye. 1881.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218-10-5. Country Landscape, 1867. by Aleksei Savras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Volga lagoons, 볼가 라군. 1870. by Fyodor Vasiliev. oil on canvas. 71.8 x 134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표도르 바실리예프(Fyodor Alexandrovich Vasilyev 1850–1873)는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 4년 후 부모가 결혼했지만 그는 항상 사생아로 여겨졌다 한다.  
바실리예프는 12살부터 우편배달, 사본 필사, 미술품 재생의 일로 돈을 벌었고, 부친의 사후에는 가족을 부양했다.

1863년(13세때) 바실리예프는 미술학교의 야간학생으로 다니며, 그를 돌봐준 여러 화가를 만났다.  
1866년 유명한 풍경화가 쉬시킨이 그의 누나와 사랑에 빠졌고, 
틈틈이 바실리예프에게 풍경화를 가르쳤고, 후에는 크람스코이, 트레치코프 등에게 소개도 해 주었다.  
그러나 바실리예프가 자신의 그림과 강한 경쟁상대가 되자 쉬쉬킨은 집행부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이 상을 받도록 했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표도르 바실리예프는 가난한 페테르부르크 우편 관리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돈이 부족하여 12 세의 청년이 우체국에서 일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15살 때 예술진흥협회의 드로잉 스쿨에 입학하여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등 저명한 예술가들을 만났다. 
크람스코이는 표도르 바실리예프보다 나이가 13살이 더 많았지만 나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우 가까워졌다. 
크람스코이는 바실리예프에게 편지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여 보존되고 있다. 
“내 인생은 부자가 아니고 인생에서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내 자존심이 그렇게 근본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매우 귀중하다. 당신의 개발은 나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신의 인생 - 내 응답 ... " 

아티스트로서 바실리예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은 이반 쉬스킨(Ivan Shishkin)이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친척이 되었다. 
쉬스킨은 바실리예프의 여동생 예브게니(Yevgeny Vasilyeva)와 결혼했다. 
쉬스킨은 처남에게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가르치고 그림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젊은 예술가 바실리예프가 쉬스킨 부부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 통 남아 있다. 
1872년 8월 11 자 그들 중 한 명은 얄타 (Yalta)에서 쓰여졌으며 그곳에서 예술가는 폐 질환 때문에 움직였다. 
“저는 항상 그렇듯이 돈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데 항상 저를 화나게 합니다. 
이미 내 그림 중 하나를 받은 대공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B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는 4점을 더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 그림들은 12월 24일 마감일까지 완료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된 그림은 낭비되고 올해 내년 1월과 2 월에만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대회에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2 개월 후 1873년 10월 6일에 일을 끝내지 못했다.

1870년, 20세의 표도르 바실리예프는 그의 예술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 및 
예브게니 마카로프(Evgeny Makarov)와 함께 볼가 강을 따라 여행을 갔다. 
몇 년 후, 일리아 에피모비치 (Ilya Efimovich)는 그의 저서 “먼 거리”에서 
그 젊은이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 동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의 오랜 동지들에게 “훌륭한 교사”가 되었다고 썼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교사였다. 
” 그에 따르면“ 머그컵 앨범의 작은 잎을 따라 재봉틀 바늘의 속도를 가진 얇은 연필은 
가파른 곳으로 구부러진 집들이 있는 가파른 은행의 사실적이고 인상적인 전체 그림을 그렸다. 
먼 거리에서 뾰족한 곤경과 뾰족한 스파이크 ... 
" 여행 중에 만들어진 연구는 나중에 볼가 라군을 포함한 여러 그림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앞으로 캔버스는 Pavel Tretyakov 컬렉션에 떨어졌다. 
그는 바실리에프가 병과 사망으로 인해 후원자에게 지불할 수 없는 부채 때문에 
1874년 작가의 그림을 사후에 전시한 후에 그것을 가져갔다.

 

해동. 1871. by Fyodor Vasiliev. oil on canvas. 53.5 x 107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그림은 특별한 유형의 풍경이다. 
추위에 휩싸인 음울하고 탐욕스럽지 않은 바람에 휩쓸리는 공간을 묘사한 것이다. 
작가는 시야를 넓게 확대하여 거의 파노라마처럼 보이도록 하여 
어렵고 목적없는 여정, “고통으로 가득 찬 길”의 느낌을 육체적으로 볼 수있게 한다. 
절망감은 배경의 세부 사항에서 강조된다. 
얼음으로 덮인 나무와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농민 오두막. 
삶의 순환을 상징 할 수있는 여행자와 어린이는 길과 약간 녹은 개울로 형성된 교차로의 중심에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에서 “충돌”이다.

