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아시아 박물관 (Eski Şark Eserler Müzesi) 전경


고대 아시아 박물관은 1883년 고고학 박물관을 건설한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에 의해 건축되었다. 

1935년에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가 복원 과정을 거쳐 1974년 재개관되었다. 

내부에는 수메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하타, 히타이트 문명의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네부카드네자르 왕 시대의 바빌론 이슈타르 문을 장식했던 사자와 수소의 상,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핫투샤에서 출토된 히타이트 이집트 간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이라는 카데쉬 조약은 인류사적 유물이다. 


오스만 제국 지역에서 수집한 이슬람 이전 시기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고대 바빌론의 행진 거리와 이슈타르 문(Ishtar Gate)을 장식했던 색색의 거대한 벽돌판 등이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벽돌판에는 사자와 용, 황소 등 실제 동물과 신화 속 동물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도자기 박물관에는 12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셀주크, 오스만의 도자기 등이 있는데, 

특히 16세기의 이즈닉 도자기를 눈여겨 볼만 하다.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아랍 반도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7만 5000여 개의 쐐기문자판도 소장하고 있다. 

계단 양쪽 아래에는 기원전 약 18세기 경 히타이트(Hittites)의 유물인 사자상이 있다.


이곳에는 그리스 이전에 터키를 지배했던 여러 왕조들의 유물과 주변 동양의 고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카데시 평화조약 (The Kadesh Peace Treaty) 문판


카데시 조약 – 인류 역사 최초의 평화조약이다.

아카디아어로 만들어진 점토판. 

아크릴판에 달려 있는 것이 실제 조약문이고

사진 윗 부분의 크게 보이는 것은 내용물을 볼 수 있게 만든 모조품이다.


카데시는 지금의 터키와 시리아 국경 인근에 있던 고대 도시다. 

카데시 전투 (Battle of Kadesh, Battle of Qadesh)는 기원전 1274년 5월 12일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이집트와 히타이트(Hittites)의 전투를 말한다.


이집트와 히타이트 모두 이 전쟁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이집트의 기록은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한 선전용으로 작성된 것임에 반해 

히타이트의 기록은 내부용으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집트 기록이 좀 더 과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단 이집트의 기록이라고 해서 이집트의 일방적인 승리만 기술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자신들의 실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기록하고 있다.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집트측과 히타이트측의 설명이 서로 다르며, 양쪽 모두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기록했다. 

때문에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지만,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히타이트가 승리 내지는 우세한 상황에서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즉위한 지  4년째로 접어 들면서 이집트 북방의 국경지대인 시리아 북부를 침략하여 

히타이트의 속국인 아물(아무르)을 복속시켰다.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스는 마침내 아무르 탈취를 목표로 동맹국들의 군대를 집결시킨 후 시리아 북동부를 향해 진격했다.


람세스 2세 역시 히타이트에 맞서 진격하던 중 2명의 히타이트 첩자를 포획하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히타이트군이 알레포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하지만, 이는 무와탈리스가 대규모 동맹군을 카데시 언덕 뒤쪽에 숨기고 

훨씬 북쪽의 알레포에 자신이 있다는 허위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속임수에 빠진 람세스 2세는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카데시를 몰락시킬 생각으로 병력을 서둘러 카데시 쪽으로 진격시켰다. 

그의 부대는 오론테스 계곡 도로를 따라 줄지어 진군하게 되었다. 

이집트군은 각 수호신 이름을 새긴 관을 쓴 프타, 세트, 아몬, 라의 4개 군단으로 조직되었는데

왕은 제1사단인 아몬 사단과 함께 저녁 무렵 카데시에 도착해서 막사를 세웠다.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아몬 군단이 카데시에 도착했을 무렵, 

그들이 너무 강행군을 한 결과 후속 군단들과 상당히 거리가 벌어졌다. 

사로잡힌 2명의 히타이트 포로(정찰병)가 히타이트의 전술을 자백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히타이트 전차부대 2,500대가 강을 건너와 람세스 2세의 후속 라 사단을 기습하여 괴멸시켰으며, 

그 여세를 몰아 아몬 군대도 기습한 참이었다.


이집트군의 패배가 명백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일전에 복속시켰던 아무르의 지원군이 돌연 나타나 히타이트군을 물리쳤다. 

이집트군은 서둘러 재결집하여 히타이트의 전차 부대를 격파하려 했으나, 

그들은 이미 오론테스 강을 건너 자군의 보병 부대와 합류해버린 후였다. 


