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성(石頭城)


강소성 남경시(南京市) 중산문(中山門) 밖 청량산(淸凉山). 석성(石城)이라고도 한다.

건안(建安) 16년(211) 건업(建業)으로 천도한 손권은 다음 해에 청량산에 있는 초(楚)나라 금릉읍(金陵邑) 옛터에 석두성을 쌓았다.


산을 등진 그 성은 둘레가 3km나 되었다.

성 남쪽에는 두 개, 동쪽에는 한 개의 문을 달았다.


그러나 서북쪽에는 대강(大江)과 가까이 접해 있어서 문을 달지 않았다.

석두성은 지세가 험요하여 도성을 보위하는 중요한 성곽이었기 때문에 동오의 수군 본부가 되었고

성안에는 병기와 군량을 저장하는 석두창(石頭倉) · 석두고(石頭庫) 등이 있었다.


성 위 가장 높은 곳에는 봉화대를 쌓았는데

동오 봉화의 총지휘부인 이 봉화에 한번 불을 붙이면 반나절 안에 온 장강 연안에 전달되었다.


석두성은 장강 최대의 항구여서 항상 1,000여 척의 배들이 정박했다.

280년 서진(西晉)의 대장 왕준의 전선이 석두성 아래 이르자, 동오의 손호가 투항했다.


후에 강의 물길이 10km가량 서쪽으로 이동되는 바람에 석두성은 군사적 가치를 상실해 폐기되고 말았다.

 현재는 높이 1m에서 17m나 되는 돌담들이 남아 있다.


청량산공원(淸凉山公園)으로 지정되었으며,

청량사(淸凉寺) · 숭정서원(崇正書院) · 소엽루(掃葉樓) 등 명 · 청대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석두성(石頭城) / 유우석(劉禹錫)


山圍故國周遭在(산위고국주조재)
산은 (삼국시대 오나라 이래) 옛 성을 감싸고 주변은 그대로인데
潮打空城寂莫回(조타공성적막회)
조수(양즈강 조수)는 빈(인기척 없는) 성을 때리고 적막하게 되돌아온다.

淮水東邊舊時月(회수동변구시월)
회수의 동쪽 강변에는 옛(옛날 그대로) 달이 떠오르고
夜深還過女牆來(야심환과여장래)
밤이 깊어지자 다시 낮은 담장을 넘어오는구나


故國 : 옛 서울. 金陵

周遭 : 순회함

女牆 : 얕은 울타리

'石頭城'은 삼국시대에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축성한 성으로서 남경성(南京城) 근방, 양즈강 강변에 있다.

이 시도 회고의 작품. 백락천(白樂天)은 이 시를 일컬어 "후대의 시인은 더 붓을 댈 데가 없다"고 격찬하였다.


劉禹錫(유우석, 772~842)


자는 몽득(夢得)이고 팽성(彭城, 江蘇省 徐州) 사람이다.

그는 정원(貞元) 9년에 유종원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유종원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정치개혁에 참가하였으나 왕숙문이 실각하자 좌천되었다.

후에 연주(連州)와 화주(和州)의 자사를 지냈고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까지 올랐다.


전기에는 유종원과 가까이 지냈고, 또 만년에는 낙야(洛陽)에서 백거이와 친하게 지내며 시작활동을 하였다.

그의 시는 풍격이 통속하면서도 청신하고 민가(民歌)의 정조(情調)와 언어를 잘 이용하였다.


 유우석이 활동했던 8세기 당대는 귀족정치의 절정의 시기였다.

유우석은 반대파의 배척으로 계속 지방으로 좌천되어 뜻을 펼치지 못하다가

연주(連州), 기주(夔州), 화주(和州) 자사를 거쳐 23년간에 걸친 귀양에서 풀려난다.


826년 55세 때 화주 자사를 끝으로 낙양에 가는 중 금릉(金陵)을 유람하고 나서 ‘금릉오제(金陵五題)’를 썼다.

유우석은 귀양지에서 시를 창작할 수 있는 많은 여가와 환경이 주어진 덕분에 풍자시와 산수시, 회고시를 많이 써냈다.


‘오의항(烏衣巷)’ 은 금릉의 화려했던 시절 귀족들이 모여 살던 오의항을 그리며

귀족 집에 깃들어 살던 제비조차도 귀족의 자취를 잃어 일반 민가에 날아들어 살고 있다고 읊고 있다.


오의항은 오나라 손권의 검은 옷을 입은 군인들이 주둔 했던 곳이라

동진시대 귀족들이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 자제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검은 옷을 의미하는 오의(烏衣)는 특수층의 자제임을 알리는 것이다. 항(巷)은 골목의 의미를 지닌다.




1975년 4월 23일 중국을 방문 중인 김일성이 등소평 등과 함께 석두성을 관람했다는 안내판이 있다.







봉황각(鳳凰閣)





봉황대(鳳凰臺) 봉황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서조(瑞鳥)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용의 몸, 기린의 날개, 물고기 꼬리 모양을 하고,

찬란한 5색 빛에 오음(五音)의 소리를 내는데 수컷이 봉(鳳)이요 암컷이 황(凰).


오동나무에 살면서 태평할 때에만 단물이 솟는다고 하는 샘 예천(醴川:甘泉)을 마시며

천년에 한번 열리는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다는...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금릉 봉황대에 올라 / 이백(李白)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옛날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았거늘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이제 봉황은 가고 대는 비어 강물만 흐른다.
吳宮花草埋幽俓(오궁화초매유경)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황폐한 오솔길에 묻혀 있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진나라 고관대작들도 오래된 무덤으로 남았네.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금릉 삼산은 푸른 하늘에 반 토막쯤만 드러내고
二水中分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   진회 두 물줄기는 백로주를 휘돌아 흐르는구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햇빛은 온통 뜬구름에 가리어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이 보이지 않으니 내마음이 슬프도다.


어구(語句)
金陵 : 지금의 南京(남경). 삼국시대 손권(孫權)이 오(吳)나라를 세우고 금릉을 처음 도읍으로 정했다.
鳳凰臺 : 남경에 있는 대(臺). 南朝宋(남조 송)의 王顗(왕의)란 사람이 봉황(鳳凰)이 떼를 지어 모인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대를 창건했다.
吳宮 : 삼국 시대 때의 오나라 孫權(손권)의 궁전.
幽徑 : 그윽한 오솔길.
晉代 : 晉 나라 시대(265~420). 서울이 洛陽(낙양)이었다가 東晉(동진) 때(317~420) 서울을 建業(건업) 곧 지금의 남경으로 옮겼음.
衣冠 : 옷과 갓. 예의바르게 옷차림을 한 公卿大夫, 貴人(공경대부, 귀인) 들.
古丘 : 오래된 언덕.
三山 : 금릉의 서남쪽에 세 봉우리가 잇달아 있는 산.
半落 : 반쯤 떨어짐. 구름에 산의 반이 가리어 있음.
二水 : 秦水(진수)와 淮水(회수). 秦淮. 江蘇省 江寧縣(강소성 강녕현)의 두 강으로 이 주변이 六朝(육조) 때 陳(진)의 도읍지였음.
白鷺洲 : 진수와 회수가 돌아 이룬 섬. 두 강은 중도에서 합류하다가 하류에서 갈라져 한 줄기는 성 안으로 들고

한 갈래는 성 밖을 돌아 흐르는데, 그 중간에 백로주 섬이 생겨났다고 함.
長安 : 옛 중국의 前漢(전한), 隋(수), 唐(당) 등의 서울. 지금의 陝西省 西安, 長安(섬서성 서안, 장안) 일대.

여기서는 현종 임금을 말함.


수련(首聯, 기起 1~2구)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다가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 봉황 떠나니 누대는 비어있고 강물만 흐른다


산문적 의미는, “봉황대 위에는 그 옛날 봉황새가 날아와 놀았다.

그런데 지금은 봉황새는 날아가고 봉황대는 비어 있고 장강의 물만 유유히 흐르고 있다.”이다.


여기서는, 만물(萬物)이 유전(流轉)함과 역사(歷史)의 흘러감을 옛날과 지금의 상황을 대조(對照)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릉 봉황산 위에 지은 누대에 봉황새들이 날아와 놀았다.


봉황새는 상서로움을 전한다는 전설의 새로서, 이는 흔히 왕조가 흥성(興盛)할 것임을 상징한다.

즉 봉황대를 지은 송나라가 자신의 왕조의 흥성을 기원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현실은 봉황새는 떠나가고 봉황대에는 오갔을 수많은 당대의 귀족들은 다 죽어 없어졌다.

그러나 강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유유히 흘러내린다.


상구(上句)에서의 기대와 환희, 낙관과 축복이 하구(下句)에서는 실망과 비애, 비관과 애수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즉 상구는 하구의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감개(感慨)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함련(頷聯, 승承 3~4구)
吳宮花草埋幽俓(오궁화초매유경) :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황폐한 길에 묻혀 있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 잔나라 고관들은 낡은 무덤 다 되었네


산문적 의미는, “먼 과거를 생각해보면, 화려했던 오나라 궁궐(吳宮), 그 궁궐 속의 꽃과 풀(花草) 같았던 궁녀들은

이미 한 줌 흙이 되어 잡풀 우거진 작은 오솔길(幽俓)에 묻혀버려(埋)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진나라 시대(晉代)의 화려한 의상(衣冠)을 입었던 부자(富者)와 귀족(貴族)들도

이제는 모두 다 죽어서 오래된 무덤(古丘)의 주인 신세가 되고(成) 말았다. ”이다.