바실리예프의 "해빙"은 발표되자마자 그를 유명하게 했다.  
알렉산더 왕자 즉 미래의 알렉산더 3세가 카피 한 점을 주문했고, 
Society for Promotion of Artists는 그에게 일등상을 수여했다.  
이 그림은 1872년 런던 박람회에서 메달을 받았다. 
바실리예프는 황립예술학교의 인턴이 되었고, 군대징집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천재소년" (바실리예프가 러시아 예술가들 사이에 불렸던)에겐 그 인기를 즐길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폐결핵 진단을 받아 셍페테르부르그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리미아로 이주했던 바실리예프를  Society for Promotion of Artists가 계속 후원했으나, 
그는 그림으로 비용을 갚아야했다.

 

Wet Meadow, 1872. 젖은 초원.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70 x 114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바실리예프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젖은 초원(Wet Meadow)"
1871에 바실리예프는 치료를 위해 크림 반도에 있었다. 
날씨가 변하는 순간이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 
뇌우에서 햇빛으로의 전환. 그림은 시각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왼쪽에서는 하늘이 더 밝지만 여전히 우울하고 

오른쪽에서는 하늘이 어둡고 때로는 진한 파란색이다. 
이것들은 멀리 떨어진 뇌운이다. 
하늘에 작은 줄무늬가 있고 비가 내린다. 
작가는 대부분의 그림에 그것을 주었다.

조금 아래는 넓은 녹색 초원을 묘사했다. 
비가 막 지나가고 풀과 땅이 모든 물을 흡수했다. 
여름 비가 내린 후 공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선한 지 떠올려본다. 
그리고 예술가가 묘사한 곳에서 얼마나 깨끗하고 가벼운 공기. 
이 순간 관객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잔디 위를 달리며 이슬 방울을 모으고 싶다. 
불행히도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림이다.

지평선에는 크고 푹신한 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들은 짙은 녹색이다. 
나무는 그림의 오른쪽에 있다. 중앙에는 작은 호수가 있다. 
그것은 거울과 같으며 구름을 통과하는 태양 광선을 그 자체로 반사한다.

작가가 그림자로 어떻게 연주하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그림의 가장 가장자리에는 풀과 초원 꽃이 태양에 의해 선물되며 조금 더 구름이 그를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
사진 자체는 시골에서 보낸 멋진 어린 시절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관객은 그런 초원을 보았고, 비가 방금 지나가는 순간에 얼마나 멋질 지 알고 있으며, 
가슴이 가득한 이 향기를 숨 쉬고 있다. 
신선한 공기와 초원 꽃의 향기. 저 멀리 어딘가에 천둥 소리가 들리고 뇌우도 볼 수 있다. 
이들은 되돌릴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언뜻 보기에 그림 "Wet Meadow"는 친숙함과 단순한 동기로 모든 시청자를 매료시킨다. 
넓은 공간의 깊숙한 곳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솟아 오르고 
멀리 나가는 거대한 구름 아래에서 작은 하늘 조각이 나타난다. 
앞서 틈새 시장을 따라 부드럽고 촉촉한 푸른 잔디로 덮인 가파른 경사면이 있다. 
그림의 거의 중앙 전경에서 검은 뇌운을 통해 따뜻한 태양이 늪지대의 역류에 반사되려고 한다.
얽히고 설킨 회색 구름이 소용돌이 치고 강력한 힘으로 충돌한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천둥 소리가 들리고 끝없는 공간에 반영된다. 

그림은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여기 주변의 모든 것이 숨을 쉬고 살아간다. 
나무가 강한 바람에 구부러지고 물이 물결 치며 하늘과 멀리서 보이는 숲...
표도르 바실리예프의 그림에서 하늘은 변함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Wet Meadow"에서는 거의 핵심 수단이며 작가의 시적 사고를 표현한다. 
푸른 초원 위 구름 위의 따뜻하고 반짝이는 채광창은 물에 반사되어 풀에 비추며 
크고 차가운 검은 구름과 전쟁을 벌이며 젖은 땅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긴장된 하늘의 존재와는 대조적으로 그림의 나머지 부분은 매우 단순하다. 
그녀의 그림의 선은 더 차분하고 부드럽다. 
풍경의 모든 세부 사항은 주요 아이디어의 변형이며 

모든 세부 사항이 전체적으로 용해되어 신중한 고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바실리예프는 새 풍경에 익숙해질 수 없었기에, 그는 계속 러시아의 풍경을 기억이나 
옛 스케치에 의존해서 또는 상상으로 그렸다.  
이때의 예가 1872년의 "젖은 초원"이다.  
그후 크리미아의 풍경에 매료되며 그린 그림이 "크리미아의 산"이다.

