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28. 바실리 수리코프 작품 전시실

러시아 역사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화가는 바실리 수리코프다. 
수리코프의 역사화는 유장하고 장엄한 분위기와 다소 음울하고 사색적인 색조가 특징이다. 
그래서 누가 봐도 '러시아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인상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리코프의 장엄함과 음울함에는 분명 저 대륙의 광활함과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가 담겨 있다.

다른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러시아적 풍미가 충만하다. 
이 작품은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위해 어떤 핍박도 마다하지 않은 용감한 귀족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건초가 깔린 수레 위에 쇠사슬로 묶인 모로조바. 
그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비웃는 사람도 있지만, 안타까 워하고 슬퍼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지체 높은 여인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추운 눈밭을 가르며 무서운 형벌의 운명을 지게 되었을까?

바실리 수리코프는 '이동파' 일원으로 레핀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주로 대형 크기의 러시아 역사와 관련된 주제를 즐겨 그렸으며,  
사실주의 역사화의 거장으로 칭송 받았다.  
1877년부터 모스크바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시베리아의 카자흐 가정에서 태어난 수리코프는 조상들의 파란만 장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이주민' 혹은 '일당 노동자'라는 의미를 지닌 '카자흐'는 무거운 세금과  
강제노역을 피해 변경으로 달아난 농노와 그 자손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품팔이, 수렵, 약탈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등  
용맹성과 강인한 개척정신을 보여주었다.  
수리코프는 이런 조상들의 삶을 의식하고 자신의 예술 속에서  
민중적이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가치를 중시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

 

Tretyakov Gallery Room 28. 바실리 수리코프 작품 전시실

이 작품은 그리스 정교의 구교와 신교의 분쟁을 테마로 민중적 주제를 제시한 그림이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구교(분리교) 즉, 러시아 구세력을 상징하는 
모로조바 부인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그림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선택 받지 못한 계층으로 삶의 고통, 소외감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델의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굴곡있는 러시아의 힘든 역사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러시아 여인들의 굳은 의지가 그림에 절절히 배어 나온다. 
이 작품은 여성 심리 묘사가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히며 레핀과 함께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끌어 올린 대표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림은 17세기 러시아의 종교 대분열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교회 개혁과 교권 확대를 위해 러시아 교회의 전례를 
그리스 식으로 개편하려 하자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들고 일어났다. 
후자는 옛 의식을 고수하는 점에서 구교도로 불렸는데, 이들 구교도 뒤에는 일부 대귀족이 있었다. 
이들은 구교도 운동을 통해 구습을 지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차르 알렉세이의 중앙집권적 권력을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반면 차르는 니콘의 종교개혁에 기대어 전 동방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를 원했다. 
양쪽 다 열정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그 충돌은 요란했으며, 
결국 차르는 구교도들을 파문하고 화형에 처했다. 
구교도의 중추인 대주교 아바쿰(1621-1682)도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와 같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2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분신자살하는 등 
구교도들은 격렬히 저항했으며, 끝내 짜르도 이들을 완전히 '박멸'할 수 없었다. 
이들의 신앙은 면면히 이어져 18세기에는 그 권리를 다시 인정받았고, 
1905년에는 이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허락하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림의 여주인공 모로조바는 종교 대분열시 구교도 편에 섰던 대귀족 
프로 코피 소코부닌의 딸이자 역시 특권 귀족인 모로조프의 부인이다. 
여동생 우르소바와 더불어 옛 신앙을 수호하려고 개혁에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보로프스크 수도원 감옥에 유폐되어 삶을 마감했다. 
모로조바는 구교 의 지도자 아바쿰과 왕래하며 그의 가족을 재정적으로 도와 차르의 분노를 샀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녀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아니, 확신이라기보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빛을 발한다. 
수레 곁에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쫓아가는 동생 우르소바는 신앙적 열정 속에서도 초탈한 듯한 인상을 보여 준다.

겉으로 드러난 빛깔은 어떠하든 이 두 사람의 신앙 목표는 같다. 
이들의 신앙 앞에 무릎 꿇고 가호를 빌거나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모스크바 거리의 사람들은 절대 권력에 억눌린 민중의 한을 대변한다. 
지독한 탄압 속에서도 구교도의 신앙이 농민과 상인, 장인 등 민중의 마음을 사고 
그들의 연대 의식과 저항 정신과 만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포착된 그림이다. 

