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신성한 지혜(Holy Wisdom)’를 의미한다.
라틴족의 지배를 받았던 1204년에서 1261년까지를 제외하고 360년에서 1453년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 대성당(cathedral of Constantinople)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 까지는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945년 2월 1일 미술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성 소피아 성당의 교회당은 서기 360년,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던 동로마 제국시기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첫 번째 건물은 궁전 근처에 위치했으나

404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남아있지 않다.


415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으로 두 번째 교회가 축성되었으나

이 건물도 532년경의 화재로 인해 성 이레네 성당과 함께 사라졌다.
몇몇의 대리석 조각들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세 번째 건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으로

532년에서 537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황제는 이전 건물과 완전히 다른 거대하고 웅장한 바실리카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를 위해 그리스 물리학자 밀레투스의 이시도르스(Isidore of Miletus)와

수학자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Anthemius of Tralles)를 고용했다.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의 각 지역에서 재료가 조달되었으며

고용된 인부들은 10,000여 명에 이르렀다.


황제는 대주교와 함께 537년 12월 27일 거대한 행사와 새로운 바실리카를 열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모자이크는 후대(565–578)에야 완성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53년에서 557년의 지진으로 건물의 메인 돔과 동쪽의 돔이 피해를 입었으며

558년 5월 7일에는 추가적인 지진으로 메인 돔이 붕괴되었다.


황제는 즉시 복원할 것을 명하며 밀레투스의 조카 이시도르스(Isidorus)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그는 돔의 형태를 바꾸었다.


그는 정방형의 평면 위에 돔을 설치할 때

돔 밑바닥에 쌓아 올리는 구면 삼각형의 부분과 함께 늑골이 있는 돔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건물과 내부의 인테리어는 지속적인 시련을 겪었다.
726년경에는 많은 이콘들이 파괴되었으며 종교적인 그림과 조각들은 사라졌다.


1204년에서 1261년까지는 유럽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1453년부터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종, 제단 등은 제거되었으며 대부분의 모자이크는 회반죽으로 덮였고

이슬람적인 상징물들이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추가되었다.
현재는 다시 복원 중에 있다.


멀리서 바라본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이스탄불(Istanbul)은 아시아와 유럽을 경계짓는

보스포러스(Bosphorus) 해협에 임한 터키의 가장 큰 항구 도시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동로마제국의 수도였을 때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1453년 시작된 오토만 터키시대에는 흔히 이스탄불로 불리었다.


1922년 터키 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Ankara)로 옮긴 후

1930년 정식으로 이스탄불이라고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로마가 476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동로마제국은 중세 기간 동안

이 곳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유지되었다.


위에서 본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성 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증인이다.
당시 모슬렘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본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1,700여 년 전 건축되어 비잔틴 건축의 으뜸으로 꼽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이슬람 건축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들은 성 소피아 성당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이슬람 사원을 만들고 싶어 했고,
그것은 대 건축가 시난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시난의 건축물은 오스만 제국의 전형적인 이슬람 사원 형태를 띠고 있으며,
사원과 함께 학교, 숙소, 시장, 묘지 등의 복합 부속 건물을 함께 지었다.


건물 전체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큰 돔을 중심으로

주변 부속 건물들이 사원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시난과 제자들은 이스탄불에만 3,000여 개의 이슬람 사원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성 소피아 성당 맞은편의 술탄 아흐메트 사원은 블루 모스크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모슬렘 건축의 특징적인 뾰족 탑 미나렛(minaret) 두 쌍이 15세기와 16세기에 각각 추가되었다.
그리고 건축사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건물은 성 소피아일 것이다.


'소피아(sophia)'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이나 지혜'를 가리킨다.


1935년부터는 현대 터키의 수립자 아타튈크(Atatürk)의 명에 의하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기독교회로 건립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멸망 후에는 모슬렘 교도들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면서
모슬렘 건축의 특징적인 뾰족 탑 미나렛(minaret) 두 쌍이 15세기와 16세기에 각각 추가되었다.


2006. 3.13 방문 기념 인증샷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 비잔틴제국이 기독교 세계에서 이슬람 세계로 바뀜에 따라

교회를 필두로 제국의 기독교 문화유산도 운명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성소피아성당이 이슬람제국 아래서 겪은 수난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도 결국 이슬람교 사원으로 바뀌었으나,

성소피아성당은 제국이 패망하면서 기구한 길을 걸어야 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메흐메드 2세는 비잔틴제국이 망한 뒤

성당에 들어가 알라에게 예배한 다음 성당 내부를 파괴했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입면도


○ 세월이 흐르면서 투르크인들은 성소피아성당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또 모스크 건축을 모방했지만,

처음에는 정복자의 파괴 본능이 기승을 부렸다.


그들은 다음해인 1454년에 성당을 개조해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성소피아성당은 이미 제4회 십자군에게 한 차례 능욕을 당했다.


교황에게 파문당한 바 있는 제4회 십자군은 비잔티움을 점령하고 마음껏 노략질했을 뿐만 아니라

성소피아성당의 제단을 파괴하고 성물을 나누어 가졌다.


