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16-31] 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작품 전시실.

 

Self Portrait. 1870. 바실리 페로프 자화상.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Vasily Grigorevich Perov 1833-1882)는 1833년 시베리아에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회화조각학교에서 수학했다(1853~62).   
이때의 스승들 중에는 세게이 자란코 (Sergey Konstantinovich Zaryanko 1818~1870)가 있었다.   
학교를 마치던 무렵 러시아 현실에 대한 분노와 민초들에 대한 연민을 버무려 

그가 그려낸 풍자화들은 러시아 화단이 바실리 페로프란 이름을 주목하도록 만든다.   

‘키치(Kitsch)’라는 용어가 있다.   
고매한 품격을 갖지 못한, 싸구려 또는 사이비 미술품을 조롱하는 말이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는 머리 깎는 이발소에 꼭 그런 그림들이 걸려 있어서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던 것들이 바로 이런 부류이다.  

세계 미술사의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19세기 러시아 회화들을  
서유럽 쪽 화단에서는 흔히 키치로 취급했었다.   
외관상으로 어딘지 그 ‘이발소 그림’의 냄새가 나는 듯한 작품들이 없지 않다.   
현란한 빛이 세련되게 부서지는 인상파 그림들을 익숙하게 보며 자라온 우리 눈에는,   
러시아 회화들의 칙칙한 색채나 가끔 좀 갸우뚱한 사실적 묘사는 뭔가 촌스러운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바실리 페로프는 러시아 회화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상당수는 이발소 그림을 닮은 데가 있다.   
그의 독특하고 우울한 화면 분위기는 세련된 도회인들의 입맛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처음 러시아 회화들에 매혹되었을 때도 그 대상은 주로 레핀이나 크람스코이, 
세로프처럼 기존의 취향으로도 충분히 전율할 수 있는 화가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로프 미학의 핵심은 시대정신과 휴머니티에 있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변함 없이 피어나는 모네의 수련이나   
고흐의 해바라기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의 그림에 접근해야 한다.   
페로프가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현실에 발을 딛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의 그림은 어떤 예술 작품들보다도 깊은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런 점에서 페로프의 그림들은, 투박하지만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러시아의 흑빵을 닮았다.   

그의 장르화들을 특징에 따라 구분해 보면 사회비판, 해학, 

그 외 인물과 역사 쯤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현실 비판적 시각의 그림들을 살펴보자.   
그가 비판한 ‘현실’, 즉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는 농노이거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농노는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지대를 납부할 뿐 아니라  
주 3일 이상 지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으로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국가는 그들로부터 인두세를 걷고 병역의무를 부과했지만 그 대가로 어떤 보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지주는 재판 없이 그들에게 체형을 가할 수 있었으며 매매할 수도 있었다.   
농민들은 농노에 비해 다소 덜 예속적이었지만, 그 궁핍한 삶은 농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은 상상 속의 지옥 풍경이 아니고 노예가 콜로세움에서 사자와 싸우던 글래디에이터 시대의 이야기도 아니다.   
불과 150년 전의 러시아 사회는 그런 곳이었다.  

그뿐이랴. 갓 불붙은 산업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이 탄생하면서 지옥은 농촌에서 도시로 확산된다.   
초기 자본주의 시절, 서로 먹고 먹히는 자본 간의 처절한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그때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이 노동자의 육신과 영혼을 

깡그리 망가뜨리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런 러시아 사회의 정점에는 무능하며 폭압적인 로마노프 황실과  
한줌도 안 되는 귀족들의 화려한 삶이 놓여 있었다.   
이런 세상을 점진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했던, '브나로드 운동'처럼  
평화적이고 낭만적인 시도는 무참히 좌절되었다.   
우리 앞에 그런 상황이 놓이게 된다면 이제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처럼 그들의 혁명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살아가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일상이 

카키색 톤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르화 (풍속화)의 대가 바실리 페로프의 걸작들이 

트레차코프 갤러리 Room 17을 가득 매우고 있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also known as Children Carrying Water). 1866.  
by Vasily Grigorevich Perov. Oil on canvas. 123.5cm x 167.5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의 작품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빈번하게 언급되는 작품이 바로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Carrying Water. 1866)>이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밤, 행복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길에 나와 있지 않을 그 시간에 이를 악물고 물을 길어 나르는 어린 도제들의 모습이다. 

페로프는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여 그린 대표적 화가이다.  
그의 유명한 그림 ‘트로이카'에서는 세 명의 어린 아이들이 눈보라가 치고 얼어 있는 길을  
아주 커다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의 비참하던 아이들의 생활과 처지를 그림으로서 어른들의 횡포와 무자비함을 고발하고 있다.  
3을 뜻하는 ‘트로이카' 라는 말은 황제의 마차를 끄는 말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와 대비되어 아이들의 모습은 더욱 더 서글프게 느껴진다. 

