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3.11 오후 6시 40분 아테네를 출발하여 오후 8시 15분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 1시간 35분 소요.

이스탄불 ERESIN TOPKAPI 호텔에 여장을 풀고 숙박.

3. 12. 호텔에서 조식 후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성소피아 사원으로 이동.


이스탄불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Mehmet Ⅱ1432~1481)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Osman Empire)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Boğaziçi denizi)과 마르마라 해(Marmara denizi), 할리치 만(Haliç) 사이에서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경계선 위에 위치한 터키의 도 및 그에 속한 동명의 도시.


도시가 두 대륙에 걸쳐 있다는 지리적 특이성으로도 유명하다.

인구는 2014년 기준 14,377,018명.


과거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으며,

동로마 제국 시기인 중세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다.
물론 터키의 최대 도시이기도 하다.
 
베욜루 남부의 갈라타 지구는 중세에 제노바나 베네치아의 무역상사가 있었던 곳이며,
부두에는 국내외의 배들이 모이고 아시아쪽의 하이달파샤역(驛)으로 떠나는 페리보트도 이곳을 기점으로 삼았다.


금융·무역의 중심지로서 오스만은행을 비롯하여 국립은행·외국은행이 많다.

베욜루 동부는 택시광장을 중심으로 일류 호텔·레스토랑·극장·대상점 및 각국의 영사관이 늘어서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 · 쉴레이만 사원의 2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예니성당 · 하기아 소피아(현재 박물관) · 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 · 고고학박물관 ·

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이스탄불대학 등이 있으며

이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도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시아쪽의 위스퀴다르는 전형적인 터키 양식의 도시로
많은 이슬람교 사원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지로 발전하고 있으며, 유럽 쪽과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세리미에 병영(兵營)과 나이팅게일 병원이 있으며

남부에는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역인 하이다르파샤역이 있다.


터키 최대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이스탄불은 섬유 · 식품가공 · 농기구 · 고무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군수공업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스탄불항은 전국 수입액의 70%, 수출액의 20%를 취급하며

매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130척이 넘는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메가라라고 불리는 도시에 비자스(Βύζας)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왕좌를 이어받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식민지 도시를 개척하고자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였던 델포이 신탁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그녀는 "눈 먼자의 도시의 반대 편에 도시를 세우라"라고 말했다.


이 눈 먼자의 도시의 정체는 칼케돈(Χαλκηδών)이며

이 도시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여사제의 조언을 들은 비자스는 메가라의 개척자들과 함께

그 땅을 찾아 항해했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른 비자스 왕자 일당들은 한 땅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은

북쪽으로는 금각만이 있고 동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어서

항구도시의 입지조건으로 매우 좋았다.


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지중해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가야 하므로 이 지역의 중요성이 높다.


그래서 그들은 BC 667년 여기에 도시를 세웠고

사람들은 도시의 이름을 왕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으로 불렀다.


칼케돈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칼케돈 또한 메가라 사람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비잔티움 개척 이전인 BC 685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그들은 금각만을 끼고 있어서 입지조건이 더 좋은

보스포루스 해협 서쪽에 개척하지 않고 해협 동쪽에 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칼케돈을 세운 집단들이 도시를 해협 서쪽에 건립하는 것의 이점을

"보지 못하였다"고 판단해서 개척자를 장님이라고 여기게 된 것.

그 후 이 도시는 바다와 바다를 낀 항구도시로 발전한다.


