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Children running from the Storm. 1872. <폭풍이 오기 전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167 x 102 cm.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콘스탄틴 마코프스키 (Konstantin Makovsky 1839~1915)
콘스탄틴 마코프스키는 1839년 6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그는 열 두 살이 되던 해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하고 
아버지가 세운 학교가 모태가 된 상트 페테르브르그 종합 예술학교로 진학하여 
2년 뒤부터는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를 시작했고 1869년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다.

비평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고,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의 사실주의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되었다. 
러시아의 중요한 사건을 묘사한 역사화는 그의 또 다른 관심사였으나 1870년 대 중반 
이집트와 세르비아를 여행하고 난 후, 그의 주된 관심이었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문제가 
색과 모양의 예술적인 문제로 작품이 변화되었다.

1880년대 초상화와 역사화의 선두주자가 된 마코프스키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3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대상을 받았고 
그는 당대에 가장 칭송을 받은 러시아 화가이자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화가가 되었으며, 
쉰 두 살이 되던 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다.

<폭풍이 오기 전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지만 벌판 어디에선가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린다. 
놀란 언니는 동생을 등에 업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놀란 동생은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이고,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는 언니의 표정도 불안하다. 
점차 밀려오는 천둥과 함께 바람이 풀들을 흔들고 있는 들판을 걸어온 소녀의 맨발이 애처롭다. 
어렸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천둥이었다. 
하늘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는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소리였다. 
할머니나 어머니에게 안겨 있으면 무서움이 덜했다. 

맨 발의 여자 아이가 어린 동생을 업고 폭풍우를 피해 뛰고 있다. 
이미 바람이 심상치 않고 아이들을 뒤따라 오는 먹구름 또한 예사롭지 않다. 
소녀는 어린 동생을 들쳐 입고 열심히 뛰고 있지만 폭풍우가 그들을 따라 잡을 거 같아 불안하다. 
사실 그림 속의 폭풍우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들 앞에 펼쳐질 험난한 세상사를 말하기도 하고 
바람앞에 등불 같은 러시아의 현실을 풍자한 그림이기도 하다. 
어두운 하늘을 돌아보는  아이의 불안한 표정이 너무도 사실적이며 
몰아치는 바람이 내 피부에도 생생히 느겨지는 것 같다.

 

Portrait of Princess S. Stroganova. 1864.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195 x 138cm. Tretyakov Gallery Room 22. 

콘스탄틴 마코브스키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초상화가이다. 
역사적, 사회적 장면을 그린 작품들도 있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것은 초상화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당시 러시아 귀족들, 부르주아들의 삶과 일상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마코브스키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화가로, 후에 유명한 모스크바 회화 예술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다. 
이러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마코브스키는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했고, 
어린 시절부터 회화와 조각등을 공부하며 화가로서의 면모를 다져 나갔다. 
1858년 마코브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리고 1862년 그곳에서 골드 메달을 수상한다.

하지만 다음해 메달을 학교에 반납했고 졸업장도 거부한 채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학생들과 학교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고 한다. 
화풍으로 보면 '사실주의'에 대항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낭만적이고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1868년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 그는 역사적 그림과 초상화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트의 귀족들부터, 유명인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큰 상을 수상하며 화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일각에서는 그를 러시아 인상파의 선구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백작 부인 스트라가노바의 초상화>
러시아에서 미인을 꼽으라면 그림 속의 여인을 떠올리리면 된다. 
그윽한 눈에, 갸름한 턱 선, 오똑한 콧날, 도톰한 입술, 백옥같은 하얀 얼굴, 
그리고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약간은 거만해 보이는 시선, 도도함을 가지고 있는 이런 여인을 두고 
러시아 사람들은 미인이라 칭한다. 
거기다 우아함까지 덧붙여야 하니 가히 러시아 민족의 미적 기준은 까다롭다 할 수 있다.

 

In Artist's Studio. 1881.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212.4 cm × 155 cm. Tretyakov Gallery Room 22

마코브스키의 작품을 보면 화려한 의상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가 당시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19세기 러시아 살롱 화가로서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현란한 의상과 화려한 묘사를 극적으로 살린 아름다운 초상화들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사회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꼭 인민을 위한 비판적 리얼리즘이 아닌 
서구 낭만주의에 정열적으로 접근한 화가 마코브스키였다

1905년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하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제1혁명이 시작된다.  
혁명을 지켜 본 마코프스키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과 같은 약자 편에 선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다. 
마코프스키는 늘 마음에 두었던 힘없고 핍박 받는 사람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완성되고 난 후 2년 뒤, 일흔 넷의 나이로 
사실주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연결시킨 마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가슴에 담고 그 때 떠났기 때문에 행복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뒤로 흘렀던 역사를 보면 혁명은 혁명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죽음은 조금 어이없는데, 19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트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Dance with Swords. 1881. 검무. by Henryk Siemiradzki. 
oil o n canvas. 120 × 225 cm. Tretyakov Gallery Room 22.