추운 겨울날 말이 대신해야 할 수레끌기를 열 살 남짓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하고 있다.  
핏기 없는 얼굴에 피곤에 찌든 아이들, 삶에 지쳐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참혹했던 당시 러시아 현실을 읽어 낼 수 있다.  
이 그림은 당시 러시아 현실을 담아 낸 민중화, 풍속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칼바람에 건물 지붕의 눈가루가 모래처럼 휘날리고,  
넘쳐흐른 물은 이내 수레에 얼어붙어 고드름을 만들었다.  
이런 길이라면 튼실한 말들이 삼두마차를 끌고 지나가더라도 안쓰러울 법하다.  
맨 왼쪽의 작은 아이는 오르막을 넘어서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튿어진 모자, 그리고 얻어 입은 어른 코트의 소매 안으로 주먹 쥔 고사리 손.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가운데 녀석은 셋 중 제일 덩치가 크지만 아직 이 빠진 구멍이 숭숭한 어린아이다.  
길이 아직 많이 남은 것일까, 수레의 무게와 추위에 그는 혼이 거의 빠져버린 것 같다.  
오른쪽 계집아이는 오히려 처연한 표정이다.  
발에 맞지 않아 덜그럭 거리는 구두의 끈은 풀어져 있고,  
실제 그림을 보면 그러쥔 조그만 주먹에는 핏줄과 힘줄이 솟아 있다. 

세상은 저 어린 것에게 낡은 장갑 하나 건네줄 여유가 없다.  
헌 외투 사이로 드러난 분홍치마. 아이가 저 옷을 처음 가졌을 때, 저 꽃무늬를 보고 기뻐하지 않았을까.  
꽃분홍 치마는 그가 현실에서 가 닿을 수 없는 행복의 신기루 같다.  
세 아이의 뒤에는 비슷한 운명의 소년 하나가 온힘을 다해 수레를 밀고 있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그들과 함께 하는 건 오직 앞장서서 뛰어가는 개 한 마리뿐이다.  
힘차게 뛰어가는 털북숭이 개.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그 모습에 화가 페로프가 자꾸 겹쳐 보인다.  
민초들의 고난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한 바실리 페로프.  
털북숭이가 날카롭게 드러난 이빨은 냉혹한 세상에 대한 그의 분노이며,  
힘찬 뜀박질은 어떻게든 이겨나가야 한다고 아이들을 독려하는 그의 애틋한 마음이 아닐까.  
안타까움이 가득한 털북숭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도록에서는 잘려버렸지만, 그림 왼쪽 끝에는 건물의 창이 그려져 있다.  
유리를 통해 비치는, 따뜻하지만 온기 한 점을 나눌 수 없는 촛불은  
오히려 아이들을 더 큰 절망에 빠트릴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수레 뒤쪽 어둠 속의 사내도 추위에 몸을 웅크린 채 종종 걸음으로 제 길을 가고 있다.

 

Portrait of Writer Fedor Dostoyevsky. 도스토예프스키. 1872. by Vasily Grigorevich Perov. 
oil on canvas. 94 x 80.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로 유명하다.   
페로프는 개인적으로 19세기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러시아 민중을 대표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무척 존경했다.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그려내고, 사실주의에 자부심을 가졌던 작가와 화가는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페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주제와 유사한 현실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페로프의 초상화는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빛을 비춤으로서   
미묘한 음영을 만들어 인간의 내면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페로프는 기민한 관찰력으로 대상을 포착해 내면 심리를 화폭에 담아 냈다.  
하나의 초상화 속에 인물의 성격을 포착한 페로프의 묘사로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한층 리얼리즘의 가치를 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말년에 이르러 추락했다고 한다. 페로프는 1882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고 민중들에게 진정성을 가르쳤던 예술가들은 
1917년 소련의 출발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정치가들과 볼셰비키 정부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사실적'인 그림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의 정치 이상을 지지하는 작품들만을 원했다.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전제 정치 하에 점차 독창적인 예술이 사라지고 국가 조직으로부터의 압력은 점점 강화되었다.   
정부에 대항하면 즉각적으로 강력한 처벌이 내려졌고,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을 출판, 전시, 공연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고립시켰고,  
이를 어긴 예술가들은 강제노동수용소에 구류, 감금시켰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에서 되돌아오지 못했다.  
이 시기에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1930년 천재시인이라 칭송 받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자살 사건이다.   
마야코프스키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성향을 가진 예술가였다.  
물론 스스로 열렬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삶은 정말 인간적이고 처절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청춘을 불사르며 혁명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3번의 구속까지 거치며 혁명을 향해 달려온 시인에게  
막 눈앞에 시작된 관료주의는 참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철저하게 관습을 거부했던 그의 눈에 이런 현실은 배반당한 혁명으로 비쳐졌다.   
게다가 그는 끊임없는 검열과 감시 속에서 거대한 정치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비열하고 남루한 현실에 절망,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한다.  
더욱 끔찍스러운 일은 1937~53년 소련 정부가 수백 명에 달하는 뛰어난 예술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던 수백만 명의 시민들을  문화영역에 미친 이같은 정부의 강압정책의 결과   
1930년대에서부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소련에서 창작된 예술작품의 대부분은   
소련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책상서랍' 속에 쌓아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은 출판이나 전시, 공연활동을 위해 결코 제출되지 않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경우에는 1980년대말까지 숨겨져 왔다.  
하지만 40대에 접어들며 페로프의 그림은 상당히 변화한다.  

미술사가들은 종종 그것을 ‘성숙’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숙'이란, 그 의미가 매우 주관적인 단어가 아닐지.   
어쨌거나 ‘성숙’해 가는 페로프의 작품 세계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 소재가 매우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반면 그의 초기작들이 하나같이 품고 있던, 

심장에 사정없이 날아와 꽂히던 그 서슬 퍼런 비수는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1872)>은   
페로프가 40대에 들어서기 직전 그린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소개할 때면 어김없이 인용되는 이 그림도   
페로프의 ‘성숙’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그림 속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금욕적인 구도자 같은 모습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어떤 평자는 이 그림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기술한 수천 편의 논문보다도   
더 함축적으로 그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감탄한다.  