그림은 분리파의 거물이었던 대귀족 모로조바가 어느 겨울날 먼 귀양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사슬에 묶인 채 짚으로 바닥을 깐 초라한 썰매에 몸을 맡긴 모로조바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  
그는 오른손을 들어 두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 내지르며 저항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화면 우측에는 분리파들이 안타깝고 슬픈 얼굴로 그를 배웅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개혁파들이 유쾌한 얼굴로 패배자를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대립의 패배자는 분리파 뿐이었을까.  
니콘은 러시아정교회를 과도한 민족주의로부터 구하고 교회의 일체성을 강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투쟁의 과정에서 파문한 수많은 인재들을 상실함으로써 
교회의 역량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우위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하다가  
1667년 주교회의에서 파면되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1681년 아바쿰보다 오히려 한 해 먼저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실행한 사회전반의 개혁에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정교회의 수장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복속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 정교회는 두 번에 걸친 내부분열을 거치면서  
그 화려했던 권력을 세속 군주에게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Self-Portrait. 1879. 바실리 수리코프 자화상.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 80 X 1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바실리 수리코프 (Vasili Ivanovich Surikov)는 1848년 시베리아의 카자흐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졸업 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베로네제,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의 그림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들의 색채 기법을 받아들였다.

1870년대의 러시아 제실(帝室)아카데미에 대항하여 회화의 리얼리즘을 지향한 진보적 그룹인 
'이동파(移動派)'에 들어가 레핀(Ilya Repin, 1844~1930)과 함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주로 러시아 역사에서 소재를 찾았으며, 대표작에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
<베료조프에서의 멘시코프><스테판 라진>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파웰 트레치야코프가 구입을 했고, 
그의 후원으로 수리코프는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7년 사랑하던 아내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자 수리코프는 
그림을 포기하고 종교에 빠져들었으며 고향인 시베리아로 떠났다. 
오랜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몇 년 뒤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191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Boyarynya Morozova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1887.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304 x 587.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모로조바(Feodosia Prokopiyevna Morozova ,1632–1675)는 귀족(okolnichi)인 
프로코피 소고브닌(Prokopy Feodorovich Sokovnin)의 딸로 열일곱 살에 
역시 귀족(boyar)인 모르조프(Gleb Morozov)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이 1662년에 사망하여 일찍 홀로 되었으나 그녀의 지위는 여전했다고  한다. 
전례 개편 과정에서 구교도를 이끌었던 대주교 아바쿰 (Avvakum)이 모로조바의 정교회 신부였다. 
모로조바는 계급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구교도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동생 우르소바(Evdokia Urusova)도 구교도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르조바는 차르 알렉세이 1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1671년에 체포되어 보로프스키의 성 파프누티우스 수도원(St. Paphnutius Monastery, Borovsk)에 
감금되었고 그곳에서 1675년 1월에 일생을 마친다. 
이런 그녀의 일생은 구교도들에게 순교자의 삶이었을 것이다. 

레핀과 더불어 러시아 이동파의 대표적인 역사화가인 수리코프는 개편된 전례에 반대하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벌인 대귀족부인 구교도 모로조바가 끌려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건에 대한 세력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그녀의 주장이 뭔지가 모스크바 길거리의 설경과 함께 펼쳐져 있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이 반대파의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모로조바는 차르에 맞서다 수도원에 유폐돼 삶을 마감한 역사적 인물이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쇠사슬에 묶인 이 귀족 여성 주위에서 민중들이 눈물을 흘린다.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역사화는  
당대 현실을 향한 정치적 발언임이 분명하다.  -고명섭 한겨레신문 기자

까마귀처럼 새까만 옷, 창백한 낯색에 광기 어린 표정, 
이 강렬한 인상의 여인은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다. 
17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를 이루는 사건은  
바로 총주교 니콘과 사제 아바쿰의 대결이었다. 
교회에서 미신적 요소를 제거해 근대화한다는 니콘 주교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것은 교회 권력보다 교묘한 왕권강화정책이었다. 

