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 작품 전시실

 

이반 크람스코이 (Ivan Nikolaevich Kramskoy 1837-1887)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미술 비평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 그룹인 '이동파'의 창시자이다.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일리야 레핀과 니콜라이 야로셴코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낸 스승이기도 하다.
 
1837년 러시아 오스트로고쥬스크 시의회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863년 아카데미 졸업 작품 주제에 반발해 다른 13명의 학생들과 함께 작품 주제 선정의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졸업 직전 아카데미에서 나왔다. 
스스로를 '14인의 반란자'라 칭하며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을 결성한 이들은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에 들어갔다.

1870년 이반 크람스코이는 비평가 스타소프(V.V. Stasov)와 

전격적인 합의로 '러시아 이동 전시 협회'를 창립하였다. 
여기에는 일리야 레핀(Ilya Repine),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이사크 레비탄(Isaak Levitan) 등 19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러시아 화가들이 참여했다. 
이 그룹은 여러 도시를 이동하면서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이동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몇몇 특수한 사람 만을 위한 미술 전시회가 아닌 모든 사람이 함께 미술품을 감상하고 즐기자는 취지로 
거의 해마다 개최된 이 전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지었다.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 작품 전시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미술은 세계 미술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자기만의 색을 드러낸다. 
러시아 미술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동파'가 등장한다. 
이동파는 정치적.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고 했던 지식인들 중심의 민주적인 미술 유파였다.

세계 미술사 곳곳에서 미술이 정치와 갈등을 일으킨 적은 있지만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한 미술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의 추구라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이동파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이반 크람스코이다. 
크람스코이는 뛰어난 화가이자 탁월한 미술 비평가였으며, 
레핀과 야로센코와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 낸 스승이자 이동파를 결성한 탁월한 조직가였다.

그는 19세기 후반기 러시아 문화계의 대표적인 민주 인사였다. 
지방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크람스코이는 귀족과 농민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직종의 중간 계급을 뜻하는 소위 잡계급 출신의 전형적인 러시아 인텔리겐챠였다. 

그의 활동과 작품은 당시의 '양심적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 준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그린 자화상은 이런 사회적 책임 의식에 가득 찬 지식인 크람스코이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 준다.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인물의 지성이 강조되어 있다. 
사선으로 뜬 깊은 눈은 날카로운 지성으로 번뜩인다. 
창백하게 야윈 뺨과 부스스한 머리칼은 그가 고뇌하는 지식인이라는 인상을 더한다.

 

Self Portrait. 이반 크람스코이 <자화상> 186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크람스코이의 자화상은 '1860년대 전형적인 지식인 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텔리겐치아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헌신적으로 만연한 사회악과의 고독한 싸움을 수행해 나갔다. 
크람스코이가 남긴 여러 그림에는 이런 지식인적 책무에 충실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크람스코이가 지식인으로서, 또 화가로서 러시아 미술계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사건은 1863년 크람스코이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직전에 시작된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 주제로 얼마 전 일어났던 농노 해방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농노 해방은 더 큰 불안 요인이 되어 사회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이 주제를 학생들에게 그리라고 하는 것은 차르의 치적을 찬양하라는 의도였다. 
크람스코이를 포함한 열 네 명의 학생들은 이에 반발해 졸업 작품 주제 선정의 자유를 요구하며, 

졸업 직전 집단 자퇴를 한다. 
화가로서의 안정적인 길을 포기한 이 겁 없는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14인의 반란자'라고 불렀다. 
아카데미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예술아카데미의 교수이며 레핀의 스승이었던 크람스코이는 
러시아 미술계의 방향을 틀은 ‘14인의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예술아카데미의 정형화된 교육에 반대하여 몇몇의 뜻있는 화가들과 결합하여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열고 이로부터 이동파, 방랑자파 등의 러시아의 새로운 화파가 등장하게 된다.

14인의 반란자들은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을 결성한다. 
이것은 1863년에 발표되어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생활 공동체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또 이런 생활 공동체에 관한 생각은 러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전시 공동체인 

이동파의 탄생을 예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1860년대 러시아 화가들은 광범위한 활동을 통해 

보다 조직적인 단체를 결성할 수 있을 만큼 세력을 키워 갔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던 바실리 페로프를 중심으로 한 여섯 명의 화가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화가들 사이에 공동체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1870년 크람스코이와 비평가 스타소프의(V.V. Stasov) 전격적인 합의로 '이동 전시 협회'를 결성함으로써  
마침내 미술사에 '이동파'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이동파의 목표는
첫째, 러시아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대 예술 작품의 감상 기회를 주는 것,
둘째, 러시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함양하는 것,
셋째, 작품 판매를 보다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한편으로는 미술계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관과 중앙 귀족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컬렉터 층을 확보해 작가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려는 의도였다.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이동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특수한 몇몇 사람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술계 브나르도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 말) 운동이었다. 
거의 해마다 개최된 이 전시들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지었다.

