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메흐멧 2세가 1452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위하여
당시 보급 물자의 항로였던 보스포루스 해협에 건설한 요새이다.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러스해협의 유럽 쪽에 지어진 요새.
1452년 당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관할하던 비잔티움제국 함대가 북쪽 동맹국과 교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해협의 폭이 가장 좁은 700m 병목구간에 건설했다.


석공 1만 명과 인부 1만 명을 동원하여 139일 만에 지었다는 전설적인 성채로,
계단식 성곽으로 되어 있으며 5~15m에 이르는 거대한 첨탑 5개가 서로 연결되어
어느 탑에 오르더라도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편의 아시아 쪽에 있는 아나돌루 히사리와 함께

서로 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을 감시하고 대포로 공격하기도 했다.


1453년에는 양쪽 요새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타고 들어오는 비잔틴 제국의 함선을 협공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함락에 성공했다.


원래의 요새는 1509년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어 일부를 복구했으며,
1953년에 이스탄불 정복 500주년을 기념해 현재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하였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매년 여름 루멜리 페스티벌이 열리며,

요새 가운데 뜰에 있는 소규모 공연장에서는 음악회와 포크댄스 등 각종 공연이 열린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에서 보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보스포루스 해협은 이스탄불의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해협의 동쪽이 아시아, 서쪽이 유럽이다.
유럽 지역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출구인 골든 혼을 기준으로 다시 남쪽의 구시가와 북쪽의 신시가로 나뉜다.
이 해협은 예로부터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에서 보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수로로서 지리적 가치가 높아
중세의 교통로와 무역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냉전 시대에는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 남하하던 소련을 막는 마지막 보루였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에서 보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보스포루스 해협은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매우 인상적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르 요새 등 이스탄불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고급 주택, 오래된 목조 별장이 늘어서 있다.


해변에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도 많다.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주변 풍광을 즐기기에 좋다.


2006. 3. 14. 보스포루스 해협 유람선에서 루멜리 히사리를 배경으로 인증샷.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란 터키 북서부의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한다.
북동쪽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흑해로 통하고, 남서쪽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에게 해에 통한다.

동서 길이 1,150km. 남북 최대 길이 610km. 면적 41만 3,000km2. 최대수심 2,212m.
유럽 지중해(海)의 에게해와는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해·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이어져 있다.

유라시아에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위치


남쪽은 터키, 서쪽은 유럽의 터키·불가리아·루마니아,

북쪽과 동쪽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연방·조지아에 둘러싸여 있다.


북부는 크림 반도가 돌출해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해안선이 비교적 단조로우며,
해저 지형은 북반부에 대륙붕의 발달이 현저하고 남반부는 비교적 깊다.


북쪽은 케르치 해협에서 아조프해에, 남서쪽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마르마라해에 이어지고
다시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지중해로 연결된다.


하천은 북부로부터 드네프르강(江)·드네스트르강이, 서부로부터 도나우강이 유입하여 유입량이 많은 데다가
비가 많아 표층은 18% 내외의 저염분(低鹽分)이다.


유라시아에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위치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지명은 그리스 어로 '대리석'이라는 뜻이다.
고대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흑해(Black Sea)의 표층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유출하는데

저층수(低層水)는 에게해로부터 강한 조류가 되어 유입한다.


표면 수온은 겨울철 6℃, 여름철에는 23℃ 내외가 된다.
예전에는 카스피해와 이어져 있었으나 제3기(紀) 말의 지각운동에 의하여 분리, 지중해와 이어졌다.

유라시아에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위치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기후가 온화하여 섬과 연안에는 휴양지가 발달하였다.
이 곳에 있는 마르마르 섬은 대리석 산지로 알려져 있다.


흑해(Black Sea)에서의 어업은 주로 얕은 북해안에서 행해지는데, 어족은 108종에 이르며
청어·고등어·철갑상어·정어리·넙치·꼬치고기·농어·도미 등이 잡힌다.


예로부터 수상교통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해외로 통하는 바다로서 몇 개 안 되는 부동항이 있기 때문에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남방 진출의 기지가 되었다.