 

겐리흐 세미라드스키(Henryk Hektor Siemiradzki, 1843 – 1902) 는 

로마에 기반을 둔 폴란드 화가로, 그의 기념비적인 학문 예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 - 로마 세계와 유럽의 많은 국립미술관이 소유한 신약의 장면 묘사로 유명했다. 

그의 그림 중 상당수는 고대의 장면, 종종 햇볕에 쬐는 목가적인 장면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타내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는 또한 성서적, 역사적 장면, 풍경 및 초상화를 그렸다. 

겐리흐 세미라드스키는 17세기 말 이래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겐리흐 세미라드스키의 아버지는 러시아 군대의 장교였으며 1871년 장군으로 경력을 끝냈다. 
그러나 가족 안에는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의 분위기가 존재했다. 
그는 예술적 성공을 거두었을 때 언론과 비평가가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에 무관심했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일부 박물관의 국립 예술 부문에 전시되어 있다.

<검무 (Dance with Swords)>는 여성 그룹이 음악을 연주하고 몇 명의 남자가 
시계를 보면서 칼 사이에서 춤을 추는 누드 여성을 묘사한다. 
설정은 이탈리아이며 그림이 정확히 무엇을 묘사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세미라드스키는 4가지 버전의 그림을 만들었으며 각 구성과 색상 구성이 약간 다르다. 
원래 K. T. Soldatenkov가 의뢰한 버전 중 하나는 모스크바의 Tretyakov Gallery에 있다. 
또 다른 버전은 2011년 경매에서 2,098,500 달러에 판매되었으며, 이는 세미라드스키 회화의 새로운 기록이었다. 

London Sothesby 경매장에서 세미라드스키의 검무 (Dance with Swords)가 등장한 것은 꽤나 큰 사건이었다. 
결국, 재포장 된 것은 폴란드가 전쟁 중에 잃어버린 작품 중 하나 일뿐만 아니라 
Jan Matejko와 Józef Brandt와 함께 폴란드 그림의 '3개 바드' 중 하나로 여겨지는 예술가의 작품이기도 하다.

<검무>는 로마 칼이 땅에 똑바로 박혀 있는 가운데 춤을 추는 세 명의 여성과 함께 누드 소녀의 춤을 묘사한다. 
그늘에 앉아 있는 귀족의 무리가 무용수들을 관찰한다. 
따라서 일화는 짧은 서사시보다 조금 더 복잡하며 일반적으로 분수대 옆의 휴식 장면이나 

야외에서 와인을 마시는 것만 묘사한다. 
세심하게 재현된 화려한 장신구, 폼페이우스 스타일의 그림 조각, 호랑이 피부가 석재 계단에 퍼져 있다. 
그림에는 많은 열린 공간이 있으며 전경은 태양 광선이 들어오는 무성한 지중해 식물군이 지배한다. 
세미라드스키의 아들 Leon이 남긴 메모 덕분에 우리는 이 장면이 

시칠리아의 Taormina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은 위대한 학문적 주제에 대한 그의 그림 중 하나이며, 
이 경우 화가의 가장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인 기독교 초기 역사의 장면이다. 
그는 또한 목가적인 작곡을 좋아하여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상상의 삶을 묘사했다. 

 

An Orgy on the Island of Capri. 1881. 카프리섬의 티베리우스 축제. by Henryk Siemiradzki. 
oil on canvas. 120 cm × 225 cm.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겐리흐 세미라드스키는 어린 시절을 하르키우에서 보냈다. 
1864년에 그는 피터스버그 아카데미 예술대학에 처음에는 비등록 학생으로 입학했다. 
많은 노력 끝에 1866년에야 그는 정규 학생이 되었다. 
그는 유명한 전투 화가 Bogdan Willewalde와 Karl Wenig의 후원으로 배웠다. 
아카데미 학생인 세미라드스키는 은메달 5번, 황금 메달 2번을 받았다. 
그는 허미티지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극장을 자주 방문하여 무대 풍경, 장식 및 조명 효과에 주의를 기울였다. 
어린 시절부터 극장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매료되었다. 
1864년과 1865년에 그는 폴란드 지역을 여행했는데 당시 루블린과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1871년에 그는 공부를 마치고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과 닥터 필립 (Philip) 박사의 그림으로 
대상 금메달을 받았고, 그 덕분에 해외 유학을 위한 6년 장학금을 받았다.