바실리예프는 23세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셍페테르부르그에서 열린 추모전시회는 대성공이었고, 전작품은 사전에 예매되었다.  
그의 그림은 러시아의 다음 세대 풍경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니콜라이 게는 "바실리예프가 우리를 위해 '하늘'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미술사가들은 바실리예프가 이사크 리비탄, 발렌틴 세로프, 빅토르 보리스-무사토프에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Hot Summer Day, 뜨거운 여름 날. 1869.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8

 

In the Crimean Mountains, 1873. 크림반도의 산들. by Fyodor Vasilyev. 
Oil on canvas. 116 x 90 cm. Tretyakov Gallery Room 18.

뿌연 안개 사이로 내비치는 산의 모습 표현이 대단하다. 
소가 끄는 수레가 내려왔을 길이 그대로 보여지며 크림 산의 위용이 가슴에 와 닿는다. 
조금 세심히 들여다 보면 소나무, 풀, 작은 길 등 작가의 사실적이고 섬세한 표현에 아~하고 탄성 짓게 된다. 
설명이 필요없는 풍경화, 마치 내가 산길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내 눈 앞에서 자연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풍경화다.

캔버스의 오른쪽 하단에서 왼쪽 상단까지 빛이 점차 물결 모양으로 짙어지고 
왼쪽으로 뒤덮인 래그 가드의 플레어를 잡아 두 마리의 황소를 사용한다. 
또한 흰 가운에 기대는 사람이 있는 앞 부분에만 조명이 비치고 있다. 
마차의 나머지 부분과 그 바퀴 근처의 사람은 더 어두운 지역에 있다. 


그림의 상단 부분도 비슷하게 강조하고 표시된다.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잔디로 덮여 있는 경사는 조명이 밝지만 왼쪽의 협곡은 그늘에 있다. 
이 경우 캔버스의 상단 부분인 하늘이 전체적으로 조명된다. 
그러나 왼쪽 위 모서리가 약간 더 밝다. 
내부에서 하늘을 통해 광원이 지구를 비추고 점차 빛을 움직인다. 
그것은 빛이 움직이는 느낌을 만들어 내고, 화가가 쓴 거의 모든 것이 빛으로 비춰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예술가 지원협회 (Society for the Supports for Artists)를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죽음 직전에 기록된 이 작품은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승천, 
하늘에 있는 표도르 바실리예프를 기다린 미지의 것으로 찬송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8 전시실

 

'바다의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Self-portrait. 자화상. 1874. by Ivan Aivazovsky

이반 콘스탄티노비치 아이바조프스키(Ivan Konstantinovich Aivazovsky, 1817 ~ 1900)는 
러시아 제국의 크림반도에 있는, 페오도시야의 마을에서 가난한 아르메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가 유럽 전역을 여행하기 전인 그의 인생 전반기에는 풍경화와 바다 그림마다 
수상작이 되면서, 그는 해안 마을의 크림반도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 후반기에, 해군 장면을 그린 작품들은 
러시아 해군으로부터 오랫동안 지속되는 직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1845년, 아이바조프스키는 술탄 압둘마지드의 초대에 응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는 1845~1950년 사이 8회에 걸쳐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여행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긴 체류 기간 동안에, 몇 점의 그림들을 그리기 위하여  
오스만 술탄 압둘마지드와 압둘아지즈, 압둘하지즈에 의해 황실 화가로 임명되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 30 점은 현재 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터키의 돌마바흐체 박물관과 다른 많은 박물관들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시 미술관과  
우크라이나 페오도시야에 있는 아이바조프스키의 미술 작품전시관을 포함하여,  
러시아와 과거 소비에트 연방 전역의 박물관들에서도 수십 점이 발견된다.  
터키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압둘라 귈의 장관실 벽에는 아이바조프스키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31세 때, 영국인 가정교사 줄리아 그레이브스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네 명의 딸을 두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이 끝나고, 아이바조프스키는 65세때, 
페오도시야의 젊은 아르메니아인 과부 안나 부나지언과 재혼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1985년, 소아시아의 아르메니안들의 하미디안 대학살에 의해 짙은 영향을 받아,  
몇몇 작품들은 "터키 함선의 축출", "트라브존에서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과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때, 모든 메달들의 수여를 거절하였다.  