러시아·루마니아·불가리아·우크라이나 등도 무역에서 흑해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주요항으로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니콜라예프·헤르손·세바스토폴, 러시아의 노보로시스크·소치,
조지아의 바투미, 루마니아의 콘스탄차, 불가리아의 부르가스·바르나, 터키의 삼순·시노프·트라브존 등이 있다.


참르자 언덕에서 보는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

참르자는 터키의 이스탄블 전체를 볼 수 있는 높은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보스포루스 제1대교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 다리가 2개 뿐이다.
차량 이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두 지역을 통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연락선(바푸르)을 이용한다.


2006. 3. 14.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에서 루멜리 히사리를 배경으로 인증샷.


보스포루스 해협의 푸른 물결을 가르며 이스탄불의 시가지를 둘러보는 보스포루스 크루즈 투어는 매우 인기 있다.
이스탄불의 일몰부터 야경까지 감상할 수 있는 저녁 시간에 맞춰 탑승하는 것이 좋다.


투어의 종류는 다양한데 에미노뉴(Eminonu) 선착장에서 출발해

보스포루스 제2교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밖에 에미노뉴에서 흑해 입구로 향하는 크루즈, 오르타쾨이에서 출발하는 왕복 크루즈 등이 있다.


에미노뉴 선착장을 이용할 경우, 항구의 별미인 고등어 케밥(발륵 에크멕)을 꼭 맛보아야 한다고.
보스포루스 크루즈선이 드나드는 선착장 주변에 작은 배에서 고등어 케밥을 만들어 내는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는 메흐메트 2세가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기에 앞서, 동맹국과 교류를 막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에 설치한 두 성채 중 하나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왼쪽은 유럽, 오른쪽은 아시아라고 이야기하는데,

루멜리 히사리는 유럽 쪽에 지어진 성채이다.
반대쪽인 아시아에는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ı)라는 이름의 성채가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제1대교에 가까이 붙어 있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다소 복잡한 주차장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들어가는 길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매표소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매표소를 지나서 입구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입구


요새를 지키던 대포를 진열해 놓은 듯.


요새를 지키던 대포를 진열해 놓은 듯.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첨탑


 루멜리 히사리는 군사 목적으로 건설된, 특히 대함전을 주력으로 한 성채라서

해협을 따라 성벽과 첨탑이 줄지어 서 있다.
모든 첨탑이 연결되어 있어 전쟁시 유기적으로 응전할 수 있었다고.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하지만 아쉽게도 성벽이나 첨탑으로 오르는 길은 모두 막혀 있어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아시아쪽 해안이 보이는 풍경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쪽 방면에 있는 저택들은 터키 금수저들의 별장들이라고 한다.


루멜리 히사리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아시아쪽 해안이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첨탑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첨탑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와 유람선이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  성벽 안에 있는 소공연장.
여기서는 매년 축제가 개최된다고 하니 때를 잘 맞추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루멜리 히사리  성벽에 붙어 있는 소공연장.


루멜리 히사리  성벽에 붙어 있는 소공연장.


루멜리 히사리  성벽에 붙어 있는 소공연장.


루멜리 히사리  성벽 안에 있는 소공연장.


소공연장 옆의 나가는 길에 버려져있던 유물들.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루멜리 히사리 (Rumeli Hisari)


메흐메트 2세(Mehmet II, 1432년 3월 30일 ~ 1481년 5월 3일)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며,

처음으로 카이사르와 칼리프의 칭호를 쓴 인물이다.


1444년부터 1446년까지 짧은 기간 통치하다가 퇴위되고

나중에 1451년부터 다시 즉위하여 1481년에 죽을 때까지 집권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의 판도를 대폭으로 넓혀‘정복자(Fatih)’란 별명으로 불렸다.


메흐메트 2세는 술탄 무라트 2세의 4남으로 세르비아 출신의 크리스트교도 여자 노예인
휘마 술탄(1410~1449)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메흐메트는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소아시아의 도시 아마시아(Amasya)로 옮겨갔다.
3년 뒤 메흐메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맏형이 죽자 뒤를 이어 아마시아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둘째 형이 아마시아 총독이 되었고 메흐메트는 마니사(Manisa) 총독이 되어
관습에 따라 2명의 선생과 함께 마니사로 이동했다.


