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촌(呈坎村 청칸춘 Chengkan)


안후이성(安徽省) 황산시(黄山市) 후이저우구(徽州区, 휘주구) 북부에 위치한

청칸진(呈坎镇, 정감진)의 촌급 행정구로 2008년 중국역사문화명촌(4차)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휘파문화(徽派文化) 예술이 결합된 전범(典范)인 이 촌락은

산과 물에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주희(朱熹)가 “정감쌍현리(呈坎双贤里), 강남제일촌(江南第一村)”이라고 칭한 이 촌락은

후이저우구(徽州区) 북부, 205국도로부터 불과 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칸향(呈坎乡, 정감향) 정부 소재지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동한(东汉) 삼국시기에 건립되었다.

역경(易经)의 음양팔괘(阴阳八卦) 이론에 따른 배치로 양(阳)은 정(呈)이며 음(阴)은 감(坎)으로

당 말에 청칸(呈坎, 정감)으로 개명되었다.

 

송대에는 나천질(罗天轶)과 나천칭(罗天秤) 형제가 예장(豫章)으로부터 이곳으로 와 정착하며 나씨 가문의 선조가 되었고

명대 중엽 나씨 문중은 촌락과 중천하(众川河)에 대해 대규모의 공사를 단행하여

산과 물에 둘러싸인 이상적 공간 환경을 갖춘 촌락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1,8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 촌락은 현재 2,7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휘파(徽派) 고건축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촌락의 하나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보존이 잘 되어 있고

풍격이 각기 다른 정(亭), 대(台), 루(楼), 각(阁), 교(桥), 정(井), 사(祠), 사(社) 및 민거(民居)로 이루어져 있다.

 

이 촌락은 3가 99항(三街九十九巷, 3개 거리 99개 골목)이라는 칭호를 지니며 현재 청대 민거 200여 동,

명대 민거 30여 동이 있고 골목과 큰 거리는 대체적으로 수직으로 나 있으며 화강암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 중 나동서사(罗东舒祠)와 청칸촌(呈坎村) 고건축군(古建筑群)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경내의 장춘사(长春社)는 청칸나씨(呈坎罗氏, 정감나씨) 및 부근 촌락의 오(吴), 호(胡) 등 여러 성씨가

토지신, 오곡신(五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 봄에는 일 년 동안 적기에 바람이 불고 때맞추어 비가 내리기를 빌었으며 가을에는 오신(娱神), 주신(酬神)에게 수확의 감사함을 제사지내던 장소였다.

 

이 사당의 규모는 매우 크고 정문(正门), 정당(正堂), 침전(寝殿) 및 좌우 무랑(庑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축공예가 장중하고 경건하여 고대 조상과 신령을 숭앙하고 공경하던 옛 사람들의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

 

청칸(呈坎, 정감)은 역사상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송대 용도각(龙图阁) 대학사(大学士), 이부상서(吏部尚书) 나여즙(罗汝楫)과 그 아들인 나원(罗愿) 및 양저우팔성(扬州八怪)의 하나인 나양봉(罗两峰)이 이곳 출신이다.

 

 

 

 

 

 영흥호(永兴湖)


동한(東漢)부터 남송(南宋)시기 정감촌의 수구(水口)이고 풍수지리학에 지호(地戶, 물이 모이는 곳)로 불리우며,

물이 모여 재물이 쌓인다는 의미로 옛날부터 천문이 열려야 재물이 마을로 들어오고

지호에 물이 모여야 재물이 수구로 모인다고 천여 년 동안 정감촌의 흥성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송영길 전 인천시장과 함께. 


2014년 전국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인천시장 재선에 출마 후 낙선하자마자 곧바로 연구활동을 위해서

중국 칭화대학교(淸華大學)에 머물러 왔다고 한다.


우리 일행과는 황산 공항에서 합류했다.

학교 후배로 송 시장이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을 적부터 인연을 맺어 온 사이여서 각별하게 반가웠다.

 

 

 평안감(平安坎) 정감팔괘마을 ㅡ 천신만고를 이겨내어 생겨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중국풍수에 관한 건축교재이기도 하다.

 

 

 팔괘도(八卦圖) 정감 팔괘촌의 자연환경은 천연 팔괘도를 형성한다.


정감촌 주위는 8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쌓여 선천팔괘로 불리운다.

촌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S"자 모양의 하천이 마을을 질러 흐름으로 팔괘음양의 흑백 분계선을 형성한다.

 

주택 집은 대부분 목조 건물 2층으로 되어 있다. 중국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천정(天井) 이것이 바로 천정의 전형이다.


햇빛은 물론이거니와 비가 오면 빗물이 마당으로 들어와 물을 받아 쓰도록 설계되어 있다.

옛 휘주인들은 집을 지을 때 색채의 조화에 특히 신경을 써서 흰 벽체에 검은 기와가 청산녹수 속에 있으면 안온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건물마다 지붕에 구멍을 뚫고 집안에 마당을 만들었는데

이런 건물들에서는 밖에 나가지 않고도 낮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고 밤에는 달과 별 또한 볼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두 마당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옛날 휘주인들은 비는 금을 의미하고 눈은 은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붕에 뚤린 구멍을 통해서 비와 눈이 마당에 떨어지는 것은 부(富)가 집에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실내의 기온조절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습도를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ㅁ자형의 2층 가옥.


이 집들은 밖에서 보면 아래층에는 창문이 없고 2층과 3층에 조그만 창이 나 있다.

옛 휘주의 여성들은 절개를 소중히 여겨서 외간 남자를 함부로 집에 들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2층이나 3층 조그만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아는 사람인지 확인 후 문을 열어 주었다.


특이한 점은 이미 명 청대에 2층 3층의 목조 가옥을 짓고 오늘날까지 남아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

한옥과는 달리 온돌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중국의 건축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발용 의자?

가이드의 설명으로 100 여 년 전 외국에서 들여온 이발용 의자라는데...

1층에는 방이 없고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이 있다.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지면 이곳으로 모여든다. 여름에는 에어콘 역할도 한다고.

 

 

 정정나동서선생사(貞靖羅東舒先生祠)

 고건축학자 나철문(羅哲文, 1924~2012) 서.

 

나동서(羅東舒)는 송나라 말기와 원나라 초기의 학자로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가난한 친척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세심한 고증을 거쳐 족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완하는 등 가문에 기여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3대 70년에 걸친 대공정 끝에 1617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때 사당을 완공하였는데,

이는 민간 사당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개인 이름의 사당이지만 나동서뿐 아니라 나씨 후대의 제사도 함께 지내며 여자들을 위한 사당, 곧 여사(女祠)도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부지면적은 약 3000㎡이고, 건축면적은 약 2000㎡이다.


주요 건축물은 조벽(照壁)·영성문(欞星門)·좌우비정(左右碑亭)·의문(儀門)·곁채·배대(拜臺)·향당(享堂)·후침(後寢) 등이다.

중축선(中軸線)이 분명하고 건물의 분포가 좌우로 대칭되어 치밀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영성문은 나무 울타리로 된 패방식(牌坊式) 대문으로, 조벽과 더불어 하나의 전정(前庭)을 이룬다.

의문은 영성문 안 쪽에 있으며, 정면 폭이 7칸 26.5m, 안 길이 10m, 높이 9.5m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의문을 지난 정원을 거쳐 향당에 이른다.

정원의 동서 양쪽에 있는 곁채에는 약 1000개의 고대 편액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부분 파손되고 지금은 30여 개만 보존되어 있다.


주 건물인 향당은 정면 폭이 5칸에 25.6m이고, 안 길이는 7칸에 22.5m, 용마루까지 높이는 13.6m이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일 뿐 아니라 가문의 일을 의논하고 공신과 명족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보륜각(寶綸閣)


보륜각(宝纶阁)은 정감촌에서 가장 큰 건물로 명나라 가정(嘉靖) 21년(1542)에 건립되었고

침전(寝殿)의 대들보상의 채색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민간 채색의 진품이며 명대 고건축의 정수이다.