반면 아카데미 미술은 급격히 쇠퇴해갔다. 
위기감을 느낀 아카데미가 1893년 거장 레핀을 교수로 영입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이동파는 재야 조직으로서의 의미가 다소 퇴색하기는 했지만, 
1923년 마지막 전시를 갖고 혁명 정부 하에서 조직 개편을 위해 해체되기까지 
무려 52년간 존속했던, 세계 미술사상 유래 없이 장수한 화가 그룹이었다.

일리야 레핀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는 

러시아 사실주의 발전의 공로자이고 이동전람파 결성의 주역이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은 문학과 음악 분야 뿐만 아니라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이 수도사인 정교회의 이콘 화가들을 제외하고, 서구 화풍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의 근대 화가들은 
주로 황실에 소속되어 황제 일가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실주의적인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 

민중들의 일상적 삶의 풍경이나 러시아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1860년대에 들어와 인텔리겐치야들의 영향을 받은 바실리 페로프와 같은 화가들은 

술을 마신 성직자나 마을의 어린이, 장례식 등과 같은 

러시아 민중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

러시아 민중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사실주의 화풍은 187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반 크람스코이의 주도로 결성된 이동전람파가 그것이다.
이동 전람파 화가들 사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크람스코이는 
인물의 외면적인 모습만을 재현하는 초상화 기법과 아카데미즘 화풍의 구태의연한 기법에서 벗어나 
러시아 민중들에게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들을 선보였다.

크람스코이는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
우리 같은 관객들이 보기에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는 자신의 기법을 바꾸지는 않았다. ​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흔들리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쉰 살이던 해 크람스코이는 의사 라우흐푸스의 초상을 그리다가 
손에 붓을 든 채로 이젤 앞에서 세상을 떠난다. 
크람스코이다운 마지막 순간이었다. 
​라우후푸스의 초상화는 미완성인 채로 남았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1873)>, <황야의 그리스도(1872)>,<산지기(1874)>,<미지의 여인 (1883)>,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막에 홀로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Unknown Woman. <미지의 여인>. 188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75.9 x 99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는 시대에 대한 의무와 정의감에 넘치는 인물들을 주로 그렸다. 
1873년에 발표한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화는 위대한 사상가의 결단과 
강인한 정신이 크람스코이 특유의 한색 계열의 색감으로 표현되었다.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었고 
크람스코이를 모델로 미할코프라는 인물을 창조하였다. 

한편 크람스코이는 1883년 <미지의 여인>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의 모델이 바로 톨스토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라는 설이 유력하다.
<미지의 여인>은 크람스코이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늘 진지하게 설명하던 크람스코이는 이 작품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매혹적인 미인은 높은 마차 위에서 관람자를 내려다 본다.

그림을 어느 높이에 걸든 그녀가 내려다보기 때문에 우리는 경외심을 갖고 올려다 볼 수밖에 없다.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여인은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전형적인 러시아 미인이다. 
그녀는 경멸하는 듯 유혹하는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카리스마에 설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추측만이 나돌았다. 
후대의 미술 사학자들은 이 그림을 다시 톨스토이와 관련시켰다. 
바로 톨스토이 소설의 여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다.

소설 속에서 안나는 검은 머리에 짙은 회색 눈동자를 가졌다고 묘사되어 있다. 
안나가 브론스키와 처음 사랑을 교감하게 될 때 그녀는 검정 벨벳 드레스 차림이었다. 
지금 마차에 탄 안나는 브론스키가 기다리고 있는 파티 장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 길의 끝에는 지독한 운명적인 사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그림은 그 아찔한 아름다움 만큼이나 아찔한 위험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크람스코이 작품이 처한 위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아카데미 화풍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아카데미즘적인 화법은 기본적으로 실내의 인공 조명 아래서 인물을 그리는 방식이다.
그림에서 여인은 실내가 아니라 거리 한복판에 있는데, 

희뿌연 안개에 잠긴 도시 풍경으로부터 분리된 듯이 느껴진다. 
즉 크람스코이는 야외에서 인물을 그린다는 것의 의미를 회화적으로 풀어내지 못한 것이다.

