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번 방까지 관람하고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 1층의 35번 방으로 간다. 
37번까지 19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그림이 계속되고, 
38번 방부터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이 시기는 19세기 후반 서유럽의 인상파로부터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까지 
다양한 유파가 한꺼번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미술의 일관성을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 
대표적인 작가를 언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림의 성향에 따라 몇 사람의 작품을 유형별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38번 방에 있는 그라바르(1871-1960)의 그림은 서유럽의 인상파 그림을 모방하고 있다. 
41-42번 방에 있는 세로프(1865-1911) 역시 인상파에서 시작 아방가르드로 넘어가고 있다. 
그것은 ‘소녀와 복숭아’(1887), ‘헨리에타 기르쉬만의 초상’(1907), 
‘오이로파의 납치’(1910)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43번 방의 코로빈(1861-1939)은 서유럽의 후기 인상파로부터 
독일 표현주의까지 작품 경향을 받아들인 것 같다. 
‘파리, 카푸친 거리’(1911)와 ‘물고기, 포도주, 과일’(1916)에서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 미술사에서 중요한 변화는 세기 전환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념적인 지도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알렉산드르 베노이스(1870-1960)를 중심으로 
잡지를 발간하면서 “예술세계 그룹 (World of Art group)”을 결성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해 나갔다.

그들은 페레드비츠니키의 예술이 지나치게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러한 경향은 44번 방의 세레브리야코바(1884-1967), 소모프(1869-1939)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전시공간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박스트(1866-1924)의 ‘살로메’와 
골로빈(1863-1930)의 ‘홀로페르네스로 분장한 가수 표도르 칼리아핀의 초상’이 
아주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해서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46번 방부터 48번 방까지 방은 일정한 기준이 없이 여라 미술가들의 작품이 섞여 있다.
다만 이들의 그림이 바로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로, ‘푸른 장미’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전시회를 통해 자신들의 화풍을 보여 주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파벨 쿠즈네초프(1878-1968), 마르티로스 사리얀(1880-1972), 
니콜라이 사푸노프(1880-1912) 등이 있다.

그리고 49에서 54번까지 방에 있는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그래픽들이 전시되어 있고, 
55번 방에는 12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그래픽이란 드로잉, 수채화, 파스텔, 프린트와 같은 형태의 그림으로 
6개월 마다 전시품이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보물이란 값진 금속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예술품과 미니어쳐, 이콘 등을 말하며, 
은으로 상감된 이콘, 금으로 장식된 예배당 등이 대표적이다.

 

<ROOM 35- 37> 19세기 후반 그림

 

On the Tiberiad Lake, 타이비어리드 호숫가. 1888.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5 

이스라엘 북부 골란 고원 아래에 있는, 요즘 이름으로는 타이비어리어스 호수이다.  
주변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의 모습이 많이 익숙하다.  
폴레노프가 예수님과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림 속 인물은 예수님을 상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우스의 모습에서 가져와 조금씩 변형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유대 지방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모습은 그림 속 남자의 모습과 많이 닮지 않았을까 싶다.  
길옆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다.  
길은 그 사이로 이어지겠지만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돌이 많은 길인 것은 분명하다. 

‘타이비어리어스’는 영어 Tiberias의 발음을 그대로 적은 것 같다.  
우리말 표기로는 ‘티베리아스’ 또는 ‘티베리우스’라 적어야 할 것 같다.  
히브리어로는 ‘티베랴’. 본래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있던 마을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에서 따왔다.  
그러니까 타이비어리어스 호수는 곧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때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바실리 폴레노프(Vasily Polenov 1844-1927)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깨끗하고 밝은 색,

색깔이 있는 그림자, 자유로운 붓 터치와 같은 기법을 소개했고 이 무렵부터

러시아 회화의 전통에 따라 사실적인 풍경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풍경화를 통해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진 러시아의 시적인 풍경들 전하고 싶어 했다.  
그의 기법은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풍경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Moscow Backyard. 모스크바 뒷마당. 1878.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80.1 x 64.5 cm. Tretyakov Gallery Room 35 

폴레노프의 유명한 1878년 그림 "러시아의 전형적인 안마당" 이다. 
폴레노프는 상트 페테르스부르그 태생으로 1863-1871년 황립예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동급생으로 이동파 미술가이자 유명한 사진사였던 라파일 레비츠키와 막역지우였다.   
그들의 서간문은 폴레노프 저택 갤러리에 보관중으로 당대 미술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폴레노프와 레비츠키는 둘 다 독신일 때 처녀의 들판이란 뜻의 "Devich'e Pole"  
거리에 있는 집의 다락방에서 함께 살았는데, 훗날 레비츠키가 이 집의 여주인과 결혼하였다.   
밝은 햇살, 푸른 하늘, 깨끗한 공기, 세상에서 제일 환하고 평온한 모습을 