금사난목 기둥 1주의 가격이 3억 위안이라는 가이드의 설명.


후침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11칸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트러스(truss)와 지붕받침, 도리, 기둥머리 등에 보존된 명나라 때의 채색화로 더 유명하다.

향당 남쪽에 있는 여사는 면적이 160㎡으로 남사(男祠) 규모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여 남존여비의 관념을 드러낸다.

 

 

보륜각(寶綸閣) 명말 서예가 오사홍(吳士鴻) 서.

 

 

 

 이륜유서(彛倫攸叙)

 동기창(童其昌 1555~1636) 서. 윤리가 일정하게 베풀어진다.

 

 

 

 마을을 빠져 나오자 S자 모양으로 흐르는 큰개울이 있다.

 

 

 

 

 

 

 개울가에는 빨래터가 있어 빨래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자기의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해서 관광객이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싫어한단다. 주의해야 할 사항.




 

보륜각01.jpg
0.21MB
청칸06.jpg
0.2MB
s자하천04.jpg
0.16MB
청칸03.jpg
0.15MB
s자하천02.jpg
0.19MB
나동서사당01.jpg
0.18MB
나동서사당02.jpg
0.19MB
청칸08.jpg
0.25MB
청칸04영흥호.jpg
0.2MB
보륜각02.jpg
0.16MB
청칸02.jpg
0.21MB
주택02.jpg
0.16MB
청칸05.jpg
0.22MB
주택01.jpg
0.16MB
청칸01.jpg
0.19MB
주택05.jpg
0.2MB
이륜유서.jpg
0.21MB
s자하천01.jpg
0.2MB
s자하천03.jpg
0.14MB
주택03.jpg
0.27MB
주택04.jpg
0.16MB
s자하천02.jpg
0.16MB
주택06.jpg
0.13MB
청칸07.jpg
0.23MB

 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는 중국역사문화도시 흡현의 핵심이며 휘주부 소재지로서 산수가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경구내 고민가 촌락은 구조가 아름답고 고대의 다리, 탑, 거리, 골목길, 제방, 패방들이 잘 어울려서 소박한 풍채을 보여주며 마치 호장한 박물관과 같다.

휘주고성경구 6개 관광지: 동방개선문—허국석방,   휘주고성표지—휘주부,   강남제일거리—두산가.   휘상의근원 – 어량고항,   휘주대관원- 휘원,   전국애국주의교육기지 –토싱즈기념관.   http://blog.daum.net/choemh/16140891

 

 

  

 

 

 

 

 

 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관람도     http://www.guhuizhouta.com/


 

 휘주부서(徽州府署) 휘주부 관아

 

 

 


명경고현(明鏡高懸)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 - 오장육부가 훤히 비춰보이는 거울이라는 뜻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 : 사심없이 공평하게 처리함)한 법관을 비유함.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3권에는 진(秦)나라 때의 신기한 거울(鏡 경)

이야기가 실려있다.

진(秦)나라의 함양(咸陽)궁(宮)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 가운데, 너비가 4(四尺 : 1m 20Cm), 높이가 59

(五尺九寸 : 1m 77Cm)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그 모습이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 옛날의 사진기는 파인더를 들여다 보면 피사체가 거꾸로 보였다는~)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腸 : 폐. 심장. 비장. 간장. 신장)이 나타나는 거울이었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몸의 환부(患部)가 나타나 병을 알아보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신기한 거울이었고

심지어는, 사람이 품고 있는 흉중(胸中 : 가슴 속)에 있는 심보(心褓)까지 알 수 있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인 거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진시황(秦始皇)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 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확인하였는데 특히 면전

(面前)에서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尋聞)하고 처벌했더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末期)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을 공격하던 혼란 와중에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大學士 허국(許國)  1527~1596

휘주부() 흡현() 사람으로 자는 유정()이다. 명()나라 때의 대신()이다.

가정() 44년(1565)에 진사() 출신으로 벼슬은 검토(), 국자감제주(), 태상시경(), 첨사(), 예부시랑(), 이부시랑(), 예부상서(), 동각대학사(), 태자태보(),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시호는 문목()이다. 저서로 《허문목공집()》이 있다.

허국석방(許國石坊)은 흡현시내에 위치하며 중국내에서 보기드문 전형적인 명대 석방형식의 건물이다. 1584년도에 처음 지어졌으며 8개의 기둥이 口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八脚牌楼(팔각패루)"라고 명명 되기도 한다. 남북으로 길이 11.54m, 동서로 넓이 6.77m, 높이 11.4m, 면적은 78.13㎡이다.

 

동기창(童其昌)  1555~1636  패방의 글씨는 중국 명대 후기의 서예가이자 화가인 동기창이 썼다.

동기창의 자는 현상(). 호는 사백(), 향광() 화정( 상하이시 송강 ) 사람. 만력 17년(1589)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한림원서길사, 황태자의 강관()이 된다. 그후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다시 관직에 들어가기도 함을 수차 반복하였다. 태창 원년 (1620) 태상소경, 천경2년(1622) 태상사경겸 시독학사, 『신종실록()』 편집에 참가하여 동 3년 예유시랑, 이어서 좌시랑, 동 5년에는 남경 예부상서를 지내고 다음해 은퇴. 숭정 4년(1631) 옛 관직에 복직, 동 8년에 예부상서겸 태자태보로 끝난다. 시호는 문민(), 서화에 능하고 고금의 명필을 연구하였으며 또 선리()를 시문서화()의 이론을 응용하여 설하였다. 서는 처음에 미불()을 종()으로 하였고, 진나라 사람의 평담 자연의 경을 이상으로 일가를 형성하였다. 형동() 미만종() 장서도()와 함께 ‘형장미동()’이라고 불리었으며, 또한 ‘남동 북미’라고도 칭하였음. 감식, 수장한 법서를 모아 『희홍당법첩()』을 만들었고 서 작품으로서는 『행초서권』(동경 국립 박물관), 『경원변묘지명고』, 『일월시권』등 많이 남아 있다. 호는 오파 문인화의 정계()를 이어 받아 원말 4대가 특히 황공망()에서 동원()에 올라갔으나, 구도법, 필묵법은 명말의 개성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졌으며, 특히 장년기 까지의 작품에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날카로운 감각이 나타남. 대표작은 『형계초은도권()』(1613뉴욕 개인 소장), 『청변산도()』(1617 클리브랜드 미술관). 또 화론가()로 남북 양종으로 나눠 그 계보를 만들고, 상남폄북론()을 전개하여, 그 화풍 ᆞ 화법과 함께 명말 청초 이후 남종화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용태집()』, 『화선실() 수필』 등이 있다.

 

 

 

 

 

 도행지(知) 1891 ~ 1946

안휘성(省) 출생. 1914년 진링[]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J.듀이에게 교육학을 배우고 1916년 귀국하여 후스[] 등과 그 교육론 보급에 힘썼다. 난징[]고등사범학교(후에 국립 ) 교수로 근무하였고, 1923년 이후로는 민족자본을 기금으로 한 민간교육운동에 헌신하며 강단에 서지 않았다. 장제스[] 정부하에서 창조적인 형태의 학교를 개설하고, 노동존중과 사상의 자유에 철저하여 공산당원을 옹호하였으며, 많은 혁명청년을 양성하였다. 난징의 사오좡[]사범학교, 상하이[]의 산하이공학단(), 충칭[]의 육재()학교 ·사회대학 등을 경영하였다.

1935년 이후 항일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참가하여, 교육은 어린이와 대중의 생활해방을 위해 민족해방에 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상하이에서 내전반대 ·정치민주화를 주장하다가 1946년 7월 뇌일혈로 갑자기 죽었다. 전생애를 통해 반식민지인 중국 사회에 근대교육의 원칙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추구하여 오늘날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기의 애국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교육이론은 중국의 교육이론에 계승되고 있다.

