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 후반 그림 <이동파 시대> 

 

Self-portrait, 자화상. 188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은 1844년 러시아의 추구예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때 고향 추구예프의 이콘 화가 

부나예프(Bunakov)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19세 되던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예술장려협회의 미술학교에서 데생 교육을 받았다. 
이듬해인 186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의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를 만났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를 이끈 지도자이자 시대를 주도하는 예술가로 
그는 레핀에게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각인시켰다.

레핀은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아카데미 졸업 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그는 이것으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레핀은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유학을 미룬 채 이 장면을 그리는 데 매달렸다. 
3년 뒤에 탄생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각각의 인물 속에 개성 넘치는 성격과 
다양한 삶의 흔적, 강인함과 절망, 비극적인 러시아의 상황을 담아낸 수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레핀은 1873년 5월 유럽으로 향했다. 
비엔나, 베니스, 로마를 방문한 그는 파리에 자리를 잡았다. 
1874년 파리에서는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레핀은 인상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예술의 흐름과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옹호했다.

레핀은 1876년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여 <성직자>, <황녀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 등 러시아적 가치와 전통에 바탕을 둔 작품을 발표했다. 
1877년 추구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온 레핀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의 영지 아브람체보를 자주 방문했다. 
이곳에는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Tretyakov) 등 예술가 및 재력 있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레핀은 이념적으로 자유로웠던 아브람체보의 분위기를 즐겼고, 

이 모임의 가장 활동적인 회원이 되었다.

1882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옮긴 레핀은 이동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이동파는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러시아 사회를 통찰력 있게 묘사한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은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역동적인 삶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삶 속에 내재된 다양한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유형지에서 고향의 집으로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간의 긴장된 심리 상황이 날카롭게 포착되어 있다.

레핀은 초상화의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고골(Nikolai Gogol) 등을 비롯한 문학가, 
무소륵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Vladimir Stasov) 같은 예술 비평가, 
그밖에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다.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 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았다. 
레핀의 마지막 대작이 된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를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핀은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왼손으로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이전의 명성에 걸맞는 작품에는 미치지 못했다. 
레핀은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보냈다. 
그리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레핀이 거주하던 쿠오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1948년 레핀의 이름을 따 ‘레피노’로 개칭되었다.

 

Krestny Khod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Gubernia. 쿠르스크 지방의 십자가 행렬. 1883. 
by Ilya Repin. oil on canvas. 280 x 17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십자가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1880–1883년) 
​1880년에서 1883년 사이, 3년여에 걸쳐 완성된 이 이 작품은 쿠르스크 지역의 
코렌나야 수도원 (Korennaya Monastery)에 모셔진 신령한 기적의 성상
 '쿠르스크 성모상 (Our Lady of Kursk)'과 십자가를 들고 

거리 행진 행사를 펼치는 대규모 러시아 정교회 축제다. 
거지와 장애인과 치안 경찰과 군인들을 위시해 지역 유지들이 앞장서서 
그 뒤를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며 대오를 이룬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어떻게 술 취한 취객이 

성상을 들고 있느냐 하며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 그림은 평범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러시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 행렬로, 

교회 안에 있는 이콘(성상화)이나 성물을 들고 행진을 하는 행사라고 한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어떤 신념으로 자리잡을 때는 분명 인간의 귀천을 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과 인간을 연결지어주는 인간이 개입하게 되면, 

이상하게도 계급에 따라 신의 사랑은 차별을 두게 된다.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은 재미있다.
이콘을 들고 걷는 귀부인은  자부심에 차 있으며, 

화려한 복장의 성직자는 지루한 것처럼 보인다. 
두 명의 여인은 조심스레 성물 상자를 들고 걷고 있다.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치안 담당자는 말을 타고 거만하게 가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채찍을 휘두르기까지 한다. 
지친 아이들은 동행하는 어른의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림의 왼쪽 하단, 그러나 화면에서 감상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그들이다.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종교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 Detail (부분)

 

레핀은 원래 십자가 행렬을 위해 숲을 지나는 배경을 선택했다고 한다. 
르노아르의 <물랭 드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에서 표현된 

일렁리는 햇빛의 효과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핀은 참나무 숲 속의 햇빛 효과를 포기한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인상을 포기하고 

화창한 하늘 아래, 뽀얀 먼지 일어나는 흙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레핀이 얻은 효과는 무엇일까? 바로 사람들이다. 

 

The Reply of the Zaporozhian Cossacks to Sultan Mahmoud IV. 1880.
by Ilya Repin. oil on canvas. oil on canvas. 67 X 87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터키 술탄 메메드 4세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 카자흐인의 회신(回信)'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가 카자크 족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에 대해 어마어마한 쌍욕이 담긴 답장을 보내서 복수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말대로 세상에서 일리야 레핀만큼 사람의 삶을 잘 표현해서 그린 화가는 없는 것같다.
저 많은 사람들이 다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데 너무 익살스러우면서도 너무 진지하고...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편지 한 장 쓰면서 쓰러지고 난리가 났다. 

16세기 몽골로부터 독립한 러시아는 모스크바랑 키예프랑 이런 곳에서 
몽골이 살고 있던 시베리아로 제국을 넓혀갔다. 
남쪽으로도 영토를 넓혔는데, 이제 독립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던 때라 
아직 제대로 만들어진 체계가 없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이 그림 역시 레핀의 주특기인 굉장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권한을 등에 업고, 시베리아 등 각종 미개척지를 돌아다닌 자유분방한 민족답게
그들 얼굴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친다.
그림의 배경인 조롱거리로 답장을 쓰는 현장답게 편지를 쓰는 서기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타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도를 가진다.