1872년 봄 세미라드스키는 짧은 기간 동안 드레스덴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위대한 폴란드 작가 Józef Ignacy Kraszewski와 친구가 되었다. 
그가 베니스와 베로나를 본 후에는 피렌체에서 더 오래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1872년 4월 베수비오 분화를 보고 싶었던 곳 나폴리에 가서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1872년 5월에 영원한 도시에 정착하여 평생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처음에 그는 스페인 광장 근처에 아틀리에를 빌렸다. 얼마 후, 그는 교외에 자신의 빌라를 지었다. 
그곳에서 세미라드스키는 종종 그의 작품에 묘사된 로마와 알바니아 산맥의 멋진 전망을 그렸다. 
세미라드스키의 집은 로마에서 활기찬 폴란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A Scene From the Saint Bartholomew's Day Massacre, 1870. 성바돌로뮤 축제일의 학살 중 한 장면.
by Karl Jacob Wilhelm Huh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칼 훈(Karl Jacob Wilhelm Huhn 1831- 1877)은 러시아의 풍속화, 풍경화가이다. 
이름이 철자가 각각 다르게 여럿으로 표기되어 있고 Huns 훈스라고도 써 있다.  
부친은 선생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는 19살 때 셍페테르스부그로 가서 황립미술학교를 다녔다. 
29살 때 금메달을 받고 일급예술가 자격을 획득했다. 
교회에서 이콘 그림을, 또 러시아 지리학회를 위해 민속 그림을 스케치했다.

1863년 장학금을 받고 독일로 갔다. 그 후 프랑스에 묵으며 살롱전에 출품했다. 
1872년 셍페테르스부그로 돌아와 교수직 받고, 파리에서 시작했던 그림들을 끝내고 

종교적 주제에 몰두하고 이즈음 '이동파'의 일원이 된다.
1874년 결혼했으나 곧 결핵 증세가 나타나고, 

여러 곳에서 요양하다 45세의 나이에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작품의 주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St. Bartholomew's Day massacre)은 기독교의 역사상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부터 10월까지 있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추종자들이 개신교 신도들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샤를 9세 때 어머니인 메디치 가의 카타리나가 아들을 위하여 후견 정치를 하고 있었고, 
프로테스탄트들의 지도자인 나바라의 앙리와 샤를 9세의 누이와의 결혼으로 
화해의 길이 바야흐로 열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카타리나와 기즈 가의 사람들은 1572년 8월 23-24일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에 참석한 

위그노파들을 살해하는 무서운 계획을 시도하기 위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특히 콜리니도 희생으로 쓰러진 이 “파리의 유혈 결혼식”에 이어, 

지방에서 위그노파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잇달았다. 
희생자의 수는 약 3만 명에서 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사건은 세계 역사상 가장 무서운 범죄 중 하나로 낙인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 정치적인 동기가 교회적인 동기를 능가하였다.

이 소식은 곧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신실한 가톨릭교도였던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까지도 
이 소식을 듣고 공포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상복을 입고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제네바에서는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디렉토리 시대의 의상을 입은 아가씨. 1881. by Yuri Yakovlevich Leman. 
Oil on canvas. 170 x 97.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유리 야코블레비치 레만 (Leman Yuri (Egor) Yakovlevich 1834-1901)은
1834년 2월 21일 탐 보프 주 엘라 트마시에서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49년까지 그는 모스크바 알렉산드리아 고아원 연구소에서 자랐고, 
이후 모스크바의 상원 관리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1850-1863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862년에 그는 신랑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그림으로 작은 금메달을 받았다. 
레만은 금메달 경쟁에 참가했지만 메달을받지 못했다. 
1863년에 레만은 5개의 멋진 수채화 초상화로 1급 클래스 아티스트의 칭호를 받고 IAH를 졸업했다.
당시에 레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았다. 
1860년대에 그는 사진 스튜디오 A. I. 의 사진 초상화를 수정하고 채색하는 일에 종사했다. 