 

흡현(셔시엔, 歙县, Shexian) 

휘(徽) 지역의 중심지이자 수도이다. 아마 와 보면 '중국 전체의 상업을 휩쓴 집단이 이 작은 시골에서 시작되었다니' 하고 의아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다른 대도시에서 성공하고, 이곳에는 자기 원래 집터에 큰 집을 짓는 순서였으니까. 그래서 흡현은 고상(삐딱해서 Sorry)하게 서당/사당의 역할을 한다. 그래도 상인들이라 재고를 관리할 수 있는 곳도 있고. 그곳이 어량(위량, 渔梁, Yuliang)이다. 그래서 같은 유적이라고 해도, 흡현은 먹물 냄새가 많이 나고 엄숙한 느낌이 강하다. 반면에 어량은 돈 냄새가 꽤 많이 나는 편, 그리고 활발했던 느낌이 많이 난다.

흡현의 옛 이름이 휘주(徽州), 즉, 이 지역의 수도 역할을 했었다. 송대부터 중국 역사상 유명인사를 기록한 사전에 등록된 사람만 200여명에 달하고 사당, 서당, 서원이 120여개에 달했다고 하나, 그 정도에 비하면 너무 남아 있는게 없다. 중국 정부가 2006년 정도부터 야심차게 수도 복원 사업을 했다는데, 한 결과가 운치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성곽의 붉은 벽과 위에서 얘기한 요란스러운 (브랜드 옷 가게로 즐비한) 상가 거리였다.

하지만, 양화문(양허먼, 阳和门, Yanghemen)을 들어서 허국석방(许国石坊)을 지나면 나타나는 요란무쌍한 흡현 시내는 2008년인가에 새로 칠한 화장일 뿐, 두산가(더우샨지에, 斗山街, Doushanjie) 들어 서면, 높고 큰 오래된 저택들이 즐비한 좁은 길을 걷게 된다.

 

휘상()

명청() 시기 안후이성() 휘주부() 지역에 적을 둔 상인() 혹은 상인집단()의 총칭으로 신안상인()이라고도 하며 속칭 휘방()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휘주부()는 안휘의 서현(, 섭현), 슈닝현(, 휴녕현), 우위안현(, 무원현), 치먼현(, 기문현) 이현(), 지시현(, 적계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휘상()은 동진() 시기에 태동되어 당송() 대에 성장하였고 명대()에 전성하였으며 청말()에 쇠퇴하였다.
휘상()은 모두 빈한한 산지 지역 출신으로 농업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조건하에서 상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였으며 이를 통해 문화적 소질을 갖추었고 또한 인적자본을 축적하며 경영활동에 한층 더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이들의 성공 과정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전국에 퍼져 있었으며 취급하는 물품이 소금, 면포(), 양식(), 차(), 문구필묵() 등이었으며 고통을 감내하고 근검절약하며 소자본 경영을 위주로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부츨 축적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사회의 공익을 위한 사업과 자선활동을 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휘상은 돈을 버는 것을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영예롭게 여겨 청 건륭에서 가경제에 이르는 70여 년간 265명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당시의 진상() 자제는 단지 22명에 불과하였다.

 

문방사우(文房四友)

서예작품은 서화가들이 (붓 필), (먹 묵), (종이 지), (벼루 연)이라는 문방사우를 이용하여 글씨를 써서 만든 것이다.

’은 짐승의 털을 대나무 막대에 넣어서 만든 붓을 한 손으로 들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이다.
붓은 늦어도 상나라 때에 이미 있었다. 어떤 갑골에는 붓으로 써넣은 붉은색 부호가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붓은 1954년 중국 호남성 장사()의 좌가공산()의 전국시대 분묘에서 출토된 것인데, 붓이 작은 대나무 통 안에 함께 들어있었다. 대나무로 된 붓자루는 길이가 18.5㎝, 지름이 0.4㎝이고 붓의 털이 토끼털이며 털의 길이가 2.5㎝이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붓은 선필()과 호필()이다.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되는 붓은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구양수()에 의해 “, .”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이 말은, 붓이 너무 부드럽거나 딱딱하지 않아 사람이 손으로 잡기에 매우 적합하고 백 개의 붓 중에 질이 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당시 이 붓은 “천금을 주고 사려해도 시장에는 없었다.(.)”고 한다. 저쟝성() 호주시()에서 생산되는 호필은 외국에서 더욱 유명하다.

’(먹)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검은색 안료이다. ‘’은 회의자로, ‘’과 ‘’로 구성된다. 빛깔과 광택이 밝고 윤기가 흐르며, 재질이 부드러우며, 고색이 창연한 먹은 서예가들의 필수품이다. 현재 안후이성 흡현() 등의 지역에서 만든 ‘휘묵()’이 이름을 떨치고 있다.
제지술은 고대 중국의 사대 발명 중의 하나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씨를 쓰는 재료로 갑골이나 청동기, 죽간, 견직물, 비단 등이 있었다. ‘’(종이 지)자의 편방은 ‘’인데, 이것은 종이가 실과 관련이 있음을 설명해준다. ‘’는 본래 실을 빨 때 도구의 밑바닥에 남는 솜 모양의 물질인데, 한나라 때 사람들이 삼, 어망, 나무껍질, 헤진 천조각 등을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채륜

동한(25~220년) 때 채륜()이 제지술을 개선하여 만들어낸 종이는 가볍고 얇으며 깨끗해서 ‘채후의 종이()’라고 불렸다. 저렴한 종이가 나오면서 글씨를 쓰는 것이 더욱 편리해졌다. 종이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선지()로, 중국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된다. 선지의 품질은 순백색으로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견고하며, 광채가 나지만 미끄럽지 않고, 빛이 통하면서도 빛깔과 광택이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래 보관해도 부패하지 않고 여러 번 접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노화에 강하고 벌레나 좀을 방지해준다. 이 때문에 ‘천년의 수명을 가진 종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자는 ‘’을 편방으로 하며 출현시기가 늦은 편이다. 이것은 돌로 된 먹을 가는 도구이다.
붓, 먹, 종이, 벼루는 ‘문방사우’라고 불린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아름다운 한자를 써내고 독특한 풍격의 서예 예술을 창조해 내었다.

 


휘주10.jpg
0.13MB
휘주131.jpg
0.12MB
휘주09.jpg
0.14MB
휘주13.jpg
0.08MB
휘주03.jpg
0.16MB
휘주14.jpg
0.21MB
휘주11.jpg
0.08MB
휘주08.jpg
0.14MB
휘주01.jpg
0.19MB
휘주06.jpg
0.09MB
휘주02.jpg
0.09MB
휘주17.jpg
0.11MB
휘주16.jpg
0.17MB
휘주011.jpg
0.18MB
휘주15.jpg
0.18MB
휘주04.jpg
0.14MB
휘주05.jpg
0.25MB
휘주07.jpg
0.15MB
휘주12.jpg
0.09MB


포씨지사(鮑氏支祠) 

1561년에 세우고 1791년에 중수한 당월포씨사당(棠樾鮑氏祠堂). 패방군 바로 옆에 있다.

지사(支祠)는 가사(家祠), 종사(宗祠) 등과 함께 사당의 한 종류.

 

 

포씨지사(鮑氏支祠)  포현륜(鮑賢倫, 1955?~ ) 서 


포가남사(鲍家男祠)

 속담에:”황실에는 태표가 있고 백성에게는 사당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고휘주백성들은 한가문끼리 집거해서 살았다.


조상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또 같은 가문들을 한데 집결하기 위해서 매 백성들에게는 규모가 같지 않는 사당이 있었다.

사당은 종사,기사,가사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중 종사가 규모가 제일 크다.

 

세효사(世孝祠)  청 가경(淸 嘉慶) 6년(1801)에 세운 남사(男祠)

글씨는 청대 서예가 등석여(鄧石如, 1743~1805)가 썼다.