이후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무와탈리스는 휴전을 제안했다. 

람세스 2세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양군은 군대를 각기 고국으로 퇴각시켰다. 

카데시 전투에서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는 막강한 저력을 발휘했지만, 

결국 히타이트군보다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많은 사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영토도 획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아무르는 후에 다시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었다.  


 ‘철의 왕국’ 히타이트와 ‘태양의 왕국’ 이집트가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인 것이다. 

두 문명권의 맹주가 맞붙은 최초의 세계대전으로도 불린다. 양국은 16년간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승자도 패자도 불분명한 지루한 싸움, 두 제국은 기원전 1274년 무렵 평화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당시 조약문 원본이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도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각기 조약문 1부씩을 나눠 가진 셈이다. 


주목할 대목은 조약문 세부다. 전쟁 재발 금지, 제3국의 침략에 대한 공동대응 방안 등을 적시했다. 

‘전쟁 중 도망간 병사가 본국에 송환돼도 엄벌을 받지 않으며 그 가족 또한 벌하지 않는다’는 부분도 선진적이다. 

공존을 향한 고대인의 절박한 증언이다. 제국은 사라졌어도 기록은 남았다. 

인간의 존재 이유인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기에 충분하다. 

조약이 타결된 장소가 지금은 화약 냄새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변했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카데시 조약의 바탕은 상호 신뢰와 존중. 

역사는 3300년 전에 이미 ‘도망간 병사가 눈물을 흘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카데시 전투 이후에 맺어진 평화조약은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이라고 한다. 

전쟁에서의 승리나 패배로 한 쪽이 다른 쪽에 복종하는 조약이 아닌 

대등한 두 세력의 공존을 명시한 평화조약으로서 최초라는 뜻이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에서 당시 맺어진 조약의 내용이 담긴 설형문자 점토판이 발견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조약문 원본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가 되어 있으며, 

복사본은 국가 간 평화공존의 상징으로 국제연합 본부에 걸려있다.


카데시 조약문판


쐐기문자로 비문이 쓰여 있는 입상


쐐기문자는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라고도 불리는 고대 문자다.

 ‘설형(楔形)’이란 ‘쐐기 모양’이라는 뜻으로 그 글자의 모습이 마치 쐐기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쐐기’는 일종의 나무못인데, 나무를 V자 모양으로 깎아서 나무로 짠 물건의 틈새를 박아 연결 부분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데 쓰인다.


글자를 쓰기 위해서는 종이와 펜 등 필기도구가 필요하다. 

설형문자를 쓰는 데 종이 구실을 한 것은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이며, 펜 구실을 한 것은 갈대나 뼈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갈대 등의 끝을 다듬어 뾰족하게 만들어서 누르거나 새겨서 쓰면 점토판 위에 자국이 남게 되며 이것이 문자가 된 것이다. 

쓰기가 끝나면 점토판을 햇볕에 말려 보관했으며, 중요한 것들은 가마에 구웠는데 이렇게 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석판이나 금속판이나 바위, 금속, 상아, 유리, 밀랍 등에 새긴 경우도 있다.

설형문자 최초의 문서는 BC 3000년대에 수메르어로 씌여졌다.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 3세(Shalmaneser III) 입상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티그리스강 상류를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국가로서 

그 명칭은 중심 도시였던 아수르(Assur)시에서 유래했다.

바빌로니아와 같이 수메르 문명을 계승한 국가이다. 

샬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재위:BC 858 ~ BC 824년)는 신 아시리아 왕국 시대의 아시리아 왕이었다.


그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왕자로 태어났다. 

기원전 858년에 즉위하여 부왕 대신에 대폭 강화되었던 아시리아를 다시 확대하는 다수의 원정을 행했다。

즉위 직후에 시리아 원정에 나서 아람계 국가 비트・아디니를 정복하였다.


이러한 아시리아의 팽창에 대하여 시리아 지방에 있는 여타의 제국은 위기감을 느끼고 반 아시리아의 동맹을 맺었다. 

샬만에세르 3세 자신이 남긴 비문에 의하면 다마스코 왕 하다드에세르, 하마테 왕 일프레니, 이스라엘 왕 아합 등 

12 왕이 이 동맹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853년에 카르가르의 싸움에 양자가 격돌하였다. 

