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2000년대를 맞아 한 개인의 부하(負荷)로만 환원되기 어려운 역사의 책무를 감내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 천년이 열리고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열전과 냉전으로 반세기 이상 대치ㆍ대결해온 남북이 정상회담을 통해 6ㆍ15선언을 채택하는 등 화해협력의 물꼬가 트였다.

하지만 국내 정치는 여전히 원초적인 대결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수구정치세력과 정치권력화된 수구신문은 진보개혁진영을 적대시하였다. 그런가하면 IMF극복과정에서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구조는 빈부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노동자들은 실업과 극심한 생활고에 내몰렸다. 개혁세력이라는 집권 민주당은 여전히 20세기적 파당과 패권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김근태의 대선경선 준비는 오래 전부터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변형윤ㆍ고은 등 재야 인사와 당내에서는 이재정ㆍ장영달ㆍ임종석ㆍ이창복ㆍ김태홍ㆍ신기남 의원 등 쇄신파 의원 10여 명이 도왔다.

그는 우선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현장에서 살피기 위해 1999년 4월 14일부터 10일간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과거 여느 대권 주자들처럼 미국 조야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계 각국 정부지도자회의’ 한국대표로 초청된 것이다.

당시 김근태는 국민회의 전자정부구현정책기획단 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방미 중 시애틀에서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와 점심을 함께하면서 전자정부구현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방안 등에 의견을 나누었다.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동북아 정세와 남북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워싱턴에서는 한반도 핵대사를 지낸 로버트 갈루치 조지 워싱턴대 교수와 만나 ‘21세기 한반도문제’를 논의하였다.

김근태의 체미 기간 활동은 과거 어느 정치인보다 활발했다. 그의 위상에 따른 결과였다.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하고, 특히 국민회의와 소원한 편인 미국 공화당쪽 인사들과도 폭넓게 만났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엘 고어 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앤드루 쿠오모 주택개발부장관 등과도 만나 양국의 현안을 심도 있게 나누었다. LA에서는 UCLA와 USC에서 강의하고 코리아 엑스포 개막식에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김근태는 2001년 1월에 다시 미국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아들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정부 대표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1월 17일부터 10박 11일간 방미하게 되었다. 다른 대선 주자들이 자신의 후원회 참석 등에 비중을 둔데 비해 그는 워싱턴 에틀란틱 카운슬과 존스 홉킨스 대학, 뉴욕대학 등에서 남북관계와 동북아의 안보문제에 대해 강연하고, 제임스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 공화당 행정부 출신 데이비드 드눈 교수, 컬럼비아 대학 레온 시걸박사 등을 차례로 만나 한국의 대북 정책방향 등을 설명했다.

또 데이비드 웅거 <뉴욕타임즈> 논설위원,
칼럼니스트인 플레리트 교수와 만나 미국 언론이 대북포용 정책을 지지하도록 촉구했다. 미주에서는 1997년에 변호사ㆍ종교인ㆍ미디어 전문가ㆍ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김근태후원회가 구성되었다. 미국 방문길에서 김근태는 모든 일정을 영사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후원회의 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후원회 간부들은 민주ㆍ공화 양당의 뉴저지주 지사 후보가 앞다투어 김근태를 면담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뿌듯한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후 미주지부 후원회는 한반도재단의 미주지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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