여기서는, 봉황대와 관련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회고하여 수련의 시상을 확대하고 있다.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오나라 궁궐의 “아름다운 궁녀”를 비유한다.


그윽한 좁은 길(幽俓)은 횡폐화 된 궁궐 터의 “풀에 묻혀버린 좁은 길”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이 선망한 화려함이 지금은 모두 풀섶 길에 묻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진대의관(晉代衣冠)은 오궁화초(吳宮花草)와 대를 이룬다.

따라서 진대의관은 “진나라 시대의 고관”을 비유한다.


고구(古丘)는 오래된 무덤이라는 뜻으로, 작가의 시대에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무덤이라는 뜻이다.

결국, 인간이 선망한 공명(功名)도 지금은 모두 죽어 헛되이 사라지고 아무 소용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상구에서는 궁녀, 하구에서는 고관들이 모두 죽어 없어진 사실을 들어 인생살이의 무상함을 더욱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고 있다.


경련(頸聯, 전轉 5~6구)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 삼산의 봉우리 푸른 산 밖으로 반쯤 솟아있고
二水中分自鷺洲(이수중분자로주) : 두 강물은 나뉘어 백로주로 흐른다


산문적 의미는, “이제 이러한 시름에서 벗어나기나고 싶어 먼 곳을 보니, 삼산이 푸른 하늘 밖으로 솟아있다.

그런데 그 형상이 너무나 높고 또 아득히 멀리 있어, 산 아래로 안개가 자욱하여 보이지 않고 윗 부분만 보인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기둥이 떨어진 듯 솟아 있다.

그리고 산 아래로는 두 물줄기가 노주에서 가운데로 나누어져 흐르고 있다.”이다.


여기서는, 봉황대를 둘러싼 보다 큰 자연 배경을 묘사하고 있다.

즉 삼산과 이수를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웅대하고 변하지 않고 영원한 산수자연과

왜소하고 변하는 인간의 군상을 은연중 대비시키고 있다.


삼산(三山)은 남경 서쪽에 잇달은 세 봉우리를 뜻한다.

반락(半落)은 산의 모습이 아래 절반은 보이지 않고, 윗 절반만 보이는 상황을 뜻한다.


아래 절반은 연무에 싸여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청천외(靑天外)는 산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드러낸 표현이다.

여기서는 삼산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수(二水)는 진수(秦水)와 회수(淮水)를 뜻한다.

백로주(白鷺洲)는 이수의 한 갈래가 이룬 삼각섬이다.


중분(中分)은 가운데서 나누어진다는 뜻이다.

봉황대를 둘러싼 이수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미련(尾聯, 결結 7~8구 )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 하늘에 떠도는 구름 해를 가리어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 서울 장안 보이지 않으니 마음에 근심 이네


산문적 의미는, “모두가 뜬 구름이 밝은 해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지만,

장안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수심에 잠기게 하는구나.”이다.


여기서는, 떠도는 구름이 해를 가리어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 현상을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어 자신이 서울로 불려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면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상구(上句)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은

하구(下句) 長安不見(장안이 보이지 않은)의 까닭을 설명하는 시구이다.


총위(總爲)는 “모두-때문이다”의 뜻이다.

부운(浮雲)은 “뜬 구름”이며, 하구(下句)의 의미와 연관시키면 “조정의 간신”을 비유한다.


폐일(蔽日)은 “해를 가리다”이며, 하구(下句)의 의미와 연관시켜보면 “일(日)”은 임금을 뜻한다.

부운능폐일(浮雲能蔽日)은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다.”는 뜻이 된다.


長安不見(장안불견)은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 표면적 의미와

“서울로 다시 불리워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면적 의미를 갖는다.


使人愁(사인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스럽게 한다.

” 여기서 사람은 내면적으로 “작가 자신”을 뜻한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권력의 지전투구에 쫓겨난 작가가

봉황대에서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죽어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그러한 변화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유구하기만 하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에도, 지금의 장안 권력자들은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간신배에 의해 작자 자신과 같은 억울한 희생자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봉황대의 전설에 얽힌 이야기를 회고하고 현재의 눈앞의 자연을 묘사함으로써

<부질없는 권력의 역사가 되풀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자신은 억울한 희생자라는 작가의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원망과 슬픔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되어 있다.

이백은 율시를 잘 짓지 않았으나 이 작품만큼은 당대의 율시 중에서 걸작 중에 걸작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시를 지은 동기와 유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내려 오고 있다.
이백이 당 현종(玄宗) 임금 때 조정에서 버림을 받아 武昌(무창)의 黃鶴樓(황학루)에 가서 유랑하던 중

창강(长江, 장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시로 쓰고자 하였으나,

최호(崔颢 704~754)의 시 <황학루(黃鶴樓)>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 시에 그만 감탄한 나머지

최호(崔颢)의 경지와 견줄만한 시를 지을 수 없음을 탄식하며 붓을 씻어 버리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그 후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市 남경시)의 봉황대에서 칠언율시로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를 지어

최호의 시‘黃鶴樓'와 비견토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두 시는 착상(着想)이 비슷하고 운자(韻字)도 같아 이 시 또한 명작으로 꼽힌다.
최호 시의 끝구가 ‘연파강상사인수(煙波江上使人愁 안개 낀 장강 언덕에서 시름겨워 하노라)’이니

이 시의 끝구‘장안불견사인수(長安不見使人愁 장안이 보이지 않아 나는 슬프도다)’와 닮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경관을 풍류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사회를 개탄했음이 최호의 시와 다르다고들 평하니,

尾聯(미련, 結 7~8구)에서 “뜬 구름이 해를 가리듯 간사한 신하들이 천자의 총명을 가려,

비록 객지를 떠도는 처지이기는 하나 현종과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몸”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 그것이다.


한편 다른 설이 있다.

이백이 말년에 유배되어 야량(夜郞)에 가던 도중 풀려나와 동남부를 유랑할 때 쓴 시라고 보는 설이다.


또 다른 설로는 말년의 작품이 아니고 쓰인 시기를 중년으로 보아

장안에서 간신배의 모함에 걸려 현종에게 쫓겨나 강호 지역을 유랑하면서 금릉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봉황대에 올라 당시의 심정을 읊은 것으로 보는 설이다.


이 시는 어지러운 국가의 장래를 근심하는 작품으로 나라를 염려하는 우국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 옛날 오나라 진나라 화려했던 궁궐도 잡풀에 묻히고 황폐한 먼지에 싸여 잊혀져 가는 게 인간 세상이라지만

강물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흐르기만 한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라고 했던가.

세상 만사가 원래 그런 것이라 달관하면 그만인가 싶더니 끝내 그는 권력 다툼에 시달리다

산천을 떠돌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 모두가 저 간신배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 탓이라 한탄한다.


세상 일이란게 본디 다 그런것을...

하지만 그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어깨 위에 그림자처럼 짙게 얹혀 있다.


이 시에서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二水分中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란 구절은 유명하다.

보통시인 같으면 삼산은 하늘 끝에 반쯤 솟아 있고 라고 표현했을 법한데

이백은 반쯤 떨어져있다고 표현하는 '반락'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위 구절이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나라의 민요중에 '양산도'라는 노래에서는 이 시를 본따

"삼산은 반락에 모란봉이요 - 이수분중하니 능라도라....."하여 靑天外 대신에 평양의 모란봉을 집어넣고

白鷺洲 대신에 대동강변 능라도를 넣어서 작사해 불렀으니

이백이 지은 이 시가 우리 백성에게 끼친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호북성 무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에 올라가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면서도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고심하다가 누각에 씌어 있는 최호(崔顥)의 시 <황학루(黃鶴樓)>를 보고

자기는 그만한 시를 지을 자신이 없다고 한탄하며 붓을 놓고 만 일은

두고두고 천재 시인 이백(李白, 701-762)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언젠가는 최호의 시에 버금가는 멋진 시를 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뒤 이백은 황제에게 글을 지어 바치는 관직인 한림공봉(翰林供奉)에 임명되어

약 3년 동안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西安)에 머물다가 천보 3년(744)에 그 자리에서 쫓겨나 도성을 떠났다.


이백이 조정에서 쫓겨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환관(宦官) 고력사(高力士)의 모함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이백은 당시 권력을 전횡하던 환관세력과 외척세력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관의 우두머리인 고력사의 질시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저녁에 현종이 양귀비를 데리고 흥경궁(興慶宮) 안에 있는 침향정(沈香亭)으로 행차했다.

당나라 태종이 신라 선덕여왕에게 모란 그림과 모란씨를 보냈다는 일화도 있듯이

당시 당나라 조정에서는 모란을 매우 숭상한지라 침향정 주위에도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란꽃을 보고 현종이 이백을 불러 시를 짓게 하라고 했다.

그때 이백은 이미 퇴청하여 장안의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었다.


끌려가다시피 침향정으로 간 그는 얼굴에 찬물 세례를 받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좀 차렸다.