9년 전 1874년 파리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최초의 전시회가 열렸다. 
파리의 화가들은 고전주의적 화법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의 색채의 자유로움을 향유했다. 
이에 비추어 보면 흑백사진을 연상케 하는 단색톤의 크람스코이의 그림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크람스코이는 색채의 매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몇 명 안 되는 작가들(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모든 화가들을 조롱했다. 그러나 미래는 그들의 것이다." 
탁월한 안목을 지닌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하지만 실제 그림을 그리는 데에서는 인상주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기 방식은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크람스코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숙기에 접어든 이동파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명민한 크람스코이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다. 
우리 러시아 이동파 화가들에게는 형식은 없고 내용만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이 형식의 문제를 풀어낸 사람은 그의 제자이자 이동파의 다음 세대인 일리야 레핀이었다.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화가였던 크람스코이는 1887년 3월 24일 
<닥터 라우흐푸스의 초상>을 그리다가 손에 붓을 든 채로 세상을 떠났다.

 

Unknown Woman.1883. <미지의 여인>, Detail (부분)

시선처리가 하단부로 되어 있다. 
복장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전형적인 러시아 사람의 복장을 하고 있다.  
보라색 벨벳소재의 옷이 보라색 마차와 잘 어울리고 있다. 
황금색 팔찌라던지 모자에 달린 술도 나름 패셔너블하다. 
주변 배경처리를 황사처리해놔서 그런지 주인공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크람스코이가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고위 관료의 아내였던 안나는 어느 날,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우연히 브론스키라는 귀족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 운명적인 만남 이후 브론스키는 보수적인 상류사회에 억눌려 있던 안나의 

열정과 자유를 일깨워주었고, 둘은 폭풍과도 같은 사랑에 빠져 버린다. 
그리고 안나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을 버리고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은 안나에게 자신의 행복했던 삶을 

'아무것도 아니었던 무료한 삶' 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존경하는 남편을 권위적이고 따분한 관료로, 행복했던 가정을 인형의 집처럼 의미없는 공간으로, 
우아한 귀족부인을 사랑에 목말라하는 한 여인으로 뒤바꿔 버린 것이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불륜이었다. 
안나는 사교계에서 냉대를 당했고,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안나와의 스캔들로 브론스키의 명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철저하게 혼자가 된 안나는 점점 브론스키에게 집착하게 되고 

그럴수록 안나에 대한 브론스키의 마음은 식어갔다.

행복보다 가문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시하는 남편의 위선적인 태도, 불타는 사랑이 식자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버린 브론스키에 대한 불안함,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에 견디지 못한 안나는 결국 상트 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서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전쟁과 평화>,<부활>과 함께 톨스토이의 3대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예술가로서 가장 원숙한 시기인 1873년에서 1877년에 걸쳐 쓴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 받는 작품이다.

1870년대 러시아 귀족 사회와 러시아 농노해방 이후 변화하기 시작한 사회상, 

남녀의 애정 심리가 150명이 넘는 등장 인물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만들어 낸 사회 제도와 구조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진실을 파헤쳤다.
<안나 카레니나>가 시대와 언어를 초원해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 그룹인 이동파의 수장이었던 이반 크람스코이는 
1883년 <미지의 여인>이라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발표하는데, 
이 작품의 모델이 바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이다.

사실 크람스코이는 톨스토이와 각별한 사이로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할 때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린 적도 있다. 
크람스코이는 <안나 카레니나>에 큰 감명을 받았고 주인공 안나를 그리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정열적이고 순수했던 안나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4년의 작업 끝에 완성한 안나의 초상, 

눈 덮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거리의 정적을 깨고 마차 한대가 멈춰섰다. 
그 위에는 화려한 차림의 한 여인이 앉아 있다. 
도도한 표정과 어딘지 모를 처연한 느낌의 눈빛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당신이 안나인가요?  그러나 화가는 이 작품에 <미지의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모델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겨 놓았다.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든, 또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것은 우리가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Portrait of Leo Tolstoy. <톨스토이의 초상>. 1873. Oil on canvas. 79.5 x 98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는 대문호 톨스토이와 친교를 맺고 그린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1873) 또한 유명하다. 
말년에는 밝은 색채를 많이 썼고 그의 초상화는 눈의 표정이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크람스코이는 시대에 대한 책임감과 정의감에 넘치는 인물을 주로 그렸다. 
특히 그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미술관 설립자 트레티야코프는 마치 인물 박물관을 만들려는 듯이 
여러 화가들에게 러시아 문화계와 과학계 인물들의 초상화를 주문했다.

1873년에 트레티야코프는 크람스코이에게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주문했다. 
크람스코이는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의 모습을 남기는 것은 

후대를 위해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해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몇 번이고 이 제안을 고사했다.