그리스 상인을 위한 지역 거점의 역할을 하던 이 도시는 동시대 사람들한테는 그 방탕함과 해이함으로 악명이 높아
어느 여행자는 비진티움 사람들을 두고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비잔티온은 BC 491년 다리우스 1세 치세의 페르시아가 점령하였으나

BC 477년 아테네를 위시로 한 델로스 동맹에게 다시 탈환되어 그리스계 도시로 쭉 남다가

AD 46년 로마 제국이 점령했으며 로마식 이름인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세


본디 비잔티움(Byzantium)이라는 이름의 고대 그리스 시절 건설된 로마 제국의 지방도시였다.
비록 인구 100만의 수도 로마나 인구 50만의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수준으로 번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제국의 무역 도시 중 하나였는데
평범한 무역 도시였던 이 도시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꾼 사람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정치 시절 서방 부제의 자리에 있었을 때부터 150여 년 간의 위기로 쇠락할 대로 쇠락하였으며
전통적인 다신교 문화와 공화주의적 정치 관례가 남아있던 로마를 대체할 제 2의 수도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조건은 이집트나 소아시아 등의 경제적 중심지와 문화적 중심지인 그리스를 포함하는 제국의 동방과 가까운 곳이며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가장 큰 세력인 다뉴브 강 이북의 이민족 및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국경과 가까워
이들의 침입 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곳이었다.


본디 그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자리로 모이시아 속주의 세르디카(Serdica)를 생각하고 있었고
"세르디카는 짐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말 또한 여러 번 언급했으나 사두정치를 끝내기 위한 리키니우스와의 내전 도중 벌인

비잔티움 공성전을 통해 비잔티움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최적의 장소라는 곳을 깨닫게 되었다.


324년 내전을 종결짓고 제국 유일의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고
곧바로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도시로 바꾸는 대공사에 착수했다.


수도 완공식이 있었던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이곳을 로마 노바(Roma Nova), 즉 '새로운 로마'라 명명하였으나,
좀 더 세세한 명칭은 로마 노바 콘스탄티노폴리타나(Roma Nova Constantinopolitana). '콘스탄티누스의 새로운 로마'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일단 이름은 이렇게 붙었지만, 도시가 동로마 제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유명한 도시가 되면서
점차 '도시 중의 여왕(바실리사 톤 폴레온/Βασιλὶς τῶν πόλεων)',

이걸 넘어서 더 흔하게는 그냥 도시(이 폴리/ η Πόλη)라고 불렀다.


즉,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마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앞에선 '도시'가 아닌 마을로 불리고

시골 취급 당할 정도로, 도시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의미로 널리 쓰였다.


마치 조선시대부터 한양이라는 자기만의 이름이 있었음에도

우리들은 그 도시를 계속 수도라는 의미의 '서울'로 불러온 것처럼.
그 뜻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오는 터키어 명칭 '이스탄불'과도 상통하는 명칭이다.


중세시대에 도시가 일단 삼각형의 양변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해 있기에

육지의 한변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지이다.


게다가 당대 어떠한 공성병기로도 뚫을 수 없다는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의 위엄은 대단했다.
도시를 노리고 쳐들어 온 수많은 이민족들을 모조리 트라키아 땅의 양분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4차 십자군 전쟁 당시엔 동맹걸고 들어온 십자군에게 패하긴 했지만.


게다가 삼각형의 양변이 접한 바다가 단순히 외딴 곳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보니
전시가 아닌 평시  상황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이 콘스탄티누스의 자식들 및 조카들에 의해 나뉘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은 제국 동방, 즉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맡게 되었다.


중세 서양 세계의 강대국 중 하나였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만큼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
특히 제국이 경제적으로 절정기에 달했던 콤니노스 왕조 마누엘 1세의 치세에는 총 인구 40만여 명 중
외국인 인구가 6만에서 8만에 달했을 정도로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로서 번영했다.


그러나 1204년 도시를 침략해온 4차 십자군에 의해 3일 동안 도시 전역이 약탈당하고
그들이 세운 괴뢰국, 라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고
1263년, 니케아 제국이 도시를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했으나 도시는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
그 뒤로 제국이 점차 쇠락하면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에 도시 인구는 겨우 4만 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1453년, 도시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를 갈망한

메메드 2세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끝내 함락된다.