샬만에세르 3세는 이 전투를 대승으로 기록하는데 실제로는 승리를 얻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 전투 후 샬만에세르 3세는 공격 목표를 바빌로니아로 바꾸어 현지의 칼데아 인등을 정복하였는데 

그 후 샬만에세르 3세는 다시 시리아 지방을 침공하였다.


그리하여 다마스코 왕 하닷에세르가 기원전 842년에 붕어하였는데 아시리아는 

그의 왕자 하자에르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여 다마스코를 공격하였다. 

다마스코의 완전정복은 불가능하였지만 이로 인해 시리아 지방에 대하여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 

다마스코, 이스라엘, 페니키아의 각 도시 국가에 공납을 부과하였다.


844년에 우라르투 왕국에 원정을 행했는데 우라르투와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반복하였다. 

다시 기원전 835년 메디아와도 전투하였는데 기원전832년에는 왕자의 아슈르・다인・아필을 군총사령관에 임용하여 그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아슈르・다인・아필은 기원전 827년 돌연 반란을 일으켜 카르프(님로드)를 제외한 아시리아의 태반의 도시를 제압하였다. 

샬만에세르 3세는 반란의 진압에 성공하지 못하고 BC 824년 붕어하고 다른 왕자 샴시아다드 5세가 후사를 계승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샬만에세르 3세는 카르프(님로드에 군사령부와 무기고를 포함한 요새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현재 샬만에세르 요새라 불리고 있다. 

이 요새의 옥좌에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조약을 체결한 광경의 부조가 있는데 이는 당시에 관한 매우 귀중한 정보다. 

이스라엘 왕 예후가 샬만에세르 3세에 평복하고 공물을 헌상하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생각하면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


가운데 부조가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 재위: BC 883년 - BC 859년)는 신 아시리아왕국 시대의 왕이다. 

신도 카르프를 건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투쿨티닌우르타 2세의 왕자로 태어났다. 부왕의 대에 강화되었던 아시리아를 다시 강대국화 하였다. 

기원전 883년에 즉위한 후 17년 간에 14회의 원정을 행하였다고 한다. 

시리아 동부와、카르케미쉬에 진군한 것 외에도, 자그로스 산맥 방면에도 출병하였다. 

그는 정복한 영토의 통치방법으로 현지의 왕에 공납을 부과하지 않고 아시리아인의 총독을 파견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는 고대부터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아슈르를 대신하는 신수도 카르프(님로드)를 건설하였다. 

이 도시의 유적에서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아시리아식의 건축양식으로 유명한 셰두(사람 머리의 날개 달릴 황소)의 조각상 등을 설치했던 것으로 유명한 

최고의 궁전이 포함되어있다. 

이 궁정은 이후 사르곤 2세가 두르샤루킨에 천도하기까지 아시리아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그는 적이 얼마나 잔혹하였는가를 나타내는 문장과 부조를 남겼는데, 일설에는 다른 이들을 위압하기 위한 정치 선전이었다고 한다. 

사후 왕자인 샬만에세르 3세가 왕위를 이었다.


여러 부조들


예멘의 고대 도시 팀나 (Timna)에서 발견


'슈신을 위한 사랑 노래' 점토판


기원전 2037~2029년 경 쐐기문자로 적힌 이 시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사랑의 시라는 판정을 받았다.

바빌로니아는 인류문명의 출발지라 부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속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아시리아-바빌로니아로 이어진 고대제국에 의해 형성됐다. 


히브리 성경의 노아 설화를 비롯한 무수한 이야기의 젖줄이 이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시작됐음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이들 문명권의 쐐기문자(설형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이 20세기 들어 대거 발굴, 해독되었다. 


기원전 20세기 무렵 수메르를 통치하던 슈신(또는 슈슈엔)의 시대 그와 결혼한 여인이 쓴 ‘슈신을 위한 사랑 노래’다. 

당시 수메르 왕은 대지 및 가축의 생산력을 풍부하게 하고자 태고의 여신인 이난나의 여사제 가운데 한 명과 매년 신성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간택된 여사제 중 한 명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는 


‘신랑이여, 내 가슴속의 사랑하는 이여 / 

꿈같이 달콤한 그대의 아름다움이여 / 

사자여, 내 가슴속의 사랑하는 이여 / 

꿈같이 달콤한 그대의 아름다움이여’로 시작한다. 