1443년 둘째 형이 죽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계승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부왕으로부터 에디르네(Edirne)에서 술탄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때 무라트 2세는 아들에게 여러 선생들을 붙여주었는데,
이들로부터 받은 이슬람 교육은 메흐메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1404~1453)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레올로고스(1405년 2월 8일 - 1453년 5월 29일)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1448년부터 치세가 시작되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때 전사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에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마케도니아 지방 드라가슈 가문 출신의 세르비아인 아내 헬레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냈으며,
1443년 모레아의 황제 소유영지를 통치하고 라틴인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448년 형인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자녀 없이 죽자,
다른 형제인 데메트리오스와 제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한 결과,
콘스탄티노스가 결정되어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했다(1449년).


145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위협을 가해오자,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재결합에 동의함으로써
서유럽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무산되었다.


결국 가브리엘로 트레비사노가 이끄는 소수의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와,
주스티니아니 롱고가 이끄는 제노바 공화국 용병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위조직을 갖추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메메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의 침공하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1453년 5월 29일 일화로, 사석포(우르반 대포)를 동원한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군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마주보며 서있었을 때, 황제는 백마를 타고 3중 성벽을 지키는 8천 병사를 시찰하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백마를 탄 그의 모습을 보고 '황제는 백마를 타는가?'라고 하며
타고 있던 흑마를 물리고 백마로 갈아탔다고 한다.


후에 메흐메트 2세가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로 칭한 것을 생각나게 한다.
4900명 정도의 그리스인들(무기를 들 수 있는 남성에 수도승까지 모두 포함한)과
2000명의 자진해서 잔류한 외국 용병들이 메메드 2세를 맞아 싸웠다.


황제는 전선에 직접 나섰으며, "활을 쏘고 창을 던져라,
저들에게 로마인들의 후예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라!" 라며 사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의 항복 제안에 대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에게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나에게도, 이 곳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없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상호간의 이해에 따라, 우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 의지에 따라 죽을 것이오."


콘스탄티노플은 그 뒤에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강력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몇번의 파상공세를 6천 남짓한 병사를 바탕으로 이겨낸다.


메흐메트 2세는 계속되는 실패로 원정을 지속할 지를 참모들에게 묻는다.
참모들은 딱 한 번의 총공세 이후에 황제와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하고 메흐메트 2세는 수긍한다.


마지막 공격지점은 외부 성벽 중 가장 약한 곳, 리쿠스강이 흘러드는 지점이었다.
황제는 첩자를 통해 공격지점을 들었지만, 방비를 단단히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바시-바주크에 의한 1차 공세, 정규군에 의한 2차 공세, 심지어 예니체리 군단의 3차 공세까지
모두 막아냈지만 비어있는 통로를 따라 올라간 오스만 병사가 탑에 오스만 군기를 세움으로써
성이 함락되었다고 생각해버린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다.


설상가상으로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던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가 투르크군의 사격에
부상을 입고 방어선에서 이탈하여 배로 도망간다.


배로 옮겨진 주스티니아니는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바다를 건너던 중 배 안에서 사망하고 만다.
주스티니아니가 부상으로 후송되자 방어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황제가 근위대와 함께 최후의 저항을 하고있는가운데 수비군이 열려있는 비밀문을 잠그지못했고
그 문을 통해 오스만 군대가 난입해오면서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 소문은 들어맞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플라비우스 모마일루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도
로마의 첫 번째 왕 로물루스와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당시 천사들이 내려와 콘스탄티누스 11세를 구하여 대리석상으로 만들었으며,
투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다.'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다르다넬스 대포


메흐메트 2세(Mehmet II)는 뛰어난 군사지도자로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고
이후 4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가 된 아나톨리아와 발칸을 정복했다.