1866년부터 레만은 주로 파리에서 살았다. 
파리로 이주한 후 처음 3년 동안 리터처로 일하면서 수채화 초상화를 그렸다.
1870년대 후반부터 레만은 파리의 상류 사회계에서 여성 초상화와 상반신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파리에 정착한 그는 거의 독점적으로 여성의 초상화, 머리, 젊은 여성의 상반신을 그렸다. 

1870년대 후반에 그는 영국에서 몇 달 동안 일하면서 여러가지 의뢰받은 수채화 초상화를 선보였다.
1881년에 그는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1881년부터 이동파 회원으로 초상화뿐만 아니라 장르 구성과 풍경화도 그렸다.
1898년 안구 질환으로 인해 그는 영원히 러시아로 돌아가야 했고 모스크바에 살았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실제로 일하지 않았다.
유리 야코블레비치 레만은 1901년 8월 10일에 사망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묻혔다.

 

At Maecenas' reception room, 1890. 마이케나스 리셉션 룸에서. by Stepan Bakalovich.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화가 스테판 바칼로비치(Stepan Bakalovich 1857-1947)는 

러시아에서 활동한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화가다. 
그는 고대 로마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1936년부터 그는 폴란드 예술가협회의 회원이었다. 

작품의 주제인 마이케나스(Maecenas)와 황제 아우구스투스.
오늘날 우리에게 ‘메세나’(Mecenat)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 마이케나스(Gaius Maecenas)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정치적 조력자로, 
외교와 행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선보인 인물이다. 


새롭게 새워진 제국의 혼란과 갈등을 노련하게 잠재우면서 
황제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던 이 정치가는 흥미롭게도 그 와중에 
호라티우스나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젊은 시인들과 어울리며 전폭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마침내 로마에 문화의 시대를 열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의 이름은 정치가로서 보다는 ‘예술 후원’으로 더욱 빛을 발했으니, 그의 명성은 훗날 베니스 화가 

티에폴로의 <아우구스투스에게 예술을 소개하는 마이케나스>라는 작품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한 사회의 전성이 가시적으로 구현되기까지 거치게 되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제일 먼저가 정치적 안정, 그 다음이 경제적 번영 그리고 맨 마지막에 오는 것이 문화의 발전이다. 
기원전 2세기 경 정복 전쟁에 주력했던 로마의 문화적 번영기는 도래하지 않았으니, 
향후 ‘로또’가 되어줄 엄청난 수의 그리스 미술품을 손에 쥐고도 이를 알아볼 눈이 없었던 로마의 장군 

뭄미우스는 결국 딸의 지참금조차도 제대로 챙겨줄 수 없는 불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무지가 비단 뭄미우스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니, 
무력을 내세워 영토 확장에 사활을 걸었던 로마 지배층 전반에 해당되는 상황이었다. 

이후 로마의 분위기에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바로 뭄미우스 이후 
채 100년이 지나지 않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부터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평화 시대를 열었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BC 63-AD 14)는 ‘돌’로 된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으로 된 로마를 후세에 남겼다는 말로 자신의 업적을 정리했는데, 
그가 남긴 것은 그 외에 ‘마이케나스(Maecenas)’라는 걸출한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술품 수집을 둘러싼 로마 황제들의 좌충우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이유로 

컬렉션에 몰두하는 컬렉터들의 양태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 하다.

 

Michael of Chernigov at the camp of Batu Khan, 1246, 1883. by Vasily Smir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작가 바실리 스미르노프는(Smirnov Vasily Sergeevich 1858년~1890년)는 
고대 역사의 장면을 전문으로 한 아카데믹 스타일의 러시아 화가다.
그는 러시아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친척인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직업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1875년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78년 그곳에서 전시회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받았다.

같은 해에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있는 Imperial Academy of Arts 로 편입하여 
Pyotr Shamshin 과 Pavel Chistyakov와 함께 공부했다. 
1882년에 그는 폐의 "만성 카타르" 로 인해 아카데미에서 휴가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예술가"라는 칭호와 유학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비엔나를 경유하여 이탈리아로 갔고 결국 로마에 정착했다. 
여름 더위가 너무 심해서 그는 토리노로 이사를 갔고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살롱에서 전시했다. 
북서부 유럽을 여행한 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일종의 멘토가 된 Vasily Savinsky와 함께 살았다 .