그는 그의 인생 후반기를 페오도시아에서 보냈다.  
그는 데오도시아에서 그의 사유지로부터 마을에 불을 공급했으며, 예술 학교를 열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첫 고고학적 유적 발굴을 시작했고, 역사 박물관을 건축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페오도시아에는 무역 항구가 건설되었고, 철도 기차역 네트워크가 연결되었다.  
아이바조프스키는 1900년 사망하였다. 

아이바조프스키는 바다 그림과 해안 장면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파도와 바다 거품의 아른아른 빛나는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그의 화법과 상상력을 특히 감탄하게 된다.  
특별히 인상적인 점은 달빛이 퍼짐을 묘사하는 그의 능력은 참으로 탁월했다. 
아이바조프스키 그림의 햇빛과 달빛은 대부분은 투명한 대기층에 있지만,  
구름 뒤로부터 퍼지기도 하고, 안개를 지나기도 한다.  

그가 그린 1840년대의 해군 전투 작품 시리즈들은 물과 구름에 반사된 
불타는 배의 불길을 묘사한 것과 함께, 그의 극적인 역량을 그림의 앞 부분에 나타나게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농부의 삶과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삶의 장면들을 포함하여, 풍경화들도 그렸다.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은 콘스탄티노플 동양학자의 작품이라고 하며,  
그의 수백 점의 그림들은 반복적이고 멜로드라마적 일 수 있는 다른 느낌이 있다고 한다. 

아이바조프스키는 그의 일생동안 가장 많은 작품을 그렸다.  
1900년, 그가 죽을때, 6,000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재산은 그가 예술가로써 데오도시아의 고향에서 예술 학교를 열고  
전시관을 개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성공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에 축적되었다. 

2006년에는, 아비아조브스키의 작품들은 3,200,000 달러 정도의 가격에 
경매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계속하여 커지고 있다.  
2007년 7월 14에는 그의 그림 "지브롤터 암초에 밀린 아르메니안 선박
(American Shipping off the Rock of Gibraltar)"이  2,710,000 파운드에 낙찰되어 되어, 
그 가격은 "아이바조프스키 작품 중에서 경매 낙찰 최고가"이다.  
그는 모든 아르메니아인 화가들의 최고의 용광로라고도 불린다. 

1977년, 소비에트 천문학자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체르닉에 의해 발견된  
소행성 아이바조프스키 3787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 작품 활동에도 참고되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에서는 아이바조프스키의 작품이 담긴 우표가 발행되고 있다.

 

The Black Sea. 1881. 흑해.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49 X 208cm, Tretyakov Gallery Room 19.

바다를 사랑한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그는 바다의 위대함과 무한의 광대함을 평생 그렸다. 
이 <흑해>는 아이바조프스키의 대표작으로 
우리에겐 익숙치 않은 검은 바다에 대해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검은 구름과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는 마치 하나의 세상인 것처럼 어우러져 있다.

이반 아이바조프스키는 러시아 회화의 별과 같은 존재이며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바다를 표현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비평가들조차 그를 가리켜 "아마도 유럽에서 아이바조프스키처럼 풍부한 감정과 표현력으로 
바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25살의 나이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사실을 
19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흥미있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나이에 러시아, 스투트가르트, 피렌체, 로마,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The Black Sea. 1881. 흑해.

 

달빛이 비치는 바다는 그의 주요 주제이다. 
낭만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초기 작품들은 마음을 편하게 하는 고요함이 있다. 
물론 소위 ‘내공’이 쌓이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무르익으면 바다도 거칠어지지만 말이다.