이 일과 관련해서 트레티야코프는 크람스코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매력을 능력껏 발휘해서 톨스토이를 설득해 주십시오." 
결국 톨스토이는 크람스코이 앞에서 포즈를 취했고, 두 예술가는 서로의 인격에 매료되었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작가들이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렸다. 
니콜라이 게는 툴라의 영지에서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톨스토이를 그렸다. 
일리아 레핀은 숲에 누워 책을 읽고 있거나, 작업복 차림으로 밭을 갈고 있는 톨스토이를 그렸다. 
이것들은 초상화에 에피소드적인 요소를 가미한 그림들이었다.

이와 달리 크람스코이는 진검 승부를 했다. 

사상가이자 지식인인 톨스토이를 정면으로 그린 것이다. 
크람스코이가 그린 톨스토이는 소박한 러시아 농부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미남은 아니지만 위대한 사상가의 풍모가 느껴진다. 
깊은 생각에 잠긴 톨스토이의 얼굴에는 결단과 강인한 정신성이 느껴진다.

크람스코이 특유의 한색 계열의 색감은 톨스토이의 금욕적 도덕성을 강조한다. 
크람스코이가 톨스토이를 그렸듯이 톨스토이도 크람스코이를 그렸다.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었고 
크람스코이를 모델로 미할코프라는 인물을 창조했다. 
톨스토이가 묘사한 미할코프는 예민하고 열정적이며 매우 지적인 화가였다. 

이 작품은 날카로우며 다부진 풍모가 먼저 다가오는 초상화다. 
지성미에서는 다른 작가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상주의자라기 보다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인상이다.
같은 모델을 놓고서도 화가의 주관과 개성, 세계관에 따라 
그 특징을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크람스코이의 초상화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깊은 고뇌의 표정과 이지적인 인상이 두드러진다.

그들은 현실에 대해 불안해 하지만, 현실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기도 하다. 
크람스코이는 전형적인 잡계급 인텔리겐치아 출신이다. 
잡계급이란 19세기 러시아의 귀족, 성직자 계급과 농민, 서민 계급 사이의 중간 계급으로, 
지식인을 비롯하여 출신과 직업이 다양하고 의식적으로는 진보 성향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계급 출신답게 크람스코이는 사회의 부정과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깊이 고뇌했다. 
그리고 그 고뇌의 흔적을 초상화에 고스란히 쏟아 놓았다.  
자연히 그의 톨스토이는 다른 누구의 톨스토이보다 현실의 모순을 깊이 성찰하고 
엄격한 자기 통제와 진지하고 이성적인 탐구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려는 위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청록색 화면과 돌처럼 다부져 보이는 모델의 인상이 
이런 자기 통제와 이성의 힘을 반영한다. 볼수록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초상화다.

 

Christ in the Wilderness. 1871. < 광야의 그리스도>.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180 x 215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다시 아침이 밝기 시작했다. 
황무지와 바위투성이인 광야에서 기도를 시작한 지 꽤 오랜 날들이 지났다. ​
맨발의 그리스도는 밤새 올린 기도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 두 손을 풀지 않고 있다. 
먹을 것도 없고 밤의 찬 기운을 피할 곳도 없는 생활은 
얼굴을 핼쑥하게 만들었지만 눈빛은 점점 깊어 가고 있다. 
지금 세상과 다가올 세상에 대해 새로운 약속을 준비해야 하는 길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

이 그림은 크람스코이의 기념비적인 작품인데, 
작품을 통해서 그는 사회에 대한 도덕성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
그리고 도덕성은 그가 평생 가지고 갔던 기준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두고 ‘내가 본 그리스도 중 최고’라고 말했다 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무렵 크람스코이에게 중대한 일이 일어난다. 
학교에서는 졸업 작품으로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할 것을 지시했지만 
그를 중심으로 한 친구들이 학교의 지시를 거부한 것이었다. 
자유로운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결국 크람스코이를 포함, 총 14명은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한다. ​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해 가는 길이 평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림의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마귀의 유혹을 뿌리친 성경 말씀을 그린 것이다. (마태복음 4장)
크람스코이는 참혹한 현실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과 악을 향해 
고뇌하는 참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황야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준다. 
바위에 주저 앉은 예수의 흙투성이 발,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며 생긴 
흉터 투성이의 발을 그려 녹녹치 않은 현실을 가늠케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신음하지만 어떤 불의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크람스코이의 굳은 의지를 예수의 깍지 낀 손에서 느끼게 한다.