메흐메트 2세는 술탄 무라트 2세의 4남으로 세르비아 출신의 크리스트교도 여자 노예인
휘마 술탄(1410~1449)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메흐메트는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소아시아의 도시 아마시아(Amasya)로 옮겨갔다.
3년 뒤 메흐메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맏형이 죽자 뒤를 이어 아마시아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둘째 형이 아마시아 총독이 되었고 메흐메트는 마니사(Manisa) 총독이 되어
관습에 따라 2명의 선생과 함께 마니사로 이동했다.


1443년 둘째 형이 죽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계승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부왕으로부터 에디르네(Edirne)에서 술탄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때 무라트 2세는 아들에게 여러 선생들을 붙여주었는데,
이들로부터 받은 이슬람 교육은 메흐메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는 메흐메트 2세


첫 재위 기간에 메흐메트 2세는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헝가리, 교황, 비잔티움 제국, 베네치아 등은 어린 왕자가 오스만 제국 술탄으로 즉위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에서 십자군을 조직했다.


또한 당시 에디르네에서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大) 와지르(총리) 찬다를리 할릴 파샤(?~1453)와
자가노스 파샤(?~1462)·시하베딘 파샤와 같은 와지르(각료) 사이의 대결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와지르들은 각기 어린 술탄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다.
1444년 9월 십자군이 도나우 강을 건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에디르네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은 후루프파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고
공포와 방화가 도시를 휩쓸었다.


어린 술탄은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헝가리군과 싸워주길 바랐는데 아버지 무라트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술탄이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만약 내가 술탄이라면 나 지금 당신에게 명령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어주시오."
라는 편지를 보내자 무라트는 급히 돌아와 군대를 지휘했다.


1444년 11월 바르나(Varna)에서 무라트가 거둔 승리로 위기는 가라앉았다.
메흐메트 2세는 에디르네에서 계속 제위를 유지했고 무라트는 전쟁이 끝나자 마니사로 다시 은퇴했다.


이때부터 자가노스 파샤와 시하베딘 파샤는

어린 술탄에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정복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1446년 할릴 파샤가 예니체리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무라트를 에디르네로 불러와 술탄 자리에 복위시켰다.


할릴 파샤와 메흐메트는 서로 반목했다고 전해지며 나중에 할릴 파샤는 메흐메트가 다시 정권을 잡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때 비잔티움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당했다.


퇴위당한 메흐메트는 새로이 선생으로 임명된 자가노스 파샤·시하베딘 파샤와 함께 다시 한번

마니사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남색과 여색을 불문하고 난행에 젖어 지내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오스만군을 수송하려는 메흐메트 2세


1451년 2월 부왕이 죽자 메흐메트는 에디르네에서 다시 권좌에 올랐다.
그의 마음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해서 유럽과 비잔티움은 그의 전번 재위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권위는 제국 내에서도 여전히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술탄 즉위 때 관례상 내리는 하사품이 늦었다는 이유로 항의하는 예니체리를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그는 군조직을 강화해 앞으로의 정복전을 준비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필요한 외교적·군사적 준비에 모든 열의를 쏟았다.

우선 베네치아와 헝가리를 중립 상태에 남아 있도록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유리한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1452년 대부분의 시간을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하기 위한
보아즈케센(뒤에는 루멜리 히사리)의 요새화 작업과 31척의 함대 건조 및
대구경 신형 대포를 주조하는 데 보냈다.


그는 헝가리인 총포제조기술자 우르본에게

유럽에조차 아직 알려지지 않은 크기의 대포(다르다넬스 대포)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할릴 파샤는 이런 계획들을 계속해서 반대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포위기간(1453. 4. 6~5. 29) 동안 결정적인 순간에 소집된 2번의 전시 회의에서 반대 소리가 높아졌다.
반면 자가노스 파샤는 포위를 풀자는 제안에 격렬히 반대했다.


자가노스 파샤가 마지막 총공격의 임무를 부여받았고 총사령관 메흐메트 2세 자신은 총공격을 개시한 날,
신형 대포로 파괴한 성벽의 돌파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날 할릴 파샤는 체포되어 곧바로 에디르네에서 처형되었으며,
이미 메흐메트 2세의 장인이 되어 있었던 자가노스 파샤가 대 와지르 자리에 올랐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에 메흐메트 2세는 병사들에게 그 도시에 대한 3일 간의 약탈을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점령 첫날 저녁에 자신의 명령을 철회했다.


