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1864년 이반 크람스코이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이동파는 지배층에 저항하는, 
그리고 러시아 현실을 고발하는 사실주의적 화풍을 기치로 내걸고 
1871년부터 러시아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회를 연다.

예술의 현실 참여를 중요시하며 아카데미 화파에서 혜택 받지 못한 많은 작가들이 
이동파 전시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또 러시아 대부호 파벨 트레챠코프는 전시 때마다 이동파의 그림을 구매했다.

쉽게 말해 이동파는 제도권에서 신분 보장받지 못하는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면 
언제든지 전시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을 제공해 주고, 
전시가 끝나면 바로 구매해 주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니 작가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예술적 시스템이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 미술 부흥을 이끌어 내는 큰 힘이 된다.

 

Tretyakov Gallery Room 16. 바실리 푸키레프 작품 전시실.

바실리 푸키레프 (Vasily Vladimirovich Pukirev 1832-1890)는 러시아 풍속화가이다.
푸키레프는 1832년 툴라(Tula)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농민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초등교육을 받은 후 모길레프 현의 무명 화가 도제로 들어 갔다.

그 후 우연한 기회로 모스크바 회화조각건축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세게이 자란코 (Sergey Konstantinovich Zaryanko 1818~1870) 교수 밑에서 회화를 배웠는데 
탁월한 재능을 나타내서 1853년 예술아카데미에 보내진다.

1860년 초상화 작품으로 아카데미 회원 칭호가 수여된다.
1861년~1873년 모스크바 회화조작건축학교에서 교사를 했지만
말년의 작품들도 <어울리지 않는 결혼>(1863년)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1862. by Vasili Vladimirovich Pukirev. 
oil on canvas. 173cm X 136.5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사랑을 통한 배우자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거래로 성사된 혼인임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나이 든 남자와 너무도 여리고 어려 보이는 신부와의 
부적절한 혼례 장면이 19세기 중반 러시아 사회에서는 꽤나 일반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칠십 살은 넘어 보이는 노인과 손녀뻘 되어 보이는 여린 소녀가 백 년을 함께 살자고 가약을 맺는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남자가 금방 핀 한 떨기 꽃같은 예쁜 여자 옆에 서서 결혼의 촛불을 밝힌다.
쭈글쭈글 한 남자는 제일 좋은 양복을 입고 반짝반짝 광을 낸 블라우스 리본으로 한껏 멋을 부렸다. 
가슴에는 황제에게 하사받은 황실 훈장을 다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알코올에 찌든 것일까, 
너무 어여쁜 신부 모습에 수줍은 것일까,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늙은 남자는 곁눈질로 가련한 소녀를 힐끔거린다.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는 작품은 그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원치 않는 강제 결혼을 주제로 그려졌다.
그러나 문제의 사회 심리적인 의미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 
오직 신부만이 고통을 받고 증오하는 신랑의 괴롭힘을 견뎌야했다. 
물질적인 관심, 좋은 거래를 수행하려는 욕망은 부모가 자신의 딸에게 희생하도록 강요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백옥같이 빛나는 하얀 드레스에 우아함과 순수함까지 차려 입은 청초한 여자는 
'행복, 순결, 반드시 행복해집니다'라는 꽃말을 지닌 은방울 꽃을 가슴에 달고 
머리에는 아직 피지도 않은 은방울 꽃 화환을 예쁘게 쓰고 
축 늘어진 힘없는 손을 어렵게 내밀어 결혼반지를 끼려 한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바닥을 헤맨다. 
이미 포기한 맘이야 붙들어 맬 수 있지만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애써 참으려는 그녀의 울음이 눈 주위로 붉게 일어나고 앙다문 양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림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어린 소녀 신부다.
신부는 여전히 아이이며, 처진 머리에 눈물을 머금고 있다. 
금발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얼굴이 참으로 슬픈 표정이다. 
그녀의 오른손은 제사장에게로 연장되며, 제사장은 얇은 손가락에 결혼 반지를 끼워 넣을 것이다. 
신부의 표정은 무관심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운명에 무관심하다. 
웨딩 드레스를 입고 소녀는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될 가족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유명한 미술 ​​비평가이자 역사가 블라디미르 바실리에프 스타소프 (Prado Vadilyevich Stasov)는 
푸키레프 (Pukirev)의 그림을 보았을 때 
"마침내 현대 사회의 깊은 곳에서 찍은 오늘의 주제에 관한 연구, 
새로운 재능있는 예술가가 러시아에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의 의견을 말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주제를 충분히 깊이 고치지 않고 그를 비난하기 시작한 많은 적을 발견했다. 
언론은 논란의 물결을 피우고 있다. 