 

등석여(鄧石如) 


1742년 건륭(乾隆) 8년, 안휘성(安徽省) 회녕(懷寧)의 집현관(集賢關)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염(琰), 자는 석여(石如)였는데
1796년 가경(嘉慶) 원년에 즉위한 청나라 인종(仁宗)의 이름이 전염(芮琰)이어서 ‘염’자를 피해 ‘석여’라 이름지었다.
자는 완백(頑白), 호는 완백산인(完白山人)이며 흔히 호를 취해서 완백(完白)이라 부른다.


완백의 부친은 이름이 일지(一枝)이며 목재(木齋)라 호를 쓴 박학한 분으로 사체서(四體書)를 잘 모각(摹刻)했으며,
성품이 우뚝 두드러진 분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집안 살림이 넉넉지 못해 완백은 어려서 마을 아이들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해다 팔아
양식을 바꾸어 먹는 간구한 생활이었으나 틈만 있으면 마을의 유식한 어른을 찾아 경서를 배우고,
부친 목재 선생의 전각과 예서 및 각 체를 본떠 흉내를 내었다 한다.


그의 서가(書家)로서의 출발은 이렇게 부친을 사사(師事)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완백은 63세 때 이승을 하직하기까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글씨와 전각을 팔아서 전각과 서예에 전념하였다.


영국(寧國, 절강성에 가까운 안휘의 동쪽 끝)에서 구강(九江, 양자강을 거슬러 강서성으로 들어간 곳)으로 전전하면서
글씨를 팔면서 여행을 하던 중 20대의 어느 날 환산산맥을 넘어 수주(壽州)에 이른 완백은
그곳 수춘서원(壽春書院)의 강의 책임자였던 양문산(梁聞山)을 만나게 된다.


수춘서원 원생을 위해 새긴 전각과, 부채에 써준 소전(小篆)이 양문산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우연이 등완백의 일생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문산은 완백을 강녕의 거인(擧人, 과거에 鄕試를 합격하여 중앙의 會試를 볼 자격을 얻은 사람) 매류(梅熊)에게 소개한다.
그는 북송(北宋) 이래의 명문가로 진한(秦漢) 이래의 금석(金石)의 명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부친 곡성(捻成)은
역술(曆術)과 산학(算學)의 대가로 강희제(康熙帝)의 수우(殊遇)를 받아 궁중에 비장한 보배를 많이 하사 받은 사람이다.


매류는 완백을 신임하여 그에게 의식(衣食)과 지묵(紙墨)의 비용을 아낌없이 주었으며, 원 없이 공부하게 해주었다.
완백은 환산산맥 최고봉의 기상이 있었으며 이것이 매류를 매혹했던 것이다.


매류의 비호 아래 8년의 세월을 그는 무섭게 면학에 몰두했으며,
그가 공부하던 열광의 모습은 포세신(包世臣)의 『완백산인전(完白山人傳)』에 자세하다.


그는 먼저 전서(篆書)로부터 시작하였다.
<석고문(石鼓文)>,  <역산각석(辣山刻石)>, <태산각석(泰山刻石)>, <개모묘석궐(開母廟石闕)>,
<배잠기공비(裵岑紀功碑)>, <선국산비(禪國山碑)>,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 및
이양빙(李陽啣)의 <성황묘비(城隍廟碑)>, <삼분기(三墳記)> 등을 각각 백 번 임서(臨書)하였다.


또한 전서가 갖추어지지 않음을 고심한 끝에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스무 번 수사(手寫)하였다.
그밖에도 삼대(三代)의 종정(鐘鼎), 진한의 와당(瓦當), 또한 비액(碑額)까지 샅샅이 더듬었다.


공부에 임해서는 매일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먹을 갈아 큰그릇에 가득 채우고서
밤늦게까지 그 먹을 다 쓸 때까지는 자지 않았다.


추위와 더위에도 계속 멈추지 않고 정진하여 5년만에 전서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다.
그는 이처럼 체력 또한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그는 예서에 착수하여 3년이 걸려 예서를 습득한다.
완백이 매류와 작별하면서 새겨준 <청소당(淸素堂)>이란 전각과 <의여고회(意與古會)>란 인장은
건륭 45년(1780) 작이라 한다.


이로 보아 그가 매류의 비호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건륭 37년 30세로 역산(逆算)된다.
그 뒤 완백은 폐의파모(弊衣破帽)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면서 매예(賣藝)생활로 돌아간다.


때마침 양주(揚州)에서 『통예록(通藝錄)』이란 대저(大著)로 유명한 석학 정요전(程瑤田)의 지우를 얻는다.
요전과는 마음 깊이 허여하는 사이가 되며, 요전은 양주에서 김방(金姪), 장혜언(張惠言) 등을 소개한다.


『완백산인전』에 의하면 김방의 집에서 교수를 하던 장혜언이 시내에서 완백의 서를 보고 돌아와 김방에게
“오늘 이사(李斯)의 진적(眞蹟)을 보았다.”고 하면서 놀라는 김방에게 자상한 내용을 얘기하니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같이 가자고 졸라, 둘이서 시내의 폐허가 된 절간에 유숙하던 완백을 찾아간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서도사(書道史)에 희귀한 걸작들을 함께 남기게 된다.


완백의 『사마온공가의예서책(司馬溫公家儀隸書冊)』에 장혜언이 쓴 발(跋)에는 완백을 만난 것이
1786년, 건륭 51년이라 쓰여 있으므로 이때 완백의 나이는 44세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은 이미 완성된 자기 집의 장려(壯麗)한 가묘(家廟)의 현액(懸額)을 모두 완백에게 의뢰했으며,
또한 장혜언은 1년간 완백을 따라 전서를 배웠다 하니 이들이 완백에게 얼마나 경도되었나를 알만 하다.


완백은 이 무렵 김방을 통해 향리에 돌아온 태자태부(太子太傅)이자 호조상서(戶曹尙書, 현 재무부장관)
조문식(曹文埴)과 친교를 맺었다.


그의 청으로 완백은 『사체천자문(四體千字文)』의 횡권(橫卷)을 휘호하여 하루 안에 완성하니
조상서는 그의 필력에 경탄하여 사람들에게 완백의 사체서는 온 나라에서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한다.


유석암(劉石庵)이 72세 때에 완백의 서를 보고 크게 놀라서
“천수백년(千數百年) 내에 이런 걸작은 없다.”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1805년 가경(嘉慶) 10년 10월, 63세로 고향 환공산 아래에서 죽기까지 12년간은 제국을 방랑하면서
매예생활 중 1802년 가경 7년 강소성(江蘇省)의 진강(鎭江)에서 일생의 지기(知己) 포세신을 만난다.


포세신이 완백을 만난 것은 장혜언의 아우 장기(張琦)에 의해서였다 한다.
뒤에 포세신은 『예주쌍즙(藝舟雙楫)』을 간행했는데 이 책은 완원(阮元)의 유명한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과 함께 청조의 서법을 첩학(帖學)에서 비학(碑學)에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포세신은 그 자신 뛰어난 서가이면서도 자신의 서론(書論)의 중심에,
이를테면 자설(自說)의 심볼로서 놓은 것이 완백의 서, 그 중에서도 전서·예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8세 때 만난 완백에의 존경심이 그에게 서론(書論)을 쓰게 했다 함이 옳을런지도 모르겠다.


『예주쌍즙』 중 청대(淸代) 101인의 작품을 품평(品評)한 「국조서품(國朝書品)」은 서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 중 최고의 신품(神品)으로 단 한 사람인 등석여의 예서와 전서를 들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여러 『완백전(完白傳)』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완백산인전』이며 완백이 죽은지 한해 뒤
1806년의 것으로서 아쉬운 정에 찬 이 글은 현대의 우리들이 읽어도 깊은 감명을 받는다


흡현 당월촌에 있는 돈본당은 당월포씨의 남자사당이다. 포씨가문의 각세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사당은 목석으로 구조되었고 조각은 비록 복잡하게 많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정밀하고 대범함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사당은 건립 당시에 종인이 가문에서 장유의 순위와 덕망이 높은 조상들을 존경한다는것을 표현하는 곳이다.