1900년 발굴돼 터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점토판에 적힌 시에는 

‘나를 침실로 데려가주세요’ ‘당신을 어루만지게 해주세요’ 

‘우리 집에서 새벽까지 주무세요’ ‘나를 애무해주세요’ 같은 노골적인 유혹의 내용도 담겨 있다. 


함무라비 법전 (복사본)


이 태블릿은 학교와 법정에서 사용하기 위해 함무라비 법전을 복사해 적었던 것으로 Nippur에서 발견되었다.

함무라비는 기원전 1792~1750년동안 고대 바빌로니아를 통치했던 왕이며, 함무라비 2년에 이 법전이 탄생했다. 

오리지널 태블릿은 2.23m의 섬록암 돌기둥에 새겨진 것으로, 루브르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


Yerkapı SPHINX - 13th century BC - Hittite Empire.


기원전 13 세기에 세워진 석회암 스핑크스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인 보아스코이 (Boğazköy)의 성벽 위의 

Yerkapı (문자적으로 "지상 게이트")에서 발견되었다. 베를린 박물관에도 동일한 스핑크스가 있다. 

보호 목적으로 출입구에 위치한 4개의 스핑크스 중 하나이다. 많은 조각을 조립하여 완성되었다. 


나람 신(Naram-Sin) 왕의 돌 초상


이 돌 조각의 비문에 나람 신(Naram-Sin) 왕이라고 씌여 있다.

Diyarbakır 근처의 Pir Hüseyin에서 발견되었다. 


나람 신(Naram-Sin)은 기원전 2270년에서 2255년 사이의 아카드(Akkad) 제국의 왕이었던 

마니 쉬 투슈(Manishtushu) 의 아들로 태어났다 .

아카드 제국 네 번째 왕인 나람 신(Naram-Sin)은 기원전(紀元前) 2254년부터 2218년까지 37년 동안 아카드(Akkad)를 다스렸다.


위대한 정복군주의 손자답게 나람-신은 재위 기간 내내 여러 땅에서 일어난 반란(叛亂)을 진압하고 

제국의 변방에서 전쟁을 벌이며 아카드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


나람-신(Naram-Sin)에서 신(Sin)은 셈 사람들이 믿던 달신(月神)의 이름이다.

셈 사람들은 신(Sin)을 수엔(Suen)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나람-신(Naram-Sin)은 나람-수엔(Naram-Suen)이라고도 부른다.


이집트 무덤 발견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체를 죽인 채로 영혼이 돌아오고 있다고 믿어졌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매우 광범위하고 뿌리가 깊기 때문에 무덤 발견은 오늘날까지 이집트 유물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내세는 신체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정상일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 마사 바 및 암벽화 무덤과 같은 

기념비적인 무덤이나 모래에 파인 평범한 무덤에 묻혔다.


테베 (Thebes)시의 매장지인 데이 르 엘 바리 (Deir el-Bahri)에서는 나무로 된 석관이 발견되었다. 

주인은 테베의 군주 아문 신의 제사장과 제사장이었다.

석관의 내면과 외면은 얇은 석고층으로 칠해져 있고, 

내세와 신화적 장면에서 죽은 자를 보호할 수 있는 상징으로 종교적 텍스트로 장식되었다. 


미이라로 만들기 전에 추출된 내부 장기를 캐노픽 병에 넣었다. 

이 관 뚜껑에는 죽은 사람을 지키는 네 신의 머리가 있다. 

위는 팔콘이 달린 Imseti의 항아리에 저장되었다.

미라가 구슬 그물로 덮여 있었고, 나무 베개를 머리 아래에 놓고 밀짚으로 만든 구슬 바구니를 무덤 방에 놓았다.


해시계


11 개의 방사형 선으로 12 개의 동일한 세그먼트로 나뉘어 진 오목한 표면을 갖는 이 해시계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Mada'in Saleh에서 발견되었다. 

아람어 비문이 있으며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중앙 수직 막대의 그림자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선으로 떨어지며 시간을 나타내준다.


이슈타르 문(Ishtar Gate)에서 발굴한 용과 오록스.


이슈타르의 문(아랍어: بوابة عشتار)은 바빌론 내성의 8번째 성문이었다. 

이는 기원전 575년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지시에 의해 도시의 정북방, 왕궁에서 동쪽에 지어졌다. 

이 문은 도시를 감싸는 성벽을 이루는 일부였고, 성문은 매끄러운 푸른색 벽돌로 이루어졌다. 