사제 아바쿰은 교회 개혁에 반대하고 기존의 전근대적 종교의식을 옹호했다.  
사제 아바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박한 종교생활을 하던 기층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황제보다도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개혁이 단행되었고 아바쿰을 지지하던 구교도들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구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수리코프가 그리고자 한 것은 그녀의 순교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순교를 둘러싼 여러 반응들이다.  
그림 왼쪽에 이빨 빠진 하아버지와 그 옆의 남자는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어쩔줄 몰라하는 젊은 여인은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이고,  
그 옆의 여인도 고개를 숙여 숭고한 순교에 깊이 경배한다.  
마차 옆에 걸어가는 붉은 색을 입은 여인은 그녀의 동생인 우루소바 공작 부인이다.  
언니를 따라서 먼 길을 함께 거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은 그저 재밌다고 키득거린다. 

모로조바 부인을 싣고 가는 썰매는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비록 그녀에게 동감하더라도 검은 옷의 사제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두려움 없이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은 화면 오른편의 걸인이다.  
추운 겨울 맨발에 어깨의 맨살까지 드러난 참혹한 모습이지만 목에 걸린 사슬로 보아 고행승이다.  
오므라든 발가락은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를 실감나게 한다. 

수리코프의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장대한 서사성과 더불어 놀라운 장식성을 가지고 있어서  
베누아는 카펫의 그림 같다고 평했다.  
수리코프는 사실적인 장면 묘사를 위해 우르소바 부인의 진주 장식 모자,  
노부인이 걸친 금실로 수놓은 숄과 외투, 17세기의 의상과 장신구, 건물의 외관 등을 아주 섬세하게 재현해 냈다. 
화려한 러시아의 전통 의상은 흰 눈과 어울려 하나의 합창이 되었다. 
다양한 색채를 화면에 구사하되 하나의 톤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Young lady with his arms folded(Study to Boyarynya Morozova), 1885. 
by Vasili Ivanovich Surikov, oil on canvas. 46 x 35.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연습 작품
이 그림은 크기가 304 x 587.5 cm나 되는 대작이다. 
그림을 몇 개의 작품으로 나눠놓아도 될 정도로 생생하다. 
실제로 수리코프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부분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바실리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연습 작품 
실제로 수리코프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부분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Young lady with violet overcoat.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Young lady with blue fur coat. 1887.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Boyarynya Morozova,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Detail (부분 1)

그림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그림을 여러 개로 나누어 보았다. 
하나하나가 별도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림의 주인공인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이다. 그녀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다.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손은 두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늘 차르의 손에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이전처럼 두 손가락으로 기도하겠다"는 결의가 보인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2)

모로조바의 여동생인 우르소바(Evdokia Urusova)는 수레 옆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언니를 따라가고 있다. 
그녀의 눈빛을 보면 종교적 믿음과 삶을 초월한 듯한 인상을 준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3)

거지같은 모습을 한 수도승이다. 
한 겨울인데 헤진 옷을 입고 쇠사슬로 연결된 십자가를 걸고 있다. 
이 수도승 또한 손가락 두 개를 들고서 순교의 결의를 보이고 있다.

그림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모로조바와 같은 구교도이거나 
그녀의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민중들의 눈물을 동해서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4)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에서 정복이라고 하면 알렉산더와 칭기즈 칸을 떠올리지만 
21세기까지 “영토”의 의미로 정복을 완성한 나라는 러시아다.
레핀의 그림에 아들을 때려죽였다고 등장하는 이반 4세 바실리예비치 
(Иван IV Васильевич, 1530-1584)는 보통 그가 폭정을 펼쳤다고 해서 
이반 그로즈니 (Ива́н Гро́зный,Ivan the Terrible) 이반 뇌제(雷帝)라고 한다. 
러시아는 당시 1582년에는 시베리아 정복을 시작으로 동방 진출을 도모했고, 
1588년에는 발트 해 연안까지 진출하려다 패전하기도 했다. 

이반 4세의 류리크 왕조는 러시아 통지세력인 자신들에게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카이사르(Caesar, 케사르, 시저)를 본 따 차르(tsar)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하여 
차르의 시대를 열었지만 1598년에 표도르 1세가 사망하고 막을 내리게 된다.

1613년 이반 4세의 황후의 집안인 로마노프(Romanov) 가의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미하일 1세 차르로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차르의 전제 정치라고 하면 떠올리는 로마노프 왕조(Romanov dynasty)가 이들이다. 

로마노프 왕조는 지배구조가 혼란스럽고 영토가 좁았던 모스크바 차르국의 후반 시대 즉
"1613년 – 1721년 루스 차르국 시대"와 표트르 1세 (표트르 대제)에 의해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건국된 “러시아 제국 시대(1721년 – 1917년)”로 구분한다. 
이 과정에서 15세기만 해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가 
1894년까지 영토 확장을 거듭하여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태평양까지 진출하여 오늘날의 러시아 영토가 형성되었다. 