표현한 듯한 그림 속 지역은 19세기 말엽 모스크바의 모습이다.  
<모스크바의 정원>은 19세기 모스크바 스타르이 아르바트 정경을 그대로 담아 놓았다.  
지금도 모스크바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붉은 광장과 함께 꼭 들르는 관광 명소로  
현재는 빌딩 숲이 우거진 대도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19세기에는 그림과 같았다고 한다. 

 찬란한 태양 아래 밝게 빛나는 모스크바 정원의 새파란 잔디 위에서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렇게 펼쳐지는 평온함과 건강한 생명력이 그림의 핵심이다.  
이 그림은 19세기 모스크바를 재현한 것이기 때문에 모스크바 도시 행사의 카탈로그 표지나  
국가적 차원에서 모스크바를 보여주어야 하는 책자같은 것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시 성립 850주년 기념행사 포스터에도 이 작품이 대표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Granny's Orchard. 할머니의 정원. 1878.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64.5 x 80.1cm. Tretyakov Gallery Room 35 

그림 속 정원은 잡초가 무성히 자리있고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어쩌면 버려진 듯한 느낌을 준다.  
할머니 혼자 사는 대저택 같은데 늙은 노인이 손보고 가꾸기는 너무 커 보인다.  
이미 연로한 할머니는 사실 누구의 도움 없이 산책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도시에 사는 손녀가 이렇게 찾아 와 따뜻한 햇빛을 선사해 주지 않는다면 할머니는 출입조차 힘들것이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않는 저택의 정원처럼 할머니의 삶도 외롭고 또 외롭다.  
할머니의 남은 인생과 내버려진 정원. 이 또한 얼마나 절묘한 비유한가. 

이제는 허리가 구부정해져 지팡이와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할머니가 정원 산책을 나섰다.  
뒤로 보이는 건물도 할머니만큼의 나이를 먹었겠다.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은 여름의 햇빛 아래 푸르름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 길을 걷는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상념이 떠오르겠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나만 늙어가는 것일까?  
분홍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에 비해 할머니가 입고 있는 검은색 옷은  
이제는 되돌아갈 시간이 없음을 알려주는 징표 같아서 마음이 언짢아진다. 

열두 살부터 체계적으로 드로잉을 배운 폴레노프는  
3년 뒤 풍경화가인 치스타코프에게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1863년 열아홉의 폴레노프는 법률을 전공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하는데 왕립 아카데미에도 입학을 한다.  
법학과 미술을 같이 전공하기로 한 것이다.  
성격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분야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폴레노프는 해내고 만다. 

폴레노프는 러시아-터키 전쟁의 (1877-1878) 종군 화가를 지내고 돌아온 후   
Peredvizhniki (이동파)에 참여했고, 파벨 트레치코는 

그의 그림을 좋아하여 다수 구입했다.   
그는 사실적인 풍경화에 집중하며 사람의 일상과 관련된 

러시아 자연의 시적 정적감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폴레노프는 외광파의 생생한 색채를 예술적 구성 처리와 결합시킨 

러시아 최초의 화가 중 일인이다.   
그가 발전시킨 원칙은 훗날 소비에트의 풍경화 발달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폴레노프는 1893년 셍페테르스부그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고,  
1926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인민화가로 지명됐다.   
그는 모스크바 미술, 조각, 건축학교에서 가르쳤고, 

아르히코프, 리비탄 등이 제자였다.   
폴레노프가 살던 집은 국립박물관으로 되었고, 

그가 살던 마을은 '폴레노포'라고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27년 83세로 사망.

 

Primae noctus, 1874. 초야권.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120 X 174 cm. Tretyakov Gallery Room 35 

폴레노프는 이태리, 프랑스의 역사적 주제를 담은 그림을 다수 그렸다. 
'나리의 권리, 초야권'이라는 작품은 나리에게 세 농노 처녀를 데리고 와서 선보이는 모습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유럽이지만 러시아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가는 그때까지도 농노 처녀들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귀족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귀족들은 농노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은 더더욱이 아니었다. 