그리고 당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고력사의 부축을 받으며 현종 앞으로 나아가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던 양귀비가 먹을 갈아 받쳐 들고 있는 가운데

일필휘지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를 지었다.


이 시에서 이백은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에 비유해 가며

양귀비의 미모를 극구 칭송했는데 평소 이백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던 고력사가

양귀비를 꾀어 함께 이백을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조비연은 본래 기녀 출신으로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얼마 동안

장신궁(長信宮)에서 태후를 모시는 궁녀로 있다가 결국 평민의 신세로 전락하여 여기저기 떠돌다 죽었기 때문에

양귀비를 조비연에 비유한 것은 이백이 넌지시 양귀비를 모욕한 것이라는 것이 고력사가 양귀비를 꾄 논리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장안을 떠난 이백은 어느 날 금릉(金陵, 지금의 강소성 南京)에 있는 봉황대에 올라갔다.

봉황대는 옛날에 봉황이 내려와서 노닌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전해지는 누대였다.


눈앞에 갖가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평선 부근에 있는 삼산은 마치 대지 바깥으로 미끄러져 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지구에 매달려 있고

먼 길을 달려온 진회하(秦淮河)는 백로주를 사이에 두고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삼국시대에 오나라의 황궁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은 온통 잡초에 뒤덮여 있고,

동진 때에 세도를 떨치던 고관대작들은 덩그런 무덤만 하나씩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눈을 들어 장안이 있는 서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황학루에서 있었던 옛날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붓을 들었다.


이처럼 최호와의 경쟁의식 속에 지어진 이 시는, 봉황대 일대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나아가 조정이 충신을 포용하지 못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하고 자신의 깊은 우국충정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시원스러운 풍경과 개인의 향수를 노래하는 데에서 그친 최호의 시를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관점도 있고 최호의 시가 더 낫다는 관점도 있다.


어쨌거나 이백은 이 시 덕분에 남경 사람들의 추앙을 많이 받고 있다.

백로주공원 정문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는 이 시 제5·6구가 씌어 있으며,

백로주공원에서 평강부로(平康府路)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간 곳의 진회하에 놓여 있는 평강교 밑에는

이백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뒤의 벽에 초서체로 쓴 이 시가 새겨져 있다.


백로주공원 안에 있는 작은 다리들 가운데 ‘이수교’라는 다리가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시의 성가를 말해 주는 예증이다.



봉황대(鳳凰臺)에서 바라본 봉황각


봉황대 옆 진회하(秦淮河)


황학루(黄鹤楼)  ㅡ 검색 자료


호북성의 성도(省都)인 무한(武漢)은 장강(長江) 남쪽의 무창(武昌) 지역과

장강 북쪽의 한양(漢陽)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 도시다.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강의 남쪽, 정확히 말하면 무한장강대교의 남쪽에

황학산 · 황곡산(黃鵠山) · 사산(蛇山) 등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이 산 꼭대기에 가면 황학루라는 누각이 하나 있다.


서기 223년에 창건되어 근 1,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누각은 중국 4대 누각의 하나로 꼽힐 뿐만 아니라

천하강산제일루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기도 한데 이 누각의 창건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신씨(辛氏)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은 우람한 사나이가 하나 와서 술을 한 잔 달라고 했다.


차림새로 보아 술값 낼 돈이 없어 보였지만 두말없이 한 잔 주었다.

그 뒤로 사나이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공짜로 술을 마셨다.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까?

사나이가 그 동안에 진 빚을 갚겠다며 귤을 하나 달라고 했다.


그는 노란 귤껍질로 벽에다 학을 한 마리 그렸다. 황학이었다.

그림이 참으로 정교하여 술집에 있던 손님들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학이 박수 소리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 뒤로 그 부근에 사는 사람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황학의 춤을 보기 위해

이 술집에 들르는 바람에 신씨는 금방 부자가 되었다.


10년쯤 지난 뒤에 그 동안 어딘가로 사라졌던 사나이가 갑자기 돌아와

벽에 있는 학을 불러내어서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신씨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누각을 세우고 황학루라고 했다.

최호의 이 시는 황학루에 올라가 일망무제로 펼쳐진 사방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문득 고향생각이 간절해져서 지은 것이다.


남송 시인 엄우(嚴羽)가 “당나라 사람들의 칠언율시는 당연히 최호(崔颢)의 <황학루>를 최고로 쳐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 시는 천재 시인 이백(李白)마저도 감탄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백이 황학루에 올라 눈앞에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어 보려는데

좀처럼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고개를 들어보니 최호의 이 시가 누각에 씌어 있었다.

이백은 이 시를 보고 나서 “눈앞의 경치를 표현하지 못하는데, 최호가 시를 지어 누각에 써 놓았네”라고 탄복하면서

시 짓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황학루가 있는 황학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내려간 곳에 각필정(擱筆亭)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으니

 ‘붓을 놓은 정자’라는 뜻의 이 정자 이름이 바로 이와 같은 일화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황학루 안에 진열되어 있는 역대 황학루의 모형을 보면 당나라 때의 황학루는 2층짜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5층이나 되는 고층 누각인 데다 안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오르내리기에는 편리하지만 예스러운 맛이 없어서 많이 아쉽다.


다만 누각 앞에 황학 두 마리를 조각한 황동상을 세우고 황학귀래상(黃鶴歸來像)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이 시의 세 번째 구절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한다.

누각의 고층화로 인해 잃어버린 운치를 다소나마 만회해 주는 셈이다. (이상 검색 자료)


황학루(黄鹤楼) / 최호(崔颢 704~754)


昔人已乘黃鶴去 (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나버려
此地空餘黃鶴樓 (차지공여황학루) 이 땅에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 (황학일거불부반) 황학은 한 번 떠나 다시 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 (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 년 그대로 유유히 떠도네.
晴川歷歷漢陽樹 (청천력력한양수) 맑은 내 건너 한양의 나무숲 뚜렷하고
芳草萋萋鸚鵡洲 (방초처처앵무주) 꽃다운 풀 앵무주에 더부룩 자랐구나.
日暮鄕關何處是 (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디멘고
煙波江上使人愁 (연파강상사인수) 안개 낀 장강 언덕에서 시름겨워 하노라.


어구(語句)
黃鶴樓 : 호북성 武漢市(무한시)에 있는 누각. 양자강과 南湖(남호)에 임했고 蜀(촉)의 費褘(비위)가 신선이 되어 황학을 타고

여기 와 쉬었다 하여 이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하고〈寰宇記〉, 辛氏(신씨) 술집에 온 사람이 술값 대신 벽에 누런 학을 그렸는데

후에 그 그림 학이 날아가 버려 신씨가 누각을 세워 항학루라 했다고도 하며〈武昌誌〉,

仙人(선인) 子安(자안)이 황학을 타고 여기를 지났다고도 함〈齊諧志>
昔人 : 옛날 사람. 古人(고인).
空 : 헛되이. 부질없이.
悠悠 : 여유있고 한가함.
歷歷 : 하나하나 그 자취가 뚜렷함.
漢陽 : 무한시 서쪽에 있던 지명. 漢陽縣(한양현)이었고 晴川閣(청천각)이 있다고 함.
萋萋 : 초목이 우거져 무성함.
鸚鵡洲 : 무한시의 남쪽 강 가운데 있는 모래 섬. 後漢(후한)의 江夏太守 黃祖(강하태수 황조)가 禰衡(이형)을 죽인 곳으로,

이형은 문인으로 단숨에 글을 잘 짓는 재주로 독수리에 비기기도 했고, 曹操(조조)를 모욕하다가 쫓겨나 황조에게 의지해

 ‘鸚鵡賦(앵무부)’를 지어 칭찬을 받기도 했으나 황조의 비위를 거슬려 피살당하니,

앵무주는 그의 ‘앵무부’에서 따 이름 붙였다고 하는데, 앵무새를 바친 사람이 있어 이름 삼았다는 異說(이설)도 있음.
鄕關 : 고향.
煙波 : 아지랑이나 안개가 낀 水面(수면).
江上 : ① 강가의 언덕. ② 강물 위. 여기서는 ①임.
使 : 하여금.


감상(鑑賞)


황학루(黄鹤楼)는 북송 시대부터 20 세기 50년대에 이르기까지 도교의 명산성지로 이용되었으며

최호(崔颢, 704~754), 이백(李白) 뿐만 아니라, 역대의 저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 가도(贾岛, 779~843),

육유(陆游, 1125~1210), 양신(杨慎, 1488~1559), 장거정(张居正) 등의 작품으로 인해 천하절경으로 알려져 왔다.


이 시는 당시(唐詩)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운데 최고작으로 평가받을 뿐만 아니라,

인구(人口)에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작품이다.


일설에 따르면 천보(天宝) 3년에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황학루(黄鹤楼)에 올라 즐기고 있다가

최호(崔颢)의 시를 발견하고 찬탄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창강(长江, 장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시로 쓰고자 하였으나 최호(崔颢)의 경지를 뛰어넘지 못함을 탄식하며

붓을 씻어 버리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그 후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市)의 봉황대로 가서 칠언율시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를 지으니,

착상과 운자가 최호의 황학루와 같아 이 또한 명작으로 이름이 높다. 