그림의 묘사, 그 분석, 비평가의 의견은 걸작의 출현에 대한 적시성에 대해 결론을 맺게 했다. 
러시아 사회는 그들의 부도덕한 이유로 결혼 생활을 비난할 준비가 되었다.
불평등한 결혼! 슬픔과 고통, 연약한 처녀 영혼을 위한 죽음. 
이 주제의 비극은 A. N. Ostrovsky "The Poor Bride"의 연극으로, 
F. Zhuravlev의 "Before the Crown" 그림으로, V. Makovsky의 "To the Crown"과 같은 
회화와 문학 작품으로 구체화되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금실 은실로 겹겹이 수놓은 사제복을 휘황찬란하게 차려 입은 대머리 사제는 
구부정한 허리를 똑바로 펴지도 못하고 어린 신부의 미래를 옭아매려 허겁지겁 매달리고 있다.
늙은이와 소녀를 엮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노파는 이 결혼이 허사가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 노려본다. 
그리고 이 둘의 인연에 더 얻어낼 것은 없는지 주름지고 싸늘한 눈을 희번덕인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그림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노라면, 뭔가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에게서 시선이 멈춘다. 
맨 오른쪽 윗부분에서, 고매한 분위기의 남자 하나가 팔짱을 낀 채 군상들을 노려보고 있다. 
그의 눈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작가 푸키레프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눈길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러시아에서 1860년대는 대변혁과 전환의 시기였다. 
한때 유럽의 헌병 행세를 하며 각국의 자유화 운동을 간섭하고 탄압하던 러시아는 
크리미아 전쟁(1853~6)에서 참패하여 안팎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오랜 숙제이던 농노해방(1861)이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면서 마침내 단행된다.

이러한 일대 격변 속에서 러시아 사회 구석구석마다 변화의 싹들이 무성하게 돋아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라즈노치네치(разночинец)’의 등장이다. 
농노해방령이 내려지던 무렵 러시아에서 사무원이나 의사, 교사, 변호사, 회계사, 작가 등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그 출신성분이 매우 다양하였으며, 그 지위는 특권계층인 귀족과 사제, 
그리고 하층계급인 농노와 농민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잡계급 인텔리겐차’라고 번역되는 그들은 대부분 사회 개혁에 대해 급진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품고 있던 그들은, 
사회 각 분야에 포진하여 러시아 사회 변화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술분야에 있어서 그들이 창조한 새로운 미학은, 현실이 아무리 추할지라도 이를 아름답게 
가장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푸키레프의 저 매서운 시선처럼 문제투성이의 세상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럼으로써 예술이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해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신랑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늙은 하객 4인방은 늘그막에 횡재한 친구가 심히 못마땅하다.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늙은이들의 심통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그들의 뒤틀린 시선이 그림 전체를 건조하게 만들고 얼굴에 진 주름만큼이나 겹겹이 한숨짓게 한다.

그런 그들을 그림 한쪽에서 팔짱 낀 채 우울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은방울 꽃의 어린 신부와 나란히 서면 딱 어울릴 법한 턱시도의 젊은 남자는 푸키레프 자신이란다.
빚을 갚지 못하는 농노의 어린 딸을 선뜻 자신의 노리개로 취하고 
말도 안 되는 불합리를 재력으로 포장하는 현실을 작가 자신은 비통한 얼굴로 바로 본다.
그림 한 켠에 야멸차게 자리 잡아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다. 
조용히 호통치는 것이다.