​러시아 감상주의는 진보적인 귀족 계급 문화의 한 현상으로, 18세기 후반 문학 및 

예술 속에서 계몽주의적인 이성 우월주의의 위기로 인해 형성된 흐름이었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분출과 완성, 개인의 ‘감수성’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였고,  
사회보다는 한 개인이 문학적인 지각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었다.  
인간의 내면세계는 물론 인간 주위의 자연 세계도 파헤쳐 보이려는 특징을 가진다. 

​감상주의의 특징적 대비로는, 순결한 자연, 비도덕적 문명, 전원의 한적한 생활,  
번잡한 도회지 생활,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의 시, 이성적인 시 등이다.  
또한 감상주의적 경향에서는 민중의 정신적인 특성, 

민족적인 서사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된다. 

계몽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개방성, 사회적 기호와 자유로운 여론, 개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는 개별 인간의 고양된 가치에 의존하였지만, 

사회적인 인간의 구체적인 성격을 밝혀내지 못했고,  
인간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묘사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소작농이 소작세를 갚지 못했나 보다.  
이제 갓 피어 난 듯 싱그러운 소녀들이 지주에게 제물로 바쳐진다.  
지주는 음흉한 표정으로 소녀들을 훑어 보고 있다.  
그런 주인의 마음을 대변이나 하듯 지주의 사냥개들조차도 거만함이 묻어난다.  
성문 입구에서 안타깝게 가로막힌 채 절망하는 아빠의 애틋함이 

그림 한 쪽에서 강한 포인트가 되고 있다. 

젊은 여자를 대동하고 노인이 영주를 보고자 찾아왔다.  
한눈에 봐도 고약한 인상을 가진 영주는 허리에 손을 척하니 올리고  
한 계단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불안한 눈으로 영주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처녀의 눈빛은 겁에 질려 있다.  
곧 결혼을 앞둔 처녀가 초야권을 영주에게 바치러 온 것이다.  
중세 스위스에서는 남편이 아내 될 여자의 초야권을 갖기 위해서는 ‘초야세’라는  
세금을 내야 했다는 기록도 있다는데, 지금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성직자나 그 지방의 영주가 그 권리를 행사하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권력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하는 습성이 있다.  
어린 소녀의 가느다란 한숨소리, 음흉한 영주의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고  
하루를 마감하는 해는 건물의 흰 벽에 불안한 붉은 그림자를 남기고 넘어가는 중이다.  
그건 그렇고 눈에 거슬리는 개 두 마리.  
왜 권력자들은 개를 데리고 나타나는 모습이 많을까? 하는 짓이 개와 닮아서 그런가? 

폴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높은 계급의 장교였고 한편으로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미술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이런 부모의 재능은  
두 사람 사이의 아이들이 미술과 과학을 좋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Early Snow. 철이른 눈. 1891.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5

아직 잎들이 다 지지도 않았는데 눈이 내렸다. 
지평선을 건너온 찬바람은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들을 흔들고 있고 
아스라한 지평선은 파란색으로 남아 다가올 겨울을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다. 
아직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크게 휘어 나가는 강 위로 쌓인 눈은 조만간 강물도 덮을 기세이다. 
겨울은 침묵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에게 침묵해야 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침묵 뒤에 오는 고요함은 다시 그 뒤를 이을 생명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기에.

8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폴레노프는 공화국 인민화가의 칭호를 받는다. 
러시아의 풍경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에게 어울리는 영예였겠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River Klyazma. Zhukovka. 클리즈마 강. 1888.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5

 

Pond in Abramtsevo.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5

 

Overgrown Pond, 숲이 무성한 연못. 1879.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5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풍경이다. 
수련이 떠 있는 연못, 작은 선착장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고 
우거진 숲의 품에 안긴 듯한 벤치가 보인다. 
숨은 듯 만 듯한 여인은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다. 고요하고 싱그럽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 언젠가 본 듯한 풍경화를 ‘무드 풍경화’라고 한다. 
흰 들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길은 여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 
조명을 흐리게 하고 음악이 있다고 해서 ‘무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괜찮다면 연못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1871년 스물일곱의 폴레노프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며 대학을 졸업한다. 
또한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야이로 딸을 일으키심’이란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다. 
이렇게 되자 폴레노프의 고민이 시작된다. 
금메달에 대한 부상은 유럽 여행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었다. 
몇 달을 고민한 폴레노프는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하느님도 편애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Sick Girl. 아픈 소녀. 1881.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5

 

Erechtheion. The Portico Of Caryatids. 에레크테이온 신전.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5

 