성 소피아성당 입구 군악대 메흐테르 (Mehter Military Band)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출입구


○ 성당 안으로 끌고 들어온 말과 당나귀들이 미끄러져 넘어지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칼로 찔러 죽여 성당을 피로 물들였다.


그런 오욕의 역사를 가진 성당은 이번에는 이교도의 소유물이 됨으로써

더 큰 수난을 겪어야 했다.


비잔티움이 이스탄불로 개명된 다음 성소피아성당은 곧바로

기독교 교회에서 이슬람교 사원으로 바뀌었지만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당 중앙 출입문. 옛날에는 황제와 황후만 출입할 수 있어 황제의 문이라 불렸다.


문 위 천장에 모자이크가 살짝 보인다.

성당 출입구는 모두 9개가 있다.


중앙의 황제문을 중심으로 살짝 보이는 양쪽의 작은 2개의 문으로는 귀족들,

그 옆으로 더 작은 문으로 세례를 받은 일반인이 출입했다.


그나마 세례를 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랑에서 예배를 보았다.


황제의 문 위의 모자이크


문 위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6세가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청하는 모습이 모자이크로 만들어져 있다.


○ 성당 내부를 장식했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오늘날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현재 2층 한쪽 벽에 그야말로 손바닥 만하게 남아 있는 기독교 성화 모자이크가

원래 성당 내부의 모습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새로 세운 첨탑 4개는 그것이 모스크임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2001년 봄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가

느닷없이 자국 영역 안에 있는 바미얀대불을 폭파해 버린 것과 견주어 볼 때,
오스만 투르크족이 성소피아성당 및 기타 기독교 문화유산에 대한 조처는

그나마 이성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모와 황제 모자이크


성모와 황제 모자이크


성모 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과 아야 소피아를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모습으로 944년에 만들어졌다.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봉헌된 그림으로 가각 4세기 6세기 인물들을 그린 상상화이다.
성모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는 그의 신성을 암시하는 종이 두루마리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 황제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성당의 외랑에 있는 문을 통해서 안쪽으로.


성당의 외랑


내랑으로 들어가면서.


내랑으로 들어가면서.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전경


○ 이슬람교 탈레반 정부는 자신들의 신앙과 배치되는 불상이라 하여

폭파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대포를 동원해 폭파했다.


광신 집단이 인류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무참히 파괴한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적어도 성소피아성당과 그밖의 로마 유산을 가능한 보전하려고 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오스만 투르크족은 이교도와 이교 문화에 비교적 관용을 베풀었다고 평가한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전경


여기에서 보면 바닥에서 돔 가운데가  미흐라브(mihrab),

왼쪽으로 슐탄이 예배드리는 장소가 있다.

오른쪽에 민바르(Minbar)는 살짝 보일듯 말듯.


바닥은 일반대리석, 벽면은 데칼코마니 양식의 타일식 대칭으로, 

기둥은 통대리석으로, 천장은 비잔틴 양식의 돔으로 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이었지만 후대에 지어진 성당에 밀려 현재는 4번째 성당이다.

자연광을 조명으로 사용하도록 지었다.


터키에서는 1백년마다 대형 지진이 발생하는데

내진 구조가 뛰어나 15번 이상의 지진을 이겨내기도 했다.


미흐라브(mihrab)와 민바르(Minbar)가 공존하여 예배드리는 곳


성소피아 성당은 916년 동안 교회로, 481년 동안은 이슬람 사원으로

그리고 1935년 이후부터는 박물관으로 그 생명을 이어왔다.


성모 마리아와 이슬람의 알라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 두 종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1453년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기존의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이슬람 사원의 건축물과 장식을 만들어 놓은 점이다.
코란의 문구를 새겨 넣은 스테인드 글라스도 그 중의 하나다.


좌측 중앙에 있는 것이 미흐라브(mihrab)이다.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는 방향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정 동방향에 비해서 메카 방향인 동남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중앙제단이 서로 방향이 다른 것이 한꺼번에 있다는 것이 가장 이색적이고 특징적이다.  


정동향에 위치한 성모자상을 직선으로 따라 내려가면 그 자리에서 약 15도 정도 빗겨난 자리에

이슬람의 예배 방향인 미흐라브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는 금요 예배 때 설교하는 장소인 민바르(Minbar)가 있고
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예배를 보는 장소가 있다.
종교가 다르고 900년 뒤에 건축한 부속물이지만 어느것 하나 튀는 곳도 어색한 곳도 없다.

 미흐라브(mihrab)


미흐라브(mihrab)란 이슬람 건축에서 모스크의 예배실은 메카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그 안쪽 벽에 설치된 작은 니치(壁龕)모양의 오목상(凹狀, 들어간모양)을 말한다.


우상(偶像)이 없는 모스크는 미흐라브가 예배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목표로서 중요시되고,

가장 정성들여 장식되어 있다.


미흐라브가 모스크에 도입된 것은 8세기 초로 생각되며,

그리스도 교의 교회당 아프시스에서 착상된 것으로 추측한다.


규모가 작은 모스크의 경우 벽의 일부 중앙 부분만 만들기도 하며,
모스크의 규모가 클 수록 키블라의 방향이 틀어질 수 있는 것을 감안하여 한 벽면 전체를 미흐라브로 사용한다.