이 시 황학루(黄鹤楼)에서 수련(首聯, 기起 1~2구)은 전설상의 선인(仙人)에 대한 동경의 염(念)을 담았고,

함련(頷聯, 승承 3~4구)에서는 그 동경이 헛된 것임을 흰구름에 의탁해 시상을 이었는데,

이 두 연은 회고(懷古)의 정을 담았다 하겠다.


경련(頸聯, 전轉 5~6구)은 눈앞에 펼쳐지는 뛰어난 경치를 그린 서경(敍景, 사경寫景)으로 멋지게 시상을 전환했다.

물론 함련과 경련은 시작법(詩作法)대로 대구(對句)로 구성되었다.

미련(尾聯, 결結 7~8구)은 나그네의 처지가 된 자신의 시름과 망향(望鄕)의 정을 읊어 시를 마무리했다.







1937년 12월 13일, 중화민국 수도 난징시를 점령한 일본군
남경성 위에 일장기를 세우고 남경입성식을 거행하는 장면 (일본 아사히신문 선전홍보 영상)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한다면, 그 연대기는 길고도 참혹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질러진 난징대학살에 
비견될 만한 정도와 규모를 지닌 사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리스 장, <난징의 강간> 중에서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남경 대학살은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어
여기서는 남경 전투에 대해서만 알아본다.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되었는데,
여기서 일본군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중국국민당군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장제스(蔣介石)의 엘리트 직계군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던데다가 여기서 일본군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1937년 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예정도 없이 곧바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향해 진격을 한다.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는 시민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난징을 포기하고
무방비 도시로 남겨둔채 충칭(중경)을 임시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하려고 하였으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을 지키고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성 안에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다.


1937년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중국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까닭은
흐트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되지 못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 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 속에 빠져 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했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 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 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한다.

 



해자 역할을 하는 진회하(秦淮河)와 남경성, 그리고 주변 남경 시가지







▲ 중화민국 장군 탕셩즈. 난징 전투 당시 중국군 지휘관이었다.


탕셩즈 장군은 난징을 지키겠다고 큰소리 친후 제일 먼저 도망을 가서

난징 대학살을 일으키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군들은 계절이 겨울에 들어섰는데도 불구하고 군복을 여름 하복 복장을 하고 있었고
병력 또한 중국군이 많았으므로 그가 수십 만의 중국군과 함께 적극적으로 항전을 했더라면
전쟁의 양상은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 아사카 야스히코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


일본 국왕의 사촌인 황족으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
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그가 난징 대학살의 최고 책임자 였으며 실제로 1937년 12월 13일 학살 명령서에 최종 사인을 했지만 ,
종전 후 전범 재판에서 왕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미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는 아무런 혐의도 받지 않은채 석방되고 대신 마쓰이 이와네가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되었다.


▲ 마쓰이 이와네 (187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3일)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
그러나 난징이 함락될 당시에는 병으로 전선에 있지 않았다.


그는 12월 7일 병가를 내고 전선을 이탈 하였으며
아사카 야스히코가 대학살을 명령한 12월 13일 이후인 12월17일 요양 후 전선으로 가서
사실 남경 대학살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미국 정부에 의해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 다니 히사오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난징 함락 직후 항복한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상하이 방면에서 남경으로 이동하는 일본군




남경 부근에서 공격 명령을 기다리며 신문을 읽고 있는 일본군


일본군의 공격 명령



방어하는 중국군



상하이에서 퇴각한 부대도 남경 방어전에 합류



 




방어 준비중인 중국군








남경에 입성하는 일본군 전투 부대






남경을 함락한 일본군






일본군 환영행사에 설탕및 담배를 받고 동원중인 중국인들


일본군이 배포한 남경 주민들의 환영행사


 




일본군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


일본군 수뇌부



남경의 국민당 본부를 점령한 후 일본군 본부를 설치하고 들어가는 장면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 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된 기사이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함께 총살되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아직까지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소송 중이다.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의 총살 후 장면








적루유지(镝楼遗址)

"본래는 한 채의 세 개 처마로 된 헐산식 적루가 있어 요망대로 사용하였는데 청조 가경년에 무너져 내려

강령현에서 다시 재건할 때 규모를 축소하였고, 1937년 겨울 일본군이 남경을 침공할 때 파괴되었다."



임시로 복원한 성루(城楼)의 모습


중국에서 꼭 봐야 할 4대 역사 명승지로 만리장성과 북경의 자금성, 서안의 병마용,

그리고 남경의 중화문을 꼽을 정도로 중화문은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南京明城墙全景圖(남경명성벽전경도)


1366년 주원장은 지리조건이 좋은 남경에 마음을 두고 옛 성을 확장하고 궁전을 지었다.

궁성(宮城), 황성(皇城), 내성(內城), 외곽(外郭)의 4중 성벽이 건설되었으며,

이것들을 총칭하여 남경성으로 불렀다.


하지만 현재는 내성만을 가리켜 남경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성의 성벽은 동쪽으로는 종산(鍾山)에 닿아있고, 서쪽으로는 석두성(石頭城),

남쪽으로는 진회하(秦淮河), 북쪽으로는 후호(後湖)에 걸친 지역에 건설되었다.


외곽성까지 모두 완공된 건 1393년으로,

처음 궁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때(1366)로부터 무려 28년이 걸렸다.


명나라 성벽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까?

“두 사람이 각각 말을 타고서 성벽의 반대 방향으로 하루 종일 가야만 만날 수 있다.”


16세기 중엽에 난징에 세 번이나 왔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마테오 리치 중국 찰기(札記)>에 나오는 말이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명나라 성벽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외곽성이 60㎞, 경성이 총 35.267km로 도시에 건설된 고대의 성벽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성벽이며,

중국에서도 보존상태가 좋은, 얼마 남지 않은 성벽이다.


하지만 일부 구간이 끊어진 상태이며, 현존하면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구간이 23.399km에 불과하여

서안성(西安城)이나 개봉성(開封城)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고 있다.

남경에서는 가장 거대한 고대 건축물이다.  


내성은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형태를 하고 있다.

벽돌을 쌓고, 그 속을 흙으로 채워 만들었다.


내성은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성들과는 달리 방(方)형으로 지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의 성으로서는 혁신적인 모습을 한 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성은 남쪽에 정양문을 정문으로 3곳, 서쪽에 5곳, 동쪽에 1곳, 북쪽에 4곳, 총 13곳의 성문이 있었다.

성문의 이름은 각각 정양문(正陽門 : 한때 광화문이라 불렸으나 없어짐), 통제문(通濟門),

취보문(聚寶門, 중화민국시기 中華門으로 개명), 삼산문(三山門, 속칭 수서문水西門),

석성문(石城門, 속칭 한서문旱西門 또는 한서문漢西門), 청량문(清涼門), 정회문(定淮門),

의봉문(儀鳳門,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 종부문(鍾阜門), 금천문(金川門), 신책문(神策門),

태평문(太平門), 조양문(朝陽門, 중화민국 때 중산문中山門)으로,

이들 성문과 외곽의 성문들을 합하여 “내십삼, 외십팔(裏十三,外十八)”이라 하였다.


13개의 성문 위에는 성루(城樓)를 지었고,

중요한 성문에는 옹성(甕城)을 지어 공격에 대비했다.


그 중 취보문(聚寶門), 통제문(通濟門), 삼산문(三山門)은 수륙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매 문마다 모두 옹성을 건설하여 방어에 힘썼다.


성벽위에는 군사들이 머무르며 보초를 섰던 와포방(窩鋪房)이 200곳 있었으며,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13,000여 개 있었다.


와포방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성가퀴는 일부만 남아 있다.

명나라 초기에 남경성 내외에 주둔했던 군사는 약 20만 명이었다.


황궁과 강을 지켰던 일부의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군사가 성내의 서북지역에 주둔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대규모의 병영과 식량창고, 병기창이 있는 일종의 군사구역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3개의 성문 중에서 사연 많기로는 신책문(神策門)과 태평문(太平門)을 능가할 게 없을 것이다.

먼저 신책문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남명의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기치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난징을 공격했을 때

난징을 지키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1만여 명에 불과했다.


청나라의 양강 총독은 신책문을 굳게 닫고 지연작전을 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둔다.


순치제는 이를 기념해서 신책문을 ‘득승문(得勝門)’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난징이 태평천국의 수도였을 때, 청나라 군대가 내내 공격의 목표로 삼았던 곳도 바로 신책문이다.


결국 신책문도 태평천국도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신책문의 ‘화평문(和平門)’이라는 글씨는, 민국시기에 화평문으로 개칭되면서 새겨진 것이다.


당시 화평문 안에는 아시아 석유회사(Asiatic Petroleum Company)의 유류창고가 들어섰다.

이후 일본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도 이곳에 유류창고를 두었다.


화평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내내 유류창고의 기능을 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화평문이 군에서 인민정부로 넘어오고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01년,

비로소 평화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태평문이야말로 그 이름과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성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최후 보루였던 태평문과 주변 성벽이 20여 장(丈)이나 무너져 내렸다.


태평천국 진압에 나선 상군(湘軍)이 성벽 아래 매설한 600여 포대의 화약이 폭발한 것이다.