광야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Wilderness)는 크람스코이의 대표 작품으로, 
종교적 주제를 도덕적, 철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인본주의적 전통을 계승했다.  
예수의 이미지에 깊은 심리적 해석으로 극적인 경험을 불어 넣어서 
고뇌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려낸 러시아 종교 미술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사막에 홀로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 1926)의 시에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Tretyakov Gallery Room 20. 크람스코이 작품 전시실

 

Inconsolable grief, 1884. <위로할 수 없는 슬픔>. by Ivan Kramskoy. 
22.8x14.1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제목이 아니어도 그림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지가 매우 무겁다. 
​검은 옷을 입을 여인은 수건으로 입을 가렸지만 흐느낌마저 막을 수는 없다. 
흐트러진 앞머리 밑, 여인의 눈은 슬픔을 넘어 절망에 빠진 모습이다. 
시간이 지나면 절망에서 나오는 법을 알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

슬픔도 힘이 된다는 말을 믿었던 적이 있다. 
지나고 보니 슬픔은 슬픔이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의지였다. ​
여인에게 슬픔이 세상 끝까지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

그런데 도대체 여인은 누구를 떠나 보낸 것일까.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저만큼 깊은 상처를 준 것이라면 
아무래도 남편이나 부모보다는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를 길러본 사람은 그 의미를 안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에 만연해 있던 외도와 스캔들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뒤에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역시 이 작품은 자식을 잃은 크람스코이의 아내를 그린 것이었다.    

Inconsolable grief, 1884. <위로할 수 없는 슬픔> Detail (부분) 

크람스코이의 아내를 그린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은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갤러리 20번 방에 걸려 있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러시아미술관’에 소장된 것을 비롯하여 

두 개의 다른 버전들을 본 적이 있다.  
이만한 그림이라면 아마도 더 많은 에튀드(습작)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걸작의 에튀드들을 보노라면, 우리가 찬탄하는 최종작품이 나오기까지 
작가가 어떤 고심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에 대해 가졌던 신비감이 어째 덜해지는 부작용도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좋고 싫은 것들은 그처럼 양날의 칼인 경우가 많다.  

 

Portrait of Pavel Tretyakov. 1876.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설립자 파벨 트레티야코프 초상화
모스크바에 있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러시아 4대 유명 미술관 중 하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9세기 말, 러시아 최대 재벌이던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Tretyakov 1832-1898)가 세웠다. 


그는 1854년(22살)부터 시작해 거의 생애 끝까지 40년간 작품들을 수집했다. 
당시 러시아 미술 수집상들은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 작품을 즐겨했지만 
트레티야코프는 본토 작품에 몰입했다. 
그는 전시회를 찾아 다녔고 직접 작가의 스튜디오를 찾아가 그림을 샀다. 
1856년, 파벨은 자택을 미술관으로 만들었고 1892년에는 작품과 미술관을 모두 국가에 기증했다. 
한 개인이 소장한 것들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재벌,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가다. 
이 미술관은 긴 세월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명성은 자자하다. 
현재 러시아 미술의 메카로 러시아 미술사를 관통하는 보고(寶庫)다. 
러시아 미술 전공자에게 필수 방문 코스가 됐고 여행객이라면 필히 가봐야 할 곳이다.

 

Portrait of Vera Tretyakova, Wife of the Collector Pavel Tretyakov. 1876.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미술관 설립자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아내인 E. A. 트레티야코바

 

Moonlit Night. <달빛 서린 밤>. 1880.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178.8 x 135.2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약간은 새초롬하고, 약간은 거만하게 그러면서도 섹시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 
달 빛이 따스하게 비치는 연못가에서 상념에 잠겨 있다. 
크람스코이에 의해 탄생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매력적인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분위기를 모두 품고 있다. 

세계적인 단편작가 안톤 체홉도 이 그림을 보고 자신의  희곡 <갈매기>에서 
항상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여 주인공 니나를 탄생시켰다하니, 그림 속 여인의 위력은 대단하다. 
이 여인의 이미지를 그대로 눈에 담고, 체홉의<갈매기>를 읽어 보자.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의 모델이  
미술관 설립자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아내인 E. A. 트레티야코바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Sophia Kramskaya Reading. 1863. <독서 중인 소피아 크람스카야>.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64.5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그림의 제목을 보면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은 크람스코이의 아내 소피아인 것 같다. ​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타고 넘은 다음 
그녀가 읽고 있는 책에 내려 앉았다. 
​독서 중인 그녀의 얼굴이 책에서 반사된 빛으로 환하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독서삼매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더욱 고혹적으로 만들었다.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은 언제 봐도 좋다. ​
용감한 14 명의 ‘안주인’다운 모습이다.

아카데미를 나온 14명의 용감한 젊은 화가들은 집과 화실을 나누어 쓰는 모임을 만들게 된다. ​
이들의 뒷바라지는 크람스코이의 아내인 소피아의 몫이었다. 
‘새우잠을 자도 함께라면 행복한 것’이 신념이다. ​
크람스코이는 젊은 화가들을 위한 드로잉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재능 많은 선생님이었던 그에게서 배운 학생 중에는 일리야 레핀과 야로센코도 있었다.