기원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제자들이 예배 방향에 대하여 묻자 무함마드가 두 기둥 사이에 깃발을 꼽아
'이곳을 향해서 기도하라'라고 이야기 한데서 비롯되었다.


전형적인 모습은 8세기 초에 확립된 것으로,

주로 양쪽에 기둥이 있고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있는 니치(壁龕) 형태를 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 고대 성당의 니치나 비잔틴 교회의 내부 공간 애프스(apse)을 모방하였다고 보는 측면도 있다.
후대에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 방의 형태를 띠기도 하며, 천장 부분에 돔을 축조하기도 한다.
정해진 형태는 없으며, 지역과 왕조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민바르(Minbar)


민바르는 이슬람교에서 설교(khuṭbah)를 행하는 연단이다.
가장 단순한 것은 3칸의 계단이 이어져 있으며, 대체로 계단의 위쪽에 반구형의 상자가 달려 있고
또 여닫이문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오를 수 있게 생겼다.


마호메트는 원래 메디나의 모스크에서 종려나무 기둥에 기대어 설교했다.
〈하디스 Ḥadῑth〉(마호메트의 언행록)는 마호메트가 그뒤 모스크에서 대표단을 영접하기 위해

2개의 계단이 달린 의자를 사용했고 또한 그리스인 또는 아비시니아인 목수가

위성류 나무로 만든 이 이동 민바르에서 설교했다고 전한다.


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이 민바르를 사용했다.
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어 첫 세기 동안에는 지방 총독도 주로 통치자로서의 관할권을 과시하기 위해

민바르에서 연설하거나 청원을 들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통치하에서 설교가 정보의 제공이나 정치적·논의적 특성을 상실하고

단순히 종교적 설교가 되자 민바르도 종교적 상징물이 되었다.


사실상 그것은 좀더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계단의 수도 점점 늘어났고

보통 돌이나 벽돌로 만들어 카티파(qaṭῑfah)라는 천을 씌우기도 했다.


슐탄이 예배드리는 장소
알라와 무함마드 사이에 마리아와 예수가 있어 서로 공존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부분


○ 세계 각지에서 민족적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성 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증인이다.


당시 모슬렘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부분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부분


천장까지 20층 높이의 건물이다.
중앙돔을 두 개의 반돔이 받치는 기둥도 없이 버티는게 참으로 대단하다.


2006. 3.13 방문 기념 인증샷


2006. 3.13 방문 기념 인증샷


6개의 날개가 달린 천사 세라펨.


본당 천정을 올려다 보면 가운데 돔의 네 귀통이에 6개의 날개가 달린 천사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데
현재도 여전히 복원 작업이 진행중이다.


1층 본당 둘러 보고는 2층의 갤러리로 올라가는 가는 길. 1,500년 동안 있어 온 역사의 통로.


2층에서 찍은 성모상


천국의 문과 지옥의 문이라 불리는 대리석 문. 12세기에 이곳에서 중요한 종교회의를 했다고 한다.



이레네 황후의 모자이크.


12세기 초 작품으로 성모에게 안긴 아기 예수에게 봉헌하는 황제 요한 콤네누스 2세와 황후 이레네의 모습이다.
헝가리 출신의 황후 이레네는 조에 황후와 달리 금발 머리와 붉은 뺨으로 표현되었다.
이레네 황후의 옆 벽면에는 이 모자이크가 만들어지고 얼마 후 결핵으로 죽은 왕자 알렉시오스의 그림이다.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


베네치아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로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며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베네치아 역사에 있어서는 영웅이겠지만 비잔틴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십자군에 의해
약탈 되고 파괴하는 등 엄청난 문명적 재앙을 겪는데 일조한 면이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국 베네치아가 아닌 적국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에 묻혀 있는 것도 흥미롭다.



연결 통로.


소원의 기둥


소원을 빌며 엄지손가락을 구멍에 넣은 채 손바닥을 기둥 바닥에 대고 360도를 다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 기둥에 기대어 두통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후대인들도 그 치유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면 들어준다고 한다.


소원의 기둥에서 소원을 빌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넣고 열심히 돌리는 모습.


소원의 기둥


제례주 보관통
1천 사오백년은 되었을 역사적 유물일텐데 사람들이 자연스레 만지고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살짝 충격적.



성 소피아 성당 분수(우물)

입구에 있는 이 분수(우물)는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 손발을 씻기 위해서 1740년 마흐무드 1세때 건설한 것이다.


2006. 3. 13. 관람을 마치고 성 소피아 성당 분수에서 인증샷. 


[EBS 영상] 성 소피아 성당.mp4


[KBS 영상] 성 소피아 성당.mp4


참조 ; https://blog.naver.com/angeljjin106/22130207256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6184&cid=46710&categoryId=46710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23&cid=43069&categoryId=4306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0718&cid=47318&categoryId=4731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06881&cid=58425&categoryId=5842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0587&cid=42635&categoryId=4263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6706&cid=40942&categoryId=3307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8m2047a

https://blog.naver.com/fightclub/22134735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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