가운데 탁자위에서 글을 쓰는 서기는 정작 이 중요한 현장에서 답장을 쓰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건만,
그의 모습은 안경쓴 샌님같은 모습에 복장도 시커먼 것이, 별반 중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않게 한다.
작가가 신경써서 연출한 중요한 인물들은 탁자를 중심으로 배치된 코사크족 인물 개개인들임을 알 수 있겠다.
진지한 모습, 익살스런 모습, 박장대소하는 모습, 담배 피우는 모습 등 개개인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하다.

주요한 얼굴 모습은 모욕적 답장을 씀으로 인해 비웃음이다.
근데 이렇게 많은 인물들 개개인의 웃는 얼굴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다.
마치 실제 현장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이다.

또한 인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비류도 사실주의가 묻어난다.
유목민족 특유의 야생적인 복장과 러시아의 투르크 양쪽의 영향을 받은 듯한 장비와 장비에 그려진 문양.
거칠게 살아왔음을 반증하는 멋드러진(?) 수염과 쭈글쭈글한 주름.
지금 쓰고 있는 답장이 여차하면 거대한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음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하하하 웃고 있는 것이 이들의 와일드함과 저항정신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1676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트 4세는 현재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던 
자포로제 코사크인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다. 
자포로제 코사크는 코사크의 한 일파로 드네프르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그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등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서 여러 번 싸운 적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 술탄의 편지 내용인즉슨
"술탄이자, 무함마드의 아들, 해와 달의 형제, 하느님의 손자이자 총독으로,
마케도니아와 바빌론, 예루살렘, 상 이집트 왕국의 지배자, 황제 중의 황제, 군주 중의 군주,
패배할 줄 모르는 훌륭한 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그리스도교의 확고한 방어자로써 짐은 그대들 자포로제 코사크인들이 
어떠한 저항없이 자발적으로 짐에게 복종할 것과 무의미한 공격으로 짐의 심기를 건들지 않을 것을 명하노라"

쉽게 말해 "순순히 항복하고, 국경지대를 찝적거리지 말도록"이란 말을
아주 거창하게 타이르듯 내지른 편지다.
이에 대해 코사크인들은 콧방귀 뀌듯이 답장을 쓴다.
편지를 쓰는 현장이 박장대소의 장이 될 정도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느냐 하면,
10원짜리 대사가 난무하는 무지막지한 편지였다.

 -자포로제 코사크 형제들이 술탄에게
터키의 임프이자 똥같은 악마들의 친구이자 형제이며 루시퍼의 꼬붕인 술탄아. 
얼마나 병신같은 기사길래 니 후장에 붙은 고슴도치 한마리도 족치지 못하냐? 
악마의 똥같은 짬 찌끄레기야. 너 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기독교 형제들을 이기지 못할꺼다. 
우린 니네 좆만한 쫄따구들이 무섭지도 않고, 땅에서든 바다에서든 박살내서 니 애미를 따먹어 주마! 

너는 바빌론의 설걷이꾼, 마케도니아의 마부, 예루살렘의 양조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염소와 떡칠 새끼, 
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새끼,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창남, 카먀네트의 망나니, 
그리고 이 모든 세상에서 가장 골빈 놈이다. 
신 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의 쥐가 난 좆 대가리, 돼지 주둥아리, 
당나귀 엉덩이에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의 대갈통이나 달고 있고 니 애미와 할 씨발새끼야!

이것이 너같은 좆만한 새끼에게 주는 우리 자포로제 형제들의 답장이다. 
너는 기독교의 돼지에게 먹이를 줄 정도도 안되거든? 
이제 끝을 맺는데, 우리는 달력 그딴거 안키워서 오늘이 몇 일인가 몰라. 
달은 하늘에 있는 것이고, 몇 년인가는 책에 적혀있고, 날짜는 니가 있는 동네와 똑같다. 
우리 똥꾸녕이나 쭈욱 빨아라!
-코사크의 수령 이반 시르코와 자포로제의 형제들-

어쨌든 이 편지를 보내고 나서도 메흐메트 4세는 별반 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당시는 이미 다른지역과의 전쟁으로 너무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편지 자체가 코사크인들에게 한번 크게 패하고 나서 보낸 것이기에
다시 전투를 치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터키와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으르렁거린 역사적 사실의 한가운데에서
이 정도의 역작을 그려낸 일리야 레핀에게 박수를 보낸다.

3, 6m가 넘는 이 대형 그림은 2년 여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 술탄 (재위 1648-1687)의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한 그림 타블로이다. 
이 그림을 본 알렉산드르 3세는 감탄하면서 즉석에서 3만 5천 루블을 하사했다. 
이 금액은 러시아 황실 그림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의 그림 값이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들은 러시아의 생생한 역사 현장을 극명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미술관과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국립 미술관을 장식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Detail (부분)

 