조열문(趙烈文)의 <능정거사(能靜居士) 일기>에서는 난징이 함락된 이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이 함락된 날 전군이 성을 약탈했다.”

“사흘 동안 10여만명을 죽였고 진회하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마흔 이하로는 한 명도 살아남은 이가 없고 노인은 부상당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칼에 십여 번 혹은 수십 번을 찔렸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으로 멀리 퍼졌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 태평문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1937년 11월 상하이를 함락한 일본군은 난징을 향했다.


12월 8일, 장제스는 비행기로 난징을 떠났다.

난징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던 탕성즈(唐生智) 역시 퇴각 명령을 받고서 12월 12일에 배를 타고 난징에서 빠져나갔다.


이튿날, 태평문 부근에서 무려 1300여명이 학살된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과 시민을 이곳에 모아 놓고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쳤다.


이들의 발아래는 일본군이 매설해 둔 지뢰가 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철조망 안에 갇힌 이들은 굉음과 함께 폭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일본군은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70년이 지난 2007년 12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었던 태평문 근방에는

이날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날의 학살에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을 증언한 이는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일본 병사다.

인터뷰 당시(1999) 그는 이미 여든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성벽의 역할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통행상의 필요에 따라 성문의 개수는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1908년 초장문(草場門)이 생겼고, 1909년에는 지금의 현무문(玄武門)인 풍윤문(豐潤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3년 지금의 읍강문(挹江門)에 해당하는 해릉문(海陵門)이 생겼으며,

1929년 무정문(武定門), 1931년 한중문(漢中門), 중앙문(中央門), 소북문(小北門),

1934년 신민문(新民門), 1935년 우화문(雨花門) 등이 건설되었다.


1930년대 이미 남경성의 성문은 24곳에 달했으며

 1952년에는 다시 해방문(解放門)이 생겨났고, 1992년에는 집경문(集慶門)이 추가되었다. 


내성은 1950년대까지도 대체로 완전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어 지금은 원형의 60%정도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내성의 최초 13개 성문 중에서 취보문, 석성문, 신책문, 청량문만이 명나라 때 건설된 성문이며,

나머지 것들은 전쟁에 파괴되어 나중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신책문도 성문자체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성루는 파괴되어 재건하였다.
난징성은 전체적으로 "ㅏ" 자 모양이다.


성의 서북쪽(난징성의 최북단)은 양쯔강에 면해 있고,

동북쪽은 지금의 중산릉과 명효릉이 위치한 자금산에 닿아있다.


자금산 서쪽에는 인공 호수 현무호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월아호(月牙湖)에 이어 호성하(護城河)가 성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 역할을 했다.


남쪽부터 서쪽에 이르는 긴 구역은 친후와이허가 해자 기능을 담당했다.

진짜 강줄기인 친후와이허는 난징성의 남쪽으로부터 서북쪽을 향하여 흐르다 양쯔강에 합류한다.


난징성의 최남단부터 양쯔강 합류 지점 중간쯤에

친후와이허를 바라보며 한중문(漢中門)과 청량문(淸凉門)이 있다.

진회하(秦淮河)


옛날 해자 역할을 하던 강 위로 다리가 놓여있다.

진회하는 총 길이 110 Km되는 남경의 주요 강으로 시 동남쪽에서 시내 방향으로 흘러든다.


중화문은 외진회하(外秦淮河)와 내진회하(內秦淮河)의 사이에 있다.

진회하의 옛 이름은 "회수(淮水)"였고, "용장포(龍藏浦)"라고도 했다.


원류는  동쪽으로 구용현(句容縣) 보화산(寶華山), 남쪽으로 율수현(溧水縣) 동려산(東廬山)이다.

두 물줄기가 강녕현(江寧縣) 방산태(方山埭)에서 만나서 남경성 동쪽 수문으로 흘러 들어와 성을 관통하여

서쪽 수문으로 빠져나가 장강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전체 길이는 약 110Km이다.


성밖의 물줄기는 외진회(外秦淮)라고 하고,

내 물줄기는 내진회(內秦淮)라고 하는데, 내진회의 길이는 약 5Km이다.


전해지기로 진시황제가 이곳으로 순행 왔을 때 방산(方山)을 파고 장롱(長隴)을 잘라

금릉(현재의 남경)의 왕기(王氣)를 없앴던 연고로 진회하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의봉문(儀鳳門) 남경성 북쪽에 있는 문.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으로 바뀜






마도(馬道)
"성으로 오르는 비스듬한 말길은 전쟁 당시에 군수물자를 성에 나르는 쾌속도였으며

장군들이 직접 말채찍을 휘두르며 성 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마도(馬道)


위에서 내려다 본 마도(馬道)


위에서 내려다 본 마도(馬道)



성문 위의 넓은 광장. 성문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성문 위에 비치된 뢰석(礌石)


뢰석(礌石)은 돌을 쪼아 만든 볼링공 형태의 병기이다.

명나라 시기의 주요 방성(防城)도구로써 성벽을 오르는 적병에게 던져서 상해를 입혔다.

가장 큰 것은 무게가 200근에 달한다.



뢰석(礌石)을 올려놓고 멀리 던져 공격하던 기구



明代大炮(명대대포) 당시에 공격 무기로 사용하던 대포



명대 중형 공격 전차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발사하는 공격형 무기





성벽(城墙) 건설에 쓰인 벽돌의 책임실명제


난징 성벽을 쌓는 데 쓰인 벽돌에는 관리부터 인부에 이르기까지

해당 벽돌의 제조와 관련된 이들의 이름이 선명히 찍혀 있다.


검사에 불합격하면 관련자는 처벌을 받았다. 사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벽의 벽돌조차 책임자를 찾아 문책했던 엄격한 ‘품질보증제’ 덕분에 난징의 성벽이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성벽은 대부분 이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벽돌을 절약하면서도

충분히 강한 성벽을 건설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타구는 총 13,616곳이 있었고, 성루에는 병사를 숨겨두었던 장병동(藏兵洞)이 200곳 있었다.

장병동은 성루에 마련된 터널식 공간으로 평소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전시에는 병사들을 숨겨두는 장소나 숙소로 이용되었다. 






제조지역, 제작자와 품질관리 관원, 그리고 감독자의 성명이 표기된 벽돌


벽돌의 탁본



南京明代城墙(남경명대성벽)


남경성(南京城) 주위를 해자가 감싸고 있다.

동쪽 주황색으로 표시된 곳이 황제가 살던 궁이고, 중화문(中華門)은 남쪽 큰 탑 앞에 있는 문이다.


북동쪽으로 현무호와 자금산이 보인다.

서쪽 성 안의 산이 청량산이다.


주원장이 어렸을 적 심각한 가뭄이 들었다.

이어진 메뚜기 피해와 돌림병. 반년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형까지 모두 잃은 이 가련한 소년,


관을 마련할 돈조차 없어 낡은 옷으로 유해를 수습해 이웃집 땅에다 안장했다.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고 갈 곳은 절밖에 없었다.


얼마 뒤 절에서도 식량이 동났다. 소

년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탁발승 노릇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가 다시 절로 돌아온 게 1348년.

스무 해가 지난 1368년, 그는 난징에서 제위에 올라 명나라 건국을 선포한다.


그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바로 주원장(1328~1398)이다.

주중팔은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 곽자흥(郭子興)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주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朱)는 주살의 주(誅)를 의미하고, 원(元)은 원나라를 의미하며,

옥으로 만든 홀(笏)인 장(璋)은 인재를 의미한다.


주원장은 그 이름처럼 ‘원나라를 멸망시킬 인재’였다.

그는 원나라 군대를 거듭 격파했다. 곽자흥은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1


355년에 곽자흥이 병사하자 그 뒤를 이은 주원장은 강남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한족의 부흥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원나라와 대적하는 지도자로 부상한 주원장,


그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재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였다.

주원장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은 것은 책사 풍국용(馮國用)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주승(朱升)이라는 책사는 “성벽을 높이 쌓고, 식량을 많이 저장하고, 왕위에는 천천히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주원장은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다.


라이벌이었던 또 다른 반란군의 지도자 진우량이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장사성이 오왕(吳王)을 자칭할 때도,

주원장은 왕위에 오르는 데 급급해 하지 않았다.


그는 소명왕(小明王) 한림아를 계속 받들면서 자신의 실력을 키웠다.

1366년, 홍건군의 기반인 백련교의 지도자 한림아는 난징으로 가던 길에 배가 뒤집혀 강물에 빠져 죽고 만다.


아마도 그의 죽음은 주원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듬해 주원장은 오왕을 자칭했던 마지막 라이벌인 장사성도 죽였다.


그리고 1368년, 주원장은 황제가 된다.

국호는 대명(大明), 소명왕 한림아를 계승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일찍이 백련교를 기반으로 일어났던 홍건군은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강생하고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결


과적으로 보자면, 대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예언의 명왕이었던 셈이다.

“성벽을 높이 쌓으라”는 주승의 권고는 난징에서 착실히 이행되었다.