동물과 신들이 성문에 조각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벽돌들로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슈타르의 문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하여 건립되었는데, 

당시는 네오-바빌로니아 제국의 최전성기였기 때문에 이같은 공사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정복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네브카드네자르 2세는 성문 공사를 완료한 후, 이 성문을 이슈타르 여신에게 바쳤고, 

성문에는 각각 용, 황소, 사자를 새겼는데, 이는 마르둑, 아다드, 이슈타르 신을 경배하기 위해서 였다.


기록에 의하면 성문과 지붕은 모두 최고급 백향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성문의 벽돌들은 푸른 유약을 입혀 구웠는데, 

이는 고대에 매우 희귀하고 값비쌌던 보석 '라피스 라줄리'처럼 보이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설계는 햇빛에 비친 성문이 아름답게 빛나는 효과를 낳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 문을 통과하는 길은 120마리에 달하는 용, 황소, 사자가 황색과 검은색 벽돌들로 이루어진 벽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성문 그 자체에는 오직 신의 모습만 그려져 있었다. 

대축제 기간에는 고대의 신상들이 이 성문 아래를 통과하여 도시를 출입하였다.


이슈타르문을 장식하고 있는 시루슈(용)와 오룩스(황소)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등장하는 시루슈는 신들의 지배자인 마르두크의 상징이며 오룩스는 기후의 신 라만의 상징이다.

마르두크 (Marduk)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으로 위대한 도시 바빌론의 수호신이다.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왕 시대부터 바빌로니아의 여러 신 가운데 주신(主神)의 역할을 하였고, 

나중에 수메르의 신 벨과 합쳐져 '벨 마르두크'로 숭배되었다.


전설에는 '에아'와 '엔릴'의 후계자로 악한 용 티아마트를 죽이고, 

티아마트의 시체를 이용하여 혼돈으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전해지며 상징 동물은 용이다. 

전통적으로 바빌로니아의 왕은 마르두크의 현신으로 마르두크 신앙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글쓰기와 지혜의 신인 나부(Nabu)는 이 마르두크의 아들이다.

구약성경 예레미야 (50:2)에 벨과 함께 잠깐 언급된다.


이슈타르 문 (Ishtar Gate) 장식


이슈타르 문은 바빌론 시의 성 외벽과 내벽을 연결하는 이중 문의 일부로, 이슈타르 여신에게 헌정된 것이다. 

테라코타와 돋을새김된 벽돌로 장식되었다. 소재는 신의 성스러운 동물인 사자와 수소이다. 

이 문의 대부분은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바빌론에서 발견된 Ishtar Gate의 사자와 꽃 무늬 테라코타 (BC 6세기)


바빌론에서 발견된 Ishtar Gate의 사자 테라코타 (BC 6세기)


고대 바빌론 행렬 거리의 말 부조 (BC 4세기)


이슈타르 문에 있던 용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된 이슈타르의 문


현재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위치한 이슈타르의 문은 1930년대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1900년대 초기에 바빌론에서 발굴한 벽돌들을 독일로 가져와 다시 재현한 것이다. 

이 문은 높이가 14m이고, 너비가 30m이다. 이 문을 발굴할 때, 14m에 달하는 성문의 기초도 함께 발견되었다.


'클라우디스 제임스 리치'는 바그다드에 거주하는 아마추어 영국인 고고학자였는데, 

고대 바빌론에 대해 알게 된 후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학자와 현장 고고학자로 둘다 활동하며, 고대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고, 1815년에 최초로 이에 관련된 책을 저술한다. 

그와 19세기의 학자들은 바빌론 유적에 있는 거대한 언덕이 고대의 왕궁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독일인 고고학자 '로버트 콜더웨이'에 의해 진실로 판명되게 된다. 

로버트 콜더웨이는 전에도 독일 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고대 시리아 도시들을 발굴한 적이 있으며, 

빌론의 발굴은 1899년에 처음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 고고학계가 선호하던 발굴 방법은 땅에 터널을 뚫고 지지대를 설치하는 방법이었으나, 

이는 성과를 크게 내지 못하였고 오히려 진흙벽돌로 지어진 바빌론 유적들을 손상시키기만 했다. 

그리하여 나온 대안은, 무너져가는 건물들에 집착하지 말고 관련된 문헌과 자료들을 조사하자는 것이었는데, 

이 방법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정보들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콜더웨이의 조수 중 한 명은 고대 바빌론의 복원과 정보 수집에 큰 공을 세워 

주변에 작은 박물관을 세우고 그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기도 하였다.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된 이슈타르의 문


 이슈타르의 문(아랍어 : بوابة عشتار)은 바빌러 바빌론의 내부의 8번째 내성문이었다. 