Fountain Of The Virgin Mary In Nazareth. 나사렛 성마리아 샘물. 1882. by Vasily Pole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5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35. 바실리 폴레노프(Vasily Polenov) 작품 전시방

 

Portrait of Anton Pavlovich Chekhov, 1898.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초상. 
by Osip Emmanuilovich Braz. oil on canvas. 80 × 120 cm. Tretyakov Gallery Room 36 

러시아 문학의 거장 중 하나인 안톤 체홉의 초상화다.  
이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그래, 체홉이 의사였지' 하는 느낌이 든다. 
체호프는 러시아 문학사를 이야기할 때 유난히 많은 분량을 할애받는 작가다.  
이는 체호프의 작품이 워낙 뛰어나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이전과는 다른 문학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즉, 체호프는 그간의 러시아 문학사를 톺아보고 정리하는 마디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가인 셈이다. 

단편소설의 거장으로서 체호프의 작품에서는 

동시대 여타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여러 특징이 나타난다.  
먼저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 사건이 뒤섞이거나,  
사건이 존재함에도 의도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기묘한 서술이 발견된다.  
극단적으로는 사건이 아예 없기까지 하다.  
또 별거 아닌 사건을 침소봉대하는가 하면 심각한 사건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취급하기도 한다.  
사건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당대 리얼리즘의 영향을 생각하면 가히 파격적이다.  
그는 이러한 기법을 통해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거나 작품 자체를 순식간에 끝내버리곤 한다. 

근대 소설의 거장으로서 문학계에 큰 파란을 체호프의 세계란 명령이 없는 무념무상의 세계였다.  
이 말은 즉 체호프 이전의 문학은 명령이 있는 유념유상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체호프는 주로 불가지론의 입장에 섰고, 혁명 전야의 혼돈기에 대다수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구체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끝까지 꺼렸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떠올리면 알 수 있듯이 그간의 문학은 교훈과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또 그래야만 훌륭한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체호프는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렇다면 체호프는 왜, 어떻게 이러한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일까? 
먼저 그의 본직이 의사였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답이 없으면 없다고,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 자연과학자의 입장은  
톨스토이와 같은 사상가의 삶과는 대비되는 면이 있을 테다.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시베리아 · 사할린 여행이었다.  
범죄자들의 유배지인 황량한 사할린에서 그는 비인간적인 삶과 일상적인 매춘,  
그리고 끊임없는 기아를 보며 인간의 극단을 목격한다.  
이 여행 이후 체호프의 작품 세계는 톨스토이를 비롯해  
당대의 주된 사조였던 비판적 리얼리즘과 완전히 단절된다.  
비판적 리얼리즘이 정말로 ‘리얼’을 담보하고 있는지 회의하게 된 것이다. 

그는 리얼리즘의 현실을 모르는 공허한 훈계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작품에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렇듯  
리얼리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작가란 세상을 꿰뚫고 판단을 내려주는 재판관이 아니었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재판관이 아닌 증인으로서 사실을 서술하는 것,  
체호프의 문학 세계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오시프 브라즈 (Osip Emmanuilovich Braz 1873 -1936)는 러시아-유대인의 사실주의 화가다. 
브라즈는 현재의 우크레이나 지역인 오데사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1891-93년 뮌헨예술학교에 다녔다.   
뮌헨에서 파리, 네덜랜드로 가서 고전의 대가들을 연구했다.   
유럽 미술을 접하며 배운 것이 평생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95-96년 브라즈는 셍페테르부르그 예술학교에 다니며 일리야 레핀 스튜디오에서 공부했다. 

다음해, 브라즈는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 세르게이 이바노프 등 러시아 문화계 인물들의 초상을 그렸고,  
그 중 안톤 체홉의 그림(위)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프랑스, 크리미아, 핀랜드의 풍경화도 훌륭하다.  


1907-11년까지 브라즈는 프랑스에 머물렀기에, 프랑스미술의 발전 동향에 영향받았다.  
1914년 그는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에르미타쥐 뮤지엄의 회화 복구 위원 중 하나였고,  
소비레트 건국 초장기에 그는 에르미타쥐의 큐레이터가 되었다.   
1924년 브라즈는 해외 반출 목적으로 그림을 사 모았다는 죄목과 간첩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동시에 17세기 네덜랜드 명작 등 그의 콜렉션은 국가에서 차압했다.   
1926년 레닌그라드 예술협회의 탄원으로 풀려난 후,  
파리에서 정착하여 그림을 그리고 골동품 거래 및 그림 콜렉션을 하며 살았다. 