시장의 도움으로 상페테스브르그 미술학교에 진학하게된 아이바조프스키는 
풍경, 특히 바다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에게 외국 유학의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는 바로 유학을 가지 않고 크리미아 반도를 돌면서 
자신의 풍경화 세계를 더욱 단련시키기로 결심한다.
크리미아 반도에서의 ‘내공 쌓기’를 끝내고 유학을 간 이태리에서 머무는 동안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홀란드를 여행하면서 
전시회와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그에 관한 신문 기사가 있다. 
"‘... 교황 그레고리 16세가 아이바조프스키의 ‘카오스 (Chaos 1841)’를 구입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의 가치가 있는 작품만 전시하는 바티칸에 걸었다. 
그의 ‘카오스’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예술 기교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림에 대한 신문의 평이 대개 호의적임을 감안해도 극찬에 가까운 기사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 다섯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낭만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써 한참이나 선배화가였던 영국화가 윌리엄 터너는 그를 천재라고 칭했고 
프랑스의 들라크루와는 자신의 우상이라 말했다고 할 정도로 국제적인 화가였다.

 

The Rainbow, 1873. 무지개.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02 X 132cm, Tretyakov Gallery Room 19.

바다에서 배가 난파당하고 사람들은 조그만 배에 몸을 싣고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들은 살 수 있을까? 작가는 죽음의 문턱에 있는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무지개가 떠 있으니 곧 폭풍우는 잠잠해질 것이고, 
저 멀리 갈매기가 나는 것을 보니 육지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아이바조프스키의 <무지개>는 희망을 상징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우리 삶을 끌어주는 힘인 희망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세계 미술 경매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러시아 작가로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작품의 가격은 520만 달러(약 60억 원)에 달했다 하니, 
러시아 그림의 세계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The Billowing Sea. ‘파도가 크게 이는 바다’. 1889.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아마도 유럽에서 아이바조프스키처럼 풍부한 감정과 표현력으로 
바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진을 넘어서 동영상을 보는듯한 착각마저 들만큼 정교하다. 
그가 파도를 그리는 기법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의 탁월한 기억력과 풍부한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는 사전 스케치 작업없이 기억 속에 있는 바다와 파도를 
연필로 대강 윤곽을 잡은 후 바로 채색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윌리엄 터너가 왜 그를 두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천재라고 극찬했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 작품에 잠재된 공포를 바깥으로 꺼내어 극대화하면 
‘파도가 크게 이는 바다(The Billowing Sea)' 같은 화면이 도출된다.  
작품에 묘사된 바다는 흑해(Black Sea)인데, 피쿼드 호를 침몰시켰던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 만큼이나 바다는 분노로 들끓고 있다. 

“버들잎 같은 배가 산마루 같은 파도마루에 올라떴다가는 또 눈 깜박할 사이에  
파도골로 떨어져 내려 가고 또 올라떴다가는 떨어져 내리고 하는” 
어느 거친 바다의 실물을 이 그림 앞에서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2019. 08. 18 인증샷

 

2019. 08. 18 인증샷

 

On The Storm, 1872.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92 X 72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그가 살았던 당시,  러시아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흐름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끝나고 시작된 러시아의 문화가 거대한 꽃을 피우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니콜라스 1세의 가혹한 전제정치와 불경기가 러시아를 휩쓸던 때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러시아, 그 거대한 역사와 혼란했던 시대를 목격한 아이바조프스키는 
그의 작품에 자유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시대 정신 등을 작품에 쏟아부었다.

 

The shores of Dalmatia. 1848.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View of the Coast Near St. Petersburg. 1835.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107 X 133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Sea coast. 1840.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61 X 40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View of Leandrovsk tower in Constantinople. 1848.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45 X 58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Meeting of a fishermen on coast of the bay of Naples. 1842.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85 X 58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Near Crimean coast. 1890. by Ivan Aivaz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The Bay of the Golden Horn in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의 골든 혼. by Alexey Bogolyubov. 
oil on canvas. 51.1 X 29.4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알렉세이 보골류보프 (Alexey Petrovich Bogolyubov 1824 ~ 1896)
알렉세이 보골류보프는 Novgorod Gubernia 의 Pomeranie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은퇴한 대령 표트르 가브리일로비치 보골류보프다. 
보골류보프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비평가 Alexander Radishchev다.

1841년 알렉세이 보골류보프는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해군에서 복무하고 함대와 함께 여러 국가를 여행했다. 
1849년에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서 Maxim Vorobiev 지도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젊은 화가 보골류보프는 Ivan Ayvazovsky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53년 그는 메이저 금메달로 아카데미를 마쳤다. 
그는 해군 장교로 은퇴하고 해군 본부의 예술가로 임명되었다.