그쯤에서 나는 좀 혼란스럽다.   
만약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강고한 신념과 지혜를 가진 구도자였다면,   
이 초상은 대단한 걸작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잘 알려진대로 금치산자에 가까운 낭비벽과 도박으로  
평생 가난의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가.  

돈 몇 푼을 빌리기 위해 주변사람들에게 아첨과 자학으로 가득한 비굴한 편지를 보내고,   
그렇게 빌린 돈을 또다시 허망하게 탕진해버렸던 그가 아닌가.   
그가 온갖 남루한 인생들의 심리를 탁월하게 기술한 기념비적 소설들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허점투성이인 그의 삶은 구도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멀다. 

이 초상화는 1872년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요청으로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것인데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트레티야코프는 당시 유명 문인들의 모습을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부탁해 그리도록 했다.  
이 그림은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에서 귀국한 그해인 1871년 말에 시작돼 이듬해 완성됐다.  
도스토옙스키가 귀국해 보니 <백치>, <악령>등의 성공으로 그의 명성이  
트레티야코프가 초상화를 부탁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짙은 그린색 두터운 재킷 차림의 수수한 그의 복장은  
당시 넉넉지 않았던 그의 경제 상황을 짐작케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초상화에 대해서 안나는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해(1871년) 겨울에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이자 미술관 소유주인  
트레티야코프가 남편에게 미술관에 소장할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위해 유명한 화가인 페로프가 모스크바에서 왔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일주일 간 그는 매일 우리를 찾아왔다.  
페로프는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 상태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유도하면서 남편의 얼굴에서 가장 특징적인 표정을 포착해 냈다.  
그것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예술적 사고에 몰입해 있을 때의 표정이었다.  
페로프는 ‘도스토에프스키의 창작 순간’을 초상화에 붙박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른 것을 여러번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마치 ‘자기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을 때는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빠져나오곤 했다.  
나중에 이야기하다 보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자기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내가 자기 방에 다녀갔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페로프는 똑똑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남편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참석했다.  
페로프에 관해서는 정말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페로프가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완성한 것은 1872년 5월이었다. 다섯달이나 걸린 것이다.  
이 초상화에 대해 트레티야코프가 페로프에게 준 사례비는 6백 루블이었다.

 

Christ in the Garden at Gethsemane.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1879. by Vasily Perov. 
tempera on canvas. 151.5 X 23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제자들이 잠든 사이 예수는 땅에 엎드려 기도한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화폭 속은 지금 깊고 푸른 밤이다. 페로프에게서는 일찍이 엿볼 수 없었던 특이한 암록색.  
그 두꺼운 어둠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비장하게 엎드려 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이곳에 오른 그는 곧이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잘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림에서 건너오는 서늘한 기운.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둡고 푸른빛 탓일 수도 있다.  
혹은 필생의 사건을 앞둔 예수의 고뇌가 그만큼 처절한 탓일지도 모른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은 누구와도 이 두려운 짐을 나눌 수 없는 예수의 고독을 더 사무치게 드러낸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잇는다. 페로프는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젊은 시절의 대표작 <트로이카>와 이 그림은 어떤 맥락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혹시 '성숙'한 페로프는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며 그랬듯이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덧없이 여기고 종교의 세계로 침잠해 갔던 것일까. 

페로프의 작품세계에서 이 그림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건 간에,  
보는 이의 가슴을 단숨에 꿰뚫고 지나가는 힘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건, 니콜라이 게(1831~94)가 내놓은 예수 연작들과의 유사성이다.   

19세기 러시아 풍속화가들의 작품은 시대를 대변하는 대변인이요,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이 시기 그림을 보며 당시 러시아가 얼마나 피폐하고 궁핍하며 아파했는지를 가늠 할 수 있다.  
그런 러시아의 시대상을 걱정하는 작가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았다.  
겟세마네 동산에 쓰러져 절규하는 예수의 모슴을 통해 아픈 러시아의 치유을 작가는 바라고 있다.  
예수의 머리 위로 떠있는 가시 면류관이 현실의 고통을 상징하는 듯 해서 참으로 가슴 저린 그림이다.

 

Nikita Pustosviat. Dispute on the Confession of Faith.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1880 - 188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12 x 337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은 페로프 이야기에서 대단원을 장식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페로프가 49세로 세상을 뜨기 한 해전에 완성한 대작이다.    
화사한 색채로 가득한 화면. 페로프가 집착하던 카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게다가 그려진 내용은 생뚱맞게도 17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내분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988년 비잔틴으로부터 러시아로 전래된 동방정교는   
몽골의 지배기(1240~1480)에 급성장하여 부와 세속적 권력까지 틀어쥐게 된다.   
그러나 한때 차르와 맞설 정도의 위세를 떨치던 러시아 정교회는 16세기 초 그 세속화에 대한   
내부적 비판이 터져 나오며 소유파-무소유파의 충돌이라는 내홍에 직면한다.  