Tsarevna Sophia Alexeevna in the Novodevitchy Convent. 1879.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감금된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45 x 202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이상적 군주란 어떤 사람일까. 
나라를 잘살게 만들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애틋하게 살핀 왕을 
우리 역사에서 찾는다면 사람들은 단연 조선조의 세종을 꼽을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세종은 충무공과 더불어 흠결을 찾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이다. 
그에게는 ‘대왕’이란 칭호가 따라붙는다. 
‘대왕’이란 이름이 익숙한 군주로는 민족의 영웅 광개토대왕도 있다. 
그는 상세한 행적을 알기 힘든 고대사의 인물이지만, 한때 우리가 동북아시아를 
호령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이 좁은 땅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적 스케일을 확장시켜준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이 두 군주의 업적들을 몽타주하여 러시아 역사에 대입했을 때 
로마노프 왕조의 제4대 차르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를 떠올리게 된다면 좀 무리가 있을까. 
‘대제’가 이룬 성과를 나열하자면 너무 길다. 
요컨대 군사·행정·산업·교육·종교 등 전 방위에 걸친 서구화 개혁을 통해, 유럽 변방의 이류 국가 
‘모스크바대공국’을 세계 열강 ‘제정러시아’로 환골탈태시킨 것이 바로 그다. 
역사를 만들어 온 주체는 한 사람의 군주가 아니라 민중이란 명제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역사가 이만큼 한 인물의 업적에 의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러시아의 거장 일리야 레핀은 1879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공주>를 내놓았다. 
화가는 그로부터 약 180년 전 아름다운 노보제비치 수녀원 어느 방 안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탁자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은 표트르 대제의 이복 누나 소피아 공주이다. 
번쩍거리는 치장이 그녀의 높은 신분을 나타내고 있지만 어딘지 퇴락해 보인다. 
사자처럼 위풍당당한 모습과 부릅뜬 눈매가 사뭇 위협적이지만 어딘지 서글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지금 무려 아홉 해 동안 이 수도원에 갇혀 지내는 신세인 것이다. 
게다가 오른쪽 창밖에는 한 남자의 주검이 매달려 있다. 
심상찮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소피아 알렉세브나(Sophia Alexeevna)의 전성시대 
표트르 대제의 부왕인 로마노프왕조 제2대 차르 알렉세이에게는 
두 명의 왕후와 그들이 낳은 많은 자녀들이 있었다. 
제3대 차르 표도르 2세는 알렉세이 사후에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1682년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뜬다. 
따라서 후계자는 자연히 수많은 형제들 가운데에서 찾게 되었다. 
차르가 죽었을 때 같은 어머니 마리아 소생으로 여섯 남매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부왕의 후처 나탈리아가 낳은 이복동생 삼남매가 생존해 있었는데 표트르가 그 가운데 하나였다. 
왕후를 배출한 두 가문은 차르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한다. 
한쪽이 승리하는 순간 다른 쪽은 멸문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를 파국적 상황이었다.

여기서 사태는 일단 표트르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었다. 
러시아정교회의 최고위자인 총대주교 요아킴이 각 계급의 대표들과 뜻을 모아 
표트르를 차르로 선포해 버린 것이다. 
차르 알렉세이의 첫 부인 마리아의 소생으로 16세의 이반이 있었지만 
병약하여 왕의 재목이 아니었고, 둘째 부인 나탈리아의 아들 표트르는 
아직 10살에 불과했지만 건강하고 군주로서의 자질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이반의 장성한 친누나 소피아 공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소피아 공주의 외가 밀로슬라브스키(Miloslavsky) 가문은 
표트르의 외가 나리쉬킨(Naryshkin) 가문이 왕자 이반을 살해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스트렐치 근위대는 
표트르의 친척과 우호 세력 40여 명을 살해한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긴급히 모인 고위성직자와 정부 관계자들은 
타협책으로서 이반과 표트르를 공동 차르로 옹립한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표트르가 죽지 않고 차르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민심이 그에게 상당히 쏠려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공동 차르’는 허울뿐인 자리였다. 
실제 권력은 공식적으로 섭정이 된 소피아가 틀어쥐게 된다.

1698년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감금된지 일년 뒤의 소피아 알렉세에브나 황녀, 
그녀의 친위대가 처형당하고 시녀 전부가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를 묘사한 작품이다. 

그림 속에 나타나는 여성들은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찬미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다. 
아름다움과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자태, 

그 내면에 산재한 고고함이 뭇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경우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샤갈의 그림, 클림트의 그림 등을 보면 

사랑하는 직접적인 대상으로의 여성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세 번째는 의인화 된 여성이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문학 속 주인공으로서, 현실 속에 포치된 타자적 시각에 의한 여성이다. 
물론 이밖에도 여성은 여러가지 의미로서 그려진다.

그렇다면 그림 속 여자가 가장 고통스럽거나 정말스러울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어떠한 연유로 절대적 위치에서 강제로 벗어났을 때 느끼는 분노로 

이성을 조절하지 못할 때가 아닐까 싶다. 
장희빈이 그러했고 서태후가 그러했음만 보아도 이는 타당성이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리얼리즘을 논할 때 거론되는 몇 안 되는 동유럽권 화가이자 
19세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독보적인 존재인 일리야 레핀의 그림 

소피아 알렉 셰에브나 황녀 정말 무시무시한 표정이다.
무언가 증오에 찬 나머지 붉게 이글거리는 눈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읽어 내게 하고 
꽉 다문 입술은 백 마디 말 보다 강인하게 다가온다. 
자세는 매우 당당하고 심지어 패기마저 넘쳐 보인다. 덤빌테면 덤벼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 황녀가 처한 당시의 입장은 상당히 불안했다​.

황금빛 의상을 걸치고는 있지만 험악한 표정을 잔뜩 짓고 있는 이 여성은 

러시아 표트르 대제 (즉, 러시아 노마노프왕조 제 4대 황제)의 친누나이다. 
그런 그녀가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원래는 표트르와 또 다른 동생 이반과 함께 1682년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표트르와의 동맹이 깨지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소피아는 동생에게 대항하려다 실패하면서 결국 감금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일종의 쿠데타가 미수로 그친 셈이었다. 

쿠데타의 실패는 곧 동생의 지독한 앙갚음임을 의미했다​.