동시에 또한 외지에 나가 있는 상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그 기파와 재능을 현시하는 곳이이기도 했다.

사당의 건축 특색은 각양각색이었다.


예를 들어서 돈본당의 구조는 들보가 천정을 받들고 빛겨서 기둥도 받쳐주는 식으로 되었고, 
량타 ,작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그때 당시 통용된 건축수단을 반영하고 있다.


구조재의 장식은 또 농후한 지방특색을 구비하여 동곽량의 머리 끝부부은
코끼리머리 형태로 되었는데 아주 생동감이 있고 조각은 또한 다양하다.


침당처마밑에는 단풍나무가 접혀져 있는 것같고
두공은 순전히 장식으고 천정에 무게를 부담하지 않게 설계하였다. 


삼진 다섯개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가 웅장하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향당구조는  넓고 훤하며 큰 재료들을 사용하여 그 기세가 아주 웅장하다.


사당 안에 의전규례비석과 가경황제상유비 등17개 패각이 있다.
위에는 “공의돈본호규례”가 새겨져 있다. 
사당은 한 가문에 있어서 정신적 핵심이고 그 가문의 위엄을 보여주는 성전이다.

낙선호시(樂善好施)  조문식(曹文埴, 1735-1798) 서

돈본당(敦本堂)  왕문치(王文治, 1730~1802) 서.

 

왕문치(王文治)

청나라 강소() 단도() 사람. 자는 우경()이고, 호는 몽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12살 때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서법에도 뛰어났다.


자라서 경사()를 내왕하며 한림원() 시독()이던 전괴()를 따라

유구()에 사절로 가면서 마침내 문장이 해외에 알려졌다.


건륭() 25년(1760) 전시(殿)에서 일갑삼명(, 즉 )으로 진사 급제하고

편수()에 임명되고 시독()에 발탁되었다.


나중에 운남() 임안지부()로 임명받았는데,

사건이 있어 직급이 낮아지자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해 귀향했다.


오월() 지방을 왕래하며 주로 항주()와 진강()의 서원에서 강의했다.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풍운()이 뛰어났다.


희곡을 즐겨 집안에 악기를 쌓아놓고 노비를 사들여 그들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연출할 때는 거리를 따지지 않고 몸소 따라다녔다.


고종()이 남방을 순행하자 명을 받들어 9곡의 희곡을 지었는데,

이들을 아울러서 『영란신곡()』이라 일컬었다.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불학()에 전념했다.

저서에 『몽루시집()』과 『쾌우당제발()』이 있다.

 

 

 


충효염절(忠孝廉節)  주희(朱熹, 1130~1200) 서.

 

주희(朱熹, 1130~1200) 주자.


중국 남송의 유학자.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주자는 존칭이다.
신안(안휘성) 사람.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계(官界)에 들어갔으며 그 전후에 도학 외에 불교, 도교도 공부하였다.
24세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나 그의 영향 하에서 정씨학(程氏學)에 몰두하고 다음에
주염계, 장횡거(張橫渠), 이정자(二程子)의 설을 종합 정리하여 주자학으로 집대성하였다.


주자의 학문은 이기설(理氣說 : 존재론), 성즉리(性卽理)의 설(윤리학), 격물규리(格物窺理)와
거경(居敬)의 설(방법론), 경전의 주석이나 역사서의 저술, 구체적인 정책론으로 되어 있고,
그 모두에 중세 봉건사회의 근간인 신분혈연적 계급질서의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그의 업적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의 도'(三綱)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 오상 五常)을
영원불변의 '인리천리(人理天理)의 지'(至)로 보는 입장에 서서 그것을 초월적 또는 내재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주자의 학문과 그 실제 정책은 모두 봉건 사회의 질서원리가 관철되고 있으며
철학적으로 강고하게 체계화시켰던 것으로 주자학은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군림하였다.


주요저서 : 四書集註, 周易本義, 資治通鑑綱目, 朱子語類


포씨오륜술(鮑氏五倫述)  등석여(鄧石如)의 예서.



포가여사(鲍家女祠)


포가여사당은 청이당이라고 부른다.
포씨가문에 역대정부열녀들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남자사당하고 반대로 남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벽 측문으로 들어간다.
구시대 여성들은 남자사당을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청이당은 전국에 유일한 여자사당이며 세계부녀대회에서 네 번째로 지정한 참관점이다.
이는 휘주종법제도와 휘주의 상업역사 연구에 생동하는 교재이며
중국에서 "여자는 사당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전례를 타파한 보기드문 여사당이다.


휘주문화특색에서 건축에는 패방,민가,사당 3절이 있다.
이들은 휘쥐여성들의 운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불효유삼,무후위대>라는 유가신조 하에서 휘주남자들은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후
짐을 싸서 차자식을 버리고 부모들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나서 멀리로 돈벌이하러 나간다. 


그 이후 일부는 사방을 떠돌며 소식도 없이 결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일부는 성공한 다음 외로움을 못참아 술집을 들락거리면서 소탈한 생활을 누리고 
집에 조강지처는 완전히 잊어버린다. 


일부는 부자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때는 벌써 삼처사첩을 가진 몸이다. 
신첩 웃음이 이뻐보이고 구인의 눈물은 보이지도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이 멀리 나가 사업하는 휘주여자들은 결코 방촌누각에서 자폐하고
천정으로만 들어오는 일편의 빛으로 온갖 힘을 다해서 애들을 키우고 시부모를 모시며
어쩔수 없이 꽃다운 청춘을 흘러버리고  생명은 시들어가고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낸다. 


이것은 그들이 뛰어 넘을수없는 운명이었다.

정부열녀의 패방은 정신상 그녀들을 억제하고 가문에 사당은 가문의 규정으로
행동상 속박해 버리고 마두벽의 봉쇄는 신체상 그녀들을 묶어버린다.


지붕보다 높은 계단식 마두벽은 벽돌로 만들어졌고 방풍방화할 수 있다.
높게 싸아진 마두벽 바로 위에만 작은 창문이 만들어져 있는데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독방 여자들의 외부 출입을 막을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끊어 그녀들의 바람행위를 막기 위해서이다.

“높은 벽안에는 고독하여 휘주는 침묵한다” 
길고 긴 휘상들이 남긴 발자국에는 수많은 휘주여자들의 피눈물이 뿌려져 있고
패방, 사당 마두벽 수묵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휘주식 건축 뒤에는
수많은 부녀들의 암담하고 씁쓸하고 처량한 처지가 숨겨져 있다.

청의당(淸懿堂) 


중국에서 유일한 여사(女祠)로 포씨비사(鮑氏妣祠).

'청의(淸懿)'라는 이름은 '淸白貞烈 德行美好(청백정렬 덕행미호)'의 뜻을 취한 것이다.

우리나라 창덕궁에도 '청의정(淸懿亭)'이 있다. * 懿 : 아름답다, 훌륭하다 (의)

 

 

입구 옆 안내판에 한글이 씌여 있다.

 

 

정효양전(貞孝兩全)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서. 청의당(淸懿堂)  포엽(鮑鉩, ?~?) 서 

 

증국번(曾國藩)


호남() 장사부() 상향현() 사람

본명은 자성()이고, 자는 백함(), 호는 척생()이다.

청()나라 때의 대신()이자 군사가, 문학가이다.


증자(; 증삼)의 70세손으로 도광() 18년(1838)에 진사() 출신이다.

벼슬은 한림원서길사(), 한림원검토(), 문연각교리(), 시강학사(),

내각학사(), 예부시랑(), 예부우시랑(), 병부우시랑(), 양강총독(),

직례총독(),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고, 의용후()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
중국 청나라 말 태평천국의 혁명을 막기 위해 호남성을 중심으로 편성한 반혁명 군대인 상군()을 창립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다. 