심만삼(沈萬三)


난징의 성문은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난징의 13개 성문은 하늘의 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난징을 둘러싼 성벽의 북서쪽 귀퉁이 의봉문(儀鳳門, 중화민국 때 흥중문 興中門)과

동남쪽 귀퉁이 통제문(通濟門)에 각각 점을 찍은 뒤 두 점을 선으로 연결해 보면

취보문(聚寶門) · 삼산문(三山門 속칭 수서문水西門) · 석성문(石城門, 속칭 한서문 旱西門 또는 한서문 漢西門) ·

청량문(清涼門) · 정회문(定淮門) · 의봉문은 ‘남두육성(南斗六星)’에 해당한다.


그리고 통제문 · 정양문(正陽門 : 한때 광화문이라 불렸으나 없어짐) · 조양문(朝陽門, 중화민국 때 중산문 中山門) ·

태평문(太平門) · 신책문(神策門) · 금천문(金川門) · 종부문(鍾阜門)은 ‘북두칠성’에 해당한다.


난징의 성벽을 만든 주원장의 효릉(孝陵)은 북두칠성 영역에 자리한다.

게다가 황릉의 신도는 모두 직선 형태인데, 효릉의 신도는 북두칠성 형태로 굽어 있다.


예로부터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믿어졌다.

난징의 13개 성문에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수도에 우주를 구현하고자 했던 주원장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또한 북두칠성 형태의 신도는 그가 우주의 중심 북두칠성에 묻힘으로써

영원을 기약하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주원장은 엄청난 축성 자금을 어떻게 조달한 것일까?

명사(明史)에 따르면, 강남의 부자 심만삼(沈萬三)이 난징 성의 3분의 1을 쌓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심만삼(沈萬三 1330년 ~ 1379년)은 원나라 말기의 강남의 거부였다.

자는 중영(仲榮)이며 절강(浙江) 오흥(吳興)(현재 湖州)출신이다.


1368년 ~ 1911년에 이르는 명나라와 청나라 때 저우장의 심청(沈廳)의 60% 이상이 건축되었다.

저우장이 발전된 것은 명나라 때 유명한 거부 심만삼(沈萬三) 때부터이다.


명사에는 주원장이 심만삼의 재력에 도움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심만삼은 개인 출자로 난징 성벽을 쌓고, 게다가 그는 군대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금까지 내놓겠노라고 했다.


일개 필부가 천자의 군대를 위로하겠다니! 주원장은 분노하며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마(馬)황후가 이렇게 말하며 주원장을 말린다.


“법률이란 불법을 저지른 자를 죽이기 위함이지, 불길한 자를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라에 대적할 정도로 부유한 자는 불길하고, 불길한 자는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니 폐하께서 그를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주원장은 심만삼을 죽이는 대신 윈난(雲南)으로 유배를 보냈다.
명나라 초에 강남 일대의 부자는 모두 주원장의 고향인 펑양(鳳陽 봉양)으로 이주당하기도 했다.


이는 한나라 고조가 부자를 죄다 관중(關中)으로 이주시킨 사례를 따른 것으로,

주원장은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고자 14만 호에 달하는 강남 백성을 펑양으로 이주시켰다.


결국 펑양으로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하들의 반대도 있었거니와, 그곳은 자신뿐 아니라 개국공신들의 고향인지라 권력의 누수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대한 경계와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게 일인자의 숙명이긴 하지만 주원장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했다.

그런 그가 심만삼과 같은 이를 그냥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심만삼은 일찍이 주원장의 라이벌 장사성을 도운 전력까지 있다.

장사성을 도운 부자가 어디 심만삼뿐이랴.


장사성이 세력을 발휘할 때 누구든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던 게,

주원장이 황제가 된 상황에서는 원죄가 되어버린 것일 따름이다.


주원장은 이 부자들을 죄다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경계와 의심을 해소했다.

그리고 부자에 대한 분풀이까지 해낸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13개의 성문 중에서 ‘취보문(聚寶門)’에는 심만삼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취보문을 세울 때 계속해서 지반이 무너져서 점을 봤더니, 성문 아래에 취보분(聚寶盆)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보분은 재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일종의 화수분이다.

주원장은 심만삼이 가지고 있던 취보분을 가져다 성문 아래에 묻게 한다.


그랬더니 더 이상 지반이 무너지지 않았고 성문을 세울 수 있었단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취보분의 소유자로 말해질 정도로 심만삼이 부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부를 주원장이 앗아갔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취보문은 ‘천하제일의 옹성(甕城)’이라 불릴 정도로 완벽한 옹성을 갖추고 있는데,

1931년 국민정부에 의해 중화문으로 개칭되었다.


주원장의 지나친 경계와 의심이 도리어 그의 의도와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 경우도 있다.

황태자 주표가 한창 나이에 죽자 주표의 장자 주윤문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단행한 대규모 숙청이 대표적인 예다.


주윤문이 숙청의 이유를 묻자 주원장은 그에게 가시가 가득한 나뭇가지를 쥐어보라고 한다.

머뭇거리는 주윤문에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가시 돋친 나뭇가지를 쥐지 못하니, 내가 너를 위해 가시를 죄다 없애주려는 것이다.”

주원장은 이렇듯 손자를 위해 가시를 없애주고자 했으나,

능력 있는 이들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도리어 손자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1399)에 넷째아들 연왕(燕王) 주체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킨다.

1402년, 주체의 군대가 난징에 이르자 주혜와 이경륭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난징은 함락되고 건문제(주윤문)의 행방은 미궁에 빠진 채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한다.

주체의 군대가 들어왔던 성문이 바로 ‘금천문(金川門)’이다.


일찍이 주원장이 잔인한 숙청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혹시 그들 중 목숨 걸고 금천문을 지켰을 사람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홍무통보(洪武通寶)


중국 명대(明代:1368∼1644)에 주조된 화폐.

태조(太祖) 때의 홍무통보(洪武通寶), 성조(成祖)의 영락(永樂)통보, 선종(宣宗)의 선덕(宣德)통보 등이 있다.


그 후 세종(世宗)의 가정(嘉靖)에 이르기까지, 효종(孝宗)의 홍치(弘治) 때 이외에는 주전(鑄錢)이 시행되지 않았으며,

가정 이후부터 다시 대대로 그 연호의 돈을 주조하였다.

원료는 처음에는 구리에 납과 주석을 더한 것이었으며, 가정 연대 이후에는 아연을 섞었다.






장병동(藏兵洞)


장병동은 성루에 마련된 터널식 공간으로 평소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전시에는 병사들을 숨겨두는 장소나 숙소로 이용되었다.


작은 쪽문을 통해 들어가면 길다란 통로가 나오고 통로 끝에 넓은 공간이 나온다.

성루에는 병사를 숨겨두었던 장병동(藏兵洞)이 200곳 있었다.


장병동(藏兵洞)

"장병동"은 우리나라 고대 성문옹성 가운데의 독특한 건축이다.

고대 전쟁에서 물자의 저장과 병원의 매복 등 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옹성에 건설된 장병동(藏兵洞)


성벽은 장방형의 돌을 바닥에 깔아 기초를 다지고, 돌을 깔아 다진 바닥 위에 흙으로 토성을 쌓고,

그 겉면에는 벽돌을 쌓아 성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다.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벽돌을 절약하면서도 충분히 강한 성벽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 중국의 성벽은 대부분 이 같은 방법으로 건설되었다.

다만 남경성 황궁의 경우에는 동쪽과 북쪽의 성벽은 전부 벽돌로 건설되었다.


성벽의 평균높이는 12m정도이며, 그 위에는 활을 쏘도록 고안된 타구(垛口)가 있다.

타구는 총 13,616곳이 있었으며, 벽돌의 기본 크기는 10cm X 20cm X 40cm으로

무게는 30 ~ 40근이었고, 재질은 두 가지였다.


양자강 중하류 지역인 강소(江蘇)성, 안휘(安徽)성, 강서(江西)성,

호남(湖南)성, 호북(湖北)성의 28개 부(府), 152개 현에서 제작되었다.


벽돌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벽돌의 측면에는 “OO府 OO州 OO縣”이라고 제조지가 기재되었고,

제작자와 품질관리 관원, 그리고 감독자의 성명이 표기되었다.


이것으로 벽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추적할 수 있었고,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벽돌에 써넣는 정보는 대게 70여자였으며, 정보를 넣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벽돌에 글자를 찍어 넣는 방법이 있었고, 새기는 방법이 있었으며, 직접 써넣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글자의 형태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위서(魏書), 해서(楷書), 행서(行書)가 사용되었으며

일부 간략화 된 필기체도 발견되었다.

약 10억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장병동(藏兵洞) 내부


장병동(藏兵洞) 내부


뢰석(礌石)

"뢰석은 명조시기에 성문을 방비하는 주요한 병장기였는데 청석으로 쫗아 만든 크고 작은 원형의 돌멩이 이다."



뢰석(礌石)


뢰석(礌石)은 돌을 쪼아 만든 볼링공 형태의 병기이다.

명나라 시기의 주요 방성(防城)도구로 성벽을 오르는 적병에게 던져서 상해를 입혔다.

가장 큰 것은 무게가 200근에 달한다.


뢰석(礌石) 저장고 내부






주원장(朱元璋)과 주승(朱升)


몽골족인 원조(元朝)의 통치는 매우 참혹했다.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몽골인(蒙古人),색목인(色目人), 한인(汉人),남인(南人) 등 4개 급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특히 원조 말년 원 순제(顺帝) 재위 기간, 전례없이 참혹했고 정치는 부패하기 그지없었다.