소르스키를 중심으로 한 ‘무소유파’ 수도자들은,   
교회는 국가와 분립하여 과다한 토지를 포기하고 원래의 청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권력과 연대한 소유파들이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무소유파들을 축출하여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러한 교회의 분열에 따라 그 세속적 힘은 이미 현저히 약화되고 있었다.      

러시아정교회가 더 결정적으로 분열함으로써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Patriarch, 가톨릭의 교황에 해당함)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종속되는 계기는 17세기 전례 개혁을 둘러싼 개혁-분리파의 분열(‘라스콜 Раскол’)이었다.   
정교회는 갖가지 화려한 비잔틴 문화와 함께 러시아에 도입되었지만, 수백 년이 지나면서 점차 토착화한다.   
이에 따라 종교예식의 세부적 내용에 있어서 원래의 비잔틴 양식과 상이한 점이 하나둘 나타나게 된다.  
이는 모든 외래종교의 전래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가톨릭이 조선에 전래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와 달리 러시아의 전례개혁은 비극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1654년 당시 러시아정교의 수장은 총대주교 니콘(니키타 미노프, 1605~1681)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러시아 교회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기도서와 예배의식을 비잔틴 본래의 양식으로 되돌리겠다고 선언하고 주교회의의 승인을 받는다.   
표면상 이는 단순한 전례형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신자들은 이러한 조치가 사실은 신앙의 본질과 무관하며,   
‘개혁파’들이 교회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꾸미는 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많은 고위 성직자와 수백만의 신도들이 이에 대해 강하게 저항한다.   
그들은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토착화한 전례의 전통을 고집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라스콜니키 파’ 즉 ‘분리파’ 또는 '구교도'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두 번째 차르 알렉세이 (재위 1645~76)는 이 대목에서 개혁파의 손을 들어주었고,   
분리파는 차르에게도 맞서다가 무려 80년 간 갖은 고난을 겪는다.   
분리파의 수장인 수좌대주교 아바쿰 페트로비치(1621~82)가 화형 당하고,   
수많은 신도들이 분신으로 이에 저항하는 처참한 사건도 발생한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 전례의 차이란 실상 매우 사소해 보이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성호를 긋는 손가락의 수였는데, 비잔틴의 원래 방식은   
손가락 3개를 사용하였으나 러시아에서는 2개로 토착화함으로써 문제가 된 것이다.  
이는 Room 28에 전시되어 있는 19세기 역사화의 대가 바실리 수리코프의 작품  
<대귀족 모로조바(1887)>에 잘 나타나 있다.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은 분리파의 거물이었던 대귀족 모로조바가 어느 겨울날 먼 귀양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사슬에 묶인 채 짚으로 바닥을 깐 초라한 썰매에 몸을 맡긴 모로조바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  
그는 오른손을 들어 두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 내지르며 저항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화면 우측에는 분리파들이 안타깝고 슬픈 얼굴로 그를 배웅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개혁파들이 유쾌한 얼굴로 패배자를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대립의 패배자는 분리파뿐이었을까.  
니콘은 러시아정교회를 과도한 민족주의로부터 구하고  
교회의 일체성을 강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투쟁의 과정에서 파문한 수많은 인재들을 상실함으로써 교회의 역량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우위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하다가 1667년 주교회의에서 파면되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1681년 아바쿰보다 오히려 한 해 먼저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실행한 사회전반의 개혁에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정교회의 수장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복속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 정교회는 두 번에 걸친 내부분열을 거치면서  
그 화려했던 권력을 세속 군주에게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Detail (부분 1) 

아수라장이 된 분리파 진영. 왼쪽 위 흰수염의 사나이가 니키타이다.  
오른쪽 붉은 망토의 병사가 바로 '스트렐치' 부대원이다.  
왼손에는 머스켓 소총을, 오른손에는 도끼의 일종인 '바디쉬'를 들고 있다.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Detail (부분 2) 

헤게모니를 쥔 자들의 냉랭한 여유, 오른쪽 흰수염이 개혁파의 수장 총대주교 요아킴.   
페로프의 그림은 이러한 개혁파-분리파의 대립이 극점에 있었을 때  
차르의 궁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주연은 분리파 구교도 사제 니키타 푸스토스뱌트(? ~ 1683)이며,  
조연은 총대주교 요아킴과 소피아 공주이다.  
요아킴은 개혁파의 수장이었고, 소피아는 공동 차르를 맡은 어린 동생들 위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사실상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었다(재위 1682~9). 

수즈달의 사제 니키타는 당시 구교도 측의 리더 중 한 명이었다.  
반대파들은 그에게 '헛일 하는자'란 의미의 '푸스토뱌트(Пустосвят)'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1659년 수즈달의 대주교인 스테판을 이단으로 고발하였으며,  
그의 무죄가 선고되자 다시 차르 알렉세이에게 고발하였다. 

대세는 개혁파 쪽으로 이미 기울어 버렸지만, 1682년 구교도들은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된다.  
차르의 근위대 역할 맡았던 머스켓 소총부대 ‘스트렐치’ 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스트렐치는 소피아를 위해 세 차례나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있는, 그녀의 핵심적 권력 기반이었다.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니키타 푸스토뱌트는 그해 7월 5일 차르 소피아의 면전에서  
개혁파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기회를 얻게 된다.  
페로프의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도 이 그림을 보면  
그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우측의 수염 덥수룩한 무리들은 전통을 고집하는 분리파 구교도들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좌측의 세련된 귀족풍 인사들은 총대주교 요아킴과 개혁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수렴청정의 억센 통치자 소피아가 서 있다.  
그녀와 개혁파 인사들이 한통속으로 냉랭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만 보아도  
니키타의 상황이 절망적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분에 못 이겨 돌진하며 몸싸움을 하느라 니키타의 웃옷이 반쯤 벗겨져 있다. 