 

The Unequal Marriage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 Detail (부분)

푸키레프의 <어울리지 않는 결혼식>은 나이 든 고관에게 시집가는 가난한 처녀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촛불을 든 손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반지를 받기 위해 손가락을 내미는 신부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런 신부를 곁눈으로 바라보는 늙은 신랑은 산전수전 다 겪은 낯빛에 
이제는 오로지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거늘 신랑은 신부의 행복에 전혀 관심이 없다. 
하객들의 표정에서도 신부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신부는 더욱 외로워 보인다.

푸키레프는 러시아 대표 풍속화가이며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사실주의 화법인 대물묘법의 대가이다.
소작세를 갚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팔려가는 어린 신부의 아픔과 슬픔이 잘 배어 나는 작품으로, 
각자의 욕심에만 빠져 있는 모델들의 표정이 너무도 흥미로운 그림이다.

 

In the Artist's Studio. 1865. by Vasily Pukirev. Oil on canvas. 
59 x 73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바실리 푸키레프의 스튜디오>는 부유한 상인 구매자가 방문했을 때의 장면으로
그림에 묘사된 이미지는 풍자적 특성이 없지만 매우 재미있다. 
P. M.의 회고록에 따르면 Tretyakov의 가장 가까운 동료인 N. A. Mudrogel은 
갤러리의 가장 오래된 키퍼인데 작가의 이미지에 자신을 담았다. 
상황에 대한 푸키레프의 표현이 좀 아이러니하다. 

 

Reception of a Dowry in a Merchant Family. 지참금 목록. 1873. by Vasily Pukirev.
oil on canvas. 73 x 66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신부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드레스를 내보이고 있고,
신랑 측에서 보낸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참금 목록을 들고 있다.
하녀는 트렁크에 여러 혼수품을 챙기고 있으며 문 앞에는 신랑측 사람이 거드름을 피우며 서 있다.

바실리 푸키레프의 또 다른 그림은 결혼과 그 역겨운 물질적인 면을 주제로 한다. 
그림은 결혼식 며칠 전 신랑의 집에 보내는 지참금을 모으기 전 평상시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 절차가 신부 가족에게는 얼마나 불쾌할지... 신랑의 자랑스런 포즈는 문 앞에 있는 장면에 보인다. 

신부와 여동생 또는 여자 친구는 공포스럽게 이 장면을 본다. 
한편, 신부의 어머니는 막내딸과 함께 가슴에 린넨더미를 놓는다. 
그녀의 얼굴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추상화하려는 시도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이 작품은 1873년에 그려졌는데, 이전 회화에서처럼 
가난한 상인의 집의 생활과 가구는 매우 소박한 분위기다. 
겸손한 설정, 여러 그림과 카나리아 케이지가 천정에 매달려 있다.

 

Princess Tarakanova, 1864. 타라카노바 황녀. 1864. 
by Konstantin Dmitrievich Flavitsky. oil on canvas. 245 x 187.5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화가 콘스탄틴 플라비츠키(Konstantin Dmitrievich Flavitsky,1830~1866)는 1830년 9월 모스크바에서 
관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곧 고아가 되었고 7년간을 꼬박 보육원에서 지냈다. 
그림에 대한 재능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알려지지 않았다가 미술 단체의 후원으로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고, 회화에 두각을 나타냈다. 
1855년 황금메달을 받으면서 졸업을 했고, 그 덕택으로 이탈리아에 6년 간 유학했다.

현재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타라카노바 황녀>가 1864년 공개되면서, 
미술계 내에서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모두들 앞으로 콘스탄틴 플라비츠키의 미술 활동에 큰 관심을 나타내었고, 
그가 훌륭한 그림을 많이 그려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라카노바 황녀>를 그리고 있을 당시부터 플라비츠키는 이미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을 당시 병을 얻어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더욱 심해졌다. 
플라비츠키는 병을 고치기 위해 유럽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36세의 나이로 1866년 9월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그림 <타라카노바 황녀>는 러시아어로는 
<타라카노바 황녀의 죽음 (Death of Princess Tarakanova)>이다. 
이그림은 러시아 역사를 소재로 하면서, 신화로 내려져오는 사건을 그렸다. 