 

Portrait of Sophia Kramskaya, the Artist's Wife. 1879. 크람스코이의 아내 소피아 크람스카야 초상화.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Ivan Kramskoy Working on Portrait of his Daughter, 1884. 크람스코이의 딸 초상화 작업.
oil on canvas. 76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Nikolay Kramskoy, the Artist`s Son. 1882. 화가의 아들 니콜라이 크람스코이 초상화.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The Actor A. P. Lensky as Petruchio in Shakespeare`s Comedy "The Taming of the Shrew". 188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셰익스피어 코미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Petruchio 역을 맡은 배우 A. P. Lensky 초상화.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렌스키(1847-1908 )는 러시아 배우, 연극 연출가.
렌스키는 러시아 연극의 리얼리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했다. 
한 사람의 내면 세계와 현실과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는 연극은 

실생활의 예술적 재현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에서 그의 매력, 미묘한 유머 및 우아함이 두드러졌다. 
그는 러시아 연극을 개혁하고 높은 문화와 연극 교육을 우선시하며 창의적인 영감, 
높은 기술 장면 및 연기 예술을 돌보았다. 

감독으로서 그는 난간을 내부 섹션과 모서리로 교체하여 날개를 제거하는 등 
무대에서 회전의 사용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그는 1888년 부터 모스크바 극장학교에서 연기 과정을 가르쳤다. 
그는 연출 기법과 연기 예술에 관한 수많은 에세이를 썼으며, 이는 많은 관심과 영향을 미쳤다. 
렌스키는 1908년 10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Nikolay Nekrasov in the Period of "Last Song" 1877~1878.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니콜라이 네크라소프(1821~1878))는 러시아의 시인, 작가, 평론가, 잡지 편집자이다.
네크라소프는 난폭하고 거친 성격을 가진 아버지가 농노를 학대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농노의 아픔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을 집필했다. 
1840년에는 자신의 첫 시집인 <꿈과 울림>(Mechty i Zvuki)을 출간했고 
1847년에는 표트르 플레트뇨프로부터 문학 잡지 
<소브레멘니크>(Sovremennik, 현대인)를 인수하고 문학 평론가, 잡지 편집자로 활동했다.

문학 잡지 <소브레멘니크>는 비사리온 벨린스키, 이반 투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급진주의 문학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1866년에 알렉산드르 2세 황제 암살 시도 사건을 계기로 발매가 금지되었다. 
1868년에는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과 함께 문학 잡지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Otechestvennye Zapiski, 조국의 수기)를 인수하고 편집자,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878년 1월 8일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치되었다.

 

Portrait of Writer Alexander Griboyedov. 1873. oil on canvas. ​68 x 58.5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Actor Vasily Samoilov. 1881.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a poet and artist Taras Shevchenko. 1871.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artist Alexander Dmitrievich Litovchenko. 1878.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writer Mikhail Evgrafovich Saltykov (N. Shchedrin). 1879.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Woodsman. 1874.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Adrian Viktorovich Prahova portrait, art historian and art critic. 1879.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88.5 x 69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Dr. Sergei Petrovich Botkin. 1880. by Ivan Kramskoy.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a Girl with Hat. 188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a Woman.1885.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Herodias​. 1884-1886.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Girl with a Tress. 187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Mermaids (Based on Night in May by Nikolai Gogol) 인어들. 1871.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painter Ivan Shishkin. 화가 이반 쉬쉬킨의 초상. 187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78 x 110.5 cm.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Vera Nikolaevna Tretyakova. 1876.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poet Nikolai Nekrasov. 1877.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Portrait of the Doctor Sergey Botkin. 1882.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Woman with an Umbrella. (In the Grass. Midday). 1883. by Ivan Kramsko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0.

 

Tretyakov Gallery Room 20, 이반 크람스코이 작품 전시실

 

Night on the Dnieper, 1882. <드네프르강의 달빛 어린 밤>,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104 x 143cm. Tretyakov Gallery Room 21.

화가 아르힙 쿠인지 (Arkip Kuindzi, 1842~1910) 
우크라이나의 음류시인이라 일컬어 지는 아르힙 쿠인지의 집안은 원래 그리스 출신이다. 
쿠인지의 아버지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그나마도 
그가 어려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리고 만다. 
친척집에 맡겨진 쿠인지는 일찍부터 옥수수를 팔거나 
사진을 수정하거나 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성장한다.