그림 뒷편을 보면 참수되어 목이 내걸린 병사를 볼 수 있다. 
황녀를 지켜주던 근위병이지만 이미 죽음에 이르렀다. 
대제는 이렇게 누나의 수족들을 눈 앞에서 하나씩 죽여 나갔고 
누나마저 서서히 죽음에 이르도록 평생 수도원에서 놓아주질 않았다​.
이를 기록하는 몸종 (그림 왼쪽 뒤)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듯 앉아 
조심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당시의 상황에 어쩔줄 몰라한다. 

이는 진실에 관한 두려움이다. 
죽음에 이를 사람이나 이를 보는 사람이나 모두 불안정하긴 매한가지이다​.

이 그림은 권력이라는, 인간이 결코 벗지 못할 굴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한 때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절대 권력자였으나 

그녀의 현재는 덧없는 무상함이 감돌 뿐이다. 
또한 그녀의 미래는 대략 짐작해도 결코 밝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일리야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역사를 조명하면서도 
인간이 가야할 길이 결국 어디로 나 있는지를 일러주려 한다​.

 

Refusal of the Confession. 고해를 거절하다. 1879~188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8 x 48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죽음이 현실 앞에 놓여 있어도 자신의 신의를 버리지 않고 
조국을 위해 생을 다한 것임을 당당히 밝히는 혁명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남루한 모습의 혁명가지만 결의에 찬 표정이 압권이다.

 

Dragon Fly. Portrait of Vera Repina, the Artist's Daughter. 188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4 x 111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Composer Anton Rubinstein. 작곡가 안톤 루빈스타인 초상화.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및 지휘자 안톤 루빈스타인

 

Portrait of the Artist Vasily Surikov. 화가 바실리 수리코프 초상화. 188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an old woman. 1870.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7 x 111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Vera Repina, 187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0 x 7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Actress Pelageya Strepetova as Elizaveta.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Hunchback 1.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3.5 x 64.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곱추소년 1> (Hunchback)

레핀의 <쿠르스크 구베르니아의 십자가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Kursk Province)>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곱추 소년이다. 
소년은 레핀이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이었다. 
그는 절름발이 곱추소년을 위해 여러 장의 습작을 남겼는데, 다양한 표정을 연구한 흔적이 보인다. 
그 중에서 그는 슬픈 표정이 아니라 무표정한 듯 앞으로 열심히 나가는 소년의 모습을 선택했다. 
소년의 얼굴에는 행렬에 낀 사람들의 오만함도, 지루함도 없다.  

 

Portrait of V. E. Repin, the Artist's brother. 186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8 x 86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Actress Pelagey Strepetova.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0 x 61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Artist Vasily Polenov. 187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5 x 89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Artist Ivan P. Pohitonov.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3.5 x 64.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Yuriy Repin, the Artist's son.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5 x 110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poet and slavophile Ivan Sergeyevich Aksakov. 1878.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6 x 97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utting a Propagandist Under Arrest. 1890~189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5 x 35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Surgeon Nikolay Pirogov.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3 X 64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Portrait of the Narratorb of the Folk Tales V. Tschegolionkov. 1879.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Warrior XVII century. 1879.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29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9. 일리야 레핀 작품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30. 일리야 레핀 작품 전시실

 

Ivan the Terrible and His Son Ivan on November 16, 1581.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죽인 뒤 오열하는 이반뇌제. 1581년 11월 16일', 188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254 x 19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이반 뇌제'라고도 불리우는 이반 4세는 

특유의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남다른 정치를 펼친 인물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대귀족들의 궁정 혁명과 전횡으로 

숱한 고초를 겪은 까닭에 의심이 많고 성품이 잔인했다. 
그의 어머니 옐레나 대공비는 그가 친정에 나서기 전 

권력 투쟁의 희생양으로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그의 치세 동안 치위대는 그의 사촌 형제와 친척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한때 중앙집권화를 위해 개혁을 단행하고 ‘타고난 예지와 뛰어난 언변 

그리고 평론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되기도 한 그였지만, 궁중의 어두운 유산인 

암투와 음모 때문에 광신적인 사람, 모든 일에 의심을 품는 기인이 되었다. 
이 최초의 공식 차르는 심지어 아들을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아들의 처소에 들른 이반 뇌제는 

며느리인 황태자비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며느리가 입은 옷이 매우 무례하고 음란해 보였다. 
진노한 뇌제는 갑자기 임신한 며느리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내가 지르는 비명에 놀란 황태자가 허겁지겁 현장으로 달려왔는데, 
그 모습을 본 뇌제는 더욱 분이 치밀어 쇠지팡이로 아들의 관자놀이를 내려쳤다. 
결국 그렇게 유일하게 믿던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것이다. 

이반 4세가 자신의 황태자인 이반을 

지팡이로 폭행해서 죽인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작품이다. 
제목의 '1581년 11월 16일'은 이반 4세가 이 일을 저지른 날짜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러시아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고 레핀도 예외가 아니었다.

 
레핀은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이 이반 4세의 일화를 통해 

그 광기와 공포의 감정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반 4세의 모델은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어느 노인의 얼굴을 

레핀이 발견해서 따왔고, 황태자 이반의 모델은 당시 레핀이 매우 아꼈던 

작가인 프세블로드 가르쉰(Всеволод Гаршин)의 얼굴에서 따왔다고 하고 다른 설도 있다.

그런데 레핀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그림은 

러시아에서 이반 4세를 재평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이반 4세는 단순히 난폭한 폭군이란 평가만 받았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이반 4세를 대단히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인간미'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반 4세의 또다른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가 단순한 

폭군이 아닌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군주라는 재평가를 내리게 된 계기가 된 것.

이 그림은 살해 장면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해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이반 뇌제의 모델로 레핀은 시인 겸 화가였던 그리고리 먀소예도프를, 
왕세자의 모델로는 작가 프세볼로드 가르신을 택했다고도 한다.