먼저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타라카노바 황녀는 표트르 1세의 딸인 엘리자베타 여제가 
공식적으로 결혼한 사실이 없는 상태에서 몰래 낳은 자식, 즉 사생아였다. 
일찍이 해외에서 조용히 자라나던 타라카노바 황녀는 예카테리나 2세가 권좌에 있던 시대에 
다시 나타나서 본인만이 러시아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진정한 왕위 계승자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타라카노바 황녀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타 여제가 물러난 후 
왕위를 계승했던 표트르 3세, 즉 본인의 남편을 죽음으로 밀어내고 황권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독일 출신으로 사실 권좌를 이어 받을 혈연적 정통성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고, 
황위 계승자의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예카테리나 2세가 타라카노바 황녀에게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혈연관계가 있는 진정한 황위 계승자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 
대단한 욕심을 보였던 예카테리나 2세는 언제고 그런 사람이 나타날까 노심초사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연히 정통 계승자라 말하는 타라카노바 황녀가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시대적으로 정통성을 확인할 길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황권 유지에 거슬릴 것을 우려해 조용히 사람을 보내 
러시아로 불러들여 수도원에 가둬놓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타라카노바 황녀의 태생부터 사망까지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문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기록에 수도원에서 칩거하던 사람들 중에 실제로 타라카노바 성을 지닌 수녀가 있었고, 
그 수녀가 1775년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있다고 한다.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과 달리 그림에서처럼 요새 감옥에서 
수장을 당했다는 것은 좀 더 비극적이고 불운했던 황녀를 원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화일 것이다.  

즉, 콘스탄틴 플라비츠키는 타라카노바 황녀의 마지막 순간을 실제 사실이 아닌 
신화에 기반하여 그림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역사 속 타라카노바 황녀가 황실의 미움을 받아,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신화가 더욱 자극적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 속 여자의 비운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황실의 권위에 짓눌려 정통성을 가진 황위 계승자가 
처참하게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홍수로 인해 감옥 내부의 침대까지 물이 차오르고 물을 피해보기 위해 
이리저리 바쁜 쥐들 사이로, 죽음이 임박했음을 스스로 깨닫고 체념하듯 무심하고, 
절망적인 눈빛으로 천정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 정도로 불쌍하다. 
감옥 내부의 생활은 엄청 열악하면서도,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그녀가 황녀임을 말해준다.  
역사 속 당시에 실제로 1777년 9월에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기록적인 대홍수가 일어나 매우 큰 수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참으로 아름답다. 
죽음을 직전에 둔 여인이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우아하다. 
트레차코프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여인의 그림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꼽는다. 
아름다운 것이 선하다는 토스토옙스키의 말처럼 타라카노바 공주의 자태는 
우리의 눈길을 사로 잡기에 충분하다. 

 

Automobile Race. 1930. 자동차 경주. by Petr Vilyams Wiliams
Oil on canvas. 151 x 213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화가 표트르 윌리엄스 (Petr Vilyams Wiliams 1902-1947)는 1902년 4월 17일
모스크바에서 1896년 러시아에서 귀화한 미국 과학자이자 기술자인 
윌리암스(VR Williams)의 가족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9년부터 그는 Meshkov의 스튜디오에 참여했다. 
1918년에 잠시 모스크바주립 의과대학 학생이었다. 
1922년에 그는 실험적인 풍경 미술관의 창설에 참여하고
모스크바 응용 장식 미술연구소 교수로 일했다. 
1929년부터 연극 예술가로 일했습니다.
1937-1941년에 Vakhtangov에서 여러 연극을 위한 무대 제작을 만들었다.
표트르 윌리엄스는 1947년 7월 1일 사망했습니다.

이 그림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 러시아의 현실과 

사회적 낙관주의에 대해 낭만적인 비전을 반영한다. 
윌리엄스의 이 예술 작품은 시간의 문화가 미래와 현재 사이의 

균형을 인식하는 방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우리는 그 시절의 “가상 현실”이 사진처럼 보이는 것을 감상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농부의 말"에서 "자가용 말"에 이르기까지, 

농업 국가에서 산업 강국에 이르기까지, 
어두운 과거에서 "밝은 미래"에 이르기까지 

긴 삶의 종족을 포착하고 있다. 
움직임에 의해 변형된 직사각형 차체, 도로의 대각선 – 

이 모든 것이 구성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속도감을 만든다. 