몽골통치자들은 백성들의 목숨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고,

특히 한인과 남인들에게는 소나 말보다도 못한 취급을 했다.


궁지에 몰린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켜 원조 통치자의 폭정에 반항했고

백성들의 연이은 봉기는 원조의 반동통치를 급속도로 와해시켰다.


기원 1353년, 봉기군의 수령 장사성(张士诚)이 고우(高邮)지역을 점령하고

장강을 넘어 상숙(常熟),호주(湖州),송강(松江),상주(常州) 에 수도를 세우고 왕으로 자처했다.


기원 1357년, 호북인 진우량(陈友谅)이 평장(平章)이라 자칭하고

강서(江西), 복건(福建)을 점령하고 구강(九江)을 수도로 정해 한왕(漢王)이라 자칭했다.

이와 동시에 절강사람인 방국진(方國珍) 역시 기회를 이용해 병사를 일으켜 점동(渐東)을 차지했다.


봉기군 가운데서 비교적 세력이 강했던 주원장(朱元璋)은 기원 1356년에

집경(集庆—오늘의 남경)을 점령하고 오국공(吴国公)이라 자칭했다.


주원장은 상당히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일정하게 승리도 거둔 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천하의 대권은 눈앞에 왔으나 확실히 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이때 주원장에게 주승(朱升)이라는 사람을 찾아

가르침을 받으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 주는 자가 있었다.


주승(朱升)은 세상의 욕망이 뿜어내는 속진(俗塵)을 피해

산간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주원장은 주승을 찾아가

천하의 대권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한 방략(方略)을 주승에게 물었다.


몇 가지 대담을 주고받았을 터이지만,

지금 전해지는 기록으로는 주승이 주원장에게 전한 말은 아주 간단하게만 남아 있다.

“성을 높이 쌓고, 식량을 많이 모으고, 선포식을 늦추라”는 말이었다.


한자(漢字)로 적으면 아홉 글자다.

 ‘高築墻(고축장), 廣積糧(광적량), 緩稱王(완칭왕)’이다.


대세(大勢)를 형성했으나 아직 지방 군벌(軍閥)이 남아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

그래서 명분보다는 실질에 주목하며 더 힘을 길러야 하는 상황.


명나라 건국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아직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했던

주원장의 그런 처지를 꿰뚫어 본 가르침이었다.


주승이 알려준 비결을 듣고난 주원장은 바로 주승의 말을 따랐다.

군량과 마초를 사들이고 병마를 훈련시키며 군웅(群雄)들을 제거하고 화하(华夏)를 통일할 준비를 했다.


자신의 군대가 머무는 곳의 축성(築城) 작업에 몰두하는 한편

군량과 무기 등 기초적인 부분을 더욱 보강했다.


아울러 섣부른 ‘창업 선포식’을 뒤로 미루고

형세(形勢)를 치밀하게 살피면서 때를 기다렸다.


주원장의 행동을 살피던 장사성(张士诚)과 진우량(陈友谅)은

자신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주원장을 없애버리려 계획했다.


하지만 주원장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부하대장인 화운(华云)을 장사성의 아들로 변장시켜

진우량의 군에 파견해 군사계획을 상의하게 했다.


하지만 진우량측의 대장인 장정변(张定边)에 의해 발각되었다.

장정변은 몇번이나 진우량에게 충고했으나

진우량은 장정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화김에 장정변의 군권마저 박탈했다.


주원장과 끝을 보려고 작심한 진우량은 전투를 벌였고

결국 진우량의 수십만 대군은 주원장 부대에 의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진우량 역시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따라서 진우량의 아들은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주원장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팔면위풍(八面威風)  위풍이 당당하다


큰 승리를 거둔 주원장 부대는 구강구(九江口)에서 술을 마시며 경축했다.

병사들이 마음껏 술판을 즐기게 하려고 주원장은 대장 서달(徐达)과 함께 조용히 그 장소를 나왔다.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달밝은 밤길을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강가에서 한쌍의 노 부부가 배를 젓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서달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그 부부에게 강을 건너줄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노 부부는 흔쾌히 승낙하고 그들을 태웠다.


배가 강심에까지 도착했을 때 배를 젓던 노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대장군은 팔방에 위풍이 당당(八面威風 팔면위풍) 하다네… "


주원장과 서달은 소리내어 기분좋게 웃었다.

그후, 주원장은 마침내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힘의 구축에 성공하고

대륙의 풍운(風雲)을 질타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남경을 수도로 정하고 명나라의 개국황제가 된 후 

그때 강가에서 만났던 노부부를 찾아 상을 내리고

그때 탔던 배에는 특별히 빨간 칠을 하여 기념으로 남겼다 한다.

팔면위풍(八面威風)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성구이다.


주원장(朱元璋)


주승(朱升)





유구한 역사 문화의 도시 난징(南京)


난징(南京)은 중국에서 3,000 여 년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이어져 온 대표적인 도시다.

삼국시대 오(吳)나라를 세운 손권(孫權)은 229년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건업(建業)이라 불렀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수도 허창(許昌)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가 되었다.


서진(西晉)시대 279년 흉노 출신의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나라가 서진(西晉)을 정복하자 

이 소식을 서진(西晉)의 황족 사마예(司馬睿)가 이곳 건업(建業)에서 전해듣고,

사마예(司馬睿)는 휘하 심복들과 호족들의 뜻을 모아 동진(東晉)을 세우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서진의 마지막 황제인 민제(愍帝) 사마업(司馬鄴) 이름의 끝자 '업(鄴)'이

이곳 건업(建業)의 '업'과 음이 같다해서 이를 피하기 위해 282년 건업(建業)을 건강(建康)이라 고쳤다. 


그 후 진(晋) · 송(宋) · 양(梁) · 진(陳)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을 수도로 삼았고

당(唐)나라 시대에는 금릉(金陵)으로 불렸다.

이 시기 난징은 중국 전체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부상했다.


원(元)나라 시대 몽고인들은 중국 남쪽 지방을 천대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로인해 금릉이 특히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금릉(金陵) 백성들은 몽고인들에게 많은 재산을 약탈당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지도 못하고 죽어나간 이들이 많았다.


이 시기 몽고인들은 이곳을 집경(集慶)으로 불렀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난징 시민들은 몽고인들에 대하여 강한 적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몽고인들과는 교류도 일절 하지 않는 편이다.


다행히도 1356년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로는

백성들을 편히 쉬게 하면서 일에 제대로 종사할 수 있도록 각별하게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이름을 응천부(應天府)로 고쳤다.


주원장은 1328년 10월, 중국의 남동부 남경(南京) 인근에 위치한 호주(濠州)에서 태어났다.

호주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이다.


명(明)나라가 건국된 이후 황제로 등극한 주원장은 이곳을 응천부에서 다시 남경(南京)으로 고쳤고,

1378년 정월 정식으로 명(明)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경사(京師)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그 이후, 주원장이 사망하고 주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몽고를 정복할 목적으로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하면서

영락 원년에 다시 남경(南京,중국어 병음: Nánjīng)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 후로도 난징(南京)의 이름은 여러번에 걸쳐 바뀌었다.

청나라 말기였던 1868~1905년 사이, 태평천국 운동을 주도한 홍수전은 이곳 명칭을 천경(天京)으로 바꾸었다.


천경(天京)이란 하늘의 수도라는 뜻으로

태평 천국이 하느님의 복음으로 발전할 도시이자 수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이곳은 동양에서 최초로 기독교가 가장 크게 발전한 도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기존 청나라 정부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중국의 황조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인류 평등과 사회 개혁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후 1911년 중국 국민당의 최고 지도자인 쑨원(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화민국을 세우고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고부터 난징(南京)은 당시 중국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잘 사는 도시로 발전한다.


중화민국은 동양에서 최초로 민주공화국이 되었고,

따라서 이곳은 자유와 혁명의 도시로 거듭난다.


1919년 5월 4일 대규모 반일 시위인 5·4 운동이 베이징(北京 북경)에서 일어나고

당시 난징 시민들도 상점과 학교 등을 휴업하고 일제히 시위에 동참하였다.


그 후 난징은 1928년 장제스(蔣介石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군의 침공으로 30만 명이 살해되는 난징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난징 대학살 이후 난징 시민들은 일본에 대해서 절대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1940년 3월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충칭으로 후퇴하고

난징은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 1883~1944)가 친일정부를 조직하여

괴뢰정권의 주석으로 취임한 후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그 후 중일 전쟁에서 승리한 장제스는 왕징웨이 정권으로부터 수도 난징을 다시 수복하였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서, 난징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추방되거나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심하게는 이곳 난징에 있는 일본인 거주지가 크게 불에 타서 없어지거나

친일파들과 일본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게 패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중국공산당은 이 도시의 지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 여파로 난징은 중국 국민당의 중심인 국민정부 수도였던 시절에 비해서

너무나도 초라한 도시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난징은 찬란한 대도시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이름에 걸맞지 않은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고

1953년 장쑤성(江蘇省 강소성)의 성립과 함께 그 성도가 되었다.  