그 후 일어난 일들이 물론 모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년 후 정신이 이상해진 가르신은 계단으로 떨어지면서 세상을 마감했다. 
계단에서 떨어질 때 그가 부딪힌 머리 부분은 불운한 그림에서 왕세자가 피를 흘리는 부분과 같았다.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죽인 뒤 오열하는 이반뇌제 Detail (부분)

공포에 질린 이반과 아들 이반
잔인했지만 용맹하고 현명한 황제였는데 

한번은 이반 4세가 왕자의 집을 저녁에 방문했하고 한다. 
황제를 맞는 왕자비는 겉 옷을 한 벌만 입고 있었다. 
당시 풍습은 손님을 맞이할 때는 세 벌의 옷을 입어야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황제는

며느리를 폭행하고 왕자가 이를 말렸고 격한 성격의 자제력이 없었던 이반 대제는 

언쟁을 하다가 뜻하지 않게 맏아들 이반을 죽이게 된다.

황제는 순간적으로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왕자의 관자노리를 내려쳤다. 
이 장면은 바로 머리를 후려 치고 난 그 다음 장면이다. 
그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아들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손으로 상처를 누르고 있으며, 
죽음을 앞둔 황자는 무력한 손으로 주단을 짚고 있다.

이렇듯 레핀은 이반 대제의 신경질적인 외모와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아들을 죽인 자의 폭군의 비극을 여실히 폭로하였다. 
바로 그 순간 벌어진 사태를 바로잡고자 하는 희망으로 아들을 향해 몸을 던진다. 
레핀은 종종 인생에 있어서 극도로 긴장된 열정으로 인해 발생되는 비상한 사건들에 흥미를 보였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깨닫고 정신이 나간 아버지 이반 4세와 한 팔로는 아버지 어깨를 잡고 
한 팔로는 바닥에 팔을 기댄 아들 이반의 비극적인 모습이 펼쳐있다. 
새빨간 피가 스며 나오는 듯한 화면의 색채는 이 작품의 정서를 더욱 고양시켜준다. 
또한 이 작품 속에서 보이는 섬세한 심리, 조형적, 색채적인 뉘앙스에 대한 레핀의 붓놀림은 
이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켜준다.

극적 묘사에 탁월했던 레핀의 감성은 정말 최고이다. 
실제로 아들 이반은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이반 4세가 죽고 나서 왕조는 바뀌고 만다. 
광기어린 폭군이 자신의 손으로 황태자를 죽였고, 이로 인해 사실상 왕조의 대가 끊기게 된다. 
폭군 사후 대혼란의 시대가 도래하자 찬탈자들은 남은 폭군의 아들을 암살하고, 
병약해서 후손을 생산할 수 없는 폭군의 다른 아들을 허수아비로 세웠다가 그가 죽자 왕국을 빼앗는다.
하지만  “폭군의 암살된 아들은 사실 도망쳤고, 다른 소년이 대신 살해된 것”이라는 소문을 통해 
가짜 왕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고 정권을 얻었던 소설 같은 역사가 있다.

 

[영상] 아들을 죽인 미친 왕, 뇌제 이반 4세

 

Il'ia Efimovich Repin: They Did Not Expect Him. Unexpected Visitors. 1884~1888.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60.5 x 167.5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거실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여기는 그의 집이다. 

이 비쩍 마른 남자는 퀭한 눈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모자를 든 손을 몸 안쪽으로 붙인 경직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노파가 그를 보고 엉거주춤 일어난다. 

놀란 모습이 역력하다. 이 노파는 그의 어머니다. 
거실 구석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뒤를 돌아본 여인은 이 상황에 경악하는 모습이다. 

이 여인은 그의 아내다. 
테이블 한쪽 구석에서 어린 여자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아이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반면에 그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의 표정은 한결 밝다. 
이 아이는 기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하녀로 보이는 여성은 문고리를 붙잡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예기치 않았던 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출현. 그 긴장의 순간. 
창문에서 들어온 은은한 햇살이 이 가족과 축축한 실내를 감싼다.  
거실로 보이는 공간 좌측의 큰 창문과 

정면으로 열린 문 뒤쪽 작은 창문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온다.
빛으로 인해 그림의 전체적인 색조는 밝고 따뜻하고 부드럽다.
이렇게 채색함으로써 돌발 상황이지만 

이 순간이 기본적으로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암시한다. 

​목에 스카프를 매고 낡고 긴 모직 코트를 걸친 초췌한 남자가 

한 손에 모자를 움켜쥐고 거실 안으로 들어온다.
지나치게 길어 구겨진 코트의 소매가 두 손목 아래를 덮었다. 
낡은 부츠와 다듬지 않은 턱수염, 

마른 얼굴은 그의 모습을 더욱 초췌해 보이게 만든다.
약간 머뭇거리며 서 있는 남자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신하지 못하는지 눈빛에 불안한 기색이 스친다.

​의자에서 황급히 일어나 엉거주춤 서 있는 검은 옷의 노파는 

돌아온 남자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의 아들임을 바로 알아본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녀의 얼굴 전체를 볼 순 없지만, 

지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는 헤아리고 남는다.
그녀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귀환이 몰고 온 놀람과 흥분에 휩싸여 
떨리는 왼손을 의자로 가져가 몸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 같다.
어머니는 곧 늙은 몸을 천천히 가누며 아들에게로 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림 오른쪽 테이블에 두 아이가 앉아 있다.
어린 여자아이는 뜻밖의 남자의 등장에 어리둥절해 하고, 
또 겁을 먹은 듯 숙제를 하다 말고 낯선 방문자를 유심히 지켜본다.
이 아이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 아이가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가 집을 떠났거나, 
아니면 너무 어릴 때 헤어져 그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불안감에 어깨를 움츠리고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이 아이의 태도와는 아주 다르게 아이 오빠는 곧바로 반가움에 겨워 활짝 웃는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아버지임을 확인하자마자 소년의 두 눈에는 기쁨의 빛이 가득하다. 