발밑에 어지러이 펼쳐진 책, 그리고 나동그라진 그릇과 사람들.  
분리파 진영은 수라장이 되어있다.  
니키타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손에 쥔 십자가와 등 뒤의 이콘 밖에 없다.  
당신들,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라고 외쳐보지만, 하늘은 늘 멀리 있다. 

 

△ 바실리 페로프 <신앙에 관한 논쟁 중 소피아 (부분)> △ 일리야 레핀 <공주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부분)>

소피아의 냉랭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표정은 이태 전에 그려진  
일리야 레핀의 <공주 소피아 알렉세예브나(1879)>를 연상케 한다.  
그녀의 권력기반인 스트렐치는 니키타를 배신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개혁파의 손을 들어준다.  
가련한 니키타는 다음날 처형되고 만다.     

크기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범상찮은 이 그림은 왜 페로프의 대표작으로 도록에 소개되지 않았을까.  
비록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나 이 그림이나 종교적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고통 받고 억압 받는 자에 대한 연민’이란 코드로 작가의 시선을 이해한다면  
젊은 시절로부터 시종일관한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페로프는 모교인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교수가 되어  
네스트로프, 코로빈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직 오십이 되지 못한 나이였다. 

 

The Funeral Procession / Last Journey, 1865. 마지막 여정.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7 x 4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Funeral Procession / Last Journey 마지막 여정>   
도록에 따라서는 <Following a Dead Man> 또는 <Bidding Farewell to the Dead Man>로도 번역되어 있다.   
앞에서 소개한 걸작 <Troika Apprentices Carrying Water>의 왼쪽 아랫부분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은   
크기도 작을 뿐 아니라 전혀 아름답다고도 할 수 없는 을씨년스런 작품이다.  

그러나 이는 트레차코프 갤러리에 걸린 어떤 화려하고 거대한 그림들에도 뒤지지 않을  
강력한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화폭에 담긴 것은 겨울 눈길을 헤치고 가장의 시신을 운구하는 한 가족의 절망적 모습이다.  
고개를 숙이고 웅크린 채 썰매를 끄는 여인의 막막한 등,   
마른 풀을 깔고 누운 사내아이는 잠든 것이 아니라 신열에 들떠 눈을 뒤집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서질 듯 엉성한 관을 꽉 부여잡고 있는 딸아이는 제법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넋 나간 표정이긴 마찬가지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눈길은 아주 춥고 멀 것만 같다.  

봄이 올 때까지 그들이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페로프의 전매특허인 카키색조는 이 작품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누렇게 떠 있어 황폐한 느낌을 더 해준다.   
이 그림은 무심히 지나가던 사람의 발길을 한동안 묶어놓는다.  
그리고 그림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언가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 기분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을 붙일 수가 없다. 그것이 이 조그만 그림에 담긴 페로프의 힘이다.

 

The Last Tavern at the City Gates. 1868.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66 x 51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트로이카의 우측에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The Last Tavern by the City Gates)>이다.  
도록마다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작품이지만 생각보다 크기가 아주 작은 소품이다.  
이 조그만 그림으로부터 사람들은 무얼 찾아 내었을까.  
도시 관문에 인접해 있는 작은 여관, 먼 길을 왔거나 떠날 사람들은 

따뜻한 불빛이 비치는 창안에서 휴식하고 있다. 

그 안에 들지 못한 소녀는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다.  
밤이 시작되는 것인지 새벽의 미명인지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그 속의 디테일은 하나하나 살아 있다.  
얼어붙은 먼 길을 다시 떠나야할 말은 눈 위에서도 건초를 씹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혹독하더라도 이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인 건지.  
눈길에는 역시 개 한 마리, 그리고 하늘에는 차가운 새 몇 마리.  
이 시기 페로프의 대표작들에는 어김없이 먼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이 등장한다.    
페로프의 매서운 새들은 무슨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이 작품을 어떻게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후세의 사람들이야 페로프의 주요 작품으로 소개되니 곰곰이 뜯어보게 되는 것일 테지만,  
이 그림의 핵심은 아마도 어둠 속 소녀가 아닐까 싶다.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The Last Tavern by the City Gates) - detail (부분) 

이발소 그림을 연상할 정도로 어수룩해 보이는 이 작품을  
빛나는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바로 이 소녀라 생각된다.  
계집아이는 추위에 웅크린 채 불안과 천진함이 담긴 눈빛으로 돌아보고 있다.  
눈밭에 나앉은 어린 것의 그 눈빛과 마주친다면

아무리 가슴 두꺼운 당신이라도 그만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페로프가 전하고자 했던 모든 생각들이 아무 설명할 필요 없이 온몸으로 젖어든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A Drowned Woman (also known as Found Drowned). 익사한 여자. 1867. oil on canvas. 68 X 108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익사한 채로 발견 된 여인의 시신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형사의 모습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큐폴라들과 강위를 떠가는 큼직한 배를 볼 때 무대는 필경 모스크바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스카이라인은 모스크바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어 어렵지 않게 구별된다. 