어린 시절 운 좋게도 친척의 친구 중에 교사가 있었다. 
그를 통해서 쿠인지는 기초교육을 받았다. 
역시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어서인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벽, 울타리, 자투리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청운의 꿈을 안고 상페테스부르그 예술아카데미 (Academy of Arts)에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두 번째도 실패하지만 끈질긴 이 젊은이의 열정에 예술 아카데미는 
그를 정원 외 학생이라는 조건으로 문을 열어준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독일,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대가들의 작품도 공부하고 , 많은 친구들도 만든다. 
그러나 귀국 후 그의 작풍을 보면,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56세가 되던 해 그는 아카데미에서 풍경화를 지도하는 교수가 된다. 
그는 학생들이 그가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창의력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도 배우기를 원했고 실제로 대단히 열성적으로 지도 했다. 
학생들도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항하는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이틀간 집에 감금된 후에 교수직을 박탈당 한다. 
그래도 그는 개인적으로 학생들을 계속 지도하였다고 한다,

교수직에서 해임 된 다음 해, 자신의 비용으로 젊은 화가들을 해외로 보낼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하여 아카데미에 10만 루블을 기탁하고 또한 자신의 이름을 붙인 단체를 만들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림과 돈, 자신 소유의 크리미아 반도에 있던 땅을 모두 기부한다. 
이 모두가 모두 젊은 화가들을 위한 배려였다.
중년부터 말년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침묵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물었자 그가 대답했다.

“ ... 예술가는 가수처럼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한,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야 하지. 
그러나 목소리가 더듬거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바로 은퇴한 후 자신을 숨겨야 해. 
그동안 나는 명성을 쌓아 왔어.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했고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러나 내 목소리가 더듬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더 이상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사람들은 쿠인지이라는 화가가 있었다고 말하겠지. 그러나 나는 영원히 쿠인지로 남고 싶어...“

실제로 그는 가끔 친구들을 화실로 초대해서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곤 했는데 
하나 같이 친구들의 넋을 놓게 한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스스로에 대해 경계했던 쿠인지의 깔끔한 면모를 엿 볼 수 있다 

쿠인지의 <드네프르강의 달빛 어린 밤 (Moonlight Night on Dneper)>은  
그림이 시가 되고 시가 그림이 되는 작품이다.  
그림 속 드네프르강은 짙은 어둠 속에 휩싸여 있으며 청아한 달빛에 물들어 있다.  
마치 눈 앞에서 생생히 펼쳐지듯 노란 색의 강한 달빛은 
서서히 녹색빛을 품으며 가장자리로 퍼져나가고 있다.  
색채의 움직임이 탁월하다. 

이 작품으로 쿠인지는 대중들의 우상이 되었다.  
중앙에 떠 있는 달은 점차 옮겨 가며 빛을 뿌리고 있다.  
작품 전체에 깔린 낭만을 어떤 말로든 표현하고 싶은데 도대체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일반적인 기법으로 이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의 평가였다.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여기에는 고집스러운 그의 노력이 밑에 깔려 있다.  
그의 화실은 일종의 연구소 같았는데 그 ‘연구소’에서 색깔의 성질, 그림자의 성질,  
자연과 색상과의 관계에 줄기차게 매달렸고 마침내는 이런 걸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A Birch Grove, 1879. <자작나무 숲>. oil on canvas, 97 x 181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자작나무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라고 한다.  
풀 밭에 내려 앉은 부드러운 햇빛과 숲을 돌아 멀리 사라지는 길 위로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관객들은 몇 시간씩 이 작품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사실적이면서도 정형화된 기법이지만 표현력이 풍부한 이 그림은 그가 늘 추구했던,  
표현력이 가득 찬 구성이 나타나 있다.  
끝없는 스케치를 통해서 나무와 풀 밭을 완벽하게 배열하고 색깔의 구성을 통하여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햇빛이 전시관 벽을 뚫고 그림 뒷면에 닿아 있는 느낌 때문에 관객들은 그림의 뒤로 돌아가서  
다른 빛이 있는지 확인했다고 하니까 대단한 반응을 얻은 것은 확실하다. 

 

Dnieper in the morning, 1881. <드네프르 강의 아침>,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105 x 167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끝을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마음 둘 곳 모르네.
눈물 되어 흐르는 이슬을 머리에 이고
희미하게 터오는 여명을 마주한 채
강을 따라 흐르는 물안개에 내 마음을 싣네.

또 하루가 시작되면 그대 향한 그리움도 고개를 들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의 목마름이 더욱,
그리움의 속살을 파고드네.

어느 누가 답해줄 수 있을까. 그 끝이 머지 않았다고.
어느 누가 전해줄 수 있을까. 그 마음 변치 않았다고.

끝도 보이지 않는 벌판을 흘러가는 강물 위로
사랑을 떠나보낸 이들의 그리움이 일제히 피어나네.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지는 그리움 때문에 눈앞이 흐려지네.