​아이들 뒤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던 젊은 여인은 오래전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던 남편이 
불쑥 찾아오자 깜짝 놀라 급히 연주를 멈추고 몸을 돌려 그를 응시한다. 
그녀의 표정에는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가족들 중  아무도 그가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 뒤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하녀로 보이는 인물이 거실 쪽 문을 열고 서 있다.
아마 남자에게 문을 열어준 사람이 이 하녀일 것이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주인집 가족들이 집안으로 들어간 

낯선 남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녀 뒤로 빼꼼히 얼굴만 보이고 있는 사람은 요리사로 생각된다. 
그녀는 단지 이 상황이 무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레핀은 그림의 주인공 격인 혁명가 아들과 그의 노모를 

세로줄 마루에서 출발해 하녀와 요리사, 열린 거실문을 통과해 

창문으로 이어지는 축선의 중심에서 좌우로 조금 벗어나게 배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인물에 더 집중시키고, 
정서적인 공감의 강도를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노렸다. 


끝으로 이 그림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표정과 눈빛이 보여주는 느낌일 것이다. 
레핀은 그가 만족할만한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 표현을 얻기 위해 
주요 인물들을 네 번이나 고쳐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통해서 레핀은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진리를 위해 몸 바친 

그리스도에 비견될 수 있다고 진술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대의(大義)가 옳고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 역시 
가족들의 반응이 어떨까 걱정하며 서 있는 그림 속 남자처럼 결국 러시아 민중들의 
평가와 검증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오랜 유형(流刑)에서 어느날 갑자기 집에 나타난 혁명가.
유형지는 분명 춥고 황량한 머나먼 시베리아였을 것이다. 

레핀의 그림을 통해 그는 어떤 출신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을까를 추정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피아노를 포함한 집안의 집기와 거실 내부의 인테리어, 하녀와 요리사를 부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걸 보면 그는 최상류층의 귀족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류 이상의 사회경제 기반을 가진 계급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인민주의주의자, 공화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로 상당한 지식과 

문화적 소양을 지닌 인텔리겐차였을 거라는 단서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러시아의 역사를 보면 초기의 혁명운동인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로드니키들, 
그리고 이후의 직업 혁명가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혹은 중류 이상의 출신 성분을 가진 
인텔리겐차 (러시아의 특수한 지식계급 집단)들이 많이 분포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은 혁명가가 먼 유배지에서 가족에게 돌아온 광경, 그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시대적 정황을 감안하면 이 남자는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반체제 농민운동과 관련된 혁명가일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아주 오랜 시간 유배지에서 고생한 후 집에 돌아왔다.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는 작품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나는 타라스 셰브첸코(Tarasa Shevchenka, 1814~1861)의 초상화이고, 
다른 하나는 니콜라이 네크라소프(Nikolay Nekrasov, 1821~1878)의 초상화다. 
두 사람 모두 러시아 차르 체제 하에서 고통받던 농민을 위한 계몽 운동에 헌신했던 시인이다. 
특히 셰브첸코는 10년 간의 유배 생활 끝에 사면되어 집에 돌아왔으나 
유배 생활에서 얻은 중병으로 인해 외로움 속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이 두 시인으로 대표되는 혁명가를 위한 일종의 헌사가 될 것이다. 

벽면에 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두 초상화 사이 가운데 있는 그림은  ‘골고다(Golgotha)’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가 두 초상화 사이에 존재하게 함으로써 
레핀은 러시아 혁명가들의 투쟁과 고통을 순교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이 가족이 이 그림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혁명가는 가족과 떨어져 있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긴장된 그 순간에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은 
이 가족과 러시아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못 박히심’의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화가는 러시아 혁명가들의 투쟁과 고난에 종교적 순교의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레핀은 1885, 1887, 1888년 3차례에 걸쳐 방으로 들어오는 주인공의 얼굴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이 그림에 심혈을 기우려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직접적인 사회 상황 반영과 간접적인 심리 표현이 돋보이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레핀은 그 다음을 철저히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마주치는 상황은 오랫동안 부재하던 가족 누군가의 급작스러운 출현과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으로 인해 아직 긴장이 깨지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그림의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가족들은 기다리지 않았지만 갑작스레 돌아온 아버지 또는 언니를 
가슴으로 맞이할 준비로 곧 부산해질 것이다.
딸 아이는 재빨리 가방과 코트를 받아들 것이고, 막내 아들은 편안한 자리를 권할 것이고, 
부인은 따뜻한 차를 준비할 것이다.
물론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언니와 아버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할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의 근거는 이들이 정치적, 사회적 신념 체계를 초월해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위대한 사실에 기인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Detail (부분)

예기치 않은 방문객’은 레핀의 심리 묘사가 화폭에 그대로 펼쳐진 작품이다. 
1883년 알렉산더 3세가 즉위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를 갔던 사람들에 대해 사면령이 내려졌다. 
니콜라이 체르니세프스키가 21년 만에 시베리아에서 집에 온 것을 맞는 
식구들의 표정과 시선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긴장감이 다 드러나 있다.

유형지에 고생을 한 주인공은 창백하고 야윈 얼굴이지만 눈빛은 아직 살아 있다. 
그를 유형지로 몰아넣은 이념이 아직도 그의 눈빛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문을 열어 준 하녀의 표정은 놀람과 황당한 표정이 함께 떠 있다.