강에서 건져낸 여자는 밀랍 같은 얼굴로 누워 있고, 관리 하나가 그 곁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왜 죽은 것일까. 혹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그림만 보아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채 감지 못한 그녀의 눈으로 미루어 한이 많은 죽음이란 느낌은 분명하다. 

시체 옆에서 태연히 담배를 물고 있는 관리의 무심한 얼굴은 또 무엇인가.  
이제 이골이 난 타인의 불상사 같은 건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는 의미일까.  
또는 그치지 않는 불행들에 그도 덤덤해져 버린 것일까.  
주검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접근하고 있다.

한 마리는 머리맡을 어슬렁거리며 시신을 넘본다. 

병든 러시아에 바싹 다가선 재앙의 예고편처럼 

그녀의 다리와 손을 휘감고 있는 건 아마도 물풀인 것 같다.  
경직되어가는 여자의 시신에 작가가 감아놓은 부드러운 물풀의 줄기와 꽃.  
페로프의 전형적인 황색 색조만으로도 이미 더할 나위 없이 황량한 느낌을 주는 화면에서  
그나마 위로 받을 대상이라고는 그것들 밖에 없다. 

 

<익사한 여자 (1867)> detail (부분) 

화면상 잘 보이지 않지만,  왼쪽의 동그란 물체 둘은 물풀(?)의 꽃이고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녀의 오른손에 남은 반지는 한때 지상에서 그녀가 꾸었던 꿈의 흔적이리라.   
19세기 러시아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 비판적 리얼리즘 회화의 기수 바실리 페로프.   
격동의 1860년대는 갓 삼십대에 접어든 그가 슬픈 러시아의 현실과 고통스럽게 교감한 시기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분노를 에두르지 않고 우리의 눈앞에 그대로 들이민 시절이다.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그래 세상이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외치는 그의 절규를 듣는다.  
얼어붙은 땅에 가장의 시신을 묻으러 가는 초라한 장례행렬,  
그리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자기 덩치보다 훨씬 큰 물수레를 끌어야 하는 어린 것들의 모습.  
이 정도라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절망의 깊이 만큼 분노하고 분노한 만큼 내지르는, 삼십대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크람스코이 등 주류 미술에 반기를 든 일단의 진보적 화가들이 1871년 ‘이동파’를 발족하였을 때  
페로프가 창립 멤버로 참여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The bird-catcher. 새 사냥꾼. 1870.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가 흥미를 가진 또 다른 소재는 '사냥하는 사람들'이다.   
페로프 자신의 말에 의하면 <새 사냥꾼(1870)>, <휴식 중인 사냥꾼들(1871)>, <낚시꾼(1871)>에서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고 세속적 행복에 취한" 젠틀하고 유머러스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들을 보면 그는 앞서 Room 15에서 살펴본 파벨 페도토프 (Pavel Fedotov 1815~52)를 계승하여   
해학적 풍속화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The Hunters at Rest. 1870. 휴식 중인 사냥꾼들.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119 X 183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낚시꾼 The Angler. 187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Room 15에서 살펴본 파벨 페도토프 (Pavel Fedotov)의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  
<불청객, 아침을 먹고 있는 귀족>을 페로프의 '사냥꾼과 낚시꾼 시리즈'와 섞어 놓으면   
처음 보는 사람은 같은 화가의 그림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후자에는 바실리 페로프의 전매특허인 카키색조가 좀 더 진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림의 분위기나 묘사가 아주 비슷하다.

 

The Sermon in a Village. 마을에서의 설교. 186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이 작품을 얼핏 보면 주일을 맞아 시골마을 교회에 모여 앉은 부자와 빈자가  
사제의 설교를 오순도순, 그러나 좀 따분하게 듣고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뒤쪽 어둠 속에서  
완전히 따로 놀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에 주목해야한다. 

 

The Sermon in a Village. 마을에서의 설교. Detail (부분) 

그들은 설교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화면 제일 오른쪽의 서류를 든 사내가 하는 말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있다.   
그는 마을 학교의 교사쯤 될 것이고, 그가 들고 있는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은   
아마도 농노해방을 알리는 차르의 칙령일 것이다.   
당시 러시아 방방곡곡에서는 해방령 칙서가 주로 교회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반노예나 다름없던 오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소식이건만 군중들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은 회색 어둠 속에서 여전히 깊은 시름에 잠겨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4년의 준비 끝에 단행한  
역사적 농노해방은 매우 불충분한 것이었다.   
노예의 사슬만 끊어준다고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해방된 농노들이 농민으로 살아남으려면 경작할 토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국가는 그들에게 토지를 배분하였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땅이 여전히 지주의 손에 남아 있었으므로  
농민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매우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토지 대금의 일부를 자신이 직접 부담해야 했다.  

또한 농민공동체의 연대책임이 강화됨으로써 농민은 공동체에 강하게 예속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농노들은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그 신분이 자유롭지 못했고,   
경제적 부담의 증가로 궁핍이 가속화 되었다.

 

Wanderer(Pilgrim). by Vasily Perov. 1870 Oil on canvas, 54 x 8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정이 들어설 때까지  
리얼리즘은 부르주아들의 부정적인 면을 고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비인간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모습을 묘사한 리얼리즘을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그리고 나중에 고리끼가지 이어지는 흐름인데  
페로프도 작품 활동을 할 때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예술가가 눈을 감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그런시기였다.    
  