역사적으로 이 함락은 함대포를 끌고 와서 포격을 하고,

방어군의 10배가 넘는 정예 예니체리들의 돌격으로 무너졌다고 하지만,
야사에 따르면 성문 샛길을 잠그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샛길을 잠그고 안 잠그고를 떠나서 이미 전황은 오스만 제국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운 상태였고,
그보다 10만 공격군에 방어군이 7천 명밖에 없었으니 그때까지 버틴 게 오히려 용하다.


삼각형 모양의 비잔티움 모습


콘스탄티노플은 두 면이 바다에 인접해 있고, 나머지 1면은 3중의 성벽으로
적의 공격을 철통같이 방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3중 성벽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 쯤 되는 시기에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2세에게 1453년 점령을 당하여
2200 여 년을 이어온 로마제국 및 비잔틴제국은 처참하게 멸망하고 만다.


특히 오스만 군은 해전에 매우 약했던 만큼, 방어 측은 육지의 성벽 한 곳만 집중하면 되었다.
오스만은 바다에서 싸우고 싶어도 바다가 매우 거칠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바다에 접한 두 면 중, 위쪽 면이 금각만(Golden horn)이다.
금각만은 바다에 능한 방어군이 그 입구를 쇠사슬로 막아 놓아서 오스만 공격군이 갈 수 없었던 곳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정복왕답게 메흐메드 2세는 육지에 기름칠한 통나무를 깔고,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에 있던 배를 사람의 힘으로 밀어서 금각만으로 진입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세운다.
잔잔한 금각만에서 오스만이 공격해 오자 병력이 부족한 방어군은 힘없이 패하고 만다.

벨리니가 그린 메흐메트 2세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이 도시를 수도로 정한 인물과 이름이 같은 콘스탄티누스2세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오랜 기간 많은 희생이 따른 전쟁이었기 때문에 메흐메트는 정복군에게 4일 간의 약탈 시간을 주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겁탈당하고 노예로 전락했다.
더불어 수많은 비잔틴 문화유산들도 사라졌다.


메흐메트 2세는 빠르게 혼란을 해결해 나간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고 거대한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470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금각만 (Golden Horn)에서 바라본 모습.


남동쪽을 향해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의 육지가 파티흐(Fatih) 구, 즉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의 콘스탄티노플 시가지이다.

만(灣)의 상류는 이스탄불 북부를 흐르는 알리베이쿄이(Alibeyköy)강과 카이타네(Kağıthane)강과 연결되며,
하류는 서쪽으로 마르마라해와, 동쪽으로는 보스포루스해협과 닿아 있다.


총 길이는 7.5km이며, 폭이 가장 넓은 곳은 750m,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약 35m이다.

만의 명칭은 지형과 역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만에 위치한 수많은 무역항을 통해 들어오던 재화(財貨)
또는 수면에 비치는 석양의 금빛 색조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정학적으로 이스탄불의 역사적인 중심지를 감싸고 흐르면서 자연적인 방어선을 이루고 있으며,
내해로서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의 변동이 적어 항구로 활용되었다.


고고학 발굴 기록에 따르면 B.C. 7세기경부터 만 주위에 항구ㆍ창고ㆍ주거지 등이 밀집한

대규모 정착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 제국 시대 이후로 경제적, 전략적 요충지로 발전하였다.


비잔티움제국 시대에는 해군본부가 주둔하였으며, 해안을 따라 군사적 목적의 성벽을 쌓았다.
또한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수중에 대형 쇠사슬을 걸어 만으로 드나드는 선박을 통제하였다.


비잔틴 시대의 감시탑은 1204년 십자군 전쟁 때 크게 손상되었고,
1348년에 제노바인(Genoese)이 새로이 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갈라타 타워이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에도 메흐메드 2세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상업 및
주거지역을 보전할 만큼 무역항으로서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근대 이후 이스탄불 인구 증가와 산업화로 인하여 수질 및 주변지역이 오염되었지만,
1980년부터 정화작업을 시작하여 현재는 깨끗한 수질과 생물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양쪽 해안을 따라 다양한 유적지ㆍ공원ㆍ상업지구가 공존하며

이스탄불의 주요 관광지로 명성을 얻고 있다.