농노 제도의 폐지 이후, 러시아 농민의 삶은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이에 진취적인 성향의 교사, 의사, 점원, 노동자가 앞장서서 러시아의 독자적인 농민 자치 공동체를 기초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믿고 '브 나로드(v narod)'운동을 펼쳤다.
그림 속의 아버지 또한 브 나로드 운동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당했고, 
어느 날 예고 없이 집으로 불쑥 들어온 것이다.

초췌한 몰골로 집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이 사람을 누가 이 집안의 가장으로 생각했겠는가.
가족들은 마치 낯선 이방인처럼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남편을,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맞이하고 있다.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 치열하게 교차하고, 경계심과 놀라움이 분주히 섞이는 지점에서
우리도 서서히 상황을 공감하게 된다. 
어떤 예술 장르가 이처럼 단시간에 이와 같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Detail (부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늙은 어머니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고 
피아노 앞의 아내는 아직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이 안 된 듯한 표정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Detail (부분)

공부를 하다가 낯 선 사람 그러나 처음 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표정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밝은 표정의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빛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Detail (부분)

거실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여기는 그의 집이다. 

이 비쩍 마른 남자는 퀭한 눈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모자를 든 손을 몸 안쪽으로 붙인 경직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The Reply of the Zaporozhian Cossacks to Sultan Mahmoud IV (study). 1880.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7 x 87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가 카자크 족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에 대해 어마어마한 쌍욕이 담긴 답장을 보내서 복수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말대로 세상에서 일리야 레핀만큼 사람의 삶을 잘 표현해서 그린 화가는 없는 것같다.
저 많은 사람들이 다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데 너무 익살스러우면서도 너무 진지하고...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편지 한 장 쓰면서 쓰러지고 난리가 났다. 

16세기 몽골로부터 독립한 러시아는 모스크바랑 키예프랑 이런 곳에서 
몽골이 살고 있던 시베리아로 제국을 넓혀갔다. 
남쪽으로도 영토를 넓혔는데, 이제 독립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던 때라 
아직 제대로 만들어진 체계가 없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이 그림 역시 레핀의 주특기인 굉장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권한을 등에 업고, 시베리아 등 각종 미개척지를 돌아다닌 

자유분방한 민족답게 그들 얼굴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친다.
그림의 배경인 조롱거리로 답장을 쓰는 현장답게 편지를 쓰는 서기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타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도를 가진다.

가운데 탁자위에서 글을 쓰는 서기는 정작 이 중요한 현장에서 답장을 쓰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건만, 그의 모습은 안경쓴 샌님같은 모습에 복장도 시커먼 것이, 

별반 중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않게 한다.
작가가 신경써서 연출한 중요한 인물들은 탁자를 중심으로 배치된 

코사크족 인물 개개인들임을 알 수 있겠다.
진지한 모습, 익살스런 모습, 박장대소하는 모습, 

담배 피우는 모습 등 개개인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하다.

주요한 얼굴 모습은 모욕적 답장을 씀으로 인해 비웃음이다.
근데 이렇게 많은 인물들 개개인의 웃는 얼굴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다.
마치 실제 현장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이다.
또한 인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비류도 사실주의가 묻어난다.
유목민족 특유의 야생적인 복장과 러시아의 투르크 

양쪽의 영향을 받은 듯한 장비와 장비에 그려진 문양.
거칠게 살아왔음을 반증하는 멋드러진(?) 수염과 쭈글쭈글한 주름.

지금 쓰고 있는 답장이 여차하면 거대한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음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하하하 웃고 있는 것이 

이들의 와일드함과 저항정신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1676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트 4세는 현재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던 
자포로제 코사크인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다. 
자포로제 코사크는 코사크의 한 일파로 드네프르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그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등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서 여러 번 싸운 적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 술탄의 편지 내용인즉슨
"술탄이자, 무함마드의 아들, 해와 달의 형제, 하느님의 손자이자 총독으로,
마케도니아와 바빌론, 예루살렘, 상 이집트 왕국의 지배자, 황제 중의 황제, 군주 중의 군주,
패배할 줄 모르는 훌륭한 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그리스도교의 확고한 방어자로써 짐은 그대들 자포로제 코사크인들이 
어떠한 저항없이 자발적으로 짐에게 복종할 것과 무의미한 공격으로 짐의 심기를 건들지 않을 것을 명하노라"

쉽게 말해 "순순히 항복하고, 국경지대를 찝적거리지 말도록"이란 말을
아주 거창하게 타이르듯 내지른 편지다.
이에 대해 코사크인들은 콧방귀 뀌듯이 답장을 쓴다.
편지를 쓰는 현장이 박장대소의 장이 될 정도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느냐 하면,
10원짜리 대사가 난무하는 무지막지한 편지였다.

-자포로제 코사크 형제들이 술탄에게
터키의 임프이자 똥같은 악마들의 친구이자 형제이며 루시퍼의 꼬붕인 술탄아. 
얼마나 병신같은 기사길래 니 후장에 붙은 고슴도치 한마리도 족치지 못하냐? 
악마의 똥같은 짬 찌끄레기야. 너 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기독교 형제들을 이기지 못할꺼다. 
우린 니네 좆만한 쫄따구들이 무섭지도 않고, 땅에서든 바다에서든 박살내서 니 애미를 따먹어 주마! 

너는 바빌론의 설걷이꾼, 마케도니아의 마부, 예루살렘의 양조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염소와 떡칠 새끼, 
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새끼,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창남, 카먀네트의 망나니, 
그리고 이 모든 세상에서 가장 골빈 놈이다. 
신 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의 쥐가 난 좆 대가리, 돼지 주둥아리, 
당나귀 엉덩이에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의 대갈통이나 달고 있고 니 애미와 할 씨발새끼야!