1885년에 그는 고전 주제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었던 폼페이에서 스케치를 그렸다. 
다음 해에 그는 "네로의 죽음" 작업을 시작했으며, 완성하는 데 2 ​년이 걸렸다. 
이 작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보냈고 여러번의 전시 후 차르 알렉산더 3세가 구입했다.

1889년 그는 아카데미 부교수가되었지만 폐 질환이 계속 악화되면서 잠깐 머물렀다. 
이탈리아의 기후는 유익한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끝이 가까웠음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 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쿠빈카(Kubinka)와 골리치노(Golitsyno) 사이의 기차에서 이동 중에 사망했다. 
그의 형은 1891년에 여러 미완성 그림을 포함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했다.

미하일 프세볼로도비치 (Saint Michael of Chernigov, 1185년경 ~ 1246년 9월 20일)는 
류리크 왕조 출신으로 키예프 대공국의 대공(재위: 1236년 ~ 1240년, 1240년, 1241년 ~ 1243년)이다. 

프세볼로트 4세 대공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2세 공작의 딸인 아나스타시아(Anastasia)이다.
키예프 대공에 즉위하기 이전에는 페레야슬라우 공국의 공작(1206년),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 공작(1219년 ~ 1226년), 체르니히우 공국의 공작(1223년 ~ 1235년, 1242년 ~ 1246년), 
노브고로드 공화국 공작(1225년 ~ 1226년, 1229년 ~ 1230년), 갈리치아 공작(1235년 ~ 1236년)을 역임했다.

1238년 야로슬라프 3세(블라디미르의 야로슬라프 2세 대공)의 뒤를 이어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다. 
1240년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 군대가 키예프를 정복하면서 키예프 대공국은 붕괴된다.
1241년에는 폐허가 된 키예프의 통치자가 되었다. 
1243년 체르니히우 공국으로 귀환했지만 킵차크 칸국 군대에 의해 처형당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Portrait of Princess M. Orlova-Davydova. 1880.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Portrait of V. Morozova. 1884. by Konstantin Mak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2.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2 전시실

 

The sick husband, 1881. 병든 남편. oil on canvas. by Vassily Maximov. 
oil on canvas. 70.8 x 88.6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바실리 막시모프 (Vassily Maximovich Maximov. 1844-1911) 
막시모프는 농가에서 태어나 일찍 고아가 되어 이콘제작소에서 일하며 그림을 처음 배웠다.  
19살에 황립예술학교 입학, 1864년 "아픈 아이"를 그려 재학생 금메달 수상.  
3년의 학교를 마친 1865년, 크람스코이가 이끌었던 14명의 학생처럼, 
막시모프는 학교의 메이저 금메달 경연대회에 불참한다.  
막시모프는 이 금메달의 부상으로 가는 유럽 유학보다는 러시아 농촌에서 그림공부하는 쪽이 낫다 생각했다.  
그는 슈비노 마을로 이주하여 귀족 자제에게 그림지도를 하며, 농촌의 삶을 그렸다.

그림 속 병상에 누워 있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남편을 보살피던 여인은 털썩 무릎을 꿇고 그녀가 섬기는 신에게 하소연한다.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꼭 그를 데려가야 하는가에 대한 절규인지... 
그림에서 처럼 보통 러시아 가정은 집안의 가장 성스러운 곳에 이콘을 걸어놓고 기도를 올린다. 
그래서 러시아 일반 가정집에 초대 받았다면 집안 어디에 이콘이 걸려있는지 
살펴보고 기본적인 예를 갖추는 것이 좋다.

아내는 이콘화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바로 옆 침대에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병이 들어 누워 있는 남편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치마 밑으로 살짝 보이는 그녀의 맨발과 침대 아래 놓인 남편의 쓰러진 신발이 애처롭다.

​남편이 누워 있는 침대도 나무 위에 짚을 깔고 모포를 그 위에 깐 것이다. 
가난한 생활에 남편까지 병들었으니 이 부부의 앞날이 그을린 마루 바닥 같은 색일까? 
그런데 울어 본 사람은 알지만 눈물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많지 않다.
눈물은 절망의 가장 밑 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빛을 막기 위해 창에 걸어 놓은 천도 이제 곧 내리게 될 게다.

막시모프는 상페테르부르크에서 140km 정도 떨어진 노바야 라도가 근처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부였는데, 어려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가 수도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이콘 화가의 견습생 일을 시작한 것이 열 한 살 때였으니까,
부모를 여읜 것은 그 이전이나 그 언저리쯤의 나이가 아닐까 싶다. ​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는 부모의 마음만큼 절절한 것이 또 있을까?

