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바탄 지하 궁전 (Yerebatan Basilica Cistern)


이스탄불에서는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라고 한다.

예레바탄 지하 궁전은 6세기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설했다.


이스탄불 구시가의 중심인 성 소피아 성당 인근에 있다.
궁전으로 불리지만 실제 용도는 지하 저수지였다.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저수지는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최대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스탄불은 안정적인 물 공급이 중요했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물을 저장해 둘 저수지가 많이 지어졌는데,
예레바탄은 그중 규모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저수지의 물은 이스탄불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와
궁전과 성당 등으로 공급되었다.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 때문이다.
저수지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 336개는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저마다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들이 지하에 빽빽이 늘어선 모습이 신비롭다.


1885년에는 저수지 보수 공사를 거쳐 조명과 음향 시설을 설치하고 관람객을 위한 보도가 조성되었다.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들어서고 때때로 공연도 열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보수 공사 당시 바닥에 쌓인 진흙을 파던 중 저수지의 기둥 받침대로 추정되는 ‘메두사의 머리’ 조각 2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어디에서 운반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메두사의 머리 하나가 거꾸로 놓인 채 발견된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는 지하 저수지의 가장 안쪽에 있다.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구글 지도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는 성 소피아 성당에서 맞은편 방향으로 디반 욜루의 맨 위쪽 부근에 위치해 있다.
지하 궁전은 1987년에 수백 년 동안 쌓인 진흙과 폐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이면서 복원되었다.


본래 황실 수도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에 공사를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2년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지하 궁전의 위치는 본래 황궁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했었지만 오스만 제국 시대에 폐쇄되었다.


예레바탄 사라이(지하 궁전, Yerebatan Sarayı) 입구


예레바탄 사라이는 ‘땅에 가라앉은 궁전’이란 뜻이다.
바실리카 시스턴(Basilica Cistern)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하 궁전은 현존하는 동로마 제국의 저수지 가운데서도 이곳이 가장 최대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한 축으로서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계단이 보인다.


이곳을 내려가면 코린트양식 등 기둥들 336개가 늘어서 있는 지하 공간을 볼 수 있는데,
이 공간 자체가 신비로운 모습이어서 궁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둥에는 다양한 문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각 기둥이 각기 다른 신전 등에서 운반되어 왔기 때문이다.
당시로는 최단 기간인 2년 만에 완성한 지하 건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수심 50cm~1m 정도의 물이 담겨 있다.


이 위로 다리가 놓여 있어 관광객들이 구경할 수 있다.
대단히 인상적이기 때문에 영화 세트장으로 쓰이기도 하고,

이스탄불 예술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는 시청각 시설로 쓰이기도 한다.

이곳으로부터 19km 떨어진 벨그라드(Belgrad) 초원에서 발렌스 수도교를 거쳐 이곳까지 물을 끌어왔다.


당시 시민들의 생활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무려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이스탄불 최대 규모의 저수지였다.
일상적인 생활용수 공급 이외에도 포위 공격에 대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바닥에는 물고기들이 돌아다니고 동전들이 많이 잠겨 있다.


코린트식 배흘림기둥


코린트식 기둥은 주두가 휘감아도는 여러 줄의 아칸서스잎과

아바쿠스 가장자리 아래쪽의 작은 나선형 소용돌이 무늬로 이루어진다.

코린트식 기둥과 주두와 천정.


코린트식 배흘림기둥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 때문이다.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저수지는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저마다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들이 지하에 빽빽이 늘어선 모습이 신비롭다.


여기에서는 도리스양식, 투스칸양식 등 다양한 기둥 양식이 보인다.

저수지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 336개는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이름하여 '눈물을 흘리는 기둥'


2006. 3. 13.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방문 기념 인증샷.


눈물을 흘리는 기둥


소원 기둥

실제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장면이란다.


이곳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집어 넣고 손바닥을 기둥 바닥에 댄 채,

소원을 빌면서 손가락이 떨어지지 않게 한바퀴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본 소원의 기둥이 생각난다.


2006. 3. 13. 눈물을 흘리는 기둥 앞에서도 인증샷


사진 왼쪽으로 남자 분이 손바닥을 기둥에 대고 엄지손가락을 중심으로 한바퀴 돌리는 장면과

이 장면을 카메라로 담는 분이 살짝 보인다.

모쪼록 소원이 이루어지시기를~

옆으로 놓인‘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은 지하 저수지의 가장 안쪽에 있다.

보수 공사 당시 바닥에 쌓인 진흙을 파던 중 저수지의 기둥 받침대로 추정되는 ‘메두사의 머리’ 조각 2개가 발견되었다.

과거 신전을 화려하게 장식했을 메두사 조각상이 지하에서 수조를 떠받치는 기둥 받침대로 변신했다.
이 조각상이 어디에서 운반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옆으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는 괴물이기 이전에
화를 잘내기 좋아하는 그리스 신들에 의해 저주를 받게 된 수많은 불쌍한 희생물 중 한 명이다.


괴물 메두사는 고르곤 세 자매 중의 1명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출중한 미모의 여인이었으나
포세이돈과 사랑을 나눈 장소가 하필이면 근엄하기로 유명한 아테네의 신전이었다.


이들의 정사장면을 우연히 보게된 아테네 여신은 신성한 자신의 신전에서 음란한 행동을 한 메두사에 격분해
그녀에게 저주를 내려 머리 한 올 한 올을 뱀으로 변하게 했다.