 

[영상] 오시프 브라즈(Osip Braz) : A collection of 30 paintings (HD)

 

Silence has settled, 1890. 내려 앉은 고요. by Nikolay Dubovskoy.  
oil on canvas. 76.5 x 128 cm. Tretyakov Gallery Room 36 

폭풍 전의 고요함! 우리 인간은 이런 풍경앞에서 불안한 마음에 두려움이 솟구치기도 하지만  
거대한 자연앞에 경외감을 가지기도 한다.  
작가는 폭풍 오기 전 드라마틱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거대한 먹구름이 화폭의 반을 차지하게 그려  
폭풍전야의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한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다가오는 자연의 힘을 그렇게 두보프스코이는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말엽 대표 풍경화이기도 하다. 

때는 늦가을 저녁, 호수 위로 거대한 구름이 밀려 와 자리를 잡았다.  
해는 이미 졌지만 구름의 머리는 남은 해의 잔광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다.  
그 뒤 검은 구름이 다시 흰구름을 덮어 오고 있다. 

하늘의 이런 변화를 호수는 흔들림 없이 그대로 안았다,  
검은 점으로 떠 있는 배는 오색으로 불타고 있는 육지를 향하던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움직이는 듯 하지만 멈춰 있고  
흔들리는 듯 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몽환의 세계와 같은 고요함이 그림을 가득 채웠다.

 

화가 니콜라이 두보프스코이 (Nikolay Dubovskoy 1854~1918)는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에 대한 기록도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단편으로 흩어져 있는 것들을 모아보겠다.  
그는 처음에 키에프 군사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장학금을 받고 
상트 페테스부르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진학한다.  
군사학교가 당시에는 고급 교육기관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미술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겠다. 

열 여덟 살의 그를 아카데미에서 지도한 선생님은 ‘러시아 풍경화의 얼굴을 바꿨다’라는 평가를 받은  
미하일 콘스탄티노비치 클로트 (Mikhail Konstantinovich Clodt, 1832~1902)였다. 
그런데 보통은 6년 이상 공부를 하는 아카데미를 

어찌 된 영문인지 두보브스키는 4년 만인 스물 두 살에 그만 둔다.  
아카데미를 나온 두보브스키는 바로 다음 해 독립 풍경 화가로서 작품 전시회에 참석한다.  
가끔은 사회가 정해준 길을 벗어나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길은 너무 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길 위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 길을 끝까지 간 사람들은 오래 기억 속에 남는다. 
  
낭만주의부터 상징주의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장르의 화풍을 잠깐씩 거치면서  
두보브스키의 작품 속에는 러시의 풍경들이 등장했다.  
겨울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았는데, 일출과 첫눈, 비 내리기 전의 모습과 내린 후의 풍경  
그리고 고요하고 적막한 자연의 모습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1886년, 스물 일곱의 두보브스키는 이동파의 멤버가 된다.  
기본적으로 그는 스승인 클로트처럼 확실한 사실주의 화풍을 유지하면서 수채화 작업도 병행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두보브스키와 그의 스승이었던 클로트가 걸었던 길이 달라진다. 

스승인 클로트는 아카데미 교수가 되면서 이동파를 탈퇴하라는 압력을 받고 마침내는 이동파를 떠난다. 
그런데 두보브스키는 작품을 통해 얻은 명성으로 1898년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지만  
오히려 그 다음 해 이동파의 실질적인 리더가 된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지만 이동파도 그 이전까지 러시아 미술계를 움직이던 힘이 빠졌겠지만  
두보브스키의 인간적인 역량이 작용한 것 아닌가 싶다. 

1890년대 두보브스키는 유럽과 근동지방에 대한 여행을 시작한다.  
한 번으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빈번하게 드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1900년, 두보브스키는 아카데미 정회원이 된다.  
뒤 이어 1911년 자신이 젊었을 때 공부했던  
상트 페테스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풍경화 화실의 주임 교수로 선발된다.  
경력으로 만 본다면 스승인 클로트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걸은 셈이 된다.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라는 말이 두보브스키에 대한 이야기로 가장 정확할 것 같다. 
1918년 그는 59세를 일기로 빛과 고요함이 가득한 러시아 풍경을 우리에게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다.