 

Everything is in the past. 1889. <모든게 다 지난 일이야>. by Vassily Maximov. 
oil on canvas. 72 x 9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겨울의 차가움을 끝내고 봄의 화사함을 즐기는 두 노인.
귀족과 하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뒤로하고 함께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피붙이처럼 보내며 세속의 어떤 구속도 뛰어넘는 삶을 견디고 있다. 
소파에 몸을 기대 할머니의 표정이 아련하다. 
땅 바닥인데도 발 받침을 깔아 놓았고 테이블 위에는 고급 그릇들이 놓여 있다.

​한 때 아주 부유했던 모양이다. 
그 옆의 노인은 시중을 드는 역할인 것 같은데, 두 여인의 표정이 대조가 된다. ​
소파에 앉은 여인은 하늘을 보고 있고 계단에 앉은 여인은 땅을 보고 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바로 앞의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전에는 꽤 근사했을 집이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햇빛 아래 서 있는데, 
할머니에게는 그 것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모든 과거는 소중한 것이지만 지금 내가 당당하게 땅을 밟고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법이다.

1872년, 막시모프는 이동파의 멤버가 되었고 가입하자 마자 곧 이동파의 중요한 그리고 열성적인 멤버가 된다.  ​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이동파의 취지가 맞았으니 흥이 날 수밖에 없었겠다. 
막시모프의 작품에는 러시아 농민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이야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처럼 다가 오기도 한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Detail (부분)

허공을 바라보는 노파의 시선엔 그리움이 가득하다. 
찬란하게 빛나던 젊음의 시간 속에 인생의 굽이마다 널려 있던 아련한 사연을 떠올린다. 
그런 그녀를 위해 햇살은 아름다운 교향곡을 울려준다. 

나이 들고 병들어 육신의 계절은 차디찬 겨울이지만 
과거에 두고 온 젊음을 떠올리며 이렇게 또 하루를 견딘다.
노파는 보라색 라일락이 만개한 화려한 계절을 따라 타임머신을 타고 있다. 
과거를 아련히 떠올리는 표정엔 만감이 교차한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Detail (부분)

묵묵히 바느질하고 있는 여인은 하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무채색으로 이뤄진 그녀. 
지금의 밝은 햇살이 고마울 따름이지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 봄날은 없다. 
오히려 머리맡에 앉아 뜨개질 하던 지난 과거를 지우고 싶은 듯하다.

세월의 눈이 하얗게 내려 앉은 그들은 
하나의 사모바르 (러시아 차주전자)에서 차를 따라서 함께 마신다. 
신분의 고하를 떠나 두 노인은 이미 서로를 의지하는 친구가 되었다. 
험난했던 인생의 골짜기 굽이굽이 마다 함께 견뎠을 그들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려 앉는 것, 
평생을 함께 해온 인생의 동반자로서 이 순리에 순응하며 끝까지 생을 함께 할 것이다. 
반상의 차이는 물리치고 인간으로서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갈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조용히 가르친다.

이 한편의 그림에서 그들이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며 
현재를 읽으며 그리고 함께할 미래를 가늠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삶도 그들과 함께 그림 속에 투영된다.
“그렇게 우린 그림에서 인생을 배우고, 삶을 느낀다.”

 

A Sorcerer comes to a peasant wedding. 1875년.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
by Vassily Maximov. oil on canvas. 116 x 188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장면은 겨울 해질 무렵 노브고로드의 한 농가의 방이다. 
결혼 축하연이 벌어지고, 성스런 이콘 아래 신랑 신부가 자리잡고 있다. 
돌연 눈을 잔뜩 뒤집어 쓴 주술사가 방으로 들어온다. 
초대받지 못한 것에 대해 심술이라도 난 듯 주술사의 이미지가 뾰로통하다. 
부모님은 빵과 소금을 들고 황급히 주술사를 맞이하고, 신랑 신부는 놀란 듯 일어선다. 
사람들은 소곤거리기도 걱정스런 눈 빛을 보내기도 한다. 

키가 아주 큰 주술사는 손에 목발을 짚고 마을 주민들을 쏘아본다. 
그러자 그들은 돈주머니로 손을 옮기고 있다. 
모두가 주술사가 어떤 말을 쏟아낼 지 긴장한 듯 보인다.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마을 사람들에겐 빛을 주고 
주술사가 서 있는 쪽은 어둠에 묻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 에서 주술사 부분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에서 신랑 신부 가족들 부분 

 

Grandmother's tales, 1867.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by Vassily Maxim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3.