한마디로 러시아는 약 300여 년 동안 내부의 권력투쟁과 암투를 벌이며 
끊임없이 주변 국가와 민족들과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한 나라이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5)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는 로마노프 왕조의 2대 황제인 알렉세이 1세 
(Aleksey I Mikhailovich Romanov, 1629-1676, 재위: 1645-1676) 시기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알렉세이 1세 시기에 큰 사건 몇 개를 꼽자면 1649년에 농민들의 이동권을 박탈하여 
농민들은 땅과 지주에게 예속시키고 완전한 농노로 만들었다. 
그리고 1650년대 말부터 우크라이나를 편입하기 위하여 
폴란드와 발트 해 연안의 지배권을 놓고 스웨덴과의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 정부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부는 
재정 위기를 해결할 목적으로 소금세를 인상하고 담배 유통을 확대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은화 대신 동전을 유통시켜 통화량이 증가하면서,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 
당연히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가장 유명한 반란이 
바로 1670년대에 코사크의 농민지도자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의 봉기이다.

오늘 소개하는 “대귀족부인 모로조바”의 직접적 배경은 러시아인들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수정에 대한 갈등이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러시아 정교의 주도권을 누가 가질 것인가의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한 영향력 강화는 차르의 중압 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이미 이반 뇌제(雷帝)때부터 그리스 정교가 러시아로 오면서 나타난 
번역의 오류를 고쳐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있어 왔다. 
1649년에는 동방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전례에 이단적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여기에 새롭게 확장된 남부 슬라브 지방의 우크라이나인들 등을 교화시키기 위해 
단일한 올바른 전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도 충분했다. 


이런 시기인 1652년 알렉세이 1세와 교분이 깊었던 노브고로드 대주교 
니콘 (Nikon, 1605–81)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로 보내 그리스 전례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1653~1655년에 걸쳐 전례 수정 작업을 벌이고, 
1655년에 종교회의를 열거 전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6)

당시 개정된 내용은 상당히 많지만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성호를 두 손가락으로 긋던 것을 
세 손가락으로 긋게 하고, 예수의 철자를 Ісусъ에서 Іисусъ로 바꾸고, 
할렐루야도 두 번 외치던 것을 세 번 외치게 하였다. 
그리고 태양의 이동방향에 따라 교회 주변을 도는 예배의식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동안은 전례 개정에 동의하고, 실제로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대주교 아바쿰 (Avvakum, Petrovich, 1621~1682) 등이 대대적으로 반발하였다. 
반대파들은 너무 급격한 변화로 러시아 전통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 식을 대대적으로 도입한 것에 반발하였다.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기를 들었고 
차르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 계급들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농민과 상공인 지대의 사람들에게는 구교파 운동이 농노제와 
차르 지방관들의 횡포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생각되었다. 
결국 전례 수정을 둘러싼 갈등은 신교도 중심의 차르 지지 세력과 
구교도를 중심으로 한 일부 귀족과 농민들의 싸움으로 확장되었다. 
차르는 결국 반대파를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했다. 
구교도의 일부는 볼가 강을 건너가 숲 속에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차르의 정부군은 구교도들의 수도원과 공동체를 수년간 포위 공격했고, 
구교도들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분신자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이 갈등은 러시아 정부가 구교들의 권리를 인정한 18세기까지 이어졌고, 
감정의 골은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대격돌의 중심에 섰던 두 종교지도자의 마지막은 모두 비참했다. 
니콘은 한때 차르 알렉세이 1세와 함께 대주권자(Great Sovereign)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차르의 버림을 받아 1658년 총대주교직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알렉세이 1세는 1666년 종교 회의를 열어 공석이 된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에 
새 인물을 앉히고, 군주의 권력이 교회보다 강하다는 것을 공인받았다. 
그리고 니콘은 추방되고, 유폐되었다가 알렉세이 1세 사후에 모스크바로 돌아오지만 길에서 죽었다. 
구교도들을 이끌었던 아바쿰은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가 
겨우 모스크바로 둘아 왔지만 1682년에 화형 당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7)

그림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조바가 받는 고통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철모르는 아이들도 이 모습에 즐거워하고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8)