진주 행렬의 선두에 서서 입성한 메흐메트 2세는 곧바로

성 소피아 대성당에 가서 그곳을 모스크(아야 소피아)로 바꾸었다.


이후 풍부한 기금을 조성하고 모스크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매년 1만 4,000두카트(중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발행된 주화) 금화를 그곳에 보내주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메흐메트 2세


메흐메트 2세가 마음에 품었던 과업 중 하나는 지금은 일반적으로 이스탄불로 불리는 이 도시를
세계적인 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재건하는 일이었다.


조세를 재확립해 갈라타(콘스탄티노플의 상업지구)에 살다가 피난 간
그리스인과 제노바인들에게 돌아올 것을 권유하고 그들의 가옥을 돌려주었으며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다.


도시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를 강제 이주시켜
콘스탄티노플에 정착하도록 했다.
밀레트(Millet) 제도를 시행해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개체성을 인정해주었으며


1454년 1월에는 도시 안에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구를 복원하고
유대교의 대랍비와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를 두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중심가에 그 자신이 먼저 이슬람 학술기관과 상업시설을 설립하고
와지르들에게도 이와 같이 하도록 격려했으며 파괴된 비잔티움 제국의 건물들을 복원시켰다.


이러한 핵심기관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노플은 다시 발전했으며 1478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갈라타 지역에는 1만 6,324채의 가옥과 3,927개의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50년 뒤 콘스탄티노플은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메흐메트 2세는 더없는 영광과 명성을 얻었고 커다란 권위를 얻었다.
그는 점차 스스로를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고 성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슬람의 패자(覇者)라고 생각했다.


정복 계획을 미리 세워두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로마 제국의 부활과 그 영역을 역사상 최대로 확장하는 일에 몰두했다.


1454년 세르비아 군주 듀라드 브란코비치(1377~1456)가 공물을 거부하자
메흐메트 2세는 에디르네에서 출발하여 세르비아 문제에 개입해 첫번째로 세멘데르(Semender)를 공략했다.


1456년 스메데레보를 점령하고 듀라드 브란코비치에게 연공 납부와
유사시 오스만 제국에게 지원군을 보낸다는 조약을 강요했다.
더 나아가 동유럽으로 진격한 메흐메트 2세는 벨그라드(Belgrad)를 포위했으나


1444년에 바르나에서 부왕에게 패했던 후녀디 야노시(1400~1456)의 기습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포위를 풀어 에디르네로 물러났다.


듀라드 브란코비치는 일시적인 독립을 획득했으나 그해 사망했고,
그의 미망인과 세 아들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이듬해 막내아들 라자르 브란코비치(1421~1458)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두 형제를 몰아내었으나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라자르의 추방당한 형 스테판 브란코비치(1417~1476)가 세르비아 군주로 즉위했으나 1459년 3월 추방당했다.
1459년 6월 메흐메트 2세는 스메데레보를 다시 한 번 공격해 벨그라드를 제외한 세르비아 전역을 합병했고
이로써 벨그라드가 점령될 때까지 스메데레보는 헝가리 공략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2세(1400~1473)


에게 해의 작은 모레아(Morea) 공국 토벌을 위해 메흐메트 2세는
대 와지르 마흐무트 파샤(1420~1474)를 파견했고 자신도 2차례의 원정을 감행했다.


1460년 5월, 늘어나는 공물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모레아 공국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메흐메트 2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모레아 공국을 침공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생 데메트리우스(1407~1470)는 사로잡혀 수감되었고,
또 다른 동생 토마스(1409~1465)는 도망쳤다.


여름이 지나갈 즈음 모레아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했으나,
모넴바시아(Monemvasia)를 점령하고 있던 카탈루냐 해적들과 모레아 남쪽 마니(Mani) 반도는
베네치아의 지원 속에서 계속 저항했다.