이것이 너같은 좆만한 새끼에게 주는 우리 자포로제 형제들의 답장이다. 
너는 기독교의 돼지에게 먹이를 줄 정도도 안되거든? 
이제 끝을 맺는데, 우리는 달력 그딴거 안키워서 오늘이 몇 일인가 몰라. 
달은 하늘에 있는 것이고, 몇 년인가는 책에 적혀있고, 날짜는 니가 있는 동네와 똑같다. 
우리 똥꾸녕이나 쭈욱 빨아라!
-코사크의 수령 이반 시르코와 자포로제의 형제들-

어쨌든 이 편지를 보내고 나서도 메흐메트 4세는 별반 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당시는 이미 다른지역과의 전쟁으로 너무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편지 자체가 코사크인들에게 한번 크게 패하고 나서 보낸 것이기에
다시 전투를 치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터키와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으르렁거린 역사적 사실의 한가운데에서
이 정도의 역작을 그려낸 일리야 레핀에게 박수를 보낸다.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터키 술탄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 Detail (부분)

 

Aleksander III receiving rural district elders in the yard of Petrovsky Palace in Moscow. 
모스크바의 페트롬스키궁에서 농촌지역원로들을 맞이하는 알렉산르드 3세. 1885~1886.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8 x 48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writer Ivan Sergeyevich Turgenev (1818-1883). 187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16.5 x 8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작가 투르게네프 (Ivan Sergeyevich Turgenev 1818-1883)의 초상
예술아카데미 학생이었던 레핀과 투르게네프의 만남은 예술아카데미의 작업실이었고
이때 레핀은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들'을 막 완성한 때였다
이들은 레핀이 아카데미 연수생으로 파리에 체류할 때 더욱 가까워 졌는데 물론 초상화를
그리면서 오래 면대하며 이야기와 토론을 하는동안 가까워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늘진 얼굴에서 오히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와 반대편 눈동자의 생동감, 
투박한 듯 섬세하게 그려진 손과 고상한 무늬의 의자, 대상의 성격을 하나하나 펼쳐내어 
꾹 꾹 눌러 놓은 듯 한 배경의 붓자국은 투르게네프의 낭만성과 소탈한 성격을 잘 나타내며 
레핀이 이 초상화를 성공적으로 완성하였음을 보여준다.

관객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한 표정과 대 문호의 존재감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 초상화는 
투르게네프가 파리에 체류하던 시기에 러시아의 거상이자 예술후원가인 트레티야코프의 주문으로 
당시 역시 파리에 있던 일리야 레핀에 의해 완성되었다. 

 

Portrait of the Composer Modest Musorgsky.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57 X 6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러시아의 음악가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 술에 취한 모습을 그렸다는데... 
레핀은 당대 러시아 예술가들의 초상화-인물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188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8 x 12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Pavel Tretyakov, Founder of the Tretyakov Gallery. 1883.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창립자 파벨 트레티야코프 초상화.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6 x 98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Author Alexey Pisemsky. 1880.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Composer Mikhail Glinka. 188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17 x 98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Autumn Bouquet. Portrait of Vera Repina. 1892. by Ilya Repin. 
oil on board. 65 x 111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Baroness Varvara Ikskul von Hildenbandt. 1889.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1 x 169.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Military Engineer Andrey Delvig.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08 X 86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painter and sculptor Mikhail Osipovich Mikeshin. 1888.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7 x 108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Artist D.N. Kardovskiy. 1896~189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1.5 x 7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Nadezhda Repina, the Artist's Daughter. 1900.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7 x 9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Author Leonid Andreev. 190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6.5 x 76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Poet Afanasy Fet.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82 x 6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V. Repin, musician, brother of the artist. 1876.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Doctor Constantine Franzevich Yanitsky. 186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Artist Grigory Myasoedov. 1886.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he physiologist Ivan Petrovich Pavlov. 192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48 X 5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Tatiana Rechinskay. 1882. by Ilya Repin. 
oil on canvas. 77 X 57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오똑한 콧날, 살짝 벌린 아이 같은 입술과는 대조적으로 
살며시 내려뜬 그녀의 깊은 눈이 우리를 궁금하게 한다.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공업자이며 예술 후원가였던 S. I. 마몬토프의 조카인 
타티야나 마몬토바를 그린 이 작품은 러시아의 국민화가이자 
인물화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일리야 레핀의 드문 여성 초상화이다.

거장의 솜씨답게 18살 아름다운 소녀의 풍부한 감수성을 붓질 하나하나에 살려낸 화면에서는 
그녀의 오랜 고민과 조심스러운 희망이 엿보이고 단정하고 품위 있는 옷차림에 
곱슬머리를 단단히 올려 묶은 현재의 그녀가 꿈꾸듯 표현되어 있다.

예술사가 그라바르는 “구성의 참신함과 놀라운 기법, 섬세한 붓터치로 인해 
레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작품의 하나”라고 평했다. 
카키의 의자덮개와 벽의 색감이 정말 부드럽게 잘 어울린다.
우울한 모습의 표정 표현이 리얼하다.

 

Evening party. 1881.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86 x 116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members of State Council Ivan Logginovich Goremykin and 

Nikolai Nikolayevich Gerard. Study (습작). 1903. 
by Ilya Repin. oil on canvas. 45 x 63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Sergey Vitte. 1903. by Ilya Repin. 
oil on canvas. 60 X 84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Portrait of V. K. Menk. 1884.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Duel between Onegin and Lenski. 1897. by Ilya Rep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0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30. 일리야 레핀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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