또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즉시, 돌이 되는 흉측한 괴물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더불어 메두사의 자매들도 괴물로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두 자매에게는 흉측한 모습과 함께 불사의 생명을 주었지만,
유독 메두사에게만은 불사의 생명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옆으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결국 불사의 생명을 얻지 못한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린 채
또다른 그리스 신화의 영웅만들기 내지는 아테네 여신의 방패 장식품으로 이용당한 불쌍한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메두사 베기에 성공해 영웅이 된 페르세우스 또한
아폴로 신탁에 의해 할아버지를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신탁 결과를 무서워한 아크리시오스왕은 딸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청동 밀실에 딸을 가두었는데
이전부터 다나에의 미모에 정신이 팔린 제우스 신이 황금의 비로 변신하여 청동밀실 지붕으로 스며들어가 다나에를 임신시켰다.


놀란 왕은 그 모자를 방주에 실어 바다에 떠내려 보냈는데
그 방주가 정착한 세리포스의 왕의 명령으로 실시한 여러 가지 모험 중 하나가 바로 메두사 머리를 베어오는 것이었다.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 영웅이 되어 다시 고향에 돌아오려던 페르세우스는 때마침 열리고 있던 경기대회에서 원반을 던졌는데,
그 원반이 우연하게도 페르세우스가 온다는 소문에 피신해 왔던 할아버지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맞아
왕이 목숨을 잃음으로써 아폴로 신탁은 잔인하게 실현되었다.

수난받는 ‘메두사의 머리 ’ 조각 기둥을 배경으로 인증샷.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화도 잘내서 후회할 짓들도 상당히 많이 했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신들을 친근하고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신들의 노여움에 의해 언제든지 신의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신화 속 주인공들은
그리스 시절부터 부적의 의미처럼 건축물에 조각되어지곤 했는데
메두사의 경우도 방패나 문짝, 사원 꼭대기 등에 새겨 넣어 부적이나 제의적인 마스크로 자주 이용했다.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지하저수조 물 속에 거꾸로 세워져 있는 메두사 머리를 보면

이런 물 저장소에 처박히게 된 사연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일설에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메두사의 상징을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하 저수조에 거꾸로 파묻었다고도 하고, 식수로 사용되는 물 저장소에

사악한 기운이 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부적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신으로서의 역할과 권위가

사라진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거꾸로 놓인‘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지하물 저장고인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는 532년에  유스티니아누스 비잔틴제국의 황제가 만들게 한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물은 많지만 정작 사람들이 마실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이곳으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먼저 수도교를  만들라고 지시를 하였고
발렌스 황제 때 수도교가 완공이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예레바탄 사라이"이다. 
이것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확장하여 다시 탄생하였다.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지하물 저장고를 만들때 수많은 기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많은 기둥을 어디에서 가져올까 생각하다가 
에게해 지방에 있는 그리스 로마 신전에서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메두사 머리가 옮겨지게 되었는데  메두사는 원래 신전이 있는 도시의 어귀에 세워졌던 기둥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네 어귀에 장승을 세워

잡신들과 나쁜 기운들이 못 들어오도록 막는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될 듯.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전에는 메두사를 꼭 부조로 만들어 놓는다고.


결국 이 기둥들은 지하 저수조를 만들려고 제작된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곳에서 옮겨져 왔다.
따라서 모양이나 두께 둘래 높이가 각각 서로 다르다.


기독교가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공인이 되었지만

아직 사람들 마음 속에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남아 있었다.   


이는 우리가 유교를 배우지 않더라도 가슴 깊은 곳에 유교 사상이 배어 있듯이
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으로 기둥이 짧은 것은 밑둥으로 사용하고
기둥을 가로와 세로로 박아 놓아 부적의 의미로 삼았다고 한다.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이 1500년 동안 이렇게 놓여있는 까닭을 헤아리며 인증샷.


그리스 사람들 중에는 터키 사람들이 그리스 신전을 파괴해서 탁월한 대리석 예술 작품들을 탈취하고,
그 대리석 예술 작품들로 지하 저수지를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기운을 눌러 버리겠다는 뜻을 담아
‘메두사의 머리’ 조각을 기둥 받침대로 삼고 바닥으로 눕혀 놓았다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역사적 죄악이자 만행의 징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 사람들의 주장과는 별도로 메두사의 머리가 거꾸로 놓인 채 발견된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 때문이라고도 한다.


기독교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신으로서의 역할과 권위가
사라진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부조물들을 짜맞추어 사용하다 보니

높이가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기둥 바닥 받침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여 너는 어찌하여 1500년 동안을 지하저수지에서 이렇게 거꾸로 놓여 있는 거니?

1885년에 저수지 보수 공사를 거쳐 조명과 음향 시설을 설치하고 관람객을 위한 보도가 조성되었다.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들어서고 때때로 공연도 열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참고로 서양의 기둥 양식에 대해서는 <그리스기행>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편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참조 ; http://blog.daum.net/choemh/16141419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출구



[터키 여행-이스탄불]예레바탄 지하 저수조



참고 ; http://flyingboat.tistory.com/31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blog.daum.net/rollei66/1688460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3598&cid=42864&categoryId=50859
http://cafe.daum.net/mosadongcho41/3Kdz/75?q=%EC%98%88%EB%A0%88%EB%B0%94%ED%83%84+%EC%82%AC%EB%9D%BC%EC%9D%B4&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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