만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다섯 개가 있다.
상류에는 1974년 완공된 할리쉬 다리(Haliç Bridge)가 있고, 1912년에 완공되어 교통 및 관광 목적으로 사용되다가
1992년 화재로 유실된 뒤 현재는 관광 목적으로 일부만 복원된 에스키 갈라타 다리(Eski Galata Bridge, 옛 갈라타 다리)가 있다.


중류에는 1940년 완공된 아타튀르크 대교, 인도교이자 도시철도가 지나가는 골든 혼 메트로 다리가 있으며,
하류에는 화재로 유실된 옛 갈라타 다리를 재현하여 새로 제작한 갈라타 다리(Galata Bridge, 1994년 완공)가 있다.


현대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당시에 불가리아군이 차탈자(Çatalca)까지 내려와서 이스탄불을 위협한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 지역은 오늘날 이스탄불 광역시에 포함되어있을만큼 이스탄불과 지척에 있는 거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코앞인 보스포루스 해협에 영국 함대가 몰려와 위협을 가한 바 있다.


오스만 제국이 1차대전에서 패하자 세브르 조약으로 인해 제국은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 왕국은 승전국이라고 신나서 이스탄불을 탈환하겠다고 터키로 진공했다.


그리스는 이스탄불을 탈환할 뻔했지만 무리한 진공으로 인해 아타튀르크에게 패퇴당했고,
이미 연합군(주로 영국군)측이 이스탄불을 접수한 상태로 그리스군이 코 앞까지 다가오자 영국이 개입한다.


영국은 에게 해의 섬과 코스탄티니예를 포함한 동트라키아 지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아타튀르크는 후자를 선택. 이로써 도시는 다시 터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수도의 지위는 상실하고,
아타튀르크를 수반으로 하는 신생 터키 정부는 오스만 왕가와 귀족들을 반역자로 규정하여 모두 추방시켰고
기존 세력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수도를 아나톨리아 땅의 튀르크계의 발원지와 같은 척박한 땅 앙카라로 천도하였다.


이 때 도시 이름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이스탄불(Istanbul)로 바뀌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뷔윅아다(Buyuk Ada). 프린세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섬.


이스탄불은 한때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협정 당시에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1/3 이 그리스인인 현실을 고려해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박해는 아타튀르크 사후 특히 1950년대 들어 키프로스 문제와 관련해 그리스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가속화되었으며
이 시기 터키 정부의 묵인 속에 이루어진 시민들의 조직적인 약탈과 폭행까지 행해져 1960년대를 기준으로 인구는 급감하게 된다.


1955년은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키프로스에서 키프로스는 그리스라며

그리스와 통합을 요구하는 시위와 폭력 행위가 극에 달해 있을 시절이다.


아테네에서도 반 터키 시위가 있었고, 특히 이스탄불과 마찬가지로
로잔 조약을 통해 추방에서 제외된 트라키아 서부 지방의 튀르크계 주민들에게도 박해가 벌어졌다.
그러자 터키에서도 반 그리스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고, 그게 폭력 사태로까지 번졌다.


1930-40년대까지만 해도 터키와 그리스 관계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동구권의 공산화로 인해 잔뜩 긴장한 양측 정부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또 오스만 제국이 소멸되고 나서 오스만 제국 국적이 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터키 공화국으로 신청하지 않은 그리스계 무국적자들이 이스탄불에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들은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인도 아닌 상태로 거주허가증만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때의 키프로스의 반 튀르크 시위 이후 법적 이유를 들어 하나 둘 추방시킨다.