이는 기원전 575년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지시에 의해 도시의 정북방, 왕궁에서의 동쪽에 지어졌다. 

바빌론 신화에 등장하는 이슈타르에게 헌정하는 이 문은 채유벽돌에 저부조로 

시루슈(혹은 무슈슈-Mušḫuššu)라는 용과 오록스를 장식했다. 

그리고 지붕과 대문은 삼나무로 제작하였으며, 문을 통해 대로가 연결되었다. 

양 옆으로는 약 120마리의 사자 저부조 장식을 하였다. 


이슈타르 문은 이슈타르를 포함한 아다드와 마르두크를 석상으로 새겨넣었다. 

이런 신들의 석상은 새해를 기념하는 종교적인 행사때 이용되곤 했다. 

본래 바빌론 성벽의 부분인 이슈타르의 문은 기원전 3세기 이전만 해도 

파로스 등대 대신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고려되고는 했다. 


이슈타르의 문의 발굴은 1902년에서 1914년까지 이루어졌으며, 

발굴이 완료될 당시 14m나 되는 문이 두 개가 있었다. 

독일의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되어 있는데, 이는 작은 문을 복원한 것이었다. 

뒤에 있는 큰 문은 너무 커서 적합하지 못하였으며, 이는 1930년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완공했다. 

이는 14 m 높이에 30 m의 너비다. 


이슈타르의 문과 사자가 꾸며진 대로에서 나오는 발굴물이나 장식들은 다른 박물관에서도 볼 수가 있는데,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서는 이슈타르 문의 사자, 용, 황소 장식을 소장하여 관람할 수 있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미술관은 용을 소장하고 있으며, 

스웨덴 고텐버그에 위치한 뢰스카 박물관에서는 용 장식 하나와 사자 장식 하나를 각각 소장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 뮌헨 주립 이집트 미술관,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시카고 동양 미술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 박물관, 보스턴 미술관, 예일대학교 미술관은 각각 사자 장식을 소장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이슈타르의 문의 축소형 복원품은 사담 후세인 때 이루어졌으며, 

이라크 전쟁때 미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성문(成文).


이슈타르 성문에 대한 네브카드네자르 2세의 설명은 옆 성벽에 고대 아카드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15m의 높이와 10m의 너비를 자랑한다.

설명문은 이슈타르 성문의 건립 목적과 업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성문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 바빌론 유적 발굴 모습을 찍은 사진


이슈타르 성문과 그 앞 도로는 20세기 초에 바빌론에서 발굴되었으며,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당시 발굴된 벽돌들을 가지고 다시 복원하였다. 

이슈타르 문을 이루던 벽돌들은 다른 박물관에서도 전시되고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거대한 복원 프로젝트들 중 하나가 바로 이슈타르 문과 그 앞 도로의 복원인데, 

이는 발굴된 유리 벽돌 조각들을 모두 하나하나 다시 붙이고, 조심스레 운반하여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들로 이루어졌다. 

완전히 사라진 벽돌들을 대체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틀들을 만들어 당대와 똑같은 벽돌들을 생산해냈다. 

이슈타르 문은 사실 이중문인데, 현재 우리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더 작은 앞문이다. 

뒷문은 전시하기에는 너무 크기가 커 전시되지 못하고 창고 안에 있다. 

또한 이슈타르 문에 있던 동물 조각 벽돌들은 페르가몬 박물관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라크 바빌론 유적에 있는 이슈타르의 문은 사담 후세인 정권 때 만들어진 것인데, 미완일 뿐더러 크기도 더 작다. 

이 문은 복원된 바빌론 궁전과 성벽과 함께 바빌론의 유적들을 지키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문은 당시 미국과의 갈등 속에서 이라크의 문명을 상기시키며 이라크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화시키기 위해 지어진 것인데, 

이라크 전쟁 때 미군의 공격으로 이 문 또한 파손되었다.


이슈타르의 문 앞에 있는 대로의 모델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문의 모델


바빌론에 복원된 이슈타르의 문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고대 동양박물관을 나와서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을 둘러본다. 

터키는 땅만 파면 고대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물을 따로 보관하지 않고 뜰에 아무렇게나 두는데 

이것이 오늘날 하나의 석조 유물 정원으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메두사 상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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