홍장(), 좌종당(), 장지동()과 더불어 만청사대명신()으로 일컬어진다.

산문()에 능통하여 상향파()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저서로 《치학논도지경()》, 《지가교자지술()》, 《빙감()》,

《증국번가서()》 등이 있다.


 






 

참고   http://www.paifangqun.com/   http://blog.daum.net/zeroko2000/7847017  




포가남자사당02.jpg
0.08MB
포가남자사당06.jpg
0.07MB
포가여성사당07.jpg
0.06MB
포가여성사당01.jpg
0.06MB
포가여성사당04.jpg
0.06MB
포가여성사당02.jpg
0.07MB
포가여성사당05.jpg
0.06MB
포가여성사당03.jpg
2.35MB
포씨지사01.jpg
0.07MB
포가남자사당03.jpg
0.08MB
포씨지사02.jpg
0.12MB
포씨지사02.jpg
0.12MB
포가여성사당03.JPG.jpg
0.17MB
포가남자사당01.jpg
0.09MB
포가여성사당08.jpg
0.06MB
포가남자사당07.jpg
0.07MB
포씨지사01.jpg
0.07MB
포가남자사당07.jpg
0.07MB
포가여성사당06.jpg
0.05MB
포가남자사당05.jpg
0.05MB
포가남자사당04.jpg
0.04MB
포가여성사당09.jpg
0.06MB



▲ 2015년 06월 15일 12:40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14:00 중국 항주국제공항에 도착.

(2시간 20분 소요, 시차 -1시간) 


▲ 항주국제공항에서 대학교 후배이기도 한 송영길 전 인천시장이 우리 인문기행 일행에 합류했다.

공항에서 숙소 크라운플라자 호텔로 이동 중.

  

▲ 황산 크라운플라자 호텔로 이동(3시간 30분 소요)





안휘성 지도  ⓒ《중국인문기행》p224.


안휘성은 중국 중앙부 양자강(揚子江) 하류 유역에 있다.

성수기에는 안휘성의 최남단인 황산까지 가는 인천발 직항이 있는데, 이번에는 비수기라 항주(抗州)를 거쳐서 갔다.


인천공항에서 항주공항까지는 1시간 45분, 항주공항에서 황산시내까지는 버스로 3시간 30분이 걸렸다.

* 항주공항 : 예전의 소산(蕭山)공항.


▲ 이번 인문기행에 참가한 분들이 함께한 기념 촬영.


부부로 오신 6쌍 12분, 부자 1쌍 2분, 중국에서 거주하고 있다가 항주공항에서 합류한 2분,

서울대, 서강대 등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신 분들과 교장 선생님을 마치고 정년 퇴임하신 분들,

다산 인문학 강좌 등을 통해서 참여하게 된 분 등 34분과 송재소 교수 등 스텝 4분

그리고 조선족 현지 안내원을 더하여 총 39분이 이번 기행에 함께하고 있다.


 당월패방군(棠樾牌坊群) / 포가화원(鮑家花園)  


올해 국가급 여행 풍경구 AAAAA로 승격된 당월패방군은 총 7개의 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패방은 명·청대에 이르는  400여 년 동안 당월촌의 포(鮑)씨 가문에서 배출한

충신, 효자, 열녀들의 공덕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황산시(黃山市) 시정부 소재지인 둔계구(屯溪區)에서 27km, 흡현고성(歙縣古城)에서 10km 정도 가면 된다.

여기에는 송,원나라부터 명청시기에 이르기까지 800여 년된 고촌락-당월촌이 있으며

장엄한 7개 패방, 듬직하고 우렁찬 남사당, 청아하고 유일한 여사당,

포씨가문의 효도를 요해할 수 있는 효도사당과 각종 종법, 공익, 문회, 서원, 의창 등 기념 건축물이 있다.


  패방군과 연결되어 있는 포가화원은 역사를 전제로 하여 휘상저택원림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분재를 주제로 국내외 각종 유명한 분재가 있으며 정자 등 원림 건축물이 있다.


휘주문화의 대표로 손색이 없는 웅대한 규모를 보여주고 있고 정원의 중심에 위치하며

호수, 나무 ,가산, 꽃들이 잘 어우려져 황홀한 경관을 만들었다.


풍경구는 2005년도 국가여유국으로부터 4A급 여유경구로 평선되였으며 황산시 <10가> 여유명소로 되어 있다.

당월패방군에는 고대의 패방, 사당, 민가는 <휘주고건축 3절>로서 걸작들이 모여 있으며

한폭의 아름다운 휘상고리도를 그리고 있다.


* 위치 : 안휘성 황산시 흡현. www.paifangqun.com

* 당월(棠樾) : 팥배나무 그늘.《시경》<감당(甘棠)>편에 '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이라 함.

棠은 '팥배나무, 아가위나무', 樾은 '나무 그늘'의 뜻.


고휘주문화여유구전경도(古徽州文化旅游區全景圖)  http://www.guhuizhouta.com


棠樾牌坊群(당월패방군) 강택민(江澤民, 1926~ ) 서


풍경구 개요


 황산 흡현 패방군 포가화원 풍경구는 산수가 아름다운 흡현 당월촌 내에 위치해 있다 .

고패방,고사당,고민가,포가화원으로 조성되었다.


여기는 고성흡현과 10 떨어져 있고 시정부가 위치해 있는 둔계하고는 27 떨어져 있다.

당월은 포씨 가문이 집거하고 있는 지역이다.


가문은 남송시 건연 년간에 자리를 옮겨 여기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해서 거의 800여 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 핵심으로 석패방은 양쪽에서 중간으로 순서대로 차례로 배렬되어 반호형으로 펼쳐져 있다.


서에서 동으로 순서가 포찬효행방,자효리방,포문령처왕씨결효방,락선호시방,

포문연처결효방,포봉창효자방,포상현상서방으로 되어 있다.


일곱개 패방은 엄숙하고 정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조용하고 품이 있게 서 있는 돈본당 남자사당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있다.


세 개 문, 다섯 개 방이고 오풍루문정으로 전체 구조는 간결하고 훤하게 지여졌다.

은행나무를 기둥으로 하고 장목은 들보로 쓰고 벽돌, 나무, 돌조각들을 사용하여

곳곳마다 유가인생철리와 문화수양을 드러낸다.


중합지미 뚜렷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사당안에는 종족관리제도를 새긴 비각들과 <가경상유삼도비>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는 종법제도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실례들이다.

 둘도 없는 청이당 즉 여자사당은 남쪽에 앉아 있고 북쪽을 마주하고 있다.


다섯 개 문 삼진 마두벽으로 전체 사당의 구주는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고

그 조형은 유창하고 안은 수려하고 밖은 소박하여  단정한 느낌을 준다 .


사당의 벽은 전부 벽돌조각으로 되어 있어 그 모습 또한 아기자기한 느낌을 줄 뿐만아니라 화채롭다.

그리하여 휘주지방에서 사당돌 조각의 으뜸으로 불리운다.


 패방군과 인접되어 있는 포가화원은 휘상개인 정원을 배경으로 하여 휘파분재를 주제로 삼아

휘파분재 예술의 정화들이  모여 있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각지방파 분재들의

대표작품들이 집결되어 있어 이는 하나의 비교적 고품격의 분재 관광기지이다. 


이 정원 면적이 21.73 헥타르이고 그 중에 인공호수와 분재정원이 각각 5.33 헥타르 차지한다.

분재의 만발을 전시하고 정원에 여러가지 분재 품종이 모두 갖춰져 있다.


형태가 다양하고 아기자기하며 서로 아름다움 모습을 다투며 자랑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의 대형산수조합이라고 할수 있다.