모레아 북서쪽의 살메니코(Salmeniko)가 가장 오래 저항했으나
1461년 이곳마저 함락당하며 그리스 전역이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다.


모레아 점령은 베네치아를 비롯한 지중해 해상 세력과의 맞대결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유리한 입지를 제공해주었다.

모레아 점령 이후 메흐메트 2세는 아나톨리아 주변에 대한 정복 사업에 착수했다.


특히 아나톨리아 북부를 감싸고 있는 흑해 연안의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제노바의 식민 도시로 전락해
동서 교역의 막대한 이익이 제노바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보스포루스와 골든혼 내해의 갈라타까지 독점 교역권을 확장하려는 제노바의 제의를 거절하고,
제노바의 흑해 교역 중심지인 아마스라(Amasra)를 공략했다.


마흐무트 파샤의 오스만 함대가 아마스라로 진격했고 술탄 자신도 아나톨리아 내륙 도시 볼루를 거점으로
아마스라를 육지에서 공격해 1461년 아마스라는 오스만 영토에 병합되었다.


아마스라 정복의 여세를 몰아 메흐메트 2세는 또 다른 흑해 중부의 교역 중심지 시노프에 대한 정복을 단행했고
시노프를 지배하던 잔다르 공국의 왕 이스펜디야 베이는 항복했다.


다음으로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잔존세력인 트라브존 항을 공격했고
1461년 10월 트라브존 황제 다비드 콤네누스(1408~1463)는 오스만 제국에게 항복했다.


이어서 내륙 평정에 착수한 메흐메트 2세는 카라만 공국을 공략했고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적대 세력은 악코윤루조만 남게 되었다.

메흐메트 2세가 묻힌 이스탄불의 파티 모스크


세르비아 토벌 이후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체페슈(1431~1476)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조공 납부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약탈하자 메흐메트 2세는 그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블라드는 기습 공격으로 오스만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나 특유의 잔혹함과 화전 전술로 인해 인기가 없었고,
오스만군을 피해 헝가리로 피신했다.


헝가리는 봉신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는 핑계로 블라드를 추방했고,
블라드는 결국 오스만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오스만군은 왈라키아의 수도 트르고비슈테(Targoviște)를 함락시켰고,
메흐메트 2세는 친(親) 오스만파인 블라드의 동생 라두(1435~1475)를 왈라키아 공작으로 세우고 철수했다.
이로써 왈라키아 또한 오스만 제국에게 귀속되었다.


이어서 몰다비아 군주 스테판 3세(1432~1504)가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왈라키아에 대한 간섭을 시도하자
루멜리 지역의 사령관 하딤 쉴레이만 파샤(?~1490)​를 몰다비아 원정대장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1475년 10월 하딤 쉴레이만 파샤는 바슬루이(Vaslui) 전투에서 스테판 3세에게 대패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직접 몰다비아 원정에 나서, 불리한 전황 끝에 아크데레 근교에서 스테판 3세를 격퇴하고

1476년 몰다비아도 오스만 제국에 편입시켰다.


관심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로 돌린 메흐메트 2세는 마흐무트 파샤를 보내
보스니아의 수도 아이차를 포위해 정복했고 클리티에 성에 피신해 있던 보스니아 왕이자 세르비아 군주인

스테판 토마셰비치(?~1463)가 항복함으로써 1463년 보스니아도 오스만 제국에게 복속되었다.


보스니아의 점령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를 통한 베네치아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고
동시에 헝가리에 대한 견제 효과도 얻었다.


이어서 메흐메트 2세는 헤르체고비나 왕국으로 진입해

스테판 카소로비치(1404~1466)를 패주 시켜 항복시켰다.


스테판이 죽은 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만 제국의 루멜리 사령부에 편입되었고
스테판의 어린 왕자는 이슬람교로 개종해 후일 아흐메트 파샤(?~1517)로 알려져 대 와지르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파티 술탄 메흐메트 다리


1466년 봄 메흐메트 2세는 대군을 이끌고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1405~1468)의 지도 아래 저항하며 베네치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스칸데르베그는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와 전쟁을 하는 것을 이용하여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베네치아는 두라조(Durazzo), 스쿠타리(Scutari)를 내어주며 알바니아를 지원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원정을 떠나 엘바산(Elbasan) 요새를 지어

스칸데르베그를 남쪽의 베네치아와 분리·고립시켰다.