1861년, 27세가 되던 해 페로프는 졸업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다.  
부상으로는 해외 유학이 주어졌으나 그 해 그가 제작해서 전시한 작품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부활절의 마을 십자가 행렬’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성직자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전시회에서 철거되고 말았다.  
비판적 사실주의 작품이기 때문이었고 한다.   
당시 페로프의 친구가 남긴 글 중에는  
‘이태리 유학 대신에 솔로베츠키섬으로 유배를 갈지도 모른다’라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The Organ-Grinder. 1864. by Vasily Perov. Oil on panel,  
25 x 31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떠돌이 음악가의 삶이 참으로 만만치 않다.   
곁에 내려 놓은 것은 등에 지고 다니던 소형 오르간 ‘샤르만카(шарманка)’이다.   
퇴락한 돌담 곁 벤치에 팔을 괴고 앉은 그의 모습은 Savoyard 만큼 남루하지는 않다.   
하지만 표정없이 멍한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에서는 내일에 대한 작은 희망의 기미마저 찾아볼 수 없다.       
   
2년 동안의 짧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페로프는 곧바로 그의 대표적 걸작들을 그려 나간다.   
그의 사회비판 정신은 이무렵 절정에 이른 듯하다.   
그림에서는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힘겨운 가련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아울러 그들을 그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The  Organ-Grinder in Paris. 파리 거리의 악사. 1864.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6 x 76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다음 해 독일의 몇 개 도시를 거쳐 파리로 유학을 간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서유럽 거리의 풍경은 이 때 그려진 것이다.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에 대해 그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기술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라고 했지만   
실제로 뚜렷하게 남긴 것은 없다고 한다.

 

Savoyard Boy. 1863. 거리의 아이.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32 x 41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짧은 파리 시절 그가 남긴 작품들인 거리의 아이(Savoyard Boy)  
그리고 <파리 거리의 악사(Organ-Grinder in Paris)>를 보자.   
Savoy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서 휴양지로 유명하다.   
‘Savoyard’를 직역하면 ‘사보이 사람’이지만, 그곳에 거지가 많았는지 19세기 유럽에서는   
거리의 거지아이들을 ‘Savoyard’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림에서 길가 돌 위에 주저앉은 아이는 곤한 잠에 빠져 있다.   
남루한 행색. 비정상적으로 커 보이는 얼굴에 담겨 있는 고단함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정말 ‘아이’가 맞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시골의 부활절 행진-Easter Procession in the Country. 186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71.5cm x 89cm.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 역시 19세기 유명한 사실주의 화가이자 초상화가이다.   
그는 <도스도예프스키의 초상화>로 유명한데 페로프의 작품은 대부분  
강한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으며, 당시 러시아 회화 역사에서 중요한 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현실과 사건을 들여다보는 냉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고고하고 가식적인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다.   
보이는대로 과장없는 색감이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페로프는 1834년 유형에 처해진 급진 귀족의 서자로 태어났다.   
검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에 적극적이었고,   
아버지의 후원으로 1854~1861년까지 모스크바 예술 학교에서 회화, 조각, 건축등을 공부한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현실의 어두움을 직시한 페로프는  
성직자의 타락을 폭로한 <시골의 부활절 행진>을 비롯하여  
통렬한 풍자와 사회적 항의를 담은 그림을 그렸다.  
당시 <시골의 부활절 행진>은 그 풍자로 인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1862년부터 2년 동안 유럽 체류 후의 일련의 작품 <트로이카>, <들판의 환송> 등에도  
사회적 항의의 자세가 역력하다.   
크람스코이와 레핀 등 젊은 미술가 그룹이 '이동파'를 결성했을 때,  
선배 화가로서 그는 그들과 함께 행동하기도 했다.    

먼저 <시골의 부활절 행진 Easter Procession in the Country(1861)>을 보자.   
부활절을 맞아 시골교회의 문을 나선 사람들은  
십자가와 깃발을 앞세우고 성가를 부르며 행진하기 시작한다.   
그림이 그려진 1861년은 러시아 역사상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농노해방령이 내려진 해이다.  

게다가 이날은 또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쯤 되면 그림 속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대와 환희에 들뜬 표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모습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깃발과 십자가를 든 사내, 그리고 이콘을 가슴에 안은 여인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교회문 앞 좌우로는 고주망태가 된 사내 셋이 널브러져 있으며,   
기둥에 몸을 의지한 정교 사제 역시 술에 취해 계단을 잘 내려 설 수 있을지 아슬아슬하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는 남루한 사내가 굽은 등을 하고 또 다른 이콘이 그려진듯한 널빤지를 안고 있다.   
만약 오랜 숙원이던 농노해방 조치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면   
화가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페로프는 음산한 잿빛 하늘과 눈이 녹아 질척한 시골 흙길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미래에 대한 음울한 전망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Tea party in Mytischi near Moscow. 186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모스크바 근교 므이치시치에서의 다회 (Tea party in Mytischi near Moscow)> 역시 암울한 그림이다.   
값비싼 옷을 입고 차를 마시는 사제.   
그의 혈색 좋고 거대한 몸집에 비해, 적선을 구걸하는 눈먼 거지부자의 행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다.   
사제의 반들거리는 구두 한 켤레면 이들은 며칠간 배고픔을 잊겠지만,   
거대한 기름덩어리로 타락한 짐승은 인간의 불행에 도통 관심이 없고 시종은 그를 냉정하게 밀어낸다.  