타이완 섬에 있는 중화민국 정부는 이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50~1960년대에 난징의 지위를 떨어뜨렸다는 것은

중화민국의 국민들을 크게 화나게 할 일이라고 경고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후 난징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고 덩샤오핑(鄧小平 )이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예전 못지않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정부는 난징을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농업과 공업과 산업을 크게 발전시키는 정책을 폈다.


개혁 개방의 영향을 받아서 난징은 1994년 부성급시로 승격되었다.

'오경(吳京)'은 지금도 난징의 비공식적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는 난징이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난징(南京)은 말 그대로 '남쪽의 수도' 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수도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다른 도시들인 일본의 교토(京都, 경도), 대한민국의 서울(漢城, 한성)이 단순히 수도를 뜻하는 것처럼,

중국의 베이징(北京, 북경)은 북쪽의 수도를 의미하고,

일본의 도쿄(東京, 동경), 베트남의 통킹(東京: 오늘날 하노이)은 둘 모두 ‘동쪽의 수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북경'(베이징)과 '남경'(난징), '장안-서경'(시안)은

중국 내륙에 있는 낙양(洛陽 뤄양)을 중심으로 방향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삼국 시대이래로 난징은 전략적으로 지리적인 위치와 편리한 교통 때문에

방직과 조폐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나라 때 난징은 산업이 더욱 확장되었고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방직과 조폐, 인쇄와 조선 등 많은 다른 산업들은

난징을 극동 아시아에서 가장 번화한 업무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20세기의 첫 50년간 난징이 잠시 동안 중국의 정치 중심지의 지위를 회복하자

부유층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난징을 생산 중심에서 대량 소비도시로 점차 변모시켰다.

중양상창(中央商場)과 같은 거대한 백화점이 많이 생겨났고

중국 전역의 상인들이 자신의 물건을 팔기 위해 난징으로 모여들었다.


1933년에는 식품과 오락 산업에서 발생한 세입이 농업과 제조업에서의 산출량 합계를 초과하였다.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였고

마약과 도박과 살인 등의 불법 행위도 또한 크게 성행하였다.


1950년대에 중국 공산당은 빠른 산업화를 위한 국가 계획의 일환으로

국가 소유의 중공업을 세우기 위해 난징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전기, 기계, 화학, 철강 공장 및 회사 본사들이 연이어 세워졌고

동아시아 중공업 생산 기지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의 산업 도시를 건설하려는 난징 지도자들의 지나친 열정은

석탄이 없는 광산에 수백만 위안을 투자하는 등의 재앙적인 실수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1960년대에 난징의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다행히도 오늘날에 이르러 개혁 개방의 영향을 크게 받아 난징은 거대한 도시로 다시 발전하고 있다.


도시 지역의 현재 산업은 1960년대의 특성을 이어받은 것으로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전력 산업이 5개의 기둥 산업을 이룬다.


대표적인 거대 공기업으로 판다 전자, 진청 자동차, 난징 철강이 있다.

난징은 양쯔강 삼각주에 위치한 이웃 도시들과 외국인 투자를 놓고 경쟁하고 있고

마이크로소프트, IBM, 애플, 폭스바겐, 이베코, A.O 스미스, 샤프와 같은

수많은 유명 다국적 기업들의 지부들이 세워져 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래로 이곳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과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 인구는 600 여만 명이지만 점차 많아지고 있고

난징 종합대개발의 목표는 2000만 명으로 잡고 있다.


중화문(中華門 종후아먼)


중화문(中華門)은 난징시에 있는 거대한 성문이자, 문화 유산이다.

명대(明代)에 있었던 13개의 성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대했던 명나라 도성의 정남문이다.


문의 길이가 남북으로 128m, 동서폭이 118.5m, 총면적이 15,168㎡ 에 달한다.

외진회하(外秦淮河)와 내진회하(內秦淮河)의 사이에 있다.


중국 대륙에서 현존하는 성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성보식(城堡式 : 작은성) 옹성(甕城)이며, 세계적으로도 구조가 가장 복잡한 옹성(甕城)이다.


중화문(中華門)은 명나라 때 취보문(聚寶門)이라 불렸다. 

명나라 홍무 2년부터 8년(1369~1375)까지 축성되었고, 1931년 중화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체 성벽은 1366년에 건설하기 시작해서 1386년 완성된 총 길이 33,676m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중화문(中華門)은 고대에 방어를 위한 군사용으로 지어진 것인데, 

어마어마한 규모에 걸맞게 3중의 옹성(甕城)이 있고 4개의 아치형 문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의 높이는 21.45m이며 성루 옆으로 말이 올라갈 수 있도록 마도(馬道)가 마련되어 있다.  

또 문마다 양 쪽으로 여닫는 목조성문과 상하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천근갑(千斤閘) 문이 달려 있어

완전히 폐쇄(閉鎖)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즉 적이 성문을 파괴하고 진입해도 천근갑이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적을 가두고 퇴로를 차단할 수 있다. 그야말로 철옹성(鐵甕城)이다.


성문 옹성에는 상, 하 총 27개의 장병동(藏兵洞)이 있다.

평소에는 식량을 저장했고, 전시에는 군수물자를 제작하거나, 병사를 숨기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중화문의 장병동은 창이 없는 터널식으로 그 깊이가 상당하다.

3,000명의 병사가 숨을 수 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아이디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군의 최대 5배 되는 적군을 상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난징성에는 13개의 문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중화문, 한서문, 청량문(淸凉門), 화평문 네 개 뿐이다.


중화문 안쪽에는 내진회하(內秦淮河)를 가로지르는 진회교(鎮淮橋)가 있는데,

이 다리는 남당(南唐)이래 1000년 동안 가장 번화했던 중화로(中華路)로 연결되며,

중화문 밖에는 장간교(長幹橋)가 있어 우화로(雨花路)로 연결된다.


중화문은 남당의 도성 남문유적에 다시 지은 성문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성문 아래에 강남 최고 부호였던 심만삼(沈萬三)의 취보분(聚寶盆)을 묻어

취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중화문이라는 지금의 이름은 1931년에 얻은 것이다.


중화문(中華門)의 모형도


종후와먼(中華門)은 4중의 성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도시 방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성벽이었고,

성벽 중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옹성을 쌓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종후와먼(中華門)의 4중 성문 체계는 그 중 가장 뛰어난 편일 것 같다.

설사 적군이 가장 바깥의 성문을 파괴하고 내부로 진입한다 해도,

여전히 부숴야할 성문 3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성문에는 천근갑(千斤閘)이라는 철문이 내려와 퇴로를 봉쇄하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성문 지하에는 기습부대가 숨어 있었다고 한다.


성문 곳곳에 기습부대가 튀어나올 수 있는 문이 있었다.

5배의 적군도 거뜬히 방어해낼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중화문(中華門)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글씨


옹성(甕城)


중화문은 처음에는 취보문이라고 불렀는데

모양새가 도자기 단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옹성이라고도 불렀다.


세 개의 옹성에다 네 개의 권문이 관통하고 있었다.

기묘한 설계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군사적 고려 때문이라고 한다.


적이 바깥쪽 문을 뚫고 들어오면 문과 문 사이에 있는 아치형의 통로 위에서 천근 갑문을 내려

27개 장병동에 숨어 있던 삼천여 명의 군사들이 기습적으로 적군을 섬멸했다고 한다.


옛날 전쟁의 승패는 성벽과 성문을 얼마나 잘 방어하는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천근 갑문은 없어졌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원래 13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중화문 한서문 청량문 화평문 등 4개가 남아 있다.

철옹성(鐵甕城) 천근갑(千斤閘) 문의 흔적


천근갑(千斤閘) 문이 끼어 있던 흔적(사진 왼쪽)만 깊게 패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

문마다 상하로 열 수 있는 천근갑(千斤閘) 문이 달려 있어 완전히 닫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즉 적이 성문을 파괴하고 진입해도 천근갑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닫히면 

적을 가두고 퇴로를 차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천근갑은 명나라 초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방성기구이다.

나무로 만든 문에 철판을 덧대어 만드는데 무게가 천근이라고 하여 천근갑이라 부른다.


중화문의 천근갑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천근갑을 고정했던 홈의 크기로 옛 모습을 추정해볼 따름이다.


현존하는 최대의 천근갑은 북경 정양문(正陽門) 전루(箭樓)에 있는 것으로,

폭 6m, 높이 6.5m, 두께 6Cm로 그 무게는 1990kg이다.


천근갑은 그 이름과 무게 때문에 일종의 아이콘이 되었다.

소설 <수당연의(隨唐演義)>를 보면 양림(楊林 : 수나라 개국공신)이 성문을 닫고

성안에 갇힌 군사들을 태워 죽이려 했을 때 대역사 웅활해(雄阔海)가 천근갑을 들어 올려 병사들을 탈출시켰다.


비록 웅활해 자신은 힘이 빠져 천근갑에 깔려죽었지만,

천근갑 덕에 웅활해는 더욱 유명해졌고, 천근갑은 ‘어려움’, ‘고난’을 대표하는 용어가 되기도 했다.


 “천근갑과 마주치다(遭遇千斤閘)”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뜻이며,

“개갑(開閘)”은 난제를 해결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천근갑(千斤閘)이 설치되었던 홈


천근갑(千斤閘)이 설치되었던 홈에 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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