모로조바(Feodosia Prokopiyevna Morozova ,1632–1675)는 귀족(okolnichi)인 
프로코피 소고브닌(Prokopy Feodorovich Sokovnin)의 딸로 열일곱 살에 역시 
귀족(boyar)인 모르조프(Gleb Morozov)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이 1662년에 사망하여 일찍 홀로 되었으나 그녀의 지위는 여전했다고 한다. 
전례 개편 과정에서 구교도를 이끌었던 대주교 아바쿰 (Avvakum)이 모로조바의 정교회 신부였다. 
모로조바는 계급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구교도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동생 우르소바(Evdokia Urusova)도 구교도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로조바는 차르 알렉세이 1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1671년에 체포되어 보로프스키의 성 파프누티우스 수도원
(St. Paphnutius Monastery, Borovsk)에 감금되었고 그곳에서 1675년 1월에 일생을 마친다. 
이런 그녀의 일생은 구교도들에게 순교자의 삶이었을 것이다.
 
레핀과 더불어 러시아 이동파의 대표적인 역사화가인 수리코프는 개편된 전례에 반대하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벌인 대귀족부인 구교도 모로조바가 끌려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건에 대한 세력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그녀의 주장이 뭔지가 모스크바 길거리의 설경과 함께 펼쳐져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9)

반대파의 고통에 즐거워하고는 모습. 
우리나라에도 극히 일부 노인들이 이런 행위를 한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반대파의 저항을 극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역사화는 또한 수리코프가 살던 시대에 대한 발언임이 분명하다. 
차르의 전제 정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민중들의 각성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민주주의자들의 주장과 
러시아에 있어서 민주를 지향하는 예술로써 이동파의 열망이 들어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0)

레핀과 더불어 러시아 역사화가의 양대산맥인 수리코프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17세기 러시아 니콘의 종교 개혁시, 귀족 모로조프의 부인이던 모로조바는  
새로이 개편된 전례에 반대하고 원래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벌인다.  
결국 수도원에 유폐되어 생을 마감한 그녀는 여전히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성녀처럼 추앙되고 있다. 

그 현장을 생동감있게 그려낸 수리코프의 그림을 통해 좌우로 대칭되는 사람들의 행동과 표정,  
그 가운데를 모로조바가 쇠사슬에 묶여 무언가를 격렬히 호소하며 끌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의 겨울 길거리의 모습을 훌륭하게 묘사해 더욱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1)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이루는 것은 17세기 러시아 정교의 대분열이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교권을 확장하려 러시아 교회 전례를 뒤바꾸자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기를 들었다.  
교권 확장은 러시아 정교의 우두머리인 차르의 중압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반대파에는 차르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 계급이 포함돼 있었다.  
차르 중심의 신교도와 귀족 중심의 구교도는 끝까지 맞섰다.  
차르는 결국 반대파를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했다.  
2만명의 구교도가 분신자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구교도의 반차르 저항 정신은 이후 수백년 동안 도도히 흐를 반역의 저류가 됐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2)

주인공 모로조바는 차르에 맞서다 수도원에 유폐돼 삶을 마감한 역사적 인물이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쇠사슬에 묶인 이 귀족 여성 주위에서 민중들이 눈물을 흘린다.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역사화는  
당대 현실을 향한 정치적 발언임이 분명하다. 

까마귀처럼 새까만 옷, 창백한 낯색에 광기 어린 표정, 
이 강렬한 인상의 여인은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다. 
17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를 이루는 사건은  
바로 총주교 니콘과 사제 아바쿰의 대결이었다. 
교회에서 미신적 요소를 제거해 근대화한다는 니콘 주교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것은 교회 권력보다 교묘한 왕권강화정책이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3)

사제 아바쿰은 교회 개혁에 반대하고 기존의 전근대적 종교의식을 옹호했다.  
사제 아바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박한 종교생활을 하던 기층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황제보다도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개혁이 단행되었고 아바쿰을 지지하던 구교도들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구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수리코프가 그리고자 한 것은 그녀의 순교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순교를 둘러싼 여러 반응들이다.  
그림 왼쪽에 이빨 빠진 하아버지와 그 옆의 남자는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어쩔줄 몰라하는 젊은 여인은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이고,  
그 옆의 여인도 고개를 숙여 숭고한 순교에 깊이 경배한다.  
마차 옆에 걸어가는 붉은 색을 입은 여인은 그녀의 동생인 우루소바 공작 부인이다.  
언니를 따라서 먼 길을 함께 거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은 그저 재밌다고 키득거린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4)

모로조바 부인을 싣고 가는 썰매는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비록 그녀에게 동감하더라도 검은 옷의 사제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두려움 없이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은 화면 오른편의 걸인이다.  
추운 겨울 맨발에 어깨의 맨살까지 드러난 참혹한 모습이지만 목에 걸린 사슬로 보아 고행승이다.  
오므라든 발가락은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를 실감나게 한다. 

