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스 아폴론 신전과 아고라(Agora)의 상점가 유적.


고대 아고라(Agora) 상점. 


아고라(agora)란 ‘시장, 집회, 사교’라는 뜻이다.

통상 공공건물과 열주랑(列柱廊)으로 둘러싸이고

거기에는 프레우테리온과 프리타네이온 외에 신전, 시장, 스토어 등도 포함된다.


정치, 경제, 종교, 사교 등 시민 공공생활의 중심지이며 대부분의 경우 로마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아테네와 코린토스 등의 고대 아고라(agora) 유적에서 그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고대 아고라 상점


상점이 있었던 자리. 고대 코린토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림으로 복원을 해 놓았다.
아고라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상점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코린토스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던 듯.


코린토스 서쪽 레카이온 항구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레카이온(Lechaion) 대로.


아고라에서 코린토스 항구까지 쭉 뻗어 난 큰 길 레카이온(Lechaion) 거리 양편을 가득 채웠을 회랑의 빈자리도 쓸쓸하다. 
상점을 지나 이어지는 코린토스 정치, 종교, 상업의 중심지 아고라 터

레카이온 대로와 아크로 코린트
아우구스트 시대까지 비포장이었던 레카이온 대로는 베스파시안 시대에 도로포장이 되어 보행자 전용으로 바뀌었다.

2천 여 전에 조성된 대리석 바닥. 아크로 코린트가 바로 보인다.


대로 양쪽에 빗물이 흘러갈 수 있게 배수로를 만들고 상점들도 만들어져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온 상인들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고대에는 이 길이 바다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레카이온 대로의 입구에는 아고라로 들어가는 입구인 프로필라이아가 있었다.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고 도금한 헬리오스와 파에톤의 청동전차상이 아치 위에 놓여져 있었다.


길게 뻗은 도로 또 아고라 광장과 더불어 그 당시 상가와 신전 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갔으리라.
멀리 계단 중간에서 보면 바다까지 연결된 길이 반듯하게 되어 있어 바다로 갈수록 길이 넓어졌다고.


고대 코린토스 유적에서 길 만은 제자리에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굳건하게 남아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코린토스의 서항인 레카이온 항에 이르고 거기에서부터 로마로 가는 뱃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길을 따라 양 옆에 상점으로 이루어진 아치형 지붕의 건물이 길 가로 늘어서 있었다.


오데이온(Odeion)


오데이온(Odeion)은 고대 그리스의 음악당이나 대극장으로 지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당시 65만의 인구를 자랑하던 그 시절은 대단한 문화의 요람이었으리라.


그리고 번성된 도시로서 각 상점과 위락 시설 또한 대단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뒷편으로 아크로 코린트 산이 바라다 보인다.


코린토스 서쪽 레카이온 항구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레카이온 대로.
코린토스의 유적지는 황량한 폐허가 되어 있다. 화려하고 흥청거리던 거리를 상상하기 어렵다.


중앙광장 아고라


현재 폐허가 된 유적지. 고린도의 지하엔 고대에 형성된 도시 유적의 한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529년 대지진과 1858년 지진으로 내려앉은 모습 그대로 있다.
시지프스 왕국은 그 자하도시보다 한층 더 아래에 있다고 한다.


베마 (bema).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1년 반 동안 기독교를 전파했던 곳.


베마란 1) 고대의 아테네에서 사용하던 낮은 연단,
2)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의 아프시스에 설치된 높은 마루.
아프시스 벽 옆을 따라 사교좌(司敎座)를 중심으로 해서 성직자의 좌석을 배치하고, 프페스비테륨으로 한다.


3) 그리스 정교의 본전 프레스비테륨으로서의 아프시스 앞에 주제단을 배치하고,

그 전면에 분전장벽을 세워서 본당으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한다.


지성소(至聖所)라고도 하고,그 마루는 대개 본당보다 높이 만들어졌다.
4) 유대교 교회당 내의 율법 낭독용 교단을 뜻한다.


바울이 재판받았던 곳. 베마 (bema)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하던 유대인들의 고발을 받아
코린토스 총독 갈리오에게 재판을 받았던 장소이기도 했던 베마.
이곳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당시 1년 6개월을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이 위에서 사도 바울이 기둥에 묶이고 갈리오 총독이 심문했던 곳이라고 한다.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에 와서 전도를 하던 중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코린토스의 총독 갈리오에게 고발당했다.
고발을 받은 갈리오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바울에 대한 고발이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한 것이니

유대인들이 알아서 하라고 연설했던 곳이 베마이다.