풍경구는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이고 세계문화유산신보지,국가4A급 여행풍경구이며

또한 "황산시십가여행 풍경구이다.



역사적 기원


 당월은 흡현시내에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북쪽 소나무 우거진 능선의 용산을 가까이 하고 있고  남쪽 분지-평원옥야을 인접하고 있다.


근원 황산의 풍낙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멀리로는 부정산을 평벽으로 풍수설에서

산을 베고 물을 안고 평원을 마주하고 있다라고 선택할수 있는 이상적 위치다.


지금까지 여전히 마을 입구에 역대에 흥건된 일곱 높고 거대한 석패방군이 우뚝 솟아 있어

휘주에 둘도 없는 장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마을안에 현재 보존하고 있는 사당 민가 화원도 휘주특색의 대표성을 반영하고 있다.

당월촌의 형성은 남송건연년간 ( 1130)까지 추적할 다.


부읍 (지금의 흡현현 시내) 서쪽문은 으로 유명한 포용이 높은 관직은 못했어도

평생 서향마을에서 산업을 넓혀 차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지금의 당월을 이상적인   휴한지소를 만들수 있는 곳임을 욕심내고 여기에 별장을 지었다.

후에 당월포씨는 그를 시조공으로 존칭했다.


포용이후 당월은 단지 한 곳의 포씨가문의 또 다른 원림업이었고 따로 건설을 하지 않았다.

사세종손 포거미는 산천이 아름답고 원전이 넓어 자자손손 백세대업을 일을수 있겠노라해서

부읍서문에 집식구들을 데리고 당월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팔백여년간 당월촌은 포씨씨족들만이 사는 곳으로 되었고 

성쇠기부를 거쳐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패방은 황산에 부여한 역사 훈장이다.

역사상에 매세대마다 황산(휘주)에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


이팅구이, 주희, 호개문, 왕모음, 대진, 호정, 도행지, 황빈홍 등 걸출한 인물들이  태어났다.

흡현에서만 해도 명청 두 조대에 524명의 진사 ,1531명의 거인, ”부자상서”, ”동포한림들로 마을의 명성을 높였고

연과삼전선,십리사한림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더우기 이 주리학의 고향에서는 부녀들은 봉건주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깊은 해를 받았고

유림외사에서 나오는 왕삼구와 같은 절부열녀들이 아주 많이 나왔다.


 구시대에 충효결의우수했던이런 사람들을 표창하기 위해서 황산시 각 지방에는 대량의 패방들이 세워졌다

그 역사 흔적들은 여러번 파손을 당했지만 지금까지도 100여 좌의 패방들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당월패방군이 바로 그 중에 대표작이다.

 당월패방군은 7 패방이 명나라 3 청나라 4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봉건사회 충효결의론리도덕의 개요를 묘사해 냈다


그 중에 명나라 패방의 횡편에는 어제자효리라는 대자가 새겨져 있다

황제가 휘상 포수손부자를 표창하기위해서 세워준 거다


역사책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원나라 때 흡현의 수장이 달이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노략하고 살해했다.

그때 당월포씨 부자는 반란군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한사람만 살려준다구 누가 죽고 누가 살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그런 부자는 서로 자기가 죽기를 다투고 대방을 살려 달라고 하는데

그 행동이 하늘도 감동시킬 정도로 심지어 반란군도 감동되어 차마 죽일수가 없어서 사람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후에 조정에서 이 일을 알고 그들을 표창하기 위해서 이 패방을 하사하였다.

청나라 건융황제도 포씨종사를 위해 제련하기를 : ”자효천하무쌍리,금수강남제일향.” 

그리고 전해지기를 당월포씨 가문은 그 때 벌써 ””””패방이 있었고 패방만 없었다고 한다.


그 마을 포씨세가 에서 포숙방시기에 양회소금운송관리로 강남염업 명맥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황제에게 자 패방을 세울 수 있게끔 청하여 가문을 더욱 빛내기 위해서

양식 십만단과 은3만 냥을 받쳐 제방을 팔백리나 재보수했고  세 개 성의 군사들의 양식을 부여하였다.  


그 공로로 결국 조정에서는 허락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당월촌 마을 입구에는 또 하나의 호선락사라는 의자패방이 세워졌다

흡현에서 많은 패방들 중에서 이같은 이상입사,이사보상정치적 경제적 상호 일관성의 긴밀한 관계는 종종 볼수 있다.

 

일곱개 패방


패방(牌坊)은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을 가진 중국 특유의 건축물이다.

본래 집의 출입문이나 마을의 입구에 마을을 드나드는 문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리고 궁정, 능, 사당, 관청을 비롯하여 절의 어귀에도 세운다.

 패방은 훌륭한 인물을 기리는 기념물인 경우가 많다.


인물과 관련된 기념물로써의 패방은 국가에 공을 세웠거나 부모에 효도를 하거나

또는 남편을 위해 정절을 지킨 인물들, 즉 남에게 모범이 되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그의 공을 인정하여 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것들이다.


공덕(功徳)패방 정절(貞節)패방 등이 있다.

따라서 패방이 많다는 것은 그 지역에 인물이 많이 났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매우 큰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패방의 기둥은 2~6개이며 낮게는 수 미터에서 높게는 10여 미터에 달한다.

지붕을 여러 층으로 얹은 것도 있다.


나무로 만든 것을 목패방이라 하고, 돌로 만든 것을 석패방 또는 석루(石樓) 그리고 패루(牌樓)라고도 부른다.

인재를 많이 배출한 후이저우에는 패방이 넘쳐난다.  


 이곳 패방은 모두 7개인데 명대(明代)의 것이 3개, 청대(淸代)의 것이 4개이다.

흡현 주변에서는 어디로 가든지 패방이 보이는데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


드넓은 논 속에 7기의 패방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은 음악적인 조화마저 느끼게 한다.

이것들은 소금장수를 하면서 부를 이룬 포씨(鮑氏)가 일족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포찬효행방

 

자효리방

포문령처왕씨 결효방


락선호시방


포문연처오씨결효방


포상헌상서방

 




Baojia 포가화원


포가화원은 청나라 건융, 가경년간에 저명한 휘상 염법도원춘추시기
이름있는 승상 “관포지교”에 나오는 포숙아의 후대 포기원의 개인화원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 정원과 분재 관람지이다.
이는 세계에서도 둘도 없는 당월 패방군에 위치해 있다.



주로 휘파분경이 주제이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유명한 분재들을 모은 정화라고 볼수 있다.
패방군풍경구와 한일체로 용합되어 있어 완벽한 휘상고려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전영적인 고휘파정원과 휘파포가화원분재가 서로 결합된 중국 개인정원 정화이다 .
소주에 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무석에 려원, 매원기명,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전쟁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이는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정원과 분재풍경구이다.
지금 정식으로 비물질세계 문화유산과 세계기네스기록에 신청한 상태이고 “동방원림지모”라고 불리고 있다.


분재애호자들의 “매가”이다.
패방군풍경구와 한일체로 용합되어 있어 완벽한 휘상고려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전영적인 고휘파정원과 휘파포가화원분재가 서로 결합된 중국 개인정원 정화이다 .
소주에 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무석에 려원, 매원기명,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전쟁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이는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정원과 분재풍경구이다.
지금 정식으로 비물질세계 문화유산과 세계기네스기록에 신청한 상태이고 “동방원림지모”라고 불리고 있다.


주요 관광 프로젝트의 분재 정원 : 포가화원에는 정품원, 유파원, 산석원이 있다.

분재정원은 산석분재를 주요로 하고 화초나무분재를 보조로 하고 있다.


휘주사람, 황산스타일, 천상인간 등을 주제로 했다.

제일 큰것은 정원에 제일 안쪽에 있는 강산유지다교이다.


정원내에 분재들은 대다수가 가지가 휘여든 목본식물로 주로 재배상대로 하고 있다,

모습들은 다양하여 줄기고 굵고 커서 신기한 것도 있고 형태가 구블구블하여 고풍스러운 것도 있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고 아기자기하게 귀여운 것도 있어 미감을 장식할수 있는것들로 있다.