백여 년이 지난 2015년 현재는 거주민의 겨우 0.01%만이 그리스계이다.
이들은 정교회를 믿는 인구만 한정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그리스 혈통이지만 19세기 말과 터키 독립전쟁 시기
그리스에서 추방된 무슬림인 기리틀리(Giritli)의 수는 훨씬 더 많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에 터키화된 그리스계 인구는 여전히 이스탄불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


사진 속 나무다리인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는 여러번 불이 나서 여럿차례 재건되었다가

지금은 돌 및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로 남아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는 터키의 산업화와 더불어 이스탄불의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비록 수도는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오스만 제국시절부터 남아있던 인프라는 어디 안 가고 남아있었고,
비록 그리스인들이 추방되었다지만 정작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엘리트 계급으로 군림하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유력 가문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고,
지리적으로 유럽과 인접하기 때문에 이스탄불 위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스탄불 하면 오늘날 관광 중심지인 구 성벽 내와 갈라타, 위스퀴다르, 카드쾨이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 전까진 논밭이나 임야지였던 곳에 시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마구자비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난개발이 시작되었다.


물론 정부도 가만히 있진 않아서 단속도 했지만, 이들은 공무원들이 죄다 퇴근한 밤중에 건물을 지었고,
'밤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의 게제콘두(Gecekondu)가 여기저기 들어서자

정부도 하는 수 없이 수도와 전기를 공급해주었다.


우리나라 개발독재 시절에야 그냥 국유지 무단점유로 다 구속하고 불도저로 죄다 밀어버렸겠지만
이슬람 관념상 집없는 사람을 내쫓긴 좀 그래서 일단 지어진 집들은 인가를 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밤중에 몰래몰래 날림으로 지은 달동네가 멀쩡할 리는 없었고,

지진이나 각종 사고로 피해를 많이 겪었다.


한때 이스탄불 내 주택의 무려 65%가 무허가 게제콘두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제대로된 주택이나 아파트로 개선된 상태이다.


하지만 이미 개발된 부지에 대한 전면재개발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게제콘두 시절 형성된 비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도 개선되지 못하고 남아있어

이스탄불의 악명높은 교통정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


도개교(跳開橋)로 총 길이는 490m이고, 폭은 42m이다.
양방향으로 각각 3차선 차도와 도보가 있으며, 중앙에 트램(Tram) 노선이 지나가도록 건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골든 혼에 처음 다리가 놓인 것은 6세기부터였다.
동쪽의 갈라타(Galata) 지구와 서쪽의 에미뇌뉘(Eminönü)를 잇는 위치에 다리를 건축하고자 처음 시도한 것은
1502년 술탄 바예지드 2세(Bayezid II, 1481~1512 재위)였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설계를 의뢰하였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건설되지 못하였다.

1845년에 술탄 압둘마지드 1세의 어머니 발리데(Valide) 왕비의 명령으로

최초의 다리가 건설되었고, 18년간 사용되었다.


1863년에 술탄 압둘아지즈(Abdulaziz, 1861~76 재위)가 다리를 재건하였고,
7년 뒤 프랑스 회사에 의해 증축되어 1875년에 완공되었다.
그 결과 다리의 길이는 480m, 폭은 14m가 되었다.


이 다리는 1912년에 철거되어 골든 혼의 상류로 옮겨졌으며, 현재 구 갈라타 다리(Old Galata Bridge)로 불린다.
1912년에 독일 회사가 놓은 새 다리는 길이 466m, 폭 25m이며, 1992년에 화재로 파괴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현 다리는 터키 건축회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1994년에 완공되었다.


2006.03.14 숙소 ERESIN TOPKAPI 호텔 앞에서 기념 인증샷


2006.03.14 숙소 ERESIN TOPKAPI 호텔 앞에서 기념 인증샷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AD 1200 3D 역사 동영상




비잔티움(Byzantium) AD 1200 3D 동영상



참조 ; https://namu.wiki/w/%EC%9D%B4%EC%8A%A4%ED%83%84%EB%B6%8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4980&cid=40942&categoryId=34070
http://blog.naver.com/youngjoot/22137005152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38603&cid=40942&categoryId=32348

https://blog.naver.com/dltpvnd/221017355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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