 

Clash with Finnish smugglers 핀란드 밀수꾼들과의 전투 by Vasily Khudyakov. 
Oil on canvas. 80 х 120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바실리 후댜코프 (Vasily Grigorievich Khudyakov 1825-1871)는 러시아의 역사화, 초상화 및 장르화가이다.
후댜코프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MSPSA) 에서 거의 2 년을 보내고 
1848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856년에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파리, 로마, 나폴리에서 
약 4년 동안 머물면서 러시아 귀족들을 위한 위원회 활동을 했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핀란드 밀수꾼들과의 전투 (Clash with Finnish smugglers)’인데
이 작품을 바탕으로 그는 1860년에 아카데미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 작품은 또한 트레티야코프 컬렉션의 탄생을 알린 풍속화로도 유명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역사는 러시아 상인이자 수집가였던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바실리 후댜코프의 그림 ‘핀란드 밀수꾼들과의 전투’를 사들인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1856년에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화가의 작업실에서 
450루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7,700달러)을 주고 이 그림을 샀다. 
이후 러시아 예술의 최대 보고로 성장하게 될 트레티야코프 컬렉션이 바로 
이 ‘핀란드 밀수꾼들과의 전투’를 구입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 그림은 현재 동 미술관 제16 전시실에 걸려있다.
그는 1871년 콜레라로 사망했다 .

 

Prisoner's rest, 1861. 죄수의 안식. by Valery Ivanovich Jacobi. 
oil on canvas. 99.7 х 144.4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화가 발레리 자코비 (Valery Ivanovich Jacobi 1834-1902)의 작품이다. 
그의 동생은 러시아의 유명한 혁명가이자 민족 학자인 파벨 자코비(Pavel Jacobi 1842-1913)다.
자코비는 부유한 부동산 소유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잔대학에서 교육을 시작했지만 
크림전쟁 중 러시아 육군 시베리아 자원 봉사단에 입대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했다. 
육군에서 제대한 후 1856년에 그는 대학 공부를 포기하고 대신 예술 경력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1856-1861년에 발레리 자코비는 Imperial Academy of Arts 에서 공부하여 
그의 그림 "고요한 거지의 휴일"(1860)로 금메달을 받았다. 
1861년에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죄수의 안식(The Prisoner 's Rest)>을 그렸다. 
1861-1869년 자코비는 아카데미 보조금을 받고 유럽으로 여행하여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1868년 이후 자코비는 Imperial Academy of Arts의 회원이었으며 
1871년에 교수가 되었고 1878-1889년에 Academy에서 가르쳤다. 
그의 작품은 순전히 장식적이고 실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891년 아카데미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후 그는 해고되었고 

그 후 알제리, 프랑스 등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코비는 1902년 니스에서 사망했다.

 

Round dance in the Kursk province, 쿠르스크 지방의 라운드 댄스. 1860. by Konstantin Trutovsky. 
Oil on canvas. 80 х 120 cm. Tretyakov Gallery Room 16.

콘스탄틴 트루토프스키(Konstantin Trutovsky 1826-1893)는 러시아 장르 화가이자 일러스트 레이터이다.
그는 지주였던 은퇴한 기병대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839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니콜라예프스키 엔지니어링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그림에 대한 그의 재능이 비로소 드러났다. 

그는 1845년에 졸업하고 역사화가가 되기 위해 Fyodor Bruni 와 함께 
Imperial Academy of Arts 에서 수업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초상화를 그렸다.  
1849년에 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가족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전시회를 주선하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를 방문하면서 지역 마을 곳곳에 그림을 그렸다.

1856년 "Free Artist"라는 칭호를 받았다. 
1850년대 후반에 그는 독일을 여행했고 "왕립 벨기에 수채화가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여행 중 병에 걸린 두 번째 부인이 사망한 후 1858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1871년부터 1881년까지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의 검사관으로 일한 후 
다시 한번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 수많은 오일, 수채화 및 그림을 남겼다. 
그는 런던, 파리 및 앤트워프 등에서 해외 전시를 계속했다. 
1893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주요 사후 회고전이 열렸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6. 바실리 푸키레프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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