 

[영상] 니콜라이 두보프스코이(Nikolay Dubovskoy) : A collection of 66 paintings (HD)

 

Golden Autumn, 1887. 황금빛 가을. by Ilya Ostroukhov. 
oil on canvas. 48.2 x 66.3 cm. Tretyakov Gallery Room 36

가지고 있는 몸 속의 모든 힘을 다 뿜어 내는 것 같은 잎들에게서 문득 경건함이 느껴진다.
마지막은 늘 이렇게 화려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일몰과 가을의 단풍을 볼 때이다.
곧 떨어져 미라처럼 마를 잎들의 모습은 아주 멋진 삶을 살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숲 사이로 난 작은 길 위, 산새도 잠시 가을 속으로 깊게 빠져 든 모습이다.

일리야 오스트로우호프 (Ilya Ostroukhov 1858~1929)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연의 풍경을 묘사하는데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때문에 사실적인 기법으로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냈는데 거기에 시적인 느낌을 더했다.
그의 작품이 사진 같은 정교함에 머물지 않는 까닭이겠지. 
한편으로 오스트로우프는 뛰어난 미술품 수집가였다.
부유한 집안 환경을 배경으로 그는 러시아 대가들의 작품을 모을 수 있었다.
물려 받은 재산을 쉽게 날려 버리는 2세들에 비해 그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림의 장소는 모스크바 근교에  위치한 20세기 초반 러시아 최고 예술 후원자인 
마몬토프 생가 아브라함 쩨보의 한 산책로다. 황금 가을의 최절정기를 그렸다. 
작가는 황금색의 화려한 낙엽을 표현하기 위해 인상주의적 터치를 사용하여 환상적으로 표현하였다. 
또 각 소재별로 표현의 선명도에 차이를 두어 자연스럽게 숲 속의 공간감이 느껴지게 한 기법이 대단하다.

모스크바에서 멀지 않은 곳에 러시아 예술가들이 모이던 아브람체보라는 곳이 있는데, 
마몬토프라는 사업가가 투자를 한 곳으로 문학가와 화가들이 모여 
일종의 예술인 마을로 성장한 오스트로우프는 이 곳에서 화가들과 어울리게 된다.

1885년, 스물 일곱이 되던 해 오스트로우프는 러시아의 재능 있는 젊은 화가들이 참여하는 
이동파에 가입하여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
러시아 곳곳에서 전시회를 통해 그들은 미술 작품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898년 오스토르우프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운영위원회 멤버가 되었고 
1905년부터는 미술관 운영 책임자로 있는 동안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일어나 
혁명 발발 이후 러시아 혁명 정부는 오스트로우프가 그 동안 개인적으로 수집했던 미술품들을 
국유화 한 다음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으로 옮긴다.

1929년, 일흔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스트로우프는 
국가의 소유가 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미술 이론가로로 활동을 했고 광범위한 정보를 담은 미술에 관한 책들도 펴냈다.

 

[영상] 일리야 오스트로우호프(Ilya Ostroukhov) 서정이 담긴 러시아 풍경

 

The Sick artist. 1892. 아픈 예술가. by Aleksey Korin. 
oil on canvas. 78.2 x 109 cm. Tretyakov Gallery Room 36

알렉세이 코린(Aleksey Mikhailovich Korin 1865-1923)은 러시아 장르 화가였다. 
그는 이동파(Peredvizhniki)의 회원이자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학교
(Moscow School of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의 교수였다.

 

여자 광부. by Nikolai Alexeyevich Kasatkin. 1894. 
oil on canvas.  65.4cm x 45cm. Tretyakov Gallery Room 36

작품의 원제목을 찾아 다녔지만 영어로 표기된 것은 없고 일어로 된 것이 있었다. 
아마 탄을 캐고 난 뒤 대충 세수를 한 모습이다. 
얼굴과 손에 남아 있는 석탄 흔적과 달리 얼굴은 아주 맑다.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그녀의 얼굴을 밝게 했을까? 
노동의 고단함 보다는 건강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미소가 참 곱다. 
자세는 또 얼마나 당당한가? 
이런 미소와 눈매가 시간이 흘러 이데올로기를 품게 되면 
웃음은 사라지고 굳게 다문 입술과 부릅뜬 눈으로 등장한다.


화가 니콜라이 카사트킨 (Nikolai Alexeyevich Kasatkin 1859~1930)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자작농이자 석판화가였던 아버지의 지도 아래 그는 처음으로 그림을 배웠다. 
아버지의 재능이 아들에게 흘러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열 네 살이 되던 1873년, 카사트킨은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 
(Moscow School of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에 입학한다.

학교에서 10년 넘게 공부를 하는 동안 카사트킨을 지도한 선생님 중 한 명은 바실리 페로프였다. 
페로프는 카사트킨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페로프 자신이 부르주아 계급의 비도덕성에 대해 엄정한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카사트킨 역시 스승의 그것을 배웠겠다.