1467년 초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 사령관인 발라반 파샤를 격퇴했고 오스만군의 크루저(Krujë) 포위를 풀어냈다.
이어서 엘베산 요새까지 공격했으나 점령까지 하지는 못했다.


메흐메트 2세는 다시 알바니아 원정을 떠나 알바니아를 고립시켜 맹공을 퍼부었지만 실패했고,
겨울에 전염병이 돌자 물러났다.


그러나 1468년 1월 스칸데르베그는 베네치아의 레즈헤(Lezhe) 요새에서 사망했고,
메흐메트 2세는 10년에 걸쳐 알바니아를 잠식해 들어갔다.
1478년 슈코드라(Shkodra) 포위전을 끝으로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이후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럽의 십자군 결성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와 연대해 유럽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했다.


베네치아 역시 교역로의 새로운 주인인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희망했고

오스만 제국 또한 베네치아 공략에 필요한 해군력의 약화로 공략보다는 공존을 택하려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및 동지중해에서의 급격한 팽창 정책은 베네치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고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 또한 꾸준히 증강되었다.


이에 베네치아는 아나톨리아 동부와 남부 지중해의 반(反) 오스만 세력인 악코윤루조의 통치자 우준 하산(1423~1478)과

동맹을 맺고 카라만 공국의 카심 베이에게 군사 지원을 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협공했으며 이즈미르를 공격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1473년 6월 마흐무트 파샤에게 군대 지휘를 맡겨 아테네 근처 베네치아의 교역 거점인
유보아 섬을 공격하게 했고 자신은 육로로 그리스 남부의 테르모필레를 넘어 유보아 성채에 도착해 17일 만에 성을 점령했다.


아나톨리아로 돌아온 메흐메트 2세는 1473년 8월 에르진잔의 바슈켄트 전투에서 우준 하산을 격파했고
아나톨리아와 발칸 지방의 지배를 확고히 했다.


동맹세력을 잃은 베네치아는 1474년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파견해 1년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도 크림 반도에 대한 해상 원정에 치중했기 때문에 1년 동안 양국 간의 충돌이 잃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호 불가침 조약이 만료되자 베네치아 함대는 아나톨리아 해안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이에 오스만 함대는 베네치아 무역 거점들에 대한 원정을 시작해


1477년 사령관인 하딤 쉴레이만 파샤가 코린트 해협 북부의 레판토를 공격했다.
동시에 알바니아 총독인 알리 베이가 크루저를 공격했고 메흐메트 2세의 친정으로 크루저는 1478년 정복되었다.


이어 스쿠타리를 포위한 후 맹포격을 가해 점령했다.
결국 1479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메흐메트 2세가 사용했던 검


1475년 대 와지르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1482)가 300척의 함선과 4만 명의 군사로
흑해 북부를 공격해 제노바의 무역 거점인 케페를 점령한 후 아조프 해로 진입해 아조프 성과 멘퀴브 성을 차지했다.


크림 칸국의 멩글리 기라이(1445~1515)는 생포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고
흑해는 오스만 제국의 내해가 되어 육·해상 실크로드의 중개지로서 오스만 제국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흑해에 이어 다시 에게 해와 지중해 통제 정책으로 전환한 메흐메트 2세는 메시히 파샤를 보내 1479년 로도스 섬을 공격했다.
그러나 로도스 섬은 1522년 메흐메트 2세의 증손자 쉴레이만 1세 대에서 정복되었다.


베네치아와 평화 협정을 체결 한 이후 메흐메트 2세는 이탈리아 공국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로 하여금 이탈리아 남부 오트란토(Otranto)를 공격하게 했다.