우리에게도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 얘기를 
화롯가에서 듣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 
막시모프는 1867년 "이동파"의 전시에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Grandmother's tales)를 내어 
입상하고 파벨 트레치코프가 구입한다.  

1872년 "이동파" 회원이 된 후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주요 화가이다.  
일리아 레핀은 막시모프를 가리켜, "이동파' 모임에서 가장 부서지지 않을 기반석"이라 평하기도.
1900년 전후로 러시아 사실주의는 쇠퇴했는데도 막시노프는 여전히 농부의 삶만 그려서 
그림 구매자가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말년은 가난과 질병의 삶이었다.  
상트 페테르스부그에서 사망했다.

 

Repairing the Railroad, 1874. 철도 복구작업. oil on canvas. 100cm x 175 cm. 
by Konstantin Savitsky. Tretyakov Gallery Room 23.

화가 콘스탄틴 사비츠키 (Konstantin Savitsky 1844~1905)
1870년 크람스코이에 의해 조직된 ‘이동 전시협회 (이동파)’는 러시아 미술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화가였지만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이동파 멤버들은 러시아 민중의 신산스러운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장엄한 풍경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담아냈다.
그 멤버들 중 한 명인 콘스탄틴 사비츠키에 대해 알아본다.

얼마 전 내린 비로 작은 산사태가 일어 났던 모양이다. 
철길을 다시 살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자세히 보니 대부분 나이 많은 사람이거나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들이다. 장비도 변변치 않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지구 끝까지 연결되어 있는 철길들은 
대부분 이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 철길에 담긴 눈물은 얼마나 될까? 철길이 열리면서 부를 쌓은 계층은 따로 있다.
​이 작품은 사비츠키의 대표작이 된다.

사비츠키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항구 도시인 타칸로그에서 태어났다.
이 곳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안톤 체홉도 있다. 
사비츠키 식구는 타간로크 남자고등학교 건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학교에 거주하는 의사였다. 혹시 관사 같은 곳 아니었을까?

 

Ikon on the road, 1878. 이콘 환영식. by Konstantin Savitsky. 
oil on canvas. 144 × 230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마을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담긴 이콘화가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경배를 올리고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도 보인다.
이 그림이 마을의 평화와 가족의 행복을 지켜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콘화는 그림이 아니라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사비츠키는 부모를 따라 해변가에서 스케치 하는 것을 좋아했고, 
드로잉 과목은 가장 좋아하는 학교 수업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갑자기 그의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오늘날의 라트비아에 살고 있던 삼촌이 사비츠키의 보호자가 된다. ​
삼촌은 그를 사립 기숙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사비츠키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얼마 되지 않아 우등생 중 한 명이 된다. 
좋아하는 것을 잘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여러번 은메달을 땄던 사비츠키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작품으로 마침내 금메달을 수상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비츠키는 2년간 유럽 여행을 다녀온다. 
이 시기에 많은 러시아의 젊은 화가들이 서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상파 화풍을 접했지만 그 기법을 바로 수용한 화가는 거의 없었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사비츠키는 이동파의 멤버가 된다. 
민중 속으로 들어 가고자 했던 이동파에게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주제였다. 
상대적으로 인상파는 주제보다는 기법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인상파 기법이 러시아 미술에 정착되는 데는 시간이 다소 필요했다.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귀국한 화가들에 의해 바로 인상주의가 자리를 잡은 미국과는 차이가 난다.

 

Morning in a Pine Forest, 1886. 소나무 숲의 아침. oil on canvas. 139 x 213 cm. 

소나무 숲의 곰 무리를 묘사한 이 그림은 ‘숲의 화가’라고 불리는 
이반 쉬스킨 (Ivan Ivanovich Shishkin)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처음 이 작품이 발표 되었을 때, 사람들은 쉬스킨이 숲을, 사비츠키가 곰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따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함께 그렸다. 
그러나 훗날 사비츠키는 자신의 서명을 그림에서 지운다.
자신의 선배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전설이 된 쉬스킨에 대한 예의였다.
사비츠키, 참으로 멋진 사람이었다.