학교에 재학 중이던 카사트킨은 1878년에는 초상화로, 
1882년에는 자연을 묘사한 드로잉으로 은메달을 수상한다.
졸업하던 1883년에는 ‘교회 광장의 걸인들’이라는 작품으로 또 은메달을 수상하는데 
요즘 말로 옮기면 이 때 학교 대표 화가 정도의 영예를 얻는다. 
메달이 꼭 실력의 우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은 확실히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1878년 처음 은메달을 수상한 때부터 카사트킨은 출판협회에서 만든 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한다. 
1891년, 그 유명한 방랑파의 멤버가 되는데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가입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 시대를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 초기까지라고 한다면 
이 시기 그의 그림 주제는 일상의 장면들을 묘사한 것으로 이야기가 담긴 것들이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카사트킨의 작품에 변화가 오는데, 
산업 현장들을 주제로 방향을 돌린 최초의 러시아 화가 그룹 중 한 명이 된다. 
그의 작품에 적갈색과 청색이 많이 등장했고 붓 터치에는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1894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카사트킨은 자신이 졸업한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의 선생님이 된다.
모교에 선생님으로 부임하는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정말 부럽다. 
선전 문구를 흉내내면 ‘기쁨 두 배’가 아닐까 싶습니다. 
1890년부터 카사트킨은 모스크바 미술애호가 협회를 비롯 여러 곳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한다. 
이 때 톨스토이와 친분을 쌓게 되고 자주 톨스토이가 있는 농장을 방문, 많은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은메달을 수상한다. 
카사트킨은 여행을 아주 많이 한 화가다. 
러시아 전역을 자주 여행했는데 그 범위와 연대를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카서스와 우랄 산맥을 비롯 파리와 베를린 그리고 1901년부터는 매년 이탈리아를 찾았다. 
그 외에도 터키와 영국,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으니까 대단한 에너지를 가졌던 것 같다.
1905년 1월 9일, 열악한 근무 환경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러시아 황제가 있는 동궁 앞에 모여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곧 이어 군인들의 발포가 이어졌고 수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렸다.
 ‘피의 일요일’이었고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혁명에 눈을 뜬 카사트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 선두에 서게 된다.

1917년 10월, 마침내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다. 
카사트킨은 거리에 화실을 차리고 이 혁명 성공을 위한 축제의 디자인에 참여한다. 
1924년, 영국 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묘사하기 위해 영국과 웨일즈를 찾기도 한다. 
화가와 혁명가가 동시에 그 몸 안에 있었나보다. 
1929년,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 생애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인 전시회를 개최한다. 
아마 그에 대한 세상의 축하가 아니었을까 싶다.
카사트킨은 19세기 비평적 사실주의와 혁명 러시아의 예술을 연결하는 고리라는 평을 받고 있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 예술의 속성 중의 하나라고 보면 예술가도 혁명가라고 할 수 있겠다.

카사킨은 러시아 제정시대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화가로 변신한 성공적인 예이다.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창시한 선구자로서 미술계의 '고르키'라 불린다.  
부친은 판화가이자 석판화가였다. 
모스크바 미술, 조각, 건축 학교를 졸업할 때 "교회문 앞의 거지들"로 메달을 받았다.  
"이동파" 회원이었고, 1894년부터 1917년까지 모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30년 간 이반 사틴의 달력, 교육용 석판화에 삽화를 담당했고,  
농노해방령(Emancipation Reform) 50주년을 기리는 백과사전과 "그림 속의 러시아 역사" 전집 제작에 관여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그가 가르치던 황립예술학교가 폐쇄되고, 
1923년에는 최초의 "공화국 인민예술가"로 호칭됐다. 
1924년 카세킨은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삶을 기록했고, 
2년 후 "혁명박물관"을 위한 초상화들을 그렸다. 

카사킨은 1930년 "혁명박물관"에서 자신의 최근작을 소개하던 중 급사했다. 
향년 71세. 1956년 소비에트는 그를 우표로 기렸고, 
1971년 다시 카사킨의 여성 광부 그림을 우표로 발행했다.