수리코프의「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장대한 서사성과 더불어 

놀라운 장식성을 가지고 있어서 베누아는 카펫의 그림 같다고 평했다.  
수리코프는 사실적인 장면 묘사를 위해 우르소바 부인의 진주 장식 모자,  
노부인이 걸친 금실로 수놓은 숄과 외투, 17세기의 의상과 장신구, 

건물의 외관 등을 아주 섬세하게 재현해 냈다. 
화려한 러시아의 전통 의상은 흰 눈과 어울려 하나의 합창이 되었다. 
다양한 색채를 화면에 구사하되 하나의 톤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The old woman with a patterned headscarf. 1886.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36 x 43.7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Head of Boyarynya Morozova. 1886. by Vasili Surikov. Series: Boyarynya Morozova. 

sketch and study 습작.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Wanderer. 1885. by Vasili Surikov. sketch and study 습작. 
watercolor. paper. Tretyakov Gallery Room 28

 

Morning of the Strelets’ Execution.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1881.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379 x 218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바실리 수리코프의 첫 역사화 대작인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은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수리코프의 첫 번째 대작으로 표트르 대제(1672~1725) 시대의 친위병 반란을 소재하고 있다. 
표트르 대제는 권력을 잡자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고, 그 일환으로 친위병들을 정규군으로 대체하였다. 
그러자 정규군으로 편입되지 못한 기존의 친위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표트르 대제의 누나 소피아 공주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려 하지만, 
반란은 실패로 끝이 났고, 이들은 잔혹하게 진압 당했다. 
결국 소피아 공주는 1704년 47세로 죽을 때까지 노보데비치 사원에 위폐 당했고, 
봉기에 가담했던 친위병들은 색출되어 처형당했다.

1698년 최초의 친위병 공개 처형이 있었는데, 표트르 대제는 직접 5명의 친위병의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그 날 57명이 처형당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1182명이 처형당했다. 
그 후 10년 간 반란의 여파로 처형이 계속되었고, 그 일로 사형당한 이가 2000명에 달했다

수리코프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검은 수염의 친위병은 화가의 외삼촌인 스테판 페도로비치 토르고쉰이었고, 
여인들은 화가의 고향인 시베리아의 아낙네들이며, 친위병 노인은 시베리아 유형수였고, 
붉은 수염의 친위병은 고향의 묘지기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림 속 수레는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그곳에서 보고 그렸다고 한다. 
성 바실리 사원을 배경으로 붉은 광장에 결박당한 친위병들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이른 아침의 푸르스름한 전경 속에서 사형수들의 흰 셔츠가 더 두르러지게 보인다.  
여인의 절망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들의 죽음과 마딱드린 노파의 고통이 전해집니다. 
사형을 앞두고 있는 마지막 몇 분의 시간은 처연하기만 하다.

그림의 배경을 러시아 모스크바의 심장'붉은 광장'이다. 
표트르 대제가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치던 당시, 구조 조정 당한 
황제의 총병(스트렐치, 이반 뇌제 시절 창설된 사격부대)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반란은 순식간에 제압되고 2000명도 넘는 총병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처형 장면이다. 
그림의 속 뜻은 신구 세력의 갈등, 소통하지 않는 황실 세력과 

민중과의 갈등을 빗대 표현한 것이라 한다.

 

Morning of the Strelets’ Execution.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Detail (부분)

 

Menshikov in Berezovo. 베레조보의 멘쉬코프. 1883.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204 x 169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멘쉬코프 (Menshikov 1673-1729)는 군인이자 행정가로 

미천한 신분에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올랐던 인물. 
표트르 1세 사후 그의 왕비 카테리나를 통치자로 세우고 승승장구했고, 
그 후에는 어린 표트르 2세를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꾀했으나 귀족들의 반격으로 실각.  
부와 권력을 모두 잃고 베레조보에서 사망했다.  