1480년 7월 오트란토 해협에 상륙한 아흐메트 파샤는 이탈리아 남부의 브린디시와 타란토를 정복한 후
파죽지세로 이탈리아 내륙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25km 떨어진 훈카르차이리(Hünkârçayırı)에서 사망했고
오스만 제국의 이탈리아 원정도 중지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죽기 전 며칠 동안 예전부터 앓아오던 통풍으로 심하게 고통받았으며, 독살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말년에는 맏아들 바예지트가 항상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간의 관계가 매우 나빠졌다.
재위 말기로 갈수록 메흐메트 2세의 재정정책에 대해 국내 전반에 불만이 커졌다.


특히 종교재단과 지주 귀족에게 속해 있던 2만여 부락과 농장을 군사 봉토로 할당했을 때가 가장 심했다.
따라서 메흐메트 2세가 죽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은 술탄이 총애한 아들 젬을 버리고 바예지트를 즉위시켜
메흐메트 2세의 정책에 대한 반동을 시작했다.

루멜리 히사리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정부를 재조직했고 최초로 형법과 신민에 관한 법률들을 하나의 법전에 집대성하고
헌법을 또 하나의 정교한 법전으로 마련해서 이 두 법전을 모든 하위 법률의 핵심으로 삼았다.


메흐메트 2세의 극히 독재적인 성향에서 오스만 술탄의 전형이 생겨났다.
그는 자신의 포고령이나 법령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 극히 잔인하게 처벌해 당시 사람들조차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역대 술탄들 중 가장 편견 없고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그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과 그리스 학자들을 궁전으로 불러 모았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2세에게 정교회 신조를 쓰게 하고 그것을 오스만 투르크어로 번역하게 했으며
궁정 안에 그리스어와 라틴어 서적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젠틸레 벨리니(1429~1507)를 초청해 자신의 초상화(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를
그리고 궁전의 벽을 프레스코 화법으로 장식하게 했다.


그가 세운 장대한 모스크 주위에는 8개의 대학을 설립했는데,
이 대학들은 거의 1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 내에서 이슬람 과학의 수준 높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가끔 '울라마'(원로 이슬람 학자)를 모아 자신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신학 논쟁을 벌였다.
그의 치세 동안 수학, 천문학, 이슬람 신학은 어느 오스만 시대보다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메흐메트 2세 자신도 1권의 디완(오스만 고전문학의 전통적 문체로 쓴 시집)을 남겼으며,
무슬림 남성에게 존재하던 남색을 애호하여 인질로 있던 크리스트교국의 젊은 왕자나 귀족의 영애들을 사랑하였다.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ı)


보스포루스해협의 아시아 대륙에 지어진 요새이다.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재위 1389~1403)가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수비하기 위한 방어벽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하였다.


해협의 중간 지점, 600m폭의 좁은 병목구간에 위치하며, 약 7,000m² 부지에 축조되었다.
다섯 개의 망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층부에서 바라본 모습은 불규칙한 오각형 형태이다.
요새의 중앙에 있는 중심 타워는 25m이며 전체적으로 전통 오스만 제국의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너편의 유럽 대륙 쪽에 있는 루멜리 히사리와 함께
보스포루스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을 감시하고, 외부 침략에 대비하였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터키 문화부의 주도로 손상된 부분을 복원하였고,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지 않다.


[영상] Panorama 1453 History Museum


[영상] Istanbul 1453 Panorama Museum OFFICIAL HD



참조 ; https://cafe.naver.com/aqob/5773
http://harenstyle.com/221385549864
https://cafe.naver.com/gorekorea/48475
https://blog.naver.com/item35/220213994601
https://blog.naver.com/mi2591/140134331473
https://blog.naver.com/ylj1407/130105356672
https://blog.naver.com/choemhwa/221406700684
https://blog.naver.com/choemhwa/221408416362

https://blog.naver.com/wrinklecat/15725575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383&cid=40942&categoryId=4009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3678&cid=42864&categoryId=5085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457&cid=40942&categoryId=3470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96460&cid=51736&categoryId=5173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9496&cid=40942&categoryId=33084
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D%9D%90%EB%A9%94%ED%8A%B8_2%EC%84%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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