 

[영상] Nikolay Alexeyevich Kasatkin 작품 모음

 

The cranes are flying. 1891. by Alexei Stepanovich Stepanov. 
canvas, oil, 620 x 110 cm. Tretyakov Gallery Room 36

알렉세이 스테파노프 (Alexei Stepanovich Stepanov 1858 ~ 1923)는 
러시아 장르 화가, 일러스트 레이터 및 미술 교사였다. 
그는 이동파(Peredvizhniki) 회원이자 "러시아 예술가연합"의 창립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이었고 크림 전쟁에서 장교로 봉사했다. 
공립학교 교육을 마친 후 그는 Konstantin Surveying Institute에 들어가 1879년 공식 측량사로 졸업했다. 
1880년부터 1883년까지 그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서 
Illarion Pryanishnikov 와 Evgraf Sorokin이 주관하는 수업을 받았다. 

1888년에 그는 이동파와 함께 전시를 시작했고, 이듬해 그의 그림 
"Moose Herd"는 Pavel Tretyakov 가 구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렌틴 세로프(Valentin Serov)는 스테파노프가 그의 옛 모교인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서 가르치도록 그를 초대했다. 
그는 나중에 교수로 지명되었고 1918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894년에 그는 미술 수집가 니콜라이 메딘체프(Nikolai Medyntsev 1841-1904)와 
그의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독일,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를 방문하여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그는 메딘체프의 딸인 류드밀라(Lyudmila)와 결혼했다. 
1903년에 그는 이동파에서 나와 "러시아 예술가연합"을 결성한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2년 후, 그는 그의 그림 "아침 인사"로 임페리얼 아카데미에서 "아카데미션"칭호를 받았다. 

 

[영상] Alexei Stepanovich Stepanov 작품 모음

 

Old Suram pass. by Alexander Alexandrovich Kiselyov. Tretyakov Gallery Room 36

알렉산더 키셀료프 (Alexander Alexandrovich Kiselyov 1838-1911)는 러시아의 풍경화가였다.
그는 러시아 해군 요새의 군대에서 태어났으며 생도군단(Arakcheev Cadet Corps) 에서 
첫 번째 학교 교육을 받았다. 
1852년에 그는 제2 상트 페테르부르크 생도군단으로 편입되었지만 
1858년 훈련 과정을 마치기 전에 사임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 주립대학에 입학했다. 
학교는 1861년 학생 불안의 시기에 일시적으로 문을 닫아 제국 예술 아카데미로 편입했다. 
1864년에 그는 "Artist Third-Class"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듬해에 그는 결혼하여 하르키우(Kharkiv)로 이사하여 그곳 지방은행에서 일했다. 

1875년에 그는 이동파( Peredvizhniki )의 회원이 되었다. 
2 년 후, 키셀료프는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소녀들을 위한 문법 학교에서 가르쳤다. 
수년 동안 그는 러시아와 코카서스를 돌아다니며 모스크바에 있는 집에서 완성할 그림을 스케치했다. 
1893년에 그는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897년에 교수가되었다. 

 

The Return Journey, 귀환 여행. by Abram Efimovich Arkhipov
Abram Efimovich Arkhipov The Return Journey painting - The Return Journey print for sale

아브람 아르크니포프(Abram Efimovich Arkhipov 1862-1930)는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삶에 지친 러시아 여성들이 강건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르크니포프는 러시아 전통 드레스와 민족 의상을 차려입은 농부들을 활기찬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아르크니포프는 모스크바 동남쪽 랴잔이라는 지역의 외딴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열 네 살이 되던 해, 
그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모스크바 종합 예술학교을 다니도록 했다.

공부를 시작한지 7년이 지난 1883년, 아르크니포프는 상트페테스부르그에 있는 ​
왕립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서 제작한 작품들은 왕립 아카데미가 
영구 소장품으로 지정할 정도로 뛰어 났으며, 1890년, 
아르크니포프는 이동파에 가입, 19세기 후반 러시아 미술의 역할은 대단했다.

물론 화풍은 사실주의에서 벗어나지는 않았고 화가로서의 연륜이 더 해지면서 
그의 작품은 시적인 느낌이 강해졌고 작품의 특징 중 상황이나 
인물의 행동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에 지친 러시아 여인들의 모습이 담긴 풍속화를 그리던 아르크니포프는 
1900년대부터 러시아 북부와 백해 (White Sea) 해변가 풍경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 ​러시아에 대한 애정과 헌사가 담긴 고요하고 장중한 ​그림을 그렸던 화가였다.
1924년, 아르크니포프는 소련예술가 동맹에 가입하여 
인민 예술가 칭호를 받은 첫 그룹에 그의 이름을 올려 놓는다.

 

[영상] Abram Efimovich Arkhipov : A collection of 59 paintings (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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