당시 귀족들과 함께 특권지배계급에 속했던 정교회의 사제들은   
이처럼 페로프 초기 그림에서 집중적인 풍자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귀족들보다는 사제가 아무래도 좀 만만해서일까.   
혹은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들의 타락한 영혼이 그만큼 더 가증스러워서일까.   
150년 전 먼 러시아에서 그려진 이 그림 속 비계덩어리들이 그리 낯설지 않음은,   
그 수많은 아바타들을 오늘 이 땅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유럽의 화가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바실리 페로프도 세상의 중심이었던 파리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머무른 것은 1863~4년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이 무렵은 파리에서 인상파가 막 태동하던 시기로서, 1863년은 마네가 낙선화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풀밭위의 점심>을 두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던 기념비적인 해이다.  

대혁명과 그에 뒤이은 두 차례의 혁명을 거치며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횃불을  
가장 치열하게 들었던 나라 프랑스. 누구 하나 빠짐없이 사회의식으로 충일하였을 것 같은 그곳에서,   
사회의식을 가장 멀리 하는 예술가 집단인 인상파가 탄생한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이다.  

이는 19세기 후반 들어 노동조건이 조금씩 개선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예술가란 원래가 앞 사람이 해 오던 방식을 좇아 생각하고 살아가기를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먹고살기가 조금 나아지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근대 시민사회의 새로운 생활양식들이 등장하자   
파리의 화가들은 대번 그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공원과 카페, 나이트클럽의 풍경은 그들의 단골소재였다.   
화가들은 그곳의 무용수와 가수, 여급, 창녀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으되,   
그를 통해 무거운 메시지를 전하거나 사회진보 따위를 꾀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을 빼앗은 건 새로운 세상을 비추는 빛과 우연성의 미학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 국가였던 러시아의 사정은 프랑스와 전혀 달랐다.   
1861년 농노해방령이 내려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곤궁한 처지에 있던 농민들,   
그리고 산업혁명의 태동과 함께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도시노동자들.   
러시아는 여전히 참혹한 환경 속에서 빵과 자유를 갈구하는 존재들로 가득했고,   
프랑스와는 달리 어디서도 희망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페로프의 눈에,  
빛과 색채에 혼을 빼앗긴 파리 인상파의 그림들이 탐탁하게 느껴졌을 리 만무하다.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볼 준비가 되어있는 것만 보게 된다.   
모네와 르느와르, 드가의 현란한 그림들이 태동하고 있는 파리에서도   
페로프의 눈길은 그 사회의 가장 아랫바닥 사람들에게 닿아있었다.

 

Lent Monday (Going to the Bath House). 1866. by Vasily Perov.  

19세기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비참했다. 짓밟히고, 고통받고, 숨 막히는 삶이었다.   
사회는 부패했고, 비판세력이나 국민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언론을 장악하고 전 러시아를 향해 광범위한 세뇌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은 러시아인의 민족적 자각을 낳았다.  

이어 1825년 터진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이 자각이 사회변혁의 열정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러시아 미술은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화하고 변모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화가들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지식인이었다.   
그들에게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변혁하는 도구였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러시아 화가들의 창작 규범이었다. 그들은 사회를 비판했고, 정부에 맞섰다.   
그런 예술가 정신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이 1870년 결성된 ‘이동파’였다.  

이동파의 등장이야말로 근대 러시아 미술을 서유럽 미술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는 지점이다.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동파란 러시아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려고   
여러 도시로 옮겨다니며 전시회를 연다는 취지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이동파는 말하자면, 미술계의 브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이었다.  

이동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했던 지식인들 중심의 민주적 미술 유파였다.   
세계 미술사에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한 미술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을 추구한다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Arrival schoolgirl to a blind father(Visiting the Blind Father). 눈먼 아버지에게 돌아온 여학생.   
1870. by Vasily Perov. sketch and study. 53 x 60.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Sleeping children. 잠자는 아이들. 1870.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61 x 53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Playwright Alexander Ostrovsky. 1871.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0.7 X 103.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Old Parents Visiting the Grave of Their Son. 아들의 무덤을 찾아온 노부부. 1874.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37.5 X 42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Seller of Song Books  in Paris. 1864.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Vasily Bezsonov. 1869.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62.5 X 74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Author Vladimir Dahl.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80.5 X 99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Historian Mikhail Pogodin.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4.3 X 104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Poet Apollon Maikov.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9.8 X 103.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Caretaker-Letting-an-Apartment-to-a-Lady. 숙녀에게 아파트를 세주는 관리인. 1878.  
by Vasily Perov.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Judgement of Pugachev. 1873.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Painter Alexei Savrasov. 1878.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Arrival of a New Governess in a Merchant House. 상인의 집에 도착한 가정교사. 1866,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54 x 44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The Investigation (Arriving at an the inquiry). 1867.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43 X 3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Festivities in Paris. 1863-1864. by Vasily Perov. Tretyakov Gallery Room 17.

 

Portrait of the historian Mikhail Petrovich Pogodin. 1872. by Vasily Perov.  
Oil on canvas. 88.8 X 115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Fomushka-owl, 1868. by Vasily Perov.  
oil on panel. 36.8 X 44.8 cm. Tretyakov Gallery Room 17.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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