1854년부터 1860년까지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많은 일을 했다. 
한편 Alexander Nevsky 대성당에 프레스코 화를 그렸다. 
Bogolyubov는 1860년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교수직을 받았다. 
얼마 동안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다. 


1860 년대에 그는 볼가 강을 따라 여행했다. 
그의 그림은 낭만주의의 모든 흔적을 잃어 버렸고 

그 요소를 자연의 확고한 사실주의로 대체했다. 
1871년에 그는 Imperial Academy of Arts 에 선출되었다 .

1870년부터 그는 Wanderers 미술 운동에 가까워 졌고 모든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운동의 다른 구성원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생각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3년, Bogolyubov는 동료 순회자들과 연대하여 아카데미를 떠났다. 
그는 심지어 로마에 대안적인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를 만들려고 했다. 

1873년 이후, 보골류보프는 그의 심장 상태 때문에 주로 파리에 살았다. 
그의 집은 러시아 예술가 사랑방 같았다. 
빈번한 방문객으로는 Ivan Turgenev, Ilya Yefimovich Repin, Vasily Polenov, 
Mark Antokolski, Vasili Vasilyevich Vereshchagin 등이 있었다. 

1885년, 보골류보프는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사라토프에 
Radischev Art Museum 이라는 미술관을 열었다. 
"러시아 최초의 혁명가"인 Alexander Radishchev 의 이름을 딴 

박물관 이름은 당국에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보골류보프는 허가를 얻기 위해 법적 싸움을 견뎌야 했다.

보골류보프는 1896년 2월 3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 후, 보골류보프의 모든 돈과 자본은 그의 회화학교에 기증되었다. 

 

Nizhny Novgorod Fair (Row of Bells), 니즈니 노브고로드 시장. by Alexey Bogolyubov. 
oil on canvas. 51.8 X 29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The Mouth of the Neva, 1872,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54.5 x 110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The Ipatiev Monastery near Kostroma, 1861,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Auvers, 1881,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Treport, Date unknown, by Alexey Petrovich Bogoliub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Fountain of Annibal in Rocca di Papa near Rome, 로마 근처 로카 디 파파에 있는 한니발 분수.
1857. by Lev Felixovich Lagorio. oil on canvas. 48 X 31 cm. Tretyakov Gallery Room 19.

 

레브 펠릭소비치 라고리오(Lev Felixovich Lagorio, 1826-1905)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수채화가였으며 특히 크림반도 주변의 바다와 해양, 코카서스 산맥의 경치를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남부 크림반도에서 일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Cimmerian" 회화학교와 관련이 있다 .

그의 아버지 펠리체(Felice Lagorio 1781-1857)는 시칠리아 왕국의 부영사를 역임하는 제노바 상인이었다. 
1839년부터 1840년까지 그는 Ivan Aivazovsky의 스튜디오에서 첫 번째 예술 교육을 받았다. 
1842년에 Taurida의 주지사인 Alexander Kaznacheyev의 지원으로 
그는 Imperial Academy of Arts에 등록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는 아카데미의 새로운 회장인 로이 히텐베르크 공작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선생님들 중에는 Alexander Sauerweid, Maxim Vorobiev 및 Bogdan Willewalde 등이 있다.

1850년에 그는 자신의 그림인 "View of Lakhta" 로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2년 후 러시아 시민이 되었다. 
그는 또한 해외 유학 연금을 받았는데, 파리를 먼저 방문(1853)하고, 

그 다음 로마를 방문하여 1859년까지 머물렀다가 추가로 2년 동안 자비로 머물렀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1860년 교수로 임명되어 이탈리아에서 자신이 만든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1861년 코카서스로 여행하여 그곳에서 성 안나교단을 수여한 

차르 알렉산더 2 세에게 일련의 풍경을 선물했다.

그는 1863년과 1864년에 코카서스 전쟁에 참가한 

대공 Mikhail Nikolayevich의 수행원과 함께 코카서스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종종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1885년에 그는 1877-1878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에 관한 일련의 작품을 그리는 의뢰를 받고 
유럽과 아시아 전역의 전장을 방문했다. 
1900년에 그는 아카데미 명예 회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노보데비치 묘지(Novodevichy Cemetery)에 묻혔다.

 

On the island of Capri. Fisher's house, 노르망디 해변, 1859. by Lev Felixovich Lagorio.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9.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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