그 중에는 분재예술인이 수년간 열심히 재배해낸 휘파특색이 농후한 남국풍정 있다.


 주로 넓은 풀밭, 입구광장, 광장합, 사계절화원(식물풍경구,춘하추과각색식물관광구),

향토화원(황산포가화원지구특색식물), 휘주문화 전시관(유명한 서예나 화가가 모은 진적들,문방사보 등), 다원파, 송림파,

유락호, 수조호, 관어지, 경제수생식물원(), 산수폭포, 유람선 부두, 분재재배기지, 도바, 다루, 주작방 산수폭포가 있다.

 

공원의 보물

 


"남국풍정"는 가지높이가 1.28 m,넓이는 2.8 미터이다. 
현재 중국에서 제일 으뜸으로 가는 대형고용분재 중의 하나로 이백여 년의 역사가 된다.


제일먼저 포씨화원의 수집품이었다. 후에 광동으로 유전되었다. 
포가화원에서 제일 비싼 가격으로 회수한 정품이다.


찐하게 그린 눈섭마냥 빽빽하게 자란 나무잎은 땅과 하늘을 덮었고 
엉켜서 자란 가지와 끝없이 자라는 뿌리는  평화롭고 국태민안을 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세계에서도 보기드문 이 분재는 곤명엑스포, 곤명 국제 원예 박람회에 나타난 적이 있다.





송재소 교수의 중국인문기행

 

1. 우리나라 한문학의 대가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직접 유적지 안내와 해설을 위해 동행합니다.
2. 일반 여행사를 통해서는 갈 수 없는 특별하고 의미있는 중국 유적지(아름다운 한시의 배경이 된)를 방문하게 됩니다.
3. 여행내내 명실상부 최고의 호텔과 음식은 물론, 여행지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 전통 차와 술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간이 마련됩니다.
4. 더불어 역사, 문화에 관심있고 품격있는 참가자들과의 소중한 인연, 좋은 만남을 약속합니다.

* 일정 : 2015년 6월 15일(월)~ 20일(토) 5박 6일

 

일 정 표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6/15

1

()

인 천

 

항 주

 

황 산

 

 

 

 

 

 

 

OZ359

 

 

 

 

 

 

 

 

 

09:30

12:40

14:00

 

 

 

 

 

 

 

 

 

인천국제공항 3M카운터 집결

인천국제공항 출발

항주국제공항 도착 (2시간 20분 소요)

황산으로 이동 (3시간 30분 소요)

청대옛거리 : 송나라때 형성되어 명과 청에

가장 발전한 건물과 거리 모습을 재현한 곳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크라운플라자

(TEL: 0559-259-1888)

:XXX :현지식

6/16 2

()

황 산

정감촌

 

 

흡 현

 

 

이 현

기 문

 

 

황 산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정감촌으로 이동(50분 소요)

정감촌 : 명나라때의 건축물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

흡현으로 이동(35분 소요)

흡현고성 : 중국의 4대고성 중 하나

허국석방 : 전형적인 명나라 석방건축물

당월패방군 : 포씨가 일족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

이현으로 이동(30분 소요)

서체촌, 굉촌 :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대민

가 건축군

황산으로 이동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헌원국제대주점

(TEL: 0559-850-8828)

:호텔식 중:현지식 석:한식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6/17

3

()

황 산

경 현

 

 

 

신 성

 

 

마안산

 

화 현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경현으로 이동(2시간 소요)

도화담 : 이백이 이곳에서 필묵을 적시며 시편

을 많이 남김

신성으로 이동(1시간 소요)

사조루 : 강남의 4대명루중 하나이며, 중국

고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와서 시를 짓던 곳

경정산 : 이백의 시로 인해 강남시산이 되었다

마안산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누실공원 - 17:00 입장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마안산 해외해 황관홀리데이

(TEL: 0555-238-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6/18

4

()

마안산

 

 

 

저 주

 

 

 

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청산 이백묘 : 당대의 시인 이백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곳

채석기(태백루) : 이백이 여러번 올라 시를 남긴 곳

저주로 이동(2시간 소요)

취옹정 : 취옹정기로 유명한 구양수가 있던 곳

남경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명효릉 : 명 태조 주원장의 능원

중산릉 : 중국 근대화의 혁명정치가 손중산 선생의 묘가 안치됨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6/19

5

()

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석두성 : 손권이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세울때 전초기지

연자기 : 청대 초기 시단의 영수 왕사진

시에서 언급되며, 남경의 북쪽 관음산에 위치하

여 장강을 바라보기 좋은 공원

중화문 : 명대에 있었던 13개의 성벽중에서

가장규모가크고 웅대했던 명나라 도성의 정남문

문묘 : 공자에 제사를 지내는 곳

왕사고거 : 육조 명문귀족 왕씨와 사씨의 병칭 고거

미향루, 진회하선유

오의항 : 동진의 지배귀족이던 왕씨와 사씨가 거주하던 지역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무궁화식당

6/20

6

()

남 경

 

 

 

인 천

 

 

 

OZ350

 

 

 

 

 

14:55

18:20

 

호텔 조식 후

포구로 이동(1시간 20분 소요)

봉황각

남경 대학살기념관 :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일

본인들의 잔인한 만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공항으로 이동

남경국제공항 출발

인천국제공항 도착 (2시간 25분 소요)

:호텔식 중:현지식



** 중국인문기행이 기대되는 이유!!**


송재소 교수님의 말씀.
“이들 유적을 기행하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체감하고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중화문명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여행은  중국의 ‘인문학적 유산'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아울러 중국 문화의 불가결의 요소인 중국술과 중국차에 대해서도 가능한 많이 소개하려고 한다. 술과 차를 빼놓고 중국문화를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일반인들이 쉽게 가기 어려우면서도 인문학적 유적이 풍부한 안휘성의 황산에서 강소성의 남경까지 이어지는 기행이 될 것이다“
“안휘성에는 도처에 이백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백이 달을 잡으려 강으로 투신 했다는 채석강과 이백의 무덤 등을 둘러보며 그의 자취를 더듬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여기에는 구양수의 취옹정과 풍락정이 있고, 풍자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유림외사'의 작가 오경재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안휘성의 남쪽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체촌과 굉촌이 명청시대 민간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안휘성은 또한 흡연, 휘묵, 선지 등 문방사우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덤으로 황산의 빼어난 경관도 즐길 수 있는 곳이 안휘성이다.”
"강소성의 남경은 육조고도라는 별칭에 걸맞게 수많은 고적을 보유하고 있다. 두목의 시로 유명한 진외하, 유우석의 시로 유명한 오의항과 석두성, 이백이 시를 읊었던 봉황대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주원장의 무덤 명효릉의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태평천국의 유적도 눈길을 끈다. 그뿐만 아니라 손문의 무덤인 중산릉의 위용도 볼만하다. 중국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남경 대학살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념관도 이곳에 있다. “

 

< 중국인문기행(송재소 교수 저) 관련 기사>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08/2015030801338.html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artid=201503062111205&code=960205
*머니투데이
http://www.mt.co.kr/view/mtview.php type=1&no=2015032515010864992&outlink=1

 

<이 글을 연재하는데 참고한 사진과 글 등 자료의 출처>

1. 중국인문기행에 함께 동반한 사진전문가 고형남 님이 사진작품을 공유할 수 있도록 보내 주셔서 연재하는데 전적으로 참고하였습니다. 사진 자료 중 거의 90% 이상을 고형남 님 작품 사진에 의존한만큼 일일이 사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2. 함께 동반한 고영표 시인 님의 블로그 ㅡ 고산지(高山芝) 블로그 http://blog.daum.net/zeroko2000 에서 기행 장소와 시간 공간, 사진 자료 등 자세한 해설을 참고하였습니다.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