베마는 그리스어로 난간이라는 뜻. 그 베마가 코린토스의 아고라 한가운데에 있다.
사도 바울이 서기 51년 코린토스를 처음 방문했고, 6년 후 다시 찾았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다가 잡혀서 심문을 받을 때 묶여 있었다고 하는 바위.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베마
고대 아테네에서 사용하던 낮은 연단. 사도 바울이 총독 갈리오에게 재판받았던 곳.


사도행전바울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갈리오가 아카이야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작당을 하여 바울로를 붙잡아 법정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라고 사람들을 충동하여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하고 고발하였다.


바울로가 답변하려 하자 갈리오는 유다인들에게

"유다인 여러분, 만일 이 사건이 무슨 범법이나 악한 범행에 관련된 것이라면 당신들의 고발을 들어 주겠소.

그러나 이것은 말과 명칭과 당신들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니만큼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이런 사건을 처리하는 재판관 노릇을 하고 싶지 않소"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법정에서 몰아내자 드들은 일제히 회당장 소스테네를 붙들어가가 법정 앞에서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도무지 참견하지 않았다.

<공동번역 사도행전 18장 12~17절)


"이 일이 사람들에게 더 퍼져 나가서는 안 되겠으니 다시는 아무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단단히 경고해 둡시다."

<공동번역 고린도후서 4장 17절>


고대 아고라 상점터


사치와 향락에 물든 코린토스 유적지


16개의 상점이 줄지어져 있었던 레카이온 대로의 서쪽 상점터.
인구 75,000명이 거주했던 상업도시였다.


프로필라이아 입구 서쪽에는 재판장으로 사용된 거대한 바실리카가 있었다.
레카이온 대로는 10세기부터 그 중요성이 줄어들다가 1858년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페이레네(Peirene) 샘


레카이온 대로의 프로필라이아 동쪽, 아고라 중앙에 로마의 상점가와 페이레네(Peirene) 샘이 있다.
중간에 기둥과 상부 가로대의 일부가 남아 있는 곳의 하부에 페이레네 샘이 있다.
벨레로폰테스가 이곳에서 물을 마시던 천마 페가수스(Pegasus)를 만났다고 한다


벨레로폰테스는 천마를 타고 키마이라를 퇴치한다.
이오바테스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 임무를 완수한 벨레로폰테스를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영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벨레로폰테스를 죽여 달라던 사위 프로이토스의 청탁을 무시하고,
오히려 벨레로폰테스를 자신의 사위로 삼고 왕위 계승자로 선포한다.


고향 코린토스에서 추방된 벨레로폰테스는 리키아에서 자신의 무용(武勇)을 과시하고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이제 그는 소아시아의 강자 리키아의 왕이 될 사람이었다.


장밋빛 미래가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진정한 위기는 고난이 닥쳤을 때가 아니라 승승장구할 때 찾아온다.
성공 뒤에 오는 오만이 파멸의 위기를 몰아오는 법이다.


왕위 계승자 벨레로폰테스는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준 페가수스의 탁월한 역량을 끝까지 시험하고 싶었다.
그는 날개 달린 페가수스를 몰아 하늘까지 올라가려고 했다.


이에 격노한 제우스는 등에를 보내 페가수스를 찌르게 하였고,
놀라 날뛰는 페가수스에서 떨어진 벨레로폰테스는 눈이 멀고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가 하늘에서 추락한 것은 곧 잘 나가던 인생의 추락을 의미했다.
추한 모습이 된 그는 절망하여 들판을 방황하다 비참하게 생을 마친다.


벨레로폰테스는 날개를 단 이카루스(Icarus)가 하늘 높이 태양까지 이르려 무한 비상을 시도하다
신의 노여움을 받아 추락하여 죽었던 그 교훈을 잊었던 것이다.


코린토스가 낳은 영웅 벨레로폰테스는 신의 성역에 무모하게 도전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했던 것이다.
그리스 신들은 이렇게 늘 인간의 오만(hybris)를 심판했다.
코린토스에 와서 벨레로폰테스의 삶을 되새겨 보며 인생을 겸허하게 돌아보는 지혜를 얻는다.


페이레네(Peirene) 샘


아고라 밑에서 끌어온 물은 네 개의 거대한 저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영웅 벨레로폰테스가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했던 페가수스를 붙잡은 곳이 페이레네 샘이다.


페이레네(Peirene)


페이레네는 강의 신 아소포스(Asopos)를 아버지로 둔 님프이다.