끝내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마저 놓쳐 버리고,
강물에 채 몸을 싣지 못한 물안개 한 아름
흘려보내지 못한 그리움의 덮개를 삼아 가슴 깊은 곳에.

흐르는 강물 위로 태양이 떠오르네.
그대 그리워해도 좋을 하루가 다시 시작되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끝을 알 수 없어 더욱 커지는 그리움에 나를 맡겨
흘러흘러 그대 곁으로 가리니.

 

Evening in Ukraine, 1878. <우크라이나 저녁>.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81 x 163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석양 빛이 동네를 감싸고 있다. 이 작품도 시와 같은 느낌이 가득하다. 
빛에 의한 색깔의 변화로 전체를 구성하는 그의 능력은 
화실에서 끝없이 그가 반복적으로 실험한 결과였다.
그런 노력 끝에 얻은 테크닉으로 그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달빛 어린 밤과 
그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Ukrainian Night, 1876. <우크라이나의 밤>.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79 x 162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위 그림과 같은 구도이다.  
전형적인 우크라아나 시골집에 밤이 찾아 왔다. 
조그만 언덕 위에 마을이 서 있고 포플러 나무는 위로 뻗어 있다.  
고요와 침묵이 만상을 덮고 있다.  
그러나 달빛은 얼마나 맑은지 마을의 길과 집을 환히 비추고 있다. 
이 작품이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 출품되었을 때 같은 러시아 화가들로부터는 환호를,  
외국의 비평가들로부터는 대단한 관심을 받았던 작품이다

 

The North, 1879. <북쪽>.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1.

이 작품도 연작 중의 하나다.  
아마 호수에서 바라 본 북쪽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에는 쿠인지의 상상과 추억이 있지 않았을까?

 

On a Valaam Island, 1873. <발라암 섬에서>.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76 x 103 cm. Tretyakov Gallery Room 21

쿠인지가 라도가 호수로 여행을 하면서 그린 연작 중의 하나이다.  
바닥에 뒹구는 나무와 컴컴하고 뻑뻑한 숲, 화강암 돌 덩어리에 눈을 맞추다 보면 숲 어디선가 
조용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러시아의 깊고 깊은 전설을 이야기해 줄 사람이 나올 것 같다. 
이 작품이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신문들은 쿠인지의 재능에 대해서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After a Rain. 1879. oil on canvas. 102 x 15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n Abandoned Village, 1874. by Arkip Kuindzi.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1.

 

Ukrainian Landscape, <우크라이나 풍경>. by Vladimir Orl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1.

드네프르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한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앉았다.
강 건너 마을은 햇빛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고 강은 

저 멀리서 크게 몸을 뒤틀며 지평선을 향해 사라지고 있는데,
​장쾌하게 펼쳐진 풍경 속에 앉아 있는 사내도 점차 그 속으로 녹아 들고 있다.

거대한 바람개비를 달고 있는 건물은 아마 방앗간 같은 건물이 아닐까 싶다. 
간혹 이런 풍경 속에 빠져들고 싶다.
시선은 거리낄 것 없어 무한대로 뻗어가고 바람 소리, 풀잎들이 서걱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곳,
그 곳에 있으면 온 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깨어날 것 같다.

블라디미르 오를로프스키(Vladimir Orlovsky 1842-1914)는 당시에는 러시아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그를 선생님들이 상트페테스부르그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 추천서를 써 줄 정도였으며, ​재학 중일 때 은메달을 수상, 
1868년 스물 여섯의 나이에 학교를 졸업하면서 금메달을 수상하였고, 
자신이 졸업한 상트페테스브르그 아카데미의 풍경화 담당 교수가 되었다.

작품의 크기와 사실적인 풍경 모사는 독특한 그만의 스타일로 자리를 잡았고 
오를르프스키는 풍경화의 대가로 우뚝 서게 되었고, 쿠인지의 영향을 받은 오를로프스키에 대해 
‘사실적인 러시아 풍경화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화가’라는 평가가 주어졌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스부르그의 상류층이 오를로프스키의 주요 고객들이었지만 
곧 그의 작품은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는다.
아울러 명성이 올라가는 동안 그에게 작품 주문은 계속 되었고 
그의 작품을 구매한 사람 중에는 알렉산더 3세도 있었다.

그는 풍경화에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다.
작품 제작은 아주 신중하고 꼼꼼하게 진행되었고 장식성이 포함되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동시에 두 가지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을 하나로 묶는 그의 재능은 타고 난 것이 아니었을까?
일흔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고향에서도 많은 작품을 그리지 않았을까?

 

Tretyakov Gallery Room 21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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