사비츠키는 민중의 삶의 실제를 그림에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동파 대부분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개인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이것도 이동파 풍속화가들의 특징이 되는데 바실리 막스모프나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의 작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사비츠키는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동파 멤버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차르 체제 아래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비평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끝없이 묘사한 중요 멤버이자
러시아 혁명 전에 가장 뛰어난 풍속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사비츠키는 화가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모스크바, 펜자 
그리고 상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20년 넘게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개인 삶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1897년, 쉰 셋의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니까 
화가로서 사회적인 지위도 확실했다. 
사비츠키는 예순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사비츠키가 세상을 떠나고 9개월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12년 뒤, 러시아 혁명이 완성된다.
혹시 그가 그 때까지 살았다면 그가 평생 애정을 담고 그림에 담았던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회를 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The road in the rye, 1881. 호밀밭 길. by Grigory Myasoyedov. 
oil on canvas. 65 x 145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러시아 회화의 대가 그리고리 마이소도프(Grigory Grigorievich Myasoedov 1834-1911) 

역시 이동파 그룹에 속해 있었다.
마이소도프는 툴라 지방의 판코보(Pankovo) ​​마을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853년 그는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861년 마이소도프는 "지주 꾼의 집에 있는 젊은이에게 축하"라는 작품으로 작은 금메달을 받았다. 

1862년 그는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리투아니아 국경에 있는 선술집에서 나온 Grigory Otrepiev의 탈출"이라는 작품으로 큰 금메달을 수상했다. 
1863년 그는 이탈리아, 독일, 벨기에, 스위스를 방문하여 파리와 스페인에서 일했다. 
로마에서 그는 사립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869년 그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The Conjuration" 그림을 그렸고, 이로 그는 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1860년대 후반 해외에서 마이소도프는 이동파 협회를 조직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1870년 12월 16일, TPHV 회원들의 첫 번째 총회가 열렸고, 
그곳에서 마이소도프를 포함한 이사회가 선출되었다. 
그는 TPHV의 첫 번째 헌장의 저자가 되었으며 40 년 동안 이사회의 영구 회원으로 남아 있다. 
1871년 11월 29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의 이동파 순회 미술전시회가 열렸고 
이어서 모스크바, 키예프, 하르코프에서 전시되었다. 

 

Before confession, 1877. 고백 전. by Alexey Ivanovich Korzukhin. Oil on canvas. 

러시아 장르 화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코르주힌 (Alexey Ivanovich Korzukhin 1835년~1894년)은 
예카테린부르크 근처의 금광 채굴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지역 철도 공장과 조폐국에서 일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58년에 제국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861년 그는 여행 경비로 금메달과 금일봉을 받았다. 


그러나 1863년에 그는 사실주의를 선호하고 회화에 대한 아카데미의 주장에 
항의하는 학생들 그룹인 "14 명의 반란" 의 일원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예술 공동체인 Artel of Artists에 합류하여 1871년 해산될 때까지 그들과 함께 했다. 
그는 또한 이동파의 회원이 되었다.
 
일상 그림 외에도 초상화와 종교 작품을 그렸다. 
그는 1881년 차르 알렉산더 2세의 극도로 피비린내나는 암살을 목격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신경 쇼크가 발생 했으며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Wake for a Deceased Merchant, 1870. 죽은 상인을 위해 깨어남. by Zhuravlev Firs. 
oil on canvas. 98 x 142 cm. Tretyakov Gallery Room 23.

러시아 장르 화가 Firs Sergeyevich Zhuravlev (1836-1901)는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다니며 역사 회화를 공부했다. 
1863년에 그는 리얼리즘을 지지하고 아카데미의 고전 스타일을 장려하려는 주장에 
항의하는 학생 그룹인 "14명의 반란"의 일원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i)와 함께 그는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워크샵을 공유하고 공동 가정을 유지하는 화가 그룹인 이동파를 설립하는 데 참여했다. 
1862년부터 1874년까지 그는 농민 생활에 대한 많은 묘사에 내재된 사회적 비판으로 인해 
혁명 집단과의 유대 혐의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아카데미에서 그의 첫 번째 전시회는 1868년에 열렸고 6년 후 작품 전시로 
그는 "아카데미션"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888년과 1889년에 그는 이동파의 전시에 참여했지만 정식 회원이 되지는 못했다. 
그는 또한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00주년 박람회, Universelle 박람회 (1889) 및 
1896년 전 러시아 전시회에 참가했다 .
유화 외에도 그는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과 리가의 탄생 대성당을 
장식하는 일을 도왔고 구세주 성혈교회의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3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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