이 그림은 몰락한 멘쉬코프와 가족을 그린 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며 권력 2인자였던 멘시코프는 
대제 사후에 실각하게 되고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그림은 시베리아로 유배된 권력자, 권세가 다한 권력자의 고독을 그린것이다. 
커다란 주먹을 불끈 쥐고 미래를 다짐하는 멘시코프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린 감이 있다. 
모든 것이 다 허무한 것임을 색바랜 갈색 톤의 색채가 대변해 준다. 


다만 아버지의 신세와 함께 시베리아에서 혹독한 삶을 살아야 하는 
딸들의 청춘만이 안타까울 뿐이다. 
풍요롭던 귀족의 삶에서 하루 아침에 조락한 그녀들의 삶에 병마저 찾아 온 것인지 
검은 옷을 입은 셋째 딸은 병색이 완연하다. 참으로 부질없는 과거의 부귀와 영화다.

수리코프의 역사화로 두 번째 작품이다.
수리코프의 첫 역사화 대작인 <총기병 처형의 아침>이 표트르 대제 시대를 강타했던 
‘신구(新舊) 러시아의 충돌’이 빚은 비극을 다루었다면, 

두 번째 작품인 <베료조프의 멘쉬코프>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 선봉에 섰던 

한 권력자의 몰락을 통해 본 ‘전제권력의 은총과 징벌의 변덕스러운 충돌’을 보여주었으며, 
세 번째 작품인 <귀족부인 모로조바>는 17세기 러시아 종교분열이라는 ‘신구교(新舊敎) 충돌’을 다루었다. 

수리코프의 초기 작품들이 포착하고 있는 일련의 충돌 지점들은 
수리코프의 역사적 사유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초기 삼부작이 서로 상이한 시공간 – ‘17세기 후반 모스크바 붉은 광장’, ‘18세기 초반 시베리아의 베료조프 마을’, 
‘17세기 후반 모스크바의 파프누티예프-보롭스키 수도원 가는 길’ – 을 각각 보여주고 있지만,
수리코프의 역사적 사유의 전개는 첫 작품인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쉐코토프(Н. Щекотов)는 <베료조프의 멘쉬코프>를 “수리코프의 표트르 대제에 관한 전반적인 사유의 지맥 중 하나”
라고 보았는데, 쉐코토프의 이러한 주장을 수리코프 작품 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고 본다. 

 

Tsarevna's visit of nunnery. 황녀의 수녀원 방문. 1912.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제목은 황녀의 수녀원 방문이지만 유배되어 온 황녀이다. 
뒷쪽에서 수근거리면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황녀는 유배되어서 그런지 멍하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19세기까지는 이처럼 사실적인 그림이 많았지만  20세기초가 되면서부터 급격하게 러시아 미술은 바뀌게 된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사진기술이 발달하면서 더이상 사물과 그대로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겠다. 
그래서 아방가드로라고 하는 추상화가 대표적인 화풍으로 자리잡게 된다.

 

The Apostle Paul explains the tenets of faith in the presence of King Agrippa, 
his sister Berenice, and the proconsul Festus 1875.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142 x 218.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사도 바울이 아그리파왕 앞과 그의 자매 베르니케와 

총독 페니투스 앞에서 믿음의 실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그리파는 바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짧은 시간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오.’” (사도행전 26:28)


바울은 주후 58년에 헤롯 아그리파 2세와 그의 누이 베르니케가 
카이사레아에 있는 로마 총독 포르키우스 페스투스를 방문하였다. 
총독 페스투스의 초대를 받은 그들은 
‘아주 뽐내는 태도로 사령관들과 그 도시의 저명한 사람들과 함께 공청실에 들어갔’다. 
페스투스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인 사도 바울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불려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추종자는 어떻게 해서 

총독 페스투스의 재판석 앞에 서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25:13-23)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사도행전 25:30-33)

 

Portrait of Olga Surikova, the artist's daughter. 1888.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80 x 1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Strelets with cap. 1879. by Vasili Surikov. sketch and study 습작. oil on canvas. 

 

Winter in Moscow. 1885.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Portrait of T. K. Domozhilova. 1891.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Portrait of L. T. Matorina. Cossack woman. 1892.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8

 

Portrait of A. I. Yemelyanova.  née Schreider. 1909.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37.5 X 4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Portrait of doctor A. D. Yesersky. 1910.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102 X 62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8. 바실리 수리코프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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