스파르타의 왕 오이발로스(Oebalus)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구전과 전승에서 페이레네의 어머니에 대해 분명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일설에는 그녀가 아소포스가 라돈(Ladon) 왕의 딸 메토페(Metope)와

결혼하여 낳은 열두 명의 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페이레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고대 도시 코린토스에 있는 '페이레네(Pirene) 샘'에

이름을 준 명조(名祖)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인들은 이곳에 영감의 원천인 뮤즈 여신이 머무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샘물을 마시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또한 페이레네 샘에 가면 날개달린 천마(天馬) 페가수스(Pegasus)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


파우사니아스(Pausanias, 2세기경?)의 ≪그리스 이야기(Description of Greece)≫,
6세기 경 비잔틴 제국에서 활동한 지리학자 스테파누스(Stephanus of Byzantium, ?~?)의

기록에 관련 신화가 다양하게 남아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페이레네는 포세이돈과의 사이에서 레케스(Leches)와

켕크리아스(Cenchrias)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켕크리아스가 죽자 아들을 잃은 슬픔에 휩싸인 페이레네는 너무 울다 그만 샘물이 되어 버렸다.

고대 코린토스에는 레케스와 켕크리아스의 이름을 딴 항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페이레네 샘은 강의 신 아소포스가 딸 아이기나(Aigina)를 납치한 자의 이름을 가르쳐준 대가로
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Sisyphus)에게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한다.


수로의 흔적. 수량이 풍부하여 우물은 근대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레카이온 대로 옆 상점터.


레카이온 대로 양쪽으로 상점과 신전, 목욕탕 등 공공건물들이 있었다.


레카이온 대로 옆 건물터.


고대 아고라 상점터


현재 남아있는 코린토스 유적지는 기원전 3세기에 로마인들이 파괴했던 고대 그리스 유적지 위에
자신들이 새롭게 재건한 유적이다.


레카이온 대로 옆 건물터.


고대 코린토스에서 가장 큰 전랑이 있었던 건물 중의 한 곳.



71개의 도리아식 열주(列柱).


열주랑 뒤편에는 우물과 와인저장소, 식당과 상점들이 있었고, 주랑의 한복판에 기원후 1세기
켄크레아이 항구와 이어지는 긴 포장도로가 만들어졌다.


도리아식 열주랑(列柱廊)


안쪽에는 길이 164m나 되는 37개의 이오니아식 열주로 이루어진 열주랑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다 무너졌다.
원형을 보존했다면 참으로 장관이었을 듯.


열주랑(列柱廊)과 시시포스(Sisyphus)의 영원한 형벌 장소 아크로 코린토스


시시포스(Sisyph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코린토스 시의 창건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에피라였다. 교활하고 못된 지혜가 많기로 유명했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렸다.
하지만 그 벌로 나중에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다고 한다.


시시포스는 그리스인의 시조 헬렌의 아들인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살모네우스, 아타마스, 크레테우스와 형제이다.


시시포스는 플레이아데스 자매 중 한 명인 메로페와 결혼하여

글라우코스, 오르니티온, 테르산드로스, 할모스 등 네 아들을 낳았다.


글라우코스는 니소스의 딸 에우리노메와 결혼하여 영웅 벨레로폰을 낳았다.
하지만 벨레로폰은 에우리노메가 해신 포세이돈과 정을 통해서 낳았다는 설도 있다.
일설에는 라에르테스와 안티클레이아의 아들 오디세우스가 실은 시시포스와 안티클레이아 사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사우스 스토아(South Stoa)를 지나 박물관 후문으로 가다보면 서 있는 옥타비아 신전의 열주(列柱).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에게 바쳐진 신전.


처음에는 여섯 개의 도리아식 열주를 가진 형태였지만 아우구스투스 사망 이후 이 신전은 3~4미터의 단위에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지고, 가로 12개 세로 6개의 기둥으로 둘러쌓인 형태로 바뀌었다.
페디먼트에는 아폴론, 아프로디테 등의 장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일부만 남아서 코린토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옥타비아 신전 기둥 확대 부분


옥타비아 신전 기둥 확대 부분


옥타비아 신전의 경우 코린트인이 창안해낸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머리 기둥으로 건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기둥의 일부와 기둥이 받친 가로대의 일부일 뿐이지만,
아칸서스 잎을 부조한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풍요를 넘어 사치스런 도시였던 코린트에서 여성미가 풍기는 코린트 양식이 창안된 것도 자연스런 결과인 듯싶다.


옥타비아 신전 기둥 확대 부분. 아칸서스 잎 문양으로 화려하게 부조되어 있다.



옥타비아 신전을 배경으로 기념 인증샷


코린토스 박물관 (후문). 옥타비아 신전의 열주 앞에 있다.



코린토스 유적 / Corinth Remains / Apollo Temple / Acanthus



참고 ; https://blog.naver.com/felwithe/221346632800
https://blog.naver.com/springborn/221296566569

https://blog.naver.com/wabool/221088240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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